419화
성필이 품은 꿈은 가로 엔터의 모두가 알고 있다. 그가 처음 가로 엔터로 들어왔을 때부터 입이 닳도록 말해왔으니까.
그 꿈은 소녀연맹 멤버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지금은 물론 아주 옛날부터, 멤버들은 성필의 꿈을 들어왔다.
“박 이사님.”
연습생 시절, 백설하는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아직 성필이 백설하를 ‘설하 씨’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왜 꼭…… 퍼포먼스로 표현해야 하는 게 저희의 생각이어야 해요?”
“벌써 잊어버렸어요? 그건…….”
“아, 아니. 알아요. 박 이사님이 해주셨던 이야기는 전부 기억하고 있는데요…….”
성필이 가로 엔터로 처음 왔을 때 작성했다던 기획서는 전부 읽어보았다.
뭐랄까, 이제 그 기획서는 가로 엔터의 문화유산쯤으로 취급받고 있다.
음악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발전해야 한다. 음악은 인류의 사상과 감정을 담는다. 그 창조자인 아티스트는 상품으로서 대해지면 안 된다. 우리의 아이돌이 음악에 담아야 할 건 자신만의 꿈과 생각, 사랑, 삶, 아름다움, 뭐 기타 등등…….
그런 이야기가 잔뜩 적혀 있다.
“다른 전문가들이 기획한 것들도요. 아, 그러니까 저희에 맞춰서 기획된 곡들도 호소력이 있지 않나…… 해서요…….”
본인이 직접 곡을 만들거나 가사를 쓰지 않고도, 퍼포먼스는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
케이팝의 역사를 장식했던 아이돌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때로는 자기 자신보다 타인이 자신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기도 하다.
“음.”
이 질문에 성필은 꽤 오래 고민했다.
“그게…… 있어요.”
“네?”
“본인이 생각했기에 본인이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것.”
“아, 네에.”
백설하가 이해 못 하겠단 기색을 보이자, 성필은 여느 때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설하 씨. 과학이나 철학, 사회학은 이성적으로 진리와 진실을 찾아가잖아요. 인간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인간의 존재 이유나 거대한 질서, 담론들은 그야 인간의 머리에 와닿지만.”
그 안에서 개인은 희미해지곤 한다.
“그에 비해 예술은 거대한 이야기들이 놓치는 인간을 조명해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예술은 인간을 한없이 작게 만드는 질서 속에 파묻힌, 인간 개개인을 끌어올린다고요.”
“…….”
“음악도 그래요. 우주적으로 보면, 지구적으로 보면, 사회적으로 보면, 국가적으로 보면, 인간 한 명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만 살 수는 없어요. 예술은 세계에 비해 초라한 나라는 존재를 발견하게 해줘서…….”
백설하는 성필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들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사랑, 사람 하나에 목매는 나도. 친구와 함께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나도. 사소한 것에 짜증 내는 나도. 우울한 나도. 가치가 있단 생각이 들게 해줘요. 왜?”
“……네?”
“왜 그럴까요?”
“어…… 공감…….”
“맞아요, 공감!”
성필이 소소하게 박수 쳤다. 백설하는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었지만, 정답을 맞혔단 게 기분 나쁘진 않았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노래로 말을 거는 거예요.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나의 노래에 대답해 줄 한 명을 위해서. 멋진 일이죠? 그리고 누구나 그렇지만, 진심으로 말을 걸어주는 사람을 좋아하잖아요?”
성필이 백설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백설하는 그의 시선을 천천히 피했다. 사람을 어쩌면 저리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설하 씨.”
“네에…….”
“저는 설하 씨의 고민이 듣고 싶어요. 설하 씨의 삶을. 설하 씨의 행복을. 설하 씨의 슬픔을. 설하 씨의 사랑을. 설하 씨의 감동을. 설하 씨를 알고 싶어요.”
“…….”
백설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옛날에 성필의 말을 오해해서 창피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이왕 설하 씨가 눈앞에 있잖아요. 설하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서서 ‘설하 씨는 이런 애예요’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설하 씨가 해주는 설하 씨의 이야기를 듣고 싶…….”
“아, 알겠어요. 그만하셔도 돼요 이제.”
별 생각 없이 했던 질문인데, 예상치도 못한 대답을 들어버렸다.
성필은 언제나 이렇다.
남 부끄럽게 만들 만한 문학적 수사를 마구잡이로 쓴다.
‘박 이사님 분명 사귄 여자가 20명도 넘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 혀가 저렇게 잘 굴러갈 리가.
“아, 눈이에요 설하 씨.”
백설하가 벽으로 눈을 돌렸다.
1층의 통유리 벽으로 눈이 하늘하늘 내리는 게 보였다. 아직 12월도 되지 않았는데 눈이 내린다.
“지구온난화가 심하긴 한…….”
농담을 던지던 백설하가 입을 꾹 닫았다.
성필이 소년처럼 빛나는 눈으로 하늘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황홀하게 아름다움을 좇았다.
그제야 백설하는 성필이 했던 이야기가 어떤 감상을 품고 있는지 알았다.
성필은 인간이 쌓아 올린 논리의 탑이나 우주적인 질서보다, 하늘에서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 한 송이를 더욱 사랑한다.
그런 사람이다.
“눈……. 그러고 보니, 설하 씨 이름에도 눈이 들어가네요.”
“네에.”
“아, 큰일 났다.”
“네?”
“앞으로 눈만 보면 설하 씨 떠오르면 어떡해요?”
백설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까지 살짝 벌렸다. 이건 도저히 못 넘어가겠다.
“그건 진짜 노리고 하신 말이죠?”
“봐요. 진심인 거랑 계산하고 한 말이랑 완전히 느낌이 다르죠?”
백설하가 뾰로통해져선 나무라듯 성필을 흘겼다. 성필은 뭐가 좋은지 즐겁게도 웃었다.
그래도, 성필이 한 말은 옳은 것 같다.
진심에서 나온 말과, 계산적으로 나온 말은 확실히 결이 다르다.
“박 이사님.”
“네.”
“저, 지금은 박 이사님의 기획에 따르고 있지만요. 나중에는 노력해볼게요.”
“뭘요?”
“저라는 인간을 마음껏 표현해볼게요.”
백설하는 노래할 것이다.
세상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에게 상냥히 말을 걸기 위해서. 그 사람이 자신의 노래에 답하고 싶단 마음이 생길 때까지.
백설하는…….
* * *
“너무 무서워서, 무서워요…….”
백설하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흐느꼈다.
그녀의 시야는 온통 검었지만, 성필의 표정을 두 눈으로 보듯이 상상할 수 있었다.
절망하고 있지 않을까. 그 단어가 너무 과격하다면, 실망하고 있을 거라 표현할 수도 있다.
성필의 꿈을 알고, 그 꿈을 소중히 여겨온 백설하이기에, 이 순간 자신의 말이 성필에게 얼마나 상처를 줄지 알았다.
그럼에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저희 애들은요오…… 소녀연맹은 지금보다 더 성공해야 해요……. 그래야 하는 애들이에요오…….”
리카.
아라.
하양.
아름.
다들 지금보다 훨씬 유명해지고 훨씬 성공해야만 한다. 백설하는 감히 그 성공에 재를 뿌릴 자신이 없었다.
“더, 더어, 잘될 수 있어요……. 저만 없으면, 저만 고집을 접으면, 잘될 거예요. 그래야 해요…….”
백설하가 코를 훌쩍이며 눈가를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붉게 부은 눈으로 성필을 바라보려 했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잖아요……. 저보다 지음 오빠가 기획한 곡이 더 좋을 게 당연해요……. 저희의 성공이 지음 오빠의 성공을 보장하잖아요. 보장하는데, 제가, 제가, 소녀연맹이란 이유로 그걸 망칠 권리는 없어요, 네…….”
백설하는 허공을 더듬었다. 성필의 손을 잡기 위해서였다.
이 떨림, 이 두려움을 그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부탁하고 싶었다. 애원하고 싶었다.
이번만 봐달라고, 제발…….
하지만 백설하는 아무리 허공을 더듬어도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눈가를 문질렀다.
“그래서.”
흐려지고 뭉개진 시야 속에서 성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음이한테 책임을 넘기겠다고?”
그에 백설하는 깜짝 놀랐다.
성필에게선 실망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지극히 냉정했다.
흐렸던 시야가 공기에 씻겨나가고, 성필의 표정이 드러났다.
그는 백설하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아장아장 달리다가 쓰러진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눈빛이었다.
“어…….”
순간 백설하는 뱃속부터 욱했다.
성필이 자신을 아이로 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아이가 아니다. 아닌데, 아닌데…….
이대로 모든 것을 넘겨버리고 싶다.
차라리 아이가 되어버리면 편해질 것이다. 이 수치심을 참기만 하면…….
“…….”
백설하는 고개를 숙이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 곧, 그녀의 입과 혀가 ‘네’라는 발음을 위한 모양으로 변했다.
성필은 그것을 지켜보았다.
* * *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 이라는 백설하의 해석은 틀렸다.
‘별이…….’
한탄한다.
표면을 감싼 흙만 바라보아 자신의 내면에 잠재한 빛을 믿지 못하는 별이, 한탄하고 있다.
백설하가 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멤버들이 슬퍼하는 모습은 몇 번을 보아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착각했네…….’
그 사실을 절절히 느꼈다.
성필은 이제껏 착각 속에 살아왔다.
옛날에 정호환과 가졌던 술자리에서 그가 이리 말했었다.
‘박 이사님의 이상은 훌륭합니다. 향수가 일어나네요. 옛날에 제가 좋아했던 밴드와 팝스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요. 친구들과 지역씬의 바닥부터 정상까지 오른, 전설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요.’
정호환은 성필의 이상을 미국 팝스타들의 이야기라고 했었다.
‘지역씬에서 유명세를 얻고 레이블과 계약하여 메이저에 오른다. 수많은 개성적인 아티스트를 위한 인프라가 갖추어진 미국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때 성필은 정호환의 설명이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떠올려보면, 그가 그렇게 말할 만했다.
성필은 정말 소녀연맹 멤버들을 팝스타와 비슷한 종류의 씨앗이라고 보았었으니까. 정호환이 그렇게 느낄 여지가 충분했다.
‘그런데, 아니야.’
소녀연맹 멤버들이 지역 소극장을 전전하며 인지도를 쌓았는가?
부족한 엔지니어링 기술이나마 이용하여 자작곡을 발표했는가?
그런 경험이 많았나?
본인의 창작력과 스타성을 인정받아 레이블과 계약했나?
전혀 아니다. 멤버들은 그런 종류의 서사와 인연이 없다. 아이돌은 태생부터가 자율적인 아티스트와는 거리가 멀다.
수능 문제를 달달 외우기만 하던 학생에게, 갑자기 특정 주제 관련 소논문을 써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설하가 이러는 것도 당연해. 내가 과도한 부담을 줬어. 내가 잘못했어…….’
멤버들의 창조성은 이제 걸음마를 막 시작했다. 그런데 성필은 그녀들에게, 백설하에게 계단을 오르라고 명령해버렸다.
성필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나 찬란한 빛을 보여주면 눈이 멀어버릴 수밖에 없잖아.’
소녀연맹의 데뷔. 컴백. HPT 뮤직 어워드. 일본 뉴아사 경연. 콘서트 월드 투어.
매 순간 전설적인 퍼포먼스를 쌓아 올렸던 소녀연맹이다. 성필은 도저히 그녀들이 갓 걸음마를 뗀 아이란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미 완성된 아티스트로만 보였다.
‘하지만.’
이제 한 걸음이었다.
백설하는 두렵다고 했었다. 자신이 정한 길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었다. 그 믿음이 인정받기까지, 고작 한 걸음이었다.
그 걸음은 성필과 백설하가 등진 회의실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었다.
“설하야.”
성필이 거칠게 백설하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계속 놀라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이사님?”
“보여줄게.”
성필은 회의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고 백설하의 손목을 쥔 채 성큼성큼 가장 안쪽 자리로 향했다.
그제야 성필이 백설하의 손목을 놓았다. 그녀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십수 명의 사람들 앞에 놓이게 됐다.
“서, 설하…….”
손혜빈은 백설하의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여러분, 정말 죄송한데요.”
성필은 미안한 기색이면서도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마치 이 일이 반드시 필요하단 태도였다.
“‘애플 크러쉬’에 투표하신 분들, 거수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어차피 나중에 토론하다 보면 누가 뭘 찍었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일단 저요.”
성필이 손을 들었다.
백설하는 화들짝 놀라 성필의 팔을 붙잡았다. 제발 하지 말라고 애원하듯, 그녀가 성필의 팔을 내리려 체중을 실었다.
“안 돼요 하지 마세요!”
‘애플 크러쉬’와 ‘우파루파’는 동수였다.
그리고 백설하가 생각하기에, ‘애플 크러쉬’에 표를 준 건 성필과 소녀연맹 멤버들이었다.
백설하가 받은 표는 동정표뿐일 것이다. 사랑하는 언니가 제작 총괄한 곡이니 당연히 손을 들어줘야지. 그런 생각으로 투표했을 게 뻔하다.
백설하는 그런 처참한 꼴이 밝혀지길 원하지 않았다.
“이사님 제발!”
그야 타이틀곡 선정 회의를 하다 보면 누가 어떤 곡을 타이틀로 찍었는지 자연스레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거수로써 득표자가 수량적으로 밝혀져선 안 된다. 그건 너무 창피한 일일 테니까.
백설하 자신이 혼을 쏟아 프로듀싱한 곡이 받은 표는 겨우 동정에서 나온 것일 뿐.
그런 꼴을 볼 바에야…….
‘……어?’
백설하는 두 눈을 비비고 싶었다. 성필의 이두에 매달려 있느라 그럴 수 없었을 뿐이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저요.”
성필 다음으로 손을 든 건 정지음이었다.
가로 엔터의 뮤직 프로듀서. 3연속 홈런을 친 천재 작곡가가 ‘애플 크러쉬’를 택했다.
다음으로는 A&R팀의 이재호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A&R팀 직원 두 사람이 따라서 거수했다.
성필까지 합쳐 벌써 다섯 표다.
가로 엔터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인 메인 프로듀서와 뮤직 프로듀서가 ‘애플 크러쉬’의 편을 든다.
“왜, 왜애…….”
그때 백설하가 퍼뜩 소녀연맹 쪽을 바라보았다.
손을 든 건 장하양과 조아라뿐이었다. 조아라가 당황해서 쩔쩔매는 모습이 백설하의 심정을 대변했다.
당연히 전부 ‘애플 크러쉬’를 찍을 줄 알았는데?
백설하가 입술을 벌벌 떨며 말했다.
“너, 너희들 어째서……?”
“데모(그치만)!”
리카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우파루파는 카와이몽(귀여운걸)! 아름아 그치?!”
“아…….”
신아름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파루파 귀엽지…….”
대놓고 귀여운 척하는 걸그룹 곡은 싫다더니, 결국 신아름도 우파루파의 귀여움에서 빠져나올 수 없던 모양이었다.
백설하는 철석같이 소녀연맹 전원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러면 안 되지만 배신감이 느껴졌다.
동료라고 생각했는데에!
“언제까지 매달려 있을 거야?”
백설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성필의 팔에 나무늘보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도 성필은 우직하게 팔을 내리지 않았다.
“…….”
백설하가 자신의 발로 일어나 중심을 잡았다. 그녀는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너한테 표를 준 건 동생들이랑 나 정도일 거다…… 그렇게 생각했어?”
성필이 고개를 저었다.
“그딴 식으로 가로 엔터가 굴러갔으면…… 이미 여긴 진작 망했어. 우리가 3부작 앨범 냈을 때 얼마나 격렬하게 갈등을 겪고 싸웠어?”
“아저씨 왜 나 보고 말해요.”
“사랑하는 언니라서, 귀여움 천재 설하라서 표를 준다. 그런 일은 없어. 설하야, 네가 성공하고 싶은 만큼 애들도 그래. 이 회사의 모두가 그래.”
소녀연맹의 성공을 위해 힘쓰고 있다.
적당히 정에 휩쓸려 타이틀곡을 선정하지 않는다.
“네가 들여왔던 시간과 노력을 믿어봐. 네가 택할 수 있는 최선만 택해왔어. 곡을 만드느라 잠도 설치면서 노력했어. 그 결과야.”
백설하는 자신의 직관과 능력으로 ‘우파루파’와 동수표를 이루었다.
그렇다, 동수표.
“하, 하지만 아직…….”
“넌 뭘 찍었어?”
“…….”
“설하는 어느 쪽을 택했어?”
아까 말했다시피, ‘우파루파’다.
“진심이었어?”
아니었다.
백설하는 책임 회피의 수단으로 ‘우파루파’를 택했다. 아니, ‘애플 크러쉬’를 믿을 수 없었다.
아티스트가 어버이라면 작품은 자식이다. 그런데, 백설하는 자식을 믿는 게 불가능했다. 자신의 능력부터가 불분명했었으니까.
남들이 ‘애플 크러쉬’를 좋다고 하는 것도 성필의 꿈에 감화된 것일 뿐. 그리 생각했었는데…….
“만약 여기서 네가 의견을 바꾸면.”
동수표의 호각이 아닌, 과반수인 ‘애플 크러쉬’가 ‘우파루파’를 밀어붙이는 형세가 된다.
‘애플 크러쉬’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결국엔 ‘애플 크러쉬’가 ‘우파루파’를 이길 거야. 어때, 설하야. 넌 ‘우파루파’로 컴백하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
자신을 못 믿는단 이유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펼치지 못한다면.
“분명 후회할 거야.”
성필이 백설하의 등을 부드럽게 앞으로 밀었다.
백설하가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십수 쌍의 눈과 마주했다.
그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허리를 숙였다.
마침내, 그녀는 두려워 숨겨두었던 진심을 밝혔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일단 사죄드릴게요. 저는, 저는 책임을 피하고픈 마음에 ‘우파루파’를 찍었습니다. 저를 믿을 수가 없어서요. 하지만, 염치가 없단 건 저도 알지만…….”
백설하의 목소리에 물기가 깃들었다.
“아까 드렸던 말씀 번복할게요. 저는 타이틀곡으로 ‘애플 크러쉬’를 밀게요. 아니, 이걸로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저희만의 여름과 사랑을 담았습니다. 저희의 사랑입니다. 저희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어요. 부탁드립니다, 저를…….”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믿어주세요.”
침묵.
그리고.
박수.
정지음을 시작으로 소녀연맹이, 그리고 다른 직원들이 손뼉을 쳤다. 이윽고 박수로 회의실이 가득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