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33화 (433/760)

433화

“상처요?”

“…….”

성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았던 미래는 두 개 다 충격적이었다. 둘 다 백설하와 관련 있었고, 백설하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자신이 만든 노래를 사랑하지 못하는 가수. 그리고 언제나 패배감 속에서만 살아가는 뮤지션.

‘흔한 일이지.’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하나부터 열까지 숫자로 표현된다.

누구나 1등이란 타이틀을 향해 달려가지만, 누구나 1등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성필은 이런 구분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1등 대신 최고란 단어를 훨씬 자주 사용했다.

‘정말 1등이란 게 존재한다면.’

1등 외의 존재는 전부 패배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다수의 패배자들이 소수의 승리자를 찬양하며 패배감과 열등감을 느끼는 상태.

이게 올바른 세계의 형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모든 곡과 뮤지션에는 저마다의 개성과 강점이 있어. 칼로 썰 듯이 순위를 매길 순 없어.’

그런데, 미래의 백설하는 그러고 있었다.

그녀는 데뷔 초창기 케이어스를 라이벌로 여겼던 때보다 훨씬 성적에 민감했다.

어쩔 수 없다곤 생각한다.

‘프로듀싱에 직접 몸을 담으면 그렇게 변해가니까.’

음악의 본질적 가치보다 상업적 가치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프로듀싱을 하기 전에는 주장만 하면 된다. 하지만 프로듀싱에 몸을 담그면 하나부터 열까지 본인이 신경 쓴다.

이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성공은 자신의 덕이며, 실패는 자신의 탓이다.

백설하는 프로듀서로서의 책임감을 가졌으면서, 동시에 인간에 명확한 급을 매기게 되어버렸다.

자신을 패배한 다수 쪽에 밀어 넣고 분류한 것이다. 마치 ‘어느 대학을 못 가면 인생의 패배자’라고 말하는 어린아이들처럼 말이다.

“너희들은 항상 케이어스를 신경 썼었으니까…….”

“으음, 그렇죠.”

백설하는 과거를 떠올리는 듯 시선을 약간 사선으로 올렸다.

“아마 저희들 다 같을 거예요. 케이어스를 신경 쓰게 된 순간이요.”

“……언제인데?”

“박 이사님이 케이어스 데뷔 무대 보고 우셨을 때요.”

성필이 깜짝 놀랐다.

백설하는 그런 성필의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를 나무라듯 바라보면서 손바닥으로 어깨를 찰싹 쳤다.

“뭘 ‘전혀 몰랐어’란 것처럼 반응하세요.”

“아니, 나는…… 같은 시기에 데뷔한 그룹이라서 신경 쓰는 줄 알았지. 여러모로 많이 엮이기도 해서…….”

“너무해요.”

백설하는 다시 한번 말했다.

“너무하세요.”

“……미안.”

“정말로요. 너무하셨어요. 저희는 막 데뷔해서 기뻐하고 있는데, 담당 PD라는 분이 다른 그룹을 보고 우시다뇨.”

백설하는 물론 멤버들 전원 기분이 안 좋았다. 심지어, 성필이 이해가 갔기에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째서 성필이 눈물을 흘렸는가, 그 이유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납득했기에.

“제가 상처받는 게 싫으시다고…… 하셨죠?”

“응…….”

“그럼, 같은 시기에 컴백하면 저희가 또 진다는 거네요.”

“그, 그렇게 생각하지 마. 앨범 판매량이 낮다고 진 건 아니잖아. 네가 그런 식으로 안 생각했으면 좋겠어.”

“아주 확신하고 계시네요?”

“…….”

백설하의 속눈썹이 토라지듯 아래로 내려갔다. 눈동자 또한 성필이 아니라 살짝 아래를 가리켰다.

“아직 결과가 나오기도 전인데……. 저는 이사님의 태도에 더 상처받겠어요…….”

백설하에겐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아직 케이어스의 컴백곡에 관해선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성필은 케이어스가 더 큰 성공을 거머쥘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좋다고…… 하셨잖아요. 다 함께, 프로듀싱한 앨범인데……. 왜, 예전처럼 희망찬 얘기는 안 해주시는 거예요? 이사님이 맡으셨던 앨범으로 컴백할 때는 ‘할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었잖아요. 매일, 항상, 언제나…….”

성필의 손등 위에 올려둔 백설하의 손이 떨려왔다.

“제가 프로듀싱을 맡아서…… 예요? 혹시, 과정 내내 이사님한테는 보였던 거예요? 지금보다 더 나아질 방법이 있는데, 저를 존중하느라 말씀 안 하셨다거나……?”

그래서 미리 패배를 점치는 건가? 아니, 패배를 확신하고 있는 건가?

“제가 프로듀싱을 맡았기 때문에요……?”

“…….”

성필은 백설하에게서 익숙한 전생을 겹쳐 보았다. 그가 미래를 보고 배우들이나 아티스트들의 결정에 반대할 때마다, 백설하와 비슷한 반응들이 돌아왔었다.

‘저를 그렇게 못 믿으세요?’ 같은 말들.

사실, 성필은 그런 물음을 받으면 마땅히 답할 게 없었다.

‘미래를 봤다고 말할 순 없잖아.’

나름대로 논리를 끌어모아 답하지만, 진심이 아니니 그들의 마음에 닿을 리 없었다.

결국 본인의 의지를 펼치지 못한 이들은 성필을 싫어하게 됐었다.

물론 성필은 항상 성공만을 골라왔었지만, 이성과 감정의 영역은 언제나 다른 법이니까.

“박 이사님, 저도 실은 미루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박 이사님이 거짓말하시는 거 같아서, 박 이사님의 진심을 보고 싶어서요.”

성필을 당황시켜 가면을 벗기려고, 일부러 ‘미루지 않겠다’고 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성필의 가면엔 균열이 일었었다. ‘장하다’라고 말해주었지만, 거짓임이 분명했었다.

“박 이사님의 거짓말은 듣기 싫어요. 진실을 말해주세요. 아무리 상처받아도, 지금보다는 나을 거예요. 박 이사님…….”

백설하는 예언자에게 간청하는 사람을 닮았다. 예언자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듯한 뉘앙스를 풍기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가만 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추궁한다.

예언자가 ‘안 듣는 게 좋다’고 해도, 미래를 알 수 있단 건 어느 경우든 달콤하기 그지없다.

백설하에게는 성필의 말이 예언자의 예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성필을 신뢰했기에, 그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비록 상처받더라도, 그의 거짓보다는 진심으로 상처받길 바란다.

“……설하야.”

“네.”

“앨범 판매량으로 케이어스를 이기는 건 불가능해.”

역시나, 예상한 대로의 답이 돌아왔다.

판을 까보지도 않았건만, 성필은 케이어스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네 곡이 안 좋단 건 아니야. 좋은 것과 잘 팔리는 건 다르니까.”

“저는 잘 팔리고 싶어요. 제 기분은 신경 안 쓰셔도 되니까, 이사님이 생각하시는 최선으로 가주세요.”

“나도 몰라.”

“……?”

“잘 팔리는 방법 같은 거, 나는 몰라.”

“네, 네?”

“단지 네가 프로듀싱한 곡이 최선이라고 믿을 뿐이야. 그럼에도 케이어스를 판매량으로 이길 수는 없어.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 내 부족함 때문이야.”

성필은 KS 엔터의 정호환과 그가 이끄는 프로듀싱팀을 이길 수 없다.

전생에서도, 케이어스는 결국 최고의 위치에 오른다. 쟁쟁한 대형 기획사의 걸그룹을 전부 밑에 두고서 말이다.

KS 엔터와 호각을 이룬다는 기획사들의 프로듀싱으로도 케이어스를 왕좌에서 몰아낼 수 없었다.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건 팬과의 소통이, 너희들의 개성이, 가로 엔터의 잠재력이 KS 엔터를 뛰어넘을 열쇠가 되리란 것밖에 없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뛰어넘을 거냐고 물어보면, 몰라.”

영화에서 최고의 각본, 최고의 감독, 최고의 배우가 항상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연예 산업도 마찬가지다.

블록버스터 비즈니스 모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누구도 미리 성공을 예상할 수 없는 세계다.

이 업계의 누구든 자신 있게 ‘이건 성공해요!’라고 외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는 게 하나 있어. 너희들이 언젠가 최고가 되리란 거야. 그 언젠가는 지금이 아니겠지. 1년이나 2년 후도, 어쩌면 아닐 거야. 하지만 언젠가는 될 수 있어. 그걸 믿어.”

“……어떻게요?”

“마음으로. 내 심장이 알아.”

애매하기 짝이 없는 답변이었다.

그때 성필의 손바닥이 위로 뒤집혔다. 그래서, 성필의 손등 위에 백설하의 손이 올라온 형태가 아니라,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모습이 됐다.

백설하는 놀라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애매하게 풀어진 자신의 손을, 성필이 아래에서 꽉 잡고 있었다.

“케이어스에 경쟁심을 품은 계기는 너희들 다 똑같다고 했지? 내가 케이어스 무대를 보고 울었을 때.”

백설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답했다.

“네…….”

“그런데 그 이후로, 난 케이어스 무대를 보고 운 적이 없어.”

“진저 씨 노래 듣고 우셨다고…….”

“그거 빼고.”

“…….”

잘 찾아보면 몇 번 더 있을 것 같다. 멤버들에게 교차검증하면 분명 더 나올 게 분명하다.

하지만 백설하는 그의 말을 차분히 들었다.

“난 너희 무대를 보고 운 적이 훨씬 많아. 그게 ‘심장이 안다’는 거야.”

“언제…….”

“너희 데뷔 무대.”

“…….”

확실히, 소녀연맹 멤버들은 성필의 눈물을 못 봤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춤추는 동안 어떻게 성필이 우는 것을 보겠는가.

백설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데뷔 전, 하양이한테 목도리 선물 받았을 때.”

“그, 그것도 쳐요?”

“하양이가 ‘보라색 튤립’ 아이디어 냈을 때.”

“또 하양이에요……?”

“‘아라베스크’로 컴백할 때 음방 출근길.”

“…….”

“‘아라베스크’랑 ‘보라색 튤립’ 사전 녹화 무대 보곤 주먹을 입에 넣고 끅끅대면서 오열했었지.”

“아, 맞다…….”

“그리고 너희들 ‘아라베스크’로 음방 1위 계속 낙방할 땐 슬퍼서 울었었지. 음, 이건 빼자.”

“…….”

“HPT 뮤직 어워드도 기뻐서 울었고.”

백설하는 어째서 성필이 자신이 운 것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지 신기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외우고 있던 건가?

‘아.’

백설하는 성필의 눈을 보곤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과거의 빛나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성필에게 눈물을 흘린단 행위는, 인생의 찬란한 부분을 장식하는 책갈피였던 것이다.

그러니 기억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성필의 책갈피가 꽂힌 페이지 대부분에는 소녀연맹이란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조진만 사장님이 작성한 너희들 콘서트 기획안 보고도 울었고. 콘서트에서 운 건 당연하고…….”

“중간에 빼먹으신 거 있어요.”

“응?”

백설하는 이제 미약하게나마 미소를 되찾았다. 아까처럼 씁쓸함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라, 진실된 즐거움으로부터 나온 미소였다.

“진저 씨가 가로 엔터 채용 예능에 나오셨을 때, 기타 연주랑 노래 듣고 우셨잖아요.”

“아, 어, 그, 그렇네. 벌써 2스택이네…….”

“그리고 또, 웨벡스에 있을 때요. 박 이사님 다키스트 콘서트 영상 보고 우셨다면서요. 감상실에서요.”

“어떻게 알아?!”

“아름이가 말해줬어요.”

“지금 너희랑 관련된 울음 횟수 얘기하고 있잖아…….”

그리고 또.

성필이 이야기를 이었다.

“너희 ‘뉴아사’ 무대.”

“그리고, 저희 몰래카메라 예능에서 저 우는 거 보고 우셨죠.”

“……응, 그랬지.”

“그때 저 꼭 행복하게 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맞아, 그랬었구나.”

“그래서요?”

“응?”

백설하가 맞잡은 성필의 손을 꼭, 꼭, 규칙적으로 마사지하듯이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박 이사님이 케이어스보다 저희를 보고 운 적이 많단 건 알겠어요. 그래서요?”

“아직 내가 울었던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거 남았어.”

“더 남아 있어요?”

어차피 그다지 중요한 때는 아니겠다 싶었다.

“‘더 언노운 싱어’ 결승 무대.”

“아.”

그때를 떠올리자 백설하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사람이 어떻게 저리도 기쁘게 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었으니까.

그건 성필의 책갈피만이 아닌, 백설하의 책갈피이기도 했다.

“많이도…… 우셨네요…….”

“이게 내 확신의 근거야.”

“케이어스보다 저희를 보고 우신 적이 더 많다는 게요?”

“너희를 보고 감동한 적이 더 많은 거지. 그러니까, 설하야. 나는 너희가 언젠가 최고가 되리라고 확신할 수 있어. 내가 본 걸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되는 순간이 바로 그때야.”

“그게 지금은 아니고요.”

“응.”

“1년 뒤도 아니고, 2년 뒤도 아니겠지만.”

“응.”

“언젠가, 반드시…….”

“오를 수 있어. 그러니 케이어스와 너희를 자꾸 비교하고, 성적이 낮다고 자책하지 마. 지금이 도착지점이 아니라 목적지로 향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줘. 일희일비하지 말아줘.”

“박 이사님이 제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신 건…….”

“한 번 떨어졌다고, 그게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자는 거야. 설하야, 알아. 나도 계속 느껴왔던 감정이니까. 내가 못나서 더 성장하지 못한 거 같고, 나 때문에 실패한 거 같을 때.”

프로듀서, 관리자로서의 책임감이 막대한 무게로 어깨를 짓누르는 감각.

“하지만,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가고 있어. 멈춰 있지 않아. 심지어 누가 등을 떠밀어서도 아니고, 네 다리로 스스로 나아가고 있잖아.”

백설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하다. 장하양과는 반대로 체온이 높은 편이다.

물론 성필은 그녀의 손이 평소에 어느 정도 따뜻한지 전혀 모르지만, 어쩐지 지금이 평소보다 더 따스하다고 생각했다.

“박 이사님.”

“응.”

“그래도, 분해요. 걱정되고, 불안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서…….”

백설하는 우울함을 무마하려는 듯 미소를 띠었다.

쇠잔해가는 제국처럼 존재감이 희미한 미소였다. 결국엔 패퇴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자리엔 소박한 사람들의 삶이 이어질 것이다.

“특히, 박 이사님이 당연하단 듯 ‘네가 최고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 게……. 제가 박 이사님의 그 말씀을 들을 수 없단 게…… 가슴이 미어져요.”

“…….”

“미룰게요. 컴백 3주 미뤄주세요.”

백설하가 성필의 손을 더 강하게 쥐었다.

“자존심 세울 때 아닌 거 알아요. ‘우리들의 프로듀싱’ 첫 번째 프로듀서가 저잖아요. 제 대에서 모든 걸 깔끔하게 정리하고 최고가 될 거다…… 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럼…….”

“저는 계단이에요. 그렇게 생각할게요. 저희 소녀연맹이 위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요. 이왕이면 다 같이 축배를 들 만큼 큰 성공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겠죠.

분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내일 회의에서 결정을 바꿀게요.”

“저, 괜찮은 거지?”

“안 괜찮아요. 제가 프로듀싱 맡은 앨범인데 시작도 전에 초쳐졌어요…….”

“그렇지…….”

“그래도, 며칠 전에 아름이가 그러더라고요. 케이어스 컴백이 알려지기 전에, 여름에 케이어스랑 안 만나게 돼서 다행이라구요. 어쩌면, 저 빼고 다 알고 있었나 봐요.”

백설하는 프로듀서로서의 책임감과 부담감 때문에 당연한 사실을 못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휘관이 승리를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란 전략은, 인내심이 부족한 일반인이 생각할 만한 게 아니다.

여기서 지더라도 다른 동료들이 승점을 만회해줄 것이다, 그리 믿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백설하는 부담감을 살짝 벗기로 했다. 자신의 뒤를 이을 멤버들을 믿고서, 조금이라도 패배감을 덜어야지.

“박 이사님.”

“응.”

“그거 해주세요.”

“그거?”

“저 영입하셨을 때 했던 말씀이요. 생각하니까, 지금 상황이랑 잘 맞는 거 같아요.”

“으음…….”

성필이 잠시 망설이자 백설하는 ‘역시’하면서 헤헤 웃었다.

“하긴, 4년도 넘은 일이니까 기억하고 계실 리 없…….”

“설하를 봤을 때…….”

“어?”

“그건 마치 첫눈이 온 다음 날 길거리를 바라본 어린이의 마음이랑 비슷했어. 조심스레 구석으로 다가가 쌓인 눈을 걷어내자 드러난, 눈 아래의 더 새하얀 눈. 그 새하얀 빛깔에 대한 감탄, 자연이 만든 미에 대한 경탄. 눈은 걷어내도 걷어내도 아래를 볼 수 없어. 드러나는 순간 겉면이 돼. 그리고 점점 더 하얗게 돼. 더 빛나고 찬란해져. 너와 만났을 때가 그랬어.”

“…….”

“지금은 그 빛을 아는 사람이 나와 회사 사람들뿐이지만. 대중이 너희들의 내면을 볼 수 있도록. 먼지 묻은 겉면보다 새하얗고 빛나는 부분을 볼 수 있도록, 힘내자.”

백설하의 입꼬리가 창피함으로 비틀렸다.

동시에 성필이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단 게 기뻤다. 아마, 성필에겐 그 순간에도 인생의 빛나는 책갈피가 꽂혀 있기 때문이리라.

“네.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반드시.”

백설하가 성필의 손을 놓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성필은 고개를 돌리곤 외쳤다.

“뭐 구경났어요?”

멈춰 있던 시간이 움직였다.

물을 가지러 1층 휴게실로 가던 김사무엘도.

김사무엘이 딴청을 부리는 건 아닌가, 장난스레 의심하며 같이 따라왔던 신인개발팀 신준성도.

막 트레이닝에서 복귀한 리카도.

그녀를 차에 태워 다녔던 매니저 김수희도.

2층, 총무로서 매니저 대기실에 비품 점검을 가던 경리 권아인도.

2층 난간에 팔을 걸치고 ‘컴백 3주 미룸’ 계획을 점검하던 이유이도.

막 지하 작업실에서 함께 나온 A&R팀 이재호와 정지음도.

“다들 할 일 하러 가세요.”

성필의 말 한마디에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들 생각했다.

‘그 고백 영상 연출이 아니라 진짜였구나.’

가로 엔터 문화유산 1호, 성필의 기획서.

그리고 문화유산 2호가 성필의 고백 영상이었다.

* * *

다음 날 회의 전,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분명 백설하의 용기에 감동받았던 손혜빈. 그녀는 성필과 조심스럽게 접촉했다.

“성필아, 진짜 너 컴백 이대로 가는 거 찬성해? 네가 설하한테 말 좀 해주면 안 될까? 아니, 진짜 에바잖아.”

“……누나 설하한테 동의한 거 아니었어?”

“동의? 야! 너 임마 설하가 그렇게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데 어떻게 반대하냐!”

성필로선 당황스러웠다.

회의에서 다들 백설하에게 감화됐다고 생각했었는데, 손혜빈은 감화된 척만 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사람 의견이 쉽게 바뀔 리는 없지…….’

“어, 그게, 설하가 미루기로 했어…….”

“진짜? 흐아, 다행이다아. 또 케이어스한테 꼬라박고 음방 1위 한 번도 못 따는 줄 알았네.”

손혜빈은 진심으로 안도한 듯 성필의 등을 두드려주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수십 분 후, 홍규헌이 성필을 은밀하게 불렀다. 성필은 은밀하게 사장실로 들어왔다.

“어, 저기 박 이사.”

“옙 사장님.”

“이미 회의에서 의견이 모였지만 말야. 조금…… 다들 다시 생각해보려는 기미는 없을까?”

“예? 그, 무슨 말씀이신지.”

듣자 하니, 홍규헌이 굳이 회의를 하루 미룬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심사숙고를 위해서 회의를 미룬 게 아니라, 다들 너무 분위기를 따라 흘러가는 듯해서 미뤘다는 모양이다.

“진짜 전부 뭐에 홀린 거처럼 바로 백설하한테 동의했잖아. 솔직히 나 무서웠거든.”

“어어…… 그, 그러세요?”

성필은 백설하와 손혜빈의 변심을 전했다.

그에 홍규헌은 다행이란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백설하가 마음을 바꾼 것보다는, 손혜빈의 의지가 쉽게 바뀌지 않았단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듯했다.

“알겠어. 사소한 일로 불러서 미안해.”

“아뇨, 괜찮습니다…….”

성필이야말로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다들 그렇게나 연기를 잘했다니.

‘아니면, 그때는 진짜 전부 설하한테 설득당했던 걸까?’

예전에 성필은 한구인이 사이클롭스 워크스와의 계약금 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백설하라는 최종병기를 사용하려 했었다.

그녀의 설득(애원)으로 한구인의 마음을 돌리려고 말이다.

‘그런데 내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거 같은데…….’

하긴, 누가 귀여움 천재의 애원을 무시할 수 있을까. 성필마저도 먼저 백설하에게 ‘컴백은 미루자’라고 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했었는데 말이다.

‘뭐…….’

결국엔 잘된 거겠지?

그리고 또 다음 날.

회의에서 소녀연맹의 컴백 지연이 공식적으로 결정됐다. 명확한 다수결이었으니, 반론이 나올 여지도 적었다.

민경섭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매니저 대기실로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들은 그의 기색을 천천히 살폈다.

“얘들아.”

“혀에 구두약 발라야 할까요?”

매니저 안이상이 물었다.

민경섭이 부서질 듯 가련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방송국으로 가자…….”

“……옙!”

매니지먼트팀만 제외하곤, 거의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었다.

* * *

케이어스가 컴백 시기를 확정했다. 그에 소녀연맹은 컴백을 미뤘다.

이 소식은 아이돌 관련 커뮤니티에 일파만파 퍼졌다.

[빨갱이들 우리 케황 등장에 헐레벌떡 꼬리 말고 도망가는 꼴 ㅋㅋㅋㅋㅋㅋㅋㅋ]

[ㄹㅇ 인기견(인민+유기견의 합성어) 애들 종일 빨갱이 새끼들 올려치기 하더만]

[우리 케이어스랑 빨갱이 엮는 언플 ㅈㄴ 개역겨움;; 엮일 급이 아닌데]

[애초에 KS랑 좆듣보 개씹 중소회사 그룹이랑 어케 비교하냐]

케이어스 팬덤인 ‘유스’는 축제 분위기였다.

반대로 인민이들은 노골적인 모욕에 분노를 삼켜야만 했다.

[가로 엔터 너무 쉽게 꼬리 마는 거 아님?

└ ‘꼬리’란 단어 쓰지 맙시다.

└ 꼬리? 지금 인민이들 유기견으로 비하하는 거임?]

순수하게 가로 엔터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던 그 글쓴이는, ‘꼬리’란 단어를 썼단 이유로 30일 정지를 당했다.

글쓴이는 안 그래도 화나는데 소녀연맹 마이너 갤러리에서 밴을 당하자 분노가 정점에 달했다.

그는 결국 어둠의 소녀연맹 팬들이 모인 ‘조아라 마이너 갤러리’까지 뛰어갔다.

[가로세로상하좌우전후 엔터 XX뒤진 XX들 걍 소련이들 케이어스 밑이라고 대놓고 광고하네]

[지금까진 같은 시기 잘만 컴백해놓고서 갑자기 왜 이 ㅈㄹ임? KS한테 구두 핥으라고 돈 받음?]

[아니 ㅋㅋㅋ 소련이들이 언더독 효과로 인기 얻은 거 모르나? 언더독 정체성 버리면 소련이한테 뭐 남음? 빨갱이?]

‘빨갱이’란 단어를 쓴 글쓴이는 밴 당했다.

아무리 ‘조아라 마이너 갤러리’라도 소녀연맹을 비하하는 표현은 쓸 수 없었다. ‘빨갱이’는 소녀연맹을 싫어하는 다른 팬덤이 만들어낸 단어였으니, 특히 더 엄격했다.

이렇듯 소녀연맹 팬덤은 폭풍 속에 있었다.

케이어스 팬덤의 도를 넘는 비난, 그리고 소녀연맹의 컴백이 밀린 데 대한 순수한 아쉬움이 인민이들을 흔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들 이해했다.

[소련이들 케이어스랑 묶여서 음방 1위도 많이 못 해봤잖아. 걔들이랑만 안 만났으면 진작 음방 1위 거의 열 번은 땄을 텐데…….]

[가로 엔터 잘했다고 생각하면 개추.]

[제발 이번엔 전설 쓰자. 3주 기다릴게. 우리 소련이들 커리어에 금칠 좀 하자 제발…….]

[거의 1년 6개월 만에 컴백하는 거니까 성공해야지. 이해한다…….]

처음의 열기가 식고, 인민이들은 소녀연맹을 응원하게 됐다.

특히,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처음 선보이게 됐으니까. 백설하가 프로듀싱을 맡은 만큼 실패는 있어선 안 됐다.

[지금 돌판 말고 대중들도 설하한테 주목하고 있음. 가로 엔터가 홍보 오지게 때려서.]

인민이들은 거센 외풍에 맞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아직 컴백이 멀었음에도 여러 커뮤니티에 소녀연맹을 홍보했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예능 짤을 쪄서 SNS에 퍼다 날랐다.

인민이들은 외부의 공격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다들 행복해했다.

당연하다.

‘드디어 컴백이야…….’

온갖 신화를 써 내려갔던 그룹, 소녀연맹의 귀환이다.

그 와중, 은근히 소녀연맹을 부러워하는 팬덤이 있었다.

[얘들아, 우리 글로브 애들은 어떡하지……?]

글로브(Globe)의 팬덤, 어스(Earth)는 인민이들을 부러워했다.

[우리 글로브들…… 케이어스랑 정면에서 붙잖아…….]

* * *

컴백이 다가온다.

석세스 엔터에도 전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직원들은 최대한 윤상열과 엮이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요즘 그에게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

다행히, 그를 만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마음을 먹지 않곤 거의 만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왜냐하면.

“다시.”

윤상열은 항상 글로브의 연습실에 있었으니까.

그는 신경쇠약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예민하고도 힘이 없었다. 계속 의자에 앉아서 충혈된 눈으로 글로브 멤버들의 연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시.”

지도했다.

글로브 멤버, 정진이 숨을 헐떡이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그녀의 아래로 땀이 후드득 떨어졌다.

“너.”

윤상열이 말했다.

“일어나.”

정진은 침을 삼키면서 일어났다. 그녀는 휘청였다. 몇 걸음 옆으로 밀려나듯 움직이고, 간신히 똑바로 섰다.

그녀의 허벅지가 과한 활동 때문에 경련했다.

“다시, 한다. 끊겼던 부분, 1분 05초부터. 하나, 둘…….”

안무가 시작됐다.

3초 후, 정진이 비틀거리면서 다시 무릎을 꿇었다.

윤상열이 벌떡 일어났다.

당연히, 갑자기 무릎 꿇은 정진이 걱정되어 살펴보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는 정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너.”

윤상열이 다가온다.

정진은 고개를 숙였음에도 그것을 알았다.

윤상열의 그림자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정진이 떨면서 고개를 올렸다.

“그딴 식으로 케이어스랑 같은 무대에 서려는 거냐?”

정진은 허겁지겁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해서일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뛴다.

이러다가 터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녀가 끙끙대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팔의 힘을 빌려서라도 일어나기 위해.

“대체 넌 정신머리가…….”

윤상열이 멈췄다.

정진의 앞에 도달해서는 아니었다.

“PD님.”

글로브의 리더, 라희가 윤상열을 막아섰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이제, 그만하세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