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
가로 엔터가 아직 작았을 시절.
팬 매니지먼트 역량이 부족했던 가로 엔터는 한시적으로 팬클럽 회장이란 직위를 만들었었다.
여러 검증 절차를 거쳐 소녀연맹 최초이자 최후의 팬클럽 회장이 되었던 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이호진이다.
이호진은 현재…….
“됐다. 거기로 둬.”
여동생을 시켜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거치하고 있었다.
이호진은 적당한 거리에 둔 핸드폰 액정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그것을 본 동생이 소름 끼친단 듯 말했다.
“어떻게 직장인이 돼서도 이래.”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아 난 대학교 들어오고 나서 관뒀다고.”
“왜?”
“왜냐니.”
동생은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남친 생겨서.”
“난 애인 있어도 계속 덕질하는데?”
“오빠, 나는요, 유사(연애)로 빨았던 거거든요?”
“아, 글쿠나…….”
이호진은 살짝 당황했다.
설마 저렇게 당당히 아이돌을 연애 감정으로 좋아했다고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돌을 연애 감정으로 좋아한단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소녀연맹을 볼 때마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지만, 에로스적이든 플라토닉적이든 그녀들을 사랑의 의미로 좋아하진 않는다.
이호진은 궁금증을 풀 겸 동생에게 물었다.
“근데 유사로 아이돌 좋아할 거면, 진짜 연애하면 되는 거 아니야? 유사로 좋아한대도 결국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얘기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데.”
“뭐. 나 고딩 때?”
“응, 뭐어…….”
“축구하고 와서 땀내 풀풀 풍기는 애들한테 그딴 마음이 들겠어? 아님 책만 봐서 비실거리는 애들한테? 그것도 아님 삼삼오오 모여서 게임이나 애니 얘기하는 애들한테?”
“…….”
“못 만져도, 직접 못 봐도, 우리 오빠들 용안 화면 너머로 보면서 앓는 게 백배 낫다.”
드디어 이호진의 궁금증이 풀렸다.
현실 남자들이 눈에 안 찼던 거구나…….
“하긴, 대학 가면 남자들도 꾸미기 시작하지.”
“……오빠.”
“어?”
“……아니, 아니다, 아냐.”
동생은 말하려다가 한숨만 푹 내쉬었다.
이호진의 꼴을 보니 말도 안 나왔다.
그가 어땠느냐.
오늘 소녀연맹과 영통팬싸(영상통화 팬사인회)를 한다는 이유로 샵에 갔다 왔다.
옷도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입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샤워도 두 번이나 했다.
‘저런 꼴을 하고서 유사 연애 감정을 몰라?’
죽여버릴까.
이호진은 현재 사귀는 사람과는 2년 차인데, 그녀를 만나러 갈 때도 이렇게 꾸미진 않는다.
동생은 그런 오빠의 꼴이 한심해서 다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녀도 흥미가 있긴 했다.
“진짜 소녀연맹한테 전화가 와?”
영상통화 팬사인회라니, 동생이 덕질하던 시절엔 생각도 못 하던 것이었다. 애초에 영상통화로 팬사인회를 한단 발상 자체가 신기하기만 하다.
영통팬싸는 소녀연맹이 가장 먼저 시작한 팬 이벤트다.
처음 영통팬싸란 이벤트가 공개됐을 적, 온 아이돌판이 발칵 뒤집혔었다.
대체 이게 뭐냐고.
실물 팬사인회 팔아먹는 것을 넘어서 통화권까지 판다고? 이게 말이나 되는 거냐? 무슨 세계적인 역병으로 5인 이상 집합 금지가 걸린 상황에나 나올 법한 이벤트가 다 있냐?
이렇듯 반발이 상당했지만, 막상 실행하고 나니 상당히 호평이었다.
사실 이 영통팬싸는 몇 년 후에나 개발될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성필이 전생에서 미리 체험(케이어스 영통팬싸였음)했기에, 성공 가능성을 믿고 이번 앨범에서 밀어붙인 것이었다.
“어, 진짜 온대. 아이튜브에 녹화 영상도 있…….”
이호진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혹여라도 못 받을까 봐 벨소리 음량을 최대로 한 덕분이었다.
그것을 듣고 이호진과 동생이 동시에 움찔했다.
이호진은 허둥지둥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폰 화면 안에 백설하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아, 으아아, 아, 아아, 안녀, 안녕하세요!”
이호진은 오랜만에 보는 백설하의 실물(실물 아님)을 보자 정신이 전부 풀어헤쳐진 듯했다.
진짜 백설하가 자신의 핸드폰에 떠오른다.
마치 친구에게 걸려 온 영상통화 같다.
[네에.]
백설하의 눈가가 아름답게 휘었다.
[너무 긴장하고 계신 거 아니에요?]
“네, 네네, 네…….”
[어? 그분이시네요, 팬클럽 회장님.]
반대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동생이 화들짝 놀랐다. 설마 현재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는 소녀연맹의 리더가 자신의 오빠를 알아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호진의 얼굴이 확 펴졌다.
“네 맞아요!”
[아, 다행이다.]
“네?”
[아직도 저희 팬이셨네요. 오랫동안 정말 감사드려요.]
이호진이 마음의 눈물을 흘렸다.
아니, 정말 고마운 건 자신이다.
계속 잘 활동해줘서 고마워…….
“아녜요. 어, 그러니까, 투샷은요…….”
영통팬싸의 절차는 일단 인사, 다음은 투샷 촬영, 그리고 토크 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이호진이 화면을 좌우로 분할했다.
백설하가 좌측, 이호진이 우측이었다.
“하, 하하, 하트, 만들어주실, 래요?”
동생이 이호진을 경멸하듯 쳐다보았다.
[네.]
흔쾌히 ‘네’란 대답이 돌아오자, 이호진은 활짝 웃으면서 손하트를 만들었다.
백설하와의 화면 중간 경계선 부근에 절반의 하트를 가져다 댔다. 이제 거기에 백설하가 나머지 절반의 하트를 만들면 되는데…….
“어?”
백설하가 팔로 하트를 만들었다.
이호진의 작은 손 하트와, 백설하의 큼지막한 팔 하트가 부정교합으로 붙었다.
‘뭐…… 뭐지? 이게 아닌데. 아, 근데 설하 얼굴 왜 이렇게 작지? 나도 얼굴이 큰 편은 아닌데 내가 대두처럼 보이네. 어떡해 너무 행복해. 어쩌면 이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
[아 죄송해요!]
백설하가 뒤늦게 손하트를 만들었다.
찰칵.
그렇게 화면 촬영을 마친 후, 본격적인 토크 타임에 들어갔다.
백설하는 두 눈을 초롱초롱 뜨고 이호진에게 집중했다. 이호진은 잠시 숨을 고르고 핸드폰 너머 밖을 보았다.
동생이 스케치북을 들었다.
그곳엔 이호진이 준비해온 말이 적혀 있었다.
“어, 그, 하, 항상…….”
이호진이 말을 더듬자 동생이 이마를 탁 쳤다. 저런 상태론 영통이 끝날 때까지 준비한 말을 전부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시, 신곡 나올 때마다 자, 잘 듣고 있어요…….”
백설하는 이호진의 얼떨떨한 모습에도 변함없이 미소를 잃지 않으며 주의를 유지했다.
그런 백설하를 보자 이호진도 용기가 났다.
“항상, 소녀연맹이 보여주는 완벽한 퍼포먼스에 힘을 받아요. 밝은 모습도 좋아요. 라이브에서 팬들이랑 계속 소통해주시고. SNS에도 개인적인 감정을 자주 적으시지만, 팬카페에만 공개해주시는 편지를 보면 인민이들을 정말 좋아해 주신다는 게 느껴져요.”
팬카페엔 멤버들이 가끔 편지를 올린다.
그곳엔 외부에 공개하기 껄끄러운 멤버들의 내밀한 속마음도 공개되곤 한다.
불안, 초조, 강박, 고뇌, 고통 등.
멤버들은 자신들을 지지해주는 인민이들과 많은 감정을 공유했다.
“물론 저는 소녀연맹의 밝은 면모에 반했고, 명랑한 걸 좋아하지만요. 소녀연맹분들이 겪으시는 고통에도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어요. 완벽한 아이돌이시지만, 또 그런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시는 것도 알지만, 너무 중압감을 느끼시진 않으셨으면 해요.”
백설하의 입가가 굳었다.
자연스러운 미소 대신, 억지로 걸어 놓은 미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번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보면서 특히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티스트가 되려고 고군분투하는 설하 씨는 멋졌지만, 좀 더 본인의 행복을 생각해주셨으면 해서…….”
이호진이 어색하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마치 응원하는 모양새였다.
“항상 노래로 저희한테 말해주시잖아요. 있는 그대로의 저희들이 가장 아름답다고요. 세상을 향해 ‘나는 나야’라고 외치라고요. 저는…….”
인민이들은.
“완벽을 추구하는 소녀연맹의 모습을 사랑하지만, 너무 비인간적인 완벽함만 기대하진 않아요. 노래로 저희들의 행복을 빌어주시는 만큼, 여러분들의 행복도 챙기셨으면 해요.”
기어코 백설하의 표정이 무너졌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가가 물기로 가득했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닦았다.
[아, 또 울었네. 죄송해요.]
“또요?”
[네에……. 인민이들이 저 볼 때마다 위로해주더라구요…….]
다른 멤버들은 참신한 주접을 받거나, 평범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유독 백설하는 인민이들에게 위로를 많이 받았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백설하는 인민이들에게 위로를 받을 때마다 눈물샘이 터졌다.
[고마워요, 정말…….]
영통팬싸를 끝낼 시간이 다가왔다.
백설하는 코를 훌쩍이곤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더 힘낼 수 있는 거 같아요. 감사해요, 항상.]
그렇게, 짤막한 팬사인회가 끝을 맞이했다.
이호진의 핸드폰이 검은 화면만 비추었다.
“……힘내세요.”
이호진은 검은 화면을 향해 그리 말했다. 아직 하고픈 말이 많았는데, 역시 시간이 짧았다.
팬들은 아이돌에게서 완전무결한 모습을 기대한다. 언제나 밝음을 잃지 않는 태도와 환희에 찬 웃음을 기대한다.
하지만, 인민이들은 소녀연맹 또한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란 사실을 안다.
그녀들이 SNS에 올리는 자신들의 감정이나, 팬카페에 공개하는 편지가 그것을 증명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들이다.
그렇기에 이호진과 인민이들은 그녀들의 환희만이 아닌 절박함도 읽는다.
소녀연맹은 그 양면 안에 존재한다.
“시간 너무 짧지 않아?”
동생이 이호진의 여운을 깨버렸다.
“걍 팬싸보단 길긴 한데. 고작 1분 30초 가지고 수십만 원 쓴 건 아깝지 않아?”
“확실히 후회가 남긴 하네.”
“그치? 아깝지?”
동생은 이호진이 다음부터는 앨범을 수십 장씩 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옆에서 영통팬싸를 지켜보니, 이렇게나 허무한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이호진은 환하게 웃었다.
“다음 팬싸를 위해 또 개처럼 일해야지!”
“…….”
동생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녀연맹의 굿즈나 포스터로 가득한 이호진의 방을.
‘오빠 여친이 우리 집 와서 이걸 봐야 하는데.’
아마 다음 날 바로 이별을 통보받지 않을까.
그래도 뭐.
‘행복하면 된 거지.’
동생도 덕질을 해본 경력이 있던 터라 오빠의 마음을 이해했다.
* * *
요즘 백설하는 꿈에서 산다.
자신이 프로듀싱한 곡이 음원 차트 상위권을 차지했으며, 길거리에선 심심찮게 ‘애플 크러쉬’가 울려 퍼진다.
그 쾌감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 믿을 수가 없을 수준이다.
‘내가 진짜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어느 순간 눈을 뜨면 병실에 누워 있고,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성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진 않을까.
그래, 교통사고를 당해서 의식불명 상태였던 것이다.
백설하는 마른 입술로 ‘이사님?’이라고 하겠지. 그럼 성필은 ‘깨어나 줘서 고마워’라면서 백설하의 손을 붙잡고 울…….
‘망상 그만해!’
아무튼, 그만큼 믿기지 않는 상황이란 것이다.
“설하야.”
백설하가 흠칫했다.
고개를 드니 성필이 폰을 쥔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근처로 오자 백설하는 자연스레 엉덩이를 들고 소파 옆자리를 비웠다.
성필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 앉았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네, 네?”
“아니, 커피잔 들고 가만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잖아.”
“그, 그냥 멍 때렸어요. 헤헤.”
“이거 볼래?”
성필이 다짜고짜 폰을 보여주었다. 뭔가 보여주고픈 게 있어서 온 듯했다.
백설하는 그에게서 폰을 받아들고 화면에 뜬 글을 눈에 담았다.
[소녀연맹 ‘인트로: 러브’ 리뷰
소녀연맹은 ‘소녀’와 ‘연맹’ 두 가지 컨셉을 유지해왔다. 소녀란 꿈을 뜻하며 연맹은 그 꿈을 이룰 현실적 방편의 상징으로 기능해왔다. 소녀연맹은 꿈과 현실의 정반합을 추구하는 그룹이다. 세상을 향해 저항과 자유를 부르짖었던 소녀들의 사랑은, 그녀들이 직접 생각해냈고 표현하는 사랑은 어떤 형태일까. 과연, 이번에도 소녀와 연맹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일관성을 보여주었다.
‘우파루파’로 대변되는 자기희생적인 헌신. ‘애플 크러쉬’로 대변되는 폭력적인 소유욕. 소녀연맹은 이번엔 자신들의 컨셉을 더욱 대담한 방식으로 표현해냈다. 꿈과 현실의 정반합보다, 사랑의 각각 다른 형태를 선명하게 대비하여 사랑의 모순적인 성격을 절절히…….]
“……?”
[이러한 앨범 컨셉 설정은 가히 혁명적이다. 이제껏 걸그룹이 사랑을 표현했던 곡은 많고 많지만, 대부분 수동적인 자세를 견지해왔었다. 능동적으로 나아가더라도, 사랑의 수많은 본질 중 하나인 강력한 소유욕까진 닿지 못했다. 하지만 소녀연맹은 그 이상으로 뻗어나갔다. 여기서 보들레르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진정한 문명은 가스나 증기에 있는 것이 아니요, 회전 테이블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원죄의 자국이 차츰 지워지는 데 있다’. 소녀연맹은 걸그룹이 표현할 수 없으리라 치부되던 폭력적 소유욕을 자아의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이 ‘원죄의 자국’을 일부분 지우는 데 기여…….]
백설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설하 여기까지 생각한 거야? 나도 이 글 읽기 전까진 상상도 못 했어.”
“네, 네에?”
“대단하다 우리 설하.”
첫째.
백설하는 소녀연맹이 ‘소녀’와 ‘연맹’이라는 두 가지 컨셉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다. 그냥 성필이 생각한 이상한 그룹명이라고만 생각했다.
둘째.
‘애플 크러쉬’와 ‘우파루파’가 사랑의 무슨 무슨 속성의 무슨 무슨 대비되는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애초에 정반합을 한구인의 수업 말고, 자신이 프로듀싱한 앨범 리뷰에서 볼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무슨 뜻이냐.
‘뭐야 이게?’
백설하도 전혀 모르는 이야기란 뜻이었다.
그런데 성필의 눈이 반짝이는 게, 여기서 ‘아니요’라고 말할 순 없었다.
“그, 이, 이걸 찾으신 분이 계시네요…….”
“크흨.”
“저 놀리신 거예요?!”
“아니, 당연히 놀린 거지. 내가 진짜 설하가 이런 거까지 생각했다고 여기겠어?”
맞는 말이지만, 무시받는 거 같아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백설하가 뾰로통하게 쳐다보자 성필은 헤실헤실 웃었다.
“참, 남 교수님도 대단하시네.”
“남 교수님이요?”
“이 리뷰 쓰신 분이야. 어떻게 보면, 나랑 설하를 만나게 해주신 분일 수도 있고.”
“어…… 왜요?”
“한 이사님이, 남 교수님이 쓰신 책을 보고 날 찾으셨거든.”
“…….”
백설하는 남 교수란 사람이 썼다는 리뷰를 다시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교수님들은 아이돌 곡을 볼 때도 시야 자체가 다르시네요.”
“뭐, 곡을 보는 덴 저마다의 방식이 있는 거지. 작품은 세상에 공개된 순간 창작자 손을 떠난다잖아.”
“아, 그거 한 이사님 수업 때 배웠는데. 그으, 그…… 포스트모더니즘…….”
“맞아. 중심의 해체. 이제 작품을 해석하는 권위는 창작자에게 없어. 그렇지만…….”
성필이 싱긋 웃었다.
“이렇게까지 깊이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든 건 대단하다고 해야지. 설하, 대단해.”
“또 놀리시는 거죠……?”
“이번엔 아니야.”
“박 이사님!”
안이상 매니저가 저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설치 다 했어요!”
“어, 그래요. 설하야 가자.”
성필이 일어났다.
백설하는 가만히 앉아 성필을 바라보았다. 성필이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자, 백설하가 단아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해 주세요, 프린스 챠밍.”
“와,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그렇게 불러달라고 하셨잖아요.”
백설하가 수줍게 입꼬리를 올리자, 성필은 머쓱한 듯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이제 만족해?”
“네, 당연히 이러셨어야죠.”
백설하가 성필의 손을 놓고 앞으로 나아갔다.
“퀸의 행차잖아요.”
* * *
“한 이사님 더 안쪽으로요.”
안이상이 카메라에 잡힌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이렇게 말입니까?”
“더요. 박 이사님도요.”
“저도요?”
“너희들.”
중앙의 홍규헌이 양팔을 펼쳐 성필과 한구인에게 어깨동무했다.
그러자 성필과 한구인을 짜기라도 한 듯 홍규헌의 팔을 붙잡고 다리를 쭉 폈다.
홍규헌이 허공에 대롱대롱 떠올랐다.
“…….”
“오, 사장님 딱 좋아요. 아까까진 너무 작으셔서…….”
“안이상 너 3개월 감봉.”
“어떻게 비율이 그렇게 좋으세요? 키 180인 줄 알았어요!”
홍규헌과 이사들 앞자리에 있던 소녀연맹 멤버들이 키득거렸다. 대롱대롱 매달린 홍규헌이 그녀들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바깥쪽 분들도 더 붙으세요.”
한구인과 성필의 곁으로 민경섭, 이유이, 양상헌, 손혜빈이 오밀조밀 붙었다.
그리고 또 그 근처에 가로 엔터 직원들이 어깨를 더 가까이했다.
“음, 됐다!”
안이상은 카메라 타이머를 설정하고 허겁지겁 자리로 왔다.
“얘들아.”
성필이 무릎을 굽힌 채 포즈를 취한 멤버들을 보고 말했다.
“트로피 앞으로 쭉 내밀어.”
“하이(네)!”
리카, 백설하, 조아라가 각각 손에 든 트로피를 카메라로 내밀었다.
“다들 웃어!”
찰칵.
약 30명에 이르는 가로 엔터 임직원들의 단체 사진. 그 중앙엔 소녀연맹 멤버들이, 그리고 또 그 가운데에 백설하가 있었다.
백설하는 환하게 웃은 채 트로피를 든 채였다.
며칠 후, 그 사진은 큼지막한 액자에 담겨 가로 엔터로 찾아왔다.
성필은 한구인과 함께 그 사진을 1층 홀 벽면에 걸었다.
[소녀연맹 음악 방송 6관왕 기념사진]
공중파 음악 방송 세 개.
케이블 음악 방송 세 개.
총합 6개의 1위를 싹쓸이한 기념사진이었다.
“그랜드 슬램이군요.”
“그러…….”
성필은 답하려다가, 놀라서 한구인을 보았다.
한구인은 울고 있었다.
이미 이전 주에 눈물 콧물 다 흘렸으면서 갑자기 또 왜…….
‘아.’
성필은 한구인의 목표를 떠올렸다.
홍규헌, 한구인, 성필, 셋이 모여 소녀연맹의 목표를 적었던 적이 있었다.
홍규헌은 ‘내가 반할 수 있는 아이돌’.
성필은 ‘세계 최고의 아이돌’.
그리고 한구인은…….
“그랜드 슬램, 드디어…….”
‘모든 음악 방송 1위 하는 아이돌’.
그게 한구인의 목표였었다.
성필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러자 한구인이 웃으면서 사양했다.
“이 눈물을 제 책갈피로 삼겠습니다.”
“……네, 뭐.”
옛날에 성필이 했던 말을 들먹이며 놀리는 것이었지만, 성필은 그냥 봐주었다.
성필은 한구인의 눈물을 닦아주는 대신 등을 팡팡 두드려주었다.
“많이 우세요.”
두 이사는 오래도록 함께 사진을 보았다.
그 가운데서 미소 짓는 멤버들을.
과거의 그녀들은 이런 순간이 올 것을 알았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믿음이 그녀들의 힘이니까.
●[소녀연맹 ‘인트로: 러브’ 리뷰
……(중략).
올해 여름은 걸그룹 격전의 계절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여름이란 바다의 표면엔 소녀연맹의 빛깔이 가장 돋보인다.
본 리뷰 앨범의 타이틀곡인 ‘애플 크러쉬’는 작곡 테크닉의 미니멀리즘(현대 음악에서의 미니멀 음악과 다른 의미로, 단어 그대로의 최소화)을 구현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악기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부여받고 나머지는 모두 소녀연맹, 그녀들의 빛나는 보컬로 채워졌다. 작곡의 미니멀리즘과 동시에, 보컬의 맥시멀리즘이다.
‘애플 크러쉬’를 듣고 현재를 떠올리지 않을 이들이 몇이나 될까. 이 곡은 유난히 더웠으며 또한 특별히 싱그러웠던 올해 여름을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책갈피일 것이다. 아무렴, 여름의 여왕이 우리에게 직접 하사해준 음악이니.
평가: MUST BU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