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화
전생의 성필은 아이돌을 좋아했다.
다키스트의 팬미팅에 가거나, 븨이에스의 앨범을 사고, 레이어드의 콘서트를 가는 등.
딱 그 정도로 좋아했다.
남들이 보면 고작 ‘좋아한다’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빠져 있긴 했으나, 아무튼.
서른 초반 무렵까지는 그러했다.
[안녕하세요, 케이어스입니다!]
서른 중반 무렵부터, 성필은 아이돌을 사랑하게 됐다.
케이어스의 데뷔부터 격렬한 사랑을 느낀 건 아니었다. 성필이 그녀들이 아무렇지 않게 올리는 사진 하나에도 앓게 된 건,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였다.
[이번 앨범은 저희가 프로듀싱에 참여했슴미다.]
케이어스의 데뷔가 딱 3년 정도를 넘었을 때, 아이돌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시기.
두말할 것도 없이 케이어스는 성공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새로운 도전이라면서, 본인들의 취향을 듬뿍 담아낸 곡들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이돌이 프로듀싱에 참여한다…….
‘별거 아니겠지.’
아이돌이 프로듀싱에 참여했단 건 흔한 마케팅 문구다. 팬들이 곡에 더 깊이 몰입하게 만들기 위한 홍보용 문구 말이다.
물론 아이돌이 가짜로 프로듀싱에 참여한단 게 아니다.
단지, 소수의 그룹이나 멤버를 제외하곤 참여의 깊이랄 게 없을 뿐이었다.
성필은 케이어스의 그러한 발언을 보고, 팬들을 위한 서비스성 이벤트나 발언일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얼마 후 바뀌었다.
[감사함미다, 정말 감사함미다…….]
케이어스, 음악 방송 1위.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케이어스가, 정확히는 진저가 마이크를 쥔 채 오열했다.
여태껏 케이어스는 음악 방송 1위 따위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담담하게 감사를 전하고, 미소를 띠며, 그렇게 당연하단 듯 트로피를 가졌다.
그런데.
‘진저가 울어.’
성필은 그 광경을 보자 가슴이 턱 막혀왔다.
대체 어떤 마음으로 노래하고 춤을 췄기에, 1위를 했다고 우는 걸까.
지금까지 얻어냈던 1위가 수십 번일 텐데.
그때부터, 성필은 케이어스에 대해 훨씬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나아가 케이어스를 사랑하게 됐다.
소속사 아이돌 그룹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인 덕질을 위한 트잇터 계정을 만들었다.
케이어스 태그가 달린 것들을 시간이 날 때마다 보았다.
케이어스의 새로운 소식이 뜰 때마다 가슴이 설레서, 그 설렘을 다른 누군가에게도 알려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케이어스 멤버들의 생일마다 생일 투어를 돌았다. 생일 이벤트를 하는 카페로 가선, 몰랐단 듯이 멤버들의 얼굴이 인쇄된 컵홀더를 받았다.
가게를 천천히 둘러보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단 듯 카페를 나섰다.
그리고 컵에서 컵홀더를 분리해, 컵홀더는 비닐에 감싸 소중하게 보관했다.
멤버들이 직접 썼다는 가사를 한 글자씩 음미하며, 새벽에 듣다가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런 고민과 이런 아픔과 이런 행복과 이런 즐거움을, 그녀들도 나와 같이 느끼곤 하는구나.
그리 생각하며 위로받고 격려받았다.
멤버들의 직캠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녀들은 모든 무대에서 립싱크를 하는 일이 없었다.
꽤 많은 아이돌들이 방송 무대의 완성도를 위해 립싱크를 택하곤 하지만, 케이어스는 그러지 않았다.
카메라에 예쁘기 보이기 위한 동작. 케이어스는 그것을 넘어, 모든 무대에서 라이브를 선보이며 격이 다른 무대 장악력과 아우라를 보였다.
그렇게 매일, 매달, 매년 사랑했다.
그리고.
[사랑해주셔서 감사해요!]
데뷔 7년 차, 어쩌면 케이어스의 마지막 콘서트.
그 월드 투어의 종착지인 서울.
성필은 그곳까지 왔다.
와서, 무대 위에 선 네 명의 아이돌을 본다.
비록 거리가 멀어 무대 위의 모습은 면봉보다 작지만, 그것만으로도 성필은 행복했다.
전광판만 보아도 행복했다.
[유스들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성필은 목이 터져라 함성을 내질렀었다.
새삼, 성필은 자신이 왜 이렇게 케이어스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생각했다.
그야 멤버들의 매력이 뛰어난 것이겠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정성.’
케이어스에겐 진실성이 있다.
만들어진 정체성을 넘어선 본인만의 태도를 갖추고 있다.
그건 단순히 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목적만이 아니라, 그녀들의 입으로 말하고픈, 그녀들의 노래로 들려주고픈, 그녀들이 보여주고파 안달이 나 있는 그녀들만의 개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필은 그때 깨달았다.
뮤지션이 팬에게 집중할 때가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할 때만 드러나는 진실성이 존재한다고.
그토록 케이어스에게 빠져들었던 건, 케이어스가 본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노라고.
[다시…….]
앙코르 무대마저 끝나고, 무대 위에 선 에리카는 수만 명의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만나요!]
이뤄질지 아닐지 모르는 약속을 입에 담으며, 에리카는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을 담아 계속 계속 손을 흔들었다.
그때 성필은 답하는 대신 눈물을 흘렸다.
어린아이들은 많이 운다. 그건 본인의 생각을 언어로 정교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눈물로밖에 타인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운다.
그래서 성필도 운다.
‘고마워 얘들아.’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을, 감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기에.
언어 따위의, 현실의 모사품으로 이 격렬한 감정의 파고를 표현하기란 불가능하기에.
‘너희들을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
네 명의 아이돌은 등을 돌리고 무대는 어둠을 맞이한다.
그와 함께 성필은 눈을 감아 눈물을 땅으로 흘려보낸다.
그녀들과 함께한 7년의 마지막.
비록 마지막 페이지라 책갈피 따윈 필요 없지만, 기념을 위해 끝끝내 책갈피를 끼워넣기 위해서.
성필은 눈물을 흘려보낸다.
뚝, 뚝, 뚝.
‘아……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케이어스를 더 사랑할 수 있을 텐데…….’
그녀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일 수 있을 텐데…….
* * *
성필이 입을 다물고 있길 수십 초가 지났다.
고작 수십 초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에선, 경우에 따라 불쾌감의 표현으로까지 여겨질 수 있다.
“박 이사님?”
참다못한 에리카가 다시 그를 불렀다.
에리카는 심장이 서서히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성필이 자신의 곡을 듣고 긍정적인 반응을 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자작곡에 자신이 있던 것이다.
최악의 평가라도 ‘수정이 필요하겠네요’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돌아온 게 침묵이다.
성필의 곁에 앉은 리카마저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다. 에리카는 리카의 반응을 보고 절망할 지경이었다.
‘박 이사님이 이런 반응을 보이시는 게 흔한 건 아니구나.’
대체 자신의 곡이 얼마나 충격적이기에?
에리카는 정호환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배울 마음은 없었지만, 정호환이 가르쳐주었다. 팬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일 방법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배움에 대충이진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실력에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충격적이라고?’
그 순간 에리카의 방어기제가 발동했다.
그녀는 부정적인 상황이 예상될 때 더욱 두꺼운 가면을 쓴다.
애초에 그녀에게 부정적인 상황이 찾아온 일 따위 없다시피 했다. 그녀의 자존감에 타격을 입힐 일 같은 건,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 스스로도 어색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가면을 한 겹 더 썼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주세요.”
에리카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불쾌감이 배어 있었다.
성필이 만들어낸 침묵에 대한 불쾌감이었다. 실제로 성필은 실례를 저지르고 있기도 했으니, 에리카의 반응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계속 그렇게 말 안 하실 거예요?”
보통 사람이 에리카의 이 말을 들었다면, ‘아, 내가 아주 엄청난 잘못을 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에리카에겐 힘이 있다.
성필에게 감정적 부채를 지우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올 부정적 평가를 조금이나마 지울…….
“좋네요. 죄송합니다, 좋아서 말이…….”
“그래요?! 좋아요? 어, 그러니까 좋다는 게 전체적으로 다 좋다는 말이에요?”
에리카의 가면이 순식간에 벗겨졌다.
무려 소녀연맹의 프로듀서로부터 받은 칭찬이다.
소녀연맹으로 신화를 쓰며, 케이어스의 턱 끝까지 추격해 들어오게 만든 인물. 그런 이에게 칭찬을 받았는데 어떻게 가면을 쓸 수 있을까?
“진짜 완벽할 정도로요? 그 정도로 좋나요? 말이 안 나올 정도로요?”
에리카는 본인이 받는 칭찬엔 익숙하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 자신의 자식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받는 칭찬엔 면역력이 적었다.
감히 행복하단 말을 붙여도 될 만큼, 그녀는 들뜰 수밖에 없었다.
“아…….”
성필은 대답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에리카에게 답변해주기 위해선, 일단 한 가지 선택이 필요했으니까.
‘에리카 씨가 들려주신 곡은 전생에 존재했던 거야.’
정확히는, 에리카의 솔로곡이었던 ‘에러’의 프로토타입이라고 보아야 한다.
성필이 듣기에 현재의 곡도 나름의 맛이 있다. 그럭저럭 들어줄 만하다, 그런 느낌.
하지만 전생의 ‘에러’와 완성도를 비교할 순 없다.
‘당연하지. 에리카 씨가 작곡을 했더라도, KS 엔터의 온갖 전문가들이 달라붙어서 곡의 완성도를 높였을 테니까.’
그럼, 에리카가 이 프로토타입을 그대로 KS 엔터로 가져가면 전생과 같은 곡이 탄생할까?
‘아니.’
성필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이대로 에리카에게 ‘곡이 좋네요, 파이팅’이라고 말한 뒤 돌려보내면 어떻게 될까?
‘전생과 완전히 같은 곡이 만들어질 확률은 0%겠지.’
하이라이트 멜로디 라인은 일치한다.
하지만 그 뒤를 받쳐주는 반주까지 전생과 같아질 순 없다.
정지음이 표현하길 작곡이란 수천 개의 갈림길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 수천 번 중 단 한 번이라도 전생과 다른 선택을 하면, 에리카의 곡은 성필이 알던 것과 완전히 다른 곡으로 변해버린다.
‘그렇다고 내가 에리카 씨를 도와준다면?’
에리카에게 ‘지금도 좋지만, 제가 더 좋게 만들 방법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치자.
에리카가 좋게 받아들일까?
성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긴 한데 이렇게 해보는 게 어떨까’는 너무나 유명한 ‘네가 만든 거 구려’의 표현 아닌가.
‘게다가 내가 에리카 씨를 도와준대도, 그 과정에서 에리카 씨가 전부 내 말을 듣는단 보장도 없어. 그리고 내가 전생의 곡을 완벽하게 복원할 수도 없고.’
성필은 정지음에게 작곡을 배웠어야 했나 생각했다. 그랬더라면 이 복원 작업에 좀 더 자신 있게 뛰어들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아니야. 근본적인 문제는 그게 아니야.’
성필이 에리카의 작업에 끼어들면, 그녀의 아티스트십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최적의 미래를, 에리카 씨에게 온갖 수상의 영광을 안겨주었던 곡의 완성본을 알고 있어.’
에리카가 성필의 지시를 따라 전생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결국 성공을 거머쥔다면, 에리카는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역시 전문 프로듀서는 다르구나. 내가 한 것보다 훨씬 낫네…….’
그건 안타깝게도, 성필이 바라는 미래가 아니다.
전생에서 케이어스가 보여주었던 아티스트십이 꾸며낸 게 아니라 진실일 수도 있단 가능성이 보인 지금.
성필이 할 일은 간섭하는 게 아니다.
‘이미 소녀연맹의 등장으로 뒤틀릴 대로 뒤틀렸지만, 최대한 간섭을 배제해야 해.’
케이어스가 방해 없이 잘 자라나도록.
“에리카 씨, 이 곡 정호환 이사님께 보여드릴 건가요?”
“아.”
에리카는 자작곡을 믹스테입으로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성필이 헤드폰을 쓰고 있을 때 제 발 저려 변명하듯 했던 것이었다.
그녀가 다시 설명했다.
“믹스테입으로 낼 거예요.”
“……믹스테입요?”
성필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또 고민에 빠져들었다. 전생의 케이어스 멤버 중 믹스테입을 낸 이는 없었다.
‘설마, 전생의 에리카 씨도 믹스테입으로 곡을 내려고 했는데 너무 좋아서…….’
정호환이 아예 에리카의 솔로곡으로 냈던 건가?
그렇다면 이야기의 아귀가 얼추 맞아들어간다.
‘정호환 이사님은 에리카 씨의 하이라이트 멜로디 라인만 가져가고, 추후에 에리카 씨와의 협업으로 이 곡을 완성시킨 거야.’
성필은 어느 정도 안도했다.
그리 크게 미래가 바뀐 건 아니겠구나 싶어서.
“믹스테입, 좋은 생각이네요.”
“네. 저도 이 곡을 케이어스의 공식곡으로 쓸 수 있으리라곤 생각 안 해요.”
에리카는 어느새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녀에게선 겸손과 겸허가 엿보였다.
“왜냐하면, 믹스테입은 지금의 저를 담기 위한 거니까요.”
에리카의 실력이 KS 엔터의 프로듀서진에 미치는가? 단연코, 아니다.
그럼에도 에리카가 작곡에 도전하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이유는, 이 시기 이 시절에만 표현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좋겠지만요. 인정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지금 저의 능력과 한계를 그대로 응시하고 싶어요. 지금의 저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와 언어로 노래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곤 에리카는 살짝 얼굴이 붉어지며, 스스로도 쑥스러운지 검지로 뺨을 긁적였다.
“나중에 보면 ‘내가 이걸 왜 했지’ 싶을 만큼 창피할 수도 있겠지만요. 그래도, 어쨌든 저잖아요. 기념사진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밖에 남길 수 없는 사진요. 그리고 이걸 내서, 저는 옛날의 저보다 한층 더 나아갈 거예요.”
성필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그는 지금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고 있었다.
백설하가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진행하면서 성장하는 것을 볼 때와는 다른 의미로, 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울면 안 된다.
성필은 곁눈질로 옆에 앉은 리카를 보았다. 그녀는 시종일관 성필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리카는 내가 아이돌에게 음악적 창조성을 기대하고 있단 걸 알아. 그런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것도.’
그러니, 리카는 오늘을 계기로 또 성필을 놀리게 될 수도 있다.
KS 엔터로 가세요,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소녀연맹의 데뷔 후 꽤 최근까지 자주 들었던 비꼼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티를 내면 안 돼.’
아아, 자신의 감정을 내키는 대로 표현할 수 없단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성필은 침을 삼킴으로써 울음을 참느라 따가워진 목을 축였다. 그리고 에리카에게 말했다.
“믹스테입도 좋지만요…….”
에리카가 살짝 긴장한 티를 냈다.
말끝에 뭐 뭐 하지‘만’을 붙인 뒤엔, 흔히 부정적인 말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나중에 정식으로 발표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네요.”
“……예?”
에리카는 물론 리카의 눈도 크게 뜨였다.
믹스테입, 즉 비상업적 앨범이 아니라 정식으로 발표해도 되겠다.
이 말은…….
“그렇게 좋나요?!”
리카가 허겁지겁 성필이 벗어둔 헤드폰을 썼다. 그리고 에리카에게 곡을 재생해달라고 했다.
에리카는 무의식적으로 재생을 누르고, 다시금 성필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들은 게 맞냐는 뜻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물론 이거 자체로 완벽하단 뜻은 아니에요. 다만, 첫 작품이잖아요. 에리카 씨 혼자서 모든 걸 하는 것도 좋겠지만, 회사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한층 성장하는 계기로 삼는 것도 좋을 거예요. 거기에서 배우는 것도 있을 테니까요.”
회사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라.
만약 성필이 ‘정식 곡으로 발표하는 걸 생각해라’란 말을 먼저 하지 않았다면, 에리카는 이를 ‘곡의 퀄리티가 부족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성필이 말하는 건, ‘조금만 더 보태면 케이어스 곡으로도 손색이 없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너, 너무 띄우지 마세요.”
에리카가 느슨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대한 품위를 유지하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이럴 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에리카는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자신이 아닌 자신의 작품이 칭찬받으니, 그녀는 최대한 겸양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리카가 헤드폰을 내려두었다.
에리카는 성필의 칭찬을 곱씹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성필은 리카의 기색을 예리하게 읽을 수 있었다.
‘고작 이걸로?’
그리 생각하는 게 한눈에 보인다.
어쩌면 성필이 에리카의 호감을 얻고자 과도하게 띄워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지금 성필을 노려보고 있으니, 그리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이후로도 대화는 에리카와 성필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대부분은 성필의 격려였고, 또 에리카의 질문들이었다.
“에리카 씨 정말 괜찮으세요?”
“네. 기업들은 자문료로 전문가들한테 수억 원씩 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정당한 대가죠.”
에리카가 식사를 계산하려 했다.
성필은 아직 정산도 받지 않은 아이돌이자, 20대 초반인 그녀에게 무얼 얻어먹는 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심지어 그 값이 10만 원을 넘는다면 말이다.
“제가 할게요.”
그래도 에리카는 완강했다.
그나마 성필이 리카의 비용을 계산하며 자존심을 챙기려 했으나.
“제가 할게요!”
현재 성필보다 현금 부자인 리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몇만 원을 훌쩍 결제했다.
‘그러고 보니, 리카가 억지로 따라온 거였지.’
그럼 리카가 본인의 것을 계산하는 게 사리에 맞았다.
흥미로운 대화와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다 함께 나가려던 때.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타시(저)도요!”
“와타쿠시(저)도요.”
“…….”
아이돌 두 사람이 화장실에 간다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성필은 왠지 모르게 공간에 금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쨌거나 성필은 화장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세면대 앞에 섰다.
“그…….”
성필이 자신의 몸을 팔로 감싼 뒤 몸을 베베 꼬았다.
“그으끄르으으극……!”
기쁨.
너무나도 거대한 기쁨이다.
이 기쁨을 표현하고 싶어서 얼마나 참았는지 모른다.
‘에리카 씨가, 아니, 케이어스가 전생에 보여주었던 모습은 꾸며진 게 아니었어!’
그녀들 스스로 창조성을 발휘하는 경지에 들어선 것이었다.
성필은 사막에 심어져 메마른 식물이, 겨우 한 방울 물을 맞이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제발 한 방울만 더 달라고, 움직이지 않은 잎사귀를 움직여서라도 애걸복걸하고픈 심정이다.
‘케이어스는 전생처럼 될 거야! 내가 망친 게 아니야. 역사는 그대로 흘러가. 케이어스는 최고의…….’
최고의…….
성필은 지랄을 멈추고 거울을 보았다.
거울 안에 비친 그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오묘했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이 은은하게 떠돌아다녔다.
‘케이어스가…… 전생처럼…….’
최고의 아이돌이 된다?
* * *
에리카와 리카는 나란히 세면대에 서서 거울을 보았다.
역시 아이돌이라고 할까, 두 사람 다 본인들의 외모를 점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리카.”
머리칼 정돈을 마친 에리카는 만족스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박 이사님 좋아하는 건 맞지?”
“에휴, 에리쨩. 아무리 착각을 들킨 게 부끄러워도 그렇지, 친구 약점을 잡으려고 하면 어떡해! 심지어 가짜뉴스잖아!”
착각이란 단어에 에리카의 표정이 일순 굳었지만, 얼굴에 서린 장난기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럼…… 왜 박 이사님이랑 나 만나는 데 따라온 거야?”
“에리쨩이 이사님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에리카는 경악한 듯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이제 리카는 빼도 박도 못한다. 스스로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이사님을 좋아하면 안 되는 거야?”
“응, 안 돼. 예전에 말해줬잖아.”
“그 이유 다 빼고서, 네가 박 이사님을 좋아하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이 건들면 안 되는 거야? 그거 외엔 설명할 방도가 없는데?”
“에리쨩, 꼭 쌤 같네.”
“쌤? 아, 설하 언니? 어디가?”
에리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흉부를 보았다.
리카는 단호하게 외침으로써 에리카의 착각을 깨주었다.
“머릿속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
리카도 머리칼 정돈을 마쳤다.
“에리쨩, 박 이사님은 꿈만 좇아가기에도 바쁘신 분이야! 이전에도 말했지만, 박 이사님은 향후 4년 반 동안 연애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셔!”
“그래서?”
에리카는 리카를 놀리듯 계속 싱글벙글했다. 그녀의 눈엔 리카가 부끄러워서 자꾸만 변명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그에 리카가 픽 웃었다.
“난 박 이사님 친구야.”
리카가 거울로부터 등을 돌렸다.
“친구의 꿈을 응원하고, 이룰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당연하잖아.”
그러니, 혹여라도 성필이 사랑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는 건 못 본다.
먼 훗날 지금을 떠올리며,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렸다고 기분 좋게 회고할 수 있도록.
“난 친구로서 박 이사님을 지키는 거야.”
에리카는 차갑게 등을 돌려 떠나가는 리카를, 거울을 통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금 건…….’
변명이 아닌 것 같다.
말 자체에 서린 진실성을 봤다기보다, 그 말을 하기 전에 에리카를 향해 보여준 웃음.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자애롭기 그지없는 웃음을 보고, 에리카는 그리 생각했다.
‘그래, 네가 뭘 알겠니’라고 말하는 듯해서…….
‘뭐야.’
에리카는 아주 살짝 기분이 안 좋아졌다.
연습생 때만 해도 자신에게 붙어 떨어질 줄 몰랐던 아이였는데, 어느새 자신을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게 되다니.
‘너도 다 컸다 이거지.’
에리카는 마지막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곤 화장실을 나섰다.
입구에서 성필과 리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에리카와 리카의 눈이 맞았다. 에리카가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아까 리카가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은근히 아랫사람을 보는 듯한 미묘한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리카, 난 너희 콘서트에서 네 무대를 보고 깜짝 놀랐었어.’
스스로 쓴 곡을 무대에 올리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나도 같은 반열에 들어설 거니까. 나아가서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갈 거야.’
식당을 나서며, 성필이 가볍게 물었다.
“곡은 어떡하실지 정하셨어요?”
“네. 정호환 이사님한테 보여드리려고요.”
“믹스테입으로 낸다는 건…….”
“만약 반응이 좋으면 박 이사님의 말씀도 고려해볼게요.”
* * *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합숙소.
성필은 본인의 방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았다. 화면 안에선 케이어스의 직캠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표정이 느슨한 미소와 함께 풀어지려던 찰나, 그는 방에 설치된 카메라의 존재를 눈치채곤 표정을 굳혔다.
‘진짜 살얼음판이다. 맘대로 취미 생활 즐기면서 웃지도 못하고.’
성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곧 다시 웃음이 나타났다.
‘내가 회귀해서 케이어스의 방향이 엇나간 게 아니야.’
케이어스는 전생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국은 성필이 알던 형태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아이돌이란 미래로 나아가겠지.
‘그래, 이게 맞아.’
성필인 정호환이 프로듀싱하는 케이어스가 전생의 위상까지 도달하지 못 하리라 판단했었다.
그래서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를 대체하는 게임 체인저가 되어야 한다고 맹세했었고.
하지만 그건 진정으로 최고의 아이돌이 되었다고 할 수 없으리라. 케이어스가 사라진 자리를 꿰찬 것에 불과하겠지.
‘내가 바라는 건 경쟁자를 전부 제거한 채 홀로 왕좌에 앉는 게 아니야.’
그러니, 이게 맞다.
에리카는 전생처럼 자작곡을 활발하게 만들며, 결국은 완전한 자체 프로듀싱이 가능한 뮤지션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리고 소녀연맹은 케이어스와 함께 성장해나갈 거야.’
그게 가장 바람직하다.
아니, 오늘만큼은 그런 계산적인 생각을 지워버리자. 성필은 케이어스의 팬으로서 순수하게 이 상황을 즐겼다.
그때 열린 문으로 김하슬이 들어왔다.
“오빠.”
그녀가 자연스레 성필의 침대 옆에 앉았다.
“뭐 해?”
“응? 걍 아이튜브 봐.”
“뭐 보는데?”
성필이 황급히 케이어스의 직캠을 내리고 적당한 정보 영상을 재생했다.
[홍삼으로 알아보는 조선 무역]
“역사.”
“이런 거 가끔 보면 재밌더라.”
“자꾸 알고리즘에 뜨지 않아?”
“응, 진짜 그래.”
갑자기 대화가 멈추고, 둘은 짜기라도 한 듯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필이 참지 못하고 웃었다.
“왜 왔어?”
“이유 있어야 와? 있긴 있지. 심심해서.”
“심심하면?”
“놀아줘.”
“내가 뭔…… 하아.”
성필은 벌떡 일어나 그녀의 옆에 앉았다. 카메라가 두 사람을 가장 잘 찍을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럼…….”
그때 성필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내려두었던 폰의 화면을 살짝 기울여 발신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급히 폰을 주머니에 넣곤 일어났다.
“아, 미안. 일 전화야.”
“일? 이 시간에?”
“응. 이 업계가 원래 그렇잖아. 잠시 받고 올게.”
“거짓말이지?”
성필이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다른 애한테 연락 온 거 아니야?”
김하슬이 말하는 ‘다른 애’란,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의 다른 여자 출연자들을 뜻했다.
슬슬 이 프로그램의 러브 라인은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다른 여자 출연자들의 압도적인 선호를 자랑하는 한구인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몸이 하나이기에 모든 이들에게 관심을 줄 수 없다.
그래서 여자 출연자들은 조금씩 다른 남자 출연자들의 간을 보고 있다. 외에도 남자 출연자들이 분발한 이유도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그 관심의 대상엔 성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면 보여줘.”
김하슬이 손을 내밀었다.
성필과 김하슬은 사실상 커플 성립이 확정되었다 보아도 좋았다.
커뮤니티와 SNS에서도 둘의 관계가 너무 빨리 이어져서 재미없지만, 둘이 꿀 떨어지는 거 보는 건 재미있다는 평이 많았다.
김하슬이 성필에게 폰을 보여달라는 것도 귀여운 질투나 의심으로, 시청자들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뭘 보여줘.”
만약, 성필이 자연스럽게 폰을 그녀에게 주었다면 말이다.
일 전화라면 업무처나 직장 동료의 이름이 뜰 테니, 보여줘도 문제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성필의 폰에 뜬 이름은.
[케이어스 에리카 씨]
였다.
다른 회사의 아이돌에게, 밤에, 사적으로, 연락이 온다는 사실은 절대 방송에 나가선 안 됐다.
성필은 목덜미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김하슬의 눈동자에 의심이 서리기 시작했으니까.
“맞잖아. 다른 애들한테 전화 온 거잖아.”
그녀가 토라진 말투로 성필의 손에 들린 폰을 바라보았다.
‘압박이다.’
김하슬은 ‘지금 네가 나한테 순수성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우리 관계가 네 마음대론 흘러가지 않을 거다’라 압박하고 있었다.
성필은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아니야. 업무 연락이라니까.”
“근데 왜 안 보여줘?”
“내 폰을 왜 보여줘?”
둘은 눈싸움 하듯 서로를 지긋이 보았다.
그러다 전화가 끊겼다.
성필은 상황이 안 좋아진단 것을 느꼈지만, 이 싸움에서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냥 바로 나갔다간 정말 최악으로 치달을 테니까.
‘나중에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이 상황이 방송으로 나간단 거 자체가 내 이미지에 타격을 주잖아…….’
성필은 수만, 수십만 시청자들에게 욕을 얻어먹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게 지난한 눈싸움이 이어지던 중, 김하슬이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나가보란 뜻이었다.
성필은 고개를 꾸벅하곤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재빨리 계단을 내려가 현관까지 달려갔다. 최대한 급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여보세요?”
합숙소를 나오자마자 성필이 통화를 누르고, 에리카와 연결이 됐다.
에리카는 거의 성필이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박 이사님…….]
에리카는 그를 부르고 힘없이 웃어보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성필은 그녀의 심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위로받고 싶은 목소리.’
설마, 오늘 정호환한테 곡을 들려주고…….
성필은 가슴이 섬찟했다.
‘잘 안 풀렸나?’
성필이 뒤바꾼 미래.
그게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닌가?’
예상보다 훨씬 더, 미래가 뒤틀려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