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59화 (459/760)

459화

7시 정각 5분 전.

성필은 파티션을 뚫고 들어올 듯한 팀원들의 시선을 느꼈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성필의 손이 멈추자 팀원들의 기대감 서린 눈빛이 더 강해졌다.

성필은 파블로프의 개 실험이 떠올라 무심코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야근하는 게 당연하던 땐 이런 시선도 받은 적 없었는데.’

그땐 팀원들이 7시가 되면 알아서 퇴근하곤 했었다. 어차피 성필의 입에선 ‘이제 퇴근할까요?’ 같은 말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분위기는 성필이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촬영에 들어가고부터 달라졌다.

그의 퇴근이 곧 팀원들의 퇴근 시각이 됐다.

‘오늘은 4분 빠른가. 4분 일찍 퇴근하는 게 그렇게나 기대되나?’

하긴, 성필도 학생이던 시절엔 선생님이 5분만 수업을 일찍 끝내 주어도 행복했었으니.

성필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말했다.

“이만 들어가 볼까요 다들?”

A&R팀으로부터 소리 없는 환호가 돌아왔다.

여기저기서 ‘고생하셨습니다’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성필은 팀원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가장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그는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시간을 확인했다.

‘6시 58분.’

이후 성필이 향할 장소는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합숙소가 아니었다.

김민주가 빌린 연습실이다. 성필과 리카에겐 에리카의 작업실로 더 익숙한 공간이었다.

‘오늘 우리 애들이 출연하는 음방이 3시쯤 생방 무대를 하는 데니까…….’

리카는 진작 회사로 와서 기다리다가, 성필이 퇴근하기 전 약속 장소에 가 있을 것이었다.

좋아.

오늘도 모든 게 계획대로…….

“팀장님.”

1층으로 내려오니 신아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필은 당연히 멤버들이 음방을 마치자마자 숙소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었기에 살짝 놀랐다.

신아름이 성필에게 다가왔다. 무대 의상이 아닌 일상복 차림이었고, 화장은 지웠는지 얼굴이 말끔했다.

“일 끝나셨어요?”

“응. 넌?”

“팀장님 얼굴이라도 보려고 기다렸어요.”

그러고 보면 요즘 멤버들과 얼굴을 마주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

회사를 마치고도 에리카의 작업실에 들렀다가 합숙소로 가며.

주말에도 방송 촬영 때문에 데이트니 게임이니, 아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나마 신아름은 신경 써서 시간을 보내지만, 옛날보다 만날 기회가 줄어든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성필의 얼굴에 자애로운 온기가 서렸다.

“마음이 통했네. 나도 오늘 아름이 보고 싶었는데.”

“생방 안 봤어요?”

“봤는데, 직접 보고 싶었어.”

“그럼 오늘은 합숙소 거기 가지 말고 나랑 놀아요.”

신아름이 성필의 손목을 붙잡고 칭얼거렸다. 성필을 올려다보는 눈빛에선 은근한 토라짐이 느껴졌다.

성필은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신아름의 손 위에,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포개었다.

“어떻게 그래.”

“거기 가도 좋은 일 없잖아요…….”

신아름이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다시 보니, 신아름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토라짐이 아니라 걱정이었던 듯했다.

성필은 다른 남자 참가자들과 달리 김하슬 한 우물만 팠었다. 그런데 김하슬이 성필에게 호의적이지 않으니, 방송에선 낙동강 오리알처럼 변해버렸다.

이제 와서 다른 여자 참가자들에게 눈을 돌리면 상황이 더 이상해질 것이다. 상황이 여의찮으니 쉽게도 마음을 바꾸는 인간으로 보이겠지.

그게 방송의 또 다른 재미가 될 수 있겠지만, 사람들은 성필이 그러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는다.

여태껏 성필이 만들어온 캐릭터가 있으니까.

“없긴 왜 없어. 가서 너희들 홍보해야지.”

성필은 소녀연맹 홍보란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다. 틈만 나면 소녀연맹의 음악을 틀고, 장기자랑만 있으면 소녀연맹의 춤을 추었다.

단체 캠핑 에피소드에서도 피를 깎는 수련 끝에 습득한 ‘아라베스크’ 퍼포먼스를 선보였었다.

출연자들은 ‘또 소녀연맹이야?’란 반응을 보였지만 말이다.

‘솔직히 속이 쓰렸어.’

아라베스크, 진짜 어려운 춤인데…….

되지도 않는 아이솔레이션이랑 바운스, 골반 돌리기 되게 많이 연습했는데…….

아무도 안 알아주니 서글펐다.

방영된 날 진저가 ‘대단함미다 이사님!’이라며 톡을 보냈었으나, 그래도 억울함은 가시지 않았다.

심지어 아직도.

“홍보 안 해도 되니까 그냥 가지 마요…….”

“하이고, 아름이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팀장님.”

“응.”

“사람들이 팀장님 욕하는 거 신경 쓰지 마요.”

“응?”

욕하는 거?

‘아, 인터넷 반응 얘긴가.’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은 평균 시청률 2% 이상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이대로만 가면 최고 시청률 3%에도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굉장히 높은 수치다.

올해의 방송 시청률 TOP20 안에도 들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치.

그런 만큼 인터넷에서 굉장히 큰 반응을 얻고 있었다.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니, 성필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도 당연히 존재한다.

“팀장님이 좋은 사람인 거 내가 알아요.”

신아름의 눈썹꼬리가 음울하게 내려갔다. 걱정이 너무 많이 걸려 무거워 내려간 모양이다.

신아름의 눈썹은 선명하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도 오늘따라 자기주장이 굉장히 강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 말고도, 회사 사람들은 다 알아요. 그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요.”

“고맙다, 아름아.”

“팀장님 분조장에다가 사귀기 시작하면 바로 돌변하는 파탄자란 소리 같은 거 다 거짓말인 거 다 아니까…….”

“사람들이 그딴 소리를 해?!”

성필은 현기증을 느끼듯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때 신아름의 손이 옮겨갔다. 성필의 손목에서 손으로.

“그런 사람이었으면, 제가 처음 만났을 때 팀장님 따라가지도 않았을 거예요.”

“괜찮아 아름아. 나 그런 거 신경 안 써. 세상 사람들이 다 욕해도, 아름이만 안 하면 난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있어.”

“저두요.”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이 욕할 일은 하지 말고.”

“안 해요.”

“그래, 그…….”

그 순간, 신아름의 어깨 너머로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인물을 또 한 명 보았다.

리카였다.

리카는 계단에서 살금살금 내려와 출구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성필과 눈이 마주쳤다.

“…….”

“…….”

왜 리카가 아직도 회사에 있지?

신아름이 아직 회사에 있는 것과 연관이 있나?

신아름은 성필의 방송 출연으로 꽤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다. 그걸 달래주려고 회사에 남았다던가…….

그때 리카가 윙크했다.

“…….”

성필이 반응이 없자, 리카는 눈에 모래가 들어간 사람처럼 수없이 눈을 깜빡였다. 그 기행은 성필도 윙크함으로써 끝났다.

리카는 무사히 살금살금 입구 앞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위쪽에 걸린 방울이 딸랑거리면서 소리를 냈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소리의 근원지를 보곤 한다. 위험을 감지하려는 인간의 본능이다.

신아름도 흘끗 눈을 돌려 그곳을 보려 했다.

‘왠지 모르지만 리카는 아름이한테 들키고 싶지 않아 해.’

성필은 맞잡은 신아름의 손을 확 당겼다. 당연히 리카 쪽을 보려던 신아름은 깜짝 놀라 다시 성필 쪽을 보았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름아.”

“네? 아…….”

신아름은 성필이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거든. 그래도 아름이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많이 위안이 되네.”

“아…… 별거, 아니에요. 당연하죠. 팀장님도 저 신경 많이 써주고 그랬으니까…….”

“고마워. 아름이가 있으니까 든든해.”

“이런 걸로 뭘요…….”

성필은 신아름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두드려주곤, 아무 일 없단 듯 그녀를 지나쳐갔다. 신아름은 떠나가는 성필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이 있었다.

2층 난간에 기대어 대화하던 신인개발팀 신준성과, 연습생 B반의 리더 역을 맡고 있는 김사무엘이었다.

둘은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하는 성필과 신아름, 그리고 그 뒤를 몰래 빠져나가던 리카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보았다.

김사무엘은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도 잊고, 살짝 질려선 물었다.

“준성이 형. 원래 프로듀서랑 아이돌은 저렇게…… 가까워요?”

“그, 박 이사님이랑 소련이들은 좀 특수하지. 박 이사님이 거의 다 따라다니면서 데려왔고, 클 때까지 옆에서 지켜봤으니까.”

“저도 데뷔하면 저렇게…… 돼요?”

“자연스럽게 자긴 데뷔한다고 생각하네. 넌 사장님한테 제안받았지? 뭐, 사장님이랑 좀 가까운 거 같아?”

“아뇨. 여기 오고 나서 두세 번 만난 거 같은데요. 월간 평가 제외하면요.”

“뭐, 우리 회사가 작잖아. 프로듀서랑 그룹이 긴밀할 수밖에 없지. 들어보니까 프로듀싱 작업 때도 자주 부른다던데. 난 잘 모르지만. 아무튼.”

신준성은 아까 보았던 광경을 전부 지우려는 듯 어조를 홱 바꾸었다.

“수현이가 어떻다고?”

“수현이가…….”

김사무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가로 엔터를 나갈 수도 있을 거 같아요.”

* * *

성필은 주차장에 세워진 차로 다가갔다. 그러자 차 뒤에 숨어 있던 리카의 정수리가 빼꼼 튀어나온 게 보였다.

“리카.”

“앗!”

성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리카가 민첩하게 튀어나왔다.

“빨리 가요!”

“왜 아름이한테 안 들키려고 한 거야?”

“아름이가 저를 욕구 해소 수단으로 써요!”

“뭐?!”

“이야(아니),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 써요!”

들어보니, 신아름은 성필이 방송 출연 때문에 욕을 먹는 데 꽤 큰 스트레스를 받는 듯했다.

재미로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신아름은 방송을 방송 그 자체로 보지 못한다고 한다.

“박 이사님은 욕만 드시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아름이는 욕이 조금만 보여도 그게 세상 전부의 의견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긴 한데, 욕이란 단어에까지 ‘드신다’란 경어는 안 써도 돼.”

“그게 중요한가요!”

아무튼, 신아름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퍼포먼스 향상을 도모한다고 한다.

그 사고 과정이 참으로 독특했다.

성필이 욕먹음. 그렇다면 성필이 프로듀싱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다. 그럼으로써 성필의 능력이 인정받고, 세간의 명성을 되찾는다.

“박 이사님의 인성이야 어떻든 능력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이에요!”

“내 인성은 어떻지 않거든?”

“아무튼 아타시(저)를 연습에 끌고 가서 마구마구 혹사시켜요! 빨간 구두를 신은 거 같아요! 죽을 때까지 벗을 수 없어요! 계속 춤춰야 해요!”

“그럼 아름이한텐 말없이 도망 온 거야?”

“당연히 톡을 보내놨어요! 음력으로 한 달에 딱 한 번 쓸 수 있는 변명을 써…….”

“그런 건 안 말해도 돼.”

둘은 차에 탔다.

시동을 건 성필은 신아름에 대해 생각했다.

‘아름이가 그렇게까지 내 걱정을 한다고?’

전생에서도 신아름은 대중의 반응을 크게 신경 썼었다. 그게 신아름의 멘탈을 갉아 먹는 주요 원인이기도 했다.

아마 이번 생에서도 그렇겠지.

‘본인이 힘들었던 경험이 있으니,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당연하지만, 성필은 신아름만큼 힘들지 않다.

만약 성필이 신아름 정도의 관심을 받고 살았으면, 이미 대로에 드러누워 오열했을 것이다.

한 번이 아니라 대여섯 번쯤.

‘그렇다고 과장되게 활기찬 모습을 보이면, 아름이는 알아챌 텐데.’

고민해볼 문제다.

* * *

“또 까였어요.”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에리카가 선언했다.

성필과 리카가 결과가 어찌 됐냐고 물을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이게 에리카의 스타일인 듯했다. 에리카는 쓸데없는 기대감을 심어주려 하지 않았다.

된 건 됐다, 안 된 건 안 됐다.

그렇게 딱 잘라서 말하려 한다.

“에엑?! 아타시(나)의 모든 작곡 기술을 동원해서 서포트했는데!”

“이번엔 곡을 1분도 들어주시지 않으셨어.”

“으음, 모시카시테(어쩌면)…….”

“뭔가 짚이는 점이라도 있어?”

“에리쨩이 에이블톤을 써서 그래!”

에이블톤은 작곡 프로그램 이름이다.

“이참에 로직으로 옮기자!”

“싫어.”

“즉답?!”

“로직 쓰려면 맥북 사야 하잖아.”

“내가 사줄까?”

리카가 흔쾌히 제안했다.

요즘 리카는 어떻게든 에리카에게 빚을 씌우려는 버릇이 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호의를 주려는 버릇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듣기 좋을 것이다.

에리카는 그런 리카를 귀엽단 듯 보았다. 아예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했다.

“귀엽다 우리 리카.”

“난 옛날의 에리쨩이 알던 리카가 아니야! 귀엽지 않아! 이사님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세요!”

“카와이(귀엽다).”

“저는 귀엽지 않아요! 예쁘다구요!”

“귀여운 리카의 요청이지만, 로직으로 바꾸자는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어. 첫째, 갑자기 작업 도구를 바꾸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둘째, 극적인 퍼포먼스 향상을 불러올 거라고 예상되지 않아. 셋째, 자금이 없어.”

리카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거절하는 이유까지 들려주다니.

성필은 에리카가 참 성실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아예 곡 스타일을 확 바꿔야 할 거 같아.”

에리카는 정호환에게 네 번 작업물을 보여주었고, 전부 까였다.

그 네 개의 작업물, 즉 곡들은 첫 번째 버전에서 수정을 거친 것들이다.

결국은 정호환에게 거절당한 원본을 이리저리 수정한 것일뿐.

“대전환이 필요해.”

에리카의 선언에 성필은 짐짓 긴장했다.

‘대전환이라면, 어느 수준까지?’

성필이 에리카의 믹스테입에 관여하기 시작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곡의 하이라이트 멜로디 때문이다.

전생의 에리카가 작곡한 ‘에러’의 하이라이트 멜로디와 소름 돋도록 똑같다.

어쩌면 전생과 같은 길을 가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에리카를 돕기로 했었다.

‘설마 아예 원형을 지워버린다거나…….’

에리카의 하이라이트 멜로디는 성공으로 가는 열쇠다. 적어도 성필이 아는 한에선 그러했다.

그것을 지운다면, 전생의 에리카가 달성했던 위업 중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성필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에리카가 말했다.

“전자악기에만 집중했던 게 패인(敗因)이야.”

“……음?”

“만약 이 믹스테입의 곡들을 공연할 일이 있다면, 난 악기 연주와 보컬 라이브에 도전하고 싶어. 그런 무대를 꾸미고 싶어. 그러려면 리얼 사운드가 필요해. 리카.”

“응!”

“악기 소스 구하기는 이제 그만하자. 공유도 안 해줘도 돼.”

“에에, 지음 오빠한테 훔친 좋은 소스들이 많은데.”

“리카, 그거 가로 엔터 자산이야. 마음대로 빼돌리면 안 돼.”

“박 이사님은 눈치를 길러주세요! 당연히 농담이죠!”

진짜 농담인지 모르겠으니, 내일 정지음에게 물어봐야겠다. 혹시 요즘 리카가 작업실에 혼자 있는 경우가 많지 않냐고 말이다.

“박 이사님.”

갑자기 에리카가 성필을 지목했다.

“연주하실 수 있는 악기는?”

“없어요.”

“대중음악 프로듀서 맞으신가요? 정호환 이사님은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잘하시던데.”

성필의 눈꼬리가 우울하게 내려갔다.

직접적으로 프로듀서끼리 비교를 당하니 기분이 정말 안 좋다. 왜 소녀연맹 멤버들이 케이어스 이야기만 나오면 성필을 잡아먹으려 안달이었는지 알겠다.

뮤직 프로듀서도 아닌데 악기를 다룰 필요가 있을까…….

“박 이사님을 상처 주면 에리쨩이라서 용서 못 해!”

“그냥 나를 용서하고 싶지 않은 거구나. 그럼 리카는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있어?”

리카가 연주할 수 있는 악기는 피아노 정도다.

콘서트에서도 신시사이저를 연주하면서 실력을 뽐냈었고 말이다.

작곡을 위해 정지음에게 전자 피아노까지 함께 배웠었다. 그 이전엔 한구인에게 배웠고 말이다.

“피아노랑 트럼펫.”

“응? 트럼펫?”

성필이 놀란 기색을 보이자, 리카는 자신의 대단함에 마음껏 전율하란 듯 목소리를 키웠다.

“할아버지한테서 배웠어요! 꽤 잘한다구요! 어때 에리쨩, 대단하지? 난 악기를 두 개나 쓴다구!”

“와, 대단해. 악기 두 개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별로 없잖아.”

“사실 저도 리코더랑 소고랑 다룰 줄 알아요.”

“왜 에리쨩 칭찬으로 경쟁하려고 하나요!”

“와, 박 이사님도 대단하세요.”

“에리쨩 소고 모르는 거 아니야? 그냥 두드리는 타악기야!”

“그런 거야?”

“그런 거야. 마아(뭐어)…….”

갑자기 리카가 다리를 꼬곤 오만한 눈빛을 보였다.

“리얼 사운드? 그걸로 간단 거지? 그럼 에리쨩은 어떤 악기를 다뤄? 통기타 하나? 그 정도일까?”

“통기타, 베이스 기타, 일렉 기타, 피아노, 샤미센, 노칸 정도.”

“샤미센이랑 노칸은 어떻게?! 아, 아니, 에리쨩 스고이(굉장해)!”

리카도 진심으로 감탄했다.

성필은 샤미센이랑 노칸을 몰라 검색하니, 일본의 전통 현악기와 관악기였다.

샤미센은 기타를 닮았다.

“와아, 일본 학교에선 이런 걸 배워? 멋지다.”

“안 배워요!”

“그럼 어떻게?”

한국에선 이런 악기를 배울 기회가 없을 텐데.

성필이 눈으로 묻자, 에리카는 살짝 쑥스러워하며 답했다.

“어렸을 때 조금 흥미가 있어서요.”

“혹시 에리쨩 엄청 대단한 집안 출신? 화족이라던가?”

리카가 스코틀랜드로 뮤비 촬영을 갔을 때, 그녀는 한구인에게서 충격적인 정보를 들었었다.

일본에도 귀족이 있단 사실이었다.

화족이란 이름으로 과거의 명예를 어느 정도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단 모양이다.

“집안보다 내가 흥미 있어서 배운 거야.”

에리카가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딱 잘라 답했다. 리카가 조금 풀이 죽어 답했다.

“소난다(그렇구나)…….”

“리카,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한국에선 화족 같은 단어를 쓰지 마. 그게 대단하단 듯이 말하지도 말고.”

“에?”

에리카는 성필을 힐끗 보곤 설명을 이어갔다.

“메이지(明治) 이후 공(公), 백(伯), 남(男)의 작위를 얻었으면, 그건…….”

“아, 이해했어.”

일본의 근대화, 그리고 그 이후 발족한 일본 제국에 기여한 집안이란 뜻이다.

인도로 간 영국인이 ‘우리 집안은 전통 있는 공작 가문이요’라며 자신을 소개하면, 좋은 감정을 가질 인도인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짧은 설명이 끝난 후, 에리카는 다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되돌렸다.

“리카는 트럼펫을 맡아줄래?”

“피아노가 아니라?”

“아, 미안. 나한테 자랑하려고 잘하지도 못하는 트럼펫 실력이 있다고 허언한 거면…….”

“에리쨩 농담은 농담 같지가 않네……. 당연히 에리쨩에게 뻗대려고 하지도 못하는 악기를 한다고 하진 않아! 난 ‘동경의 눈으로 유리 진열장 안에 든 트럼펫을 바라보는 흑인 소년’보다 트럼펫에 더 진심인 일본 소녀였다구!”

성필은 리카가 트럼펫을 불 줄 아는지는 꿈에도 몰랐었다. 왜 그렇게 트럼펫을 연습했느냐고 물으니.

“할아버지가 좋아하셔서요! 할아버지는 교장 선생님이셨는데, 학생들이 입학하면 트럼펫 공연을 보여주시곤 했어요!”

“오, 리카는 음악가 집안이구나.”

“교육자 집안이에요! 할아버지도 아빠도 다 교사예요! 아, 에리쨩은?”

“나는…….”

에리카는 몇 초간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집안이랄 것도 없어. 굳이 말하자면 아버지가 사업가셔.”

“헤에, 그렇구나.”

곡에 대한 회의는 약 30분 이어졌다.

원곡을 라이브 버전으로 바꾸자는 정도의 합의가 나오자 성필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 곡도 편곡을 끝내자마자 정 이사님께 보여드릴 거예요?”

“그래야죠.”

이래선 언제 정호환에게 허가가 떨어질지 몰랐다.

‘정말 에리카 씨의 곡이 문제일까?’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이 시기의 정호환은 케이어스에게 자율권을 줄 마음이 없다던가.

‘전생에서도 케이어스가 창조성을 보여주기 시작한 건 3년 차 후반에서 4년 차였어.’

혹시 모른다.

정호환이 에리카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이미 정해진 미래일지도.

에리카가 정호환에게 곡을 검사받으면, 정호환은 곡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상식적인 이유를 대며 거절할 뿐.

‘뭔가 이유가 있어. 하지만 정호환 이사님이 그 이유를 말해줄 것 같진 않아.’

적어도 에리카에겐 말이다.

총괄 프로듀서로서 품은 고민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언젠가 에리카의 곡을 케이어스의 앨범에 넣을 정도로 그녀를 신뢰하지만, 그 신뢰는 현재 만들어지지 않는다.

미래와 현재의 간극을 연결하는 문제가, 정호환에게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에리카 씨를 돕기보다, 정 이사님을 직접 봬서 이야기를 듣는 편이 낫겠어.’

성필은 일본에서 정호환의 제안으로 함께 식사한 적이 있다.

비록 체급 차이가 까마득한 회사의 이사이지만, 성필이 그와 만날 명분은 존재한다.

“……러니까 아예 질러버리는 거야!”

성필은 리카와 에리카의 열띤 토론에서 벗어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래, 에리카 씨가 고뇌하는 이유는 결국은 정호환 이사님이 거절하기 때문. 그 근원부터 알아야 해.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리카의 시간을 쓰는 이유가 없어.’

가로 엔터에 알린 명분은 리카의 아티스트 이미지 브랜딩이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전 리카에게 경험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에리카의 믹스테입이 결코 통과되지 못할 기획이라면, 리카와 성필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진다.

‘에리카 씨가 그러셨지.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대전환은 곡에 필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성필이 정호환의 의중을 듣고, 그것을 에리카에게 전달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다.

전생처럼 에리카는 본인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되겠지.

그게 비록 지금은 아니더라도, 성필이 돕는 것보단 훨씬 더 전생에 가까운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어떤가요, 박 이사님?”

“…….”

“박 이사님?”

“어, 네?”

“안 듣고 계셨어요?”

성필은 실망한 듯한 에리카의 눈빛과 나무라는 듯한 리카의 눈빛을 동시에 받아냈다.

그가 멋쩍게 웃으면서 물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역시 하슬 님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하시겠죠. 죄송해요. 괜히 박 이사님 시간을 뺏어서…….”

“그거 때문 아니…… 그것도 중요하긴 한데……. 아뇨, 그래서 어떤 이야기였죠?”

“에리쨩이 자꾸 거절당하는 이유요!”

성필이 흠칫했다.

리카와 에리카도 성필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일까?

“에리쨩의 곡엔 소울이 없어요!”

“……소울?”

“절박하지 않으니까 그저 그런 것만 나오는 거예요!”

성필은 ‘무슨 개소리니?’라고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에리카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레코딩에 뮤비 촬영까지 끝내고 정 이사님께 전달드립니다!”

“뭐?”

“아예 완성작을 보여드리는 거예요! 이게 에리쨩과 아타시(저)의 의지입니다!”

에리카와 리카의 결론.

기다리지 않는다.

에리카의 군자금인 500만 원을 장렬하게 태워 완성품을 만들어 낸다.

“이 열의를 보면, 웬만한 냉혈한이 아닌 이상 웃으면서 OK 사인을 보낼 거예요!”

“리카,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야.”

“박 이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하나도 설득력이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제목도 바꿀 거예요. 대전환이죠. 포메란츠의 대전환이 아니에요.”

“누군지도 몰라요.”

“곡명(曲名)은…….”

에리카는 두 사람의 이목을 끈 후 진지하게 말했다.

“‘교토걸(Kyoto Girl)’이에요.”

“표절이얏!”

* * *

아무리 성필이 전생을 겪었더라도 미래를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다. 이미 뒤틀린 미래라면, 원래대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성필은 그리 결론을 내렸었다.

‘에리카 씨가 전생에 발표했던 곡인 에러. 그걸 원곡 그대로 살리는 건 불가능해.’

성필이 아무리 조언해도 그 형태로 가지 않는다. 전생의 히트곡인 ‘에러’를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애초에 곡의 주제조차 바뀌었다.

애인 사이의 권태기를 ‘에러’라고 표현했던 러브송은, 현재에 이르러선 완전히 달라졌다.

같은 주제인 사랑이지만, 표현법이 다르다.

‘에리카 씨는 일본인이지.’

그것에 착안하여, 에리카는 한국에 와서 한국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단 내용의 가사를 썼다.

그래서 에리카가 제목을 ‘한국 남자’라고 정하려 했으나, 성필이 극구 반대했었다. 요즘 사회에선 왜곡된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까.

그래서 에리카는 남자 대신 본인에게 집중하여 ‘교토걸’이라고 하려 했으나, 리카가 ‘표절이얏!’이라고 반발하여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나온 제목은 ‘서울 시티 보이’였다.

교토걸인 에리카가 서울 남자를 묘사하는 가사의 이 곡은, 성필이 듣기에도 확실히 좋았다.

다 좋은데…….

“에, 에리카 씨 진짜 하시게요?”

지하철역 벤치.

그곳에 에리카와 리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무더운 여름임에도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를 쓴 채였다.

성필은 그녀들에게 살짝 떨어져 있었다. 성필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그의 역할은 카메라맨이었다.

뮤직비디오 카메라맨.

“네, 해야죠. 잘 부탁드려요.”

“…….”

“저도 너무하단 거 알아요. 카메라 빌리는 게 그렇게 비싼 줄 몰랐어요. 그으, 그래도 제 카메라에 무비 모드도 있으니까요. 애플을 믿죠.”

“에리쨩, 아타시(나) 화장실…….”

“방금 갔다 왔잖아.”

에리카가 도망치려는 리카를 붙잡았다.

성필은 리카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됐다.

“스읍, 후우, 스읍, 후우.”

에리카가 달뜬 숨을 자꾸만 내쉬었다. 그녀도 긴장되는 것이다.

뮤직비디오의 내용은 이러하다.

“시, 시작합니다.”

에리카와 리카가 서울 곳곳에서 버스킹한다.

중간중간 서울 시민들의 반응이나 표현도 카메라에 담는다.

심플하기 그지없으며, 아무런 돈도 들지 않는 뮤직비디오다.

문제는.

“이, 이쿳(간다)!”

에리카와 리카가 동시에 마스크와 선글라스, 모자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에리카는 통기타를 어깨에 걸고 자세를 잡았다. 리카는 악기점에서 구매한 트럼펫을 입가에 가져갔다.

순식간에 사방에서 이목이 몰렸다.

‘리카다!’, ‘에리카다!’와 같은 비명과도 같은 환호가 지하철역을 휩쓸었다. 사람이 없는 시간대를 고르지 않았다면 주변이 마비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무대가 아닌 곳에서 쏟아지는 관심.

그것을 받자 에리카는 절로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되뇌었던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귓가를 채우는 건 화산처럼 솟아나는 사람들의 관심뿐.

관심받는 건 익숙하지만, 이런 상황엔 익숙하지 않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여기서부터 막히면 앞으로의 뮤비 촬영은 꿈도 못 꾼다.

에리카가 손을 벌벌 떨며 기타의 지판을 짚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곤 기타 줄을 퉁겼다.

그리고 외쳤다.

“네 억양은 한국어 교본에서

배운 거랑 조금 달라―!”

이 뮤직비디오 촬영 최대의 난관.

“서울 시티 보이―!”

수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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