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화
KS 엔터 회장 집무실.
구유한은 막 입소한 훈련병이 떠오를 정도로 각진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의 앞으론 책상 하나를 넘어 KS 엔터의 회장이 보였다.
막 해외 출장에서 돌아온 그는 피곤한 안색으로 재킷이며 와이셔츠를 되는대로 풀어 헤치는 중이었다.
“으아, 꼴이 말이 아니로군.”
와이셔츠를 벗자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티셔츠가 드러났다.
회장은 나잇살 가득한 배를 손바닥으로 통통 두드리더니, 그제야 구유한을 보며 빙긋 웃었다.
“밖이 많이 더워.”
“그렇더군요.”
“선물 사 왔네.”
회장은 캐리어에서 쇼핑백을 하나 꺼내어 구유한에게 주었다.
쇼핑백엔 중고가(中高價)형 비즈니스 가방 브랜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구유한도 20대에 큰마음을 먹고 산 적이 있는 것이었지만, 이 자리에 올라서 쓰기엔 영 어울리지 않는 브랜드였다.
“면세점에서 샀어.”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쓴다고? 쓴다고 했지? 내일 출근한 때 본다? 슈트케이스 말고 백팩 메고 오는 거지?”
“이거 백팩이었습니까…….”
회장은 어린애처럼 구유한을 놀렸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회장은 이곳에 오기 전 전략 기획 회의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졌는지 미리 보고받았다. 그리고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구유한을 불렀다.
그 이유로 짐작되는 건 하나뿐이었다.
“총괄 프로듀서로 후보로 추천된 게 누구라고?”
“박성필이란 외부 프로듀서입니다. 소녀연맹을 프로듀싱했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였다고?”
구유한은 입을 일자로 다문 채 답을 피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의 추궁을 침묵으로 피하려는 것만 같았다.
회장은 장난기 넘치는 진지함을 꾸며냈다.
“외부 프로듀서 영입이라. YSL 엔터의 선례라도 따를 셈인가?”
한국의 아이돌―프로듀서 관계는 워낙 일체감이 강하다. 그래서 외부 프로듀서를 영입하여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적지만, 없진 않다.
KS 엔터, SMS 엔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YSL 엔터의 행보가 대표적이었다.
YSL 엔터는 걸그룹 프로듀싱 공백기가 장장 7년에 이르러, 자사에서 새로운 그룹을 발표하길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전에 자사의 역량이 건재한지 시험하기 위해, YSL의 대표 프로듀서가 어느 중소기획사의 걸그룹을 프로듀싱했던 적이 있었다.
해당 그룹은 유명 프로듀서의 프로듀싱을 받아서 좋았고, YSL 엔터는 자사의 능력을 확인함과 동시에 새로운 수익 가능성까지 보았다.
프로듀서의 능력을 자사만이 아니라, 외부 회사에 투사하여 개런티를 얻는 수익 창출법 말이다.
“앨범 단위의 프로듀서 교체라면 나도 흥미가 있는 사안이긴 하지만…….”
“……진지하게 물으시는 거라면, 앨범 단위로 프로듀서를 선임하는 건 저희 KS 엔터 내부 인력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최고의 인재가 모두 모여 있는데, 굳이 외부 사람을 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 우리나라가 미국도 아니고, 인재는 대기업에 몰리는 법이니까.”
구유한은 숨이 막혔다.
이게 회장의 대화 방식이란 것을 알아도 그러했다. 회장은 상대가 먼저 잘못을 시인하기 전까지, 지독하게도 말을 빙빙 돌려서 한다.
“그럼…… 왜?”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구유한은 즉각적으로 본심을 드러냈다.
“두려워?”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 강 PD가 총괄 프로듀서로 추천한 인물이 박성필이란 걸 들었을 때…….”
구유한은 문자 그대로 겁먹었었다.
강동현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결코 변하지 않을 최종적인 결정’이라고 하던 순간,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옅은 신음까지 흘렸더랬다.
그건 곧 A&R팀 전체의 반항이나 마찬가지였다.
구유한은 그때를 회상하며 손깍지를 꼈다. 떠올리기만 해도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온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음 음, 그렇겠군.”
회장의 표정이 아까보다 누그러졌다.
“회사의 심장이나 다를 바 없는 팀이 죄다 합심해서 자네를 노려본 거나 마찬가지니까.”
“예, 회장님의 말씀대로입니다.”
구유한은 어느 정도 정호환을 깔보았었다.
그의 이전 직장은 게임 회사였다.
한국으로만 한정하자면, 게임 회사의 가장 중요한 인력은 게임 디자이너나 프로그래머가 아니다.
비즈니스 모델 개발자다.
잘 만든 게임도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이 없으면 망한다. 그런 고로, 흔히 장사치라고 무시받는 구유한과 같은 이들의 몸값은 계속해서 상승했었다.
엔터 업계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최고다. KS 엔터의 실적을 몇 단계나 끌어올리지 않았는가. 이 회사에서 자신의 입지는 정호환과 동등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그런데…….
“고작 강 PD 한 명이지만, 그 뒤엔 회사 직원 전체가 도열한 것만 같았습니다. 그들 전부가 저를 노려본 거 같았어요.”
저들이 마음만 먹으면 회사를 뒤집는 것 따윈 일도 아니겠구나.
KS 엔터의 심장, 프로듀싱 파트.
그리고 그들의 지지를 한 몸에 입은 정호환.
구유한이 어찌할 인간이 아니었다.
“이 갈등이 끝까지 가면…….”
“끝까지 가면?”
“……사라지는 건 저일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갈등을 표면적으로 드러내기보다 받아들이길 택했단 건가?”
“그렇습니다. 솔직히, 뭐라고 해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 수습하려고 했습니다…….”
“알겠네.”
“회장님.”
“뭔가.”
“정호환 이사를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정말로 총괄 프로듀서를 교체하실 겁니까?”
회장은 이마를 긁적였다.
“호환이 그 친구, 몇 년 전부터 살짝 맛이 갔어.”
“예?”
“뭐에 쫓기는 인간 같거든. 주변에 잡아줄 인간이 없어서 더 그러는 거 같기도 하고. 이번에 구 이사도 느끼지 않았나. 호환이가 막 나가려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어. 주변에서 ‘정호환 만세!’만 외치면서 따라갈 테니까.”
30년의 업적이 만든 신화적인 카리스마다.
구유한도 동의한다. 신경 쓰이는 건, 회장이 말했던 ‘맛이 갔다’라는 부분이었다.
정호환이 맛이 가?
‘케이팝의 역사를 뒤바꿀 정도의 성적을 낸 참인데? 이게 맛이 간 거라고?’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회장은 그에 대해 설명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아무튼, 알겠어.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알겠고. 내가 오늘 돌아와서 다행이군. 아니었으면…….”
회장은 심각한 분위기를 지우려 너털웃음을 보였다.
“프로듀싱팀도 구 이사 자네처럼 ‘끝까지 가보자 그래!’란 심정으로, 진짜 박성필한테 접촉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예, 뭐…….”
설마 그러겠나 싶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되면, 구유한의 입장이 참 곤란해질 것이었다. 기 싸움 때문에…… 아니, 아무리 당황해서라지만 ‘박성필 영입’을 전략 기획 회의의 결정 사항으로 만들다니.
회장이 타이밍 좋게 입국하여 일을 빨리 수습할 수 있어 다행이다.
회장은 내선 전화를 들어 비서에게 말했다.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 부르게.”
잠시 후.
[외근이라고 합니다.]
“외근?”
강동현이 무슨 외근?
회장은 더 자세히 알아 오라고 했다.
[박성필 프로듀서와의 접촉을 위해 가로 엔터로 갔다고 합니다.]
“어?”
회장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구유한에게로 향했다.
구유한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강동현 이 미친놈……!’
진짜 박성필을 만나러 갔다고?
이 일을 명분 삼아 대체 얼마나 꼽을 줄려고?!
‘진짜 위험한 건 정호환 이사가 아니었어!’
발톱을 숨기고 있던 KS 엔터의 수석 프로듀서, 강동현이었다!
* * *
인간의 지능을 판단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다.
영어 단어 많이 외우거나 수학 문제를 잘 푼다면, 그건 그 계통의 지능이 높은 것뿐 전체적으로 똑똑한 사람은 아니다.
정호환은 새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옆에서 시무룩해져 있는 강동현을 보고서였다.
‘이 친구는 다 괜찮은데 참…….’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매우 낮다.
말하다가 어버버하는 것은 예사이며, 당황하기라도 하면 아예 말문이 막히기도 한다.
정호환은 강동현의 등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강동현이 퍼뜩 허리를 굽혔다.
“죄, 죄송합니다.”
강동현이 사과하는 앞엔 떨떠름한 표정의 홍규헌이 있었다.
장소, 가로 엔터 사장실.
상황이 어째서 이렇게 됐느냐.
끝끝내 홍규헌과 대화를 잘 풀지 못한 강동현이 정호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치 학교 일로 학부모를 부르는 아이처럼 말이다.
정호환은 학부모처럼 홍규헌에게 사과를 전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요…….”
홍규헌도 정호환만큼이나 어이가 없었다.
물론, 처음에 강동현의 저의를 오해하고 추궁한 홍규헌의 잘못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입을 꾹 다물고 울먹이며 정호환을 호출한 강동현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뭐어…… 다 오해란 거죠?”
“그렇습니다. 저희 회사의 일에 엮여 피해를 입으신 사장님껜 면목이 없습니다.”
“피해랄 것도 없습니다, 네.”
있다고 해봐야 점심이 넘어가도록 조간 회의를 끝내지 못했단 것 정도일까.
KS 엔터의 사내 정치 이야기를 들었으니, 꽤 재밌는 경험을 했다고 봐도 좋으리라.
‘대기업 돌아가는 꼴이 마냥 합리적이지만 않네. 이런 유치한 일도 벌어지고.’
“박 이사 관련한 일은 제가 잘 설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부탁드리겠습니다.”
KS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와 수석 프로듀서가 왔으니, 사장인 홍규헌이 둘을 직접 배웅해야 그들의 체면이 살 터였다.
출구까지 가는 동안 말할 수 없는 어색함이 세 사람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때 정호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분께선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연헌 언니 말씀하시는 거라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로군요.”
딱 이 정도가 두 사람 사이의 연관점이었다.
홍연헌을 아는 것.
그러니 서로에게 할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
홍규헌은 머리를 한참 굴리다가, 적당한 대화 주제를 찾아냈다.
“A&R팀 전체가 정 이사님을 지지해주시니, 총괄 프로듀서 자리엔 계속 있을 수 있으시겠네요.”
“그럼 좋겠지만, 아닐 가능성이 크지요.”
아,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는데.
정호환은 ‘허허, 그렇지요’라며 적당히 받아넘기지 않았다.
정말 자신이 곧 KS 엔터를 떠나리라 생각하기 때문일까, 내밀한 이야기까지 마음껏 펼쳤다.
“제 생각으로, 회장님의 눈에 저는 통제할 수 없는 리스크일 뿐입니다.”
“하지만 정 이사님은 전설적인 프로듀서잖아요. 이렇게 쉽게 내보낼 순 없을 텐데요.”
“언젠가 가로 엔터에도 올 겁니다. 시스템이 인간을 완벽히 대체하는 순간이요.”
정호환의 말에, 옆에서 걷던 강동현은 우울히 눈썹을 떨어뜨렸다.
“회사가 계속 성장하면 할수록, 인간보다 시스템을 신경 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듬어갈수록 인간 개개인의 가치는 떨어지는 법이지요. 회사가 완성됐다, 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박 이사를 처음 만났을 때, 박 이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자신이 매니저가 아니라 프로듀서였다면, 회사에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런데 막상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네요.”
“프로듀서건 매니저건, 회사의 눈으로 보면 다 똑같은 부품이니까요.”
“부품이요…….”
“아, 죄송합니다. 사장님 앞에서 드릴 말씀은 아니었군요.”
홍규헌은 정호환의 눈빛에서 쓸쓸함을 보았다. 아마 그는 막 석세스 엔터에서 나온 성필과 비슷한 기분일 것이다.
평생을 헌신한 회사로부터 버려지는 느낌.
자신이 사회의 부품일 뿐이란 사실을 깨달은 사람 특유의, 형용할 수 없는 외로움이 보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호환은 다시금 작별을 고하며 등을 돌렸다. 그런 그를 보며, 홍규헌은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프로듀서를 향한 최고의 칭찬이자 위로라면…….
“저, 다키스트 좋아했어요.”
정호환이 고개를 돌려 홍규헌을 보았다.
“한 1년은 진짜 미쳐 살았을 정도로 좋아했어요. 그러니까, 그런 그룹을 프로듀싱하신 분이니까…… 자부심을 가지셨으면 해요. 정호환 이사님은 부품 같은 게 아니세요.”
과거도 지금도 한국 최고의 프로듀서다.
멋들어진 수사라곤 없이 담백한 위로. 그것을 들은 정호환은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이번에야말로 떠나려…….
“아.”
“에.”
갑자기 문이 열리고 성필과 에리카가 나타났다.
정호환은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설마 에리카가 튀어나오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다.
심지어 성필과 함께라고?
영원 같던 마주침의 순간이 지나자.
“……정호환 이사님!”
성필이 무릎을 쩌억 꿇었다.
1층 홀 전체에 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필의 무릎이 박살 나진 않았나 싶을 만큼 큰 소리였다.
정호환은 성필이 자신 앞에 무릎을 꿇자 크게 당황했다. 애초에 누군가가 무릎을 꿇는단 사태를 마주하는 게 처음이었다.
“에리카 씨를……!”
그 순간, 정호환은 사랑하는 딸이 놈팽이 같은 사위 새끼를 데려온 순간이 떠올랐다.
왜인진 모르겠다. 그냥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에리카 씨가 믹스테입을 내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성필이 고개까지 팍 숙였다.
에리카는 입을 막은 채 무릎 꿇은 성필을 보며 경악했다.
홍규헌은 생각하기를 포기했는지 느슨히 열린 입술 사이로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정호환은.
“……믹스테입? 아!”
총괄 프로듀서 일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던 믹스테입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 * *
가로 엔터 응접실.
성필은 맞은편에 앉은 정호환의 기색을 조심스레 살폈다. 해야 할 이야기는 마쳤다. 남은 건 정호환의 답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내가 에리카 씨를 찾은 걸 뭐라고 생각하실까.’
KS 엔터의 1팀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긴 했으나, 유선상의 대화라 얼마나 진실이 전달되었을진 모른다.
만약 소녀연맹 멤버 중 한 명이 사라졌다가 KS 엔터 남자 직원과 함께 돌아온다?
성필은 차마 상상하기도 싫은 가정을 머릿속에 떠올릴 것이다.
물론 멤버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싶지만, 말도 없이 훌쩍 떠났다가 남자랑 함께 돌아오는 건 너무하잖아…….
‘그러니 사정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야 해.’
그리고, 설명을 마쳤다.
과연 정호환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성필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이 기분을, 성필은 전생에 느낀 적이 있었다.
‘아라네 부모님 뵈러 갔을 때.’
누가 자신을 딱 3시간만 기절시켜줬으면 했었다.
그만큼 성필은 압박감을 느꼈다. 비단 에리카와 함께 돌아온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에리카의 믹스테입 때문이기도 했다.
성필은 옆에 앉은 에리카를 흘끔 보았다.
그녀도 안절부절못하는 게 딱 눈에 보였다. 자꾸만 손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뭐라도 손에 쥐어 안정감을 찾고 싶은 듯했다.
“박 이사님은.”
마침내 정호환이 입을 열었다.
“케이어스를 정말 사랑하시는군요. 소유가 일본에서 해줬던 이야기를 단서 삼아 부산 바닷가를 뒤질 생각을 하셨으니 말입니다.”
“네, 팬으로서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정호환은 에리카를 흘끔 보았다.
눈빛에서부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껴진다. 성필이 어떤 사람이건, 그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적으로 연락해왔고, 믹스테입도 흔쾌히 도와줬고, 사라진 에리카를 찾으러 수 시간의 운전마저 감내했다.
성필은 그런 사람이다.
사심이 있대도 이상하지 않으며, 사심이 있다고 판단하는 쪽이 적절하다.
그래서 눈빛으로 에리카에게 묻고 있다.
‘괜찮은 거니?’
그에 에리카도 정호환의 의중을 짐작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필은 안심했다. 에리카가 성필을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고 공인해준 것이다.
“그래, 에리카 네가 좋다면 나도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네에…….”
“다만, 알지? 3년.”
“……네?”
정호환은 헛기침을 했다.
“왜 네가 박 이사님과 합석한 자리에서 나와 대화하겠다고 했는지, 충분히 이해한다. 판을 이렇게나 벌여놨으니 걱정이 되겠지. 이전에 계약을 들먹이며 믹스테입이 문제없다고 했겠지? 네가 계약을 무기로 들었으니 나도 흉내 내보자면, 이번 사태가 계약을 위반한 거라고 말해줘야겠구나. 잠적은 확실한 문제의 소지가 있다.”
에리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
“너를 이해한단다. 그리고 사과를 전하고 싶구나.”
성필과 에리카가 동시에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호환이 고개를 숙였으니까.
“미안하다, 에리카.”
“이, 이사님 왜……!”
“어제 너에게 그러면 안 됐어.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에리카는 혼란스러웠다.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한 건 자신이었는데, 왜 정호환이 사과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저 자신보다 훨씬 어른이 고개를 숙였단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 뿐이었다.
“난 열등감이 있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회장님이 나를 총괄 프로듀서 자리에서 해임하겠다고 예고하셨어.”
“그런, 그럼, 그럴 수는……!”
에리카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분노를 표출했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 전, 정호환이 재빨리 이야기를 이어갔다.
“화가 났다. 그리고, 슬펐다. 가슴 속에 나 혼자선 어쩌지 못할 검은 찌꺼기가 쌓여 갔어. 그걸…… 너한테 풀었던 거다.”
“이사님…….”
난 이런 대접을 받아선 안 돼.
나는 정호환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듀서다.
세상은 나를 받들어야 마땅해.
누구도 감히 나를 비난하거나 탓할 순 없어…….
“아닌 거야.”
정호환은 자신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세월을 맞은 그의 머리칼은 힘이 없고 얇았다.
“그리고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에리카 너에게 내 열등감을 쏟아내선 안 됐어. 난 열등감에 눈이 가려져 너를 제대로 보지도 않았단다. 미안하다, 에리카. 전부 내 부족함 때문이야.”
“…….”
에리카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에리카, 하거라.”
“……!”
“믹스테입, 그래, 해도 괜찮다. 거절할 때 케이어스의 이미지를 들먹였었지만, 믹스테입이 주는 효과는 0일 수는 있어도 마이너스는 되지 않아. 네 개성을 마음껏 담아보렴.”
에리카의 머리로 강렬한 쾌감이 내달렸다. 그 쾌감은 신경계의 구석구석까지 전해졌다.
“가, 감사합니다 이사님!”
에리카는 활짝 웃으면서 성필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해냈어요 박 이사님!”
“잘됐네요.”
성필은 에리카와 주먹을 가볍게 맞추려 했다. 그런데 에리카는 너무 기쁜 나머지 힘 조절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주먹은 쩍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부딪쳤다.
성필이 사색이 됐다.
“에, 에리카 씨 괜찮……!”
그때 성필은 주먹으로부터 올라오는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그곳을 보니, 자신의 주먹이 풀린 채 손가락이 사방팔방 늘어져 있었다.
“어라, 왜 내 손이……?”
“박 이사님 괜찮으세요?!”
이게 가라테 숙련자?
성필이 고통을 겨우 참으며 손만 벌벌 떨고 있자, 에리카는 그의 손을 붙잡고 마사지했다.
효과는 없겠지만 입김을 호호 불기도 했다. 일본에도 아플 때 입김을 부는 문화가 있나? 모르겠다.
성필이 아파…….
“나는 허락해주지만.”
해피 엔딩으로 끝날 듯한 분위기였다.
그가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
“다음 총괄 프로듀서는 어떨지 몰라.”
“네? 저, 정말 이사님이 쫓겨나시는 거예요?”
에리카가 걱정스레 물었다.
정호환은 시원한 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그럴 수도 있단 거다.”
“그럴 순 없습니다!”
성필이 벌떡 일어나 역정을 냈다. 분노를 표출하려는 듯 오른 주먹을 꼭 쥐었지만, 잘되지 않았다. 아직도 주먹이 얼얼했다.
이거 골절된 거 아니야?
“KS 엔터가 미친 게 아니라면 정호환 이사님 정도나 되는 프로듀서를 쫓아낼 리 없잖습니까!”
“하하, 박 이사님께 그런 말씀을 들으니 쑥스럽군요.”
“저는 정 이사님의 팬입니다! 정 이사님의 대단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에리카는 어이가 없는 듯 성필을 보았다.
‘대체 몇 명의 팬이신 거야?’
아님 그냥 만나는 사람마다 ‘팬이에요’라면서 작업 치는 것일까? 이러다가 김하슬한테도 ‘팬이에요’라 하겠다.
“문규완 회장님이 진심일 리 없어요!”
문규완.
회장의 이름이 나오자 정호환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정호환은 오랜 세월 보아온 만큼, 그를 잘 알고 있다.
“한다면 하시는 분입니다. 꼭 필요하지 않다면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 같은 건 안 하시지요. 아마 진심일 겁니다.”
“그럼 케이어스는…… 븨이에스는…… PTR17은…… 부테스는…… 리드…….”
“제가 총괄하는 그룹과 아티스트의 이름을 전부 대실 필욘 없습니다. 제가 없으면, 그래도 KS 엔터는 보란 듯이 성공을 이어 나가겠죠. 하지만, 곱게 물러나진 않겠습니다.”
탁했던 정호환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회장님께 해임 선고를 듣는 순간, 저의 커리어는 전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취급을 받는 것 자체가 굴욕이니, 더한 치욕을 입기 전에 떠나자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러지 않을 겁니다. 끝까지 저항해보겠습니다. 에리카를 위해서라도요.”
“제가 도울게요.”
“귀여운 선언이구나. 어떻게 도우려고?”
“연습을 게을리할 거예요.”
시종일관 진지했던 정호환의 얼굴에 그럴듯한 웃음이 떠올랐다. 에리카도 그의 얼굴에 맺힌 웃음을 보자 마주 웃었다.
“회장님도 당황하셨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게, A&R팀이 다음 총괄 프로듀서로 박성필 이사님을 추천했으니까요.”
“네?”
“절대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인물을 추천하는 건, 예로부터 부당한 인사(人事)를 향해 자주 써온 저항법이었죠. 회장님과 구유한 이사도 한 방 먹었을 겁니다.”
구유한 이사?
성필에겐 낯이 익은 이름이다. 한구인이 옛날에 설명해주었던 적도 있고, KS 엔터로 갔을 때 마주치기도 했으니.
사업적 혜안이 생겼을 때 따로 보자고 했던가.
아니, 그것보다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 직?
“……그렇, 네요. 한 방 먹었겠, 네요.”
“박 이사님, 표정 관리하세요.”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로 추천받았다, 라…….
“얼굴에 욕망이 드러난다는 게 이런 거네요.”
윤상열이 들으면 허파가 뒤집힐 만한 일이다.
그나저나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라…….
“생각보다 명예욕이 있으시군요.”
절대 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아…….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
이름만으로도 찬란히 빛나는 것만 같다.
아, 총괄 프로듀서…….
전생에선 자주 망상하곤 했었지…….
“어쨌거나.”
정호환이 손뼉을 침으로써 성필을 망상의 세계에서 구출해냈다. 성필이 정신을 차리니, 에리카가 나무라듯 바라보고 있었다.
성필은 괜히 찔려서 변명했다.
“이상한 생각 안 했어요.”
“괜찮아요. 저도 가끔 소녀연맹이 된 망상을 하곤 해요.”
정호환이 경악했다.
“케이어스가 마음에 안 드는 게냐!”
“망상이라고 했잖아요. 남친을 두고도 다른 남자를 망상하는 거랑 비슷해요. 머릿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니까 죄는 아니잖아요.”
“…….”
그래, 공주님도 평민의 삶을 동경하곤 하니까.
정호환은 분위기를 다잡았다.
“어쨌거나, 저는 계속해서 투쟁해볼 생각입니다. 허허, 투쟁이라고 하니 오랜만에 피가 끓는군요. 이래 봬도 대학 땐 시위깨나 나갔습니다.”
“하하, 저는 대학을 안 갔어요.”
“아, 죄송합니다…….”
“웃으라고 한 말인데요…….”
“아무튼 회장님도 A&R팀의 결정으로 당황했을 테니, 저도 다음 수를 준비해야겠습니다. 제가 강경하게 나가는 걸 보시면 마음을 바꾸시겠죠. 어쩌면 후회하시고 갈팡질팡하고 계실…….”
“이사님!”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나타난 건 사색이 된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였다.
“크, 큰일입니다!”
“큰일?”
“회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문규완 이 개자식이 이렇게 빨리 나를 내쫓고 싶은 거냐아아아아―! 내가 얼마나 오랜 세월 회사에 헌신했는데에에에에―!”
정호환의 절규와 함께, 성필은 다시 망상에 빠져들었다.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
엣, 와타시(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