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화
에리카가 한국어의 다채로운 욕 문화를 여실히 경험하던 도중, 갑자기 전화 너머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폰이 떨어진 듯한 충격음과 함께 신아름의 우리말 욕 강의도 끝이 났다.
“……아름 씨?”
전화 너머로 들리는 소리는, 영화에서 형사가 범죄자를 제압할 때 나올 법한 것이었다.
사람을 붙잡아 구속하면 으레 나올 법한 소리들……. 신아름의 비명은 덤이었다.
잠시 후 전화가 뚝 끊겼다.
“신아름이 뭐래?”
에리카가 황망히 앉아 있자 김민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에리카는 묵묵히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 * *
“아름이 너 뭐 하는 짓이야!”
백설하는 신아름을 무릎 꿇리곤 호통쳤다.
신아름이 무릎을 꿇고 있긴 했으나, 그녀가 제 잘못을 알아 자발적으로 꿇은 게 아니었다.
옆에서 조아라와 장하양이 억지로 신아름을 붙잡아 무릎 꿇린 것이었다. 마치 반역자가 왕 앞에 불려온 모양새였다.
그리고 붙잡힌 반역자가 흔히 그러하듯, 신아름은 분노의 불길을 감추지 못하며 백설하를 올려다보았다.
백설하는 신아름의 반항적인 기세에 겁을 먹었다.
“너, 너, 눈을 왜 그렇게 떠!”
치켜뜬 신아름의 눈동자엔 세상을 향한 원망이 가득했다. 조금만 더 저렇게 놔두면 ‘왕후장상의 씨가 어딨느냐!’라며 투쟁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 듯했다.
“내가 뭐요.”
“뭐?”
“쌤도 저거 봤잖아요!”
백설하는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렸다.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이 방영 중이었다.
성필에게 바람맞은 김하슬의 시점이 계속해서 나왔다. 방송은 그녀가 느꼈을 배신감과 쓸쓸함에 집중했다.
“에리카 그년 때문에 이게 뭔 꼴인데요!”
에리카 그년 때문.
그렇다.
성필이 김하슬과의 데이트를 취소한 건 에리카가 잠적한 까닭이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성필의 사정을 알기에, 성필이 갑자기 사라진 전후 사정을 끼워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왜 팀장님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데요!”
백설하는 거실 한복판에 내팽개쳐진 신아름의 폰과 스마트 패드를 눈에 담았다.
신아름이 방송 실시간 반응을 체크하겠답시고 산 물건이다. 그리고 패드엔 여러 커뮤니티의 현재 반응이 적나라하게 나왔다.
백설하가 선 자리에선 패드와의 거리가 꽤 있어 정확한 글자는 보이지 않았으나, 아마 성필을 욕하는 반응이 상당할 것이다.
나이 때문에 눈이 침침해서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 거리가 있어서 안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백설하가 신아름을 타일렀다.
아까 신아름은 갑자기 일이 있다며 거실을 나갔었다. 그리고 잠시 후 현관 쪽에서 신아름의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에리카 XXX’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상대는 케이어스의 에리카일 게 분명했다.
신아름이 에리카를 향해, 심지어 제대로 대화도 나눠본 적 없는 상대를 향해 무자비한 욕설을 퍼부었다.
말려야만 했었다.
“나보고 어쩌라고요 그럼!”
신아름의 양편에서 구속 중인 조아라와 장하양이 긴장했다. 신아름의 근육이 박동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뭔가 일이 벌어진다.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곧 신아름은 축 늘어져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이제 나도 지쳤어요……. 내가 아무리 키배 떠 봐야 아무것도 안 변해…….”
기어코 신아름이 눈물을 쏟았다.
그에 백설하는 심히 당황했다. 비단 신아름이 울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신아름은 마치 커다란 대업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은 영웅과 비슷했다. 그렇게 보인단 게 아니라, 신아름이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백설하는 당황했다.
‘아름이는 대체…….’
얼마나 진지한 거지?
성필이 욕을 안 먹도록 하는 게 삶의 지상 과업인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솔직히 신아름의 사고방식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때 장하양이 신아름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아름아, 이해해.”
이해한다고?!
“그렇지만 이런 방법으론 박 이사님도 기뻐하지 않으실 거야.”
“알아요, 아는데에, 내가 너무 한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단 게 분해서어…….”
신아름이 장하양의 품에 안겼다.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딸 같았다.
장하양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신아름을 안고, 그녀가 진정하도록 등을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어…….”
백설하는 신아름과 장하양의 감정선을 쫓아가는 게 버거웠다.
자신이 이상한가 싶었는데, 얼빠진 조아라를 보니 그녀도 신아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름아 일단 진정하자. 방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고 최후의 수단을 강구해도 늦지 않아.”
“네 언니…….”
“사과 깎아줄까?”
“웅…….”
그렇게 멤버들은 싱겁게 평온을 되찾았다.
백설하와 조아라는 장하양, 신아름과 살짝 떨어진 자리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신아름은 방송을 보며 장하양이 깎아주는 사과를 오물오물 잘도 받아먹었다. 어쨌거나 진정했으니 다행이었다.
“박 이사님이 잘 수습하실 거야. 그런 분이시니까. 그러니까 아름아 너무 걱정하지 말구.”
신아름은 붉게 부은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양의 말대로 조금 기다려보기로 했다.
방송은 성필이 김하슬을 바람맞힌 다음 날로 넘어갔다.
“봐. 이제 박 이사님이 사태를 잘 풀…….”
성필과 김하슬은 온데간데없고 한구인과 서아영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클림트 기획전이로군요.]
[네, 한국에선 10년 만이에요.]
[기대됩니다.]
[저도요.]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
아무튼, 장하양이 잘 달래주어 신아름은 조용히 방송을 볼 수 있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다른 커플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방송이 끝날 시간이 다가왔다.
신아름은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진짜 이대로 끝난다고? 아니겠지? 제작진이 생각이 있으면, 성필이 사태를 수습하는 부분까지 보여주겠지?
아니…… 성필이 수습했겠지?
“박 이사님이다.”
신아름이 퍼뜩 다시 텔레비전을 보았다.
화면은 성필을 잡았다. 그는 어두운 밤거리를 쓸쓸하게 걷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쓸쓸한지는 모르겠지만, 배경 음악이 그런 분위기를 돋보이게 했다.
합숙소로 가던 도중 그는 우연히 꽃집을 발견했다. 그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그가 꽃집 안으로 들어갔다.
“…….”
장하양의 동공이 팽창했다. 사냥꾼이 사냥감의 움직임을 한계까지 분석하고 파악하려 할 때처럼.
화면 안의 성필은 꽃집을 돌아다니다가 보라색의 풍성한 꽃 앞에서 멈춰 섰다.
장하양이 어금니를 까득 물었다.
저 꽃 설마…….
[이거 히야신스인가요?]
[네.]
튤립은 아니었다.
[선물할 건데 꽃다발로 예쁘게 좀…….]
[여자친구분 주실 건가요? 부럽네요.]
[하하…….]
여자친구 아니거든.
그렇게 성필은 히야신스 꽃다발과 함께 꽃집을 나왔다. 그의 손안에 든 건 다발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삭막하게만 보였다.
성필은 합숙소로 가는 도중 자꾸만 걸음을 멈추거나 의미 없이 한숨을 쉬었다.
성필은 마침내 합숙소 문 앞에 도착했다. 그는 결심하듯 꽃다발을 들곤, 천천히 철제 대문을 열었다.
그리고…….
[차회 예고]
끝났다.
성필과 김하슬 커플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성필이 김하슬을 바람맞힌 상태에서, 끝이 나버렸다.
장하양은 사과 깎던 과도를 꼭 쥐었다.
“아름아, 네가 옳았어.”
신아름은 이미 끝난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뒤로 다음 내용이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당연하게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 신아름의 분노가 옳았다.
에리카 때문에, 성필은 쓰레기가 됐다.
* * *
성필은 고민이 있다.
최근에 생긴 건 아니고, 이 고민을 하기 시작한 지 몇 주 정도 되었다.
‘이번 주에 우리 애들 앨범 활동이 끝나는데…….’
그 말인즉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가 재개된단 뜻이다.
백설하의 프로듀싱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만큼 다음 타자의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다.
어쩌면 첫 타자였던 백설하 이상으로 말이다.
‘비교 대상이 같은 멤버이니, 설하와는 다른 의미로 부담이 되겠지.’
이번 프로젝트는 성필에게도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스스로 프로듀싱의 키를 쥐고 본인이 표현하고픈 것, 자신만의 개성을 마음껏 표출한다. 성필은 그게 마냥 즐거울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사람들은 전부 자기표현 욕구가 있으니까.’
그런데 백설하는 그러지 못했다.
자기표현 욕구를 이루는 기쁨보다 압박감이 더한 듯 보였다.
결과적으로 ‘인트로: 러브’ 앨범은 성공했으며, 백설하는 이런 경험을 하게 해준 성필에게 감사하다고 했지만…….
‘전부 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 성필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옳은 결과에 도달하는 것만큼 옳은 길을 걸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멤버들이 받는 압박감을 도외시하고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이어가는 게 옳은가. 그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강제성과 고통 속에서 탄생한 작품에 생명력이 있을 것인가?
‘어쩌면 설하의 예가 굉장히 이례적인 게 아닐까?’
연장자와 리더로서의 책임감이 백설하를 겨우 지탱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성필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자 그의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민경섭이 움찔했다.
“형.”
민경섭은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최대한 성필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조심 물었다.
“그, 괜찮아요?”
“뭐가?”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이요. 그게…… 시청자들 반응이 안 좋긴 하죠?”
“아, 그거?”
아까부터 민경섭은 묘하게 가만 있지 못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성필을 걱정해서인 듯하다.
“반응이 안 좋나?”
“네? 뭐, 그런 편인 거 같기도 하고…….”
“괜찮아. 방송인데 뭐.”
성필은 별거 아니란 것처럼 답했다.
민경섭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석세스 엔터에서부터 여러 그룹과 아티스트를 담당했던 민경섭은, 사람이 결코 평판에서 자유롭지 않단 사실을 안다.
‘특히 형이라면 더 그렇겠지.’
성필이 자주 하던 말이 있다.
타인의 평가란 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두 중요하다.
아이돌에게 그리 말했던 성필이 정작 자신에게 쏟아지는 평가에 무심할 리 없다. 오히려 출연자들 중 누구보다 평가에 관심을 기울일 게 분명하다.
‘말은 안 해도 힘들 거야. 저거 봐 저거.’
자꾸만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소녀연맹이 관련된 고민에서나 보여줄 법한 태도다. 그리고, 현재 성필이 소녀연맹에 관해 고민할 문제는 없다시피 하다.
공전절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데, 뭘 또 고민한단 말인가? 매일 밤 샴페인을 따진 못할망정, 소녀연맹 문제로 고민한단 건 말이 안 된다.
“형, 그래도 그렇게 된 게 KS 쪽 일 때문인데, 거기선 뭐라고 말 안 하…….”
“아 맞다.”
“네?”
“너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 전에 프로포즈했잖아. 아니, 먹혔을 리 없나? 술에 취해서 전화로 한 거였으니까.”
“아, 하기로 했어요.”
“했어?!”
민경섭의 여자친구는 부처인가?
성필이 놀란 기색을 보이자, 민경섭은 그를 위로하려던 것도 잊고 신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근데 생각보다 결혼이란 게 준비할 것들이 많더라고요.”
“음, 그렇지.”
“뭘 해본 사람처럼 말해요.”
“아…… 어…… 나도 옛날에 찾아본 적이 있어서…….”
“얼마나 결혼이 하고 싶으면 상대도 없이 결혼 정보를 찾아봐요. 진짜 심각하네.”
“……으응. 음, 뭐, 제일 힘든 게 뭔데?”
“장인어른한테 허락받는 거요.”
“시작부터 막혔잖아. 허락을 안 해주셔?”
“네, 제가 매니저라니까…….”
성필이 ‘아이고’ 소리를 내며 한탄했다.
하긴, 어른 세대가 생각하는 매니저란 보통 좋은 이미지가 아닐 것이다.
과거 연예계는 깡패가 개입하는 경우가 많았어서, 매니저라고 하면 그쪽과 관련된 연예인 시다바리 정도의 인식이었다.
어른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가로 엔터테인먼트 매니지먼트 팀장이라고 정식으로 소개했어?”
“무슨 다단계 사원 보듯이 보시더라고요.”
“저런…….”
갑자기 분위기는 민경섭을 위로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성필은 현실적인 조언 몇 개를 던진 후 휴게실을 나갔다.
민경섭은 성필이 떠난 자리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과연 자신의 결혼은 무사히 안착할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
“……시맛타(아뿔싸)!”
성필의 마음을 알아내고 위로해야 했는데!
민경섭은 뒤늦게 성필을 쫓으려 했으나, 휴게실로 약속 상대가 들어오자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상대, 신아름이 진지한 태도로 민경섭의 앞에 앉았다.
“팀장님은 어떠세요?”
민경섭의 의뢰인은 신아름이었다.
신아름은 성필의 심정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신아름이 성필에게 ‘팀장님 괜찮아요?’라고 물어봤자, 성필은 자애롭게 미소 지으며 ‘응 괜찮아’라고 할 뿐일 테니.
성필은 멤버들에게 진심을 자주 숨긴다. 주로 멤버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만한 진심을 말이다.
같은 직장 동료인 민경섭이라면, 성필이 마음을 열 것 같아 그에게 부탁했다.
“형도 힘들어하는 거 같아. 자꾸 한숨 쉬고, 오늘도 자주 넋 놓고 있었거든.”
신아름이 입술을 꾹 물었다. 다물어진 그녀의 입가엔, 이 사태를 미연에 막지 못한 회한이 언뜻 보였다.
“처음부터, 허락해주면 안 됐는데…….”
후회된다.
화가 나기도 한다.
그야 미리 소식을 들었으면 성필의 출연을 반대했겠지만, 성필은 그걸 알아 방송 출연 사실을 끝까지 숨겼었다.
“우리 홍보 따위 안 해줘도 되는데…….”
“그, 아름아. 너도 아이돌이라 알겠지만, 사람들 욕하는 게 시간 조금만 지나면 금방 없어지잖아. 그리고…….”
“팀장님이 욕을 먹는단 거 자체가 문제잖아요! 팀장님이 왜 욕을 먹어야 하는데요! 그것도…….”
신아름이 씹어 뱉듯이 말했다.
“케이어스 그딴 년 때문에…….”
민경섭의 말마따나, 신아름은 아이돌이기에 대중의 속성을 꿰뚫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소녀연맹 멤버 중 가장 여론에 민감했으니.
사람들이 비난하는 거?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불길은 잦아들기 마련이다.
사람 욕하는 걸 스포츠처럼 즐기는 일부 악질만 제외하면, 대부분은 금방 사그라든다.
연예인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여론의 불길에 일희일비하면 안 된다. 그런 멘탈 자체가 연예인의 능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팀장님은 연예인도 아닌데, 이게 직업도 아니잖아요…….”
연예인의 힘은 불특정 다수의 관심에서 나온다.
부정적, 긍정적 관심 모두 연예인의 힘이다.
만인의 관심을 받는단 것 자체가 연예인의 본질이니, 연예인은 그 관심을 다루는 법을 익히고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성필은 연예인이 아니다.
“욕먹을 필요도, 먹어서도 안 돼요 우리 팀장님은…….”
지금 이 시각에도 성필을 욕하는 이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허파가 뒤집히는 기분이다.
성필은 행복해야 하는데. 하등 관계없는 놈들한테 욕먹을 필요도 이유도 없는데. 행복하게 해줘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세상이 성필을 욕한다는 부조리함.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
그게 신아름을 괴롭게 만들었다.
“아름아.”
민경섭이 그녀를 불렀다.
“방법은 세 개인 거 같아.”
“……무슨 방법이요?”
“네가 바라는 대로, 형이 괴로워하지 않을 방법. 너무 당연한 소리긴 하지만…….”
“말해줘요.”
민경섭은 하나씩 설명했다.
첫 번째.
“시간이 지나길 기다린다. 나도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챙겨보는데, 아마 다음 편에서 해결될 거 같아. 형이 어련히 잘 안 하겠어? 물론 하슬 씨가 어떻게 반응하셨을지 모르긴 하지만…….”
“그건 방법이 아니잖아요.”
두 번째.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거에 집중하는 거지. 왜, 굳이 연예인만이 아니라 사람들은 다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잖아? 근데 형은 힘들다고 여행 가거나 사치할 사람이 아니지. 그러니까 주변에서 힘을 줘야 할 거야. 뭐, 파티라도 열어준다거나? 형이 갖고 싶은 걸 사준다거나?”
“팀장님이 갖고 싶은 게 있으세요?”
성필이 가지고 싶은 거라고 해봐야 아이돌 관련 굿즈일 것이다.
신아름에게 그런 걸 말해봤자 도움이 안 될 테니, 민경섭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야 모르지.”
“음…….”
신아름은 두 번째 방법이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맞아, 팀장님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매 순간을 행복하게 해주면 되잖아.’
성필도 자주 신아름에게 그리해 주었었다.
신아름이 이런 일로 고통받으면 ‘신경 쓰지 마’라고 말하기보다, 신아름이 좋아할 만한 걸 선물해주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었다.
‘나도 팀장님이 하던 것처럼…….’
정말, 다른 곳으로 감히 생각이 뻗쳐나갈 수 없도록 몸과 마음 모두 극도의 열락(悅樂)으로 채워주는 것이다.
문제는, 성필이 그토록 행복해할 걸 신아름 자신이 줄 수 있는가?
‘다키스트 퍼포먼스라도 익혀서 보여주면…… 아냐, 그 정도론 안 돼.’
생각해보니, 신아름은 성필에게 받기만 했지 무언가를 준 적은 없는 듯하다.
그를 위해 최고의 아이돌을 목표로 하지만, 그건 지금 당장 주는 게 아니지 않은가.
‘내가 팀장님을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나……?’
함께 식사하고, 함께 기념일을 보내고, 함께 본가에서 명절을 지내고, 함께 여행가고, 그런 것들은 모두…….
‘나만 좋은 건가? 아니, 팀장님이 나만큼 행복하셨을까……?’
만약 신아름이 성필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신아름은 성필에게 그런 선물을 받는 순간 모든 고민과 고통이 녹아내렸을 것이다.
그런데 성필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신아름은 깨달음이라도 좋을 것과 마주했다.
‘나한테, 팀장님을 즉각적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만한 게 있나……?’
비대칭.
둘 사이의 관계는 동등하지 않다.
신아름은 그 결론까지 도달했다.
왜냐하면, 신아름이 성필을 필요로 하는 것만큼 성필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실제로 성필은 석세스 엔터를 나간 1년간, 신아름 없이도 잘 살았지 않은가…….
“아름아?”
“어, 네?”
“갑자기 왜 그래.”
“아니, 아뇨…….”
신아름은 표정에 서린 동요를 지웠다.
지금은 다른 고민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다.
“마지막은요?”
“형이 이 상황에 이른 원인.”
사쿠라바 에리카.
“그쪽으로 어떻게 해보는 거지.”
에리카와 접촉하여 부탁한다.
아니, 요구한다.
성필이 저렇게 된 책임을 지라고.
상식적으로 에리카가, KS 엔터가 그런 행위를 용납해줄 리가 없지만…….
“혹시나 저쪽에서 반응해줄지도…….”
“맞아요.”
신아름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어, 그러면 되겠네요. 그년이 어떻게 나오든, 그냥 우리가 알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어?”
방향이 이상하게 흐른다.
“팀장님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걍 사람들한테 알리면 되잖아요! 맞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럴 때 써먹으라고 유명해진 거잖아요!”
정보: 아니다.
“아름아 그게 무슨…….”
민경섭은 아연하게 되물었다.
“KS 엔터에 양해도 안 구하고…… 에리카가 잠적했던 걸 대중에 풀겠…….”
“양해를 왜 구해요?”
구할 필요 없다.
아니, 저쪽도 양심이 있으면 뭐라고 하면 안 되지. 성필을 천하의 둘도 없는 쓰레기(신아름의 생각)로 만들어놓고서, 자기네 아티스트의 이미지는 중요하다고 외칠 순 없는 노릇이지.
당연히 그래선 안 되지…….
“지금까지 입 꾹 다물고 있는 거 보니까 에리카 그년 인성 알 만해요. 어제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는데도(아님) 아직도 나한테 연락이 없거든요? 보니까 우리가 안 나서면…….”
신아름이 원수의 이름을 외치듯, 발음의 가장 작은 단위까지 잘근잘근 씹어가며 말했다.
“팀장님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단 거야. 그딴 년한테 무슨 양해요?”
신아름은 마음을 굳혔다.
성필을 지킬 것이다. 그게 성필을 향한 보은이다.
* * *
“아, 네. 박 이사님.”
에리카는 폰을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곤 성필과 통화했다.
“네에, 그, 오늘 안 오시는 거죠? 네, 네에. 리카도 일 있어서 안 온다고 하더라구요. 네…… 알겠습니다, 일이요……. 아뇨, 괜찮아요! 원래 혼자 해야 하는 작업인데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통화가 끝났다.
에리카는 한숨을 쉬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앞엔 케이크를 사 온 김민주가 있었다.
“들어보니까, 사 올 필요도 없었네.”
“……응.”
김민주는 케이크를 입구 옆 신발장 위에 아무렇게나 두었다.
“애초에 위로한답시고 케이크를 사는 게 이상하지. 안 그러냐? 케이크는 보통 축하할 때 쓰잖아. ‘박 이사님 이미지 박살 축하해요, 이젠 방송 말고 제 믹스테입에 더 신경 써줄 수 있겠네요’도 아니고.”
“박 이사님이 그렇게 생각하실 리 없잖아.”
아닌가, 혹시 모르지…….
에리카는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바닥에 털썩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 박 이사님이랑 리카가 갑자기 안 온 적은 없었지.’
둘 다 따로 개근상을 주고 싶을 만큼 성실하게 에리카를 도와주러 왔었다. 하지만 오늘은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일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짐작 가는 일이 있었다.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때문이야…….’
에리카는 여태껏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을 보기만 했지 시청자 반응을 살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최신화의 전개는 너무나 당황스러워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을 다루는 가장 큰 커뮤니티에선 성필을 욕하기 바빴다.
‘그걸 보셨으면 멀쩡할 리 없지…….’
갑자기 길 가던 사람이 욕해도 기분이 나쁠 텐데, 수백 수천 명에게 욕을 얻어먹고 있으니 어떻게 제정신일까.
‘나 때문이야.’
성필이 김하슬을 바람맞힌 이유는 명백히 에리카 때문이다.
‘나 때문…….’
성필이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게다가 도의적으로든 상식적으로든, 그 상황에선 에리카를 찾기보다 김하슬과 데이트하는 게 맞았다.
그렇지 않은가.
에리카가 뭐라고 방송도 내팽개치고 찾으러 간단 말인가.
역으로 생각하면, 성필은 자신의 평판이 어찌 되든 에리카가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한 거겠지…….
‘날 왜 그렇게까지, 내가 뭐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이건 정말 사랑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사랑하니까요.’
바닷가에서 들었던 성필의 고백이 떠오른다.
에리카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앞을 직시했다.
‘사랑한다고 하셨지.’
에리카는 성필이 아무렇지 않게 사랑을 입에 담기에, 그에게 사랑이란 단어의 무게가 가벼울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사랑이란 어느 사람에게든 무거운 것이다.
중요한 때가 아니라면 감히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단어다. 부모에게조차 부끄러워서 꺼내기 어려운 단어인데…….
‘내게 해주신 그 말이 가벼울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됐어.’
성필은 자신을 사랑한다.
앞으로 그리 생각하련다.
그럼, 성필에겐 그에 합당한 대가를 돌려줘야겠지.
‘그래, 이건 계약이야.’
과거 프랑스의 밤하늘 아래에서 맺었던 계약.
그 연장선이다.
에리카는 그런 식으로 자기최면을 몇 번이나 걸었다. 그리고 충분한 용기를 얻었다고 생각한 시점, 김민주에게 선언했다.
“가만 있을 순 없어.”
“가만 안 있으면 뭐 어쩌게?”
김민주가 은근한 불안을 담아 물었다.
“네가 도망갔단 거 알리기라도 하게?”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