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485화 (485/760)

485화

조아라의 요구를 실행하기 위한 방안은 두 개다.

첫 번째, 가로 엔터가 즉각적으로 전문적인 퍼포먼스 디렉팅 팀을 구축하는 것.

두 번째, 지금까지와 같이 여러 안무팀에 발주를 하되 사령탑이 될 디렉터를 섭외하는 것.

성필은 이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 위해 백민정을 찾았다.

“와.”

성필은 ‘유 노 댄스 아카데미’ 앞에 서자마자 탄성을 흘렸다. 건물 외벽이 전체적으로 리모델링되어 있었다.

원래 ‘유 노 댄스 아카데미’는 빌딩의 한 층만 사용했지만, 이젠 세 개 층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장사가 잘되나 보네.’

이 또한 전생과 달라진 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케이어스 문제와는 달리 매우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성필은 학원 안으로 들어가 백민정을 찾았다. 그녀는 새로 꾸민 응접실에서 성필을 맞아주었다.

“이야, 너 신수가 훤하네!”

“오빠는 주름이 훤하네!”

성필은 악수한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백민정이 사방팔방 오두방정을 떨면서 ‘항복!’이라고 외쳐댔다.

“오빠 이거 봐. 우리 학원 홈페이지도 제대로 꾸몄어.”

백민정이 폰에 학원 홈페이지를 띄워 보여주었다. 메인 페이지에 조아라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유 노 댄스 아카데미는 제2의 조아라를 기다립니다]

“아라가 효녀야 효녀. 아라 덕분에 아이돌 되고 싶은 애들은 죄다 우리 학원에 몰리는 거 같아.”

“가르칠 역량은 돼? 원래 너희 학원 방송 댄스는 취미반 위주였잖아.”

“뭐, 입시반 꾸리긴 했었는데 전체적으론 오빠 말이 맞지.”

‘유 노 댄스 아카데미’는 스트리트 댄스에 강점을 둔 학원이었다.

아이돌 댄스, 흔히 방송 댄스라고 불리는 것도 가르치긴 했으나 취미반이 주력이었다. 학원이라기보다 댄스 스튜디오라고 불리는 게 더 정확할 정도였다.

조아라의 이름값으로 홍보해서 아이돌 지망생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지만, 학원에서 그들을 관리할 역량이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근데 원래 사업이란 건 공격적이어야 하잖아.”

“아하, 수준 미달의 수업을 우리 아라 이름값만 팔아서 이어가고 있단 뜻이구나?”

“아니거든?! 강사들도 여기저기서 많이 데려왔지.”

수강생들이 몰리면 당연히 강사들도 오고파 한다. 수강생의 수는 곧 강사의 임금으로 이어지니 말이다.

그 덕에 ‘유 노 댄스 아카데미’는 공격적인 사업 확장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학원을 잘 꾸려가고 있었다.

“맞다, 잠시만.”

백민정은 잠시 응접실을 나가더니 깔끔한 흰색 바탕의 상자를 들고 왔다. 사이즈를 보니 술이 들어 있을 것 같다.

“이거 사장님께 드리는 선물. 홍 사장님이 술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원래 직접 찾아뵈려고 했는데 오빠가 왔으니까 가져가.”

“이사를 심부름꾼으로 써?”

“사장님이 잘 안 봐주시잖아.”

가로 엔터는 소녀연맹을 위시하여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 이쯤 됐으니 가로 엔터의 사장인 홍규헌에겐 별의별 연락이 다 온다.

대부분 엔터 산업 쪽 사람들이었다. 홍규헌과 어떻게든 접촉하여 이익을 도모하려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한 사적인 인맥은 사업을 유지하고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단순히 비즈니스 이상의 친분으로 연결되어, 여러 방면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까.

흔히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높으신 분들이 주말에 골프 치러 다니면서 친목을 도모하는 이유이다.

“사장님은 그런 자리 싫어하시니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홍규헌은 공적인 자리가 아니면 웬만해선 업계 사람을 안 만나고자 했다.

사적인 친분이 주는 이익보다, 만약의 손실과 부정적 영향을 더 크게 보는 것이다.

그러한 방향성은 ‘유 노 댄스 아카데미’를 향해서도 그대로 발휘됐다.

“진짜 감사 인사만 드리려고 하는 건데. 사장님이 가로 엔터 연계 오디션 허락해주셔서 이렇게 컸잖아.”

“진짜 그게 효과가 커? 우리 회사 이름으로 모이는 연습생이 그렇게 많아?”

“우리 학원 보면 모르겠어? 암튼, 주기적으로 연계 오디션 열게 해줘서 고맙다고.”

“고맙긴. 우리도 제2의 조아라 찾으면 좋지.”

기획사 연계 오디션이란, 학원의 자체적인 평가에 기획사 관계자가 참여하는 것이다.

가로 엔터에선 매니지먼트팀의 민경섭과 신인개발팀의 신준성이 참석하고 있었다.

백민정의 이야기를 들으니, 성필도 언제 한 번 가보는 게 좋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오빠, 그래서 제2의 아라는 찾았어? 지금까지 두 명 데려갔잖아.”

“그 두 명? 그럭저럭 잘해.”

“잘 대해줘.”

“청탁하는 거야?”

“그냥 잘해주라구. 한때 우리 학원에 몸담았던 애들이니까.”

소소한 잡담을 끝내고, 성필이 본론을 꺼내었다.

“그런 사람이 있어?”

당연하다고 할까, 성필이 제시한 디렉터의 조건을 들은 백민정이 곧바로 의문을 표했다.

온갖 무용 지식과 테크닉에 발을 걸치고 있어서, 여러 명의 안무가 사이에서도 최적의 답안을 도출할 수 있는 사람.

“장르 하나만 파기도 힘든데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그렇지. 현실적으로 보자면, 디렉터는 일단 아이돌 댄스에 능통해야 해.”

“어반 댄스?”

“응.”

조아라가 목표로 하는 건 다양한 안무 테크닉과 구성을 받아들여 혁신적인 퍼포먼스를 꾸리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엔 아이돌이 무대에 오르기 위한 안무일 것이다. 그러니 이번 프로젝트의 디렉터는 무엇보다도 아이돌에 박식해야만 한다.

“아라가 제시한 인재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최대한 양보해서 디렉터는 방송 안무에 정통한 사람이어야 해.”

“거기에 다른 장르 이해도도 높고?”

“응.”

“음, 가장 빠른 방법은…….”

백민정은 몇 초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하더니 어벙하게 웃었다.

“그냥 가로 엔터가 그런 사람을 만드는 거 아니야? 찾기보다 만드는 게 훨씬 빠르겠다.”

전문적인 퍼포먼스 디렉팅 팀 구성. 그리고 그 디렉터를 섭외하여, 그가 성장할 때까지 가로 엔터가 투자한다.

인적 자원을 직접 개발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라고 백민정은 추천했다. 그만큼 조아라가 바라는 요구를 들어줄 만한 디렉터는 찾기 힘들다.

“그렇게 하려면 연 단위의 투자가 필요할 거야. 그리고 사람을 개발한다는 건 웬만한 확신이 없고선 못해. 거의 연습생 수준의 제약을 걸어야 할 거야. 사람 한 명한테 시간이랑 돈을 쏟는 건데, 이직이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농담이었는데 왤캐 진지함?”

“…….”

“아라가 직접 하는 건 어때? 아라가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2’ 프로듀서잖아.”

조아라 또한 춤에 일가견이 있으니, 그녀가 디렉팅에 참여하는 것도 고려할 만한 선택지다.

하지만 성필은 고개를 저었다.

“춤(Dance)과 안무(Dance―making)는 다른 거야. 아라는 춤을 잘 추지만, 그게 안무 역량까지 증명하는 건 아니야.”

댄스 플레이어로서의 활동을 본업으로 삼았던 전생의 조아라라면 몰라도, 현재의 조아라는 아이돌로 성장해왔다.

아이돌치곤 안무 능력이 있는 편이겠으나, 이번 프로젝트는 그녀가 감당하기엔 허들이 높다.

“혹시…….”

성필은 계속 숨기고 있던 본심을 살짝 드러냈다.

“서학준 선생님은 지금 어떠실까?”

‘아라베스크’의 안무를 맡았던 백민정의 스승 중 하나, 서학준.

그는 무용수로서 전공이 따로 있지만, 아이돌 안무 제작도 병행하고 있다. 본인의 전공과 방송 안무 둘에 능통한 사람이다.

‘서학준 선생님 정도의 연륜과 경험이라면, 이 프로젝트를 맡길 수 있을지도 몰라.’

성필의 질문에 백민정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많이 바쁘셔. 대회 준비하시거든. 어쩌면 인생 마지막 대회일 수도 있어. 방해하면 안 돼.”

백민정은 매우 단호한 어투여서, 성필도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릭 칼먼은 어때? ‘애플 크러쉬’ 시안 맡아줬었잖아. 디렉터로 어찌어찌 섭외할 수 있지 않을까?”

릭 칼먼은 댄싱 스타 시즌 7 우승자이자, 조아라의 우상 중 하나였다.

조아라가 미국으로 갔을 때 ‘포스트 무브먼트 아카데미’에서 직접 보기도 했었다.

“외국인이잖아. 지구 반대편에 있어.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안 될 가능성이 너무 높아.”

“아니면 아예 요구 사항을 딱 박아두고 시안 발주해봐. ‘포스트 무브먼트 아카데미’엔 여러 장르의 마스터들이 있어서 가능할 거 같은데?”

“아예 결과물만 받자?”

“응.”

“그럼 지금까지랑 다를 바가 없지 않나…….”

“돈도 많이 들겠고. 결과물이 제대로 나올지도 모르겠고.”

대화가 마무리에 이를 시점이 오자, 백민정 또한 가로 엔터의 A&R팀이 한 고민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돈은 돈대로 쓰고.

결과물이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겠고.

그런데도…….

“꼭 해야 할까?”

그에 성필이 단호히 답했다.

“해야지. 아라가 하고 싶어 하니까. 난 아라가 본 길이 옳다고 믿어.”

“그걸 받쳐줄 수 있다면 그야 옳겠지.”

백민정은 잠시 성필의 눈치를 보았다.

“오빠, KS 엔터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안 돼?”

“뭘?”

“인하우스 시스템 갖춰지기 전에 다키스트나 EMC, 다른 새로운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그룹들 안무 어떻게 디렉팅했는지.”

“그걸 알려주겠냐…….”

KS 엔터도 맨몸으로 들이박아 가면서 얻어냈을 노하우일 텐데, 가르쳐줄 리가 없다.

맨입으로 ‘어떻게 하셨어요?’라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도둑놈 심보에다가, KS 엔터를 향한 모욕이다.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을 만신창이가 되어가면서까지 개척한 선구자에게, 뒤에 선 이들이 ‘이 개XX야 왜 가는 길 안 알려줘 비겁한 놈아!’라고 하면 선구자는 얼마나 어이없겠는가.

꼬우면 직접 와보라고 하겠지.

“뭐…….”

성필은 시간을 확인하고 슬슬 대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우리도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깨달아야지. 애초에 쉬운 길만 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오, 멋진데?”

“헤헤, 그래?”

“좀 폼 잡으려면 끝까지 잡아. ‘헤헤, 그래?’가 뭐야.”

“…….”

“오빠 근데 이제 퇴근이지? 오랜만에 봤는데 밥이라도 먹자.”

“아냐. 나 바로 갈 데 있어.”

“빛나솔?”

“어, 음, 응.”

“열심히 해. 아, 스포 좀 해주면 안 돼? 주마다 기다리는 거 너무 감질나.”

“안 돼.”

성필은 학원을 나와 차에 탔다. 그리고 내비게이션에 항상 가던 위치를 찍었다.

백민정에게 했던 말과 달리,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의 합숙소가 아니었다.

‘가야지.’

에리카에게로.

오늘로서 마지막인 믹스테입 회의를 향하여.

* * *

“마스터링은 박 이사님이 소개해주신 구태범 엔지니어님께 맡겼어요.”

에리카는 손에 배인 땀을 식히려 손을 털었다. 말만 했을 뿐인데도 긴장됐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시원하면서도 섭섭하네요. 정말 마스터링만 끝나면, 모든 게 끝.”

“에리쨩 고생 많았어!”

“고마워 리카.”

“이젠 시간 뺏길 일도 없겠네!”

“누가 오래?”

“협력 프로듀서라며?!”

김민주의 연습실 구석.

작은 원형 테이블엔 성필, 리카, 에리카가 둘러앉아 있었다. 그곳에 김민주가 음료와 저칼로리 과자 한 봉지를 가져와 앉았다.

“민주도 작업실 빌려줘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너 아니었으면 이렇게 유기적으로 작업이 진행되진 못했을 거야.”

“협박했으면서 말은 잘한다.”

“에리쨩 협박했어?”

“아니야. 협박이 아니라 부탁이야.”

“야쿠자!”

“아니라니까. 박 이사님, 아니에요. 오해하시면 안 돼요.”

성필은 애매하게 미소만 지었다. 그에 세 명의 아이돌이 그를 이상하단 듯 보았다.

에리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박 이사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요. 일이 있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상. 하슬 님이랑 잘 안 되죠?”

김민주는 요새 성필과 꽤 말을 트게 되어, 이런 가벼운 농담 정도는 던질 수 있게 됐다.

“민주야, 그런 말은 실례야. 남의 연애사 함부로 물어보는 거 아니야.”

“진지충.”

성필의 표정은 여전히 애매했다.

오늘로 이 정다운 풍경이 끝이라고 생각하니 슬픈, 그런 건 아니었다.

성필의 머릿속은 한 가지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케이어스의 향후 행보였다.

“근데 이대로만 가면 박 이사님 하슬 님 사귈 거 같던데?”

“민주야, 그러니까 그런 말은…….”

“박 이사님은 최종 선택 때 아무도 안 골라!”

“응?”

“어?”

성필은 5년 후의 미래를 보았었다.

미래의 그는 진득한 후회를 품고, 케이어스에 더 깊이 더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했노라고 후회했었다.

그래서 성필은 도망간 에리카를 쫓으러 가기까지 했었다.

“리카, 그게 무슨 말이야? 박 이사님이 아무도 선택 안 한다니?”

“박 이사님은 우리와의 맹약에 걸려 있어!”

에리카의 믹스테입을 돕고, 방송까지 팽개치며 에리카를 보러 간 것.

모두 전생의 케이어스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박 이사님은 우리가 해체할 때까지 연애 안 하셔!”

“뭐야. 가로 엔터는 이사들도 연애 금지 걸려 있기라도 해?”

“민주는 모르겠지! 박 이사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진심인지! 아무튼 그러니까 박 이사님은 연애 안 하셔! 방송에 나간 것도 소녀연맹을 홍보하기 위해서야!”

“그거 기만 아니야? 연애 프로그램에 연애 안 할 마음가짐으로 나가는 건 뭐 하자는 건데?”

과연 성필은 올바른 미래에 도달했는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선 최소 케이어스의 앨범이 두 개쯤 발매돼야 할 것이다.

약 1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성필이 할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다. 하지만 성필은 불안했다. 과거의 그는 ‘고작 6개월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고 후회했었으니까.

“당연히 제작진분들이랑 말을 맞췄지!”

“그럼 출연자들도 알아?”

“에, 그건 모르겠는데……. 제작진이 따로 출연자분들한테 고지해주지 않았을까?”

“근데 연애 금지라니. 너희들, 소녀연맹 때문이지? 박 이사님은 전생에 뭔 죄를 지었기에 그러냐? 진짜 불쌍하다.”

“아, 왠지 알 거 같아.”

고작 6개월로는 모든 후회를 막는 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성필은 지금 미래를 보지 않는 것에 안심할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미래의 그가 후회했던 이유를 되풀이할 순 없다. 더 과감하게 케이어스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려 노력해야만 한다.

어떻게?

정호환에게 연락하여, 그의 프로듀싱 철학이 바뀌었는지 확인하는 게 가장 빠르겠지.

“축구 감독들은 중요한 경기 전에 선수들한테 성욕 해소를 금지하기도 한다고 들었어.”

“에엑?! 그거 인권 유린이잖아!”

“성욕은 투쟁심과 관련이 있대. 성욕이 해소된 상태에선 투쟁심을 부추기는 호르몬이 잘 분비되지 않는다고 들었어. 이미 몸이 만족했으니, 굳이 경쟁의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는 거지.”

“에에, 히도이(너무해)…….”

“그거 나도 육상할 때 선배들한테 들었어.”

“민주도 경기 나가기 전에 그랬어?!”

“난…… 됐다, 이런 얘기 그만하자.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성필은 불안했다.

에리카의 믹스테입을 도왔던 몇 개월, 자신의 평판을 희생하고 에리카를 붙잡았던 순간, 자신이 쏟아왔던 그 모든 시간이 의미 없던 건 아닐까.

어쩌면 에리카의 믹스테입만 허락받았을 뿐, 케이어스의 방향성 자체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게 아닐까.

그럼 자신이 했던 모든 일엔 어떤 의미가 있지? 정말 미래란 바꿀 수 없을까? 그만큼이나 미래가 뒤틀린 걸까?

그렇다면 전생의 케이어스는 결국…….

“이사님!”

쿵!

리카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려치자 성필은 화들짝 놀라며 거의 넘어질 뻔했다.

“어, 응?”

“에리쨩 말 들었나요!”

“아, 뭐가?”

“파티 연대요!”

“파티?”

“하이(네)!”

리카는 에리카 쪽을 가리켰다.

에리카가 뾰로통해져선 성필을 흘겼다. 성필이 ‘아’ 소리를 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죄송해요.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진짜 죄송해요.”

“……파티를 열 거예요. 믹스테입 쫑파티요. 다들 고생했잖아요. 유종의 미를 거두자는 의미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거예요.”

“술은 좀…….”

“논 알코올로 준비할 거예요. 애초에 민주는 술은 안 마시거든요.”

“과자 파티 같은 거야?”

김민주가 묻자 두 일본인이 물음표를 띄웠다.

“과자 파티 몰라? 우리 어릴 때 학원 같은 데 가면 한 달에 한 번씩 했잖아. 과자 가져와서 다 같이 나눠 먹고, 몰라?”

“한국엔 그런 문화가 있구나.”

“아타시(나)는 학원 싫어했어!”

“Whatever…….”

김민주는 관심 없단 듯 턱을 괴었다.

“그럼 파티도 여기서? 참나, 여기 원래 나 혼자 연습하던 데였는데. 이젠 아주 사교의 장 다 됐네.”

“고마워 민주야, 사랑해.”

“민주 다이스키(너무 좋아)!”

“아 떨어져.”

“박 이사님도 오실 거죠?”

에리카의 물음에 성필은 동의를 표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에리카 씨, 요즘 회사에서 달라진 거 없나요?”

“달라진 거요? 어떤 거요?”

“뭔가, 창작을 독려한다던가?”

“글쎄요. 제 믹스테입 관련해서도 말은 잘 안 나와요. 저 혼자 하는 거니까요.”

성필은 심장이 탁해지는 기분이었다. 진득한 타르가 심장의 표면으로 뚝뚝 떨어져, 천천히 안쪽까지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렇게까지 발악했는데.

결국 케이어스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

“야, 그거 있잖아. 워크샵인가 그거.”

김민주가 에리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에리카가 ‘아’ 소리를 냈다.

“맞다. 저희 주에 한 번씩 모여서 아이디어를 내라거나, 그런 거 해요.”

“아이디어요?”

성필은 흥분해서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앨범이나 곡 관련해서요?”

“네. 자유롭게 대화하는 장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게 생겼어요. 박 이사님이 말씀하신 창작을 독려하는 것에 포함되겠네요.”

성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미래는 바뀌었다. 마침내 정호환은 케이어스의 개성을 독려하고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성필은 자칫 방심하면 눈물마저 나올 것 같았다.

“그런가요. 정호환 이사님이 그렇게까지…….”

자신이 쏟았던 모든 노력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간 에리카와 함께 해왔던 세월은 의미 없는 게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히 뒤틀린 미래를 바로 잡았…….

“아뇨, 정호환 이사님이 아니라.”

에리카가 말했다.

“다른 분들이 진행해주세요.”

“……네?”

* * *

여섯 명이 둘러앉을 수 있을 법한 크기의 롱 테이블. 그곳에 케이어스 멤버들이 두 명씩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KS 엔터의 소규모 팀들이 사용하는 회의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케이어스 멤버들의 시선이 모인 벽면의 화이트보드. 그 앞엔 수석 프로듀서 강동현과 매니지먼트 1팀장이 서 있었다.

강동현은 수줍게 미소 짓곤 재차 이야기했다.

“얘들아, 알겠지? 다, 다 필요한 일이니까 너무 귀찮아하진 말아줘.”

그에 1팀장은 한숨을 푹 내쉬곤 강동현을 살짝 옆으로 밀어냈다.

“회사의 목표는 명확해. 너희들에게 성장 서사를 부여하는 거야. 어떤 성장? 아티스트로서의 성장. 너희들의 요구를 관철하고, 그 요구가 앨범과 팀 컬러에 기여한 스토리를 만들어낼 거야. 오케이? 너희의 이미지는 기획형 아이돌에서 자체 제작형 아이돌로 나아간다. 다들 이해했지?”

케이어스 멤버들이 작게 ‘네에’라고 답했다.

1팀장이 화이트보드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자, 주마다 1시간씩 이런 시간을 가질 거야. 오늘은 첫날이니 가볍게 해보자. 아이디어 내봐. 터무니없어도 돼.”

정적.

침묵.

고요.

회의실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이 장소에서 가장 큰 데시벨을 가진 소리였다.

자칫하면 옆 회의실의 목소리도 들릴 법했다.

수석 프로듀서 강동현이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진소유가 손을 들었다. 1팀장이 반색하면서 마카의 끝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그래, 소유.”

“가사 떠올랐어요.”

“오오, 가사! 작사가 제일 입문하기 쉽지.”

“암 쏘 핫. 난 너무 예뻐요. 암 쏘 쿨. 난 너무 멋져. 암 쏘 쏘 쏘 핫 핫.”

“표절이잖아 임마!”

진소유가 손을 내렸다.

그러자 다시 침묵과 고요와 정적이 찾아왔다.

수석 프로듀서 강동현이 재차 울상을 짓자 이번엔 진저가 손을 들었다.

1팀장이 억지로 미소를 만들곤 그녀를 가리켰다.

“그래, 우리 재간둥이 진저.”

“가사는 광둥어여도 됨미까?”

“어?”

강동현이 반응했다.

“진저는 관화 쓰지 않았었어? 광둥어로 작곡하게?”

“으엥? 강 PD님 관화랑 광둥어 구별하심미까?! 그런데 왜 외롭고 쓸쓸한 타지 생활을 보내던 연습생 시절의 저에게 말 한마디 안 걸어주신 검미까! 제가 불쌍하지도 않았슴미까!”

“아, 아니, 수석 프로듀서가 무슨 용무로 연습생한테 말을 걸어……. 사람들이 다 저의가 있는 줄 알고 오해하겠지…….”

“그렇슴미까.”

“응.”

“알겠슴미다.”

“응.”

“…….”

“…….”

“…….”

“그게 끝?”

“강 PD님 광둥어랑 관화 어떻게 구별할 줄 아심미까?”

“내 부전공이 중어중문이었어.”

갑자기 강동현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대학 생활을 회상하듯이.

“KS 엔터 취업설명회 갔는데, 중국 시장을 노리겠다고 했거든. 중국 시장을 먹으면 아시아 1위의 엔터 기업이 되는 건 시간문제라면서, 중국의 중요성을 엄청 강조했었어. 중국어가 가능하면 가산점이 붙겠다 싶었지.”

“그래서 중국어를 구별하실 줄 아셨던 검미까.”

“응.”

갑자기 강동현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런데 귀신같이 한한령 터지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일어일문 선택하는 건데…….”

뭐, 누가 미래를 알 수 있겠는가.

다들 동정하는 눈빛으로 강동현을 보았다.

“아무튼 광둥어로 작곡해도 됨미까?”

“당연히 안 되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자꾸만 시답잖은 소리를 해대는 강동현 대신 1팀장이 일갈을 날렸다.

그에 진저가 작게 중얼거렸다.

“터무니없는 의견이어도 된다고 했을 땐 언제고, 대체 어쩌란 건지. 그럼 의견 없슴미다.”

“너 궁시렁거리는 게 좀 길다?”

다시 침묵, 고요, 정적.

그리고 진소유가 손을 들었다.

“암 쏘 핫. 난 너무 예뻐요.”

1팀장이 이마를 탁 쳤다.

그렇게, 성필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케이어스 멤버들에게 본인들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로써 케이어스의 앞날은 전생과 비슷한 형태로 나아갈 것이다.

성필의 노력과 고생은 쓸모없지 않았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이 성필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얘들을 어쩌면 좋지?’

이번 생에선, 그녀들의 개성과 창조성을 살리는 건 정호환이 아니었다.

‘진짜 돌아버리겠다.’

케이어스의 성장 서사 확립이란 안건을 내었던,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와 1팀장이 이 일을 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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