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화
웨벡스에서 소녀연맹에게 제공해준 숙소는 이전에 지내던 곳보다 한층 더 좋았다.
일단 침실이 세 개였다.
덕분에 한 명의 멤버는 독실(獨室)을 쓸 수 있게 됐다. 그 영광스러운 방의 주인은 조아라가 됐다.
“아라쨩, 정말 안 외로워?”
책상에 노트북을 세팅하던 조아라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리카가 다리 사이에 베개를 끼운 채 고혹적인 자세로 누워 있었다.
“하나도 안 외로워.”
“아타시(나)는 아라쨩이 그리운걸?”
“어쩌라고.”
“히도이(너무해)!”
“하양 언니랑 어떻게 잘해봐.”
“언니는 말랑하지 않은걸!”
조아라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장하양은 말랑하지 않다.
조아라는 최근 무용에 관한 칼럼을 찾아보았었는데, 그곳에서 어느 유명 무용수를 ‘강철 나비’라고 표현했었다.
한없이 가녀리게만 보이는 무용수의 몸이 실은 강철처럼 단단하단 뜻이다.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겉보기와 달리 강철로 이루어져 있다.
‘하양 언니 정도면 강철 무당벌레는 되려나.’
조아라는 잠시 무당벌레의 어감을 생각해보았다. 사랑스러운 언니에게 붙이기엔 ‘벌레’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뭐, 나비처럼 고아한 뉘앙스는 아니지만 무당벌레는 귀여우니까 괜찮겠지.
‘의외로 어울리네.’
조아라는 어릴 적 놀이터에서 무당벌레를 주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무당벌레는 발 디딘 곳의 가장 높은 위치에서 날아가려는 습성이 있다. 무당벌레를 막대기에 올려서 막대기의 끝 위아래를 바꾸면 계속해서 바뀐 끝으로 올라간다.
그냥 중간에서 적당히 날아가면 될 것을.
그 모습이 장하양과 비슷했다.
‘계속해서 위로 향하려는 게.’
조아라는 자신의 센스에 만족하여 미소를 머금었다.
“아라쨩, 근데 갑자기 노트북은 왜 꺼내? 각 잡고 커뮤니티랑 SNS 탐방 시작하는 거야?”
“그거 프레임이거든? 나 그렇게 인터넷 많이 안 해. 춤출 시간도 없는데 뭔. 지음 오빠랑 화상 회의하려고 꺼냈어.”
가로 엔터의 뮤직 프로듀서 정지음은 ‘우리들의 프로듀싱’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곡을 선별하거나 직접 만드는 것이다.
조아라는 백설하와 마찬가지로 정지음과 지속적으로 교류하여, 타이틀에 걸맞은 노래를 찾으려 노력했다.
“지음 오빠 대단하지 않아?”
“대단하지.”
일본에 컴백하고 나서 새삼 정지음의 능력을 체감하게 되었다.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우파루파를 연호하는 팬들을 보곤 얼마나 당황했던지.
심지어 일본에서 우파루파가 사회적 현상까지 일으키고 있다지 않은가.
‘내가 진짜 진짜 밀고 싶은 곡이 있거든요? 설하야 너도 들으면 깜짝 놀랄 거다 진짜!’
정지음은 그렇게까지 ‘우파루파’에 확신이 있었으며.
‘설하야, 이게 진짜 대중음악이야!’
성필이 진짜 대중음악이라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곡.
조아라는 춤과 컨셉이 부끄러워서 뮤비 촬영 내내 얼굴이 붉어져 있었지만, 아무튼.
우파루파는 한국 땅을 벗어나서 제 진가를 드러내 버렸다. 덕분에 백설하는 행사나 방송에 출연해서 항상 ‘우파루파!’라고 외쳐야만 했다.
뮤직 프로듀서 정지음,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건가. 그야말로 음악계의 신산귀모(神算鬼謀, 귀신 같은 계산과 책략)였다.
[아라야, 들려?]
“두둥, 음악계의 신산귀모 치논(知音)쨩 등장!”
[네, 편곡의 천재 치논쨩입니다. 리카도 있었네?]
“하이(네)! 아라쨩이 외롭대서 방에 같이 있었어요! 근데 웨벡스에 실제로 치논이란 아티스트분이 계시니까 그 이름은 쓰지 말아주세요.”
[네가 먼저 썼잖아!]
“오빠 근데 왤케 어두워요.”
기계치인 조아라는 자신의 카메라가 문제인가 싶어서 엄지로 카메라를 닦았다. 상대가 안 보이는 게 본인의 카메라 문제일 리 없는데 말이다.
뒤에서 지켜보던 리카는 ‘아라쨩 진짜 바보 같다’라고 생각했다.
‘바보 같아서 귀여워!’
[몰라. 시차 때문인가?]
‘지음 오빠도 바보였어!’
음악 지능이 높은 정지음.
안타깝게도 다른 지능은 낮은 듯했다.
[거기는 아직 밝아?]
“아뇨, 오빠가 있는 방 전체적으로 어둡다고요. 뭐 설정 잘못 건드렸어요? 오빠 뭔 연기가 움직이는 거처럼 보여요.”
[아, 맞네. 어둡다. 여기 이수연 작사가님네…….]
“에엑?!”
이수연 작사가가 남몰래 정지음을 좋아하고 있단 건 매우 유명한 사실이었다.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째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이수연 작사가님네라구요?! 주변이 어두운 건 마사카(설마)!”
[작사가님네 작업실이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쌤이 작사 수업받으러 가는 거기요?”
[응.]
“오빠가 왜 거기 계시나요!”
[그냥, 작업실에서만 작업하면 매너리즘에 빠지니까…….]
“라는 핑계를 대고 작사가님을 보러 가신 거군요!”
[시간 괜찮으면 작업실에 놀러 오라고 하셔서 왔어.]
이 인간은 예상에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군.
리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정지음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하는 거 없이 시간만 보내니까 눈치 보여. 억지로 남의 집 들어와 있는 기분이야. 뭔가, 갑자기 다른 작사가분들도 다 나가시고. 어색해…….]
“음, 아주 좋은 분위기네요! 잘해보세요!”
[리카, 자꾸 그런 말 하지 마. 작사가님한테 실례잖아. 애초에 그런 분위기도 아닌데.]
“…….”
“…….”
[리카? 아라야?]
리카와 조아라는 정지음의 화면으로 보았다. 그의 뒤에 서 있는 희끄무레한 형체를 말이다.
그 흰 인형(人形)은 두 개의 커피잔이 놓인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정지음이 한 말을 듣곤 귀신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뭐야. 멈췄나? 하 씨, 그냥 이 프로그램 프리미엄 버전 지를까? 한 달에 만 원 조금 넘던데.]
“……그냥 회의 시작해요.”
[안 멈췄어?]
“네. 걍 회의해요 빨리.”
뮤직 프로듀서와 메인 프로듀서의 회의는 대략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정지음은 A&R팀이 선별하여 올린 음원 중 조아라의 의도와 일치하는 것을 그녀에게 보낸다.
조아라는 그것을 듣고 정지음과 협의를 나누어, 타이틀곡의 방향을 더욱 명확하게 잡는다.
이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해야 한다.
이미 몇 번이나 조아라와 회의하며 느낀 것이지만, 정지음은 다시금 이야기가 잘 맞지 않는단 느낌을 받았다.
‘설하 때랑은 완전 달라.’
백설하는 오랫동안 노래를 공부했다. 그냥 노래만 공부한 것이 아니다.
뮤지션 중엔 악보조차 읽지 못하는 사람이 꽤 많다. 아이돌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이들이 노래를 습득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한데, 그냥 가이드 보컬을 듣고 대략적인 음정과 멜로디를 파악하는 것이다.
보통의 뮤지션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설하는 거기에서 더 나아갔어.’
일단 피아노를 칠 수 있는 데다, 기타 연주까지 가능하다. 거기에 음악적 지식까지 꾸준히 습득해왔다.
그렇기에 백설하는 화음, 리듬, 모드, 멜로디, 스케일 등의 지식에 전반적으로 박학하다.
그래서 그녀와 곡 관련 회의를 할 때는 대화가 넓은 강처럼 부드럽게 흘렀었는데…….
‘아라는 아예 음악적 지식이 없다시피 하니까.’
얼마 전 정지음은 조아라와 회의를 하다 충격받은 적이 있는데, 조아라가 반음이란 개념을 정확히 모른단 것이었다.
조아라는 평소 보컬 디렉팅을 받으며 ‘반음 내려’란 말을 듣곤 하는데, 단순히 ‘음정을 내려’란 뜻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정지음은 그 소리를 듣곤 숨이 막혔었다.
정지음은 조아라에게 피아노 건반을 보여주면서 온음과 반음, 장3도와 단3도 등 음의 거리 개념을 수십 분에 걸쳐 설명해주어야만 했었다.
그렇게 조아라와의 회의는 백설하와 비교하면 거의 두세 배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란 말을 하면, ‘이렇게’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했으니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둘의 대화는 명확한 개념의 교환으로 이뤄지지 않고, 오로지 느낌과 부정확한 단어의 주고받기로 이뤄졌다.
그럼에도 정지음은 끈기를 가졌다.
‘성필이 형이 제시한 이상을 믿으니까.’
아티스트 본인의 상상력과 표현력이 곡에 반영될 때 더욱 가치 있단 사실을, 정지음은 이미 백설하와의 작업으로 깨달았었다.
게다가 조아라가 음악에 문외한이라고 그녀의 의견이 의미가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음악의 체계를 모르기에 그녀의 의견이 더욱 가치 있을 때도 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말대로, 모든 인간은 음악을 배웠든 배우지 않았든 음악적 지혜와 상상력을 품고 있으니까.
‘게다가 굳이 설하가 아니더라도, 난 멤버들의 창의력을 믿는 근거가 있어.’
‘롱 포’ 작업 당시, 조아라의 의견으로 탄생했었던 댄스 브레이크 파트. 그건 정지음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었다.
댄서와 작업하면 이런 결과물이 생기는구나, 그리 감탄하기까지 했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물었다.
[아라야, 혹시 작곡에 참여해볼 생각 없어?]
“내가 무슨 작곡요. 난 쌤이 아니잖아요.”
[‘롱 포’ 때는 네가 거들어줬었잖아.]
“그건 곡이 존재하니까 그랬죠. 머리에 춤이 그려지니까. 지금은 백지인데 도와주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정지음은 ‘끙’ 소리를 냈다.
만약 조아라가 작곡에 참여할 방법이 있다면, 이 회의가 획기적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
조아라 혼자 음악 없이 춤만 춰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알겠어. 오늘은 이쯤 하자.]
“네. 오빠 수고했어요.”
[쓰읍!]
“오빠도 아저씨 닮아가네. 수고가 싫으면 뭐, 고생했어요.”
[흐뭇.]
“에에, 오빠 방금 입으로 ‘흐뭇’이라고 말하신 건가요. 조금 기분 나쁠지두.”
[시무룩.]
시무룩한 정지음이 화상 회의를 종료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침대에 누워 있던 리카가 자신의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수고했어요 아나타(당신, 여보)! 어서 와서 마음과 몸을 치유받으세요!”
“나가.”
“손나(그런)!”
조아라가 ‘나가’라고 했지만, 리카는 으레 그렇듯 조아라가 농담한 거라고 생각해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자 조아라가 다시 말했다.
“나가.”
“에? 혼또니(정말)?”
“어. 나 춤 연습해야 해.”
“숙소에서까지?”
숙소에서밖에 할 수 없는 연습이다.
조아라는 굳이 그것까진 설명해주진 않았다.
“아라쨩 춤추는 거 보고 싶어!”
잠시 후.
“아라쨩 너무해! 아타시(나)한테 이런 대접을 해선 안 된다구! 세상은 나를 사랑해줘야 하는데에! 내 귀여움…… 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알아줘야 한단 말야아!”
내쫓긴 리카가 조아라의 방문에 매달려 문을 쿵쿵 두드렸다. 안에서 기대한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리카는 즉각적인 보상 반응을 얻기 위해 성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소녀연맹 일본 수익의 일등공신 리카입니다!”
[나 바빠.]
“왜 이렇게 세상이 쌀쌀할까요.”
[너도 어른이 됐단 증거지.]
“소난다(그렇구나).”
성필에게 하소연하는 리카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조아라는 침대 앞에 서 있었다.
조아라는 침대 위에 올라온 옷 한 벌을 바라보았다. 민시화가 연습할 때 입으라고 했던 레오타드 무용복이었다.
“스읍, 후우.”
심호흡을 하고, 조아라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아예 안쪽이 비칠 기미가 안 보이는 흰색 무용타이즈를 신고 무용복을 입었다. 그녀는 환복을 마치곤 전신거울 앞에 섰다.
“……하.”
거울 안엔 적나라하게 몸매를 드러낸 자신이 있었다. 아이돌로 활동하며 참 많은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적나라한 옷은 처음이다.
이런 옷은 처음이라서, 더 보기 힘들다.
“이게 뭐냐.”
조아라가 자신의 허리를 검지로 쓸었다.
“뭔 그라비아 화보도 아니고.”
혀를 찬 조아라는 노트북 화면에 영상을 하나 켰다. 손혜빈이 직접 촬영하여 보내준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 영상이었다.
화면 안의 손혜빈 또한 무용복을 입고 있었다.
조아라는 영상 속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하면 할수록 스트리트 댄스나 어반 댄스를 연습할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 뱃속을 채웠다.
“…….”
30분 정도 테크닉을 연마하던 조아라는 갑자기 멈춰 서서 노트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이튜브에서 관련 테크닉을 검색했다. 다른 무용수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와 다를 바 없는 기분이 찾아왔다.
다들 어떻게 몸이 저렇게 가늘까.
팔 한번 뻗고 다리 한번 움직이는데, 어떻게 저렇게 고운 선이 만들어질까.
“하아…….”
최근 정지음과의 회의도 그렇고, 무용 테크닉 연습도 그렇고.
“잘되는 게 하나도 없네.”
근본적인 의문이 조아라의 머릿속에서 솟아났다. 그녀가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마다 들었던 의문이었다.
‘이걸 왜 배워야 하지? 왜 해야 하지?’
어디다 쓰려고?
조아라는 그 의문이 지닌 답을 알았다.
그런 의문은.
‘그냥 하기 싫어서 떠오르는 생각.’
조아라는 노트북을 덮곤, 손혜빈의 움직임을 따라 하지 않고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움직임을 재현했다.
모범적인 시연을 보기만 하다간, 의지가 꺾일 것 같았다.
* * *
아이돌 관리 2실 사무실.
성필은 눈앞에 소녀연맹 매니지먼트를 맡은 직원들을 불러두고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다.
“자, 바로 예스 오어 노가 나와야 합니다.”
다섯 명의 직원들이 긴장하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일부러 침묵을 지키며 긴장을 끌어올리던 성필이 갑작스레 말했다.
“소녀연맹, 냉장고!”
“예, 예스!”
“예스!”
“노!”
“노!”
“예스!”
“파운데이션!”
“예스!”
“예스!”
“예스!”
“예스!”
“예스!”
“초콜릿 과자!”
“예스!”
“예스!”
“예스!”
“예스!”
“예스!”
이는 일종의 이미지 연관 게임이었다. 소녀연맹의 컨셉 이미지와 맞는 광고를 선별하기 위한 실험 중 하나다.
광고 상품과 소녀연맹을 즉각적으로 연관시켜, 그것을 어울린다고 판단하는지 아닌지 알아내는 것이다.
비록 표본이 다섯 명뿐이라 아쉽긴 하지만.
십수 번 단어를 더 꺼낸 성필은 결과를 기록하곤 그들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냈다.
‘의외네.’
가로 엔터의 직원들과는 꽤 결과가 달랐다.
한국에서 바라보는 소녀연맹과 일본에서 바라보는 소녀연맹은 확실히 다르다.
‘우파루파’ 때문인지, 일본에선 소녀연맹을 상큼하고 발랄하며 귀여운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애플 크러쉬를 주력으로 광고 안 해서 그런가?’
잠시 고민하던 성필은 곧 ‘아니’라는 답에 도달했다. 그냥 우파루파의 임팩트가 너무 강한 것이다.
‘아니, 롱 포, 아라베스크로 이어지는 서사를 소비한 사람들이라면 소녀연맹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까? 그런 사람들은 우파루파로 인한 이미지 체인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우파루파’만으로 소녀연맹의 팬이 급증하고, 일본 소녀연맹 팬덤이 그러한 색을 바라고 있다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껏 소녀연맹은 한국에서 발매한 앨범을 일본에 재발매하는 전략을 사용해왔다.
그녀들이 지닌 본연의 색이 국가란 장벽을 넘어서도 그대로 통할 것이라 보았으니까.
물론 앨범마다 타이틀곡을 바꾸는 등의 일은 해왔지만, 이젠 프로듀싱 전략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일본의 인민이들과 대중들이 소녀연맹을 귀여움의 대명사로 소비하길 바란다면,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효과적이라면…….’
이후로는 소녀연맹의 컨셉을 둘로 나누어야 할 수도 있다.
자본력 있는 여느 기획사가 그러하듯, 아예 일본에 맞춰진 일본 전용 앨범을 내는 것이다.
‘인트로 러브 앨범은 한국에서도 성공했지만, 일본에선 두 배는 더 많이 팔렸어.’
시장 규모의 차이로 보자면 당연한 일일 테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어느 나라에서 성공한 것을, 그 나라보다 경제력 높은 나라에 가져갔을 때 더 많이 팔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계속해서 소녀연맹의 색을 유지하느냐, 아니면 일본 시장에서의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 두 가지 컨셉을 만드느냐.’
케이팝은 현지화보다 글로벌성을 추구함으로써 성공한 사례가 많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처럼 한국에서 선보인 소녀연맹의 색을 그대로 일본에 이식하려 하다간…….
‘우파루파로 대변되는 귀여움을 기대하던 팬들이 어느 순간 실망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
다음, 혹은 다다음 소녀연맹의 타이틀이 무거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그럼 이왕 만들어둔 소비층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불러올 텐데…….
‘그렇다고 아예 일본 전용 앨범을 만드는 건…….’
성필이 소녀연맹의 근본으로 삼고자 한 진솔함과 진정성을 배반하는 일이 아닌가?
“후나비키 세이코예요! 아, 괜찮아요. 다들 앉아 있어요.”
아무리 일본에서의 상업적 성과가 좋다 하더라도, 그룹의 색 자체를 둘로 나누는 게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까.
대중들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건 물론 중요하지만, 그게 그룹의 근본을 뒤흔들면서까지 추구해야 하는 건가.
“에스타스가 있나 해서 왔어요. 없는 모양이네요. 음?”
만약 일본 시장에 본격적으로 맞추고자 한다면 웨벡스에 더 의존해야 할 텐데, 몸집이 작은 가로 엔터로선 좋은 선택은 아니다.
종국엔 완전히 웨벡스에게 주도권이 넘어갈 수도 있다.
“정말 우연하게도 파쿠 이사가 있었네요. 오랜만이에요.”
이건 단순히 성필 혼자, 혹은 가로 엔터 A&R팀끼리 회의해서 답이 나올 사안이 아닌 듯했다.
멤버들의 의견을 듣는 일도 필요하다.
“이봐요, 듣고 있어요?”
성필이 추구하는 게 진정성과 진솔함이라면, 그 진정성이란 소녀연맹 본인들에게서 나온다.
그녀들의 의견이 곧 알파이자 오메가다.
“파쿠 이사! 사람을 무시하는 데도 정도가 있……!”
“아저씨 여기 있어요?”
“히에에에에엑!”
조아라가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세이코가 비명을 내지르면서 구석으로 가 숨었다.
“어, 아라야. 스케줄 잘 끝냈어?”
“네. 이제 내 일본어 실력 물올랐어요. 거의 뭐 원어민 수준.”
“잘됐네.”
“이, 이봐요!”
성필과 조아라가 세이코 쪽을 보았다.
세이코는 가장 안쪽 직원의 책상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이 세이코가! 가후(歌侯) 세이코가 말을 걸 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일부러 무시할 정도로 잘못한 기억은 없……!”
“저 사람은 왜 있어요.”
“끄흐으윽…….”
조아라의 차가운 한마디에 세이코가 울상을 지었다.
“에스타스분들 찾으러 오셨대.”
“다 듣고 있었어요?!”
“세이코 선배님, 에스타스는 여기 없는 거 같으니까 나가보셔도 될 거 같아요.”
조아라가 깍듯하게 존대를 하니 오히려 정 없어 보인다. 조아라의 양아치 말투가 왜 더 친절하게 느껴졌던 걸까.
세이코는 풀이 죽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
조아라는 갑자기 세이코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세이코는 거의 기겁하면서 엉성한 가드 자세를 취했다.
“여, 여긴 나의 구역이에요! 나에게 상해를 입히려 해도 직원들이 막을 거라……!”
“선배님.”
“때리지 말아주세요오……!”
“작곡은 어떻게 해요?”
“으에?”
세이코는 바로 앞에 선 조아라를 보곤 멍청한 목소리를 냈다.
“작곡요, 작곡. 선배님은 작곡할 때 주로 어떻게 하나 싶어서요.”
“…….”
세이코는 공벌레처럼 말았던 허리를 곧게 편 후 거만한 투로 팔짱을 꼈다. 그리고 턱을 치켜세운 뒤 조아라를 내려다보았다.
“후후, 알고 싶나요? 좋아요, 가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역사상 손에 꼽는 인간만 누릴 수 있겠죠. 특별히 저의 노하우를 아주 조금 나눠주도록 할게요. 일단 자리를 옮기죠.”
“오.”
“왜 그래요?”
“선배님이 주위 신경 쓸 줄 몰라서.”
“끄흐으윽…….”
“아저씨도 와요.”
“나? 나는 왜?”
“왜긴요. 프로듀서잖아요.”
음.
아라한테 듣는 프로듀서란 호칭도 좋군.
성필은 들떠선 조아라와 세이코의 뒤를 따랐다.
세이코가 아티스트 라운지에 들어서자, 그곳에서 쉬고 있던 한 여자가 슬며시 일어났다. 그녀는 옆에 둔 기타를 챙기더니 호다닥 라운지를 나섰다.
조아라가 세이코를 흘겼다.
“아라 씨, 왜 그렇게 보는 거죠.”
“선배님 평소 행실 알 거 같아서요.”
“저는 회사 식구들에게 따뜻해요. 멋대로 오해하지 마세요.”
“방금 그건?”
“뭐어, 대선배의 아우라에 미리 질려버렸달까?”
세이코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상황을 즐기는 시점에서 인간성에 의심이 든다.
“여기서 문제. 방금 그분의 이름은?”
“…….”
“식구 이름도 모르는 대선배 등장.”
“아, 아니, 에에? 뭐지? 새로 들어온 애인가 봐요. 지, 진짜예요!”
“수고.”
“흐끄으윽…….”
세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자리를 잡은 세이코는 금세 기운을 차렸다.
세이코가 짝짝 박수를 쳤다. 그것을 본 조아라가 은근히 기대했다.
‘여기 뭐야. 설마 박수를 치면 웨이터가 나오고 그런 건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몇 초 후, 세이코는 슬며시 일어나서 음료수를 가져와 테이블에 두었다.
“가후가 직접 주는 음료수예요. 역사상 손에 꼽는…….”
“감사합니다 선배님.”
“말씀하셨으면 제가 가져다드렸을 텐데. 잘 먹을게요 세이코 씨.”
“……뭐, 맛있게 드세요. 직접 만든 건 아니지만요. 그래서, 작곡 얘기였나요? 당연히 악보는 볼 줄 알겠죠?”
“선배님은 읽을 줄 알아요?”
“지이, 지금은 잘은 못, 읽지만.”
성필이 조아라의 정수를 톡 쳤다.
“아, 그런 의미로 물어본 거 아니었는데. 죄송해요 선배님.”
“……아녜요. 말투를 들어보니 악보는 못 읽는 모양이네요. 당연히 쓰지도 못하겠고. 그럼 악기는 다룰 수 있나요?”
“네.”
“그럼 얘기가 쉽죠. 악기만 다룰 수 있으면 작곡 따위는 껌처럼 쉽게 씹어먹을 수 있어요.”
“드럼이요.”
“드럼으로 무슨 작곡을 하겠단 거예요?”
세이코가 곧바로 악의 없이 조아라를 깔보았다.
조아라는 ‘그럼 그렇지’란 듯 음료수를 들이켰다. 세이코는 왠지 자신이 잘못한 거 같아서 또 주눅이 들었다.
“선배님 말씀이 맞아요. 아무것도 안 배우고 작곡을 할 수 있을 리 없죠.”
“이 가후 후나비키 세이코가 특별히 가르쳐주는 건 어떨까요?”
“지금 배워서 어쩌자고요. 대학 가서 4년 동안 배워야 되는 기술 아녜요?”
“그렇게 어렵진 않아요. 저는 기타를 치기 시작한 시점부터 곡을 만들었으니까요.”
“예, 천재라서 좋으시겠네요.”
“네, 좋아요.”
조아라는 헛웃음을 뱉었다. 세이코의 저 오만함은 가끔 보기 껄끄럽지만, 자격 있는 자의 오만이니 영 보기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은근히 기운이 나기도 했다.
‘그래,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정지음이 조아라와 회의하며 느끼던 답답함은 조아라 본인도 느끼고 있었다.
백설하의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으니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백설하와 비교하면 조아라 자신은 정말이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조금이나마 방법이 있나 했는데.’
조아라는 백설하가 진행하는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멤버들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었다.
백설하는 자신이 미숙하고 부족함이 많았다고 했지만, 멤버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었다.
‘나도 쌤처럼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백설하는 찬란히 빛났었다.
그녀는 본인의 미숙함을 받아들이면서, 그 미숙함 안에서 항상 최선을 찾고자 노력했었다.
그녀의 노력과 눈물과 기쁨과 성공은 마치 하나의 드라마 같았다.
자연스레 백설하를 응원하게 되었었다. 그녀가 좌절하면 어떻게든 위로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었었다.
그때만큼은, 조아라를 포함한 멤버들은 백설하의 열렬한 팬이었다.
팬이기에 백설하를 동경했다.
그녀의 빛을 닮길 바랐었지만…….
‘내가 뭐라고 쌤처럼 할 수 있겠어.’
역시, 음악 쪽은 완전히 A&R에 맡겨야 할까.
애초에 자신이 작곡에 참여하는 것보다 전문 작곡가의 곡이 나을 게 자명하기도 하고 말이다.
초보 중의 초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아니.”
갑자기 성필이 말했다.
“드럼으로도 작곡할 수 있잖아요.”
“네?”
“네?”
조아라와 세이코가 동시에 놀랐다.
둘 다 생판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세이코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반문했다.
“파쿠 이사, 프로듀서란 사람이 작곡이란 것도 모르나요? 작곡하는 걸 본 적도 없나요? 작곡가를 본 적도 없나요? 드럼으로 무슨 작곡이에요? 당황스럽네요.”
“오히려 제가 더 당황스러운데요…….”
“아저씨.”
조아라 또한 세이코처럼 당황하면서, 또 기대하면서 성필을 불렀다.
“진짜 드럼으로 작곡할 수 있어요?”
조아라는 성필이 ‘응’이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성필은.
“응.”
조아라의 기대대로 말해주었다.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