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화
함께 올림픽 개막식을 보는 인원은 10명에 이르렀다. 한 집에, 그것도 같은 장소에 수용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인원이다.
하지만 미사토의 집은 그런 인원조차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65인치 텔레비전을 반원으로 둘러싼 소파는 10명은커녕 15명도 앉을 법한 크기였다.
“미사토 언니 돈 많으신가요!”
리카가 눈을 빛내며 묻자 미사토가 자랑스레 요리 집게를 어깨에 걸쳤다.
“그럼요, 웨벡스의 본부장인 걸요.”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네요!”
“성공한 커리어 우먼뿐이겠습니까.”
히무라가 미사토를 더 띄워주었다.
“미다스의 손이라 불러도 흠이 없을 만한 인재죠. 미사토 본부장이 웨벡스로 온 건 일본 음악계에도, 웨벡스에게도 다시 없을 행운이었습니다.”
“아이, 실장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입이 가벼우신지 모르겠네.”
“사실이니까 술술 나오는 거지.”
미사토도 히무라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물론 자신을 띄우기보다는 다른 이를 띄움으로써.
“세이코를 데려왔는데 미다스의 손으로 끝나겠어? 내가 바로 예술의 신 아폴론이지.”
“아폴론은 남자인데요!”
“그럼 예술의 여신인 뮤즈로 할게요. 세이코란 가후를 발견한 신이 바로 저예요. 하, 처음 세이코를 봤을 때도 스타가 되겠다 싶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뭐야 미사토, 의외로 내 가능성을 낮게 봤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레이와 최고의 가수를 찾았을 줄은 몰랐지! 알았으면 내가 겨우 이런 집에 살고 있겠어?”
미사토는 장난스럽게 자신의 넓을 집을 쭉 둘러보았다. 그리고 전화를 받는 흉내를 냈다.
“바로 사장님한테 전화해서 이렇게 말했겠지. 사장님, 제가 지금 어떤 뮤지션이랑 계약을 맺을 건데요, 말도 안 되게 성공할 겁니다. 제 성과금은 한정판 페라리 두 대랑 마루노우치 중심가의 고급 맨션 한 채예요. 그렇게 알고 있으세요. 아니면 저 회사 나가서 독립할 거예요.”
세이코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홱 돌렸다.
평소 자기 자랑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녀이지만, 부모 같은 미사토의 입으로 듣는 칭찬은 부끄러운 듯했다.
그런 둘을 바라보던 리카가 옆자리에 앉은 성필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박 이사님은 사장님한테 페라리 안 받으셨나요!”
“내가? 페라리를?”
“세계 최고의 아이돌이 될 저, 이시카와 리카를 스카우트했으니까요! 한국 엔터계의 미사토 언니잖아요!”
“맞아요, 팀장님 사장님한테 뭐 안 받았어요?”
리카와 신아름은 마치 추궁하는 투였다.
성필이 이만한 성공을 이룩했는데, 가로 엔터에선 무엇을 주었는지 궁금한 것이다. 미사토의 자랑을 들어서 괜한 경쟁심이 생긴 듯했다.
“나는 페라리랑 고급 맨션보다 더 좋은 걸 받았지.
“뭔가요!”
“너희들의 프로듀서가 될 수 있었잖아. 그 기회 자체가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었어.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
물론 홍규헌으로부터 가로 엔터의 주식을 받긴 했다. 후일 가로 엔터가 건실한 기업이 되어 상장한다면, 성필은 그것을 팔아 집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팔진 않겠지만.’
어느 기업이 상장하자마자 임원이 이익을 실현하겠답시고 주식을 팔면, 사람들이 그걸 좋게 볼 리 만무하다. 그 때문에 기업의 이미지가 안 좋아지는 경우가 꽤 많다.
아무튼.
“나는 매일 선물을 받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런 식으로 어물쩍 때우지 마세요!”
그리 말하는 리카는 감동한 기색이었다.
프로듀서가 ‘너희들의 프로듀서가 된 게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라고 말해주었으니,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최고의 프로듀서에겐 최고의 대우가 필요해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같이 사장님한테 항의해요!”
“그러지 마. 나 사장님한테 받은 거 있어.”
“뭐 받았는데요? 아저씨 사는 집도 그대로고 차도 안 바꿨잖아요.”
멤버들이 성필의 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겸연쩍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자 히무라가 성필을 구해주었다.
“여러분, 그건 민감한 이야기입니다. 당사자한테 물을 만한 것도 아니고요.”
히무라의 중재로 화제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소녀연맹 멤버들은 자신들끼리 대화를 더 이어갔다.
“우리 눈에 안 보이지만 아저씨가 받을 만한 게 뭐가 있지?”
“사장님이 줄 수 있는 거…… 역시 심플하게 돈인가? 아니면 미래의 약속?”
“상장했을 때 스톡옵션 준다던가?”
물론 그녀들끼리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여도 답이 나올 리는 만무했다.
“사장님이 박 이사님한테 줄 수 있는 거…….”
그리 되뇌던 장하양은 뭔가 떠올랐는지 어깨를 흠칫했다. 그리고 성필을 빤히 바라보았다.
성필은 그 시선을 눈치챘지만, 이 화제를 계속 끌고 가고 싶지 않았기에 무시했다.
솔직히 장하양이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짐작이 갔으나, 괜히 왜 그러냐고 물어봐서 그녀의 농담을 직접 듣고 싶지 않았다.
“미사토.”
그때 잠에 취한 서유선이 비틀비틀 나타났다. 그는 눈을 비비면서 거실로 걸어오다가,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마주하곤 번쩍 정신을 차렸다.
“어?”
“아.”
성필이 소파에서 일어나자 소녀연맹 멤버들도 차례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유선 씨, 가로 엔터 박성필입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멤버들이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인사를 마치자마자 짜기라도 한 듯 구호를 외쳤다.
“우리들의 연맹, 소녀연맹입니다!”
마치 방송국 대기실의 한 장면 같았다.
서유선은 오랜만에 겪는 일에 당황하더니 뒤늦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가 사라졌다.
“잠시만요.”
미사토가 잠시 거실을 떠났다.
잠시 후, 서유선은 부스스함을 전부 씻어버린 모습으로 나타났다. 푸른색 잠옷도 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특이한 점은 모자를 썼단 것이었다.
그는 모자챙에 눈가를 숨기곤 다시 한번 인사했다.
“서유선입니다. 반갑습니다 후배님들.”
서유선은 많은 사람 앞에 서는 것이 부담스럽다. 특히 번화가에 나가는 건 꿈도 못 꾼다.
그렇지만 이 자리를 피하진 않았다.
그는 그늘진 눈가 아래에서 눈동자를 번뜩였다. 그의 눈은 성필을 향하고 있었다.
‘세이코가 마음에 둔 남자라고…….’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서유선과 세이코는 오랫동안 미사토를 둘러싸고 대립해왔었다.
서유선은 세이코가 혹여 동성애자가 아닌지 의심해왔던 마당이었다. 세이코가 미사토에게 갖는 애정은 절대 평범한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세이코에게 경쟁심마저 느껴왔었다.
‘다행이다.’
그런데 세이코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고 한다. 정말이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은 세이코가 미사토의 집에 오는 빈도도 훨씬 줄어서, 서유선은 미사토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게 됐다.
‘내가 여기 있기만 하면 된다 이거지?’
세이코의 사랑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서유선은 많은 사람 사이에 끼이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정말로 얼마든지 이곳에 있을 것이다.
다행히 그다지 거북한 자리는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온 아이돌 후배님들.’
비록 서유선은 아이돌이란 직업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했었지만, 그게 아이돌이 싫단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후배들을 보니 반가웠다.
다들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다. 이제 3년 차라고 하던가. 마치 다키스트의 멤버들이 활동하던 때처럼 그녀들은 빛나고 있다.
빛나고 있지만…….
‘언제까지…….’
저 의지와 열정과 생기를 유지할 수 있을까.
서유선은 ‘뉴아사’에서 소녀연맹의 무대를 보곤 감격하고, 동시에 동정했었다.
저만한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고생했을까. 프로듀서가 그녀들을 얼마나 몰아세웠을까.
비록 지금은 미래를 향한 노력이라면서 이를 악물 수 있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올 것이다. 그게 파멸적인 형태만은 아니길, 서유선은 진심으로 빌었다.
그는 소파의 끝, 신아름의 바로 옆에 앉았다. 앉자마자 신아름이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선배님 사람 많은 곳 불편한 거 아니셨어요?”
“아녜요. 상황 따라 다르죠. 그땐 죄송했어요.”
“죄송하긴요. 안 불편하시다니 다행이네요.”
같은 나라 사람들, 그것도 서유선의 옛 직장인 아이돌들이다. 친근하면 친근했지 불편하지는 않았다.
처음 이 계획에 끼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꽤 괴롭겠다 싶었지만, 의외로 괜찮을지도…….
“…….”
서유선은 침을 꼴깍 삼켰다.
‘뭐지? 왜 나를 노려보는 거지?’
신아름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절대 호의적인 시선은 아니다. 오랜 세월 아이돌로 살아왔던 서유선은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목덜미로 식은땀이 흐른다.
‘내, 내가 뭘 잘못했나?’
신아름의 눈빛은 마치 적을 보는 것만 같았다. 서유선은 특유의 민감한 성격 때문에 그 눈빛을 감내하기가 어려웠다.
서유선은 손을 미세하게 떨며 식탁 위의 와인 병으로 손을 가져갔다.
“선배님 제가 따라드릴게요.”
“아니, 무슨, 괘, 괜찮아요. 안 그러셔도 돼요.”
“주세요.”
신아름이 병을 빼앗듯이 가져갔다. 서유선은 공손하게 와인 잔을 들었다. 신아름이 와인을 그의 잔에 부어주었다.
‘내 착각인가? 그냥 눈매만 사나운 거지 딱히 나를 적대하지는…….’
신아름이 와인을 따르면서 명백히 서유선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유선이 눈을 질끈 감았다.
‘미사토, 나 벌써 힘들어…….’
* * *
올림픽 개회식은 장장 4시간에 이른다.
공연, 귀빈 입장식, 공연, 국가별 대표선수단 입장, 공연, 올림픽기 게양, 공연, 개회사, 공연.
이외에도 수많은 절차가 존재한다.
술과 음식을 즐기며 개막식을 1시간쯤 보던 조아라가 문득 말했다.
“거의 다 무용이네요.”
대부분의 공연은 무용 작품들이었다. 그에 히무라가 짧게 답했다.
“일본은 무용이 발전했으니까요.”
스트리트 댄스 강국이기도 하지만, 일본이 올림픽 공연에서 선보이는 건 오로지 제도권 무용과 퍼포먼스뿐이었다.
유명한 일본의 안무가들이 올림픽을 맞아 창작한 작품들을 차례로 선보였다. 문외한인 이들이 보기엔 무용이라기보다는 연극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컨템포러리 댄스와 그 개념을 배운 조아라는 그것들이 전부 무용의 카테고리에 속해 있단 것을 알았다.
“올림픽 개막식은 개최국이 자기 자랑을 하는 시간이니까요. 그러니까 무용을 주로 할당한 것도 일종의 과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시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현대 무용을 창조해낸 나라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즉, 이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향한 과시였다. 문화적 역량을 보여주는 것 말이다. 어지간히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뭔가…….”
리카가 살짝 불만스러운 투로 말했다.
“유명한 걸 안 보여주는 거 같아요! 그냥 유명한 사람들 내에서 유명한 걸 보여주는 느낌이요!”
“뭔가 보고 싶은 거라도 있으셨습니까?”
“저는(아타시)는 런던 올림픽 같은 걸 기대했다구요! 막 제임스 본드 나오고 록밴드랑 걸그룹들이 노래하고요! 도쿄 올림픽에선 게임이랑 만화랑 애니메이션이랑 사무라이 같은 걸 보고 싶었어요!”
뭔가 굉장히 한 분야에 치중된 유명한 것 목록이다. 하지만 성필도 리카의 의견에 동의했다.
공연들의 퀄리티는 상당했지만, 지금까지는 딱히 일본의 특색을 보여준다거나 ‘대단하다’ 싶은 건 없었다.
그때 세이코가 말했다.
“히무라, 그럼 저기서 공연하는 사람들 엄청 유명하단 거지?”
“그렇겠지.”
“헤에, 문외한이 어떤 분야의 대가를 보면 이런 느낌이구나.”
“어떤 느낌이기에?”
“아무런 감상도 안 들어.”
성필이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자 세이코는 허겁지겁 본인의 발언을 주워 담았다.
“무, 물론 대중예술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단 건 알아요. 저건 록스타의 공연장이 아니라 엄연한 의전이니까요. 저도 그 정도는 안다구요.”
딱히 반응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세이코는 시무룩해져서 다시 성필을 보았다. 성필은 조아라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세이코도 조아라를 보았다.
조아라는 진지한 얼굴로 텔레비전에 떠오른 무용 공연을 감상 중이었다. 그녀는 무용수들의 동작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성필이 대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
세이코는 허리를 곧게 펴고 공연에 집중했다. 그때 서유선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세이코. 거기 나초 좀 집어…….”
“조용해 잘난 케이팝 아이도루. 나 진지하게 공연 감상 중이야.”
“…….”
서유선은 풀이 죽어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감히 소녀연맹 멤버들을 가로질러 나초를 가지러 가도 될지 확신이 안 서서였다.
나초 따위를 가지러 그녀들의 시선을 잠시라도 막는 게 허용될까?
그가 고민하고 있자 나초가 담긴 쟁반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여기요.”
성필이었다.
서유선이 당황한 것도 잠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쟁반을 받았다.
성필이 세이코를 나무랐다.
“세이코 씨, 거리도 가까운데 왜 안 집어주신 거예요. 사람이 너무 차가우신 거 아니에요?”
“공연 진지하게 감상하느라 그랬어요.”
“…….”
왠지 모르게 자랑스러운 표정인 세이코를 보고, 성필은 그저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개막식이 약 2시간 정도 지나자 슬슬 집중력도 낮아졌다. 풀리던 분위기를 바로 세운 건 한 팬터마임 공연이었다.
픽토그램을 사람의 몸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우와.”
약 5분간, 10명 모두 그 공연에 확 집중했다. 보는 내내 감탄이 끊이질 않았다.
중간에 한 번 실수가 있긴 했으나, 그게 오히려 공연의 긴장감을 올려주어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픽토그램 공연이 끝나자마자 조아라가 박수 쳤다.
“미쳤다. 어떻게 저렇게 잘하지?”
다들 동감이어서 조아라를 따라 공연장에 온 듯 박수를 쳐주었다. 나중에 따로 또 보고 싶은 수준이었다.
이후로 주목할 만한 공연은 역시나 치논이 등장하는 부분이었다.
“저기 치논쨩이에요!”
세이코가 뿌듯한 미소를 띠며 소녀연맹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제 친구예요!”
“저희도 친구예요!”
“저랑 더 친해요!”
“그럼 나중에 치논 언니한테 물어봐요!”
“에, 어, 그, 그래요! 얼마든지!”
리카와 세이코, 어린애 둘의 말다툼은 불안해하는 세이코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제 보니 폰을 꺼내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설마 치논한테 ‘치논쨩 나랑 절친이지?’ 같은 문자를 보내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세이코라도 그러진 않으리라고 믿는다.
“와, 스케일이 엄청나요.”
백설하가 홀린 듯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토록 감탄할 만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훌쩍 뛰어넘는 이들이 합주를 펼치고 있었으니까.
클래식 오케스트라 편성에 빅밴드 재즈 세션, 록밴드에다 전자악기를 다루는 DJ까지 있다. 현대와 과거가 어우러지는 압도적인 풍경에 다들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다.
‘여길 봐라’라는 듯 다른 악기 세션들보다 높은 단상 위에서 연주하는 이들 말이다.
피아노를 독차지한 치논이 그러했고, 일렉 기타를 치는 중년의 남자,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재즈 빅밴드를 동시에 통솔하는 지휘자, 그리고 음향 기기 옆에 선 DJ가 그러했다.
“하아.”
그 광경을 보자 미사토가 이마를 짚었다. 왠지 그녀의 얼굴이 붉었다.
성필이 걱정하여 괜찮냐고 묻자, 그녀가 떨떠름한 투로 대답했다.
“아뇨, 쫌, 창피해서요. 다른 나라 분한테 이런 거 보여드리는 게요.”
“너무 보여주기식이긴 하네.”
미사토와 히무라가 동시에 쓴소리를 뱉었다.
그에 성필과 소녀연맹 멤버들이 그들에게 집중했다. 공연은 멋지기만 한데 뭐가 창피하단 걸까?
“저기 단상에 계신 분들…….”
치논, 지휘자, 기타리스트.
“그래미 수상자들이에요.”
“네?”
백설하가 깜짝 놀라서 다시 화면을 보았다.
그래미 어워드 수상자가 셋.
그리 말하니 무게감이 달라 보인다.
“감탄할 게 아니에요.”
백설하의 반응을 보고 미사토가 딱 잘라 말했다.
“다분히 서양권의 눈을 의식한 인선이잖아요. 뭐예요 이게. 일본이 대단한 음악가라고 보여줄 게 그래미 수상자들이에요? 그래봤자 미국 음악 시상식인데. 다른 나라에서 주는 상 받아왔다고 자랑스럽게 단상 위에 세우는 꼴이라니.”
미사토가 그래미를 깎아내리자 백설하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백설하의 목표 중 하나가 바로 그래미였으니 말이다.
“그치만 그래미는 대단한 거 아닌가요!”
리카가 이의를 제기했다.
“대단하죠. 그런데 애초에 그래미는 미국 음악 산업의 발전을 독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상식이에요. 그쪽 지역, 언어권에서 유명한 사람들한테 ‘잘했으니까 앞으로도 더 노력해주세요’라면서 주는 상이라구요. 그 상의 수상자를 자랑스럽게 국가행사의 단상 위에 올려뒀으니까 창피한 거죠.”
“에, 그렇지만…….”
리카가 성필의 눈치를 보았다.
“팝의 역사는…… 세계 음악의 역사 아닌가요? 그러니까 팝의 본고장에서 주는 상은 곧 세계에서의 인정이고…….”
미사토의 설명은 성필이 음악사 시간에 들려준 이야기와 큰 차이를 보였다. 그래서 리카는 물론 소녀연맹 멤버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성필의 이야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한국은 한국의 문화인이 해외에서 상만 받았다고 하면 ‘엄청난 위업’ ‘대단한 쾌거’라면서 띄우길 주저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소녀연맹 멤버들은 칸이나 베니스 영화제, 혹은 아카데미나 오스카상과 같은 맥락에서 그래미를 동경해왔다.
그런데.
“월드 뮤직이요? 거창한 말이네요. 팝의 영향력은 인정하지만, 미국의 인정이 세계의 인정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미사토는 그래미를 정말 ‘지역 시상식’ 정도로 취급했다.
세계 음악 산업 2위인 나라에서 살기 때문일까, 자의식이 엄청났다.
굳이 다른 나라에 진출하거나 인정받지 않아도 방대한 산업 규모를 유지하는 나라. 미사토는 그런 곳에서 살아왔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의식은 어쩌면 미국인과 닮아 있었다. 굳이 해외의 반응에 집착하지 않는 미국인들 말이다. 그들에게 세계란 곧 자국(自國)을 의미하니까.
성필과 소녀연맹 전원은 미사토의 말에 섞인 그러한 뉘앙스를 충분히 느꼈다.
‘이런 게 제이팝의 강점이겠지.’
일본의 문화적 인프라는 뮤지션의 다양성을 충분히 허용한다. 워낙 업계가 크기에 어느 장르든 수요가 있다.
그래서 개성적인 뮤지션이 탄생하기 쉽다.
한국의 케이팝은 그 반대다.
‘케이팝의 강점은 글로벌성을 추구하는 것.’
한국 안에서만 유명해선 죽도 밥도 안 된다. 무조건 해외로 진출해야 한다. 그래야만 부를 거머쥘 수 있다.
온갖 기획사의 사장들은 혈안이 되어 해외 진출을 도모한다. 그렇기에 보편적 감성의 EDM을 추구하고, 미적인 완성도를 중요시하고, 완벽한 퍼포먼스에 집중한다.
그게 판에 박힌 아이돌 문화로 나타나지만, 그 판에 박힌 것 중에서도 빛나는 정수가 추출되곤 한다.
‘일본의 음악계가 다수의 승자를 위해 구축되어 있다면, 한국의 음악계는 소수의 우승자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 소수의 우승자는 세계로 뻗어갈 자격을 부여받는다.
소녀연맹처럼.
“끝났네.”
치논의 멋들어진 공연이 끝나자 세이코는 흥이 식은 듯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개막식만 몇 시간을 이어서 보는 건 피로감이 상당했다.
그것을 본 히무라가 주의를 모았다.
“볼 만한 건 다 나온 것 같으니 저희끼리 게임이라도 할까요?”
“게임요?”
히무라가 능숙하게 텔레비전 아래의 선반을 열었다. 가라오케 기기가 들어 있었다.
마이크를 두 개 꺼낸 그가 미사토를 보며 웃었다. 미사토가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아’ 소리를 냈다.
“계단식? 그걸로 할 거야?”
“응.”
“계단식이 뭔데요?”
성필이 묻자 미사토는 마이크를 하나 넘겨받으면서 답했다.
“유선이랑 세이코가 개발한 가라오케 게임이에요. 1960년대부터 차례로 올라가는 거요.”
“올라가요?”
“곡의 발매 연도요. 그러면 서로의 애창곡만 안 들어도 돼서, 같이 노래 부르는 게 안 지겨워지거든요.”
세이코와 서유선이 견원지간이라더니, 의외로 같이 잘 놀았던 모양이다.
물론 둘이 노래 대결을 펼쳤던 건 순수하게 서로를 꺾었단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라는 건, 당사자들을 제외하곤 알 수 없었다.
“그럼 사람도 많으니 마실 사람은 마시고, 얘기할 사람은 하고, 노래 부를 사람은 불러요. 점수가 제일 낮은 사람은 벌칙!”
그렇게 올림픽 개막식은 제쳐두고 술판과 노래판이 동시에 시작됐다.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은 건 리카였다. 그녀는 비틀즈의 I wanna hold your hand를 열창했다.
1964년.
다음은 히무라였다. 그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를 불렀다.
1969년.
이런 식으로 노래의 연도가 점점 올라갔다.
연도가 올라갈수록 사람들도 술에 취해갔다.
그러는 와중, 세이코는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성필의 옆으로 자리를 옮길 기회를 엿보는 것이었다.
세이코와 성필 사이에는 소녀연맹 멤버 몇몇이 있었다. 그녀들을 가로질러 성필에게로 가야 한다.
‘됐다. 조금 자리가 생겼어.’
세이코가 은근슬쩍 일어나 소녀연맹 멤버들을 가로지르려 했다. 그때 마이크를 든 조아라가 세이코와 어깨동무했다.
“선배님 합창!”
“으엑?”
“빨리! I! Love! Rock’n Roll!”
“아, 아이 라브 로큰롤!”
조앤 제트의 I love Rock’n Roll.
1981년.
그 노래의 끝과 함께, 세이코는 조아라에게 어깨동무당하여 소녀연맹 사이에 앉게 됐다.
“선배님, 술 받으세요.”
“저는 술을 잘…….”
“이 후배의 간곡한 부탁입니다! 드세요!”
세이코는 취한 조아라의 기에 눌려 꼴깍꼴깍 술을 마셨다. 예상치 못한 사태였지만, 소녀연맹 멤버가 자신을 친근하게 대해주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Nobody can ever here him call.”
백설하는 미사토의 집에 방치되어 있던 세이코의 기타를 빌려 연주와 노래를 동시에 해냈다.
그녀의 노래를 듣자 다들 환호했다.
미사토가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술병을 휘둘렀다.
“이야, 역시 아티스트들이 모여서 그런가 선곡이 미쳤네! 잘한다 우파루파!”
“우파루파라고 부르지 마세요!”
취한 백설하가 곧장 반항했다. 우파루파로 쌓인 게 많은 듯했다. 어쩌면 저항의 음악인 로큰롤의 힘일지도 몰랐다.
오아시스의 Supersonic. 1994년.
“그런데 멤버분들 다 어떻게 옛날 노래를 이렇게 잘 알죠? 진짜 20대가 아닌 수준인데요.”
미사토가 의문을 표하자 리카가 자랑스레 답했다.
“박 이사님의 음악사 수업 덕분이에요! 록과 팝의 역사는 전부 꿰차고 있다구요!”
“가로 엔터는 음악사 강의도 해줘요? 한국 기획사는 학교라더니 진짜네요.”
그렇게 점점 연도가 올라와 마침내 2010년대에 이르렀다. 그제야 성필에게 마이크가 쥐어졌다.
소녀연맹 멤버들이 휘파람과 환호와 박수로 맞이해주었다. 그녀들의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성필은 그 기대에 보답해주었다.
“소녀연맹의 ‘아니’. 간다.”
와타시(나), 아이돌이 됩니다.
그리고 3분 30초 후.
“진짜 노래 못 부르신다.”
미사토가 신기하단 듯 성필을 바라보았다.
“근데 춤은 잘 추시네.”
“후흡, 후우.”
성필은 무려 소녀연맹의 댄스 퍼포먼스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노래 실력은 끔찍했지만, 춤까지 함께 소화하는 그 열정만은 누구도 폄훼할 수 없었다.
세이코는 춤을 추는 성필을 처음 본 터라 생소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춤이라는 행위가 이렇게나 매력적이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서유선이 추는 걸 볼 때랑은 전혀 달라. 근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
보통은 성필보다 서유선의 춤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세이코는 자신만이 인식할 수 있는 성필의 매력이 더 늘어난 거 같아 기분이 좋았다.
“아저씨 진짜 아이돌 했어야 한다니까.”
이제 보니 조아라 또한 눈을 빛내면서 성필을 보고 있었다. 그에 세이코가 살짝 실망했다.
‘내 눈에 매력적으로 보이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보이는 거구나.’
“어후.”
그때 성필이 술 때문에 머리가 핑 돌아 소파에 앉지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겨우 마이크를 테이블 위에 두고 바닥에 몸을 뉘였다.
“저, 저예요? 아, 부끄러운데.”
서유선이 쑥스럽게 인사하면서 앞으로 나왔다. 쓰러졌던 성필이 즉시 벌떡 일어나 환호했다.
“더 원! 더 킹! 서유선 서유선 서유선 서유선 서유선! 다, 키, 스, 트! 더 원! 더 킹!”
“미친, 아저씨 응원법 다 외우는 거 봐라. 나 소름 돋음.”
“아타시(나)도.”
마이크를 입에 가져가던 서유선은 오랜만에 들은 응원에 감동했는지 잠시 입술을 물었다. 그러곤 활짝 웃으면서 성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장막 여러분(한 명임)! 와주셔서 감사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봐주세요!”
“우와아아아악!”
“미친, 아저씨 1인 팬미팅이다.”
“박 이사님 계 탔어!”
서유선이 선택한 곡은 정말 놀라웠다.
무려 소녀연맹의 ‘애플 크러쉬’였으니까.
성필은 서유선의 등장에 살짝 오버해서 반응한 감도 있었다. 정말 성필이 흥분했다면 소리 따위는 지르지 않는다.
단지 조용히 보기만 할 뿐.
지금의 성필이 그러했다.
다른 멤버들도 똑같았다.
서유선이 추는 ‘애플 크러쉬’는 원본과 달랐다. 달랐지만, ‘애플 크러쉬’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
“바꿨어.”
조아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서유선은 원본을 바꾸었다.
여성성이 강조되는 부분을 죄다 지우고 남성적인 테크닉으로 변환시킨 것이다. 즉흥적으로 행한다기엔 너무나 짜임새 있고 완벽, 간결했다.
그러한 춤을 추면서 보컬 또한 소화했다.
그야말로 아이돌이었다.
성필은 서유선을 보며 연습생 백수현을 떠올렸다.
‘수현이가 한 거랑 같은 일이지만…….’
그 퀄리티는 비교를 불허한다.
“하아, 후우.”
3분이 넘는 퍼포먼스를 마친 서유선은 시원하게 한숨을 뱉곤 금세 원래 호흡으로 돌아왔다.
처음과 다른 건 술 때문에 붉어진 얼굴뿐이었다.
아까 사람이 많다고 쩔쩔매던 그가 아니었다. 술을 마셨을 뿐인데 사람이 아예 바뀐 듯했다.
서유선은 쑥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그, 원곡자 앞에서 하려니까 많이 창피하네요. 후배님들한테 부끄러운 모습은 안 보였다면 좋겠습니다, 네. 봐주셔서 감사합…….”
신아름이 서유선의 앞에 섰다.
술에 취해 용기가 생긴 서유선이더라도, 줄곧 그를 죽일 듯 노려보던 신아름을 마주하자 움찔 떨었다.
신아름이 손을 내밀었다.
“제 차례예요.”
“아, 네.”
서유선이 마이크를 주자 신아름은 핑글 뒤로 돌았다. 그리고 바로 자세를 잡았다.
‘애플 크러쉬’가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됐다.
전주를 듣자 서유선이 굳었다.
“선배님께 답가(踏歌)를 드릴게요.”
다키스트의 ‘더 킹’.
“노래만이 아니라 퍼포먼스로요.”
“계단식이 아닌데? ‘더 킹’은 ‘애플 크러쉬’보다 더…….”
“조용.”
“…….”
신아름은 성필을 보았다.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놀란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신아름은 서유선을 보았다. 경쟁의식을 눈동자 안에 활활 태우면서.
‘이전엔 내가 졌었지.’
이번엔 내가 이긴다.
그렇게, 서유선과 신아름의 12연속 퍼포먼스 대결이 시작됐다.
* * *
새벽 4시.
성필은 벽에 기대 누워 난장판이 된 거실을 바라보았다. 다들 거의 정신을 잃은 채 비몽사몽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특히 12번 연속으로 아이돌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신아름과 서유선은 거의 기절해 있었다.
성필은 몽롱한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히무라와 미사토 또한 성필처럼 벽에 기대어 누워 있었다.
성필이 손을 내밀자 히무라가 와인병을 주었다. 성필은 그냥 병을 입에 꽂아 넣고 와인을 들이켰다.
“그래서요, 퍼포먼스 디렉팅팀을 꾸리는 게 지금 엄청난 난제거든요.”
“그런 디렉터가 어딨습니까. 그냥 포기하세요.”
“너무 시니컬하시네요 실장님.”
히무라는 피시시 웃더니 기지개를 켰다.
“저희 쪽에서도 알아보겠습니다. 일본인이어도 될까요?”
“예에, 일본인이라도 그런 분이 있으면 감지덕지죠. 저희 애들은 전부 일본어 할 수 있으니…….”
세 사람은 다른 이들이 모두 쓰러진 와중에도 일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에 다다른 모양이다.
다들 너무 피곤하다.
미사토는 멍하니 쓰러진 서유선을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슬슬 정리하죠. 쓰레기는 내일 일어나서 어떻게 하고, 사람만 제대로 눕혀 둡시다. 박 이사님, 히무라 실장님, 유선이 옮기는 거 좀 도와주세요.”
“네엡.”
“으엉.”
성필과 히무라가 비틀비틀 일어났다. 다들 엔터 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술기운을 이겨내는 데는 도가 터 있었다.
둘이 서유선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 일으켰다. 일으키자마자 서유선의 입가에서 와인이 뚝뚝 흘러내렸다.
“다키스트가 키타아(왔다아)…….”
그의 잠꼬대를 듣고 성필이 픽 웃었다.
“유선 씨 술 드시니까 사람이 달라지시던데요.”
“원래 그래요. 잘은 안 먹는데, 술 마시면 막 밝아져요. 그게 저는…… 좋다기보다는 안쓰러워요.”
술을 마셔야만 정신적인 부담감을 드러내어 비로소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성필은 한때의 우상을 끌며 미사토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무대 위에서 빛나던 이가, 지금은 어떻게 사람과 대화도 잘 못 나누게 되었을까.
“춤은.”
서유선의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걸으며 성필이 입을 뗐다.
“계속 추시는 거예요?”
“네. 유선이 취미가 케이팝 아이돌 퍼포먼스 카피예요. 웨벡스가 가로 엔터에 소녀연맹 매니지먼트 제안 보냈던 거 기억하세요? 유선이가 소녀연맹 퍼포먼스하는 거 보고 제가 히무라한테 말했던 거예요.”
“유선 씨가 지금의 인연을 만들어준 거나 마찬가지네요.”
“그런 셈이죠.”
취미가 아이돌 퍼포먼스 커버.
심지어 퍼포먼스 수정도 가능하다.
어쩌면 서유선이…….
‘아니.’
아이돌 퍼포먼스를 수정하여 추는 것 정도로 퍼포먼스 디렉팅이 가능할 리 없다.
조아라가 원하는 사람은 여러 안무에 능통하며, 그렇기에 안무 장르를 적절히 조합할 수 있는 이였으니까.
성필이 팬심의 색안경을 끼고 서유선을 보지 않더라도, 그는 현재도 대단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퍼포먼스 디렉팅을 맡길 만한 인재는 아닐 터다.
“어디 보자, 불이.”
먼저 서유선의 방으로 들어간 미사토는 벽면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여기다.”
방이 밝아졌다.
서유선을 멘 무게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성필이 처음 본 건 바닥이었다.
여기저기가 움푹 파여 있는 바닥.
격렬하게 바닥을 뛰어다닌 것이다. 아마도 춤을 추느라고.
성필은 고개를 들었다.
중앙의 전신 거울을 제외하고, 방의 모든 벽엔 천장까지 닿은 책장이 있었다. 그곳엔 온갖 CD와 DVD, 혹은 책으로 가득했다.
그중 눈에 띄는 건 녹화용 테이프들이 꽂힌 책장이었다. 하나하나 직접 녹화하거나 촬영했는지, 테이프의 겉면 커버에는 네임펜으로 서유선이 직접 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국어로.
[피에르 리갈]
[앙즐랭 프렐조카주]
[롤랑 프티]
[데이비드 파슨스]
[실비 기엠]
[버락 마셜]
[마츠 에크]
[나초 두아토]
[필립 드쿠플레]
[안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
[보리스 샤르마츠]
[카롤린 칼송]
[바슬라프 니진스키]
[마기 마랭]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에두아르 록]
[이르지 킬리안]
[빔 반데키부스]
[로익 투제]
[윌리엄 포사이스]
[얀 파브르]
[존 뉴마이어]
[조제프 나주]
[호세 몽탈보]
[호페시 셱터]
[에미오 그레코]
[필립 장티]
[장 클로드 갈로타]
[매튜 본]
[제롬 벨]
[모리스 베자르]
[피나 바우슈]
테이프들은 인명(人名)일 게 분명한 이름들이 쓰여 있었다. 각 이름 당 하나씩이 아니라, 어떤 건 두세 개도 있었고 어떤 건 열 개도 넘었다.
그중 성필의 눈에 들어오는 이름은 ‘바슬라프 니진스키’ 정도였다. 그 이름만은 성필도 알았다.
‘발레리노.’
‘무용의 신’이라고 불린 전설적인 무용수다. 그럼 다른 이름들은…….
“아, 저거요.”
성필이 책장을 응시하고만 있자 미사토가 설명했다.
“유선이 취미 퍼포먼스 커버 말고 또 있었네. 저거 테이프들, 유선이 직접 모은 영상들이에요.”
“어떤…….”
“유명한 무용수랑 안무가들이요. 어반 댄스 말고도 춤이란 춤은 죄다 좋아해서요.”
자신의 이야기가 귓가로 들어와서일까, 서유선이 잠꼬대로 중얼거렸다.
“다키스트가 키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