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화
조아라는 방에 전자 드럼 설치를 마쳤다.
성필에게 리듬 작곡법에 관해 듣고 바로 주문한 것이었다. 가격이 꽤 나가긴 했지만, 벌어들이는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조아라는 드럼 앞에 앉아 헤드폰을 꼈다.
채를 들고 드럼을 내리치려던 때.
“조아라.”
신아름이 노크도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조아라는 익숙하단 듯 천천히 헤드폰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봐. 내가아아아아악!”
조아라에게 헤드락 당한 신아름이 비명을 내질렀다. 신아름이 팔을 툭툭 두드리며 탭을 해도 조아라는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방이 무슨 거실이냐? 내가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어야 할 일 하고 있으면 앞으로 내 얼굴 어떻게 보려고? 어? 제발 예의를 좀 지키자 아름아.”
“공용 숙소에서 그딴 짓 하는 년이 어딨어어어!”
“사과 안 해?”
“미안 미안 미안 미안 미안!”
헤드락에서 풀려난 신아름은 울분을 담아 조아라를 노려보았다. 조아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왜?”
“이 씨…….”
신아름은 조아라의 침대에 앉았다.
“오늘 들었는데 팀장님이 뭐 하려는 줄 알아?”
“몰라.”
“넌 사회성이 없어?”
“아냐고 물어서 모른다고 대답했는데 뭐. 할 말 없으면 나가.”
“오늘 얘가 왜 이렇게 까칠해.”
조아라를 향해 항상 친근함이 서린 날을 세우는 신아름이라도, 조아라가 저기압이니 평소처럼 강하게 나가기 힘들었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싸우는 경우가 드물다. 누군가 기분이 안 좋은 듯하면 다들 알아서 말과 행동을 사리기 때문이다.
숙소 생활의 끔찍한 점은 혼자만의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단 점이다. 기분이 안 좋아도 혼자 삭일 수 없고, 계속 다른 사람과 부딪쳐야 한다.
‘오늘은 얘랑 덜 마주쳐야겠다.’
신아름은 조아라와 수다를 떨 생각으로 왔지만, 간단하게 용무만 끝내고 나가리라 다짐했다.
소녀연맹은 다섯 명. 그중 한 명만 신경질적이어도 팀 분위기가 안 좋아진다.
사람이 항상 기분이 좋을 순 없다.
일주일에 하루, 한 명씩 번갈아 기분이 안 좋아진다고 하면 일주일에 5일이나 팀의 분위기가 안 좋은 것이다.
이러한 공동생활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멤버들은 서로의 기분에 더 민감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다들 노력하지 않았다면 진작 머리채가 다 쥐어뜯긴 멤버가 발생했을 것이다.
“서유선 선배님 있잖아. 오늘 팀장님한테 들었는데 이번 프로젝트 안무가로 들일 수도 있다고 해서.”
“그러냐.”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진짜 안무가도 아니고 아이돌 하던 사람을, 그것도 우리 연습생 때 은퇴한 사람을 안무가로 부른다는 게.”
“음.”
조아라는 신아름의 이야기를 적당히 흘렸다.
신아름이 서유선에게 묘한 경쟁심과 질투를 품고 있단 건 얼마 전 미사토의 집에서 밝혀졌었다.
그 경쟁심이 성필 때문에 생겼으리란 것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심지어 단순한 안무가도 아니야. 퍼포먼스 디렉터로 들일 수도 있대. 참나, 이거 솔직히 팀장님 사심 개입된 거야. 그치?”
“뭐, 그럴지도 모르고.”
“……이거 네가 제일 민감해야 하는 얘기 아니야? 네가 이끄는 프로젝트의 퍼포먼스 디렉터라고. 근데 왜 무미건조해?”
“나는.”
조아라는 다시 헤드폰을 쓰고 드럼 채를 잡았다.
“아저씨 믿어.”
“뭐?”
“아저씨가 유선 선배님이 괜찮다고 하면 믿어볼 거야. 믿을 수밖에 없지.”
신아름은 예상과 전혀 다른 답을 듣자 얼이 나갔다.
“우리가 선수라면 아저씨는 감독이잖아. 선수의 시야도 중요하지. 아저씨도 항상 강조하는 거고. 근데, 전체적인 일을 조망하는 데는 감독의 시야가 가장 적절하지 않겠냐. 아니 뭐, 논리적으로 뭐라 뭐라 하기 전에.”
조아라가 탐탐을 느리게 두드렸다.
“아저씨가 지금까지 이룬 거 보면 믿음이 있을 수밖에 없잖아.”
“……그래, 네 일이다.”
신아름은 살짝 삐친 채 방을 나섰다. 아마 조아라가 동조해주길 바랐던 것이리라.
하지만 조아라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선 선배님이 디렉터로 들어와?’
성필이 그걸 옳다고 생각한다면, 조아라도 그 결정에 따를 것이다.
애초에 조아라가 디렉터 선임은 조아라의 얕은 지식과 경험으로 어떻게 해볼 만한 영역이 아니니까.
그저 성필을 믿기로 했다.
‘하자.’
조아라는 마음의 방향을 따라 드럼을 치기 시작했다. 리듬 작곡법이라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방법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당연히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되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한다.
성필을 믿으니까.
* * *
“안무가분들 반응은 어때?”
[시간 비는 사람들은 다 하고 싶다고 그러지.]
전화 너머 손혜빈의 목소리는 기운이 없었다.
그녀는 성필이 없는 한국에서 퍼포먼스 디렉팅팀 구성을 담당하고 있었다. 여러 안무가에게 연락하여 이번 프로젝트에 합류할 만한 인물을 찾아내는 것이다.
성필도 가로 엔터로부터 안무가 후보를 넘겨받았는데 수가 상당했다.
‘아이돌 안무가로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후보를 찾는 것만 해도 고생했겠지.’
여러 장르의 안무가들을 모아 종합 작품을 만든다는, 중소기업이 시도하기 어려운 도전이다.
가로 엔터로서도 처음 시도하는 작업이기에 초반부터 여러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고, 지금도 그 난관들과 싸우고 있으리라.
[슬슬 추려지면 골라내야지. 너 일본에서 돌아올 때쯤엔 정리 끝날 거야.]
“고생 많네. 디렉터 쪽은 어때?”
[그게…….]
원래 자본력이 어느 정도 있는 회사는 아이돌의 춤을 한 사람에게만 맡기지 않는다.
여러 팀과 회사에 시안을 의뢰하고, 그중 쓸만한 것들을 파트별로 뽑아내어 하나로 합친다.
당연히 그러한 일에 전문화된 인재가 있다.
[믿고 쓸 만한 사람이야 여기저기 많겠지만, 그게 아라의 비전에 맞는 사람인지는 모르겠거든.]
막말로 그냥 유명한 디렉터 한 명 데려와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그럭저럭 결과물은 나올 것이다.
하지만 조아라가 바라던 새로움이나 신선함은 많이 퇴색될 게 분명하다. 그들은 프로이기에, 프로로서 안정될 길로 가려 할 테니까.
여태까지의 케이팝 씬에서도 신선한 안무들이 많았지만, 그중 몇몇은 ‘과하다’거나 ‘오버한다’는 신랄한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프로는 도박하는 사람이 아니니, 가로 엔터가 요구하더라도 안전한 길로 갈 것이다. 그들의 커리어에도 영향을 미치니 말이다.
[일본엔 괜찮은 사람 없어?]
“웨벡스에서 나름 후보를 추려주긴 했어. 그분들 코레오그래피 확인하는 중.”
[너도 마냥 일본 여행만 하는 건 아니구나.]
“무슨 여행이야. 이젠 뭐 일본이 외국처럼 느껴지지도 않아.”
[하긴, 나도 비슷해.]
서로가 할 말을 마쳤다.
손혜빈이 전화를 끊으려는 기색을 보였다. 그때 성필이 속에 담아두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서유선에 관한 것이었다.
[다키스트 서유선?]
“응.”
성필은 서유선의 방 풍경을 묘사했다. 또한 그날 서유선이 신아름과 함께 펼쳤던 12연속 퍼포먼스 대결도 말이다.
“현대 무용에 조예가 깊으신 거 같아. 서예고 현대 무용 전공이어서, 아이돌이 된 후에도 계속 관심을 두셨던 거 같아. 아이돌 퍼포먼스 카피는 옛날부터 계속하셨고, 미사토 씨 말로는 집에서 정말 춤추거나 무용 영상만 보신대.”
[그게 진짜면 대단한 거 아니야? 그럼 유선 씨 찍은 코레오그래피(안무) 있어? 카피 영상이라도?]
“……없어.”
[뭐야.]
그게 유일한 문제였다.
서유선은 다키스트로서의 활동을 끝내고도 계속 무용과 퍼포먼스를 갈고 닦았을 것이다. 단지 그게 기록으로 남지 않았을 뿐이다.
[유선 씨가 그냥 무용 오타쿠일지 어떻게 알아? 인터넷에도 그런 애들 많잖아. 운동은 개뿔도 안 하면서 식단은 뭐가 좋니, 데드 리프트는 이렇게 해야 하니 하는 인간들.]
“유선 씨 욕하지 마!”
[어, 미안하다.]
“……내 말은, 굳이 디렉터가 아니더라도 프로젝트 안무가 중 한 명으로 부르는 건 어떻겠냐는 거야.”
[아이돌 출신 안무가가 없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경력이 없단 게 마음에 걸린다.
물론 이건 서유선의 실력을 단 한 번만 확인할 수 있더라도 바로 끝나는 문제다.
세계엔 미성년자임에도 아이튜브에 올린 영상 하나로 안무가로 데뷔하거나, 장난으로 SNS에 올린 짧은 춤을 통해 스타가 된 이들조차 있다.
춤을 추는 이들은 고작 하나의 영상, 고작 십수 초의 움직임만으로 실력과 잠재성을 파악하는 게 가능하다.
손혜빈도 서유선을 보자마자 그의 능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필이 서유선의 ‘애플 크러쉬’를 보자마자 넋을 놓고 봤을 때처럼 말이다.
[근데 너 너무 확신이 강한 거 아니야? 무슨 근거라도 있어?]
“감이지.”
[그럼 믿어봐야겠네.]
성필이 소녀연맹 멤버들을 찾아내고, 앨범 곡들을 선택하고, 해외투어를 결행하던 것. 사실 대부분은 감이라고 부르는 게 근거였었다.
애초에 감일 수밖에 없는 업계이다.
내놓기 전까지는 대중의 반응을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세계. 그게 예술이란 것이고, 그 안에서 유일한 나침반은 예술가의 확신뿐이다.
그리고 손혜빈은 성필이란 예술가의 감, 믿음을 신뢰했다.
[어차피 내가 후보로 고른 안무가들도 전부 대충 커리어 훑어보고 고른 거니까.]
“누나 일 너무 대충하지 마.”
[그럼 네가 그 안무가들 작품 전부 다 극장 가서 보고 올래? 애초에 그걸 봐 봤자 우리가 뭘 알아. 뭘 아냐고!]
“누나 많이 힘들구나.”
[응, 성필아 누나 많이 힘들어어……. 빨리 와서 위로해줘…….]
제도권 무용과 아이돌 퍼포먼스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으며, 어떤 식으로 결합되어야 하고, 결합되어서 어떤 결과가 있을지 하나도 모른다.
그런 마당인데 어떻게 안무가들의 작품을 보고 저 사람이 잘할까 못 할까를 가려내겠는가.
가로 엔터 전원 처음 맞닥뜨리는 도전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총괄 프로듀서인 내 스탠스가 중요해.’
정호환도 이런 난관을 수없이 헤쳐나왔다.
성필이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인터뷰 중 하나가 있다.
1세대 아이돌이 완전히 몰락하고 소수의 아이돌만 명맥을 유지하던 시기, 2000년대 중후반.
KS 엔터의 모두가 아이돌은 끝났다고 했었다. 아이돌에 집착하는 정호환을 손가락질하고 욕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도 정호환은 포기하지 않았었다.
근거는 없었다.
오직 정호환은 자신의 감만을 믿고 끝까지 나갔었다. 그렇게 그의 감은 신화가 되었고, 그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프로듀서의 신으로 등극했다.
‘내가,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런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야.’
적어도 앞이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니까.
성필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자신감을 드러냈다.
“누나, 걱정하지 마. 여느 때처럼 우린 또 역대급 성적을 낼 거야. 항상 쉬운 적은 없었지만, 계속 성공해왔잖아. 우린 바른길로 가고 있어.”
[너는 애가 되게 긍정적이야. 꼭 미래라도 보는 것처럼.]
오히려 성필은 미래를 안 볼 때 더 긍정적이지만, 아무튼.
[유선 씨는 제안 받아들이셨어? 바로 오신대?]
“지금 아는 사람 통해서 물어보는 중.”
[알겠어. 야, 진짜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만약 유선 씨가 온다고 치면, 돈을 얼마 드려야 해?]
“……안무가로서 부르는 거니까, 안무가의 페이로 드려야 하지 않을까?”
서유선은 당장 컴백을 선언하더라도 연예계에 자리를 잡을 만한 실력자이다.
게다가 아직도 많은 ‘장막’들이 다키스트의 완전체 컴백을 기다리고 있다.
서유선이 앨범을 공개하지 않고 콘서트를 열더라도, 좌석 수천 개를 매진시키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서유선은 평범한 페이를 받고 프로젝트에 가담해줄까?
[막말로, 우리가 유선 씨 이름으로 광고만 해도 관심 엄청나게 받을 거 아니야. 그 값까지 쳐달라고 하면 곤란하지 않아?]
“곤란하지…….”
[얘 봐라. 아예 그쪽은 생각도 안 했네? 너 진짜 서유선 보고 싶단 팬심으로 일 진행하려는 거 아니지?]
“아니야. 아름이도 그렇고 다들 날 무슨 아이돌에 미친 사람으로 보는데…….”
[아니야?]
“맞긴 한데,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아.”
[에리카.]
손혜빈은 이름 하나로 성필의 반론을 차단했다. 성필도 할 말이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암튼 알겠어. 그렇게 알고 있을게.]
손혜빈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성필을 비웃으며 통화를 끝냈다.
“……그럼 이제.”
미사토와 만나러 갈 시간이다. 미사토가 성필의 제안을 서유선에게 대신 전달해주기로 했고, 오늘은 그 답이 돌아오는 날이다.
성필은 오늘을 너무 기대한 나머지 평소보다 30분 일찍 출근하기도 했다.
그는 미사토가 출근할 본부장실 앞에서 기다렸다. 아직 비서들조차 자리를 잡지 않은 시각이었다.
‘아마 바로 네,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오진 않겠지.’
성필의 예상대로라면, 최소한 서유선과 한 번 만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럼 성필은 서유선과 대화를 나눈 후 그의 영입 건을 고려하면 된다.
‘내가 유선 씨를 안무가나 퍼포먼스 디렉터로 초빙하려는 건 감 때문.’
그 감은 장하양을 발견해냈을 때와 닮아 있었다. 믿고 싶으며, 믿음 끝에 보답이 돌아오리란 막연한 느낌이 온다.
멍하니 서유선이 추었던 퍼포먼스를 회상하고 있자니 폰이 울렸다. 미사토인가 싶었는데 신아름이었다.
“응, 우리 딸. 아침 잘 챙겨 먹었어? 아빠는 지금 회사에 막 도착했는데.”
[아빠 말고 오빠.]
“오빠라고 부르니까 죽고 싶다면서.”
[오빠.]
“…….”
[맞네요, 죽고 싶어요. 특별히 종신 팀장님 시켜드릴게요.]
영원히 신아름의 팀장님인가.
신아름이 아이돌 은퇴하고 나서도 팀장님……. 그럼 성필은 무엇의 팀장일까?
[어디 계세요?]
“나 지금 미사토 본부장님 사무실 앞.”
[갈게요.]
“응?”
전화가 끊겼다.
몇 분 후, 신아름이 정말 나타났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탐탁지 않은 티를 내며 성필의 앞에 섰다.
“팀장님.”
“응?”
“진짜, 지인짜, 서유선 선배님 퍼포먼스 디렉터로 쓰려고요? 진심이에요?”
“꼭 디렉터로 초빙한다는 게 아니라, 능력 있으신 분이니까…….”
“아니, 뭘 보고요?”
‘뭘 보고’라니.
서유선과 혼신의 12연속 퍼포먼스 대결을 펼쳤으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건가. 하지만 성필은 신아름을 이해했다.
‘얘가 오랜만에 질투하네.’
초창기 케이어스를 향한 경쟁심과 맞닿아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신아름은 성필이 다키스트에 얼마나 빠져 있었는지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다키스트가 성필이 바라는 이상향에 발을 걸쳤단 것도 안다.
‘아름이의 꿈은 최고의 아이돌.’
그건 동시에 성필의 꿈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아름이 최고의 아이돌을 노리기로 한 건, 오로지 성필 때문이었다. 그녀는 성필과 2인 3각으로 최고를 향해 나아간다.
최고의 아이돌이란 그녀가 성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고, 최후의 결승선에서 함께 터뜨릴 샴페인이어야 한다.
그런데.
‘서유선 씨는 이미 최고의 아이돌이셨어.’
신아름은 서유선이 성필의 동경과 관심을 가져갈 게 두려운 것일 터다.
성필은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신아름은 툴툴대면서도 그의 옆에 앉았다.
“내가 유선 씨를 뵈려는 건 오직 안무가로서의 모습 때문이야. 네가 유선 씨 방을 봤어야 해.”
“이미 팀장님이 말씀해주셨잖아요. 방 전체가 안무가들 비디오로 채워져 있다고…….”
“아라만 봐도 몇 년 동안 춤을 췄어. 그것만으로도 안무 창작이 가능한 수준이야. 몇 년 전엔 한국 스트릿 댄스 대회에서도 큰 성적을 거뒀고. 만약 아라가 아이돌이 안 되고 계속 춤을 팠으면, 세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플레이어가 됐을 거야.”
이를테면, 서유선은 조아라의 강화판이다.
아이돌로서 방송 안무에 정통하면서도, 현대 무용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분석해온 인물이다.
서유선보다 경험이 한참 부족한 조아라조차 안무 창작이 가능하며, 소녀연맹의 퍼포먼스에 관여할 정도인데 서유선의 실력은 어떻겠는가.
신아름은 그것을 이해했기에 대꾸 없이 발만 휘적였다.
“아라가 짠 계획, 이번 프로젝트의 퍼포먼스 디렉터는 일단 아이돌 댄스에 능숙해야만 해. 그래야 아이돌을 중심에 두고 다른 춤들을 종합할 수 있어. 난 유선 씨가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해.”
“그래도…….”
그래도, 다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성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너 진짜 내가 유선 씨 팬심으로 데려오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팀장님은 몰라요.”
“뭘 몰라?”
“팀장님이 서유선 선배 볼 때 어떻게 보는지 모른다구요. ‘뉴아사’ 때도 다키스트 공연 무편집본 보고는 눈물 펑펑 흘렸으면서…….”
“펑펑은…….”
“펑펑 흘렸어요.”
성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딸에게 이기려고 하는 아빠만큼 추한 게 또 없으니까.
“아름이는 유선 씨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게 싫어?”
“선배님이 들어오는 게 싫은 게 아녜요. 팀장님이 시도 때도 없이 선배님한테 들러붙을 게 싫은 거지.”
신아름이 불안한 듯 양손을 꼭 모았다.
“비교되잖아요…….”
신아름은 이전에 서유선에게 퍼포먼스를 배웠던 때를 회상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자랑스러운 재능으로도 서유선의 퍼포먼스를 완벽히 따라잡지 못했었다.
우사인 볼트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 한다더라도 그의 기록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최고의 아이돌.
그 광채를 직접 마주하자 신아름은 겁먹은 것일지도 몰랐다.
“팀장님 나중에 유선 선배 프로듀싱하겠다면서 막 가버리는 거 아니죠?”
성필은 정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너 유선 씨가 몇 살인 줄은 알아? 이제 서른이셔.”
“2세대 아이돌분들 서른 넘어서도 컴백 잘만 하시던데요 뭐. 앨범도 잘 파시고.”
“아…….”
확실시 가로 엔터가 서유선을 프로듀싱할 수만 있다면 흑자는 확정이다.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내가 감히 유선 씨를 프로듀싱해도 될까? 그리고, 할 수 있을까?’
이미 완성된 조각을 굳이 더 손대는 기분이다.
“지금 고민해요?!”
“아, 아니. 고민 안 했어.”
“방금 말 더듬었잖아요!”
“안 더듬었어. 그리고 비교되긴 무슨. 세상 누구랑 아름이를 비교하겠어.”
이건 진심이다.
전생에서 신아름의 한계를 보았던 성필로선, 그녀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녀는 곧 삶의 전성기에 다다른다. 예술가로서의 정신과 신체, 그리고 경험이 상승을 거듭하여 마침내 최고점이 교차하는 시간.
“진짜예요? 서유선 선배님 들어와서도 막 저 소홀하게 안 대하죠?”
“전제부터 틀렸잖아. 만약 유선 씨가 오면 그냥 프로젝트 참가자로 오시는 건데, 내가 뭐 그렇게 만날 때가 많겠어.”
“약속해요. 유선 선배 프로듀싱 안 하기로요.”
결론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 할게.”
성필은 기꺼이 신아름과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비서들이 출근하는 게 보였다. 미사토와 함께.
성필과 신아름이 몸을 일으켰다.
미사토는 둘이 기다리는 것을 보더니 놀라면서도 반갑게 인사해주었다.
“두 분이 어쩐 일이세요?”
“어제 답을 빨리 듣고 싶어서요.”
“아…….”
미사토가 쓴웃음을 떠올렸다.
“유선이가 힘들겠대요.”
“……네?”
이렇게 간단하게 NO가 나온다고?
성필은 좌절하여 입술을 벌벌 떨었다. 그때 옆에서 킥킥 웃음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신아름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아, 이해했다.’
아빠들이 딸을 괴롭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어, 어떻게 해도 안 될까요?”
성필이 묻자 미사토의 쓰디쓴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 * *
미사토는 서유선에게 가볍게 말을 건넸다. 가로 엔터의 박성필 이사님이 너를 안무가, 혹은 퍼포먼스 디렉터로 초빙하길 바란다고 말이다.
저녁 식사 자리의 간단한 담소였다.
이 제안을 읊는 미사토는 활기차기까지 했다.
“어때?”
미사토가 그리 물었다. 그리고 당연히 ‘내가 무슨’이란 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서유선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시선을 살짝 돌린 채 희미한 미소를 띠고는,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고민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것을 보고 미사토의 표정이 굳었다.
‘왜 고민하는 거야?’
당연히 거절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유선아, 너는 밖에도 잘 못 다니잖아.
새로운 사람들과 말을 섞길 꺼리잖아.
그래서 웬만해선 집에만 있잖아.
너는 나를 떠날 수 없잖아.
왜 고민하는 거야.
알고 있어? 네가 가로 엔터의 안무가가 된다는 건, 일본을 떠난다는 소리야.
나랑 못 만난다는 소리인데…….
‘왜.’
고민하는 거야?
미사토가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곤 은근한 투로 말했다.
“유선아, 설마 고민하는 거 아니지? 네가 모르는 사람 여럿이랑 같이 일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 이후로 무슨 말을 했는지, 미사토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조금 흥분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풀이 죽어선 체념한 미소를 띤 서유선이 보였다. 그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정한 눈웃음을 지어 주었다.
“미사토 말이 맞아. 나는…….”
그는 아이돌일 때와 달라지지 않은 환한 웃음으로, 오직 미사토만을 바라보고 말했다.
“못할 거야, 응. 편의점에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데, 퍼포먼스 디렉팅 같은 걸 할 순 없겠지. 민폐만 될 거야. 미사토가 맞아. 박 이사님껜 죄송하지만 거절한다고 전해줘.”
미사토는 안심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서유선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자신이 서유선을 더 필요로 한다고.
동시에 양가적인 감정을 품었다.
자신은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한 것일까. 아니면 마침내 펼쳐지려던 그의 날개를 다시 한번 꺾은 것일까.
* * *
성필은 진땀을 빼면서 미사토에게 여러 차례 부탁했다. 그것을 미사토는 ‘정말 죄송하지만’으로 시작하는 말로 전부 회피했다.
서유선과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해도, 근래엔 어렵다는 말로 피해 갔다.
그걸 보면서 신아름이 생각했다.
‘이상한데?’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성필에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서유선이 디렉터로 선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성필이 다른 사람에게 저토록 비굴해지는 것을 보자니 화가 치밀어오르려고 한다.
무엇보다.
‘이 아줌마 거짓말하는 거 같은데.’
신아름은 서유선의 디렉터 선임을 막으러 왔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했냐면, 미사토의 집에서 서유선과 꽤 깊은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라면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기에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미사토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날 서유선과 나누었던 대화와는 정반대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죄송해요 박 이사님.”
대화가 끝났다.
성필은 한숨을 내쉬면서 사무실로 돌아가는 미사토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래, 쉽게 될 리가 없지…….”
“팀장님.”
“응?”
“직접 만나봐요.”
신아름이 폰의 액정을 보여주었다. 그곳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성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서유선 선배님]
신아름이 그녀 특유의 매력적인 눈웃음을 보였다.
“어때요, 저 잘했…….”
“왜 남정네 번호가 폰에 있는 거야아아아아!”
“아, 그쪽?”
성필은 두 가지 의미로 흥분해선 신아름에게서 폰을 받아들었다. 미사토가 사무실로 들어간 것을 단단히 확인한 후, 사무실과 멀어지면서 서유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당황한 서유선의 음성이 들려왔다.
[후, 후배님?]
“바, 박성필인데요?”
성필이 자신의 뺨을 짝 때렸다.
“가로 엔터 박성필 이사입니다.”
[아, 아아, 박성필 이사님…….]
“만납시다.”
성필이 또 자신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목소리는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좀 그만 긴장하고 제대로 말 좀 해!’
신아름이 남자의 번호를 가지고 있단 것과, 미사토 몰래 서유선과 접선한다는 감정이 혼란스럽게 뒤엉켜 성필의 혀를 얼어붙게 했다.
그가 입술을 꾹꾹 물면서 입 주변 근육을 풀던 중, 답이 돌아왔다.
[네, 그, 언제 뵐까요?]
“으엑?”
“역시.”
신아름이 헛웃음을 뱉었다.
“그 아줌마 처음부터 끝까지 다 거짓말한 거네.”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간다만, 괘씸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