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화
성필이 머금은 긴장감과는 반대로 서유선과의 접선은 부드럽게 이루어졌다.
그와 조만간 직접 만나기로 약속한 후, 성필은 얼떨떨하게 뺨을 쓸었다.
‘미사토 씨의 이야기를 듣고 전부 포기하고 있었는데.’
신아름은 이미 멀어져 버린 미사토의 집무실을 노려보고 있었다.
“거짓말이라니?”
“딱 보면 모르겠어요? 그 아줌마가 자기 남자친구 떠나보내기 싫어서 거짓말한 거잖아요.”
만약 서유선이 가로 엔터가 제시한 프로젝트를 수락한다면, 그는 당분간 한국으로 오게 될 것이다. 그럼 미사토와 떨어져야만 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고작 몇 개월일 텐데.
‘물론 그 몇 개월도 치명적이긴 하지.’
거리가 멀어져서 헤어진 커플의 이야기는 발에 챌 정도로 많으니까, 미사토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미사토가 걱정하는 건 그뿐만이 아닐 터다.
‘만약 유선 씨가 이번 일에 재미를 붙이고 엔터계로 복귀하기라도 한다면, 두 사람 사이는 거의 파탄 나는 거니까.’
국가라는 거대한 장벽을 사이에 두고도 사랑을 유지할 수 있을 리 없다.
이 상황은 인류의 유구한 역사 동안 되풀이된 오랜 난제였다. 애인의 바람이 먼저인가, 그와 나 사이의 사랑이 먼저인가.
성필은 마일스 데이비스와 그 애인이었던 프란시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마일스는 배우이자 댄서였던 애인의 뮤지컬 연습 현장으로 찾아와 ‘일은 전부 때려 쳐’라고 했었다.
전도유망한 배우였던 프란시스는 마일스를 사랑했기에, 기꺼이 주부가 되었었다. 그리고 그녀는 매일 자신의 무용화를 몇 시간이고 넋 놓고 바라보았다던가.
‘애인의 꿈을 응원하고 품에서 떠나보낼 줄 건가, 아니면 계속 곁에 두고 사랑할 건가.’
어느 쪽이 정답일지,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으리라.
성필은 미사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곤 그녀의 태도를 납득했다. 그러나 신아름의 설명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나한테 거짓말했다기엔, 유선 씨는 내 제안을 알고 계셨어. 적어도 미사토 씨는 유선 씨한테 제안을 정확히 전달하신 거야.”
“그럼 선배님이 팀장님 제안 거절한 게 되잖아요. 근데 왜 다시 만나기로 한 건데요?”
“…….”
“그 아줌마가 반대한 거예요. 억지로 단념시킨 거라고요.”
신아름은 화가 난 듯했다. 성필로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반응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서유선을 걸고넘어지길 반복한 그녀다. 그런데 그녀는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감에도 화를 내고 있다.
“안 되겠다. 가서 따져야겠어요.”
그제야 성필은 그녀가 왜 화났는지 알았다.
신아름은 성필을 대신해서 화를 내는 것이다. 그가 당한 부당한 처사에 분노하고 있었다.
성필은 신아름의 팔을 잡아 멈췄다.
“그러지 마.”
“팀장님은 화도 안 나요? 비즈니스적인 제안에 거짓말로 응수한 거라니까요? 기만이잖아요.”
“아름아, 사랑은…….”
성필은 신아름에게 미사토의 마음을 이해시키려 했으나, 곧 말로 할 수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저 한숨을 쉬면서 신아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이성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어.”
“무슨…….”
“내가 박재환 PD님한테 화냈던 거 기억해?”
신아름이 김민주와의 특별 무대에서 마음대로 안무를 고쳤을 때, 박재환 PD는 길길이 날뛰었더랬다.
성필은 그것을 보고 마주 화를 내며 아주 고래고래 소리까지 쳤었다. 추후 일이 불리하게 돌아갈 것을 뻔히 알고서도 말이다.
“그랬으면 안 됐잖아. 경섭이의 태도가 옳았어. 옳았는데, 난 옳지 않은 길을 택했어.”
“……사랑 때문에요?”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어?”
“……살짝요.”
역시, 모든 종교와 도덕의 황금률인 역지사지는 가장 좋은 이해 수단이다.
“미사토 본부장님을 너무 탓하지 마.”
“그래서 어쩌실 거예요? 아줌마랑 선배님 사이 갈라놓을래요?”
“유선 씨가 이 일을 받아들인다고 무조건 갈라지는 게 아니잖아. 어떤 일을 벌일 땐 그런 식으로 결과를 단정하면 안 돼.”
“그러면요?”
“각자의 입장을 확실히 주지시켜야지.”
성필은 단지 서유선의 바람을 알아볼 것이다. 그가 진실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말이다.
둘은 소녀연맹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연습실로 향했다. 신아름은 성필을 감시하기 위해 일찍 오느라, 스케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신아름은 성필과 있는 시간을 늘리려는 듯 일부러 걸음을 늦추었다.
“팀장님, 만약 내가 꿈 때문에 어디 멀리 간다고 하면요. 그럼 팀장님은 나 말릴 거예요? 막 떠나지 말라고 하면서요.”
“네 꿈인데 내가 어떻게 막겠어.”
신아름이 한숨을 쉬었다.
“서유선 선배님이 마냥 불쌍한 게 아니네요. 오히려 행복할 수도 있겠어요.”
“내가 잡아줬으면 좋겠어?”
“몰라요.”
“아름아 가지 마아. 계속 나랑 있어 줘어.”
“아 됐어요.”
미사토가 서유선을 잡은 게 옳은지는 모르겠고, 일단 아름이가 떠난다고 하면 무조건 잡아야겠다.
* * *
시계 알람이 울렸다. 서유선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평소보다 몇 시간은 더 일찍 일어났다.
죽을 것 같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켜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마지막으로 챙이 깊은 모자를 눌러쓴 그는 현관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은 그가 멈칫했다.
“…….”
이 문을 열면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굳이 기자들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따라붙으면서 영상과 사진을 마구 찍을 것만 같다.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힌다.
‘그냥 못 간다고 할까?’
성필에게 문자를 보낸 후 다시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사토가 돌아오면 같이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서유선은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항구 속에서, 다시금 고요와 만족을 향유할 것이다.
영원토록 행복한 낙원 안에서 말이다.
“…….”
서유선은 눈을 질끈 감고 문고리를 꽉 쥐었다. 그것을 돌리려던 순간, 비밀번호를 누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하는 동안 문이 열렸다.
미사토였다.
“유선아?”
그녀는 외출 준비를 마친 서유선을 보고 적잖게 놀란 듯했다. 서유선은 그녀가 이토록 빨리 올지 몰랐기에 놀랐다.
당황이 만들어낸 정적이 둘을 감쌌다.
이윽고 미사토가 추궁하듯 물었다.
“어디 가?”
“바, 박성필 이사님 뵈러.”
“뭐?”
미사토는 저녁 찬거리가 든 봉투를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서유선의 어깨를 짚었다.
“어떻게 연락을, 아니. 너 안 하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또 이사님을 만나러 가는 거야?”
서유선은 말 문이 막혔다.
그 틈을 타 미사토가 말을 총알처럼 쏘아댔다.
“몇 년 동안 좋아졌잖아. 네가 왜 은퇴했는지 잊어버렸어? 또 남들 기대나 맞추면서 살아갈 거야? 네가 아닌 채로? 그래봤자 행복하지 않단 거 이미 알잖아, 깨달았잖아. 그런데 왜 다시 돌아가려고 해?”
아니, 왜 나가려고 해?
이렇게나 안전하고 풍족하며 고요한 낙원을 내버려 두고, 어째서 폭풍우 치는 바다로 나가려 해?
다시 망가지고 부서져서 돌아올 거니?
다시 상처를 입어 눈물을 쏟아낼 거니?
다시.
“남을 위해서 살려고?”
“…….”
“유선아.”
미사토가 서유선을 꼭 안았다.
“넌 그런 일에 어울리지 않아. 사회를 견디기엔 넌 너무 여린 아이였어. 이제 겨우, 이제야 겨우 밤에 울지 않게 됐잖아. 갑자기 비명을 지르지도, 동료들의 이름을 부르짖으면서 넋을 놓지도, 그 모든 일을 안 하게 됐잖아. 이제야 겨우 좋아졌는데, 왜 이러는 거야?”
미사토의 말은 바르기 그지없었다.
서유선은 다키스트가 해체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데뷔할 때도 그랬으나, 그는 현재도 어린아이나 다름없다.
어린아이인 채로 사회에 나가봤자, 또 이전처럼 상처받고 찢기고 발가벗겨져 돌아오게 될 것이다.
“왜?”
미사토가 물었다.
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서유선은 답하려 했다.
그가 입술을 뻐끔댔다.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나왔다.
“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미사토가 포옹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길에서 비켜섰다.
“가.”
그리고.
“아…….”
서유선은 신음을 내며 무릎을 꿇었다.
길이 생기고야 깨달았다.
자신은 저 문 하나도 홀로 넘을 수 없음을.
미사토가 미련 없이 ‘가’라고 한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고독이 찾아와 그를 무릎 꿇렸다.
무릎 꿇은 채 바닥을 보며 오열하는 서유선. 그런 그를 미사토가 다시금 다정하게 감쌌다.
* * *
“안 오시네, 결국.”
성필은 아쉬움을 삼키며 앉은뱅이 테이블 위의 찻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원룸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 도쿄 프라이빗 호텔. 호텔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원룸 빌딩을 개량하여 숙소로 쓰고 있는 곳이었다.
일본식으로 꾸며진 방 안엔 원형 테이블과 텔레비전, 구석에 곱게 개어진 이불이 전부였다.
돈 없는 도쿄 여행객들을 위한 숙소이자, 서유선의 특성을 감안하여 성필이 특별히 마련한 미팅 장소였다.
“팀장님, 룸서비스 시킬까요?”
한쪽 구석에선 신아름이 엎드려 누운 채로 메뉴판을 살피고 있었다.
룸서비스라고 해봤자 차나 다과가 전부였다. 크기는 작아도 나름 호텔 분위기를 내려 노력한 게 보였다.
저런 걸 주문하는 사람은 일본에 처음 여행 온 외국인 정도겠지만.
“뭐 있는데?”
“차 종류들이랑 일본 전통 과자? 근데 다 마트에서 파는 싸구려 같아요.”
“난 됐어.”
신아름은 서유선에게서 ‘못 가겠다’는 문자를 받은 후부터 묘하게 들떠 있었다.
‘여행 온 기분이 들어서 그런 걸까.’
서유선과의 미팅을 위해 잡은 방이라 하더라도, 어쨌거나 여행객용 호텔이니까.
“여기 내일 12시까지죠? 나가서 화투 사 올까요?”
“얘는 진짜 놀러 온 것처럼 말하네. 그때까지 있지도 않을 거고, 이것만 다 마시면 나갈 거야.”
“이왕 왔는데 놀다 가지…….”
“이 좁은 방에서 너랑 둘이 뭐 하겠어.”
“화투요. 계속 궁금했어요. 엄마가 안 끼면 팀장님이랑 저, 둘 중 누가 더 강할지.”
“당연히 나지.”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그럼 해요. 질 때마다 소원빵.”
“소원빵…….”
이곳이 개인 풀이 딸린 리조트였다면, 신아름에게 질 때마다 풀장 다이빙 같은 것을 시켰어도 재밌을 것이다.
“팀장님 진짜 악마다.”
그런데 이 호텔 방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전통 일본식 인테리어란 것을 제외하곤 자랑할 만한 게 정말 아무것도 없다. 그마저도 조악한 수준이다.
창문을 열어도 들어오는 거라곤 도시의 밤 풍경과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뿐이었다.
“나중에 프라이빗 리조트 갈래요? 아, 재밌겠다. 나 중학생 때처럼 같이 수영도 하고요. 여름 가기 전에 한 번 가요.”
“성수기라 엄청 비쌀 텐데.”
“아니 그럼 리조트를 여름에 가지, 좀 싸게 놀아보겠다고 비수기 맞춰서 가을 겨울에 가요? 풀에 몸 담갔다가 얼어 죽어요. 맞다, 그럼 같이 수영복도 보러 가요.”
“음…… 그러고 보니 아깝네.”
“뭐가요?”
“몸 이렇게 만들어두고 자랑한 기억이 없어. 친구들이랑 바다 가서 추억 좀 쌓아야겠다.”
“34살에 헌팅이라도 하게요? 참 잘 먹히겠다.”
“내 나이가 어때서.”
“그리고 팀장님 친구들 다 결혼했잖아요.”
“그럼 나 혼자 해야지.”
“권강철 트레이너님이랑 피트니스 대회나 준비하세요.”
시답잖은 농담이나 주고받던 중, 신아름은 호텔 데스크와 연결된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다과와 음료를 주문하곤 바닥에 대짜로 뻗어 누웠다.
“팀장님은 유선 선배가 최애였죠?”
“그랬지.”
“특별히 좋아했던 이유라도 있어요?”
“하나의 이유에 딱 꽂힌 건 아니야. 어느 순간 좋아하게 됐고, 나중에 이유를 붙인 거라고 해야 할까.”
“어떤 이유요?”
“글쎄, 아마, 노력하는 모습.”
“팀장님 취향 바로 알겠다. 하양 언니 같은 모습 말하는 거죠? 계속해서 노력하는 거요.”
“누가 노력하는 사람을 싫어하겠어.”
“그거 알아요? 우리 연습생 때 팀장님이 하양 언니 막 편애한다는 소문 돈 거요.”
“사실 그 시절엔 편애가 맞았지.”
“미친, 왜요?”
“내가 제대로 잡아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넘어질 거 같았으니까.”
지금이야 워낙 건강하게 자라나서, 성필이 없더라도 어떤 폭풍우든 견딜 수 있게 됐다.
확실히, 신아름이 말했듯 성필은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서유선도 그러했었고 말이다.
“유선 씨가 처음부터 완벽했던 건 아니야. 각고의 노력으로 정상의 자리에 오른 거지.”
“그런데 그건…….”
‘뉴아사’ 당시 신아름은 다키스트의 공연 무편집본을 보았었다. 그때 서유선의 얼굴에서 읽었던 진득한 절망과 피로는 신아름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었다.
확실히 서유선은 정점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오른 게 아니었다.
뒤에서 등을 밀었기에 어쩔 수 없이 올라간 것이었다.
“아름아, 정상이란 건 누가 시켜서 오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럼 팀장님이 서유선 선배를 좋아했던 건 재능 때문이네요?”
“물론, 지금에서야 유선 씨가 큰 부담감을 짊어졌단 걸 알지. 옛날엔 몰랐었어. 몰랐었던 나여서 볼 수 있는 것도 있었어.”
“어떤 거요?”
“다키스트 콘서트 때.”
성필은 순간 기적을 경험한 적이 있다.
다키스트의 앨범이 고작 서너 개이던 시절의 콘서트.
최후의 피날레 도중 갑자기 서유선이 움직임을 멈췄었다. 그는 퍼포먼스의 도중, 록스타가 애드리브로 동선을 옮기듯이 중앙으로 나왔다.
그리고 가만히 멈춰서 관객들을 바라보았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관객들이 전부 입을 다물었다. 화면에 비친 서유선의 얼굴을 보고, 그의 눈동자 속에 빨려 들어가 그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진공상태였어.”
시끄러운 음악이 흐르든, 밴드가 연주를 하든, 그것을 전부 지금과 상관없는 배경으로 만드는 힘이었다.
고작 몇 걸음만으로 모든 주의를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는 아우라. 그로 인해 발생한 진공상태에서 서유선은 조용히 관객석을 응시했다.
그리고 성필은, 관객들은 깨달았다.
지금 자신들은 지배당하고 있다.
그리고 서유선은 지배하고 있다.
무대를 장악했다.
무엇에?
“유선 씨의 아우라에 지배당한 거야. 감히 소란을 허용하지 않는, 오직 자신에게만 이목을 모으는 힘이었어.”
그는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타이밍에 맞춰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더니 본인의 파트를 부르짖었다.
그때 관객석을 뒤덮던 모든 침묵이 깨지고, 오로지 서유선의 목소리만이 파도가 되어 세상을 휩쓸었다.
그의 목소리만이 세계의 전부가 되었다.
“그 외침은 승리 선언이었어.”
그때 서유선은 확신했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정상에 오를 자격이 있단 것을.
무아지경에 빠져 회사가 짜놓은 틀에서 벗어난 몇 초의 순간, 그는 오직 자신만의 아우라를 확인했던 것이다.
“누구에 대한 승리요?”
“자기 자신. 그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런 느낌이 아니었어. 비록 무대에 서는 건 힘들고 고된 일이지만, 자신은 무대를 사랑한다.”
서유선이 관객석을 둘러보았던 건, 아마 자신이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인간인지 알아보려고 했던 것일 터다.
“고통과 바꿔서라도 오를 가치가 있다. 사랑하니까. 그리고 그 사랑이 가진 힘을 확인한 순간, 아이돌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던 걸 거야.”
“잘 이해가 안 돼요. 결국 팀장님은 유선 선배의 뭐에 반한 거예요? 재능? 노력?”
“아름아.”
성필은 장황한 이야기를 마칠 요량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 세상을 편하게 살 방법이 무수히 많은 인간이, 재능 넘치는 인간이, 굳이 예술이 아니어도 살아갈 방법 따위 차고 넘치는 인간이, 예술에 목숨을 걸고 상처받으면서도 계속해서 나아가는 모습은 너무 아름답지 않아? 동경하게 돼.”
마치 각고의 고난을 뚫고 마왕을 죽이는 용사처럼 말이다.
그 힘으로 왕국을 침략하여 왕위를 찬탈하거나, 적당한 영지를 얻어 권력자로 행세할 수도 있을 텐데, 굳이 바른길로 나아가 아름답게만 피어나려는 모습.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들은 현대의 영웅이었다.
성필은 황금 권좌에 앉은 샤를 대제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중세의 어린아이처럼, 영웅의 이야기를 흠모한다.
“보고 있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거야. 물론,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다는 게 아니야. 정상으로 향해가는 여정과 그 스토리 자체를 사랑해. 행복하게 즐기면서 목표에 다다르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내가 데려왔으니까, 책임을 질 거야.”
“저는 이미 행복해요. 더 행복해질 수도 있긴 한데.”
“어떻게?”
“이스터에그예요.”
신아름은 망설이다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결국 서유선 선배는 불행해졌잖아요. 그런데도, 아직도 그런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서유선 선배 대인기피증 같던데, 프로젝트에 참여해도 힘들어하시지 않을까요. 팀장님은 그때의 선배를 다시 보고 싶어서 가로 엔터에 부르려는 거예요?”
“유선 씨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전처럼 괴로워하시진 않을 거야.”
“왜요?”
“누군가 등을 떠밀어서 선택한 게 아닐 테니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신아름이 주문했던 차와 다과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신아름이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모자를 깊이 눌러쓴 서유선이 있었다. 그 뒤엔 피곤한 얼굴의 미사토 또한 있었다.
그녀가 쓰게 웃었다.
“아직 파토 난 거 아니죠?”
* * *
서유선을 달랜 후 방으로 돌려보내고, 미사토는 그가 좋아하는 감바스를 만들었다.
냄비 안의 끓는 기름처럼 미사토의 마음도 들끓었다. 그녀는 기름을 바라보다가 눈을 딱 감았다.
‘좋아하는 거라고, 하고 싶은 거라고 무작정 응원할 수는 없어.’
세이코가 나가고 싶다기에 ‘뉴아사’ 출연을 허락해주었다가 어떤 꼴이 났는가.
그땐 미사토도 마에 씌었었다. 세이코의 보호자 역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었다.
게다가 협력사인 가로 엔터에도 엄청난 부담을 지웠고 말이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사는 건 어린애뿐이다. 아직 세상이 어리광을 받아줄 나이에만 할 수 있는 게 있다.
‘유선이는 환자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는데, 다시 밖으로 내몰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난 옳은 결정을 내렸어.’
미사토는 감바스를 예쁜 그릇에 담아 쟁반 위에 올렸다. 그것을 들고 서유선의 방으로 향했다.
“유선아.”
문을 여니, 어둠 속에서 모니터만 바라보는 서유선이 눈에 들어왔다. 화면엔 바슬라프 니진스키가 공연한 ‘목신의 오후’가 나오고 있었다.
서유선이 집중하는 듯하여, 미사토는 쟁반을 바닥에 내려두고 잠시 기다렸다.
살아있는 두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화면 안의 사자(死者)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춤을 펼쳤다.
서유선의 눈은 불가능한 춤, 무용의 신, 묘사불능의 미(美)라고 불린 남자의 춤을 멍하니 쫓았다.
‘유선이가 안무가가 된다, 라…….’
아마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유선은 조아라가 제시한 비전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발레, 현대 무용, 어반 댄스, 스트리트 댄스를 가리지 않았으니까.
완전한 창작은 불가능하더라도, 안무의 종합은 멋들어지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익히 알려졌듯이, 고집 센 예술가들의 결과물을 하나로 합치는 건 말도 안 되는 수고를 요구한다.
‘유선이는 의견을 합치는 과정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무너질 거야.’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혼동해선 안 된다. 많은 이들이 몰락하는 이유의 태반은 그러한 착각이다.
미사토는 다시금 자신의 선택을 옳다고 여겼다.
그때 서유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선…….”
자신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렸나 싶었는데, 서유선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니진스키와 함께 ‘목신의 오후’를 추었다.
요정에게 반한 나무의 신은 그녀에게 구애한다. 허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요정은 옷가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목신은 주변을 살피고 요정의 옷가지를 집어 든다. 그리고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자위한다.
처음 보는 사람은 대체 목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어리둥절하겠지만, 이 무용 작품의 줄거리를 아는 미사토는 서유선의 춤이 자위를 묘사한 것을 알았다.
발레를 인공적인 아름다움이란 감옥에서 해방시킨, 욕망을 예술적 표현으로 승화시킨 인류의 유산.
느릿한 음악을 따라, 서유선은 중력에 거부하는 상승의 동작을 이어가면서 목신을 연기한다.
몇 번이고.
“…….”
몇십 번이고.
“…….”
서유선은 춤을 춘다.
그의 가슴으로 땀과 함께 눈물이 흘렀다.
이윽고 미사토의 시야가 넓어졌다. 그녀는 서유선만이 아니라 서유선의 방을 보았다. 그가 몇 년 동안 갇혀 지낸 그만의 안전한 항구이자 낙원, 집을.
바닥 여기저기에 파인 자국은 그가 수천, 수만 번 반복한 춤의 흔적이었다.
벽을 가득 채운 비디오와 CD, 책은 그의 식지 않은 열정의 증거였다.
열정.
마치 사춘기에 이른 청소년의 방처럼, 서유선의 방은 그의 욕망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
미사토가 괴로운 신음을 뱉었다.
서유선이 춤을 추는 건 즐거워서라고 생각했다. 춤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는 건 취미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즐거워서다.
취미였다.
하지만 그건 어느 행위의 열화판이자 모방품에 불과했다.
“유선이 너…….”
서유선은 이 방에서 해소할 수 없는 욕망을 어떻게든 억누르려 춤을 추었던 것이다.
그건 자위였었다.
그는 어른의 세계에서 아이의 세계로 추방당한 인간이었다. 다시 어른의 세계로 돌아가려 하지만, 용기가 없어 방에 틀어박혀 자기 위로만을 거듭하는 어른아이였다.
그의 방바닥에 찍힌 발자국과 벽을 채운 자료들은 억눌린 욕망의 발현일 뿐이었다. 건전한 힘의 발산 따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미사토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씹었다.
고민이랄 것도 없었다.
미사토가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유선아.”
그제야 서유선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미사토를 보았다. 그가 웃었다.
아이돌일 때는 모두에게 보여주었던 미소를 오직 미사토에게만.
“아, 미사토. 언제 왔었어?”
지금부터, 미사토는 몇 년 동안 자신에게만 허락되었던 황금의 미소를 세상에 풀어놓을 것이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나가.”
서유선의 표정이 굳었다.
그에 미사토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나가자.”
서유선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청소년기에서, 세계를 향해 열린 성년기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는 상처받고 망가진 배였다.
겨우겨우 침몰하지 않고 항구로 돌아와 수리받았다. 그러나 다시 나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항구가 너무나 포근하고 따뜻하고 안전하니까.
물론, 항구는 안전한 곳이다.
그러나 항구에 박혀 있는 게 배의 목적은 아니다. 배는 험난한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다.
“같이, 나가자.”
영원히 항구에 있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 * *
“저는.”
서유선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말했다.
“이사님의, 아라 씨의 이상에 맞는 인간이 아닐지도 몰라요. 자리만 차지하고, 회사 돈만 갉아먹을 수도 있어요. 저, 저도 제가 어떡할지 몰라요. 이사님을 실망시킬 수도, 실망시킬 수도 있어요. 이, 이, 이사님이 기대하는 제가 아닐 수도, 아니면, 어떡하죠?”
서유선은 안쓰러울 정도로 떨었다. 그의 합류를 반대했던 신아름조차 불쌍하게 볼 정도였다.
그는 처음 심부름간 어린아이처럼 불안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바라는 건 지금의 유선 씨입니다.”
성필이 즉답했다.
“제가 바라는 건 미래의 유선 씨가 아니에요. 엄청난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혹시 재능을 드러내지 못했을지도 모를, 세기의 안무가일지도 모르는, 그런 유선 씨가 아니에요. 제가 보는 건 미래의 유선 씨가 아니라.”
서유선이 챙 아래에 감춘 눈을 천천히 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유선 씨예요.”
이윽고 서유선은 고개를 들어 성필과 마주 보았다. 그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순간, 서유선은 어째서 정호환의 시선만 받으면 주눅 들었는지 이해하게 됐다. 그와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정호환은 한 번도 서유선을 봐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가 본 건 미래의 서유선이었다.
그 모습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도달할 수 있을지조차 확신이 없는 미래의 이상향.
정호환이 본 건 미래의 서유선이며, 동시에 서유선과 완전히 다른 타인이었다. 그는 서유선을 녹여 이미 만들어진 주형에 부어, 그의 입맛대로인 인간을 새로 창조하려 했던 것이다.
“저는 그날 유선 씨의 퍼포먼스를 보고, 유선 씨의 이야기를 듣고, 유선 씨의 방을 보고 유선 씨를 섭외하길 바란 거예요. 유선 씨조차 모르는 가능성 때문이 아니에요.”
정호환은 서유선이 지니지도 않은 광채를 보고.
지니지도 않은 재능을 보고.
지니지도 않은 아우라를 보았다.
그랬기에 그의 시선은 그토록 폭력적이었다.
서유선은 몇 번이고 현재의 자신을 부정해야만 했다.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미래의 자신, 사실상 타인을 목표로 삼아 달려가야만 했었다.
“지금 유선 씨가 지니신 안목과 경험이 필요할 뿐이에요. 아이돌로 활동했고, 어반 댄스를 십 년 넘게 추어왔고, 현대 무용에도 정통하신 유선 씨요. 다른 누군가가 될 필요는 없어요.”
성필이 손을 더 멀리, 서유선에겐 더 가까이 뻗었다.
“와주실래요?”
서유선은 벌벌 떨리는 다리로 겨우 서 있었다. 이윽고 그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그 한 걸음이 전부였다.
장막의 안,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어두운 장소에서.
장막의 밖, 그림자조차 지지 않는 찬란한 광채 속으로.
“네.”
서유선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