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화
원래 장하양은 미아를 통해서 하루키에게 강의를 부탁하려고 했었다. 이전에도 그런 방식으로 하루키를 섭외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연락 자체가 끊긴 것이다.
문자도, 전화도, 라인으로도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성필이 웨벡스의 모델 에이전시 부서를 통하여 하루키를 불러야만 했었다.
“…….”
하루키는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아주 크게 박수를 쳤다. 장하양이 깜짝 놀랐다.
“하양, 강의는 이미 시작됐어. 강의엔 정해진 시간이 있고, 난 그 시간을 잡담으로 채우고 싶지 않아. 그게 내 프로 의식이야.”
“……응, 알겠어.”
그 답에 장하양의 눈빛도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자.”
“몰토 베네(아주 좋아, 피렌체 사투리).”
하루키의 강의는 원래 난이도가 높았다. 그가 제시하는 기대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강의는 유독 혹독했다.
하루키는 거의 장하양을 몰아붙이듯이 했다. 그는 그의 버릇인 박수를 짜증이 날 정도로 쳐대면서 장하양에게 말했다.
“하양만의 매력을 발산하는 거야! 연예인의 화보란 모델과 달라! 옷을 매력보다 너 자신을 드러내는 거야! 옷을 판매하는 힘은 하양을 향한 선망이야!”
장하양은 무의식적으로 포즈를 바꾸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서.
재즈 뮤지션들이 즉흥 연주를 하듯이.
이성보다 본능을 따라 포즈를 만들어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
개성적인 매력을 표출하기 위하여.
“더.”
하루키의 박수 한 번.
“더, 더.”
하루키의 호통 한 번.
“다시, 다르게, 너무 굳었어!”
그의 목소리와 박수를 따라 장하양은 끊임없이 포즈를 바꾸길 반복했다.
간간이 그가 들려주는 금과옥조를 따라 포징의 방향성을 바꾸거나, 아예 지금까지 취해본 적 없던 전위적인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하루키는 잘했을 때 ‘좋아’라 했고, 애매할 땐 ‘음’이라고 했고, 못했을 땐 ‘더’라고 했으며, 정말 못했을 땐 말이 길어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했다.
2시간이 지났다.
장하양은 간이 탈의실로 들어가 마지막 옷을 입었다. 옷을 갈아입던 그녀는 팔이 땀으로 눅눅해진 것을 깨달았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켜져 있는 공간에서 땀이 이렇게나 나기도 힘들 텐데.
장하양은 심호흡을 하곤 탈의실 밖으로 나갔다.
시계를 보니, 약속한 강의 시간이 끝났다.
‘아직 만족할 수준이 아니야.’
하루키가 만들어준 포징과 장하양이 OK 사인을 받은 포징은 겨우 십수 개에 불과했다.
그게 촬영 현장에서 괜찮은 평가를 받을 진 몰랐다. 촬영이란 포토그래퍼와 에디터, 브랜드 관계자의 요구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이다.
모델의 이해력과 즉흥적인 창의력이 중요하다.
‘아직 도달하지 못했어.’
장하양은 만족할 만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녀는 미안한 기색을 띠며 하루키를 보았다.
혹시 강의를 연장하거나, 촬영 당일까지 예정된 강의 횟수를 늘려도 괜찮은가 질문하려던 때.
“하양, 더 할 수 있겠어?”
하루키가 먼저 물었다.
“오늘만이 아니라, 이후로도.”
“이후?”
오히려 장하양이 부탁하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화색이 되어 ‘그래’라고 대답하기 전, 하루키가 먼저 말했다.
“돈은 안 받아도 되니까, 추가로 더 하자.”
하루키의 승부욕이 발동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는 무려 돈은 필요 없으니 강의를 연장하겠다고까지 말했다.
보그 재팬이란 잡지에 출연하기 때문일까.
만약 장하양이 좋은 결과물을 낸다면 하루키의 커리어에도 한 줄이 더 박힐 테니, 그가 열정적인 것도 이해가 갔다.
“나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 돈은 당연히 줘야지.”
“……아냐, 이후의 추가분은 공짜로 할게. 하양이 나한테 미안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돈을 써야 더 절박해지지 않겠어?”
“그것도 그렇네! 나야 돈을 더 받으면 좋지. 하양의 의지가 그렇다면…….”
갑자기 하루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얼마나 더 시간을 낼 수 있어?”
장하양이 빈 시간을 말해주자, 하루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시간 거의 다 쓸 수 있겠어?”
“응.”
“정말?”
“이번 촬영은 완벽하고 싶어. 시간을 얼마나 들여서라도 꼭 완벽해야만 해.”
그 대답에, 하루키는 이제껏 보여주지 않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장하양의 노력이 흡족하기까지 한 듯했다.
“10분 쉬고 시작하자. 수분 보충해.”
장하양은 바닥에 털썩 앉곤 스포츠 음료를 들이켰다.
“쉬면서 들어. 하양은 혹시 남자한테 사랑받은 적이 없어?”
장하양이 음료를 뿜었다.
“어, 어?”
“매력엔 여러 의미가 있어. 하지만 화보에서의 매력이란 오로지 시각에 의존해. 시각에 의존하는 매력이란 곧 매혹, 이성을 끌어들이는 힘과 같은 거지.”
그러고 보니 ‘후쿠요 히다카’ 패션쇼 전. 당시의 강의에서도 하루키는 ‘이성을 유혹하듯이’라는 말을 하곤 했었다.
그 때문에 성필을 허수아비 대역으로 세우기까지 했었으니.
하루키는 구석에 앉은 직원을 흘끗 보더니, 장하양에겐 대답하진 않아도 된단 듯 짧게 윙크했다.
“하양은 뭐랄까, 자기애밖에 느껴지지 않아. 자신감! 물론 좋은 거지. 하지만 그래선 표현할 수 있는 매력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어. 여러 스펙트럼을 표현하기엔 부족하지.”
“경험…….”
하루키가 ‘말하지 말라’는 듯 연속으로 윙크했다. 장하양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타인에게 받는 평가란 건 중요해. 인생에선 타인의 평가가 전부가 아니지만, 이 업계에선 타인의 평가가 전부잖아? 엔터테인먼트는 혼자선 성립하지 않는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하양이 가진 무기가 자기애뿐이란 건 큰 약점이지.”
“그렇다기엔 소유 언니는…….”
“소유?”
하루키가 ‘아’ 소리를 냈다.
“그 괴물 같은 여자 말이구나. 패션쇼에서 봤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인간으로 쓰면 그 여자가 되지 않을까 싶어.”
“언니는 어땠어?”
“그 여자는 광기와 맞닿았어.”
하루키가 과장되게 어깨를 떨었다.
“그 여자는 사랑도 자기를 닮은 사람이랑밖에 할 수 없을걸? 상대에게서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조각을 보는 거야.”
“그렇게까지 알 수 있어?”
“보여. 모든 행동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어. 그 여자는 홀로 도시고 국가고 문명이고 집단이야. 내적으로 완성됐고 완결됐어. 그래서 낼 수 있는 아우라야.”
“……나는 그렇게 못하고?”
“슬퍼할 게 아니야!”
하루키는 속단하지 말라고 했다.
“그 여자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쓸쓸해. 서로를 끝없이 비추는 만화경이지. 거울과 거울을 맞닿아 생기는 끝없는 공간. 신기하지만 지루해. 그에 비해 하양은 훨씬 열려 있지!”
“경험만 있다면?”
하루키가 쓰게 웃었다.
“그래도, 이해해. 어떤 남자가 하양을 반하게 할 수 있겠어? 하양이 다른 남자의 호감을 얻으려고 아양을 떠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는걸. 혹시 있다면, 있었다면, 그 사람 앞에 섰을 때를 떠올려 봐. 어떤 식으로 자기 어필을 했는지.”
“……창피하네.”
“흑역사야?”
“막상 떠올리니까 창피해.”
“오히려 좋아.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경험은 아주 소중하거든.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매력을, 심지어 없는 매력까지 전부 뽑아내려고 하지. 좋아, 그때를 떠올리면서 해볼까!”
하루키가 박수를 치자 장하양은 자동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시작!”
강의는 아까보다 더욱 혹독했다.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포징이 가능해졌으니.
하루키는 지친 눈빛으로 최후의 박수를 쳤다.
“이제 끝내자.”
“수, 수고했어 하루키.”
“하양도.”
하루키는 4시간 동안 일어서 있었는데도 전혀 지친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녹초가 된 장하양을 내버려 두고 빠르게 짐을 챙겼다.
그는 어깨에 가방을 메곤 손을 흔들었다.
“하양, 휴식을 잘 취하…….”
“미아는 어떻게 됐어?”
당장 떠날 기세였던 하루키가 멈칫했다.
강의 때는 하루키가 장하양을 몰아붙였다면, 이번엔 장하양이 하루키를 몰아붙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알고 있지?”
“…….”
“이상하잖아. 모든 연락이 끊겼단 건.”
“…….”
“나한테 얘기하지 못할 일이야?”
장하양은 ‘친구인데도’란 말로 물음을 끝맺었다. 하루키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지친 손짓으로 얼굴을 쓸었다.
미아는 이 말을 하지 말라곤 안 했었다.
오히려 하길 바라는 뉘앙스를 풍겼었다.
‘하지만 그건.’
미아의 소심한 복수일 것이다. ‘너 때문에 나는……’이란 감정으로 시작하는 욕망 말이다.
비겁하지만, 미아는 장하양이 죄책감을 느끼길 바랐던 것이다.
“그래.”
하루키는 이야기해주려 했다.
하지만 그는 미아와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해주는 건 장하양을 위해서였다.
“미아는…….”
이야기가 진행된 건 약 3분.
그동안 장하양의 표정은 시시각각 굳어갔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장하양이 추궁하듯 물었다.
“나 때문에……?”
“미아는 모델을 그만뒀어. 미리 예약된 오디션만 끝내고 완전히 업계를 떠날 거야.”
장하양은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녀를 향해 하루키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하양을 무급으로라도 가르치고 도와주려 했던 건, 하양이 그저 그런 마음가짐으로 카메라 앞에 서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야. 미아가 보기에도 완벽하길 바라. 최소한, 미아가 본인의 노력을 탓하진 않게. 하양의 재능을 수긍할 수 있게.”
하루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미아가 자신이 쏟아왔던 노력을 싸구려로 취급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
“…….”
“하양, 도와줄 수 있을까?”
하루키가 앉은 장하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장하양은 오랜 트레이닝 때문에 지쳐서인지, 아니면 충격받아서인지 덜덜 떨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물었다.
“미아는, 어딨어……?”
그 목소리는, 하루키가 기대했던 패기와는 굉장히 멀리 동떨어져 있었다.
* * *
‘오늘로 끝이네.’
미아는 마지막 오디션이 이뤄지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후쿠요 히다카’였다.
오디션을 보러 오라기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어차피 떨어질 테니.
분명 마음이 무거워야 할 텐데, 후련해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아, 나는 이 일을 안 좋아한 거구나. 그래서 그만둘 때가 돼서야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거구나.’
미아는 힐을 신지도 않았다.
편한 운동화를 신었다.
옷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편안한 에스레저 룩으로 꾸몄다.
‘후쿠요 히다카’ 사람들이 보면 ‘나이키나 아디다스 홍보하러 왔어요?’라고 할 만한 복장이다.
미아는 커다란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곤 어슬렁어슬렁 건물 안으로 향했다.
‘참, 공교롭기도 하네.’
이 건물 안에서, 지금 장하양이 ‘보그 재팬’을 촬영하고 있다니.
건물에 들어서고서야 미아는 가슴이 무거워졌다. 오디션 때문에 긴장한 건 아니었다.
혹여라도 장하양을 만날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
미아는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도약하는, 절벽에서 낙하하는 새끼 독수리처럼 가볍게 걸었다.
떨어져 내려간다.
* * *
‘보그 재팬’ 촬영 현장.
이리에 아토무가 절망하여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저 애를 믿은 내가 바보지이…….’
장하양의 촬영은 절망적이었다.
물론 그럭저럭 괜찮지만, 그럭저럭 괜찮아선 안 된다. 진소유가 이전 촬영에서 감탄에 감탄을 끌어낸 이후니까.
아토무는 촬영장 구석에서 진소유와 대화하는 마하라를 보았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네. 그래, 승리의 미소라 이거지. 마하라……!’
아토무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만 그만!”
포토그래퍼도 한숨을 쉬면서 카메라를 내렸다. 시간당 수십만 원의 인건비를 요구하는 포토그래퍼였다.
그마저도 장하양의 잠재력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했다. 카메라를 내리는 그의 손길엔 안도감마저 담겨 있었다.
자격 미달인 피사체를 마주한 예술가처럼, 그는 온몸으로 ‘그만하고 싶다’라는 분위기를 뿜어냈다.
그 꼴을 보자, 아토무는 장하양에게 직진하던 방향을 틀어 포토그래퍼 앞에 섰다.
“당신 제대로 안 해?!”
“예, 예?”
수십 명의 스태프가 아토무를 쳐다봤다.
“그딴 식으로 한숨이나 퍽퍽 쉬면서 수만 엔이나 받아 가는 거냐! 그딴 식으로 굼뜰 거면 내셔널 지오그래피에 취직해! 사바나에 가서 저격수처럼 천이나 뒤집어쓰고 엎드려서 사자 무리 꽁무니나 찍으란 말야! 당신 내 작업에 다신 안 불러!”
포토그래퍼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토무는 장하양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검지 끝에 분노를 담아 그것으로 장하양을 손가락질했다.
“너, 하양……!”
“하양아.”
성필이 장하양의 손을 낚아채어 촬영 세트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성필은 아토무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양해를 구했다.
아토무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몇 번이고 헛웃음을 뱉었다.
“저, 저, 당최 이 무슨……!”
그러고선, 아토무는 세트장 바닥에 주저앉곤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 매니저를 믿어봐야지. 내가 지랄하는 것보다야 효과가 있을 테니.’
* * *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은 복도.
정적 속에 성필과 장하양이 마주 섰다.
장하양은 고개를 내렸고, 성필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윽고 성필이 물었다.
“하양아, 왜 그래?”
“…….”
“어디 아파?”
“……이사님.”
장하양이 겨우 고개를 들어 성필을 바라보았다.
“모르겠어요.”
“뭘?”
“제가.”
저따위가.
“이곳에 서도 되는지…….”
장하양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정과 꿈이 얽힌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성필이 즉답했다.
“하양아, 너 되게 오만해졌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