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505화 (505/760)

505화

진소유는 번화가의 큰 서점에 들렀다.

점원들은 진소유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일단 장신이어서 놀랐고, 그녀가 얼굴을 선글라스나 모자로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놀랐다.

진소유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신경도 쓰지 않고 여성잡지 코너로 갔다.

진열된 수십 개의 잡지 중 하나, 보그를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전화가 울렸다.

장하양이었다.

“응, 하양아.”

[보셨어요?]

“이제 보려고.”

[언니.]

장하양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진소유는 보려던 잡지를 진열대에 두곤 전화를 바로 받았다.

“응.”

[제 착각이라면 욕하시고 놀리셔도 돼요. 저는, 언니가 바라시는 마음을 드릴 수 없어요.]

수화기 너머로도, 진소유의 근처에도 침묵만이 있었다.

진소유는 원래 받고 있던 귀에서 반대편 귀로 전화를 옮겼다.

[죄송해요, 언니. 그 마음은…… 기쁘, 기, 기쁘지만 저는…….]

“알겠어 하양아.”

진소유는 전화를 끊곤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곤 보그를 집어서 계산대로 갔다.

남자 점원은 진소유의 외모에 넋을 잃었다. 계산이 느렸지만 진소유는 가만히 기다렸다.

“여, 여기.”

진소유는 계산이 끝나자마자 카운터에서 비키지도 않고 보그의 포장을 찢어버리고 내용물을 펼쳤다.

장하양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페이지 넘기기를 멈추었다. 한 장씩 파르르 넘기자, 대강의 윤곽이 드러났다.

합동 촬영 지면 2장, 진소유 개인 지면 3장, 장하양 개인 지면 3장.

동점이다.

“음.”

진소유는 고개를 주억이면서 카운터를 떠났다. 걸으면서 잡지를 보고 있자니 시야의 외곽에 쓰레기통이 들어왔다.

진소유는 장하양의 지면만 조심스럽게 뜯어내어 나머지 잡지는 쓰레기통에 박아버렸다.

그녀는 서점에서 나오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햇볕이 강해서였다.

핸드백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내어 귀에 착용했다. 어플로 들을 노래를 고르다가, 귀찮아져서 저장된 음악 중 랜덤 재생을 눌렀다.

익숙한 베이스 오스티나토(같은 악절을 반복하는 것)가 들렸다.

퀸과 데이비드 보위의 ‘Under Pressure’였다.

진소유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Mmm num ba de

움 눔 바데

Dum bum ba be

둠 붐 바 베

Doo buh dum ba beh beh

두 부 둠 바 베 베]

진소유는 햇볕이 쨍쨍한 거리를 걸었다.

그녀를 지나치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그녀는 고독했다. 귀로 들어오는 건 산 사람의 활기찬 목소리가 아닌 오직 음악뿐이었다.

그녀는 세상과 단절되어 걸었다.

“하아.”

하양아.

나는 내가 되고 싶었어.

네 앞에서라면 될 수 있을 거 같았어.

너는 나랑 닮았으니까.

[압박감이 나를 짓누르고

너를 짓누르지, 누구도 바라지 않았건만

압박감 속에서 건물이 불타고

가족을 두 갈래로 찢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고]

내가 가진 건 나약함뿐이야.

그걸 가리기 위해 가면을 썼어.

몸을 영혼보다 중히 여겼어.

외면만이 나의 자랑이었어.

페르소나 없인 사람들 앞에 설 수 없어서.

나는 내 나약함을 감추려고만 했지.

[괜찮아

세상이 어떤지 아는 건 끔찍한 일이야

좋은 친구들이 내보내달라고 외치는 것을 보며

내일은 더 나아지길 바라

짓눌린 사람들, 내몰린 사람들]

타인을 짓누르지 않으면 내가 약한 거 같아서.

내 약함을 들킬 거 같아서.

나는 나쁜 사람이 되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땐 그러면 안 됐는데.

난 나만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아서 그랬는데,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았나 봐.

[별것도 없이 머리만 어지러워

비는 내리면 대충일 때가 없지

내몰린 사람들

내몰린 사람들

세상이 어떤지 아는 건 끔찍한 일이야

좋은 친구들이 내보내달라고 외치는 것을 보며

내일은 더 나아지길 바라

짓눌린 사람들, 내몰린 사람들]

이해받고 싶어.

사랑받고 싶어.

누군가 내 가면을 뚫고 나를 봐줬으면 해.

내 나약함을 보고도 이용하거나 비웃지 않을 사람이었으면 해.

그래서 나랑 닮은 사람을 바랐어.

너를.

너의.

너의…….

[장님처럼 모든 걸 외면해

선을 안 넘으려 해도 잘 안 되네

사랑을 찾으려 해도 사랑은 베이고 조각났어

왜, 왜, 왜?

사랑, 사랑, 사랑.]

이렇게 괴로울 거라면 어째서 인간은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도록 만들어진 걸까. 나 자신만 사랑하면 괴롭지도 않을 텐데.

[광기는 우리가 부서지는 것을 보며 웃고 있어]

그래도 이젠 알겠어.

사랑하는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행복해.

내 가면을 뚫고, 제발 내 나약함을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우리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줄 순 없을까?

우리 사랑에 기회를 더 줄 순 없을까?

왜 우리는 사랑을 줄 수 없는 걸까

사랑을, 사랑을, 사랑을, 사랑을, 사랑을……]

처음부터 사랑받을 수 없다면, 차라리 사랑이란 걸 하고 싶지 않아.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게 사랑이라면, 영원히 가슴에서 도려내고 싶어.

그래도 되질 않아.

심장 안에서 지워지지 않아.

왜 안 될까…….

[왜냐하면 사랑은 너무나 오래된 단어고

그리고 사랑은 네가 밤의 끝자락에 몰린 사람들마저도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고

그리고 사랑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사랑은 우리의 마지막 몸부림이고

사랑은 우리의 마지막 춤이니까

이게 바로 우리야

Under pressure…….

압박감 속에서도…….]

“…….”

정신을 차리니 소나기를 맞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산을 쓰거나 가게의 지붕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진소유만이 멍하니 서 있었다.

세상에 홀로 있는 기분이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녀는 천륜이 없었으니까.

언제 어디에서나 이어진 인연 따위 없다.

다른 인간들보다 압도적으로 고독하다.

인생 최초의 압도적인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상담 하나 나눌 상대가 없다니.

그때였다.

문자가 왔다.

성필이었다.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시죠? 일본에서의 마지막 날 뜻깊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창작 관련해서 고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진소유는 문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핸드백에서 티켓을 두 장 꺼냈다.

디즈니랜드의 티켓이었다.

티켓과 문자를 번갈아 보곤, 그녀는 성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소유 씨.]

“지금 디즈니랜드 가실래요?”

[지금? 지금요? 또?]

“또라뇨.”

[아, 아니에요. 얼마 전에도 갔다 와서요.]

“그래서 가실 거예요?”

[……보통 얼마 전에 갔다 왔다고 하면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맞네. 저 이사님 유혹하는 거 아니에요.”

[으엑? 갑자기요?]

“미리 말씀드릴게요. 제가 이사님한테 어떤 제스처를 보여도, 그건 유혹의 뜻이 아니에요. 저는 여자를 좋아해요.”

[네? 아니, 아닐 텐, 그럴 리, 아니었는…….]

“충격받으셨어요?”

[왜 그런 거짓말을…….]

“거짓말 아니에요. 아니, 거짓말이라고까지 하실 줄은 몰랐네요.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세요? 아니면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있으신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니, 소유 씨가요? 진짜예요? 그럼 왜…….]

‘그럼 왜’라니.

자신이 뭐 어떤 식으로 보였기에 저럴까.

아님 진소유 자신도 모르는 뭔가를 아는 건가.

진소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싫으면 됐어요.”

진소유가 디즈니랜드 티켓을 찢으려던 순간.

[그, 변장 철저히 하신다고 하면 갈게요.]

“정말요?”

[네.]

“왜요?”

[보통 일이 아니니까요. 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을 정도로 뭔가…… 고민이 있으신 거죠?]

“아뇨, 고민 없어요. 그냥 놀고 싶은데…….”

진소유가 하늘을 보았다.

소나기가 그쳤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거리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친구가 없어서……. 저희 토모(친구) 하기로 했잖아요.”

[네, 뭐,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다시 말하지만, 저는…….”

[알겠어요. 이제 오해 안 할게요. 매니저랑 같이 있으세요?]

“아뇨.”

[그럼 제가 데리러 갈게요.]

“친구끼리는 약속 장소에서 만나잖아요.”

[차 있으면 차 있는 친구가 데리러 가요.]

“그래요? 친구 없어서 몰랐네.”

[……네, 위치 찍어주세요.]

전화를 끊고 진소유는 톡으로 그에게 현재 위치를 보내주었다.

그때 왼손에서 눅눅함이 느껴졌다. 비 때문에 짓이겨진 장하양의 보그 화보 페이지였다. 아까 잡지에서 뜯어낸 후 계속 손에 꼭 쥐고 있었나 보다.

“…….”

진소유는 그것을 바닥에 홱 버리고는 유유히 길을 걸어갔다.

‘사랑은 무슨 사랑.’

음악 어플을 반복 재생으로 해놓은 탓인지, 귓가에선 계속 ‘언더 프레셔’가 들렸다.

‘데이비드 보위, 프레디 머큐리, 당신네들이 틀렸어.’

사랑은 그렇게 가치 있는 게 아니야.

‘우정이 최고지.’

물론 아직 우정 같은 걸 느껴본 적은 없지만.

감정적으로 성필을 부르긴 했지만, 재미나 있을까? 장하양 얼굴은 보기만 해도 재밌긴 했는데.

‘모르겠네.’

진소유는 다음 곡으로 스파이스 걸스의 ‘Wannabe’를 틀었다.

그녀는 곡을 따라불렀다.

“Make it last forever, Friendship never end.”

영원히 잘 지내야 해, 우정은 끝나지 않으니까.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걸그룹의 곡을 따라 부르고 있다 보니 성필이 금방 도착했다.

그는 진소유를 둘러싼 수많은 인파를 뚫어내고 겨우겨우 그녀를 차 안으로 데려왔다.

“소유 씨 왜 변장 안 하고 계세요! 진짜 무슨 큰일 있으세요?”

“예에.”

진소유는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고 장난스레 웃으면서 주먹을 들었다.

“토모다치(친구).”

성필은 미친놈 보듯이 그녀를 보았다.

그러자 진소유가 미친년처럼 웃었다.

실제로 지금의 진소유는 미친 것과 비슷했다.

사랑에 실패한 누가 맨정신이겠는가.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혼자 울적하기도 하고, 이유 없이 사람을 만나고 싶기도, 이유없이 사람을 밀치고 싶기도, 소리지르고 싶기도, 그리고.

친하지 않은 사람과 디즈니랜드를 가고 싶기도 하다.

“아, 에리카가 계속 왜 이랬는지 알겠어요. 얼굴만 봐도 재밌네.”

“…….”

“예에, 토모다치(친구).”

“내려요.”

그날 둘은 디즈니랜드를 가지 않았다.

표가 비 때문에 눅눅해져 헤졌기 때문이다.

대신 차 안에서 음악이나 패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약 3시간 정도 간식이나 커피를 사 마시면서 돌아다니다가, 진소유가 말했다.

“이제 지루하니까 갈래요.”

“예, 지루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2시간 58분쯤까지는 재밌었어요. 제가 찍어준 호텔로 가주세요.”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뭐가요.”

“아뇨, 소유 씨 이상하세요.”

“굉장히 직설적이시네요. 실연을 겪었다고 해둘게요.”

“연애 금지 풀렸어요?!”

“나 혼자 사랑하고 나 혼자 슬펐어요. 그게 다예요. 위로받고 싶은데 친구가 없어서 이사님 불렀어요.”

“참, 그런 말 들으니까 기분이 좋네요 정말.”

“예에, 토모다…….”

“그거 그만하세요.”

“…….”

“하양이는…… 만나기 싫대요?”

“하양이는…….”

진소유가 창문틀에 팔을 걸쳤다.

“친구가 아니거든요.”

“……연모의 대상이었나요?”

진소유는 될 대로 되란 듯 말했다.

“네. 이젠 아니지만요.”

“…….”

“이런 쪽으론 불편하신 거 맞죠?”

“아뇨. 저 굉장히 개방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왜 그렇게 뻣뻣하세요.”

“…….”

“또 이러시네. 못 믿으시는 거죠?”

“못 믿는다기보다는…….”

“뭐요.”

“……아니에요.”

호텔 앞에 도착했다.

진소유가 나가려 할 때 성필이 말했다.

“로맨스 영화는 보지 마세요. 후유증 생겨요.”

“안 봐요.”

진소유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녀는 문을 닫으려다가, 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성필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성필은 황당하단 듯 한숨을 쉬었다.

대체 이걸로 몇 번이나 놀림당했는지 모른다. 그냥 무시하려 했지만, 진소유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성필의 어깨를 주먹으로 살짝 쳤다.

“일일친구, 좋았어요. 다음에 생각나면 또 일권 끊을게요.”

“왜 친구 없으신지 알겠어요.”

“네, 이제 필요 없어요.”

진소유가 미소 지었다.

“일일친구랑 노니까 기분이 훨씬 나아졌어요. 의외로 사랑이란 것도 별 게 아닌데요. 앞으로도 종종 쓸게요.”

“저는 사람을 ‘쓴다’라고 표현하는 사람이랑 친구 안 해요.”

진소유는 맘대로 하란 듯 성필의 어깨를 다시 주먹으로 툭 치곤 차를 빠져나갔다.

성필은 창문 너머로 사라져가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불안하게 조수석 시트를 보았다.

역시나, 비를 흠뻑 맞은 진소유가 앉은 자리답게 물로 축축했다. 심지어 물자국이 진소유의 둔부 모양으로 나 있다.

“이건 씨, 어떻게 습기 빼지…….”

일단 에어컨을 최대한으로 틀어 습기를 날려버리려고 했다.

성필은 진소유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곤 차를 몰아 웨벡스로 돌아갔다.

솔직히 진소유와 있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진짜야? 소유 씨가 하양이를, 여자를 사랑한다는 게……?’

이상하다.

왜냐하면 전생의 진소유는 확실하게 남자와 사귀었었으니까. 성필이 직접 보기까지 했다.

석세스 엔터 소속 배우여서 알 수밖에 없었다.

그 배우를 집무실까지 불러서 피 토하는 심정으로 뭐라 뭐라 했던 거 같은데, 잘 기억은 안 난다.

어차피 케이어스가 해체한 다음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마 ‘눈물 나게 하면 죽인다’랑 비슷한 대사였던 것 같다. 무슨 딸의 애인을 만난 아빠도 아니고…….

‘거짓말인가? 농담? 왜 나한테 그런 농담을?’

그게 아니면.

‘바이(바이섹슈얼, 양성애자)신가……?’

성필은 웨벡스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는 바로 내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진짜 실연당하신 게 다야?’

성필은 진소유의 부름을 받곤 에리카 때를 떠올렸었다.

분명 창작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진소유와 한 일은 차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것뿐이었다.

성필은 진소유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아직도 그녀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진짜 이 씨, 이거 어떻게 말리냐.”

물 냄새 차 안에 다 배게 생겼다.

성필은 티슈를 여러 장 뽑아 진소유가 앉았던 자리를 슥슥 문질렀다. 그러다 보니 진소유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슬퍼도 함께 할 사람이 없어서 나를 부르시다니.’

정말 고독한 사람이다. 그녀의 성격 탓이겠지만, 그렇다고 안타깝지 않은 건 아니다.

어떤 강한 사람일지라도 영원히 혼자일 수만은 없다.

진소유는 잘 벼려진 검과 같은 사람이다.

태생부터가 명검이다.

하지만 제대로 관리받지 못하면 결국엔 녹슬고 부러지게 될 것이다.

성필은 진소유가 부러지지 않길 바랐다.

* * *

진소유는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했다.

20분 만에 끝내고 나왔다.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고 샤워 가운을 걸쳤다.

텔레비전 앞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침대 옆에 둔 전신거울로 눈을 돌렸다.

거울 안엔 자신이 비추고 있었다.

26년간 함께해 온,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

하지만 그 친구의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친구…….”

친구가, 아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은 오직 자신일 뿐이다.

진소유는 고독하다.

성필과 헤어진 뒤라서 그 사실이 더욱 뼈아프게 다가왔다. 이 조용하고도 넓은 방엔 진소유의 숨만이 돌아다녔다.

‘아.’

진소유는 깨달아버렸다.

그녀의 마음은 좁고 좁아 오직 자신만을 위한 자리뿐이었다. 그런데 장하양이 있다가 나가니, 자리가 홀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넓어진 것이다.

진소유는 그 빈 자리 때문에 괴로웠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픽 쓰러졌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고, 그녀는 귀찮단 듯 얼굴을 침대에 파묻었다.

하지만 전화는 몇 번이나 계속 걸려왔다.

결국 진소유는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언니, 보그 봤슴미다.]

진저였다.

그 순간, 진소유의 마음속엔 안도감이 퍼져나갔다.

방금까지 누구의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는데, 우습게도 진저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진소유로서도 생소한 감각이었다.

‘왜?’

자신을 신경 써주는 사람이 있단 게 기뻐서.

진소유는 그걸 깨닫곤 입술을 미세하게 떨었다.

[예쁨미다.]

“……어떻게 봤어? 오늘 나왔는데.”

[일본 출장에서 돌아오는 직원분께 부탁했슴미다.]

[야 진소유. 일본에서 탱자 탱자 놀고 있으니까 좋냐? 컴백 연습은 제대로 하고 있어?]

김민주가 비꼬듯이 물었다.

화보 촬영이란 명목으로 진소유 혼자 일본에 간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진소유는 낮게 웃었다.

[…….]

갑자기 반대편이 조용해졌다.

통화가 끊겼나 해서 액정을 바라보자.

[어, 언니가 이상해졌슴미다!]

[이거 진짜 심각하다.]

“왜 그래.”

[너 그런 식으로 안 웃잖아!]

웃어?

내가?

진소유는 자신의 입가를 만져보았다.

그러곤 아까보다 큰 웃음을 터뜨렸다.

[어떡해 어떡해 진짜 돌았나 봐!]

[빨리 에리카 언니한테 말해야 함미다!]

진소유는 두 사람의 호들갑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들을 만큼 들었다.

그녀는 통화 종료를 누른 후 폰을 침대 어딘가로 던졌다. 그러곤 벌떡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삶은 혼자 사는 거야.’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진소유에겐 케이어스란 이름으로 운명을 나눈 이들이 존재하니까.

진소유가 손을 뻗었다. 그 간단한 동작은 곧 춤이 되었다.

“나는.”

진소유.

케이어스의 진소유다.

* * *

“저희는 지금 ‘소녀연맹’의 콘서트가 열리는 요코하마 아레나에 나와 있습니다! 아직 공연이 시작하기까지 수 시간이나 남았습니다만, 현장의 열기는 벌써부터 뜨겁습니다!”

한국에서 온 기자들이 공연장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일본의 팬들을 찍고 있었다.

팬들은 공연장을 뱀처럼 휘휘 감으며 줄을 섰다. 그중, 유난히 자외선에 민감한 차림을 한 다섯 명이 보였다.

스카프로 머리와 뺨을 완전히 가르고, 명백히 수상한 선글라스를 쓰기까지 했다.

“유, 유미…….”

그녀들의 정체는 웨벡스 소속의 걸그룹인 에스타스였다.

유미가 ‘적진 정찰’이라는 명목하에 멤버들을 끌고 함께 콘서트를 보러 왔다. 당연히 표는 히무라에게서 얻어냈다.

“사람 엄청 많아……. 우, 우리 ‘에스타스 비긴 어게인’ 방영 전까지 외부에 보이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조심하면 돼.”

유미는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또 다른 멤버가 입을 열었다.

“유미, 적진 정찰이라곤 했는데, 이건 뭐 적이라고도 할 수 없잖아.”

“무슨 뜻이야?”

“우리가 이기고 말고 할 덩치가 아닌걸.”

요코하마 아레나.

17,000석의 공연장을 채울 수 있는 그룹에게 무슨 적대의식을 불태운단 말인가.

“레이 또 그런 말 하는 거야? 중요한 건 덩치가 아니라 투쟁심이야! 다윗과 골리앗 몰라?”

“난 너처럼 교회 안 다녔거든?”

“다윗과 골리앗은 상식이잖아?!”

유미는 동료들의 낮은 의식 수준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17,000명이라던가?

직접 보니 주눅이 든다.

‘부도칸 이틀 연속 공연이 가능한 수준이잖아. 일본 한정 투어 전체로 따지면, 부도칸 나흘 연속 공연도 가능할 거야…….’

이런 그룹이 에스타스의 컴백 무대에 온다는 건가. 후배(선배임)의 화려한 컴백을 축하하는 동시에 엄정히 심사하기 위해서…….

그때 유미가 자신의 뺨을 짝짝 쳤다.

‘아니야, 주눅 들면 안 돼!’

똑똑히 보고 자양분으로 삼는 거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핫한 케이팝 그룹, 소녀연맹과 박성필이란 프로듀서의 힘을!

“다들 패배자처럼 생각하는 건 그만둬! 우린 스타잖아!”

유미가 크게 외쳤다.

에스타스 멤버들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랍도록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앞뒤에 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행과 소녀연맹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바빴다.

“……우린, 스타가 될 거라구.”

힘내라, 에스타스.

* * *

콘서트 대기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핫한 케이팝 그룹, 소녀연맹의 백설하.

그녀는 우파루파 잠옷을 입은 채 뻣뻣이 굳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둥둥 뜬 것 같은 눈은 생기를 잃었다.

“이 옷은 몇 번을 봐도 귀엽네.”

성필이 박수를 치자, 왠지 모르겠지만 대기실의 스태프들도 박수를 쳤다.

그 박수를 받으면서 백설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젠 이 모욕도 끝이야……. 일주일 조금 뒤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잘 있어, 일본. 어서 와, 한국.”

“한국에서도 예능에서 입을 건데?”

“끼아아아아아악!”

백설하, 콘서트 전에 혼절!

“아무튼.”

성필은 쓰러진 우파루파를 괴롭히는 멤버들의 주의를 모았다.

“이게 일본에서의 마지막 스케줄이야. 마지막이기에 가장 힘들지. 잘할 수 있지?”

일치단결된 ‘네!’란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 공연 연출 감독으로부터 지시가 들어왔다. 슬슬 자리를 잡으란 것이었다.

멤버들은 스태프들의 안내를 따라 정들었던 대기실을 나섰다. 그 순간 성필이 리카를 불렀다.

리카는 긴장된 얼굴로 나가려다 성필이 부르자마자 홱 돌아서 그의 앞으로 왔다.

우파루파 잠옷을 입은 리카가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카.”

“하이(네)!”

“일본에 혼자 남으면 외롭진 않겠어?”

“일본은 제 고향이라구요! 오히려 박 이사님이 외로우실 거예요!”

“그래, 그렇겠네.”

“제가 없다고 울지 마세요!”

리카가 울먹이듯 목소리를 떨었다. 성필은 그녀의 잠옷 후드에 붙은 우파루파의 더듬이? 같은 것을 만지작거렸다.

“안 울게. 리카도 혼자지만 열심히 일해야 한다?”

“개처럼 일해서 돈 많이 벌어올게요!”

성필이 리카의 정수리를 손날로 톡 쳤다.

“정승처럼 일해서 돈 많이 벌어올게요!”

리카가 경례하면서 미소 지었다.

“아타시(저)는 일본의 별이니까요!”

소녀연맹 한국 귀국 약 10일 전.

리카, 스케줄 소화를 위해 일본 체류 결정.

가로 엔터가 웨벡스에 결정 사항 전달하기까지 하루.

그리고.

성필이 후회할 미래를 보기까지, 앞으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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