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510화 (510/760)

510화

고등학교 3학년 김채현.

그녀의 일과.

아침 5시 20분 기상.

“채현아, 괜찮은 거 맞지……?”

여느 때와 같은 어머니의 걱정에 ‘으에’라고 답하면서 아침 흡입.

6시 10분, 등교 시작.

걸어가면서, 버스를 타고 가면서, 교실에 도착할 때까지 단어장으로 영단어 60개 복습.

화장실 다녀오고, 자리 정리하고, 단정하게 교실에 착석, 7시 10분.

어제 외운 영단어 약 100개 복습.

‘분명 어제 봤는데 왜 기억나는 게 없지?’

복습 끝, 8시.

“조용히 자습해라.”

0교시.

새로운 영단어 약 100개 암기.

0교시 쉬는 시간 끝, 9시 수업 시작.

간신히 100개 암기 끝.

“자습해라.”

국어 모의고사 2회분.

점심 전까지 풀고 매기고 해설 보고 이해하기.

“점심 맛있게 먹어라.”

‘아직 해설 덜 봤는데…….’

아쉽지만 밥은 먹어야지.

교실 문을 나서자마자 연습생 신분으로 조퇴를 허락받은 백수현과 김사무엘이 보였다.

백수현이 반갑게 인사했다.

“오우, 퍽.”

그가 웃으면서 하이파이브를 해달라는 듯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야 김채현 너 어제…….”

“비켜어어어어엌!”

김채현은 백수현을 밀어버리고 미친 듯이 급식실로 달려갔다.

엉덩방아를 찧은 백수현은 김채현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보았다.

김사무엘이 그를 한심하게 보았다.

“빨리 일어나.”

“X나 박력 있어…….”

“……?”

급식실에 도착한 김채현.

돈까스가 많이 남아서 두 개 더 받아먹음.

다음 수업이 있는 교실로 가서 덜 공부한 국어 모의고사 공부.

수업 시작 10분 전에 완료.

“채현아, 오늘 쌤이 수업…….”

친구 이선주가 말 거는 것도 못 듣고, 모의고사 다 공부하자마자 책상에 이마 처박고 잠듬.

김채현의 코골이가 교실을 울림.

“…….”

이선주는 그녀의 옆에 차분히 앉아 핸드폰을 만졌다. 그녀는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자습해라.”

5교시 시작.

김채현 침 흘리면서 기상.

저녁까지 수학 문제 60개 풀고 매기고 해설 보고 공부하기.

자신 없는 적분 파트라서 빡침.

저녁.

“비켜어어어어엌!”

저녁 먹은 후 학교 밖으로 뛰쳐나감.

학교 근처 편의점에서 콘 아이스크림 흡입. 그리고 운동장 빙글빙글 돌면서 영단어 복습.

야간 자율 학습.

“조용히 자습해라.”

탐구 영역 문제 풀고 매기고 암기하고…… 에휴.

11시, 심화반 자습까지 마치고 하교.

병든 닭처럼 버스에서 꾸벅거림.

집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기초 화장 바르고 책상 앞에 경건히 착석.

책상 앞 벽에 붙여진 소녀연맹 포스터 보고 의지 충전. 그리고 책상 옆에 놔둔 소녀연맹 사인 CD를 보고 의지 더 충전.

“오늘은 수학 모의고사…….”

90분 시간 재면서 모의고사 풀이

새벽 1시 30분.

“매기고, 풀이만 간단하게 보고, 자는 거야. 빨리, 김채현, 야, 김채현, 정신 차려…….”

병든 닭처럼 꾸벅거림.

“대학, 공연예술과, 가서, 가로 엔터에, 입사, 소련들이랑 같은 회사에…….”

쿵.

김채현은 책상에 이마를 박고 잠들었다.

새벽 1시 45분, 취침.

현재 김채현 국어 1등급. 수학 3등급. 영어 2등급. 탐구 1등급. 한국사 1등급.

현재 모의고사 백분위 상위 10%.

수능 약 100일 전.

“흐억!”

김채현은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어느새 창밖에서 햇볕이 비춰오고 있었다.

“책상……? 왜……?”

김채현은 한숨을 쉬었다.

의자에서 자서인지 삭신이 다 쑤셨다.

씻으러 가려다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소녀연맹 채널에는…….

“……올라올 리가 없지.”

일본 활동 중이라고 하니, 예능이나 기획 영상이 올라올 리 없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2’도 게시가 끊긴 지 오래였다.

‘소련이들 뮤비 보면서 씻자.’

힘든 고3 수험 생활 중 유일한 낙은 소녀연맹이다. 하지만 소녀연맹은 일본 활동으로 바빠 변변찮은 영상 하나 올라오지 않고 있다.

컴백하더라도 수능 후일 듯하니, 김채현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수능 끝나 봐. 소련이들 올콘하고, 알바해서 앨범 50장씩 사서 팬싸 전부 다 가고, 방학하면 음방도 전부 다 뛸 거니까…….’

김채현은 미래를 기약하면서 의지를 다졌다.

‘……그래도.’

소련이들 떡밥 좀 나왔으면 좋겠어…….

상식적으로 일본 활동 너무 긴 거 아니야?

* * *

가로 엔터 회의실.

소녀연맹 멤버들은 나란히 앉아 양상헌과 성필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무료하게 폰을 만지던 조아라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백설하를 불렀다.

“쌤, 이거 봐요. 여기 베스트 1위, 2위 쌤이 다 먹었어요.”

“뭔데?”

포털 사이트 네이트.

그중 엔터 관련 이야기를 하는 게시판이었다.

한국의 엔터 관련 통합 게시판 중 조회 수가 가장 높은 곳이다.

베스트 10위 안에 들면 조회 수가 수십만에 이르기도 하니, 가장 많은 돌덕들이 눈팅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1위: 소련 설하 뽕인 거 너무 티남]

[조회 수: 21만]

[내용: 백설하의 흉부가 어색하게 움직이는 움짤 여러 개.]

“…….”

[2위: 이게 어케 뽕임?]

[조회 수: 17만]

[내용: 백설하의 흉부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움짤 여러 개.

판녀들 열등감 ㄴㄴ]

“…….”

“쌤 열 받지 않아요? 저격 글 올릴래요?”

“내, 내가?”

“안 억울해요?”

“여기 이런 글 올라오는 거 한두 번도 아닌데 뭘…….”

이 게시판의 주요 주제는 두 가지다.

누군가를 까거나,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비단 백설하만이 아니라 온갖 아이돌들이 의심어린 시선이나 찬양을 받는 게 바로 이곳이다.

몇 개월 전에는 조아라를 주제로 베스트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조아라 골뽕(골반 뽕)하려면 제대로 입지 ㅋㅋㅋ’였다. 그때 조아라가 어찌나 억울해하던지, 백설하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근데 여기 남돌한테만 너무 관대하지 않아요? 남돌 글은 병먹금(병X한테 먹이 금지) 잘하면서, 여돌 글은 지나치질 못하네.”

“사용자 성별 차이겠지. 반대로 디씨는 남자 아이돌 다 조롱하니…… 너 댓글 쓰는 거야?!”

“아니, 억울하잖아요.”

“억울해도 내가 억울하지 네가 왜 댓글 써?! 그, 그만해! 그러다 추적당하면 어떡하게!”

[본 적 없으면서 날조하지 마라 ㅋㅋㅋㅋㅋㅋ]

“빠, 빨리 지워!”

“대댓 바로 달렸어요.”

“어?!”

[넌 뭐 봤음? 개어이털리네 인기견들 증거 줘도 아득바득 우기죠 ㅋㅋㅋㅋㅋ?]

[봤는데?]

[네넵 설하 남친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많이 보시든가요]

“오, 쌤 남친 생겼어요.”

“아라쨩 여친은 아타시(저)예요! 쌤은 다른 사람 노리세요!”

“…….”

백설하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난 엔터테이너야.’

그깟 신체 부위, 얼마든지 남들 입방아에 올라도 된다. 그렇게 이름이 알려져서, 한 명이라도 더 소녀연맹의 노래를 들어주기만 한다면.

아마 욕하는 사람은 안 들어주겠지만…….

“얘들아 좋은 아침!”

성필이 힘차게 문을 열며 회의실로 들어왔다. 홍보팀 양상헌이 그의 뒤를 따랐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상헌 오빠 하이.”

다른 멤버들과 다르게 조아라는 양상헌에게 굳이 ‘상헌 오빠’를 붙여서 인사했다. 그러곤 성필의 기색을 살폈다.

성필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성필과 양상헌은 나이가 같다. 그래서인지, 조아라는 성필을 놀리려고 일부러 양상헌을 오빠라고 불렀다.

“아저씨도 안녕해요.”

“응, 아저씨는 안녕합니다.”

“아저씨 진짜 재미없다.”

“안 물어봤는데? 다들 주목!”

“짜증 난 거 다 보이죠? 아저씨라고 불러서 삐졌죠? 화나죠? 근데 아무것도 못 하죠? 내가 가로 엔터 돈줄이죠? 이번 프로젝트 프로듀서죠?”

“오늘부터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2’ 프로듀서는 리카다!”

“어?”

“맛테마시타(기다렸습니다)!”

“다들 박수!”

조아라 빼고 다 박수 쳤다. 리카가 회의실 탁상 위에 올라가서 우파루파를 췄다.

“리카, 잘해보자.”

“이때만 기다렸어요! 이사님과 24시간 365일 함께 지내면서 곡을 만들 거예요! 제2의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이 돼서 전설로 남아요!”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더 맞지 않나.”

“아타시(저)를 하나의 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에 가두지 마세요! 제가 폴 매카트니 할래요!”

“그래.”

“뭐, 아니, 진짜는 아니죠?”

조아라는 성필이 농담하는 것이란 걸 알아도, 괜히 불안해서 물어보았다.

성필이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답했다.

“당연히 진짜 아니지.”

“재미없거든요?”

“개재밌죠? 우리 아라 순간 당황했죠? 화났죠? 근데 아무것도 못 하죠? 내가 총괄 프로듀서…….”

조아라가 성필에게 쇄도하여 어깨에 정권을 질러 넣었다. 성필은 어깨를 붙잡고 울상을 지었다.

“난 가로 엔터 이사이자 총괄 프로듀서인데…….”

양상헌은 성필을 보고 생각했다.

‘박 이사님이 나랑 동갑?’

니체를 너무 인상 깊게 읽어서, 니체가 최고의 상태라고 일컬었던 어린아이로 평생 남기로 결심한 걸까?

“자, 다시 주목.”

니체를 인상 깊게 읽은 성필이 진지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멤버들도 그를 주목했다.

“소녀연맹 채널에 올릴 예능 여분을 다 소모한지 어언 한 달이 지났다. 새로운 걸 찍어야 할 때야. 자, 상헌 씨. 설명 부탁드립니다.”

“크흠.”

양상헌이 단상 중앙에 섰다.

“이번 예능 주제는 체력장입니다.”

“너무 식상하지 않아요?”

조아라가 곧바로 반론을 펼쳤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반론이 들어오니 양상헌은 당황했다.

“예?”

“아니, 체력장 그거 웬만한 아이돌들 다 한 거잖아요. 식상하지 않냐고요. 차라리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 7회 찍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그건 아라 씨가 리카 씨한테 억지로 와인 한 병 먹여지고 흑역사 찍혀서 그만하…….”

“아 그럼 ‘뭐든지 잘하는 아름이’도 있잖아요.”

“조아라 너 그냥 예능 찍기 귀찮은 거 아냐?”

“암튼 체력장은 식상하다고요.”

성필과 양상헌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조아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성필의 표정이 부드럽게 펴졌다.

그는 익숙하지 않은 하이톤으로 마치 어린애를 달래듯 말했다.

“어쩌엄, 우리 아라 요즘 노력하는 모습이 너어어어무 보기 좋아! 호불호 분명한 모습 보기 좋네에! 우리 아라 체력장이 하기 싫어요오?”

“아저씨 왜 그래요.”

“어떡하지? 너무 기특해서 상이라도 주고 싶네? 아저씨랑 드라이브나 하러 갈래요?”

“아타시(저) 갈래요!”

“으응? 가자아, 가자아, 아이스크림도 사줄게에.”

“진짜 어이 털려서 미치겠네. 아 그럼 하든가요.”

“애들은 반어법으로 칭찬해주면 싫어한다더니 진짜네.”

“반어법으로 칭찬하는 건 어른도 싫어하거든요?!”

“근데 체력장 왜 하기 싫어? 진짜 식상해서 그래? 상헌 씨가 준비 많이 했는데.”

성필이 시무룩한 양상헌을 가리켰다. 그것을 보니 조아라도 죄책감이 드는지 시선을 피했다.

“아라쨩 어제 한국 와서 좋다고 자유분방하게 밤새도록 유흥을 즐겼어요! 그래서 전신 근육통이 생긴 거예요!”

“뭐?!”

성필이 기겁했다.

“대체 무슨 유흥을 즐겼으면 전신 근육통이 생긴 거야아아아!”

“새벽까지 과격한 춤을 연습했어요!”

조아라에겐 춤이 남자고 유흥이고 이하 생략.

“근육통 있으면 퍼포먼스가 제대로 안 나오니까 하기 싫은 거예요! 어때, 아라학(學) 1타 강사 리카의 해석이!”

“…….”

조아라는 한 칸 떨어진 자리의 신아름을 바라보았다.

체력장을 한다면 그녀와 맞붙게 될 것이고, 조아라는 신아름에게 예능에서라도 지고 싶지 않았다.

“뭐, 리카 말이 맞아요. 불공평하잖아요.”

신아름이 헛웃음을 뱉었다.

“예능인데 걍 해.”

“거기서 너한테 지면? 며칠 동안 계속 촉새처럼 너한테 쪼이라고?”

“날조하지 마.”

“날조는 씨. 아저씨, 얘 아저씨가 아는 거처럼 착한 애 아니거든요?”

“팀장님은 왜 끌어들여!”

“아니 아저씨도 알아야 해, 네 추악한 모습.”

“알기 싫어.”

성필이 단호히 답했다.

멤버들이 놀라서 그를 보았다.

“난 평생 아름이 색안경 끼고 볼 거야.”

“팀장니임…….”

조아라가 성필을 향해 검지를 치켜올렸다. 양상헌이 없었으면 중지를 들었을 수도 있다.

성필은 흐린 눈으로 조아라의 치켜올려진 검지를 보곤 이야기를 이었다.

“그런데 아라야, 이건 알아야 해.”

그때 갑자기 장하양이 수첩을 꺼내 성필이 한 말을 메모했다.

가사 소재로 쓸 것이었다.

장하양은 평소에도 라임이 맞는 단어가 떠오르면 기록해두곤 했다.

“아라야, 알아야…….”

“……이건 알아야 해. 세상은 언제나 만전의 상태를 기다려주지 않아. 자, 그럼.”

성필이 손뼉을 짝, 쳤다.

그러자.

* * *

“짜잔, 연습실!”

소녀연맹 연습실엔 예능 촬영팀이 대기하고 있었다. 멤버들은 ‘후쿠요 히다카’와 어바이비에서 받은 에스레저 룩을 갖춰 입고 연습실로 들어왔다.

조아라는 아까부터 뚱하기만 했다.

결국 그녀는 근육통 때문에 패배하고 촉새 신아름에게 며칠 동안 시달려야 할 테니까.

“여러분.”

콘텐츠 기획자인 양상헌은 예능 기획 대본을 들고 멤버들 앞에 섰다.

“체력장 종목은.”

멤버들은 반은 노는 기분으로, 반은 애매한 승부욕을 태우며 양상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러분이 정해주시면 됩니다.”

“에에, 상헌 오빠 실망이에요.”

“리얼. 이러고 월급 받는 건 쫌 너무한데.”

“아저씨 이거 맞아요?”

동생 라인이 소소하게 양상헌을 조리돌림했다. 그러자 양상헌이 기다렸단 듯 손가락을 딱 튕겼다.

촬영 스태프 구역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홍보팀 강지혜가 운동화 다섯 벌과 문틈 철봉을 들고 중앙으로 왔다.

“첫 번째 종목, 1.5km 달리기. 두 번째 종목, 턱걸이. 세 번째 종목 철봉에 매달려 오래 버티기. 네 번째…….”

“창의성을 존중하는 혜안에 감탄했어요!”

“저희의 아티스트십을 키워주시려는 것도 모르고…….”

“역시 상헌 오빠 대기업 출신이라서 그런가 발상 자체가 남다르네.”

동생 라인이 양상헌을 찬양했다.

이 여름날에 1.5km를 달리고 싶진 않았다.

왠지 실망한 듯한 강지혜가 운동화와 철봉을 가지고 다시 구석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다섯 개를 한 분씩 정해주시면 됩니다.”

멤버들은 양상헌에게 종목 표를 받았다.

예능에서 할 법한 종목이 약 스무 개 정도 있었다. 멤버들은 각자 자기가 자신 있는 종목을 찾으려 했다.

그때 장하양이 손을 들었다.

“혹시 상품이 있나요?”

“네, 상품이 있습니다. 무려 이 체력장의 스폰서가 계시거든요.”

“아하하, 또 어바이비예요?”

“가로 엔터 임원진입니다. 여러분에게 평범한 상품은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우승자에겐 임원진 중 한 분에게 적당한 수준의 요구를 전달할 권리를 드립니다.”

사장인 홍규헌에게 당당히 보너스를 요구하거나, 한구인에게 회사 내부 설비를 부탁하거나, 성필에게 프로듀싱 관련 의견을 낼 수도 있겠지.

멤버들의 독특한 요구 또한 예능의 일환일 것이다.

“이거요.”

장하양이 즉시 종목을 하나 골랐다.

“허벅지 씨름으로 할게요.”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 마주 본다.

그리고 한 사람이 다리를 벌리고, 다른 사람은 그 사이에 무릎을 넣는다.

다리를 바깥에 둔 사람은 다리를 좁혀 상대의 다리를 다물게 하면 승리.

다리를 안쪽에 둔 사람은 다리를 벌려 상대의 다리를 활짝 열면 승리다.

멤버들은 장하양다운 종목이라고 생각했다. 이중 가장 근력 운동에 열심인 장하양이니까.

그녀는 아이돌로서 축복받은, 헬스인으로서 저주받은 몸을 지녔다.

운동을 열심히 해도 노력한 만큼 근육이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축복이자 저주이다.

덕분에 장하양은 몸이 과하게 커지지 않으면서도 비상한 근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체력장은 리그 형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모든 멤버들과 겨루고, 가장 승수가 많은 분이 우승자입니다.”

양상헌의 지시에 따라 스태프들이 의자 두 개를 마주 보게 두었다.

장하양은 자신만만하게 의자에 앉았다.

‘나는 대퇴사두근(大腿四頭筋)이 발달했어.’

흔히 말하는 허벅지 앞쪽 근육이 발달했단 뜻이다. 물론, 그게 허벅지 씨름에서 유리한 조건이란 건 아니다.

허벅지 씨름에서 사용되는 근육은 다리를 모을 때 사용되는 내전근(허벅지 안쪽), 다리를 벌릴 때 사용되는 둔근(엉덩이 근육)이다.

그리고 장하양은 피트니스 센터에서 하체 운동을 할 때 스쿼트와 어덕터 머신으로 둔부 근육을 가장 신경 써서 발달시켰다.

‘대퇴사두근이 발달했기에, 힙 근육이 받쳐주지 않으면 엉덩이가 처지고 골반이 좁은 것처럼 보여.’

장하양은 완벽한 신체 밸런스와 미적 효과를 위해 내전근과 둔근을 끊임없이 발달시켰다.

근육이 불에 타는 듯하여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꾹 참고 운동해왔다.

‘임희선 트레이너님, 감사합니다.’

장하양이 어덕터 머신으로 조이고 벌릴 수 있는 최대 무게는 성인 남성의 몸무게 정도다.

예를 들면, 성인 남성이 막고 있어도 내전근과 둔근만으로도 밀어서 비키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장하양이 아이돌로서 칼로리 제한만 하지 않았다면, 진작 어덕터 머신으로 100kg 이상 정도는 무리 없이 수행할 수준이 되었을 것이다.

‘제 모든 노력은 이 순간을 위해서였군요.’

첫 타자는 백설하였다.

그녀는 어색한 자세로 앉아 장하양의 무릎 바깥을 자신의 무릎으로 감쌌다.

이러면 백설하가 조이고 장하양이 벌리면 된다.

“언니는 그쪽이 편하세요?”

“으, 응? 그으, 모르겠어. 어느 쪽을 잘하는지. 해본 적이 없어서…….”

“편하다 싶은 쪽으로 하세요.”

백설하는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그냥 원래 하던 대로 정했다.

심판은 리카가 맡았다.

“자, 그럼.”

긴장된 분위기 속, 장하양은 백설하를 노려보았다. 백설하는 자신의 무릎만 보면서 걱정스럽게 끙끙거렸다.

“하지메(시작)!”

쩍.

백설하의 다리가 시작과 동시에 너무나도 쉽게 활짝 열렸다.

“끼아아아악?!”

백설하가 비명을 지르면서 장하양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찰싹 찰싹 때렸다. 장하양이 힘을 풀자마자 백설하는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나, 나 허벅지 안쪽이 끊, 끊어진 거 같아악!”

“언니, 허벅지 안쪽이 아니라 내전근.”

“어쩌라고오오옥!”

“어? 진짜로 아프신…….”

“끊어진 거 같다니까아악!”

백설하는 시작하자마자 내전근을 이용해 다리를 모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강한 힘이 그녀의 다리를 활짝 벌렸다.

근육은 안쪽으로 힘을 쓰려하는데 너무나 강력한 외부의 힘이 개입하여 근육의 가동 범위를 억지로 늘려버렸다.

무리한 과신전.

그 결과.

“병원에! 병원에 빨리잇! 아악, 아, 아파!”

근육이 놀라서 극심한 고통을 유발했다.

그렇게 체력장이 시작하자마자 첫 번째 부상자가 발생해버렸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인(도수치료사)이 백설하의 상태를 살폈다.

“저, 저어 영원히 허벅지를 못 쓰게 되면 어떡하죠오……? 끄흐윽, 아파요오……. 으흑, 으허어어엉…… 아직 제대로 써본 적도 없는데에에에…….”

“아, 그냥 근육이 놀란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왜 혼자 놀라는 건데요오…….”

“……?”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25살, 탈락.

잠시 예상치 못한 사태가 있었지만 체력장은 계속됐다. 쇼는 계속되어야 하니까…….

장하양은 백설하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언니 죄송해요.”

“헤, 헤헤, 아니야. 멋진 승부였어. 하양아, 꼭 이겨야 해…….”

“네. 언니의 원수(장하양임)를 꼭 갚을게요. 제가 이기는 걸 지켜봐 주세요.”

다음 차례는 리카였다. 그녀는 백설하에게서 배운 게 있었다.

리카는 백설하와 반대 포지션을 잡았다. 장하양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넣은 것이다.

“아타시(저)는 만만치 않아요! 제 말랑 근육을 항상 무시하셨지만, 지방과 근육의 황금 비율을 이룬 것뿐이에요! 근력은 사라지지 않아요!”

“기대할게.”

“자, 그럼…….”

“어? 리카가 할 때도 심판이 리카인…….”

“샥!”

리카는 비겁하게도 시작을 ‘샥’이라고 외치곤 다리를 힘껏 벌렸다.

그런데.

“에?”

벌려지지 않는다.

의자를 붙잡고 안간힘을 다해도, 조금도, 벌려지지 않는다. 리카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힘을 줌에도, 그 흔한 흔들림조차 없다.

“끝이야?”

“마사카(설마)…….”

탁.

리카의 다리가 닫혔다.

“…….”

“…….”

리카는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곤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아라에게 가서 안겼다.

“아라쨩, 아타시(나)의 노력이이…….”

“하양 언니 앞에서 노력이란 말 쓰지 마.”

“그치마안…… 나도 운동 열심히 했는데에……. 역시 말랑 근육으론 이길 수 없는 거야……?”

“어.”

“그럼 아라쨩도 지겠네…….”

조아라는 리카의 더듬는 손길을 가볍게 쳐냈다.

다음 장하양의 상대는 신아름이었다.

그녀는 백설하와 같은 포지션을 잡았다. 허벅지를 조이면 된다.

“아름아, 살살할게.”

“전력 다해요.”

“그치만…….”

장하양이 신아름의 대퇴사두를 검지로 가볍게 훑었다.

“이렇게나 말랐는걸?”

“하기나 해요.”

“아하하. 아이돌이면서 나를 이기려는 거야? 가소로워라.”

“언니 뭔 컨셉이에요?”

“예능이야. 맞춰.”

신아름이 고개를 홱홱 젓곤 눈동자에 의지를 새겨 넣었다.

“와라, 하양.”

“간다, 아름.”

결과는 너무나 당연했다.

신아름의 다리는 기념일 입장 무료 경복궁 입구처럼 자유분방하게 열렸다.

신아름은 그럴 줄 알았단 듯 가볍게 일어났다. 백설하가 어찌 되는지 미리 보았기에 힘은 크게 주지 않았었다.

당연히 부상도 없었다.

“…….”

백설하는 그걸 보고 억울해서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냥 나중에 할걸…….

다음은 조아라였다.

조아라는 자신 없는 기색으로 장하양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만요.”

조아라는 장하양과 살짝 떨어져 앉더니, 다리를 벌리거나 모으길 반복했다.

감을 잡은 그녀는 장하양의 무릎 바깥에 자신의 무릎을 두었다.

“진지하게 할 거야?”

“난 언제나 진지하거든요?”

“그러면, 저렇게 될 텐데.”

장하양이 고갯짓으로 쓰러진 백설하를 가리켰다. 그에 조아라가 코웃음쳤다.

“뭐, 그럼 그게 내 한계겠죠.”

“우승은 양보할 수 없어.”

“나도요.”

“왜?”

“신아름 쟤한테 쪼이기 싫으니까요.”

“아 진짜 선동 날조 그만 좀 해라.”

신아름의 야유에도 조아라는 진지했다.

장하양은 시원한 미소를 띠었다.

“그럼, 간다?”

일촉즉발의 분위기.

리카가 팝콘을 하나 씹으면서 시작을 외치려던 순간.

“잠만 잠만요!”

조아라가 카메라를 향해 손바닥을 들었다.

“나 오늘 근육통 있거든요? 그래서 잘 안 돼요. 그거 감안하고 봐줘요. 알겠죠?”

“아라야, 추해.”

“진짜라고요…….”

장하양은 의자 양옆을 손으로 꽉 쥐었다. 몸을 최대한 고정시킨 채 다리에 힘을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이번만 이기면 전승(全勝)이다.

전력을 다해야 한다.

‘아라야, 너한텐 미안하지만.’

하지메(시작)!

‘설하 언니처럼 돼줘야겠어.’

장하양은 전력을 다해 다리를 벌렸다.

벌리려 했다.

벌려지지 않는다.

장하양은 다리 대신 입만 벌린 채 아래를 보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자신의 다리와는 달리, 조아라의 다리는 너무나도 평온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작한 거예요?”

“어?”

“전력으로 해도 된다니까요. 난 쌤처럼 안 돼요.”

“으, 그읏!”

장하양은 전력을 다해 둔근에 힘을 주었다.

혈류가 빨라졌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턱 주위로 힘줄이 도드라졌다.

전신의 근육이 팽창, 수축을 반복한다.

신체가 협응력을 발휘하여 한계 이상의 근력을 내려고 발악했다.

그런데.

“끄으그으윽!”

안 된다.

“아니, 설마.”

조아라가 픽 웃었다.

“이게 한계?”

조아라가 허벅지를 살짝 조이자, 장하양의 다리가 힘없이 좁혀졌다.

“흐끄윽, 끄으으읏!”

“아니, 진짜?”

조아라가 또 허벅지를 조였다.

장하양의 무릎이 맞붙기까지 고작 1cm.

“뭔데. 하양 언니 별거 없네.”

“크흐…… 읏?!”

장하양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시야가 팽팽 돈다.

‘블랙아웃?!’

신체가 한계 이상의 힘을 갑작스럽게 발휘하면 발생하는 현상.

몸이 호소하는 것이다.

더는 그만해.

이게 네 한계야.

이 이상 하면, 더는 네가 아니게 된다.

장하양은 이를 까득 물었다.

‘질 수 없어!’

허벅지 씨름은 그녀가 고른 것이다.

그러니 모두 이겨야만 수지타산이 맞는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해!

“그냥 끝낼게요.”

“하읏!”

장하양의 볼품없는 신음과 함께 그녀의 무릎이 맞닿았다. 그녀는 절망한 눈동자로 게임의 결과를 바라보았다.

“어, 어째서?”

“흐음, 그런 건가.”

리카가 유심히 조아라를 관찰했다.

“하양 언니, 그건 아시죠? 지방이 많은 사람, 살이 찐 사람이 근력이 더 강한 거.”

“무슨…….”

“지방이 많단 건 곧 온몸에 아령을 달고 다니는 거랑 같으니까요! 움직이기 위해선 근육이 발달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아라쨩은!”

리카가 쪼그려 앉아 조아라의 둔부를 가리켰다.

“평소에도 엉덩이 양쪽에 몇 kg 아령을 달고 다니는 거랑 똑같아아악 이타이(아파)!”

“사람 그만 좀 멕여.”

“말도 안 돼…….”

장하양이 절망하여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도, 결국은 재능이야……?”

레슬링 선수 중 알렉산더 카렐린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처음으로 벤치 프레스를 해보았다.

그 무게는 무려 150kg이었다고 한다.

근육은 노력에 보답하지만, 재능에 따라 차등을 두는 법.

누군가의 결승선은 누군가의 출발선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첫 번째 종목, 허벅지 씨름.

조아라 4승(부전승 1승) 0패.

장하양 3승 1패.

리카 2승(부전승 1승) 2패.

신아름 1승(부전승 1승) 3패.

백설하 0승 4패(부전패 3패).

조아라, 승점 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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