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520화 (520/760)

520화

“그걸…… 할 수 있을 거 같아?”

라희가 떨면서 물었다.

“몰라.”

지유가 간단히 답했다.

그 순간부터 라희는 지유가 괴물처럼 보였다. 사고방식 자체가 자신과, 글로브 멤버들과 달랐다.

지유는 절박하지 않다.

아니, 지금까지는 아이돌로서 절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절박함마저 몰아낼 정도로 윤상열의 밑에 있는 게 짜증 났던 거겠지.

“그런데 어떤 일이든 확답이 있을 순 없잖아? 도전해야 얻는 것도 있어. 난 도전할 거고.”

“지유야.”

성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 또한 라희처럼 떨렸다.

“그러니까, 법적으로 석세스 엔터와 싸우겠단 거지? 그건 설령 이기더라도 아무것도 안 남아.”

자폭과 다르지 않다.

석세스 엔터는 기업 이미지에 심각한 피해를 입을 거고, 그건 글로브도 마찬가지다.

연예인과 매니지먼트사의 법적 공방이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지치고, 괴롭다.

서로가 계약서에 명시된 사항을 지키지 않았단 사실을 증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애초에 구체적인 이행 의무를 제시하지 않으니까.

혹은 계약서에 존재하지 않는 업무를 시켰단 이유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단 이유를 들먹이더라도, 그것 또한 증명하기 어렵다.

회사가 ‘필요한 일이었다’라고 하면 연예인이 뭐라고 하겠는가. 설령 명확한 보상이 없었더라도, ‘원래 연예계 일이 그렇다’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이 업계는 모든 게 불확실하고 부정확하다.

그러니까 지유가 벌이려는 일은 자폭이다.

“알아요.”

성필의 친절한 설명에 지유는 짧게 답했다.

“안다고?”

라희는 억지로 화를 가라앉혀야만 했다.

“네가 갈등을 점화시키면, 그동안 글로브 관련 업무가 전부 정지될 거야. 이 싸움은 얼마나 가는데? 1년? 2년? 3년? 그동안 우린 손가락만 빨고 있으란 거야?”

연예인은 회사의 허락 없이 상업적, 비상업적 활동이 금지된다.

지유가 석세스 엔터와 싸우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글로브는 창고 안에 갇혀 썩게 될 것이다.

아이돌의 평균적인 수명은 7년.

글로브는 벌써 수명의 절반가량을 썼다. 나머지 절반을 헛되게 날릴 수는 없다. 헛되게 날릴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절대 그딴 짓은 하면 안 된다.

‘왜 내가.’

라희 자신이 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다가 지면?”

“너 너무 흥분한 거 아냐?”

지유는 라희와 다르게 분위기가 가벼웠다.

“오빠 말 들었잖아. 석세스 엔터는 입을 피해 생각하면 우리한테 함부로 못 해. 우리가 강하게 나가기만 해도 들어줘야 할 거라고. 우리가 법원 문 밟기도 전에 저쪽에서 부랴부랴 숙일 거라니까? 윤상열이 직접 내 집에 찾아온 것만 봐도 몰라?”

라희는 말문이 턱 막혔다.

지유가 하려는 건 치킨 게임이다. 절벽을 향해 내달리는 두 개의 스포츠카. 그중 먼저 겁을 먹고 멈추는 쪽이 지는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자존심을 세우고 끝끝내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다면, 둘 다 죽는다.

라희는 지유가 이 사태를 게임처럼 생각한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면? 안 그러면? 너, 최종 목적이 우리들 전부 계약 해지되는 거랬지? 거기까지 갈 수나 있어? 피디님이, 대표님이 그걸 두고 보겠어?”

“하아.”

지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희야. 법인(法人)의 지상 목적은 생존이잖아. 난 석세스 엔터란 법인의 목 밑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거야. 당연히 살려고 노력하겠지.”

“우리 목에도 같이 들이밀고 있잖아!”

“난 조금도 더 그딴 데서 못 있겠다고!”

지유가 소리치자 라희가 움찔했다. 지유가 이토록 강력하게 분노를 표출할 줄은 몰랐다.

“아니, 나만 아니라 우리 전부가 그래! 처음부터 그딴 취급을 참으면 안 됐어! 그 결과가 뭐야? 우리 죄다 뭔 초등학교 수련회보다 더 X 같은 대우 받고 있잖아!”

“…….”

그래서, 글로브를 아예 몰락시킬 수도 있을 싸움에 뛰어들 거라고?

라희는 이 집에 들어설 때부터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과 관련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겠다.

애초에 지유는, 이 어마어마한 재력가에서 태어난 지유는, 보통 사람과 보는 경치 자체가 다르다.

그녀는 삶이란 게임에서 한 번 실패하더라도 몇 번이나 재시작할 코인이 있다.

그녀에게 글로브는 물론 중요하겠지만, 글로브가 실패하면 다시 일어나면 그만이다.

그에 비해 글로브 멤버들은 한 번 넘어지면 앞날이 막막하다.

라희부터가 최대한 유화적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은가.

한 번 죽으면 끝이니까.

고졸.

춤과 노래 실력.

얼굴.

고작 그딴 것만 지니곤 정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아이돌로서 키워진 이들은, 아이돌로서 실패하면 인생의 난이도가 몇 배나 올라간다.

얼굴을 써서 결혼 잘하면 된다고? 그딴 애완견 같은 삶에 만족하는 건, 만족하라고 말하는 건 머리 빈 연놈들밖에 없다.

“……지유야. 더는.”

라희는 놀라운 평정심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더는 너를 괴롭게 했던 환경은 없어. 피디님은 달라지실 거야. 그러니까 우리, 한 번만 더 회사를 믿어보면 안 될까?”

“나는……!”

그때 성필이 바닥을 쩍 소리 나게 손바닥으로 쳤다. 둘 다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참…….”

성필은 어색하게 웃고는 말했다.

“격렬하다, 그치?”

라희와 지유는 얼떨떨하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흥분이 눈 앞을 가려서, 서로의 말조차 제대로 듣지 않게 됐다.

둘은 이야기를 들으러 앉은 게 아니라, 자신의 주장만 말하려고 앉은 것이었다. 대화를 하러 이곳에 왔고, 이야기를 들으러 만난 건데도.

“두 사람 말이 다 맞아. 라희의 말마따나 윤상열은 더 조심하게 될 거야. 지유의 말대로 회사는 윤상열을 제지할 거고. 결국 너희들의 취급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아져. 그건 내가 보장해. 근데 문제가 있어.”

“…….”

“윤상열이 이 일을 아니꼽게 여겨서 너희를 방치하는 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유가 말한 해결책을 쓸 수밖에 없겠지. 앨범 다섯 장 이상을 무조건 발매하게 하거나, 아니면 소송을 걸어서라도 계약을 해지하던가.”

“그쵸! 제가 말하는 게…….”

“그런데, 다른 애들 말은 들어봤어?”

“……네?”

“만약 글로브의 계약이 해지되고 가로 엔터로 오는 게 지유 네 목적이라면, 다른 애들 의견은?”

“그야…….”

당연히 좋아하지 않을까?

지유는 표정으로 그리 말하는 듯했다.

성필은 그녀의 낙관적인 이야기를 듣고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짧게 수긍해주었다.

“지유 네 생각은 잘 알겠어. 그런데 멤버들 의견부터 듣는 게 먼저인 거 같아. 그리고 그 극단적인 방법은, 윤상열이랑 회사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정해도 안 늦지 않을까? 정말 윤상열이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땐 내가 진지하게 받아들일게.”

“오빠, 지금까진 안 진지했어요?”

성필은 미소 짓기만 했다.

지유는 더욱 아리송한 표정이 됐다. 성필은 대체 뭘 고민하는 거지?

글로브는 현역 걸그룹 중 상업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아이돌이다. 그런 그룹을 삼킬 기회가 왔는데, 왜 이렇게 소극적이지?

“지유야.”

성필은 온화한 투로 말했다.

“너에게 명백한 진리더라도, 다른 사람 눈엔 안 그럴 수 있어. 그래서 대화가 필요한 거야.”

* * *

그날 저녁, 글로브 멤버 전원이 지유의 집으로 모였다.

지유는 창문 블라인드를 살짝 제쳐 대문 밖을 바라보았다. 석세스 엔터의 매니저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얘기 시작할까?”

라희는 오늘 낮에 봤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멤버들에게 항상 보여주었던 부드럽고 자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지유는 라희의 목소리를 듣고 모두의 앞에 섰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멤버들 이야기를 다 들어보라고?’

들어볼 필요도 없다.

당연히 자신의 생각에 동의할 테니까.

라희는 너무 무르다. 부드럽게 상황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여긴다.

아니, 절대 아니다. 기득권과 권력자들은 스스로 힘을 내려놓지 않는다. 양보하는 척만 할 뿐.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혁명이야.’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전부 뜯어고쳐야 한다.

귀족과 왕족을 단두대 위에 세우고 피로 광장을 적셔야만 한다.

부패한 권력자의 피를 맛보기 위해서라면, 정의로운 자들의 피를 수십 배 더 바치는 것조차 감수할 수 있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나아간다고, 지유는 믿었다.

“반대야.”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유현이 말했다.

너무나 빠른 답이라 지유가 당황할 정도였다.

“뭐?”

“반대라고.”

유현은 양반다리로 앉아 무릎 위에 느슨히 팔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시선은 지유를 향해 있지 않았다. 뭐라도 있는 것처럼 바닥만 보았다.

자신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유현은 원래 다른 사람과 눈을 잘 맞추지 않는다.

지유는 평소엔 그걸 아무렇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만큼은 유현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꼈다.

“계획의 현실성이나, 우리 방치되는 기간은 뭐, 그렇다 치고. 우리가 가로 엔터에 가봤자 좋은 일은 없어.”

“뭐래?”

“우리가 정말 가로 엔터로 간다면, 우린 영원히 2등 그룹이야.”

“그, 그건 나도 걱정한다!”

노아가 발표하는 것처럼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소비에트 연방만큼은 아니지 우리! 그래도 돈 버는데, 결국 2인자 아닌가!”

“맞아, 가로 엔터가 우리한테 소련 정도로 투자할까?”

“아니, 니들 진짜 뭐라는 거야?”

지유의 목소리에 흥분이 감돌았다.

“성필 오빠가 있다고 가로 엔터에는!”

“그 박 팀장님이 우릴 버렸어. 버리고 간 거야.”

유현이 말하자 지유는 입을 다물었다. 지유의 입꼬리가 격한 감정으로 파들파들 떨렸다.

유현은 여전히 바닥만 보며 말했다.

“그러고서 만든 게 소녀연맹이고. 무슨 소리인지 몰라? 박 팀장님은 소녀연맹을 더 신경 쓰실 수밖에 없어. 아니, 소녀연맹은 반드시 글로브보다 더 유명하고 잘나가야만 해.”

“이해가…… 이해가…… 이해가 안 되는데? 야, 최유현. 넌 시발 애가 왜 그렇게 꼬였냐? 그럼 뭐, 윤상열 밑에서 계속 이딴 식으로 살게?”

“새우잡이 배 탔다고 생각해.”

“…….”

“7년 동안 배 위에서 개고생하는데, 끝나면 돈 많이 벌잖아.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고, 나는.”

돈 때문에 자존심을 굽혀?

지유는 최유현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해보려 노력해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지유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곤 했다. 젊을 때는 뭐하고, 저 나이 되어 저렇게 사느냐고 경멸해왔다.

그때의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최유현이 길거리의 거지로 보인다.

“소민이 너는?”

양소민은 아까부터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난…….”

양소민이 읊조리듯 작게 말했다.

“시간 버리는 건…… 싫어…….”

석세스 엔터와 본격적으로 갈등 상태에 들어서면 1년은 우습게 날아갈 것이다.

양소민은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

아이돌로서 활동할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 황금기를 버리는 건, 윤상열 밑에서 괴롭게 사는 것보다 싫다.

최고의 아이돌이 되어야 하니까.

지유는 넋 잃은 얼굴로 이번엔 위세라를 보았다. 위세라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애매하게 답했다.

“자, 잘 모르겠어.”

“정진이는?”

“아이 돈 노우.”

“진지하게 대답해!”

정진은 어깨를 흠칫 떨더니 오해 말란 듯 손을 마구마구 저었다.

“아, 아니 진짜 모, 몰라 난! 내 일, 내가 뭐 할 일도 아니……!”

“네 일이라고! 우리 일이야! 우리 일인데 제대로 답도 못 하는 년들은 뭐야! 어쩌자는 건데!”

“지유야.”

라희가 지유의 손을 잡았다. 지유는 거칠게 숨을 토하더니 작게 ‘미안’이라고 말했다.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지유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게 뭔가?

‘버텨? 그 꼴을 당하고도?’

그 꼴을 당하고도 3년을 참은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멤버들은 심지가 너무 약했다. 윤상열 그 새끼한테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없나?

동료가 칼을 빼 들었다. 자신들을 억압하는 폭군을 죽이기 위하여. 그런데, 동료들은 같이 칼을 뽑긴커녕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다.

‘뭔데 대체 이게?’

지유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일을 벌였어야 했다고 내심 자책해왔다. 이제야 윤상열에게 반항할 생각을 한 게 멤버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멤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래, 멤버들에게 미안했었는데…….

“뭐야, 대체, 뭐냐고…….”

정작 돌아온 건 멤버들의 냉담한 반응뿐이다.

철석같이 옳다고 믿어왔던 정치관이, 역사관이, 신념이, 주변 친구들에게 부정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아.”

그때 최유현이 입을 열었다.

“아까 박 팀장님이 우리 버렸단 거, 말이 심했어. 그냥 피디님 싫어서 나간 건데. 딱히 우릴 버린 건 아니지. 음.”

“…….”

어쩌라고.

“박 팀장 조금 섭섭하긴 하다…….”

노아 넌 또 뭔데.

“저어, 지유야.”

그때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양소민이 지유를 불렀다. 양소민은 겨우 용기를 내어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지유 넌…… 아이돌을 그만하고…… 싶어?”

“……뭐어?”

지유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뭐, 죽을 거면 나 혼자 죽으라 이거야? 팀에 분란 일으킬 거면 나 혼자 나가라고? 넌……!”

“아님 피디님한테 불만이 있는 것보다, 혹시, 그냥, 박 이사님 있는 회사에 가고 싶은…… 거야……?”

“…….”

지유는 한숨과 함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녀는 똑똑하다. 또래보다 성숙하다고 자부한다. 그 이유는 반성하는 자세에 있다.

타인과 생각이 다르다면, 그녀는 ‘내가 옳아’가 아니라 ‘내가 틀릴 수도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녀는 분노에 휩싸여 말싸움을 벌이지 않는다.

그런 지유가 생각했다.

‘내가 뭘 놓치고 있나?’

일단 생각나는 건 하나다.

돈 없는 이들은 절박하고 비굴하다.

12년 동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노예가 되는 법을 학습한다.

인간이 아니라 노동자가 되는 법을 배운다.

그런 멤버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부당한 권력자에게 복종하고 굴복하는 태도를 학습했다.

손에 쥔 한 줌을 놓고 싶지 않아서…….

“왜 자해하나!”

노아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팍팍 때리는 지유를 다급히 말렸다. 이마가 붉어진 지유가 멤버들을 한 명씩 가리켰다.

“정리해볼게. 소민이, 넌 회사가 죽자고 덤벼들었을 때 시간 버리는 게 싫어. 아이돌로서 살 시간은 한정적이니까. 맞아?”

“으, 응.”

“노아 넌 우리가 가로 엔터로 옮겼을 때 2등으로 대우받는 게 싫어. 맞아?”

“난 항상 톱을 노려라!”

“정진인 생각이 없고.”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모르겠…….”

“세라도 똑같고.”

“…….”

“유현이, 최유현, 너는, 그냥 새우잡이 배 탄 거고. 아예 상황을 바꾸기보다 참는 걸…….”

최유현이 지유를 제지했다.

“우리 똑바로 말하자. 회사 옮기는 거? 좋다 이거야. 근데 어디로 옮기든 석세스 엔터만큼 우리한테 신경 써줄 리가 없어. 석세스 엔터만한 역량도 없을 테고. 가로 엔터도 마찬가지야. 거긴 소녀연맹 하나 신경 쓰기도 벅찬 작은 회사잖아. 애초에 우리가 전부 가로 엔터로 가는 거부터가 말이 안 되긴 하다만…….”

“어, 윤상열이 개새끼지만 그래도 해줄 건 다 해주는 개새끼다 이거지?”

“아주 정확해. 나도 아무런 문제도 없이 마법처럼 팀장님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아.”

양소민이 작게 ‘응…….’이라고 말했지만, 작아서 다들 듣지 못했다.

“근데 아무런 문제도 없이 마법처럼 팀장님을 다시 만날 수가 없잖아. 이렇게 비유를 들면 이상한데, 우린 팀장님한테 불장난으로 태어난 애라고. 멀쩡하게 가정 이루고 사는데 집으로 찾아가서 ‘아빠’라고 하면, 거기서 참 융숭하게 대접해주겠…….”

“재미없는 비유 그만해. 사랑과 전쟁이랑 심야의 고민 상담도 그만 보고. 됐고, 라희 넌 윤상열이랑 S극과 M극처럼 서로 끌어당기고.”

“S극과 M극이 아니라 N극이야.”

“얘는 농담을 모르네.”

“너 그딴 얘기 좀 하지 마. 정진이 섹드립 하나만 해도 듣기 싫어.”

정진이 곧바로 반발했다.

“내가 뭐! 그게 내 잘못이야? 너희들이 내가 야한 얘기할 때마다 웃어줬잖아. 너희들이 날 이렇게 만든 거잖아.”

“하아, 정진아. 이제 와서 말하는데, 난 진짜 그런 거 듣기 싫거든? 그리고 누가 웃어? 억지로 맞춰주는 거…….”

“XX.”

노아가 크게 웃었다. 거기에 더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천박한 단어에 몇몇이 짧게 풋 웃었다.

라희는 희망을 잃었다. 정진은 정말 글로브 멤버들이 만든 괴물이었다.

“암튼.”

지유가 본론으로 되돌아왔다.

“다 나처럼 결사항전할 생각은 없단 거지? 겁쟁이들아.”

“지유야, 일단 들어봐.”

라희는 본인의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윤상열에게서 글로브의 권리를 얻어내고자 한다. 최소한 존중받고자 한다.

그건 지유가 돌아옴으로써 해결된다.

“회사가 어떻게 하지도 못하는 일을 내가 해결한 거야. 내 말에 영향력이 생길 수밖에 없어. 너희들이랑 피디님의 연결을 아예 끊을게. 나를 통해서만 이야기하도록.”

“윤상열이 날 폭탄처럼 취급하게 만들겠단 거네? 무서워서 못 다가오게?”

“맞아, 그거야. 지유야, 네가 나간 이유도 피디님이 과하게 몰아붙인 거 때문이잖아. 이젠 그런 거 없어. 굳이 과격하게 나가지 않아도, 모두의 고민은…….”

“알았어.”

“정말로?”

“어. 네 말 알겠다고. 근데.”

지유는 테이블 위에서 스마트 패드를 가져와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펜슬을 들고 중앙에 내려두었다.

“그냥은 안 돌아가.”

“……그럼?”

“다들 그 새끼한테 불만이었던 거 하나씩 써.”

“피디님한테 요구하려고? 직접적으로?”

“야, 라희야. 넌 그 새끼를 굉장히 우호적으로 보나 본데, 난 그렇지가 않아요. 그 새끼한테 최소한의 인간성이 있단 걸 확인하기 전까진 못 돌아가.”

아무도 패드와 펜슬을 잡지 않았다.

그러자 지유는 패드를 양소민 쪽으로 내밀었다. 옛날부터 윤상열에게 가장 무시받았던 멤버에게.

“야, 적어.”

“…….”

양소민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우물쭈물 패드와 펜슬을 쥐었다. 그러고서 또 지유의 눈치를 보았다.

지유가 빨리 적으라는 듯 턱을 까딱했다.

양소민은 고민했다. 몇 초, 십수 초, 그러고선 천천히 펜을 움직였다.

처음엔 빠르게 움직이던 펜은 곧이어 희미하게 떨려왔고, 이윽고 양소민은 눈물을 한두 방울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다들 말없이 그걸 바라보기만 했다.

양소민은 눈물을 훌쩍이면서 패드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체스판을 돌려주세요.]

“……좋네.”

지유는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멤버들은 돌아가며 요구사항을 적어나갔다.

아까 멤버들에게 비굴한 이들이라고 생각했던가. 이제 보니 아니었다.

이건 명백한 반항이다.

반란이다.

이걸 윤상열에게 보여주는 건 충분하고도 넘치는 반항 정신의 표현이다.

‘적어도 나 혼자 지랄하는 것보다 훨씬 나아.’

멤버 전원, 글로브는 신을 향해 도전한다.

‘다 같이 회사를 나가는 것보다야 못하지만.’

소중한 동료들이 회사에 남고 싶다면, 지유는 그 의사를 존중한다. 존중해보기로 했다.

“그래.”

지유는 요구사항을 적으면서 말했다.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는 거랑 같지.”

내가 고른 게 아니라도.

이 만남이 실수더라도.

삶 자체를 비관해선 안 된다.

환경을 저주하며 세상을 등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세상을 사랑해보도록, 삶을 바꾸도록 노력해봐야겠지.

“라희, 잘해봐. 그 새끼가 더는 소민이 못 울리게.”

“어.”

반드시.

“그런데, 이번이 마지막이야. 또 그딴 일 있으면 정말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어떡하나!”

“나 혼자라도 나갈 거야.”

“역시 이름이 지유(자유)라서 호쾌다!”

* * *

윤상열은 글로브의 요구사항이 적힌 서류를 읽었다.

“이게, 뭐냐…….”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뭐냐, 고, 이게…….”

[노아: 그래서 학점 A 받았나! 알려달라!]

아니, 이게 아니라.

[소민: 체스판을 돌려주세요.

노아: 그래서 학점 A 받았나! 알려달라!

세라: 주간, 월간 평가 폐지해주세요. 저희가 연습생도 아니잖아요.

정진: 앨범 활동기간 제외하고 저녁 이후 트레이닝 스케줄 빼기.

유현: 인신공격, 욕설, 비꼬기, 비웃음을 삼가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유: 추가 부속 계약서 이행.]

“거기 적힌 걸 들어주셔야.”

라희가 말했다.

윤상열에겐 그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만 해도, 아니. 분노를 삼키는 것만 해도 온 정신을 쓰고 있었다.

이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건, 지유가 변호사를 데리고 와 제시한 조건을 들어주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적어도 윤상열에겐 그러했다.

“들어주셔야, 지유가 돌아온대요.”

왜냐하면, 이걸 들어주는 순간 윤상열은 본인의 잘못을 시인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잘못했다’고, 글로브 멤버들에게 사죄하는 것과 똑같다.

그의 눈동자에 불길이 차올랐다.

그 불길을 보며, 라희는 생각했다.

‘무서워.’

무섭지만, 해야만 한다.

사랑하는 멤버 모두를 위해.

“그리고요 피디님.”

라희는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불길에 맞섰다.

“저도 거기 적힌 거엔 전부 동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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