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화
‘아오아’에 출연하는 아이돌은 본인이 직접 안무를 만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전문 안무가의 도움을 받는다.
본인이 안무 작업에 참여하더라도 부분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는 정도다.
그도 그럴 게, 아이돌은 춤추는 사람이지 춤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아라가 다른 안무가한테 춤을 받을 바에야, 내가 기억하고 있는 춤을 전수해주는 쪽이 낫겠지.’
성필이 기억하는 춤은 두말할 나위 없이 걸작이다. 전생의 조아라를 스타로 만든 안무였으니, 그 아름다움을 의심하진 않는다.
하지만 현재의 조아라가 그 춤을 마음에 들어 할지는 몰랐다.
‘아라가 마음에 들어하면 좋고, 아니더라도 딱히 문제는 없지.’
성필은 딱히 ‘반드시 이 춤이어야 한다’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음, 뭐.”
조아라는 의외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보여주고 싶으면 뭐, 보여줘요. 근데 웬일이에요? 아저씨 내가 춤춰달라고 하면 경기 일으키면서 도망가잖아요. 아님 그거? 내가 더 적극적으로 들이대 보라고 해서 이러는 거예요? 참나, 아저씨가 학생도 아니고 춤으로 매력 어필하게요? 무슨 하이틴 드라마예요? 댄스 동아리 남자 선배 보고 반하는 내용?”
“너 되게 기뻐한다.”
지금까지 춤을 안 춰준 게 미안할 정도로, 조아라는 만면에서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가 춤춰달라고 했을 때 안 춘 건…….”
성필이 말을 멈추었다.
“안 춘 건, 뭐요?”
네가 반할까 봐, 라고 말할 순 없다.
그럼 성필은 곧바로 도끼병 환자가 되어 가로 엔터 곳곳에서 악명을 얻을 게 분명하다.
훗날 조아라에게 남자친구가 생기거나, 성필의 나이가 마흔을 넘어간다면 춤 따위 얼마든지 춰줄 수 있으리라. 그때면 조아라가 부탁하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 조아라에게 남자친구가…….
“…….”
“아저씨?”
성필은 그녀가 재차 부르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 춘 건, 네가 놀리려고 부탁한 거니까 그러지.”
“진짜 보고 싶었던 거예요. 아저씨 재능 있다니까요. 몸 쓰는 게 예사롭지 않아요.”
“눈동자 위아래로 굴리면서 훑지 마.”
둘은 가벼운 마음으로 빈 연습실로 향했다.
조아라는 성필의 정면에 앉았다.
“곡 틀게요.”
조아라는 흥미가 있을 뿐이었지, 성필이 정말 제대로 된 춤을 보여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배드’는 3분에 이르는 곡이다. 성필이 3분 동안 춤을 출 리는 없고, 1분이라도 채우면 잘했다고 박수칠 것이다.
성필도 간단한 아이디어가 했을 뿐, ‘배드’ 전체 안무를 생각했다곤 하지 않았으니.
그러니 조아라는 춤에 대한 기대가 없다시피 했다. 물론 성필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에 대한 기대는 있었지만.
뭐, 당연하지 않은가.
성필이 진심으로 춤을 배운 것도 아니고 취미 삼아 아이돌 안무를 몇 개, 어쩌면 십수 개 외웠을 정도이니.
“맞다, 잠시만.”
성필은 연습실을 나갔다가 1분 후 돌아왔다. 그는 정장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웬 거예요?”
“한 이사님 꺼 빌렸어. 이게 키 포인트거든.”
“생각 많이 했나 보네.”
조아라는 흥미를 담아 성필이 춤추길 기다렸다.
단순한 흥미가 놀라움으로, 경악으로, 이윽고 넋 잃음으로 변하는 데엔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놀랍게도 성필은 ‘배드’ 곡 전체 안무를 추었다.
“어때?”
성필이 살짝 거칠어진 호흡과 함께 물었다.
조아라는 대답 대신 벌떡 일어나 연습실을 나갔다. 성필이 당황하고 있자, 그녀는 소녀연맹 멤버 전원을 데려왔다.
“박 이사님이 환상적인 댄스 퍼포먼스를 선보인단 소식을 듣고 지금 도착했습니다! 자, 춤추세요!”
“아, 아라야 왜…….”
“아뇨, 어…….”
조아라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답했다.
“내가 콩깍지 같은 거 씌었는지 확신이 안 들어서요…….”
“코, 콩깍지?”
성필이 기겁하면서 반문하자 조아라가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 거 있잖아요! 제 자식이 노래하고 춤추면 실력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예쁘게만 보이는 거요!”
“형편없는 건 네 비유 실력이야.”
“아, 암튼 멤버들 앞에서도 해보라고요! 쌤, 언니, 리카, 잘 봐.”
“난 없는 사람이냐?”
신아름이 툴툴거리면서 자리를 잡았다. 그녀 또한 조아라처럼 별 기대는 없었다.
조아라는 왠지 모르지만 성필의 댄스에 관심이 많았다.
장난으로 ‘아저씨 춤춰줘요’라고 자주 말하는데, 이젠 장난 수준이 아니라 집착의 선까지 닿아가고 있었다.
‘아마 조아라 나름 오기가 생긴 거겠지.’
성필이 춤을 춰주자, 조아라는 결국 자신이 이겼다면서 좋아했으리라.
그 기쁨이 합쳐져서 자기도 모르게 성필의 춤을 고평가한 거겠지.
그럴 수밖에 없다. 성필이 안무가도 아니고, 그가 만든 춤이 만듦새가 좋을 리 없…….
“으허어헝 팀장님 너무 멋져요……!”
3분 후, 신아름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성필에게 모든 열광과 열정과 열망을 바쳤다.
‘딸바보’라는 단어가 있다.
흔히 딸에게 한없이 무르고, 딸만 보면 팔불출이 되는 아버지를 일컫는다.
그리고 신아름은 생각했다.
‘아빠바보’란 말도 생겨야 한다. 신아름은 지금의 마음가짐이라면 성필을 덕질할 수도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왜, 잘생긴 선생을 덕질하는 학생들도 있지 않은가. 회사 이사는 왜 안 되는데(누구도 안 된다고 한 적 없음)!
“박 이사님 이사님! 그거 다시 보여주세요! 재킷 내리는 거요!”
“이거?”
성필이 재킷을 팔에 걸치도록 헐렁하게 입곤 상체로 바운스를 탔다. 곡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안무의 하이라이트였다.
전생의 조아라는 이 안무를 할 때 크롭을 입어서 섹시함이 강조됐었지만, 성필은 평범한 티셔츠 차림이라 섹시함은 없.
“이사님 세쿠시(섹시)!”
역시 완성도 높은 춤은 의상의 구애를 받지 않고 매력을 펼칠 수 있는 듯했다.
조아라는 또 멍하니 성필을 보다가, 아까처럼 연습실을 나섰다. 그녀는 이번엔 홍규헌, 한구인, 손혜빈, 이재호, 정지음을 데려왔다.
홍규헌은 신나서 바운스 타는 성필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조아라, 네가 박 이사를 프로듀서로서 많이 아끼는 건 아는데 나한테까지 자랑할 필요는 없…….”
3분 후.
“이게 박 이사가 만든 거라고?!”
아이돌에 심취하다 보니 아이돌이 되어버렸나?
아니면, 아이돌을 10년 이상 파다 보면 저절로 안무 능력이 생기는 건가?
하긴 10년 동안 춤을 수천수만 개는 봤을 텐데, 춤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영 이상하진 않긴 하다.
“이사가 되려면 저 정도는 되야 하나 보네요.”
이재호는 묘하게 패배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선 한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보십니까.”
“아뇨…….”
“…….”
“한 이사님은 춤 못 추…….”
“제가 이상한 게 아니라 박 이사님이 특별한 겁니다!”
관객이 추가될수록 성필은 점점 더 기분이 좋아졌다. 이대로라면 아이돌 콘서트처럼 25연속으로 무대 퍼포먼스를 소화할 수 있을 듯했다.
“아라야, 이번엔 누구 데려오게? 이젠 네가 콩깍지 씐 거 아니란 거 알겠지?”
조아라는 멍하니 성필을 보다가, 또 연습실을 나섰다. 그러고선 서유선과 안무가들을 데려왔다.
“마지막 시험이에요. 회사 사람들은 전부 아저씨한테 호의적이잖아요. 재호 오빠는 인사 평가에 불이익 얻기 싫어서 좋은 척하는 걸 수도 있어요. 자, 춤춰요.”
“부, 부끄러워…….”
“네?”
아, 하긴.
진짜 춤꾼들을 데려다 놓고 춤을 보여주려면 창피하겠지. 회사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는 것과는 결이 다르…….
“유선 씨한테 보여주는 건 부끄럽…….”
“아저씨 진짜 미쳤어요?! 우리 앞에선 신난 강아지처럼 날뛰어놓고 선배님 앞에서 춤추는 건 부끄럽다고요?!”
“그렇지만 아이돌이시잖아…….”
조아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럼 자신과 멤버들은 아이돌이 아닌가?
조아라가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듯 노려보자, 성필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춤을 추었다.
성필의 춤이 끝나자 안무가들은 박수를 쳤다. 그러나 그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
안무가 신지욱이 물었다.
“근데 저 춤이 왜요?”
“아저씨가 직접 만들었어요.”
“와, 엔터 업계 이사쯤 되려면 어반 댄스 안무도 할 수 있어야 하나 보네요. 하기사, 업계인이 이사 자리에 앉는 거니까요.”
“아저씨는 춤 안 배웠어요.”
“……???”
신지욱이 얼떨떨하여 물었다.
“그럼, 어떻게?”
그건 조아라가 묻고 싶은 거였다.
그녀는 성필을 빤히 응시했다.
그에 성필도 조아라를 마주 응시했다.
“어떻게냐고 묻잖아요.”
성필은 이미 시선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조아라 때문이다. 정확히는 전생의 조아라지만.
“뭐, 어쨌거나 결판났네요. 내 콩깍지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좋은 춤이에요.”
“그럼…….”
홍규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무비를 박 이사한테 지불해야 하나?”
“퍼포먼스 디렉터 필요 없던 거 아녜요? 굳이 제가 일본에서 안 와도 됐을 거 같은데요…….”
서유선은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성필이 즉시 반박했다.
“아니에요! 어떻게 저 따위가 유선 씨에 비비겠어요!”
“아아, 이사님……!”
“유선이는 술 먹어서 저런 건데, 성필이 쟤는 맨정신에도 유선이랑 감정선이 비슷하네.”
손혜빈의 말에 멤버들이 동감했다.
그렇게 조아라가 ‘아오아’에서 선보일 곡과 안무가 하루 만에 결정됐다.
* * *
“결정됐다.”
윤상열이 아이튜브에 접속하여 모니터에 뮤직비디오 화면을 하나 띄웠다.
지유는 곡명을 읽었다.
“캘리포니아 걸스(California Gurls)요?”
“아나?”
“몰라요.”
“케이티 페리는?”
“모르는데요?”
“케이티 페리를 모른다고?”
윤상열의 얼굴에 얼핏 비웃음이 지나갔다. 그러나 지유를 보고선 곧바로 비웃음을 감추었다.
아니, 지유의 뒤에 선 라희를 보고서.
라희는 싱긋 미소를 지은 채 윤상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티 페리는 팝의 여왕이다.”
7억 이상 조회 수 뮤직비디오를 10개 가진 유일한 가수.
30억 이상 조회 수 뮤직비디오를 가진 유일한 여성 아티스트.
최초로 10억 조회 수 영상을 달성한 여성 아티스트.
최초로 빌보드 싱글 차트 52주(약 1년) 연속 10위권 달성 가수.
“캘리포니아 걸스가 수록된 앨범은 아직도 빌보드 200 차트 안에 있지.”
빌보드 200 차트는 앨범 판매량으로 순위를 나누는 차트이다.
빌보드 내엔 수많은 차트가 있는데, 그중에서 싱글 차트와 빌보드 200 차트가 가장 주목받는 동시에 위상이 높다.
“언제 나온 건데요?”
“2010년.”
그엔 지유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유가 초등학생 때 나온 앨범이 아직까지 차트 안에 있단 뜻이었으니까.
“일단 들어봐라.”
통통 튀는 경쾌한 사운드와 귀를 휘어 감는 보컬이 인상적이었다.
왜 아직도 차트 안에 남아있는지 알겠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났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세련되었다. 시간이 내려주는 풍화를 거의 맞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지유는 귀로는 곡을 들으면서, 눈으로는 뮤직비디오 대신 윤상열을 보았다.
윤상열은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구르면서 박자를 맞추었다. 무슨 뜻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신나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걸스의 가사를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We got it on lock, West Coast represent(우린 그 모든 걸 가졌고 웨스트 코스트를 대표하지)…….”
지유는 윤상열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그의 작업실에 직업 발을 들인 것도 처음이었으니.
연습실에서 지랄하는 것만 봐서 몰랐는데, 그는 작곡가인만큼 음악을 사랑하는 듯했다.
‘곡 고르는 센스가 없진 않네.’
“Sex on the beach(해변에서 정사를 나눠)…….”
“……???”
윤상열의 흥얼거림을 듣고 지유는 깜짝 놀랐다.
‘노래 가사야? 내가 잘못 들었나?’
지유는 뮤직비디오에 집중했다.
나신의 케이티 페리가 엎드려 섹시한 매력을 발산하는가 하면, 등장하는 여자 백댄서들은 과자로 꾸며진 옷을 입었다.
너무 적나라한 비유였다.
그리고 지유를 또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스눕독?”
“케이티 페리는 모르는데 스눕독은 아나? 말도 안 되게 편향된 지식이군.”
지유가 딱히 해외 힙합을 들어서 아는 게 아니었다. 스눕독이 밈으로 쓰이는 유머 영상을 봐서 아는 것이었다.
외국 밈 영상을 보다 보면 ‘Smoke weed everyday(매일 대마를 피우자)’라는 가사의 음악이 자주 등장하곤 했다.
그때마다 스눕독이 춤추는 모습이 나온다.
뮤직비디오가 끝나자 윤상열은 다시 지유를 쳐다보았다.
“이 곡이 가진 힘은 알았겠지. ‘아오아’에서 네가 선보일 건…….”
“섹시는 별로……. 막 골반 강조하고 엉덩이 흔드는 건 진짜 별론데…….”
“뭔 소릴 하는 거냐? 넌 그런 거 안 어울려.”
“…….”
원하는 대답이 나왔건만 지유는 역으로 기분이 안 좋아졌다.
“회사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넌…….”
“아아 네 알겠어요.”
유상열이 ‘감히 내 말을 끊어’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지유에게 한 소리 하려는 듯 낮게 숨을 내리깐 그는, 지유의 뒤에 선 라희를 보곤 바로 분노조절장애가 치료됐다.
“아무튼…….”
윤상열은 자신의 머리를 손바닥을 약하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머릿속에 스트레스가 계속해서 쌓여만 간다.
“네 강점은 청순함과 상쾌함과 청량함이다. 소주 광고 모델로 적합하지.”
“소주?”
“우리나라 소주 광고 모델은 전부 청순한 느낌이니, 거기에 어울린다고. 방향성은 알겠지?”
“대충은요.”
“……동의하나?”
“네?”
지유가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지, 지금 저한테 의견 물은 거예요?”
윤상열은 세상에 없을 굴욕을 참으려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지유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 뒤에 선 라희를 보았다. 라희는 미소만 방긋거릴 뿐이었다.
“그냥 묻는 건데,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어쩔 거예요?”
“안 하려고?”
“그냥 묻는 거라고 했잖아요. 할게요.”
지유는 기분이 좋아졌다.
스스로도 이상할 만큼 기분이 좋았다.
단순히 윤상열이 자신의 의중을 신경 써주었단 것만으로도 엄청난 배려를 받은 느낌이었다.
“안무 시안은 일주일 내에 받아서 너한테 전달할 거다. 그때까지 너는…… 그래, 진저랑 아라와 친해져라.”
“……???”
윤상열은 ‘계속 어벙한 표정 지어서 본인 지능이 낮단 걸 드러내지 마라’라고 말하고 싶었다.
만약 지유의 난과 라희의 압박이 없었더라면 그대로 말했을 것이다.
윤상열은 또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을 느끼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아오아’의 경연 방식은 너도 알다시피 특이하다. 그리고 소수의 다수결이란 게 으레 그렇듯이 옳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하지. 결국엔 친분 싸움이 될 거다. 유감스럽게도 아라랑 진저가 절친한 사이이니, 네가 우승할 가능성은 없겠지. 하지만 아예 노력도 하지 않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지금부터라도 둘과 친해져라. 최소한, 둘이 친분이란 이유로 서로를 고를 때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게.”
“……진짜 걔들이 그럴까요?”
“애들은 그럴 마음이 없더라도, 회사가 그렇게 시킬 거다. 어쩌면 이미 KS 엔터와 가로 엔터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오갔을 수도 있겠지.”
“그 둘이 거래해서 어떤 결과가 나와요? 결국 내가 안 찍어주면 이기질 못하잖아요.”
“KS 엔터와 가로 엔터는 나를 싫어한다.”
“네?”
“비열한 놈들이, 1대 1대 1로 그럭저럭 체면을 챙기는 대신 네가 패배하도록 짤 거란 말이다. 내게 굴욕을 주려고.”
지유는 윤상열의 병명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피해망상.
‘그래도, 아라랑 진저가 서로를 찍을 거란 건 그럴듯해. 두 사람이랑 친해지긴 해야겠어.’
누가 더 친해지기 쉬울까?
얼핏 보면 조아라일 것 같지만…….
‘의외로 진저 같은 애가 한번 친해지면 정을 많이 줄 거 같네.’
이전 ‘아오아’ 사전 미팅에서 진저는 지유를 무시하다시피 했었다.
조아라가 오자마자 주인을 맞이하는 강아지처럼 달려 나간 꼴을 보라지.
하지만 오히려 조아라보다 진저가 공략이 더 쉬울 듯하다.
‘모르는 사람한테 쌀쌀맞게 대하는 건, 그만큼 인간관계에서 먼저 다가가는 데 부담을 느낀다는 거니까. 나를 무시한 것도 그런 맥락이겠지.’
원래 사교성이 좋은 사람은 깊이 친해지기가 더 어렵다. 모든 사람과 친하니 말이다. 조아라가 그런 스타일이다.
‘좋아, 첫 번째 목표는 진저다.’
* * *
‘아오아’ 3인 합동 인터뷰 당일.
쉬는 시간.
지유와 조아라는 해맑게 담소를 나누었다.
“아 진짜요? 엡실론 선배님들이 그런다고요?”
“그렇다니까. 연습하러 오면 머리 안 감고 다들 모자 쓰셔. 내가 장난삼아 좀 씻고 오라고 하면 ‘어차피 땀 흘릴 건데 왜?’라더라고.”
“그럼 언니는 매일 머리 감고 연습하러 가요?”
“쓰읍…….”
“아 뭐야아하핰!”
둘은 끊임없이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둘 다 사교성과 사회성이 좋아 처음 보는 사람과도 격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소심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진저였다.
그녀는 둘의 대화에 쉽사리 끼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단순히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이지유…… 저 여우 같은……!’
아라 씨 베프는 나인데! 나여야 하는데! 나밖에 없는데!
진저는 지유를 향해 질투의 불길을 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