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32화 (532/760)

532화

‘아오아’ 촬영은 오전, 낮, 이른 저녁으로 시간을 나누어 촬영한다. 지유, 조아라, 진저 순서다.

그 세 명은 본인의 촬영 시간에 맞춰서 오면 되는데…….

“PD님.”

“어.”

스태프들은 촬영장 한편에 모여 있는 세 명의 아이돌을 바라보았다.

셋 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오전부터 모여 있었다. 지유는 원래 오전 촬영이니 그렇다 쳐도, 조아라와 진저는 할 일도 없을 텐데.

“셋이 친해서 이런 거겠죠……?”

그렇다기엔 세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드문드문 짧게 이야기할 뿐, 나머지 시간은 폰을 만지거나 몸을 푸는 데 쓰고 있다.

“경쟁자들을 보고 싶은 거겠지.”

“나중에 인터뷰 딸 때 영상 보여주잖아요.”

“직접 보고 싶은 거 아닐까.”

“우와, 라이벌리가 느껴지네요.”

촬영은 춤 한 번 추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중간중간 카메라들의 각도를 교체하거나, 백댄서가 나왔다가 빠지고, 조명 강도와 색을 바꾸며, 의상을 갈아입기도 한다.

약 3분의 영상을 위해 촬영해야 하는 횟수는 십수 번이나 된다. 아이돌의 컨디션을 고려해야 하니 휴식 시간도 필요하다.

“다른 참가자들이 끝나는 걸 기다리면, 거의 하루를 다 쓰는 건데요.”

“그러게.”

PD는 왠지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런 경우가 없진 않았으나, 대부분의 아이돌들은 본인의 촬영 시간만 맞추어 올 뿐이었다.

나중에 경쟁자들의 영상을 확인하곤 의례적인 리액션 정도를 보이는 정도. 그게 대부분의 아이돌이 지닌 의식 수준이었다.

‘아오아’를 기획한 PD로서 씁쓸하지만, 시청자들은 물론 아이돌들도 이 프로그램을 경쟁으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대충 표 갈라 먹어서 서로 체면 세워주는 정도라고 생각하지.’

중요한 건 아이튜브에 올라갈 영상이다.

그 영상으로 조회 수를 최대한 확보하여 인지도를 올리는 것. 그게 아이돌로서의 진정한 경쟁이리라.

‘그런데 쟤들은 달라.’

서로를 진정한 경쟁자로 여기고 있다.

적어도 PD가 생각하기엔 그러했다.

PD는 티테이블 위에 올라온 커피를 바라보았다. 평소 오전 촬영 땐 눈이 떠지지 않아서, 위장에 커피를 몇 잔이나 부어 넣어야 했지만.

‘오늘은 필요 없겠네.’

저 셋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번쩍 떠진다.

* * *

점심시간.

성필과 조아라는 스튜디오 밖으로 나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지유 언니 어땠어요?”

조아라가 묻자 성필은 하하 웃을 뿐이었다.

의도적으로 대답을 회피한 것이다. 조아라의 멘탈을 고려하자면 성필은 경쟁자를 평가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런데 조아라는 성필을 계속 빤히 바라보았다.

성필이 떨떠름하게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진짜 말해?”

“네. 걍 영화 보고 수다 떠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부분이 괜찮았네, 이건 좀 별로였네, 그런 거 있잖아요.”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할 만한 게 아니다.

성필은 고민해야만 했다. 조아라의 의지를 북돋워 주는 차원에서 지유를 깎아내려야 할까, 아니면 사람 좋게 적당한 칭찬을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지유라는 아이돌에 대한 애정을 듬뿍 드러내야 할까…….

“솔직하게 말해요 솔직하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솔직하게 말해서 좋은 반응 보여주는 사람 없더라.”

“왜, 아저씨 전 여친이 그랬어요?”

성필이 깜짝 놀라자 조아라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왜 헤어졌는지 알겠네. 그런 사람 진짜 짜증 나잖아요. 자기가 하래서 하랬더니 화내고. 안 그래요?”

성필은 말을 아꼈다.

조아라는 재미없단 듯 샐러드를 포크로 쿡쿡 찔러댔다.

“그래도 옛날에 사랑했던 사람이라서 명예 지켜주는 거예요? 꽤 젠틀하네.”

“지유는…….”

성필은 무언가에 쫓기듯 지유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자 조아라는 귀를 쫑긋 세우며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굉장했어.”

“그게 다예요?”

“세세하게 하나하나씩 말한 순 없고, 그냥 굉장했어. 감상 자체가 그래.”

“굉장하긴 했죠.”

“응.”

“특히 마지막 1분이.”

“…….”

지유는 케이티 페리의 ‘캘리포니아 걸스’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캘리포니아주(州) 공인, 발매된 해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음악이라고 한다.

절로 몸을 흔들게 만드는 흥겨운 멜로디.

바다를 생각나게 하는 시원한 보컬.

그에 맞춰 지유가 내세운 강점은 섹슈얼리티였다.

“뒤로 돌아서 춤추길래 뭔지 싶었어요.”

마지막 1분, 지유는 뒤로 돌아 춤을 추었다.

보통 춤은 정면 관객을 대상으로 추는 게 기본이다. 인간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거의 다 정면에 있으니까. 얼굴부터 시작해서…… 아무튼.

그런데 지유는 최후의 하이라이트에 카메라를 등지고 춤을 추었다. 그랬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효과가 터져 나왔다.

“분명 1절, 2절 하이라이트랑 똑같은 안무였는데 훨씬 섹시했죠? 막 남자 스탭분들 처음 그 부분 나오니까 숨 헛 삼키던데. 눈 돌리는 사람들도 있고.”

“그으, 그랬지. 춤을 추는 방향만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변할 거라곤 생각 못 했어. 안무가분이 머리가 좋다, 그치? 그런 안무 구성도 대학에서 배우는 건가? 역시 사람은 배우고 봐야…….”

“아저씨는 눈도 안 감고 보더만.”

“그건 예술 작품이야! 내가 왜 눈을 돌려야 하는데! 왜 내가 오이디푸스(아내가 실은 어머니인 것을 알곤 스스로 눈을 찔러 맹인이 된 신화 속 인물)가 돼야 하는데!”

“알았어요 알았어. 누가 뭐래요? 혼자 발끈해서 변명하네.”

조아라가 실실 웃었다.

어쩌면 그녀의 눈엔 도전과제 같은 게 보이는 걸까? ‘성필 10회 놀리기’ 같은 거 말이다.

성필은 지긋지긋하단 듯 그녀에게서 눈을 돌렸다.

‘근데 윤상열이 지유한테 그런 춤을 추게 할 줄은 몰랐어.’

윤상열의 성격이라면 퍼포먼스 디렉팅 과정에서 세세하게 간섭했을 것이다. 안무가가 짜증 나서 일을 그만둘 정도로 열성적이었겠지.

‘윤상열이 지유한테서 볼 매력이 섹슈얼리티일 리 없는데.’

전생에서 가졌던 방향성과 달랐다.

윤상열이 지유에게서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일까? 하긴, 오늘 지유의 춤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윤상열의 성격이면 ‘이건 내가 아는 지유가 아니야!’라면서 황급히 뜯어고칠 것 같은데…….

윤상열은 인간 고유의 개성보다 자신의 머릿속에 든 이미지를 훨씬 신뢰하니까.

‘지유가 강하게 주장하기라도 했나?’

얼마 전 라희와 만나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는 윤상열에게 목줄을 걸겠다고 당당히 선언했었다.

‘그게 먹혔나……?’

조아라는 샐러드 보울을 반만 비우곤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만 먹을래요.”

“속 안 좋아?”

“속이 뜨거워요.”

“화장실 갈래?”

“아 진짜 섬세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네. 흥분돼서 그래요.”

“흥분이라…….”

“왜 갑자기 진지한 얼굴 돼요? 뭐, 아저씨 나름 섹드립친 거예요? 이상한 커뮤니티 좀 그만 봐요. 그런 게 아니라, 피가 끓는다고요. 적당히 배 비우고 싶어요.”

바로 다음 촬영이 조아라 차례다.

긴장될 만도 하다.

지유와 진저가, 특히 진저가 지켜볼 테니까.

진저는 오늘 조아라에게 슬금슬금 다가와 이전에 저질렀던 무례를 공식적으로 사과했었다. 조아라도 자기가 너무 심했다면서 또 사과했고.

그렇게 사이가 풀리나 싶었는데, 오늘 두 사람은 아주 조금밖에 이야기하지 않았다.

둘 다 대화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복잡한 심경이겠지.’

친구끼리 대전 게임을 해도 불편한 상황이 생기는데, 조아라와 진저는 댄서로서 자웅을 겨뤄야 하니.

“들어갈까?”

“네.”

둘은 나란히 걸으며 스튜디오로 향했다.

“아저씨.”

“응.”

“내가 바꾼 안무 어때요?”

조아라는 안무를 바꾸었단 사실을 성필에게 통보했었다. 말 그대로 통보만 했을 뿐, 그게 좋은지 어떤지는 물어보지 않았었다.

미뤄진 질문이 이제야 튀어나왔다.

“조…….”

“전 여친이 만든 거랑 비교해서요. 안무가 아니라, 퍼포먼스요.”

성필은 ‘음’ 뜸을 들이더니,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더 좋아.”

조아라도 활짝 웃었다.

‘거짓말쟁이.’

* * *

촬영 전, 조아라는 세면대 거울 앞에 서서 차림을 점검했다.

아무리 봐도 ‘롱 포’ 당시 활동 의상을 재현한 느낌이다. 검은 정장 바지 위에 브라탑, 그리고 재킷까지.

몸의 곡선을 최대한 살리는 디자인이다. 몸에 달라붙지만, 재질이 스판이라 유연하게 늘어난다.

신발은 워커다. 살짝 무거운 게 단점이지만, 무게감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아…….”

조아라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몸에 피가 빠르게 돌았다.

당장이라도 춤추고 싶다.

고루한 용어지만, 피가 끓는다.

‘나랑 지유 언니랑 비교하면 어떻지?’

모르겠다.

‘그럼 진저랑 비교해선 어떨까?’

모른다.

모르지만, 이길 것이다.

시에이스의 규영이 그랬었다. ‘아오아’를 촬영하며 가장 기뻤던 순간은, 다른 두 명의 참가자에게 표를 받아 이겼던 때라고.

조회 수나 대중의 인정과는 별개로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했었다.

‘그렇겠지.’

메인 댄서는 외로운 포지션이다.

메인 보컬은 사람들이 금방 알아본다. 노래방이 동네마다 몇 개씩이나 있는 나라이니, 사람들은 노래에 대해 훨씬 더 잘 안다.

경연 프로그램도 춤보다 노래 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제대로 봐주는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포지션.’

춤을 아무리 잘 춰도 화제가 되긴 어렵다.

애초에 아이돌의 춤은 군무니까.

군무는 모두가 주인공이어야 하지, 한 명이 특출나게 부각되진 않는다.

메인 댄서는 외롭다. 자신이 가장 오랜 세월 갈고닦아온 장기를 여실히 보여줄 기회가 없으니까.

‘그런데 여기선 달라.’

사람들은 춤을 봐준다.

춤만으로 평가를 내려준다.

춤에 대한 심미안을 가진 이들, 동료 경쟁자들이 평가해준다.

대중들마저 춤에 집중해야만 한다.

“개성…….”

그래, 모든 춤은 고유하고 개성적이다.

우열을 나눌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우열은 나뉠 수 있다.

아이돌, 연습생 경연 프로그램만 보아도 그러하다. 서로 다른 곡과 춤을 소화하더라도, 대중들이 보기엔 명백히 상하가 갈린다.

모든 아이돌은 개성적이다. 하지만 그게 아이돌 사이에 급이 없단 이야기는 아니다.

‘모두가 승자다, 같은 이야기는 없어.’

조아라는 정점에 서겠노라고 약속했다.

회사 사람들과, 멤버들과, 성필과 약속했다.

가장 자신 있는 분야에서 경쟁자들을 이기지 못한다면, 정점이란 이름은 더욱더 멀어진다.

조아라는 백설하를 떠올린다.

소녀연맹의 메인 보컬이자, 아이돌계에서 따라올 자 없는 여왕을 떠올린다.

‘쌤은 해냈어.’

백설하는 소녀연맹 모두의 손을 잡고 정점에 발을 걸쳤다. 이젠 조아라의 차례다. 그녀 또한 백설하와 함께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가자.”

조아라는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인 단발을 쓸어 넘기곤 화장실을 나왔다.

얼마 가지 않아 복도 모퉁이에서 진저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연습곡으로 쓰던 노래가 타이틀곡이 됐슴미다. 이거야말로 재능의 증명임미다.”

“전에 들려주셨던 거 말이죠?”

“네. 박 이사님이 듣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셨던 곡임미다!”

조아라가 멈칫했다.

그냥 바로 다가갈 생각이었는데, 성필이 진저의 노래를 듣고 울었다고?

‘……아, 그랬었지.’

들었던 적 있는 것 같다.

진저와 통화할 때, 그녀가 자랑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로 그리 말했던가.

“그런데 회사 분들은 걱정이 많으심미다. 케이어스랑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는 거 같슴미다.”

“그런 얘기 저한테 해도 괜찮아요?”

“안 됨미까?”

“회사에서 사업상 얻은 정보는 외부로 발설 못 하지 않아요?”

“예?”

“계약서에 적혀 있을 텐데…….”

“그런 거 못 읽었슴미다(진짜 ‘못’ 읽었음)!”

조아라는 진저와 성필이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볼 때마다 속이 뒤틀렸었다. 특히 성필이 진저의 팬을 자처하며 그녀에게 온갖 호의를 가져다 바칠 때면 그러했다.

왜 성필이 진저를, 케이어스를 좋아하는지 알기에 더욱 심술이 났다. 케이어스는 성필이 선망하는 우상이다.

“그런데 홍보 기사에 작사를 소유 씨가 했다던데, 정말이에요?”

“감히 KS 엔터를 의심하시는 검미까?”

“왜 눈을 자꾸 이리저리 돌리세요.”

“프로파일러인 척하지 않는 검미다! ……소유 언니가 작사를 하긴 했지만, 그 뭐랄까 조금 살짝 도움이 있긴 했슴미…….”

“그런 얘긴 그만 듣고 싶네요…….”

그렇다. 조아라는 둘을 보면 심술이 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아저씨.”

오늘 조아라의 상대는 진저가 아니었으니까.

“어, 아라야. 준비 끝났어?”

“아라 씨 안녕하심미까.”

오늘 조아라의 상대는.

“힘내십…….”

“아저씨, 가요.”

“아, 어, 응.”

성필의 전 여친이란 인간이다.

* * *

“멋짐미다.”

진저는 조아라의 춤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조아라는 심플한 백색의 조명 아래에서 춤추었다. 뒤의 백댄서들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진저는 두 눈을 반짝이며 조아라의 숨결, 손짓, 스텝, 모든 동작마다 열광했다.

촬영이 두 시간을 이어감에도 진저의 열기는 식을 생각이 없었다.

“멋지지 않습니까?”

진저의 물음에 브라이언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몇 번이나 저 질문을 받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미 멋지다고 수십 번도 더 말했다.

“재능은 있어.”

브라이언의 짤막한 평가에 진저의 입꼬리가 승천할 듯 높이 치솟았다.

“춤 자체를 즐기잖아.”

조아라의 움직임에선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한 채, 그녀는 사지를 자유롭게 날뛰도록 두었다.

그 즐거움이 보는 이에게도 그대로 전염된다.

춤의 형태와 춤에 담는 감정. 이 둘은 춤을 평가하는 주요한 기준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형태와 달리 감정이란 건 온전히 감상자의 주관에 달려 있다.

그래서 감정 표현이란 걸 평가에서 배제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어쨌거나 감정은 춤에 깊이를 더해준단 의견엔 다들 동의한다.

“깊이가 있네.”

브라이언은 유심히 조아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춤을 춰 온 세월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그 세월은 대부분 즐거움과 행복으로 점철되어 있다.

저 어린 나이에 저만한 에너지를 가진 것도 이해가 간다. 어째서 그녀가 아이돌인지도 충분하고 넘치도록 알겠다.

“또, 또 나옵니다!”

진저가 브라이언의 팔을 붙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꼭 봐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만 같았다.

조아라가 하이라이트 안무를 펼쳤다.

재킷을 헐렁하게 팔에 걸쳐 어깨와 팔을 드러낸 채 미려하게 바운스를 탔다.

조아라가 입은 브라탑은 브이넥이라 가슴 부분 노출이 많았다. 진저는 그걸 보면서 거의 실신할 것처럼 앓았다.

“아라 씨 세쿠시(섹시)!”

브라이언은 뚱했다.

‘가슴골이 거의 없는데 뭐가 섹시하단 거지?’

그냥 분위기가 섹시하단 걸까.

아니면 남자로선 알 수 없는, 여자들 사이에 끌리는 지점이 있는 것일까.

조아라가 한 차례 촬영을 마치자 진저도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빠져나왔다.

“아라 씨는 멋진 댄서입니다.”

진저가 들뜬 투로 말했다.

“미국에서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라 씨의 팬이 되기로 했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너무 멋집니다…….”

“멋지긴 하지. 재능도 있고. 그런데 뭐…….”

브라이언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어디까지나 ‘오락무용’에 한해서지.”

“……뭐라고 했습니까?”

진저는 브라이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의 목소리에 담긴 무시하는 분위기를 잡아냈다.

그녀가 눈꼬리에 불길을 매달자 브라이언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는 너도.’

브라이언은 대답 대신 진저를 향해 열받는 미소만 지었다.

‘저 애를 댄서가 아니라 아이돌로 보고 있잖아.’

진저는 조아라를 아이돌이라 인식하여 열광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조아라를 댄서로 보고, 진짜 본인의 경쟁자로 인식했다면…….

‘이렇게 순수하게 좋아하진 못하지.’

진저가 조아라를 좋아하는 건, 역설적으로 조아라를 본인보다 아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브라이언은 그걸 간파했다.

* * *

‘아오아’ PD와 작가진들 사이에선 대박의 기준이 있다.

조회 수 1,000만이 넘어가면 대박이다. 그리고 지유 때도 그러했지만, 조아라의 춤을 보고 스태프들은 단숨에 깨달았다.

‘이건 대박이다!’

SNS랑 커뮤니티 여기저기 퍼 날라지며 조회 수 1,000만을 아주 손쉽게 뚫어버릴 것이다!

‘아오아’ 제작진은 상업적인 심미안이 있었다. 그들의 심미안이 강렬하게 외친다.

조아라의 무대는 평범한 아이돌들과 결을 달리했노라고.

스태프들이 조용히 흥분을 곱씹는 사이, 촬영을 마친 조아라는 백댄서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성필을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아저씨 어땠어요!”

그리 묻는 조아라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녀도 자신의 역량을 훌쩍 넘어선 퍼포먼스를 보였단 걸 알았다.

한 테이크 촬영이 끝나면 촬영분을 확인하는데, 그때마다 조아라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정말 나라고?

내가 이렇게 춤췄다고?

백댄서들마저 진심에서 우러나온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아라 씨 진짜 안무 제작에 재능 있으신 거 아니에요? 전보다 훨씬 좋아요 진짜.’

조아라는 눈을 반짝였다.

성필의 얼굴도 감동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말, 내가, 웬만해선 안 우는데 우리 아라 춤 보니까 눈물이 다 나오네…….”

“거짓말 마요! 아저씨 눈 나일강처럼 존, 개잘, 주기적으로 범람하잖아요!”

“우리 아라 천재만재 영원히 아이돌 해주라…….”

“아 얼마든지 해줄게요! 가로 엔터 신사옥 수백 개는 세울 때까지 할게요!”

성필은 진심으로 감동했다.

그가 전수해주었던 전생의 안무보다, 조아라가 새로 짠 안무가 현재의 그녀를 훨씬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조아라 본인이 생각한 문제점을, 본인에게 적합하도록 뜯어고친 것이었으니까.

유려한 어반 댄스 스타일은 조아라의 스트릿 스타일로 부분부분 변화되어, 이전보다 테크닉적으로 진일보했다.

그야말로 조아라 본인을 드러내는, 그녀가 직접 쓴 자기소개서였다.

“아니 진짜 웃어야지 왜 울어요…….”

성필이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자 조아라도 울 듯했다. 후련함과 만족감이 없으면 들 수 없는 감정이었다.

조아라는 확신했다.

이 이상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잘 해냈다.

성필의 전 여친보다 잘 추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그녀와 동등한 위치엔 섰다고 자부했다. 성필의 눈물이 증거였다.

“아저씨, 그만 울고 앉아서 좀 진정해요.”

“응…….”

둘은 나란히 앉아 여운을 즐겼다.

그동안 스태프들은 진저의 무대에 알맞도록 세트와 조명을 조정했다. 조정이 끝나자 진저와 백댄서들, 브라이언의 제자 십수 명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조아라가 자신이 설레발쳤단 것을 깨닫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조아라는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 * *

‘아오아’ PD와 작가진 사이에선 대박의 기준이 있다. 1,000만 돌파가 그 기준이다.

그리고 현재 ‘아오아’에서 최고 조회 수는 4,000만이다. 아마 그건 초대박이라고 불러야 할 기준점이리라.

앞으로 그걸 깰 사람이 나올지 알 수도 없고, 나올 것 같지도 않은 기준.

그런데.

“이건, 와…….”

뚫었다.

진저의 퍼포먼스는 초대박의 기준점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4,000만 조회 수의 영상. 그 주인공의 퍼포먼스를 직접 보았을 때도 이런 감상은 들지 않았었다.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그냥, 예술 작품이잖아…….”

크리스티나 페리의 ‘휴먼’.

진저와 백댄서들은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노래 안에서 군무를 선보였다.

도저히 커머셜 댄스로 분류할 수 없는 예술적 기교의 향연이었다.

‘나는 인간’이라며 처절하게 울부짖는 가사 안에서 그들은 몸부림쳤다.

인간답게 괴로워하고, 인간답게 싸우고, 인간답게 분노하고, 인간답게 증오하고, 인간답게 스러져간다.

마치 말하는 것만 같다.

인간의 언어를 춤이란 무브먼트로 완벽히 번역하여 선보이는 것만 같아서, 사람들은 넋을 놓았다.

‘예술적이면서도 난해하지 않아.’

무용 작품을 감상하기 위한 기초적인 지식과 경험, 그런 것 없이도 즉물적인 즐거움을 부여한다.

무엇보다, 아름답다.

그저 아름다울 뿐.

한없이 아름답고 숭고해서, 동작 하나하나마다 보는 이의 뇌를 갈아버리고 짓뭉개는 것 같다.

‘우린 모두 인간이고 우린 모두 평등하며 하나이다’란 주제를 사람들의 뇌리에 때려 박는다.

‘메시지를…….’

지유와 조아라는 음악에 춤을 붙여 멋지게 보이려고 했다면, 진저의 퍼포먼스는 메시지를 담았다.

메시지를 춤으로 쓴다.

그 메시지를 인간의 심장으로 박아 넣는다.

백댄서들이 비틀비틀 걷다가 여기저기서 쓰러진다. 진저 홀로 중앙에 서서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디딘다.

백댄서들은 저마다 비틀리며, 일그러지고, 추하게, 동시에 결연한 의지를 지닌 채 일어난다.

진저가 하늘로 손을 뻗는다.

인간들은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서로의 손을 잡아 얽히고설킨 인간들은, 진저를 중심으로 난잡하게 모여 불꽃을 만들어낸다.

인간으로 만들어낸 불꽃.

인류의 봉화다.

이윽고 인간들이 하나씩 스러져간다. 그 중심에 홀로 남은 횃불인 진저는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리고 그녀 또한 눈을 감고 고개를 떨어뜨린다.

단 한 번.

원 테이크.

진저는 한 번 만에 촬영을 끝냈다.

브라이언은 침묵으로 물든 촬영장을 만족스레 훑어보았다.

‘아, 정말이지…….’

이런 작은 나라에서 발표하기에 아까울 정도의 코레오그래피(안무)다.

그래도 그는 만족했다.

‘최고의 주인공을 찾아냈으니까.’

진저의 경쟁자들은…….

아니, 이젠 경쟁자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뭐한 어중이떠중이들은.

‘신경 안 써도 되겠지.’

이 압도적인 예술성과 재능 앞에서, 천박하기까지 한 커머셜 댄스가 어찌할 도리는 없을 테니.

* * *

조아라는 자신이 춤추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비단 그녀만이 그러진 않을 것이다.

세상 모든 댄서들은, 다른 보통 사람들보다 압도적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이 많다.

변호사가 법전의 내용을 떠올리듯, 화가가 캔버스에 그릴 그림을 상상하듯, 댄서는 자신의 몸을 손에 닿을 듯이 그릴 수 있다.

‘뭐야 저건.’

그런데 조아라도 이런 적은 처음이다.

진저가 빠져나간 촬영 무대 위로 무언가가 춤추고 있다. 조아라는 그걸 보고 자기도 모르게 검지를 까딱이며 리듬을 탔다.

진저의 춤이 너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저런 환영까지 보이는 건가.

그런데 그렇다기엔 체격이 작다.

마치 자신처럼…….

‘뭔데, 진짜.’

인간의 형태를 지닌 검은색 불꽃이다. 아니면 흐린 연기를 휘감은 인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체 모를 것이 무대 위에서, 조아라의 머릿속에서 계속 춤추고 있다.

그 형체 위로 자꾸만 사람들이 덧씌워진다. 그건 민시화이기도 했다가, 진저이기도 했다가, 미국 아카데미에서 만난 릭 칼먼이기도 했고, 때론 서유선이었지만, 결국엔 원래대로 돌아왔다.

조아라처럼 체격이 작은 검은 무언가로.

‘이거 설마…….’

조아라는 침대에 누워서도 춤추는 자신을 천장에 그려보곤 한다.

연습하다가도 쉴 때 거울 안에서 춤추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냥 길을 걸을 때도 그날 배운 춤을 또렷하게 재생한다.

마음만 먹으면 가상의 파트너마저 눈앞에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가상의 댄서가 저토록 선명하게 보이는 건 처음이다.

‘이거 설마, 나야?’

그건 춤추고 있다.

어떤 춤이지?

‘아저씨가 만든, 아니.’

성필의 전 여친이 만들었다던 ‘배드’의 원본 안무다. 그걸 춰내고 있다.

백설하가 해주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노래를 오랫동안 배우고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사람은, 노래를 하기 전에 자기가 어떻게 부를지 알 수 있어.’

숨이 폐에 걸리는 순간부터, 그 노래가 성공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예술가의 자기 확신이라고 한다. 끝없는 연습과 실전이 만들어낸 예지에 가까운 감각.

몇 년, 십수 년, 수십 년간 쌓은 경험이 만들어내는 완벽에 이른 추론, 추리이다.

동시에 민시화와 나누었던 대화도 떠올랐다.

대회 날이었다.

‘연습을 안 했다고요?’

‘응.’

‘어, 아무리 옛날에 췄던 춤이라도 연습을 안 하는데 기억이 나요? 지금이라도 연습해보는 게 낫지 않아요?’

‘안 해도 돼.’

안 해도, 자신이 어떻게 움직일지, 움직여야 할지 아니까.

그건 곧 화가의 머릿속에 든 그림이다.

운동선수의 근육에 새겨진 기억이다.

소설가의 손끝에서 나오는 본능이다.

조아라의 근육들이 움찔거렸다. 움직일 마음도 없는데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했다.

지금이라면 뭔가 닿을 것 같아서…….

“아라야.”

조아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네?”

“한 번 더 해볼래?”

“뭐요?”

“한 번 더 해보자. 춤.”

조아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태프들이 세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카메라도 접히고, 간이 의자는 접혀서 옮겨지고, 촬영이 다 끝났단 분위기밖에 안 남았다.

“어, 어떻게요? 하지 마요.”

조아라는 자기도 모를 이유로 목소리를 떨었다.

“다 끝났잖아요.”

“내가 PD님한테 무릎 꿇고 부탁할게.”

“아니, 다시 춰도 똑같…….”

“내가 가르쳐준 대로 다시 한번 해보자.”

“……원본으로요? 왜요?”

성필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한동안 대답을 내지 못했다. 그러고선 조아라를 바라보았다.

조아라는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성필은 자신이 왜 이래야 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엔 확신이 가득했다.

마치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란 것처럼,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쉽지 않겠어? 지금 뭔가…….”

성필은 마치 조아라의 심정을 전부 헤아리는 듯 말했다.

“진저 씨를 보고, 뭔가 막 떠올리지 않았어?”

“아…….”

조아라는 무대 위를 보았다.

성필과 이야기하는 동안 검은 무언가는 사라져 있었다. 떠올려보려 해도 잘 그려지지 않는다.

이상하다.

옛날엔 춤추는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었는데, 지금은 안 된다.

성필이 너무 터무니없는 제안을 해서 머리가 맛이 가기라도 한 걸까.

“아녜요, 됐어요. 다 접잖아요. 민폐예요.”

“보고 싶어.”

포기한 사람처럼 시선을 아래로 두던 조아라. 그녀가 고개를 들어 성필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그 춤 추는 거, 보고 싶어.”

조아라는 말하려고 입을 벌리다가, 풋 하고 웃었다.

“아저씨 전 여친이 만든 춤이요?”

“응.”

“진짜 취향 고약하네.”

조아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되면 해볼게요.”

성필은 얼굴이 환해져선 PD에게로 뛰어갔다.

그러고선 필사적인 설득의 향연이 펼쳐졌다.

한 번만이라도 괜찮다.

민폐란 건 안다.

백댄서분들 없어도 된다.

조명도 미세 조정은 필요 없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라가 춤추게 해달라.

조아라는 그걸 들으면서 얼굴이 다 붉어졌다. 진저와 지유도 뭔 일인가 싶어서 성필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너무 갑작스럽다.

될 리가 없…….

“부탁드립니다!”

성필이 진짜 무릎을 꿇었다!

“아, 아저씨 뭐 하는……!”

“죄송합니다 정말! 그래도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저희 다른 애들도 여기 출연 아주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습니다! 섬머퀸 설하 어떠세요?!”

기어코 성필이 잠자는 백설하까지 팔아버렸다.

대체 얼마나 필사적인 건지 모르겠다.

스태프들이 난감한 안색으로 서로를 보았다.

그때 PD가 하하 웃었다.

“네, 그래요.”

“감사합니다!”

스태프들이 ‘진짜……?’란 뜻을 담아 PD를 바라보았다.

“우리 프로그램 이름이 ‘아티스트 오브 아티스트’잖아. 아티스트님이 더 할 게 있다고 하시는데…….”

PD는 저 멀리 떨어진 조아라를 응시했다.

“촬영 끝! 집에 가자! 그러면서 접는 건, 우리 프로그램에 어울리는 태도는 아니잖아. 아티스트의 아티스트를 뽑아야지.”

아티스트가 보여줄 게 단 하나라도 더 남았다면, PD는 얼마든지 촬영을 연장할 수 있다.

성필은 아까보다 훨씬 기쁜 표정으로 조아라를 돌아보았다.

“아라야!”

성필이 어서 오란 듯 손을 흔들었다.

조아라는 멍하니 그에게로 다가갔다.

다가가다가 멈추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자신의 뒤와 앞으로 선이 나뉜 것 같다. 그리고 그 선을 넘으면, 앞으로 돌아올 수 없단 느낌이 들었다.

저 앞은 다른 세계다.

저 세계로 가서, 지금과 다른 것을 봐버리면, 이젠…….

‘난 춤을 즐길 수 없을 거야.’

그런 확신이 들었다.

조아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스태프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간에 지유도 있었다.

조아라는 다시 앞을 보았다.

PD와 촬영팀이 조아라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무대 뒤로, 진저가 가려던 길을 멈추고 조아라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라야.”

그리고 무엇보다, 성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부름에, 조아라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더는 춤을 사랑할 수 없는 세계로.

‘보고 싶어.’

떨어지지 않도록 죽어라 발버둥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구름 위의 세계로.

조아라는 구름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자마자 보이는 것.

‘다키스트.’

조아라는 선을 넘으려 한다.

전생과 다른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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