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35화 (535/760)

535화

“잠깐.”

홍규헌이 신아름을 제지했다.

일생일대의 퍼포먼스를 준비하던 신아름은 엔진이 덜 꺼진 자동차처럼 멈칫거리면서 주변 눈치를 살폈다.

“서유선 디렉터.”

“네, 네, 느, 네, 에, 네.”

홍규헌이 부르자 서유선은 벌 받는 학생처럼 목각인형으로 변해버렸다.

성필은 그가 이해되는 동시에 이해되지 않았다. 서유선이 낯가림이 심하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도 소심할 뿐이셨지 이만큼 떨지는 않으셨는데.’

정말 홍규헌이 지닌 사장이란 직함 때문일까? 그 아우라가 서유선을 얼어붙게 만드는 걸까?

성필은 홍규헌을 힐끗 살폈다.

‘저렇게 귀여우신데…….’

성필은 언젠가 서유선의 오해를 풀어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신아름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려고 한 이유는 짐작이 가. 이게 서유선 디렉터가 나에게 제시할 대답인 거지?”

“…….”

서유선은 불안한 눈초리로 신아름을 흘겼다.

신아름은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주눅 든 듯했다. 단순히 춤을 추면 끝, 그런 가벼운 자리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서유선은 신아름을 보곤 가슴이 철렁했다.

신아름처럼 당당한 사람, 아이돌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실례겠지만…….

‘나 같아.’

후배님의 저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서유선은 흐린 눈동자를 선명히 밝혔다. 그는 일생일대의 용기를 뿜어냈다.

“네, 네! 그, 그렇습니다! 아름 씨의 춤이 저의 대답입니다! 아, 아름 씨의 춤이…….”

서유선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버벅거림 하나 없이 외쳤다.

“아름 씨의 춤이 제가 본 빛입니다!”

서유선이 만족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신아름에게 믿음을 주었다. 그럼으로써 그녀의 용기를 돋워주고 싶었다.

분명 효과가 있을…….

‘표정이 더 안 좋아졌어?!’

신아름은 속이 안 좋은 것처럼 보였다.

서유선이 안절부절못하자 홍규헌이 말머리를 가져갔다.

“그럼 서유선 디렉터의 답을 듣기…… 보기 전에 다른 쪽의 이야기부터 들어볼까.”

이재호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오토마타’ 안무 작업은 호평만 받은 게 아니었다. 직원들 사이에선 반론 또한 나왔다.

그 반대파의 대표를 맡은 게 이재호였다.

딱히 그가 필사적으로 ‘오토마타’ 안무 컨셉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최고참이라 어쩔 수 없이 대표의 짐을 진 것뿐이었다.

“이재호.”

“네, 사장님.”

“심히 우려된다고? 그 우려를 듣고 싶어.”

이 프로젝트의 발의자인 조아라는 반대 의견을 듣곤 확실한 답을 내놓지 않았었다. 그녀는 반대 의견에도 타당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조아라가 성필에게 도움을 구하자, 성필이 낸 답은 이것이었다.

“논쟁 끝에 답이 나올 테니까.”

논쟁 끝에 답이 나온다.

어느 쪽에도 타당성이 있다면, 결국 둘이 붙어 한쪽이 쓰러지는 수밖에 없다.

“예, 일단 제가, 저희가.”

이재호는 자기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란 듯 ‘저희’를 주어로 두었다.

“저희가 보는 문제점은 간단합니다. 너무 기교적이란 겁니다. 생소하고요. 아이돌 안무라기보다 어반 댄스 코레오그래피 같습니다.”

즉, 라이브를 염두에 두고 만든 아이돌의 퍼포먼스 안무가 아니란 뜻이다.

춤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만든 것. 그러니 현란하고 복잡하다.

홍규헌이 흥미를 드러냈다.

“아이돌 안무는 기교적이고 생소하면 안 된단 건가?”

“그러란 법은 없습니다만, 우려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안무 프로젝트는 대중음악의 미덕 하나를 위배하고 있습니다. 반복성입니다.”

“반복성?”

아이돌 안무는 캐치하고 포인티한 안무를 강점으로 삼곤 한다. 사람들이 따라 하기 쉽고, 궁극적으로는 기억하기 쉬운 안무 말이다.

주객이 역전된 소리이지만, 대중음악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좋은 노래가 기억에 남는 게 아니다. 기억에 남는 게 좋은 노래이다.

나올 때는 비웃음과 욕을 들이먹었던 우스운 노래가, 몇 년이 지나고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반복이란 대중음악의 미덕입니다. 그리고 아이돌에 있어선 반복적이고 단순한 춤 또한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녀연맹 퍼포먼스가 단순하진 않았지.”

성필은 홍규헌의 대응을 보곤 살짝 놀랐다.

홍규헌은 이재호에게 반박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재호의 의견에 반감을 품는 것일까?

아니, 그게 아니라…….

‘어차피 나올 반론을 사장님이 대신 하고 계신 거야.’

이 정도 반론에도 무너질 정도면 들어가라. 그런 뜻이리라.

물론 이재호는 이 정도 반론에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홍규헌의 질문을 파도로 삼아 더 높이 날아오른다.

“지금까지 소녀연맹이 보였던 퍼포먼스와는 다릅니다. 퍼포먼스 디렉팅팀의 중간 결과물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오토마타’는 1절과 2절 하이라이트 댄스조차 다릅니다. A멜로디와 B멜로디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반복, 이 중요한 미덕을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습니다.”

‘과장하는군.’

홍규헌은 이재호의 언변에 감탄하면서도 그의 논리에 내재된 문제를 찾아냈다.

이재호는 부풀리고 호도하고 과장한다. 자신의 의견을 모두에게 관철시키기 위해서.

‘미덕’이란 거창한 단어만 보아도 그렇다.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는 인간들을 전부 미덕을 어긴 인간으로 만들고 있잖아.’

대중음악 프로듀싱에 문외한인 안무가들은 이재호의 목소리 하나하나에 움찔 떨었다. 자신들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아마 실제로 ‘우리가 잘못했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상헌 씨가 말씀하시더군요.”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 시즌2’를 머릿속으로 기획하고 있던 양상헌이 깜짝 놀랐다. 갑자기 자기 이름이 불린 것이다.

“이건 ‘기교의 나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양상헌이 경악했다.

그건 그냥 회의에서 대충 한 말인데!

자신의 의견이 만방에 알려지자 그는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안무가들과 눈이 맞을세라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건 아이돌 안무가 아니라 기교의 나열입니다.”

“잠시만요!”

한국 전통 무용가 허수인이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건 동의할 수 없겠는데요! 복잡하고 현란하면 아이돌 안무가 아니라니요? 아이돌이란 건 신나고 수려하고 매력적인 젊음의 과시잖아요! 신체를 한계까지 끌어올려 표출하는 인간 내면의 표현, 이게 아이돌리시함이 아니라면 뭐란 건가요.”

“…….”

“왜, 왜 갑자기 조용해지죠?”

“아뇨…….”

안무가인 안희진이 풋 웃었다.

“수인 씨가 그런 말씀 하시니까 좀 웃겨서…….”

한국 전통 무용가 허수인은 한국 문화를 사랑한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평소에 개량 한복을 입고 회사로 온다.

그 차림으로 굉장히 포스트 모던한 이야기를 하니, 사람들은 그 생소함에 절로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엔 사람들을 웃기겠답시고 웃긴 목소리로 판소리를 하는 사람이니, 대비 효과가 더욱 명확했다.

한국 전통 무용가(석사 학위 소지) 허수인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다, 다들 날 뭐라고 생각한…….”

허수인이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저고리 끈이 흔들거렸다.

“개념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이재호는 갑자기 대화에 난입한 불청객을 그 한마디로 내쫓아버렸다.

“서로의 생각에 관련한 부분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면, 밤이 새어도 결론이 안 날 거예요.”

“그럼, 의견이 아니면서 개념적인 것도 아닌 주장이 있나?”

홍규헌의 물음에 이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인티한 안무란 건 옛날엔 막연히 ‘있으면 좋지’ 수준이었죠. 그런데 요즘은 필수입니다. ‘클락’은 다들 아시죠?”

약 15초에서 1분 내외의 영상을 올리는 SNS다.

한때 ‘광고에 너무 많이 나와서 지겹다’라거나, ‘중국 어플이니까 개인정보를 멋대로 빼간다’란 말을 듣곤 했었다.

여전히 지겹다, 쓰면 안 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지만.

“‘클락’은 현시대의 지배적인 SNS 중 하나입니다. 이건 제 생각인데, 다른 SNS들이 이 시스템을 훔칠 거 같아요. 인기가 엄청 많거든요.”

성필은 소름이 돋았다.

이재호는 발표 중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 농담한 거겠지만, 그의 농담은 사실이다.

스타그래프는 몇 년 전부터 클락과 같이 1분 영상 시스템을 도입했다. 아이튜브는 당장 몇 개월 후부터 이 시스템을 베타 버전으로 오픈한다.

“하하, 다들 주식 사두세요.”

그리고 ‘클락’은 이후, 마침내 방문자 수가 구글마저 넘어서는 SNS가 되어버린다.

이재호는 그야말로 선구안을 지녔다.

“하하…….”

그의 선구안과 별개로 분위기는 싸늘했다. 농담이 먹힐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성필의 표정이 유난히 심각했다. 성필은 언제나 유머러스함과 장난기를 잃지 않는 사람이다. 그 덕분에 직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은데, 저렇게나 심각하다니…….

이재호는 용기를 잃어 재빨리 발표를 이어갔다.

“여, 여기에 아이돌들 챌린지 영상이 자주 올라오잖아요? 하이라이트 안무만 따서 따라 추는 거요. 이게 요즘 인기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옛날엔 아이돌 춤을 커버한다고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혹은 1절만 외우고 올리는 식이었다.

커버하려면 상당한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클락’이 등장한 이후 고작 십수 초의 하이라이트 안무만 찍어 올리는, 흔히 ‘챌린지’라고 불리는 문화가 전면에 드러났다.

이젠 춤을 보여주고픈 욕망을 훨씬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노래만이 아니라 춤에도 전염력이 생긴 겁니다. 잘 만든 노래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시대에서, 잘 만든 춤이 사람들의 눈에서 눈으로 전해지는 시대가 된 거예요.”

‘클락’에 재미로 올린 창작 춤이 팝스타의 눈에 띄어 공식 안무로 정해지는 경우도 있다. 혹은 그런 춤을 통해 아예 안무가로 데뷔하게 된 사례마저 존재한다.

작곡 프로그램과 홈 레코딩 시스템, 그리고 음원 공유 사이트들은 수많은 방구석 작곡가들을 낳았다. 그 덕에 작곡이란 재능이 훨씬 더 잘 알려질 수 있게 되었다.

‘아이튜브’는 누구나 노래를 커버하여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었다. 노래란 재능이 이전보다 훨씬 더 눈에 띄게 됐다.

그리고 ‘클락’의 등장은 방구석 안무가들과 댄서들이 세계와 연결되는 결과를 낳았다.

작곡처럼, 노래처럼, 춤도 문화의 전면에 드러나고 있다. 사람들은 옛날보다 훨씬 더 많이 춤을 춘다.

아이돌의 춤은 개성을 표현하는 유용한 도구로써 각광받고 있다.

“당연히 아이돌의 안무는 이전보다 더 중요해집니다. 사람들이 따라 하고, 인터넷에 올리고, 그럼으로써 홍보 효과가 생긴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훨씬 중요하죠.”

이 챌린지 문화의 주역은 뭐니 뭐니 해도 10대다. 그리고 아이돌은 근본적으로 10대에게 소구(訴求)한다.

“매력적이고, 간단하고, 따라 추기 쉬워야 합니다. 현란한 춤은 보기엔 좋겠지만, 확장성을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올 거예요. 팬만 보고 팬만 감탄하는 춤보다야, 더 유행을 타도록 춤을 만들어야지 않을까요?”

이재호는 열띤 발표를 마쳤다.

그는 이러니저러니 여러 이유를 붙였으나, 결국 요약하자면 ‘홍보성을 높이자’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홍보성이란 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나중엔 클락 차트가 따로 생길 정도로, 클락에 노출되는 음악들이 중요해져.’

주요 소비자가 10대란 점에서도, ‘클락’에서 입소문을 타는 건 중요하다. 이를테면 아이돌의 인기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행위이니 말이다.

성필은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일단 안무가들은 반박할 기력을 잃어버린 듯했다. 그들은 사업에 관련된 이야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저 아름다운 것을 바라는 이들이니까.

‘이대로면 반박이 한 줄도 안 나오겠어.’

신아름이 춤을 보여준다곤 하지만, 그게 이재호의 논리정연한 설명을 이길 듯싶진 않았다.

성필이 한 걸음 나서려던 순간.

“아뇨.”

서유선이 말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성필은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어째선지 흥분해 있는 듯 보였다.

‘아, 이건.’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겠다.

성필은 다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니에요…….”

서유선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로 몰렸다.

“아니, 에요, 그건…….”

“아니라뇨?”

이재호가 반문했다.

“디렉터님, 트렌드를 따르는 건 엔터사(社)가 취해야 할 당연한 전략이잖습니까.”

이윽고 서유선이 시선을 앞으로 쳐들었다.

이제까지의 그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의지가 깃든 눈으로.

* * *

애물단지.

쌀벌레.

그게 서유선이, 아니.

다키스트 데뷔조 멤버들이 받는 취급이었다.

“이사님은 언제까지 저 애들 데리고 있을 생각이시지?”

복도 모퉁이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서유선은 정수기로 가던 걸음을 되돌렸다.

아이들은 어른 이상으로 눈치가 빠르다.

중학생이던 서유선도 그러했다.

그들은 KS 엔터에서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루하루 언제 내쫓길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며 연습만을 반복했다.

“정말, 이해가 안 된다니까.”

“그러게. 사장님이 나서셔야 하는 거 아니야?”

아이돌 2세대가 시작되기 전. 소수의 1.5세대 아이돌이 업계를 겨우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KS 엔터를 이끄는 건 소수의 발라드, 팝 가수들이었다. 그들의 어깨는 하늘을 찔렀으며 직원들 모두 그들에게 굽실거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에 비해 아이돌 연습생들의 취급은 그야말로 벌레만도 못했다.

‘당연해.’

서유선은 자신이 쌀벌레란 이야기에 동의했다.

회삿돈만 갉아먹는다.

데뷔해도 돈을 못 벌지도 모른다.

사실 못 벌 가능성이 훨씬 높다.

아이돌은 몰락했다.

“나 그만둘 거야.”

또다.

데뷔조 멤버 중 한 명이 또 그리 말했다.

서유선은 이제 말릴 기운도 없었다.

“미안, 갈게. 이미 다 말해서, 어…….”

원래 데뷔조는 9명이었다.

이젠 6명밖에 안 남았다.

“갈게.”

아니, 이제 5명.

데뷔조 중 한 명인 하민이 울음을 토해냈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KS 엔터에 들어와,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되어서도 이런 꼴로 지냈다.

인생을 바쳤건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가장 어두운 밤, 세상에서 가장 짙은 어둠이다.

‘우리, 데뷔할 수 있을까?’

모른다.

데뷔하더라도 성공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회사 사람들은 아이돌 따위 포기하라고 한다.

아이돌의 원류였던 영미권에선 보이밴드, 걸그룹이란 이름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아이돌 문화가 꽃피었던 일본에서도 사정은 좋지 않았다. 몇몇 아이돌이 인기를 독식하여 잘나가는 것처럼 보일 뿐, 바닥에 있는 이들의 취급은 벌레보다 안 좋았다.

이 세상에서, 이 지구에서, 아이돌이란 포맷은 사라질 것이다.

흔한 이야기다.

한때 세상을 휩쓸었던 예술 양식도, 결국 생명력을 잃고 역사의 저편에 묻히곤 한다.

먼지만 맞으며 책 안에서밖에 찾을 수 없게 된 예술은 하늘의 별처럼 많다.

아이돌도 그런 것 중 하나일 뿐이다.

“이사님도 감이 떨어지신 거지.”

“연습생 애들 빨리 쫓아내면 안 되나?”

“그러게. 괜히 돈만 들어가고, 연습실만 차지하고.”

“그래도 의리가 있으니 앨범 한 장은 내주시려는 거 같던데.”

“앨범 하나가 뉘 집 개 이름이야? 돈이 얼마인데!”

“사장님이 결정하셔야 해.”

“아니, 정호환 이사님을 아예…….”

서유선은 한계였다.

결국 그는 데뷔조를 관두기로 했다.

아직 중학생이다. 다른 일을 할 기회는 충분히 남아 있다. 그리 마음먹은 날이었다.

“그만두겠다고?”

정호환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집무실에 앉은 그는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 보였다. 힘이 넘치던 풍채는 쪼그라들어 기력의 조각조차 보이지 않았다.

“네…….”

서유선이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답했다.

어차피 정호환의 답은 알고 있다. 이미 네 명이나 내보냈으니, 다섯 명은 안 될까.

낙담한 표정을 지으면서 어깨를 두드려주겠지. 그리고 몇 마디 덕담을 한 후 내보낼 것이다.

“안 돼.”

“……네?”

서유선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안 된다.”

서유선은 말문이 막혔다.

정호환은 타협 따위 없단 것처럼 단호한 어조였다. 초췌하여 흐리기만 했던 그의 눈동자엔 불꽃이 살아났다.

“넌 포기 못 해. 포기하게 두지 않는다.”

“……왜요?”

서유선은 바보같이 그리 물었다.

“왜…….”

서유선은 울분을 담아 말했다.

평소 자신을 무시하던 직원들에게 쏟아내고 싶었던 분노를, 눈앞의 정호환에게 퍼부었다.

“이사님, 회사 사람들 전부 우릴 싫어해요.”

“안다.”

“아이돌 같은 거, 이제 망했다구요.”

“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잖아요. 저, 들은 거지만, 외국에도 아이돌 같은 게 안 먹힌다면서요.”

“그래.”

“전망이 없어요.”

“맞다.”

“이사님, 10년 전이랑은 상황이 전혀 달라요!”

“네 말이 전부 옳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도대체.

“왜……?”

“나에겐 보이니까.”

정호환은 서유선을 보았다. 아니, 서유선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보았다. 서유선이 아닌 무언가를.

정호환이 서유선의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쓰다듬으려는 것 같았으나, 그의 손바닥은 고목처럼 거칠었다.

서유선은 겁먹었다.

정호환의 눈동자 안에 맺힌 빛은 광기에 맞닿아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이 나라가 군부를 몰아내고 대중문화를 획득한 지 고작 20년이다. 일본에 비해 60년은 느리고 미국에 비해 100년은 느리다. 이 나라가 진정하고 고유한 ‘현대’문화란 걸 얻기까지 앞으로 수십 년이 걸리겠지. 그러니까, 내가 이 나라에 현대문화를 쥐여줄 거다. 정해진 운명보다 수십 년 빨리.”

“네……?”

“유선아, 회사 사람들이 욕하는 걸 들었느냐.”

매일 듣는다.

오늘도 들었다.

“그 인간들은 ‘못 보는 인간’들이다. 문화엔 다수결이 없다. 소수가 깃발을 쥐고 이끌어가야 해. 적어도 자생적인 인프라가 확립되기 전까진…… 이 나라가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처럼, 문화에도 깃발을 쥘 자가 필요하다. 유선아.”

정호환이 서유선의 손을 맞잡았다.

정호환의 손은 뺨으로 느꼈던 것처럼 거칠었다. 그가 보내온 세월이 고집이 되어 새겨진 것만 같았다.

‘아니야.’

정호환은 세월을 마냥 보내오지 않았다.

세월을 자신만의 시간으로 채워온 것이다. 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밀도를 지닌 삶이, 그의 목소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네가 깃발이다. 약속하마, 너라는 깃발이 이 나라는 물론 세계에 휘날릴 거다. 그러니까, 부탁이다.”

서유선의 손을 쥔 채로, 정호환은 천천히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가지 말아다오.”

“…….”

서유선은 연습생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마 정호환의 눈빛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눈빛은 서유선의 내면에 깃든 무언가를 낚아채듯 끌어올렸다.

서유선은 보았다. 정호환의 눈동자 안에서, 갈고리에 채인 자신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건 서유선 자신이 아니라, 정호환이 상상한 무언가였다.

하지만 서유선은 그것에 홀렸다.

매혹되었다.

그것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정호환이 그려낸 이상을 믿어보기로 했다.

“고맙다. 후회하지 않게 해주마, 반드시…….”

남들이 전부 안 된다고 해도.

상업적으로 말도 안 되는 선택이라고 해도.

실패할 게 뻔하다고 해도.

정호환은 이루어냈다.

[다키스트가 왔다―!]

정호환의 결단과 서유선의 결심은 영원히 한국의 대중문화를 바꾸어놓았다.

서유선은 깨달았다.

세상을 바꾸는 건 일반인들의 생각 따위가 아니다.

‘일반적인 생각이란 건, 상식이란 건, 일반인이란 건…….’

일반인이란 건 재즈를 외설적인 음악으로 매도했던 이들이며, 록을 악마의 음악이라고 금지하려 했던 이들이며, 비틀즈의 앨범을 불태우고 시위했던 이들이며, 엘비스 프레슬리를 감옥에 넣으려 했던 이들이며, 디스코를 없애라며 흑인을 폭행했던 이들이며, 힙합을 범죄자 음악이라고 경멸했던 이들이며, 일렉트로닉을 잡동사니 모음이라고 비난했던 이들이고, 또…….

“유선아, 보이냐. 우리가 이룩한 이 모든 것들이…….”

아이돌이 망할 거라고 했던 이들.

일반인이란 그런 사람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조차 모르니까.

깨달은 자. 미래를 보는 자. 확신이 있는 자.

문화를 이끌어가는 건 그런 소수다.

문화엔 다수결이 없다.

존재하는 건 오직…….

‘예술가의 확신뿐.’

* * *

“스텝의 반복 재생, 단순한 신체 과시, 가사를 몸으로 표현한 일차원적인 안무…….”

서유선이 옅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런 건 너무 지겹습니다.”

“지겹다니…….”

이재호가 발끈하려 하자 서유선이 외쳤다.

“그런 걸로 올해의 퍼포먼스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올해의 퍼포먼스상.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2’가 시작될 시점에, 조아라가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로 못 박은 것이었다.

가로 엔터 전원은 조아라의 꿈을 이뤄주기로 약속했다. 소녀연맹의 손에 ‘올해의 퍼포먼스상’을 쥐여주기로 맹세했다.

케이어스의 ‘넥타르’를 깨뜨리고, 반드시.

“…….”

이재호가 입을 다물었다.

서유선이 더욱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모두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2’ 오리엔테이션에서 들으셨잖습니까. 아라 씨가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의 예시를 열심히 들며 설명해주었잖습니까. 벌써 잊으셨나요.”

조아라가 바라는 건 혁신이다.

다들 이들과 같은 걸 하고픈 게 아니다.

“유선 씨는 그때 없으셨…….”

“춤이란.”

서유선이 이재호의 태클을 끊었다.

“인간의 감정을, 개성을, 상상력을 표현하는 것. 적에 대한 도전, 금기를 어기는 용기, 타인과의 결합, 자신이 아닌 것과의 관계, 아름다움의 재현, 모든 역동성의 집합체입니다. 그곳에 밋밋한 춤추기, 아니, 춤 엇비슷한 게 설 자리는 없습니다. 아이돌의 춤이 그렇단 게 아닙니다. 단지, 아라 씨가 바라는 춤에 그런 게 설 자리가 없단 뜻입니다.”

서유선은 좌중을 휘어 감는 존재감을 발휘했다. 그가 시선을 천천히 옮기자 자석처럼 모든 주의가 그에게로 빨려 들어왔다.

마치 무대에 선 뮤지션 같았다.

진공상태.

모든 게 그에게로 집중된다.

“소녀연맹분들께 복제된 자기소개서를 쥐여주고 싶으신 겁니까? 그게 소녀연맹이 걸어온 길입니까? 아라 씨가 바란 겁니까? 물론…… 그…… 그쪽…… 당신…….”

“이재호입니다.”

“재, 재호 님의 말씀도 맞습니다. 하지만 소녀연맹이 지향하고자 하는 게 단순한 인기가 아니라, 남과 비할 바 없는 개성이라면…….”

서유선의 말엔 힘이 있었다.

그는 한 세대를 풍미한 아이돌의 정점이었으니까. 거기에다 안무가들을 이끄는 퍼포먼스 디렉터였으니까.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아우라가 있었다. 어느 한 분야의 정점에 닿아본 인간으로서의 아우라가.

“트렌드만 따라가는 얄팍한 전략은 종국엔 개성의 박약함으로 돌아올 겁니다. 저와 함께 2세대를 살아갔던 수십·수백의 아이돌 중 살아남은 건, 고유한 개성을 가진 이들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하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잘나가는 이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론 불충분하다.

“물론 세상을 바꾸겠단 마음만으로 성공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성공한 이들은 모두 세상을 어느 정도 바꾸었습니다. 혁신성이 있었습니다. 다키스트도 그랬습니다. 그 시대엔 생소했던 현대무용 테크닉을 안무에 도입함으로써, 저희 다키스트는 영원토록 아이돌 퍼포먼스를 바꿨습니다. 빛이 필요한 겁니다, 혁신엔!”

서유선이 신아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 제가 본 빛입니다.”

신아름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저토록 장황한 소리 뒤에 나오려니 어지간히 쪽팔린 게 아니었다.

그녀는 성필을 보았다.

성필은 서유선을 바라보며 감격에 젖어 있었다. 신아름은 뿔이 나서 중앙으로 나갔다.

“여러분에게도으엑!”

“춤출게요.”

신아름이 자세를 잡았다.

서유선은 억지로 그녀에게 밀려났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아.’

이거다.

단 10초의 춤.

그것을 보고 서유선은 눈물을 글썽였다.

‘정호환 이사님이 내 안에서 본 건, 이런 거였어.’

정호환은 서유선에게서 그도 모르는 이상형을 보았다.

그 이상형은 서유선 본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서유선은 그것을 쫓아가야만 했다. 쫓아가고 싶었다. 너무나 매혹적인 이상을 따라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마음이 망가질 때까지 달렸다.

정호환을 원망해왔다.

그런데, 이젠 그가 조금 이해가 된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이 미칠 수밖에 없겠지…….’

짙은 어둠 사이로 희미하게 박힌 빛 한 점.

저 희미한 빛을 끄집어내어, 억지로라도 세상에 전시하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네…….”

서유선이 중얼거렸다.

“이게, 제가 본 빛입니다…….”

* * *

서유선은 죄지은 사람처럼 젓가락만 놀렸다. 맞은편에 앉은 성필은 안쓰럽단 듯 그를 위로했다.

“퇴짜 맞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성필이 탕수육 접시를 그에게 가깝게 밀어주었다. 서유선은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탕수육을 씹었다.

“그렇긴, 하지만요…….”

서유선의 감동적인 연설 이후, 이야기의 흐름은 이렇게 이어졌다.

홍규헌이 질문했다.

‘라이브 고려하고 만든 안무야?’

‘이건 댄스 브레이크 파트입니다!’

‘다른 파트는? 보여줄 수 있어?’

보여줬다.

‘라이브 못할 거 같은데.’

‘네? 할 수 있는데요?’

서유선‘은’ 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놀라운 사실. 안무가들은 지금까지 라이브 퍼포먼스가 가능한 기준을 서유선과 조아라에게 맞추고 있었다.

‘과해. 줄여.’

이건 의논하고 말고 할 사항도 아니었다.

결국 안무가들은 중요 댄스 포인트를 제외하고, 전체적인 기준을 장하양에게 맞추게 됐다.

“저 솔직히 이런 흐름일 줄 알았거든요…….”

서유선의 감동적인 연설.

홍규헌 기립박수.

다들 눈물을 흘리면서 환호.

서유선과 성필의 하이파이브.

‘제발 저희 회사 전속 퍼포먼스 디렉터가 되어주세요!’라며, 성필이 부탁하는 흐름일 거라고…….

“유선 씨?”

“아, 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 아녜요.”

서유선은 자기도 모르게 멍때리고 있었다.

전속 퍼포먼스 디렉터가 되어달란 부분은 서유선만의 망상이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인정욕을 버리지 못하다니, 서유선은 창피해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뭐, 다들 눈물 흘리면서 기립박수 치진 않았지만요. 유선 씨의 마음은 모두에게 닿은 거 같아요.”

“그, 그럴까요?”

“전체적인 구성에 대해선 말이 안 나왔잖아요.”

“아…….”

서유선은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썩 만족스럽기도 했다.

자신이 신아름에게 보았던 빛을 다른 사람들도 보아주었단 것이니까.

“아름 씨 덕이죠.”

“아름이 덕분이기도 하지만, 유선 씨가 말씀을 잘하셨어요.”

“제, 제가요?”

“저 감동했어요. 농담 아니라 진짜로요. 거의 눈물도 흘릴 뻔했는걸요.”

“아, 아, 제가, 제가…….”

“네, 유선 씨가요. 말도 안 더듬으셨어요.”

서유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물기가 맺힌 한숨과 함께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띠었다.

“네……!”

“사람을 아예 없는 취급 하네. 둘이 드라마 찍고 앉았어. 괜히 밥 먹는 데 따라왔네.”

신아름이 툴툴대면서 단무지를 으적댔다.

그러자 성필이 그녀의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렸다.

“당연히 우리 아름이가 일등공신이지! 아까 춤추는 거 봐. 나 진짜 졸도할 뻔했잖아. 너어무 잘 춰.”

“언젠 서유선 선배님 덕이라면서요.”

“하하.”

“이땐 내 편을 들어야지 웃음으로 무마하면 어떡해요!”

신아름이 성필의 어깨를 팍팍 때렸다.

“그치만 유선 씨는 아이돌이잖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빨리 내 편 들……!”

“맞아요.”

서유선이 씩 웃었다.

그는 이전과 다르게 보였다. 사람 눈도 못 마주치고 말도 떨던 그가 아니었다.

자존감이 한껏 채워진 듯 밝게 빛나는 미소로, 그가 말했다.

“저는 아이돌이니까요. 언제까지나…… 비참할 순 없잖아요.”

“…….”

신아름은 탐탁잖게 성필을 보았다.

또 성필이 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아름은 모두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혀를 찼다.

‘역시 이 인간 마음에 안 들어.’

성필의 저 눈빛은 사막에 내리는 비처럼 한도가 정해져 있다.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 마음 같아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자신이 받아먹고 싶다.

그런데 이미 은퇴한 뒷방 늙은이가 가져가다니.

‘그래, 마음껏 즐겨.’

신아름은 탕수육이 서유선이라도 되는 듯 잘게 부서지도록 씹어 삼켰다.

‘다키스트가 이뤘던 위치까지, 앞으로 고작 몇 걸음일 테니까.’

그때가 되면, 저 눈빛은 오로지 자신만을 향해 쏟아지리라.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갔다. 그러자 1층 휴게 공간에서 직원들이 들떠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성필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다들 무슨 얘길 그렇게 재밌게 하세요?”

“아, 이사님 오셨어요? 지금 논란 터진 거 하나 있어서요.”

“논란요?”

홍보팀 강지혜가 폰을 보여주었다.

기사 제목만 보아도 뭔지 알 수 있겠다.

[보이그룹 ‘도미니온’ 라이브 퍼포먼스 논란]

“지금 난리예요.”

‘아, 이게 이제 터지는구나.’

성필은 쓴웃음을 입에 걸었다.

‘그룹 여럿 피 보겠네.’

* * *

[MR(Music Record)로 하니까 실력 다 뽀록나네 ㅋㅋㅋㅋ]

[도미니온 얘들만 이런 거 아닐 듯. 솔직히 요즘 아이돌이 가수임? 립싱커지.]

[의무적으로 AR(All Record) 금지하고 다 MR만 하게 해야 함. 중국처럼.]

[숨차도 부르려고 노력하면 좀 나을 텐데 아예 안 부르려고 하는 건 뭔 심보임?]

[지금까지 무대에서 한 번도 제대로 안 불렀단 거지.]

[요즘엔 AR에 숨 쉬는 소리까지 녹음해서 튼다면서? 이 정도면 사기다 ㄹㅇ]

[2세대 아이돌들처럼 MR 기강 한번 잡아야지]

[그냥 아이돌 노랠 듣지 마 수준 떨어지는 양산곡밖에 없잖아]

[이딴 게 아ㅋ티ㅋ스ㅋ트ㅋ]

탑티어 보이그룹 ‘도미니온’이 음방 무대에서 대참사를 벌였다.

생방송 무대에서 제작진 측이 AR이 아니라 MR을 튼 것이다. 하필 ‘도미니온’이 평소처럼 사전녹화를 하지 않아서, 생방송 무대가 그대로 텔레비전에 송출되었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음 이탈, 삑사리, 숨차서 노래를 못 부르는 건 당연하고 아예 포기한 듯 노래를 부르지 않기까지 했었다.

더욱 가관은, 마치 파트를 잊어버린 듯 노래를 부르지 않는 연기까지 한 멤버까지 나온 것이었다.

발전한 보컬 보정 기술로도 이 끔찍한 사태를 막을 수 없었다.

‘도미니온’ 팬들은.

‘AR을 잘못 튼 제작진 잘못 아니냐! 그쪽이 실수했는데 왜 우리 애들이 욕먹냐!’

라면서 피의 실드를 펼치고 있으나…….

‘막힐 게 아니지.’

공고하고 거대한 팬덤으로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이다.

오히려 공고하고 거대한 팬덤을 거느릴 정도의 그룹이 낸 사고이기에 큰일이었다.

사실상 ‘도미니온’ 팬덤을 제외한 모두가, 아니. 도미니언 팬덤 내에서도 이런 목소리가 나왔다.

‘이런 애들이 정점에 올라 있었다고……?’

정점.

탑티어.

톱클래스.

그 찬란한 이름이 도리어 ‘도미니온’의 목을 졸랐다.

이제 아이돌계는 커다란 돌풍에 직면할 것이다.

한동안 MR 제거 버전으로 조리돌림이 계속될 것이고, 아이돌들은 라이브에 훨씬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아니, 신경 쓰는 것을 넘어 팬과 대중을 향해 호소하고 변명해야 하리라.

많은 이들이 이 폭풍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없을 텐데…….

“신이 우리를 돕는다…….”

윤상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의자를 돌려 뒤를 보았다.

“첫 무대는 AR로 안 한다. MR로.”

윤상열의 눈앞엔 글로브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온전한 라이브 퍼포먼스로 한다.”

“어…….”

노아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보컬 입힌 AR이 없다?”

“그래.”

“PD가 아련히 알아서 잘 알지만 AR 아님 보컬 공백 있다. 퍼포먼스 완성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더 좋은 거다. 못 하나?”

노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할 수 있나!”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할 수 있슴다!”

“‘있습니다’.”

“……있쓤니다!”

윤상열이 환희에 찬 미소를 지었다. 딱히 노아가 한국어를 제대로 쓴 게 기뻐서는 아니었다.

‘못 할 리가 없지 그래.’

그녀들이 매일 연습하는 게 라이브 퍼포먼스인데, 못 할 리 없다.

윤상열은 기본에 충실했다.

아이돌의 원형이라고 불리는 그룹이 있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이다. 그들이 데뷔할 때, 프로듀서는 그들을 이렇게 소개했다.

‘춤추며 노래하고, 노래하며 춤추는 미래의 밴드입니다!’

아이돌이란 춤추며 노래할 수 있고, 노래하며 춤출 수 있는 게 당연하다.

악기를 포기하고 춤을 택한 밴드니까.

‘AR이 당연해? 전부 개 같은 소리나 지껄이고 있군.’

무슨 초기 MTV(Music Television) 시대인가? 밴드들이 출연해서 에어 기타에 립싱크만 하게?

라이브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보기에 아름답고 멋진 안무를 받는다. 그딴 식으로 프로듀싱을 진행하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참사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야말로 아이돌의 수치다.

평소였다면 ‘도미니온’을 욕하는 데만 반나절을 썼겠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윤상열은 기분 좋게 웃었다.

타이밍이 좋다.

왜냐하면, 이 폭풍 같은 시기에 글로브가 컴백할 테니까.

보기 좋게 컴백하여, 지금까지 쌓아온 능력을 여실히 발휘해 이목을 끌 것이다.

“당연히 할 쑤 있쓤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야말로 신이 돕는 타이밍이다.

글로브 컴백까지 7일.

그리고 윤상열은 기대되는 게 하나 더 있었다. 공교롭게도 케이어스도 곧 컴백한다.

‘항상 의심했지.’

케이어스의 퍼포먼스를 보곤 항상 의심하고 의아해했다. 저렇게나 폭발력 있는 퍼포먼스를 펼치는데, 정말 라이브로 할 수 있는 건가?

심지어 전반적인 체력이 보이그룹보다 떨어지는 걸그룹이?

저건 AR이다.

부분 AR이라 몇몇 부분에선 직접 노래를 부르겠지만, 아마 AR 의존도가 클 것이다.

‘케이어스, 이번에 곤혹 좀 치르겠어.’

“윤 PD 이상하다. 음흉하게 웃어.”

“쉿, 보지 마.”

라희가 노아의 눈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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