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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39화 (539/760)

539화

성필은 리카의 공세에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사무실 밖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응접실로 향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문을 열었더니.

“아, 이사님!”

신준성이 한 연습생과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등을 돌린 연습생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앗, 유우쨩!”

“누나…….”

유우토가 반갑게 일어나자 리카가 팔을 활짝 펼치며 그에게로 달려가려 했다. 그때 성필이 리카의 뒷덜미를 잡았다.

“목은 약해요! 아무리 아타시(제)가 다른 남자랑 얘기하는 게 싫어도 유우쨩은 제 동생이라구요! 질투심이 너무 과해요!”

“회사에서 아는 척하지 말라니까.”

“아 맞다!”

리카는 눈물을 머금고 유우토를 보내주었다. 성필도 신준성과 유우토에게 인사하곤 문을 닫았다.

“대회의실은 비어있을까요?”

“리카, 유우토 앞에서 오해할 만한 말 하지 마.”

“에, 오해라니요?”

리카는 다 알면서도 모른단 듯 눈썹을 까딱였다. 어디 말할 테면 성필의 입으로 말해보란 태도였다.

“너 유우토 눈빛 못 봤지?”

“음, 모시카시테(혹시) 질투?”

“널 불쌍하게 보고 있었어.”

“도시테(어째서)?!”

“글세…….”

동경하던 누나가 이렇게나 가벼운 여자가 된 게 안타까운 거 아닐까.

성필은 가끔씩 리카가 걱정되곤 한다. 그녀의 붙임성이면 그녀가 만인의 연인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넘친다.

무슨 뜻이냐고?

리카와 말만 섞은 남자들은 죄다 오해해서 꿈속에 그녀를 그린 거란 뜻이다.

“긍정적인 태도와 밝은 모습은 나도 좋아해.”

“아타시(저)요?”

“아니, 그냥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고. 인간적으로 그런 성격인 사람이 좋다고.”

“에헤헤.”

“널 특정하는 게 아니라…….”

“알겠다구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실버타운 메이트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때때로 묵직할 줄 알아야 해. 너무 가볍기만 한 건 사람이 정말 가볍게만 보여.”

“쌤처럼요?”

“음, 설하는 이상적이지.”

풀어줄 땐 풀어주고 묶을 땐 묶을 줄 안다.

백설하는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동시에 지녔다.

멤버들의 말을 들어보면, 평소엔 부드럽고 유하다가도 침대에만 올라가면 무서워진다고 한다.

‘설하가 잠기운이 많아서, 자다 일어나면 맹하긴 한데 무섭다니…….’

성필로선 쉬이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다.

어쨌든 둘은 빈방을 찾아 돌아다녔고, 마침내 빈 회의실을 발견하여 들어갔다. 회의실 예약 목록엔 2시간 뒤 신인개발팀 회의가 잡혀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리카가 장난스럽게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왜 안 가신단 건가요! 설득(說得)과 체득(體得)이 통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어요!”

“체득은 몸의 설득이란 뜻이 아니야. 말했잖아. 일해야 한다고.”

“휴일엔 일을 못 하지 않나요!”

성필은 벽 너머 매니저 대기실을 응시했다.

“물론 휴일에도 일하시는 분들이 계시죠! 저희 컴백하면 홍보팀이랑 매니지먼트팀이 한숨도 못 자고 뺑뺑이 도는 거 알아요! 하지만 박 이사님은 프로듀서시잖아요! 프로듀서가 왜 좋은데요?”

“왜 좋은데?”

“일하고 싶을 때만 일할 수 있으니까요! 또 업무를 남한테 미룰 수 있으니까요!”

정말 잘못된 지식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에서 젊은 재벌이나 팀장이 저녁마다 여주인공과 데이트하는 장면만 봐서 그런가.

“프로듀서니까 더 일할 수 있는 거야. 지금만 해도 내가 검토할 게 얼마나 많은데? 수록곡만 해도 그래.”

“……수록곡에 문제가 있나요?”

소녀연맹의 유구한 전통.

앨범마다 멤버들의 개성을 담은 개인곡, 혹은 유닛곡을 넣는 것이다.

리카는 수록곡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찔렸다.

이번 앨범에 넣은 곡 중 과도하게 제이팝스러운, 아니, 과도하게 서브컬쳐스러운, 아니, 과도하게 오타쿠스러운 곡을 집어넣자고 주장한 것이다.

“하양이 가사 관련해서 그래. 곡 분위기라거나.”

리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양 언니 가사가 어떤가요!”

“너 못 읽어봤어?”

[너에게 안겨 온몸이 부서져

조각들이 심장을 찔러

아니었네 안긴 적도 없네

나 혼자 나를 안던 거네

안긴 나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부숴가네

힘없이 널브러져

널 향한 내 마음만 태우네

하얀 연기 되어 날아가네

한 줌 재만 남아서

하얗게 하얗게 흩날리네]

“하양 언니스러운데요? 한국의 ‘라나 델 레이’가 될 거예요!”

“제목은 화양연화(花樣年華)야.”

“헤에, 왕가위인가요! 가사는 괴로움을 말하는데 제목은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기라니, 심오해요!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찬란하단 걸 보여주고 싶은 걸까요?”

성필은 리카의 해석을 듣곤 깜짝 놀랐다. 그는 이걸 듣고 ‘무겁다’라거나, ‘하양이 얘는 100퍼 연애를 해봤어’란 생각만 한 것이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찬란하다, 라…….

‘한국의 라나 델 레이…….’

리카의 비유는 의외로 성필의 마음에 와닿았다.

“사랑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건 하양 언니밖에 없을 거예요!”

“이걸 소녀연맹 전원이서 부르고 싶대.”

“아타시(저)는 아직 이렇게 심오한 사랑을 표현할 능력이 없는데요?!”

단 한 소절도 어떤 감정을 담아서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애절하게 부르면 될까?

모르겠다.

리카는 끙끙대면서 가사를 읽었다.

“앨범의 비주얼 컨셉과 어울릴까, 그런 이야기야.”

“…….”

“왜?”

“이, 이에(아뇨).”

리카는 자신이 미는 개인곡은 지적당하지 않으니 의아했다. ‘너만의 경찰이 될래’는 이번 앨범의 비주얼 컨셉과 어울리는 걸까?

“아무튼…….”

“너무 일만 하는 것도 안 좋아요! 이사님은 조금 더 본인에게……!”

그때 성필의 전화가 울렸다.

조정훈 뮤직비디오 감독이었다.

“예, 감독님.”

리카는 전화 받는 성필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이제껏 신경 써서 본 적이 없었는데, 성필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는 듯했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는 것일까?

리카는 왠지 그의 시간을 빼앗은 게 미안하게 느껴졌다. 그가 일로 지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런 말을 꺼내는 걸 너무 가볍게 한 듯싶었다.

“아, 네. 그거 저희 팀이서 말해봤는데요, 리카한테 불꽃놀이를 쏘는 게 좋아 보여요.”

“저한테 불꽃놀이요?!”

“리카, 불꽃놀이 좋아하지?”

“좋아하지만 저한테 쏘는 건 싫어요!”

“예, 리카도 좋대요.”

“싫다니까요?! 아프다구요! 아니, 아플 거라구요!”

“그럼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손나(그런)!”

성필은 통화를 끊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튼…….”

“왜 그러시나요!”

“뭐가? 불꽃놀이?”

“아니요! 박 이사님이요!”

“나?”

“옛날보다 더 쫓기는 거 같이 보여요!”

성필은 리카가 하는 말이 의외였다. 쫓기는 것처럼 보인다고? 자신이? 그리고, 옛날보다?

“옛날엔 이해가 갔어요! 저희가 성공하지 못하면 가로 엔터가 망하니까요! 이사님이 초조해하시는 것도 이해가 갔어요! 그런데 지금은요?”

가로 엔터는 반석 위에 올랐다.

새 그룹을 짤 정도로 충분한 자금을 마련했다. 아니, 마음만 먹는다면 그룹 한두 개 더 준비해도 될 정도다.

물론 소녀연맹의 성장세와 성공이 이대로만 유지된단 가정하에 그렇단 뜻이다.

사업이 언제 고꾸라질지 모르니 문어발식으로 그룹을 만드는 일은 지양해야만 한다.

어쨌든, 가로 엔터는 안정권에 올랐다.

“프로젝트마다 진심을 다하는 모습은 보기 좋아요! 신뢰가 가요! 저희도, 저도, 항상 감사드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사님도 좀 쉬셔야 하지 않나요! 매일 늦게까지 일하고, 또 운동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세우기만 하시잖아요! 이젠 회사도 크니까…….”

리카는 어느 순간 자신의 목소리가 높아졌단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놀랐다.

평범하게 성필을 설득할 생각이었건만, 어느새 흥분해 있던 것이다.

“……조금은, 여유를 가지셔도 되지 않나요?”

“…….”

성필이 침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리카가 호들갑을 떨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긍정적인 톤으로.

“그리고 이전보다 저를 대하는 게 너무 삭막해요! 아까 사무실에서 ‘가까이 오지 말란 말이다아아아앗(과장)!’이라고 외치신 건 너무했어요! 소녀에겐 상처라구요!”

“이제 리카는 어른이잖아.”

“헤헤, 아타시(저)는 어른이 맞긴 하죠! 그치만 나이와 거리가 반비례 관계도 아닌걸요! 자꾸 이러시면 옛날처럼 카페에서 울어버릴 거예요!”

성필은 힘없이 웃으면서 눈썹을 검지로 긁적였다. 마치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고민하는 듯했다.

“리카, 친구여서 할 수 있는 말인데.”

“그것도 그만두세요!”

“어?”

“자꾸 저한테 ‘친구 친구’하는 거요!”

“우, 우리 이제 친구 아니야……?”

“친구끼리는 친구라고 안 해요! 자꾸만 억지로 관계를 정립해두려고 하는 거 같아서 어색해요!”

“아. 그런가?”

그럼 리카가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실버타운 메이트’는 뭘까. 친구와는 다른 의미인가?

“그래서.”

리카가 짐짓 삐친 티를 내면서 물어왔다.

“아주 아주 가까운 관계라서 할 수 있는 내밀하고 은밀한 이야기는 뭔가요!”

“내가 무서워하는 거.”

“박 이사님 강아지 무서워하시지 않나요!”

“뭐, 그것도 무섭긴 하지. 근데 내가 진짜 무서운 건 있잖아…… 이 행복을 오랫동안 누리지 못하는 거야.”

리카의 눈동자가 생각하는 듯 좌우와 위를 오갔다. 그러더니 그녀가 창백해져선 외쳤다.

“불치병인가요?! 그, 그런 영화 같은 일이! 이럴 때가 아니네요! 얼마나 남았나요! 당장 인생 최고의 추억을 만들러 가요! 삿포로 눈축제예요! 숙소는 제가 알아볼게요!”

“진지하게 들어줘.”

“……하이(네).”

“이런 말 알아? 신이 벌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있잖아, 그 사람이 바라는 걸 안 들어주는 걸로 벌주지 않은대. 오히려, 그 사람이 바라는 걸 모두 들어주고, 그걸 누릴 시간을 주지 않는댔어.”

“바라는 거……?”

성필이 바라는 것.

최고의 아이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리카의 뺨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저희가 최고의 아이돌인가요!”

“언제나 내 마음속에선 최고지. 그걸 너희들도, 세상도 믿게 하려고 계속 노력하고 나아가는 거고.”

“그만하세요 심장이 녹을 거 같아요!”

“HPT 뮤직 어워드 ‘아라베스크’ 무대를 보고, 내가 뭐라고 생각했는지 알아?”

이대로 죽어도 좋다.

“옆에 계셨던 홍연헌 사장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렸어. 진심이었어. 그때의 난 정말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거 몰래카메라인가요?! 아니면 생일?!”

“그런데 이 모든 게…….”

제한 시간이 있다면.

아니, 제한 시간은 확실히 존재한다. 성필은 그 시간을 알고 있다.

앞으로 4년 남짓 남았다. 아이돌에게 주어진 7년이란 시간 말이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게 너무나 짧다면.”

우리의 화양연화가 초봄에 우연찮게 내린 눈보다 짧게 녹아 사라진다면. 그 아련함만을 손에 쥐고 언제까지나 하늘을 바라보게 되겠지.

다신 내리지 않을 눈을 영원토록 기다리며. 머릿속에 든 그 날의 눈을 떠올리며. 그저 하염없이.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아직 너희 자신이 너희를 믿지 못하고, 세상이 너희를 알아주지 않는데. 이게 너무 빨리 끝나버리면 안 되잖아.”

인정해야 한다.

성필은 글로브의 곡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다.

어쩌면 앞당겨졌을지도 모를 시련과 고난이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소녀연맹은 케이어스를 이기는 게 숙원이라도 되는 듯 말한다.

그런데 성필이 바꾼 미래가 모종의 이유로 대중들을 바꾸고, 엔터계 종사자들을 바꾸고, 프로듀서들을 바꾸고, 마침내 문화계 전체를 바꾸었다면.

그럼으로써 세대의 등장을 앞당겼다면.

얼마 안 가 소녀연맹은 케이어스엔 미치지 못하지만, 데뷔하자마자 소녀연맹을 넘어설 그룹들과 한꺼번에 경쟁해야만 한다.

‘너희들이 느낄 허탈감이, 너희들이 느낄 절망이, 너희들이 느낄 슬픔이…….’

그런 걸 떠올리면 성필은 괴롭기만 하다.

마치 3세대 등장 직전 야심 차게 ‘섹시’나 ‘청순’을 주력으로 삼아 데뷔한 그룹들이, 3세대 그룹들과 마주했을 때의 기분이 그러했을까.

그건 노력 여하에 따라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절대 쉽게 극복할 문제는 아니다.

시대 자체를 극복한단 건 한 세대의 아이콘이었던 팝스타들마저 우수수 실패했던 과업이니까.

“저희가…….”

리카가 조용한 어조로 성필의 말을 받았다.

“실패할 거라는 뜻인가요? 이사님이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너희는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단 뜻이야. 너희가 앞으로 누릴 걸 생각하면, 내 사정이나 생각하면서 여유 부릴 수는 없어. 일주일, 아니 단 하루라도 허투루 낭비하고 싶지 않아.”

“갑자기요?”

“어?”

“글로브 때문인가요?”

성필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이상했어요. 글로브가 컴백했잖아요. 이사님이 저희한테 한두 마디쯤 할 수도 있을 텐데,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어요. 글로브한테 뭔갈 보신 건가요?”

“…….”

“케이어스처럼?”

“…….”

“글로브의 ‘후 어’는 음원 차트에서 맥을 못 추고 있어요. 앨범은 이전보다 더 팔겠지만, 정상적인 성장의 범주라고 생각해요. 반응도 호불호가 크게 갈려요.”

“…….”

“그렇지만, 이사님이 이렇게나 걱정하실 정도라면 뭔가 있는 게 확실하네요.”

그러고선 리카는 빙긋 웃었다.

“좋아요! 어차피 거슬렸어요!”

“……거슬려?”

“하이(네)!”

리카는 굉장히 활달한 어투였다. 그런데 어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다음 ‘우리들의 프로듀싱’ 때 격의 차이라는 걸 보여드릴게요!”

“리카 너 설마…….”

“글로브에게서 무언가를 보셨나요? 아타시(저)는 훨씬 더 잘할 수 있어요! 저는 그 곡을 신기하게만 느꼈지 대단하다곤 생각 안 했거든요! 그렇지만 그 안에 정말 ‘진짜’가 존재한다면, 그보다 더 나은 걸 만들게요!”

“다, 다음 프로듀서가 되려고?”

리카가 V를 만들어 눈가에 가져갔다. 그러고선 눈에 모래가 든 것처럼 마구 윙크했다.

“그건…….”

그녀가 씨익 웃었다.

“비밀이에요! 하지만 방법은 있어요. 이사님이 글로브 때문에 걱정이시라면요!”

“어떡하게?”

“프로듀서가 되세요!”

“난 이미 프로듀서잖아?”

“총괄 프로듀서가 아니라, 앨범의 메인 프로듀서가 되세요!”

앨범 프로듀싱을 온전히 통제해보아라.

다시 옛날처럼.

성필은 어처구니없단 듯 자꾸만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곤 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감정을 그대로 질러냈다.

“너 대체 4년 동안 내가 하는 말을 뭘로 들은 거야?! 한 번뿐일지도 모를 소녀연맹의 메인 프로듀서 자리를 그냥 내주겠다고?!”

“전부 다 기억해요! 레드 제플린 얘기도 알고! 스파이스 걸스가 마스터 테이프 들고 도망간 얘기도 알고! 니암이 노엘의 후광에 가려져 있다가 작곡으로 빛을 찾은 얘기도 알아요! 창조성과 도전이 힘이란 거요! 이사님이 해주신 이야기는 하나도 안 빼먹고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왜! 너, 너는 작곡을 마스터한 유일한 멤버잖아! 누구보다 네 예술성을 잘 실현할 수 있잖아! 애초에 ‘우리들의 프로듀싱’ 전에도 너희들 의견을 모아서 컨셉을 정해왔잖아! 그런데 왜……!”

“아타시(저)는……!”

리카는 양손을 모으고 꼼지락거렸다. 그러다 손의 움직임이 몸으로 전염됐는지 몸을 살짝 꼬기 시작했다.

드물게도 리카가 성필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녀가 부끄럽단 듯 말했다.

“이, 이사님의 바람대로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달까…….”

“……뭐?”

“이사님의 명령을 듣는 것도…….”

리카가 이젠 몸을 넘어 머리카락까지 꼬았다. 그러면서 흘끔 성필을 보았다.

“나쁘지 않단 느낌?”

손나 칸지(그런 느낌)?

“이사님은 프로듀서잖아요!”

그리고 리카가 갑자기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희를 온전히 프로듀싱하신 적이 없어요! 궁금해요! 되고 싶어요! 이사님의 머릿속에 그려진 완벽한 제가요! 그게 그렇게 나쁜 건가요! 내가 하고 싶은 무엇도 분명 귀중하고 소중한 꿈이지만, 소중한 사람, 이 아니라 아니 맞긴 한데, 다른 사람이 하고 싶은 무엇이 되고픈 것도 귀중하고 소중한 꿈이잖아요!”

“…….”

“제 말이 틀렸나요!”

“아니, 미안한데, 문장이 너무 길어서 이해가 안 됐거든. 다시 말해줄래?”

리카가 발악하듯 외쳤다.

“이사님이 바라는 모습이 되고 싶어요오!”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이제 이해가 되네.”

“앗, 알아주신 건가요!”

그리고 성필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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