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46화 (546/760)

546화

글로브 대기실.

카메라 리허설 전까지 주어지는 인고의 시간. 그것을 버티기 위해 멤버들은 오늘도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봤을 때.”

최유현은 노아와 마주 보고 앉은 채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최유현은 언제나 근엄하고 엄격하며 진지한 표정이긴 했다. 그 표정이 깨지는 건 무대 위나 예능에 출연했을 때 정도가 전부였다.

“우리 ‘글로브’가 나아가기 위해선 대표자가 되는 수밖에 없어.”

“대표자아?”

“우리 이번 타이틀곡인 ‘후 어’의 최대 문제점은, 공감을 얻을 수 없단 거야.”

“사랑 이야기는 보편적야!”

“아니, 뮤비가 문제야. 배경이 왜 미국일까. 왜 출연자들은 전부 서양인이냐는 거지. 어떤 한국인이 미국을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에 공감하겠어?”

“케이팝에 그런 거 자주 있나, 다. 어차피 다 캐릭터가 중요해!”

“그래선 안 돼. 진정성, authenticity가 필요해.”

“난 언제나 진정해!”

최유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이돌에게 진정성이란 성실함이잖아. 내가 바라는 진정성은 말 그대로야.”

“이해 어렵다……. 비교해줘!”

“내 롤 모델은 ‘오아시스’야.”

영국의 록 밴드다.

“그 말은?”

“우린 노동 계급의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양극화가 극심한 현 세태에 희망을 주는 밴드가 되자.”

드디어 최유현이 맛이 가버렸다.

그녀는 평소의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오아시스의 ‘Some might say’를 부르기 시작했다.

“Cause I’ve been standing at the satation in need of education in the rain(난 정류장에 비를 맞으며 서 있어, 교육받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면서)…….”

“소녀연맹 초기 컨셉 파쿠리(훔친 것)다!”

“아니, 걔네는 민중 혁명이고 우린 노동 계급을 대변하는 거라니까. 오아시스처럼. 그리고 걔네는 컨셉이지만 우린 진정성이 있어.”

실제로 최유현은 교육받지 못한 편이다. 아니, 그녀 스스로가 한국 교육 체제에 순응하길 거부했다.

쉽게 말해서, 학교에 급식만 먹으러 갔단 뜻이다.

“어때?”

“그것도 오아시스 파쿠리다!”

“음, 그럼 역으로 부자의 마음을 대변해볼까.”

“힙합 그룹인가! 그건 좋다. 마음껏 돈 자랑 하고 싶어! 지유가 부자니까 진정성 있나!”

“뭐래.”

의자에서 폰을 만지던 지유는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본인의 집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지위나 재산 때문에, 학교 아이들이 지유에게 거리감을 느낀 적이 많아서였다.

“밴드는 어렵다…….”

열띠게 논쟁에 참여하던 노아는 갑자기 축 늘어졌다.

“왜 빨리 해산하는지 알 거 같다. 시작부터 의견이 안 맞아…….”

“얘들아!”

음료수를 뽑으러 갔던 라희가 숨을 헐떡이면서 대기실로 들어왔다.

다들 그녀가 왜 저렇게 흥분했는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모두 심심했던 터라 라희에게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방법이 있어!”

“노동 계급을 대변할 방법?”

“……뭐?”

“아니야.”

최유현은 농담이 먹히지 않자 부끄러워서 괜히 딴 곳을 보았다.

라희가 다시 외쳤다.

“우리의 성장에 기여할 방법을 찾았어! 믹스테입을 만들자!”

“믹스테입……?”

양소민은 예전에 보았던 에리카의 기사를 떠올렸다. 딱히 케이어스 에리카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돌판에 워낙 유명했던 사건이라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었다.

게다가 성필이 엮여 있는 이야기였으니,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떡밥을 탐닉했었다.

‘부럽다.’

의견 차이로 회사로부터 도망쳐서 성필과 긴밀한 대화를 나눈 후, 다시 회사로 돌아와 인정받는다.

에리카는 양소민이 망상만 하던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이었다. 그녀 덕분에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었지만, 솔직히 기분이 묘했었다.

대체 에리카가 뭔데…….

“소민이가 하자!”

“어으어?!”

멍 때리고 있던 양소민이 기겁했다.

믹스테입을 한다고? 자신이?

라희는 기겁한 양소민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자신의 지론을 이어갔다.

“믹스테입은 팬들과 교감하는 중요한 수단이야. 안 그래도 우리는 지금까지 자체 제작 콘텐츠가 적었잖아.”

“그 새끼가 계속 연습만 시켜서 그랬었지.”

정진은 기회가 올 때마다 윤상열을 ‘그 새끼’라고 부르면서 헐뜯곤 했다. 그녀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법인 듯하다.

하긴, 그녀는 취미 자체가 악플 달기였다.

간간이 아이돌의 라이브 방송으로 들어가, 그 아이돌에게 일부러 상처가 될 만한 말을 하곤 한다.

“그래, 근데 이젠 시간이 꽤 많아. 물론 연습을 땡땡이치자는 게 아니야. 우리가 믹스테입을 발표해서 ‘어스’들을 만족시키고, 또 사람들의 관심을 조금씩이라도 끌어보자.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 그런데 왜 나야?”

양소민은 겁먹은 양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물었다. 그에 라희가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우리끼리 믹스테입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해. 나는 박성필 이사님을 생각하고 있어.”

멤버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이사님은 하등 관계없던 에리카 님까지 도와줬잖아? 그럼 아끼던 소민이는 당연히 도와주지 않을까?”

“그, 그치만…….”

양소민이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자조했다.

“난 에리카 님처럼 작곡도 못 하고 악기도 못 다루는걸…….”

“그럼 곡만 있으면 할 거야?”

“그, 그게…….”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다. 성필에게 프로듀싱받을 수 있다는 부분이 특히 매력적이다.

“잠깐만.”

최유현이 끼어들었다.

“일단 윤 PD님이 허락해주지 않을 거란 걸 먼저 말해야겠네. 특히 박 이사님이 끼어들면 절대로 허락 안 할 거야. 애초에 믹스테입을 하고 싶으면 라희 네가 하면 되잖아?”

“너희가 근래 그룹의 미래를 많이 걱정한 건 알아. 하지만, 걱정만 해선 아무것도 안 되잖아. 그렇지?”

다들 라희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다들 여기에 인생을 걸었다, 라고 난 생각해. 인생을 걸었다면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야 해. 글로브가 걱정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해보자. PD님께 허락받는 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라희는 멤버들의 분위기가 나빠지는 것을 계속 경계해왔다. 이대로라면 글로브란 그룹 자체에 애착이 떠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윤상열은 항상 ‘최고’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데, 글로브가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 처음 확인한 자신들의 위치는 최고와 굉장히 멀었다.

‘동기가 필요해.’

본인들이 글로브의 키를 쥐고 있단 실감, 혹은 착각이 필요하다.

자신들의 작은 행동 하나가 글로브란 그룹을 바꿀 수 있단 것을 작게나마 느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서 라희가 생각한 방법이 바로 믹스테입이었다. 물론 그녀들만으론 죽도 밥도 안 될 테니, 유능한 프로듀서의 도움을 빌려야만 한다.

‘PD님은 우릴 도와주실 리 만무하고.’

만약 윤상열에게 이 건을 허락받는다면, 그는 참견은 할지언정 도움은 주지 않을 것이다.

믹스테입은 아티스트가 상업적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는 일이다.

윤상열은 라희의 제안을 듣는다면 솔로 데뷔시켜줄지언정 믹스테입을 도와주진 않을 게 분명하다.

“……하아.”

최유현은 한숨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멤버들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믹스테입을 만드는 게 안 내킨단 건 아니었다. 다들 윤상열이 만든 ‘후 어’를 듣고 위기감을 느껴왔다. 이런 스타일로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을지 확신이 안 섰다.

그랬기에 멤버들은 성공을 지속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 하고팠다. 그런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믹스테입, 즉 앨범 작업이 얼마나 큰 자본과 노력이 들어가는지 알기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최유현은 한숨에 뒤이어 반박을 이어갔다.

“그럼 다음으로 지적한 건 곡이야. 퀄리티 낮은 싼 곡을 살 바에야 시작도 안 하는 게 나아. 퀄리티는 높은데 싼 곡, 그런 걸 우리가 찾을 수 있을 리도 없어. 회사가 도와주면, 도와주지도 않겠지만, 그 순간부터는 믹스테입의 의미가 없어.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곡을 찾는 게 우선이란 거지?”

“맞아. 어떻게 구할 건데? 우리 전부 작곡의 ‘작’자도 몰라.”

그때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안녕하세요, 케이어스 에리카입니다. 여기 라희 님 계신가요?”

대화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최유현은 열라는 듯 라희에게 고갯짓했다.

라희가 문을 열자 에리카가 나타났다.

에리카는 라희를 보자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카드를 하나 내밀었다.

“자판기에 두고 가셨어요.”

“…….”

라희는 에리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또 그녀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라희가 카드 대신 에리카의 손을 맞잡았다.

“작곡가님!”

“……네, 저요?”

케이어스의 사쿠라바 에리카.

작곡을 할 수 있다.

에리카가 작곡을 해준다면…….

‘화제성이 보장된다.’

라희는 이것을 신의 계시로 여겼다. 필요할 때 작곡가가 나타나다니, 계시가 아니면 무엇일까.

게다가 에리카는 화제성은 물론 설득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인물이다.

‘아티스트로 인정받고 싶다면서 회사에서 도망까지 간 사람이잖아.’

사근사근 ‘작곡가님’이라고 불러주며, ‘부탁합니다!’라고 저자세로 나오면 당연히 흔들리지 않을까?

에리카를 진짜배기 아티스트, 작곡가로 여겨주는 사람이 바로 이곳에 있다. 아니, 진짜배기로 여겨 줄 사람이 이곳에 있다.

라희였다.

‘우리를 위해.’

케케묵은 라이벌리(라희 개인의 생각)는 접어두고, 라희는 에리카에게 고개 숙일 준비를 마쳤다.

“잠깐만 기다려라!”

라희가 에리카를 향해 구애하려던 순간, 노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본인에게 이목이 모이자 노아는 위풍당당하게 에리카와 라희를 향해 나아갔다.

“그 역할 나한테 맡겨다.”

“어?”

“소민이 윤상열한테 믹스테입 얘기 꺼내면 또 개처럼 멸망한다. 하지만 난 달라 달라! 윤 PD는 날 밥으로 본다.”

사실이었다.

노아가 석세스 엔터 신사옥 녹음실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더라도, 윤상열은 ‘넌 X신이냐? 아, 맞군’ 한마디로 수긍할 것이다.

괜히 윤상열이 노아가 신경을 살살 긁어도 가만히 두는 게 아니다.

인간의 평균 IQ는 100이다. 그럼 인구의 절반이 IQ 100 이하란 뜻인데, 윤상열은 노아를 IQ 100 이하라고 확신했다. 공공연히 그런 말을 노아에게 하기도 했었다.

윤상열은 그만큼 노아를 무시한다.

“그러니 그 짐은 내가 져. 나한테 맡겨라!”

“……정말 하고 싶어?”

믹스테입 건이 노아에게 넘어갈 듯 보이자 양소민은 극심한 위기감을 느꼈다.

벌써 머릿속으로 성필과 아이디어 회의, 프로듀싱 진행, 좌절, 위로, 우정, 극복, 승리의 서사까지 전부 그렸건만 그게 사라지게 생겼다.

“나, 나는…….”

양소민이 끼어들려던 찰나 노아가 또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난 옛날부터 아이디어가 있다. 솔직히 이런 기회가 와서 기쁘군.”

“그랬어?”

라희는 진심으로 놀랐다.

항상 윤상열에게 벗어나겠단 이유로 연기를 연습하기에, 아이돌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프로듀싱 계획이 있었다니? 노아가 장난치는 거더라도 꼭 들어보고 싶었다.

“프로젝트 유닛 짜! 케이어스 에리카, 소녀연맹 리카, 그리고 이 몸.”

노아는 팔짱을 낀 채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무슨 코스프레 화보라도 찍듯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글로브의 노아로 3인 유닛을 한다. 하고 싶다. 하고 싶습니다. 난 할 수 있다 지금 당장(I can do it right now)! 그리고 유닛 이름도 정했다 벌써!”

“뭔데?”

노아가 일본도를 겨누는 시늉을 했다.

“사무라이 걸즈(Samurai girls)!”

‘X 됐군.’

라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라희는 그녀를 진심으로 설득할 생각이었는데, 노아가 끼어들어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에리카가 이 상황이 장난이라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 그러니까 저를 프로젝트 유닛 그룹으로……?”

에리카가 검지로 본인을 가리키자, 노아는 기대감이 서린 눈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에 에리카가 얼이 빠져서 물었다.

“저랑…… 저를 어떻게……? 오늘 처음 뵀는데 그런 권유를……?”

해석하자면, ‘너 나 아니? 너 뭐 돼?’란 뜻이었다.

에리카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방금 만난 어눌한 한국어 말투의 소녀가 갑작스레 유닛을 제안했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게다가 그런 요청을 받아들일 이유 따위 하등 없다.

“농담이시라면 재밌네요. 아까 작곡가도 그렇고.”

“아, 아뇨, 에리카 님을 작곡가라고 부른 건 실은…….”

“장난 아닙니다 에리카 님!”

노아의 목소리에서 절절한 욕망이 묻어났다. 그녀는 진심으로 ‘사무라이 걸즈’란 프로젝트 유닛을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노아가 상체를 살짝 낮추었다. 기회만 된다면 에리카의 발목에 매달리거나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 거의 절박함까지 느껴지는 노아의 태도에 멤버들이 아연실색했다.

‘얘 실은 우리랑 그룹 짜기 싫었던 거야?’

그래서 프로젝트 그룹에 목숨을 거는 건가? 윤상열에게서 벗어나겠다면서 연기를 연습했을 때처럼?

“음…….”

에리카는 너무나 상식적인 질문을 던졌다.

“제가 왜?”

멤버들의 눈이 노아를 예의주시했다.

노아는 한동안 가만히 있더니, 검지와 중지로 브이를 만들었다. 그것을 눈으로 가져간 후 귀엽게 윙크했다.

“민―나 토모다치(모두 친구)! 민―나 아이도루(모두 아이돌)! 민―나 니혼진(일본인)!”

노아…….

“사무라이 걸즈!”

동향인임을 어필하다!

* * *

“에취!”

날씨가 추워진 탓일까, 리카는 재채기를 했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일본에선 재채기를 하면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거란 미신이 있다. 한국식으로는 귀가 간지러운 것이다.

누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면 귀가 간지러워야 할까, 아니면 재채기가 나와야 할까.

세계 시민인 리카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까워져 오는 사무라이 스피릿을 알아채지도 못한 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