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화
정호환이 말했다.
“선택해야 할 때야.”
텔레비전으로 소녀연맹의 소개 영상이 나왔다.
흑일색(黑一色) 복장 멤버들의 사진이 이름과 함께 차례로 지나갔다. 그녀들의 눈빛은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어딘가 공허했다.
인형처럼.
“어느 쪽이든 좋겠지. 다행히, 케이팝보다 이 문제를 먼저 직면했던 선배들이 있어. 참고할 순 있어.”
정호환은 테이블 옆에 벗어두었던 안경을 썼다.
“스웨디시팝처럼 글로벌 스탠다드를 쫓느냐.”
아예 팝이란 기준에 맞추는 것.
언어, 문화, 기술, 전부 다.
“라틴팝처럼 다르기에 멋진 것을 추구하느냐.”
기준에서 벗어나 ‘다름’으로써 세계로 나아가는 것. 언어도, 문화도, 모든 게 다르기에 오히려 팝의 대안(Alternative)이 됐던 것.
“아니면, 그 중간이 될 수도 있겠지.”
정호환의 귀를 익숙한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채웠다. 소녀연맹의 ‘오토마타’다.
일렉트로닉, 지극히 팝적인 음악이다.
한국에서 일렉트로닉이란 장르는 마이너다. 그나마 사람들이 케이팝 덕분에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익숙해졌을 뿐.
소녀연맹이 들고나온 사운드는 일렉트로닉에 충실하기 그지없었다.
한국인들에겐 색다른 것이지만, 팝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겐 익숙한 것일 터다.
“다르면서도 같은 것. 글로벌적이면서도 지역적인 것.”
이윽고 소녀연맹이 화면에 비친다.
익숙한 사운드 아래에서 멤버들이 천천히 숙인 고개를 들었다. 태엽이 감긴 인형이 서서히 움직이듯이 그건 느긋하고도 칼같이 각진 모습이었다.
“다르면서도 같은 거요?”
“다르단 건 음악, 비주얼, 뮤직비디오, 마케팅 방식처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1팀장이 묻자 정호환은 텔레비전으로 다가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춤.”
케이팝이 다른 음악 장르들과 비교하여 지닌 차별점이자 압도적인 우위.
케이팝을 다른 장르들과 구별하는 기준 중 하나이자, 가장 색다른 요소.
“퍼포먼스.”
케이팝을 정의하는 건 춤이고 퍼포먼스다.
정호환은 미래를 모른다.
하지만 미래를 엿보는 방법은 안다.
항상 그러했다.
‘박성필 이사.’
이번에도 보여다오.
‘미래를.’
소녀연맹 미니 3집.
오토마타.
* * *
“야, 이거 봐라.”
시에이스의 리더 영준이 규영에게 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어느 트잇터 계정의 글이었다.
[선전관
소녀연맹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민중에게 혁명 정신을 전파한다. 그 최일선에 선 남자의 이야기. 그런 컨셉의 계정입니다.(외국인 맞습니다)]
“이 계정 개웃겨. 글들이 하나같이 컨셉이 정신 나갔어.”
“나도 알아.”
규영도 아는 트잇터 계정이었다. 그는 트잇터에 본인의 이름을 검색하는 게 취미 중 하나였다.
시에이스 관련해서 알음알음 여러 트잇을 보다가, 우연찮게 저 계정을 보았었다.
뒤틀린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과거로 뛰어든 소녀연맹 멤버들. 그 사이의 불화와 극복 그리고 우정. 그런 컨셉 스토리를 ‘선전관’이란 제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과몰입 미쳤던데.”
“과몰입도 과몰입인데 스토리가 그냥 재밌어. 소녀연맹이 이런 거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뭐라고 생각하긴.”
재밌다고 생각하겠지.
규영은 피곤한 듯 눈을 문질렀다. 실제로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번 늦여름에 컴백하고 세 달도 안 돼서 또 컴백했다. 그 스케줄을 전부 소화하자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영준은 걱정스럽게 규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냐? 뭐 간식이라도 좀 줘?”
“아니…….”
그런 걸로 해결될 피로가 아니다.
시에이스는 이번 컴백으로 초동 70만 장 달성. 자체 커리어하이를 찍었다.
올해에만 네 번 컴백하여 이뤄낸 성과다.
어째서 회사가 이런 무리한 스케줄을 강행하고 있느냐면…….
‘곧 군대 가니까.’
회사는 시에이스 멤버들을 전부 동시에 군대로 보낸다는 기상천외한 전략을 내놓았다.
멤버들은 전부 동의했다.
동의해서, 군대 가기 전에 골수까지 빨리는 중이다. 군대에 다녀오면 인기가 팍 식어 있을 테니,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하지 않겠는가.
보통 사람들은 직장을 40년 다닌다.
규영이 현재까지 번 총수입을 40으로 나누면, 직장인 연봉과 비교해서 꽤 많은 수준이다.
하지만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벌 때 더 벌어야만 한다. 젊을 때 몸이 부서져라 벌어야지.
“그건 그렇고.”
영준은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었다.
“오전에 소녀연맹 드라이 리허설 하는 거 봤어? 미쳤더라. 난 아이돌 춤에 스텝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 거 처음 봤어. 그리고 스텝 할 때마다 바닥이 동시에 쾅 쾅 쾅 울리는데 와 진짜 대단하더라.”
“안 봤어.”
“왜 안 봤냐.”
규영은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보려고.”
카메라 리허설.
모든 코디와 메이크업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생방송과 같은 조건에서 하는 리허설이다.
규영이 연습실을 나서자 영준이 따라왔다. 다른 멤버들은 안대를 쓰고 죽은 듯이 늘어져 자고 있었다.
“뭐, 뭐야.”
복도를 나온 규영은 당황했다. 복도가 평소보다 훨씬 붐볐다. 게다가 모두 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무대?’
설마 전부 소녀연맹을 보러 가는 건가?
그 의문은 곧 밝혀졌다. 규영의 예상이 맞았다.
무대 근처엔 소녀연맹의 카메라 리허설을 보기 위해 몰려든 아이돌로 가득했다.
“와.”
영준이 실실 웃었다.
“이런 건 또 오랜만에 보네.”
아이돌들도 퍼포먼스가 굉장하거나 유명한 이들이 리허설한다고 하면 궁금해서 보러 나온다. 같은 업계 사람이자 경쟁자들의 무대이니 궁금한 게 당연하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몰려든 건 또 오랜만이다.
“그때 생각난다. 우리 막 데뷔했을 때 있잖아. 다키스트 선배님들 리허설한다고 하면 막 전부 다 나와서 구경했었잖아.”
그리고 그 광경이 떠오른단 건, 현재 소녀연맹에게 주어지는 관심이 그만큼 크단 뜻이겠지.
무대 앞에 모여든 수십 명의 아이돌들.
그게 소녀연맹의 위상을 증명한다.
아이돌의 아이돌.
소녀연맹은 아이돌에게마저 동경받는 입장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암튼 그때 다키스트 선배님들 진짜 레전드였는데. 몰려든 사람들 수도 장관이었고. 이거 보니까 그때가…… 너 왜 그래?”
영준이 의아해했다.
규영은 아까부터 어느 방향을 쭉 바라보고 있었다. 관객석으로 들어오는 길, 후드티에 모자를 푹 눌러쓴 장신의 남자가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스크까지 쓴 터라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아니…….”
규영은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무대를 보았다.
‘설마, 그분일 리 없지.’
저 체형, 다키스트의 서유선을 닮았다.
규영이 아이돌이 되기로 했던 건 2세대 보이그룹들 때문이다. 특히 다키스트를 동경했어서 연습생이 됐더랬다.
방송국에서 다키스트와 마주했을 땐 어찌나 설레던지. 이젠 두 명을 제외하곤 방송국에서 못 만나게 되어버렸지만…….
‘몇 년 동안 안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잖아.’
그냥 비슷하게 닮은 사람이겠지.
“어, 저기 케이어스 아니야?”
영준이 규영의 어깨를 붙잡고 한쪽을 가리켰다. 무대와 멀리 떨어진 곳에 케이어스 멤버 네 명이 모여 있었다.
“활동 기간 끝났는데 왔네.”
“소련이랑 케이어스랑 그룹 자체가 친하다잖아. 응원하러 왔나 보지.”
“그런가?”
그때였다.
무대에서 쾅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앞을 보니 소녀연맹의 조아라가 몇 번이고 무대를 밟고 있었다.
쾅, 쾅, 쾅, 바닥이 얇은지 그녀의 발길질에 굉음이 자꾸만 울린다.
‘원래 저런 재질이 아닌데…….’
격렬한 춤을 추면 당연히 바닥을 세게 밟게 된다. 그래서 무대 바닥은 소리를 최소화하는 재질로 만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소녀연맹은 일부러 바닥에 소리가 어느 정도 울리는 재질로 깐 듯했다.
왜?
* * *
“정말 괜찮겠어?”
메인 PD 구상준이 성필에게 물었다.
“이러면 애들 마이크에 바닥 밟는 소리가 다 들어갈 텐데.”
“녹음본 들어보니까 지금이 딱 좋아요.”
“쿵쿵 울리는 게?”
“네.”
왜냐하면, 라이브의 박진감이 그대로 전해질 테니까. 그녀들의 발 구르는 소리가 퍼포먼스의 실감을 더욱 극대화시킬 것이다.
“거기에다 요즘 MR 제거 논란이 뜨겁고요. 애들 마이크가 켜져 있단 증거도 될 테고요.”
“철두철미하네. 그런 식으로 증명하려고 하고. 뭐, 사녹(사전녹화)은 라이브로 한 거 보긴 했는데, 드라이도 라이브로 할 거야? AR 까나?”
성필은 뒤를 돌아보았다.
소녀연맹을 보러 나온 아이돌들이 가득했다. 그중에서 성필은 케이어스를 찾아냈다. 일부러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성필이 그곳을 응시하자 진저가 진소유의 뒤에 숨었다. 진소유는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성필은 미소만 지어주고 다시 앞을 보았다. 그래서 에리카가 양손을 흔드는 것을 못 봤다. 에리카가 뻘쭘하게 손을 내렸다.
“라이브로 해야죠.”
“애들 힘들지 않겠어? 퍼포먼스 한 번 하니까 땀이 비처럼 쏟아지던데. 메이크업도 다 녹을 수준이고.”
“관객이 있잖아요.”
“관객? 리허설인데?”
성필이 뒤를 가리켰다.
구상준이 돌아보았다. 그걸 보고 구상준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관객이 있네.”
그것도 가장 깐깐한 관객들.
“대충 할 수가 없는 분위기야.”
춤과 노래를 숙련한 아이돌이, 소녀연맹의 컴백 무대를 지켜보고 있다.
“그럼 이대로?”
성필은 무대 위를 올려다보았다.
조아라는 성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아라가 다시 발을 한 번 굴렀다.
쾅.
그에 성필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OK 사인을 보냈다. 조아라가 씩 웃었다.
“자, 그럼.”
구상준이 스태프들에게 사인을 보냈다.
“시작해볼까.”
소녀연맹.
리허설.
* * *
생방송.
‘오토마타’가 재생되자 조아라는 감았던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보아라.’
세상아.
‘여기 이곳에.’
뮤직 스테이션 컴백 스테이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형이 있다.’
소녀연맹 미니 3집 ‘오토마타’.
최초 공개.
* * *
소녀연맹 멤버들이 방 안에 있다.
천장, 바닥, 벽이 모두 상앗빛이다.
그 안엔 멤버들이 좋아하는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 만화책, 침대와 이불 베개, 캐릭터 인형, 아령, 예쁘고 멋진 옷 등등.
다른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멤버들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그 안에서 멤버들은 해맑게 웃으면서 담소를 나눈다. 그런 그녀들이 줌아웃되고, 곧 그녀들이 어디에 있는지 밝혀진다.
그녀들은 커다란 녹음 부스 안에 있다.
부스 안을 볼 수 있는 유리 벽 밖으로는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의 남자.
‘박성필?’
윤상열은 그의 뒷모습만 보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등만 보여주는 성필은 이윽고 손을 움직인다. 그 손이 어느 버튼으로 향한다.
‘재생’ 마크가 있는 붉은 버튼이다.
그것을 누르자 부스 안의 모습이 바뀐다. 멤버들이 좋아하는 건 모조리 사라지고, 칠흑의 옷을 입은 멤버들이 포지션을 잡고 서 있다.
지극히 건조한 광경 속에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 그렇군.’
‘오토마타’란 건 정말 인형을 비유한 것이었다. 즉, 아이돌이란 상품의 처지를 뜻한다.
프로듀서가 버튼 하나 누르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
인형들은 부스 안에서 ‘오토마타’의 멜로디에 따라 춤추기 시작한다.
아니, 그냥 춤이 아니다.
‘뭔…….’
곡이 하이라이트에 들어서자 윤상열은 경악했다. 가사는 오직 ‘Wow wa wa’ 같은 외침으로만 대체된 채, 멤버들은 춤을 춘다.
끝없이 진지한 눈으로, 이제껏 아이돌에게서 본 적 없이 격렬한 퍼포먼스를 펼친다.
당장이라도 화면을 박차고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스텝이…….’
아이돌의 춤이란 게 이토록 스텝을 많이 쓰는 것이었나? 숨을 쉴 새도 없이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며 발을 구른다.
도저히 요령을 피울 수 없는 춤이다.
게다가 더 끔찍한 건.
‘음악.’
악질적이다시피 쉴 새 없는 리듬으로 멤버들을 몰아붙인다.
마치 채찍질하는 것처럼 터지는 베이스 리듬에 묶여, 소녀연맹의 발은 끝없이 요동친다.
‘이런 거, 1절만 춰도 온몸이 땀에 젖을 거야.’
뮤직비디오임에도 벌써 목이 갈라지듯 말라버렸을 멤버들이 상상된다.
아예 노래를 버리다시피 하고 춤에만 올인한, 걸그룹의 체력을 과대평가에 과대평가를 거듭하여 만들어낸 춤.
너무 비인간적이고…….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워.’
저토록 격렬한 춤을 추면서 각이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멤버들은 한 사람처럼 움직였다.
윤상열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옆에 있는 양소민에게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멜로디가 잦아들었다.
‘1절이 끝난 건가.’
그렇게 생각한 시점, 사운드가 다시 날뛰었다.
1절 2페이즈.
“아.”
옆에서 같이 뮤비를 보고 있던 양소민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설마 여기서 더 한다고?’란 뜻을 담은, 경악에 가까운 감정이 목소리로 흘러나온 것이리라.
이젠 ‘Wa’ 같은 가사조차 사라졌다.
멤버들은 굳게 입을 다물고, 마치 영혼이 춤을 향해서만 열린 듯 몸으로만 말했다.
‘인형이란 건 이런 의미였나.’
아이돌.
프로듀서의 수족이자, 프로듀서가 지닌 자의식의 발현.
그곳에 아이돌의 퍼스널리티가 설 곳은 없다. 오직 프로듀서가 부여한 캐릭터만이 있다.
그렇기에 인형이다. 인더스트리얼 베이비, 산업이 만들어낸 영혼 없는 인형.
‘하지만 그런 비인간적인 산업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형태가 아이돌…….’
어릴 적부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춤과 노래를 동시에 숙련한 뮤지션.
강제로 스타를 만들어내는 시스템 속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퍼포머.
‘오토마타’로 소녀연맹은 말하고 있다.
‘인형이기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고.’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우리들의 프로듀싱’이란 이름을 걸고 있으면서, 정작 내놓은 컨셉이 인형이라니.
본인들이 인형이란 걸 인정하는 꼴 아닌가.
‘그래도.’
꽤 그럴듯하단 건 인정해야겠다.
특히 춤이.
그런데.
‘다른 부분은 엉망진창이군.’
* * *
‘엉망진창이야.’
춤에 감탄했던 것도 잠시, 2절에 들어서자 진저는 정신을 차렸다.
“에리카 언니, 이거…….”
“그냥저냥 듣기엔 좋은 거 같은데.”
에리카는 진저의 몇 마디만으로도 그녀의 심정을 유추해냈다. 그리고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었다.
실제로 케이어스의 모두가 비슷한 감상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엉망진창이네.”
소녀연맹의 곡 중 이렇게나 짜임새가 부족한 가사는 처음이다.
‘We going high’라거나, ‘This is hit sound’라거나, ‘umm breaking down 숨죽여’라거나, 아무 의미도 없는 영어 가사의 난발이다.
오직 곡의 분위기와 라임만을 맞추기 위해 아무렇게나 가져다 붙인 가사들.
‘Wo wo wo wo’나 ‘Trrrr Tta Tta Tta’ 같은 함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곱씹을 거리 하나 없이…….”
오로지 귀만을 즐겁게 하기 위한 음악.
그리고 오직 춤에 집중시키기 위한 노래.
물론 그 춤은 대단하다.
‘아라베스크’마저 넘어서는 파워풀한 퍼포먼스다.
“그렇지만 그 강점인 춤마저도, 봐.”
에리카의 말에 진저는 다시 무대를 보았다.
이제 2절에 들어섰다.
고작 2절에 들어섰을 뿐이다.
백댄서들은 물론 소녀연맹 멤버 전원 얼굴과 목이 번들거린다.
“저거 다 땀임미까……?”
에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땀이 날 수밖에 없으리라.
한겨울, 히터의 따스한 공기가 가득한 공간이다. 그런데 목 바로 아래부터 손목과 허벅지까지 죄다 감싸는 검은 옷을 입고 있다.
게다가 단거리 달리기에 육박할 정도로 체력 소모가 심한 춤에 노래까지 라이브로 부른다.
“대단하긴 해. 대단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
“하양이가 땀으로 번들거려…….”
“…….”
에리카는 옆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런데 춤이란 건 보는 사람이 힘들단 걸 눈치채지 못하게 추는 게 기본이잖아.”
춤추는 사람이 숨을 헐떡이고 인상을 찌푸리면 보는 사람까지 기분 안 좋다.
표정 관리는 댄서의 기본 소양이다.
그런데 보라.
“다 악에 받쳐서 무표정으로 정면만 보고 있어.”
이건 무리수라고밖에 할 수 없다.
“애초에 제대로 소화할 수 없는 곡인 거야.”
‘오토마타’는 춤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했다.
가사의 심미성을 버렸기에, 가사와 곡은 시너지를 일으키지 못한다.
곡은 춤에 의존해야만 하는데, 춤이 저런 모습이어서야.
“그럼, 아라 씨의 프로듀싱은…….”
에리카가 애매모호하게 말했다.
“글쎄, 진저 넌 어떻게 생각해?”
“……모르겠슴미다.”
“그래?”
“그런데.”
아까부터.
“눈을 못 떼겠슴미다.”
2절 하이라이트 1페이즈.
멤버들이 제자리 도약으로 체스판의 말들이 교차하듯 위치를 바꾼다. 그녀들이 발을 디딜 때마다 인이어 마이크로 쿵쿵 발 구르는 소리가 약하게 울린다.
그녀들이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점프할 때마다 턱선을 따라 땀이 떨어진다.
힘들어 보인다.
그런데도 그녀들의 눈빛에선 투지와 의지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이 뒤에 무언가가 더 있다는 것처럼.
“뗄 수가 없슴미다.”
“설하 언니 때문에?”
“그런 뜻이 아님미다.”
그렇다.
‘오토마타’는 ‘아라베스크’마저 넘어서는 강렬한 퍼포먼스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노래와 가사의 힘마저 포기하고 펼치는 춤인데 고작 이 정도로 그친다면, ‘아라베스크’의 열화판일 뿐이다.
‘뭔가가 더 있어.’
있어야만 할 거다.
* * *
2절 끝.
가장 앞에 선 조아라가 무대의 끝을 향해 걸어간다. 그리고 신아름, 장하양, 백설하, 리카가 차례로 그녀의 뒤를 따른다.
멤버들은 조아라를 따르며 그녀의 등을 보았다.
뒷모습만으로도 그녀의 의지가 느껴진다.
마치 이렇게만 말하는 듯하다.
준비됐지? 그럼.
‘간다.’
잔상 파트,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