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화
영원토록 이어질 것만 같은 대치. 그것을 깬 건 윤상열이었다.
윤상열이 성필을 향해 다가갔다.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전신이 긴장하여 근육이 수축했다. 마치 링 안에서 상대 선수가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다.
그러나 윤상열은 성필을 지나쳐 세면대 앞에 섰다. 성필이 뒤로 돌아보자, 윤상열은 손을 씻고 있을 뿐이었다.
“왜 멀뚱히 서 있어.”
윤상열은 거울을 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비누 거품이 번지는 자신의 손만 바라보았다.
성필은 석세스 엔터에 있을 때를 떠올렸다. 윤상열은 과하게 손 씻기에 집착해서,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유독 길었다.
겨울엔 손을 너무 자주 씻어서 손등이 트기 일쑤였었다. 보다 못한 성필이 핸드크림을 선물해줄 정도였다.
“할 말 있냐?”
없다.
그와 나누고픈 말은 단 한마디도 없다.
성필은 그와 재회하는 날을 정해두었다. 가로 엔터가 석세스 엔터를 인수할 때이다.
그때 윤상열의 작업실로 쳐들어가 방 빼라고 말하는 상상을, 정말 수없이 해왔다.
그게 성필의 결심이었다.
지금 와서 구구절절 말을 나누고픈 마음 따위는 없었다. 없었는데.
“뭐…….”
성필은 손을 꼼지락댔다. 뭔가 만질 거라도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손이 허전했다. 그래서 그는 거울로부터 고개를 돌리면서 팔짱을 꼈다.
“살 만해?”
윤상열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똑같지.”
“의외네.”
“뭐가.”
“내가 나가기만을 바랐잖아. 그럼 더 좋아야 하는 거 아니야? 눈엣가시 하나 사라졌으니까.”
그제야 윤상열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거울에 비치는 성필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
윤상열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채 위아래로 박박 문지르는 중이었다.
손가락 주름 사이에 낀 세균을 전부 죽이기라도 하려는 기세였다.
“넌.”
윤상열의 어투는 평온했다.
“내가 후회라도 하길 바라는구나, 그렇지?”
“뭐?”
“‘난 이렇게나 대단한 프로듀서다, 날 내보낸 걸 후회하지 않고는 못 배길걸’. 그렇게 후회했으면 하는 거잖아.”
윤상열이 드디어 손을 물로 헹구기 시작했다. 평소 루틴보다 빨랐다.
“네가 프로듀싱 권한을 가지는 것에 반대했던 내가 후회하길, 혹은 당황하거나 창피해하길 바라는 거지. 글로브 애들 분위기도 안 좋고…… 그러니까 후회할 거다…….”
윤상열이 수도꼭지를 잠갔다.
“태훈이 형은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난 안 그래. 네가 나가서 얼마나 성공하든 후회하거나 창피한 마음은 조금도 안 들어.”
“그렇겠지. 어련하겠어.”
성필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그래, 저 인간에게 어떤 말을 기대하겠는가.
웃으면서 ‘소녀연맹 좋더라’ 같은 이야기라도 할까 봐?
윤상열은 성필을 석세스 엔터에서 내쫓는 것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간이다. 그때의 일을 사과해도 떨떠름할 텐데, 저런 말이나 면전에서 듣고 있다니.
“그래, 알겠…….”
성필이 대화를 마치고 그에게서 떠나가려던 순간.
“어떤 일이 있어도.”
윤상열은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단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껏 평온했던 그의 어조가 조금씩 흔들렸다.
“난 내 선택을 후회 안 해.”
“뭐?”
“이랬으면 좋았겠다느니, 그때 이렇게 해야 했다느니, 그딴 식의 후회는 패배자들이나 하는 거니까. ‘해야 했다’는 건 없어. 뭐든 결심한 순간 그 상태로 확정되는 거다. 4년 전의 나는…….”
힘없이 내려간 윤상열의 손으로부터 닦지 않은 물기가 흘러내렸다. 물방울이 바닥으로 톡톡 떨어졌다.
“네가 나갔으면 했다. 그 결과 어떠하든, 난 그걸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나를 믿는 만큼 과거의 나도 믿는다. 나는…….”
윤상열이 성필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후회 안 해.”
그의 말과 단어 하나하나는 갑옷의 재료였다.
자의식의 갑옷.
윤상열은 선언했다. 옛날에 성필이 회사를 나가도록 만든 것, 나가도록 방치한 것엔 조금의 후회나 미안함도 없다고.
그 선언을 굳이 성필의 앞에서 꺼낸 건, 그에겐 갑옷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믿기 위해 그 믿음을 입 밖으로 꺼낸다. 그 말은 즉 윤상열의 내면이 흔들리고 있단 뜻이다.
언어의 힘이 아니고선 지탱하기 힘들 정도로, 흔들리고 있단 거다.
“…….”
성필은 침묵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로 백날 떠들어봐야 뭐 하겠어. 근데 후회란 건 형 마음에 달린 게 아니지.”
“뭐?”
“주변 사람 반응에 달린 거 아니야? 자존심 강한 형 성격에 말야, 지금 상황이 납득이 가?”
윤상열의 표정이 굳었다.
“그때 날 나가게 한 걸 후회 안 한다. 옳은 선택이었다. 그건 형이 결정할 게 아니지. 어디 주변에서도 그러나 두고 봐.”
“너…….”
“옳은 선택이었는지 아닌지는, 무대 위에서 알 수 있어. 아, 그래, 형한텐 옳았겠네.”
성필은 미소 한 조각을 얼굴에 띄었다.
“내가 석세스 엔터에 남아 있었으면, 지금 형 입지가 어땠겠어? 내가 그룹 하나만 만들었어도…….”
커다란 환호가 다시 벽을 뚫고 두 사람에게로 내리쬐었다.
“개막 무대인가 봐. 먼저 갈게.”
성필이 화장실을 나섰다.
윤상열은 그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후, 페이퍼 타올을 뽑아 천천히 손을 닦았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무대 위에서 알 수 있다, 고…….’
글로브와 소녀연맹의 관계를 암시한 거겠지.
성필은 윤상열이 가장 열받는 포인트를 잘 알았다.
‘네가 프로듀싱한 글로브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보아라’라고, 성필은 그리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글로브는 외부로 투영된 윤상열의 예술혼이자, 세상에 드러난 윤상열의 자의식이다.
글로브는 패배해선 안 되고, 누군가의 밑에 있어서 좋을 게 아니다.
왜냐하면.
‘난 KS 엔터로 돌아가야 해.’
다시금 KS 엔터의 프로듀서가 되어야만 한다.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 자리까지 올라가야만 한다.
그게 윤상열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론적 실증을 완성하기 위한 최후의 증거다.
자신은 뛰어나다.
문화의 선도자다.
석세스 엔터라는 좁은 땅덩이에 갇혀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니다.
글로브의 성공이, 모든 그룹을 앞지를 거대한 성공이 그 발판이 된다. 그로써 윤상열의 존재론적 실증이 끝나는 것이다.
자신에겐 가치가 있…….
‘아니야.’
그냥, 그저.
‘글로브는 이겨야 해.’
미사여구를 전부 떼어내고, 단지 글로브가 정상에 서길 바란다.
윤상열은 그리 생각한다.
어느샌가 그것만 생각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글로브가 정상에 서는 모습만을 상상해왔다.
We are the one, We are the world, Globe.
언젠가 세계 그 자체가 될 소녀들.
글로브는 윤상열의 예술혼이나 자의식의 투영 같은 게 아니다.
윤상열 그 자체다.
성필이 석세스 엔터를 나가 소녀연맹을 만들어 성공했다고? 그게 어쨌단 건가.
성필은 어차피 글로브 프로듀싱과 관련해선 일말의 연관조차 없을 외부인이었을 텐데. 그가 나간 걸 어떻게 후회할 수 있단 건가.
꺾어야 할 그룹이 하나 늘어났을 뿐이다.
‘이제 고작 3년.’
앞으로 4년.
시간은 충분하다.
충분한데…….
“하아.”
윤상열은 손으로 벽을 짚었다.
고작 3년인데, 너무 힘들다.
글로브를 정상에 올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무너질 거 같다.
* * *
올해 HPT 뮤직 어워드는 총 3부로 진행됐다.
시상식에 참여한 가수나 아이돌들이 전부 무대를 배정받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무대를 받았단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순서가 있기 마련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무대 순서는 역시 각 부의 개막 무대와 종막 무대다.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특권을 부여받은 여섯 팀.
‘케이어스도 그중 하나.’
조아라는 속으로 큐시트를 되짚어보았다.
사람들은 어떤 그룹이 어느 순서에 나오는지 모르지만, 무대에 서는 아이돌은 당연히 순서를 알고 있다.
케이어스는 1부 종막 무대를 맡았다.
‘우리는…….’
소녀연맹은 2부 개막 무대다.
작년의 HPT 뮤직 어워드는 2부로만 구성되어 있었음에도 소녀연맹이 1부 피날레를 맡았었다. 그 때문에 여러 말이 나돌았었고 말이다.
그때의 논란을 신경 쓴 건지 이번엔 아예 3부로 늘려버렸다. 실제로 어워드 진행 시간도 늘어났고 말이다.
“이제 신인상 차례인가?”
장하양이 물었다.
얼마 안 있어 1부가 끝나니, 곧 신인상 차례이긴 하다. 조아라는 케이어스의 순서만 신경 쓰고 있던 터라 대답이 느렸다.
“뭐, 그렇겠죠.”
“누가 받을까? 작년엔 글로브였고.”
“아, 그거 진짜 의외였죠. 아슬아슬하게 1년 못 채워서 받을 수 있었던가.”
“우리도 노렸었는데.”
“그쵸.”
그런데 그보다 낫다고 하긴 뭐하지만, 소녀연맹은 본상을 수상했었다.
[다음은 신인상입니다!]
사회자가 기대하란 듯 호기롭게 외쳤다.
신인상은 케이팝 팬덤 내에서도 주목도가 큰 분야이다.
보통 케이팝 팬들은 덕질할 그룹에 굶주려 있으니, 새로운 그룹의 등장을 언제나 기다린다.
조아라도 신인상이 가장 기다려졌었다. 병아리를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
[여자 신인상!]
아까까지 달아올라 있던 관객석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넛지’입니다!]
대기석에 있던 다섯 명의 ‘넛지’ 멤버들이 깜짝 놀라면서도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그녀들도 본인들이 받을 거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넛지는 주변의 선배들에게 꼬박꼬박 인사하면서 무대로 걸어 나갔다.
[아, 네…….]
리더인 유경민이 마이크를 받곤 수상소감을 말하기 시작했다.
조아라가 한 칸 띄어진 자리의 신아름을 불렀다.
“너 쟤랑 친하지 않냐?”
“내가? 친하긴.”
유경민은 ‘프로젝트 포유 시즌1’의 우승자 중 한 명이다. 즉, 그룹 포유의 멤버였다.
포유가 해체하자 SMS 엔터로 들어갔고, 고작 몇 개월의 연습생 생활을 마친 후 데뷔했다.
“방송국에서 잠깐씩 인사만 했지.”
“프로그램에선 얘기 좀 나누던데.”
“언제 적 일이야 그게. 나랑 친한 건 모르겠고, 경섭 오빠가 쟤 팬이긴 하지.”
민경섭은 은근히 ‘포유’를 덕질했었다. 정확히는 포유의 유경민을 덕질한 것이었다. 그의 덕질 경력은 자연스레 SMS 엔터의 넛지로 넘어갔다.
“아니 근데 쟤.”
조아라는 신기하단 듯 무대 위의 유경민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소멸 직전인데?”
‘넛지’의 다른 멤버들과 비교해도 확연히 비율이 좋다.
톱티어 여배우 출신 사회자가 달라붙는 드레스 차림으로 옆에 서 있는데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그때 갑자기 관객석에서 ‘우효!’라는 이상한 함성이 들려왔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깜짝 놀라 관객석을 보곤 전광판을 보았다.
우효민이 전광판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면서 웃다가 무대 위의 유경민을 향해 손키스를 날렸다.
유경민은 수상소감을 말하다가 웃으면서 그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네, 마지막으로 SMS 엔터의 모든 식구분들과 총괄 피디님께 감사 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소프트’들 고마워요.]
유경민과 멤버들은 트로피를 들고 대기석으로 돌아왔다. 그녀들은 도중 소녀연맹의 옆을 지나갔다.
유경민은 신아름 쪽을 보았다. 신아름도 그녀를 보아 둘의 눈이 맞았다.
유경민이 눈웃음을 보냈다. 신아름도 그렇게 했다.
“오, 그래도 옛날에 한솥밥 먹었다고 인사해주네. 좋겠다 후배들이랑 눈인사 섞어서.”
“응…… 그치.”
신아름은 어쩐지 떨떠름했다.
하필 유경민이 이쪽을 본 게, 아니, 이쪽을 쳐다봤단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유경민은 꼭 이곳을 지날 때 신아름을 보겠다고 마음먹은 듯한 태도였었다.
이어서 남자 신인상 차례가 됐다. ‘넛지’와 마찬가지로 대형기획사 출신 그룹이 받았다.
“저거 보니까…….”
리카가 우울하게 말했다.
“저희 후배님들도 신인상은 그른 거 같아서 마음이 착잡하네요…….”
신인상을 받는 건 웬만해선 대형 기획사 출신 그룹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주목도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로 엔터의 보이그룹도 소녀연맹처럼 시상식에 불려져 손가락만 빨 미래가 훤히 그려진다.
“안 그러겠지.”
백설하가 리카의 말을 부정했다.
“우리가 있잖아.”
“……그렇네요!”
리카가 금방 기운을 차렸다.
“저희가 있는 가로 엔터는 무적이니까요!”
소녀연맹의 후배 그룹은 소녀연맹보다 나은 시작이 보장될 것이다. 적어도 데뷔 초의 소녀연맹처럼 시상식 박수 기계가 되는 꼴은 면하겠지.
그때였다.
무대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정면과 좌우 스크린도 어둠만이 비쳤다. 그리고 점점 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스크린에 진저가 나타났다.
전신에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가죽옷을 입었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녀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가 발 디딘 흰색 바닥엔 붉은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그녀의 걸음 한 번마다 가루가 흩날려 일렁였다.
“시작이다.”
케이어스의 1부 종막 무대가 시작된다.
진저의 댄스 퍼포먼스 영상은 에피타이저다. 곧 본무대가 시작될 것이다.
‘종막 무대인 만큼 시간이 꽤 많겠지. 두세 곡은 보여줄 수 있을 거야. 연출에 신경을 써서 두 곡으로 채울 수도 있고.’
시상식 무대를 멋지게 해낸다고 수상에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건 자존심 싸움이다. 다른 이들보다 떨어질 순 없다.
‘어떤 무대를 보여줄까.’
카오스? 가이아? 넥타르?
이번 컴백곡인 ‘IWY’는 반드시 있을 거고…….
영상이 끝났다.
조명이 밝았다.
어두웠던 무대 위엔 수십 명이 서 있었다. 그 중앙엔 영상 안의 진저처럼 검은 가죽 차림으로 도배한 케이어스 멤버들이 있다.
신체의 선을 최대한 드러내기 위한 복장.
음악이 흘러나온다.
조아라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타임.’
케이어스가 지닌 최고 난이도 댄스 퍼포먼스 곡이다.
* * *
케이어스 정규 1집 ‘타임’은, 케이어스에게 20만의 초동판매량을 안긴 작품이다.
그 타이틀곡 ‘타임’은 퍼포먼스로 화제를 모았었다. 여태까지의 그 어느 걸그룹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느낌의 댄스였으니까.
기계장치가 맞물리듯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군무는 순식간에 관객의 눈을 빼앗는다.
윤상열은 ‘타임’을 처음 보곤 열등감에 도중에 시청을 그만두었다. ‘타임’을 직접 보았던 백설하는 눈물마저 흘렸었다.
KS 엔터의 직원들도 모두 호평했었다.
그 전설적인 퍼포먼스가 1년을 뛰어넘어 다시 시상식 무대 위에서 펼쳐졌다.
‘다분히 소녀연맹의 오토마타를 신경 쓴 배치지.’
에리카는 그리 생각했다.
처음 회사 측으로부터 편성곡을 받았을 땐 ‘타임’이 껴 있는 것을 보곤 놀랐었다.
발매 시기가 가장 가까운 ‘넥타르’와 ‘IWY’만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선택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에리카는 ‘타임’이 선곡된 게 기껍기까지 했으니.
그리고 이 선곡은 누구보다 진저가 좋아했다.
‘케이팝 팬들 전체가 시상식을 지켜본다.’
‘타임’은 소녀연맹의 ‘오토마타’와 맞서 싸우기 위한 가장 좋은 무기다.
하이라이트 퍼포먼스가 시작됐다.
케이팝 역사에 길이 남을 1분간의 댄스 브레이크. 케이어스 멤버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동작을 수행한다.
그녀들의 동선은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까지 1분 동안 천천히 움직인다.
케이어스의 황홀한 걸음을 따라 관객의 눈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옮겨진다. 그 눈빛은 성당 벽 한 칸을 모두 메운 프레스코화를 감상하는 관객과 닮았다.
경건함과 위압감에 사로잡혀 눈은 강제로 그림을 훑는다.
‘타임’이 끝났다.
조명이 꺼졌다.
케이어스 멤버들은 재빨리 무대 뒤로 가 의상을 갈아입었다. 다음은 이번 컴백곡인 ‘IWY(I Want You)’다.
고작 1분 만에 케이어스는 다시 무대로 나섰다.
불이 켜진다.
음악이 흐른다.
관객들이 환호한다.
그 환호는 너무나 거대했다. 아까 ‘타임’이 나올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이나…….
‘아.’
에리카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 * *
관객들이 환호한다.
그 환호는 너무나 거대했다. 아까 케이어스가 1부 종막 무대에서 선보였던 ‘IWY’가 나올 때처럼.
에리카는 대기석에 앉아 무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대 위론 다섯 명의 소녀들이 올라와 있었다.
2부 개막 무대.
소녀연맹의 컴백곡 ‘오토마타’가 흘러나온다.
그 함성과 환호는 ‘타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비교하려면 ‘넥타르’로도 부족했고, ‘IWY’를 가져와야만 했다.
에리카는 홀린 듯 ‘오토마타’를 보았다. 오토마타를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감정이 심장으로부터 온몸의 혈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에리카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래, 내가 패배감을 느꼈던 건…….’
케이어스에겐 ‘오토마타’를 뛰어넘을 퍼포먼스가 없기 때문이었다.
‘타임’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아름답고 정교한 기계장치는 신기함만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진저.’
에리카는 옆자리에 앉은 진저의 손을 잡았다. 진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 * *
[베스트 퍼포먼스 그룹, 여자 부문입니다.]
사회자가 큐시트를 응시하다가 미소를 지으면서 외쳤다.
수상자명을 들은 조아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팽창했다.
그리고.
“으쌰아아아앗!”
조아라가 벌떡 일어나 모두 들으라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길고 긴 외침을 내뱉으면서 불끈 쥔 주먹을 몇 번이나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소녀연맹의 옆자리, 케이어스 대기석의 진저는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주변의 아이돌들처럼 소녀연맹에게 웃음과 박수를 보낼 수 없었다.
진저는 춤을 좋아한다. 춤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춤으로 지고 싶지 않다.
‘타임’은 그녀가 지닌 최고의 수였다.
그런데…….
“진저.”
에리카가 진저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힘을 주어 그녀가 등을 펴게 했다.
진저는 억지로 무대를 보아야만 했다.
무대 위로 걸어가는 소녀연맹 멤버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빛에 물든 조아라의 뒷모습만이 보인다.
“박수 쳐. 카메라가 우릴 찍을 거야.”
그래, 분명 찍겠지.
케이어스의 라이벌이라고 불리우는 소녀연맹이 수상하여 무대 위로 올라가는 중이다. 케이어스의 반응을 찍고 싶을 것이다.
“…….”
진저는 어금니를 까득 물며 손뼉을 부딪쳤다.
사회자가 다시 외쳤다.
[올해의 베스트 퍼포먼스 걸그룹은 소녀연맹, 그리고 그 곡은 ‘오토마타’입니다!]
* * *
KS 엔터 사옥.
휴게실 중 하나.
케이어스를 맡은 매니지먼트팀과 프로듀싱팀이 모여 시상식을 보았다.
[올해의 베스트 퍼포먼스 걸그룹은 소녀연맹, 그리고 그 곡은 ‘오토마타’입니다!]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가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리고 문질렀다.
“앨범 ‘테이스트 더 넥타르’는…….”
그는 입술을 꾹 물었다.
“이렇게 묻힐 게 아닌데…….”
올해 발표한 ‘테이스트 더 넥타르’와 그 타이틀곡인 ‘넥타르’는 이렇게 사라져선 안 된다.
안 되는데, 사라지게 생겼다.
‘넥타르가 상을 받을 수 있다면 베스트 퍼포먼스 부문일 거였어. 그런데.’
빼앗겼다.
케이어스 예술성의 극치였던 ‘넥타르’는 이렇게 역사 속에 묻힌다.
소녀연맹에게 패하여, 아무런 족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 * *
사회자는 마이크를 리더인 백설하에게 넘겼다. 백설하는 그것을 조아라에게 주었다.
조아라는 마이크를 받곤 당황하여 자꾸 ‘나? 나?’라고 물었다. 백설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앞으로 내밀었다.
조아라는 무대 앞으로 나갔다.
수만 명의 관중이 보였다. 관중들이 전부 조아라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작년 시상식처럼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는 없다. 다들 소녀연맹이, 조아라가 수상하러 무대에 오른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조아라는 등줄기에 벼락이 내리치는 듯했다. 그 벼락이 신경을 따라 퍼지며 강렬한 쾌락을 선사했다.
조아라는 희열에 가득 차 입꼬리를 올렸다.
“저…….”
미소는 금방 사라졌다.
조아라는 말을 더듬었다.
“고, 고마워요, 인민이들…….”
이 자리에 서게 해줘서.
노력할 수 있게 해줘서.
* * *
가로 엔터 사장실.
텔레비전을 보던 홍규헌은 재떨이에 거칠게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샴페인을 들고 힘차게 땄다.
[고마워요오…….]
가로 엔터의 임원들이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하늘에서 샴페인이 조아라의 눈물처럼 흘렀다.
그녀의 눈물은 기쁨의 맛을 지녔다.
소녀연맹 데뷔 3년 차.
올해의 퍼포먼스상 수상.
무려, 케이어스를 제치고 얻어낸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