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화
리카는 이수림으로부터 그림을 구매했다. 이전에 성필과 함께 갔던 이수림의 개인 전시전 때 옵션을 걸어둔 것이었다.
이수림의 화실(畫室) 앞에서, 둘은 목적지를 향해 떠나가는 트럭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정말 사러 올 줄은 몰랐어요.”
이수림은 살짝 멍한 투로 말했다.
“아타시(제)가 사러 오겠다고 했잖아요! 저는 약속은 지킨다구요!”
“심지어 정말 1,000만 원에 구매하실 줄은…….”
100호 캔버스에 그린 성필의 초상화.
그때 이수림은 장난스럽게 1,000만 원에 판다고 했었다. 그 정도 가격에 팔릴 만한 건 아니다, 라고 이수림은 생각했다.
딱히 안 팔려도 상관없다. 그 그림은 이수림이 제멋대로 남긴 기록과 같은 것이었으므로, 팔지 않아도 가치가 있다.
그런데 팔렸다.
리카가 1,000만 원에 샀다.
“막상 팔려니까 아쉬운가요!”
“아뇨, 팔려야 의미가 있죠. 시간 있으시면 안에 들어오셔서 차 좀 드실래요?”
이수림은 예의상 그리 말했다.
리카는 아이돌이다.
심지어 엄청 인기 있는 아이돌이다. 그림도 챙겼으니, 이 이상 시간을 쓸 이유는 없으리라.
“좋아요!”
그런데 리카는 너무나 시원하게 ‘알겠다’고 했다. 이수림은 당황하지 않고 그녀를 화실 안으로 들였다.
한적한 골목길의 상가 건물 1층.
이수림의 화실은 바깥과 맞대고 있는 벽이 유리다. 그렇기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 번쯤 그녀의 화실을 보곤 한다.
눈이 갈 수밖에 없다.
평범한 가게와 전혀 다른 모양새였으니.
리카는 한편에 놓인 응접용 의자에 앉아 화실을 둘러보았다.
벽면엔 타공판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곳엔 온갖 종류의 붓, 물감, 테이프, 칼, 그 외에도 미술에 쓰겠거니 싶은 물품이 가득했다.
미술에는 이렇게 많은 도구가 쓰이는 건가? 이 도구를 전부 다룰 수 있는 건가? 절로 경외감을 갖게 될 만한 풍경이었다.
“드세요.”
이수림은 테이블에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두었다. 리카는 감사 인사와 함께 품위 있는 태도로 다과를 즐기기 시작했다.
“혹시 제가 방해한 건 아닌가요!”
“방해는요. 오히려 대접해드려서 영광이에요. 제 그림의 가치를 알아봐 주시는 분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죠.”
이건 일종의 애프터 서비스와 같다.
그림을 구매하는 이들 중엔 소장욕이나 투자 외에도 후원의 개념을 지닌 이들이 있다.
청년 화가, 물론 이수림은 청년 화가라고 불리기엔 나이가 있지만, 그런 이들의 미래를 위해 후원하는 것으로 만족감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진짜 유화 작품을 집에 둔다는 게 손님이 왔을 때 은근한 과시 효과를 주기도 하고 말이다.
이수림은 리카도 그러한 생각이 있으리라 생각하여 그녀에게 계속 감사를 표했다. 그 감사가 리카의 자존심을 키워주길 바라면서.
‘또 고객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수림은 리카와 정다운 대화를 이어갔다. 그럴수록 점점 감탄만 나왔다.
외모도 그렇고, 리카는 정말 세상에게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 같았다. 잠깐의 대화만으로 호감도가 쭉쭉 솟는 기분이다.
“부당한 유산을 누리는 구(舊) 제국 국가들은 인류에 대한 사죄를 위해 더 경주(傾注)해야 해요!”
대화 주제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런 이상한 주제마저 리카의 매력이 됐다.
물론 이수림은 구 제국 국가들의 부당한 유산이나 업보 같은 덴 일평생 주의를 기울여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박 이사님은.”
그런 이상한 화제 후, 드디어 리카와 이수림의 공통 주제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리카는 제국주의 뭐시기 이야기를 할 때처럼 자연스럽게 성필의 이름을 꺼냈다.
“완전히 잊으신 건가요!”
“잊었다는 게 이성적인 감정이면, 네.”
“새 애인을 사귀신 건가요!”
“네.”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성필이 얘기가 궁금하세요?”
리카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손을 보였다. 그녀는 검지와 엄지 맞대었다가 동전 크기 정도의 틈이 생기도록 벌였다.
“쪼금?”
“걔 성적 취향이 궁금하신 건 아닐 테고.”
“에엑 엄청 궁금한데요!”
“걔한테 미안하니까 말 안 해요.”
“박 이사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좋은 남자였어요.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이수림이 성필과 헤어진 이유는 그와 있으면 너무 행복해서였다. 그와 함께인 상태론, 현재에 안주해버려서 꿈을 포기할 것만 같았었다.
당연히 리카는 그 이야기를 기억했다.
“박 이사님은 헤어질 때 어땠나요?”
“어땠을 거 같으세요?”
리카는 자신의 경험과 멤버들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결론을 내렸다.
“다리에 매달려서 울었나요!”
“아뇨. 깔끔했어요.”
정말 예상외였다.
성필은 꿈에 진심이다. 당연히 사랑에도 진심일 것 같다.
상대가 이별을 고하더라도 ‘내가 놓기 전까진 널 놓아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어떻게든 마음을 돌리려고 할 성격 같았는데.
“내가 헤어지자니까 이유도 안 묻고 고개를 끄덕이더라고요. 한 1분간 입 다물고 있다가요.”
“에, 그건…….”
성필도 헤어질 각을 보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저는 제 발 저려서 대강이나마 이유를 말해줬어요. 너랑 있으면 내 꿈에 집중할 수 없겠다고요. 그러니까 걔는 조금 우울한 눈빛을 하더니, 또 고개를 끄덕였어요.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렇겠네요…….”
이수림은 꿈과 사랑 중 꿈을 택한 것이다.
그 결과 꿈을 이루었다. 한국에서 그림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화가는 200명 내외.
이수림은 그중 하나다.
“동시에, 막 자아도취가 됐어요.”
“자아도취요?”
“안 그랬겠어요? 난 꿈을 위해 사랑도 포기할 수 있는 인간이다. 난 내 인생에 이렇게 진지하다. 자기최면이라고 해야 하나……. 이상하죠?”
“이해해요! 저도 새벽까지 연습할 때 자주 느껴요!”
“근데 제가 그런 걸 느낀 건 성필이 덕도 있어요.”
“박 이사님이요?”
이수림은 씩 웃으면서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었다.
“걔 눈빛이 있잖아요, 이런 거예요. 저를 엄청 동경하듯이 쳐다보는 거. 저를 동경해서, 알겠단 듯이 고개를 끄덕여주는 거예요.”
무슨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성필은 그녀의 꿈을 이해했고, 이해했기에 헤어지길 택했다. 아니, 그건 이해를 넘은 동경을 품고 있었다.
“‘너 엄청 빛나고 있어’란 듯이 쳐다보는데,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아요.”
꿈의 광채는 타인의 동경으로 완성된다.
이수림이 자아도취에 빠졌던 건 이상하지 않다. 리카는 그녀를 충분히 이해했다.
성필의 목소리와 눈빛이 쥐여주는 꿈의 마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리카였으니.
“다시 생각하면…… 둘 다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리카는 이수림의 자그마한 후회들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대신 옛날에 성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른 방법으로 잘 먹고 잘살 방법이 치이도록 많은 재능 있는 사람이, 예술에 영혼을 바치는 건 너무나 아름답지 않아?’
리카뿐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성필에게서 한 번쯤은 비슷한 뉘앙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러한 생각은 성필의 머릿속 깊이 박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아마…….
“아무튼, 그래요.”
리카는 차를 홀짝이는 이수림을 바라보았다.
성필이 영혼을 태우며 빛나는 재능을 사랑하는 건, 어쩌면 이 사람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수림과의 만남은 성필이란 인간을 바닥에서부터 뜯어고쳤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빛을 탐하는 인간이 되도록.
아마 그가 쫓는 빛이란 건, 사랑보다 훨씬 높은 가치겠지. 아니, 사랑보다 높은 가치여야만 할 것이다.
이수림이 그러했던 것처럼.
* * *
회사에서 연습을 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온 유우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문 앞에 빳빳한 종이로 포장된 엄청 커다란 직사각형 물체가 놓여 있었다. 문을 막고 있어서 치우지 않으면 들어가지도 못한다.
“에에, 에엑…….”
누가 잘못 놓고 간 걸까?
“유우쨩!”
갑자기 리카의 목소리가 들리자 유우토는 기겁했다. 그는 너무 놀라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곤 땅을 밀어내듯 발을 굴러 물러났다.
유우토의 격렬한 움직임에 원룸 복도 형광등이 죄다 켜졌다.
“누, 누나?”
“다행이다 시간에 딱 맞췄네!”
“무슨, 무슨 시간?”
“무슨 시간이긴! 당연히 유우쨩이 오는 시간이지! 자!”
리카가 포장된 직사각형 물체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이걸 집 안에 옮겨!”
“……응?”
“빨리!”
유우토는 영문도 모르고 리카와 함께 그 물체를 집 안으로 옮겼다.
원룸은 안 그래도 좁았다. 그런데 리카와 함께 괴상하게 큰 물체가 자리를 차지하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리카는 가위로 포장을 벗겨내고 안에 숨겨져 있던 물건을 꺼냈다.
그림이었다.
“우와, 이거 뭐야?”
“박 이사님이야! 내가 샀어!”
“멋지다.”
“앞으로 이 그림은 유우쨩한테 맡길게!”
“……응?”
“잘 부탁해! 소중한 거야!”
“에엑…… 뭐, 딱히 상관없지만…….”
옛날부터 리카의 기행에 익숙해져 있던 유우토다. 이 정도로는 놀라지 않는다.
참고로 유우토가 가장 놀랐던 일은, 리카가 길거리에 버리려고 둔 폐지 뭉치에서 성인잡지를 가져와 유우토의 침대 밑에 모아두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그걸 걸린 유우토는 대경실색했었다. 자기도 모르는 새 자기 침대 밑이 성인잡지들의 천국이 된 것이다.
어머니는 ‘그럴 수 있지’라고 했지만, 유우토는 너무 억울해서 울기까지 했었다.
그 이후로, 유우토는 웬만한 일엔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당황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기 두는 게 좋겠어!”
리카는 그림을 유우토의 책상 옆에 두었다.
유우토가 나중에 책장을 사면 두려고 했던 자리다. 원룸엔 책장이 없어서, 유우토가 개인적으로 구매한 책들은 헌책방에 쌓인 책 무더기처럼 보관되고 있었다.
“의외로 분위기가 사네?”
“그치? 기뻐해!”
유우토는 기뻐했다.
이런 순응성이 없었으면 리카의 동생으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근데 이게 박 이사님이라고?”
“응, 닮았지?”
“음…… 미술은 어렵네.”
“유우쨩도 나(아타시)처럼 심미안을 길러! 아, 배고파. 먹을 거 없어?”
리카는 냉장고로 달려갔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샐러드, 삶은 고구마, 달걀이 전부였다. 냉동실을 열었더니 닭가슴살과 닭가슴살 볶음밥이 무더기로 나왔다.
“……이런 걸 먹고 사는 거야?”
“의외로 맛있어. 몸에도 좋아. 먹을래?”
“절대 안 먹어!”
리카는 동생이 걱정됐다.
회사에서 밥을 준다지만, 집에 있을 땐 저런 것만 먹고 사는 건가?
건강한 걸까…….
“…….”
리카는 원룸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평행봉과 아령들, 그리고 화장실 문틈에 달린 철봉을 보았다.
그리고 옛날보다 우람해진 유우토의 흉근도 보았다.
건강한 모양이다.
유우토의 롤모델은 백설하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유우토가 롤모델을 백설하라고 한 건 메인보컬이란 포지션 때문이겠지만…….
“유우쨩, 요즘 어때?”
“어떻냐니?”
“데뷔할 수 있을 거 같아?”
“그거야 모르지.”
“그런 마음가짐이면 안 돼! 무조건 데뷔해야 한다고 말해야지!”
“아, 아, 그렇지. 미안…….”
“자신감 없는 태도도 집어치워! 무조건 데뷔해서 남매 아이돌로 유명해지는 거야! 나도 이사님들의 무의식을 조종해서 너를 데뷔조로 뽑히게 만드는 계획을 실행 중이니까!”
“그런 걸 하고 있어?!”
리카는 성필, 손혜빈, 홍규헌과 대화할 때마다 꼭 한마디씩 유우토의 이름을 언급하곤 한다.
그들의 무의식에 유우토를 박아 넣는 것이다.
“비겁하잖아!”
“비겁? 누나의 노력을 비겁하다고 하는 거야?”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사실 그런 뜻 맞다.
유우토는 백수현을 떠올렸다. 누나의 후광 때문에 눈물까지 훔쳤던 동료 연습생을.
그를 떠올리면, 리카가 한 말에 순순히 ‘고마워 누나’라고 할 수가 없었다.
“한국어는?”
“어느 정도…….”
“이럴 게 아니야! 내가 ‘결국엔 이기는 데뷔조 뽑히는 법’을 전수해줄게!”
“혹시 길거리에서 이사님한테 도게자하는 거야?”
“그걸 어떻게?!”
리카는 유우토가 길거리에서 무릎 꿇고 땅에 이마 박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하더라도 데뷔조로 뽑아줄 것 같진 않으니.
“약간…… 예술가병(病)?”
“예술가병?”
“응! 앞으로 이렇게 행동하는 거야! ‘내 인생에 아이돌뿐이다. 아이돌이 되기 위해선 어떤 고난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 내 영혼을 불태워서라도 반드시’ 같은 태도야!”
“이해가 잘 안 가는데…….”
“그리고 자주적인 태도!”
“더 모르겠어. 연습생의 자주적인 태도란 건 뭐야?”
“음…….”
리카도 모르겠다.
되새겨보면, 소녀연맹 각자는 각양각색이다. 어떤 기준으로 뽑혔는지조차 알 수 없다.
다만 성필과 지내온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건 하나 있다. 그가 연습생에게, 아이돌에게 요구하는 빛은…….
“가장 소중한 것마저 버릴 수 있는 용기야!”
“가장 소중한 거?”
“사랑이라든가?”
“뭐야 그게. 애인을 사귄 후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지기라도 하란 거야? 애초에 우린 연애하면 안 되는걸.”
“어렵네……. 요컨대, 노력이야! 그거면 이사님이 아주 뻑이 갈 거니까!”
“다르게 말하면, 워라밸을 지켜선 뽑힐 수 없단 뜻이야?”
이 무슨 블랙기업.
“워라밸은 무슨 워라밸! 유우쨩은 국가공무원 종합직(한국의 외무, 행정, 사법고시를 합친 일본의 고위 공무원 선발 시험)보다 더 낮은 확률에 도전하는 거라구! 그 사람들이 워라밸 지켜가면서 합격했을까? 아니! 전혀!”
“연습생이 그렇게 많진 않…….”
“데뷔하면 끝이 아니야! 아이돌로 또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구! 워라밸을 지키려면 다른 직업을 가져야지! 유우쨩의 꿈은 겨우 그 정도야?”
아니다. 유우토는 모든 것을 포기할 결심으로 한국에 왔다.
그런데, 이미 그 정도 각오로 한국 땅을 밟았는데 이 이상 어떻게 노력하란 건가.
리카가 하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었다.
소중한 것을 버리라느니.
노력하라느니.
영혼을 불태우라느니.
“그럼 누나는 뭘 포기했어?”
“나? 음…… 포기한 건 아니야! 잠시 미룬 거야!”
“뭘?”
“사랑!”
“연애 금지는 풀렸잖아.”
“더 미뤄야 해. 그래야만 닿을 수 있어.”
그리 말하는 리카의 목소리엔 비장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위를 노리기 위하여 정말로 소중한 것을 버린 아니, 미룬 인간의 각오가 느껴졌다.
“성급해선 안 돼.”
유우토는 리카를 다시 보았다.
최고의 아이돌에 오를 때까지 꾸준히 자신을 갈고닦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한단 것 아닌가.
현재의 욕망을 죽이고 이성을 따른다.
그야말로 누군가의 귀감이 되기 충분했다.
“때는 결국 올 테니까.”
* * *
“난 세이코 씨가 좋아.”
성필이 그리 말했다.
그 말은 장하양의 심장 안에 메아리가 되어 끊임없이 증폭했다. 그리하여 증폭된 음파는 장하양의 심장을 터뜨릴 것처럼 두들겨댔다.
중앙 계단의 형광등이 꺼져서 성필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얼굴이 보고 싶다.
장하양이 떨리는 손을 위로 움직였다. 그녀의 움직임을 감지한 센서가 불을 켰다.
다시금 그의 얼굴이 보였다.
아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굳어 있고, 진지하며,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을 듯 감정의 밀도가 빼곡하다.
그는.
‘인간적으로.’
란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성필은 그저 ‘세이코 씨가 좋아’라고 했다.
‘좋아’란 말은 여러 갈래로 해석될 수 있다.
친구로서 좋아할 수도 있고, 인간적으로 좋아할 수도 있고, 스승으로서 좋아할 수 있고, 사랑의 의미로 좋아할 수도 있다.
만약 성필이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면 ‘인간적으로’나 ‘친구로서’ 같은 말을 덧붙였을 터다.
그러나 덧붙이지 않는다.
성필은 장하양은 바라보기만 한다.
‘아닐 거야.’
장하양은 사랑에 빠진 성필은 본 적 없다. 하지만 그가 사랑에 빠지면 어떨지는 예상이 간다.
세이코를 바라보는 성필은, 적어도 사랑의 감정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렇게 믿었고, 그러길 바란다.
그런데 성필은 오해를 잔뜩 불러일으킬 말을 꺼내고선, 부차적인 설명도 하지 않고, 장하양을 바라보기만 한다.
“아…….”
장하양의 입술 사이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그녀는 몸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등에 땀이 배어 나온다.
‘알고 있어.’
장하양은 어느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알고 계신 거야.’
침을 꼴깍 삼키자마자 그녀의 손에 땀이 흥건히 배어 나왔다.
‘이사님은…….’
장하양이 사랑하는 것을, 성필은 알고 있다.
문득 그런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니면 인식인가.
추측인가.
추정인가.
직감인가.
장하양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손에 땀이 가득해서 찝찝했기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만약 자신이 성필을 사랑하는 것을 성필이 알고,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펼쳐진 거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해?’
장하양은 연애를 모른다.
그녀가 아는 연애의 형태는 전부 로맨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의 형태를 띠었다.
그리고 그런 매체에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건 대부분이 남자의 고백으로부터였다.
여자는 자연스럽게 남자를 ‘유혹’한다. 의식적이지 않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이 쌓이면서 결과적으로 남자가 연심을 자각한다.
연심을 자각한 남자가 여자에게 대시하고, 그로써 로맨스 소설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의 연심을 깨달은 남자가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로맨스 소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성필이 목소리를 내었다.
장하양은 열병이 일으키는 멍함에서 깨어나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러 갈래로 흩어졌던 성필의 상(相)이 하나로 모였다.
“하양아, 네가 한 부탁은 못 들어주겠다. 세이코 씨만이 아니라, 네가 내 인간관계에 뭐라고 할 순 없어. 그건…….”
성필이 들었던 손을 힘없이 놓았다.
장하양은 그가 선을 그으려 했던 거라고 생각했다. 선을 긋는 제스처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려고 했던 거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우리 사이니 뭐니 그런 말 다 떼고, 예의가 아니야. 네가 했던 말 그대로, 주제넘은 거야. 말할 순 있어. 그 사람 좀 별론 거 같다. 그렇게 말할 순 있어 당연히. 그런데 ‘내가 싫으니까 관계를 끊으라’는 건…….”
그때 장하양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행동했다.
그녀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입꼬리를 올리며, 눈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깨어질 듯 연약한 목소리로 말하려 했다. 마치 연습생 시절, 성필의 응원과 믿음을 갈구했을 때처럼 절박하게.
꼭 4년 전의 그녀로 돌아간 것처럼.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해야 해. 지금 바로. 당장.’
이게 장하양의 본능이 내린 판단이었다.
사과하고, 그의 자비를 바란다.
장하양은 그의 분노나 불쾌감, 적대감이나 언짢음을 감당할 수 없었다. 감당할 마음도 없었다. 감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용서를 빈다.
용서를 비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죄송, 해요…….”라고 말하려 했다.
순간적으로 장하양의 이성이 본능을 압도했다. 이성은 욕망의 하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성이 승리했다.
이성이 말한다.
사과하면 안 된다고.
더 멀리 보라고.
* * *
장하양의 눈썹이 분노로 이글거리는 듯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명백한 적개심을 담았다.
“알겠어요.”
장하양의 목소리는 차갑다.
“저희가, 아니.”
장하양은 소녀연맹과의 고리를 끊어내듯 ‘저희’란 호칭을 부정했다.
“제가 이사님께 가진 경애의 감정과는 별개로, 저는 이사님의 마음을 존중해드릴 수 없어요. 이사님이 세이코 선배님을 좋아한다고 하는 건, 물론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제가 세이코 선배님을 싫어하지 못할 이유는 아니에요.”
장하양은 성필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박 이사님은 제 은인이세요. 평생을 바쳐 그 빚을 갚으려 해요. 그런 은인인 이사님을, 세이코 선배님 때문에 잃을 뻔했어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화가 나서 미칠 거 같아요. 이사님이 세이코 선배님을 용서하는 건 더 돌아버릴 거 같고요. 저는 이사님이 품으신 따스함을 동경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혐오의 빛이 깃든다.
“솔직히, 그런 일을 겪고서도 세이코 선배님을 용서하는 이사님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냥 호구 아닌가요?”
성필은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이사님의 헌신 덕에 저희는 웨벡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죠. 그럼 그걸로 교환은 끝났어요. 이사님은 더는 세이코 선배님을 신경 써주실 필요가 없다구요. 그런데도 이사님은 세이코 선배님을 놓지 못하는 거네요. 그냥 한없이 바보 같아서…….”
장하양은 짜증스럽게 성필을 지나쳤다.
“이사님 마음대로 하세요. 그게 이사님의 행복이라면, 얼마든지 누리세요. 근데.”
장하양의 발소리가 멎었다.
“……아니에요. 더는 뭐라고 할 마음도 없네요.”
등 뒤로 그녀의 발소리가 다시 들렸다.
성필은 먹먹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워줄…….”
“필요 없어요.”
그렇게 장하양은 떠나갔다.
성필은 중앙 계단에 우두커니 남았다.
그는 소녀연맹 멤버들이 세이코를 싫어한단 것을 안다. 특히 장하양과 신아름은 세이코를 거의 혐오하듯 하여,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면으로, 성필은 안심했다.
장하양이 보인 반응 때문이었다.
‘하양이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구나.
홍규헌은 항상 장하양을 유심히 보았다고 한다. 그녀를 연습생으로 받을 때도 혹시 성필을 좋아하냐고 묻기까지 했었으니.
장하양이 성필에게 하는 행동을 본 다른 이들도 ‘혹시?’라고 의문을 제기했었다. 장하양이 성필을 대하는 건 확실히 일반적이지 않았으니, 그런 의문을 품는 게 당연하기까지 했다.
둘을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이들은 그 의문을 성필에게 말하기도 했었다.
성필은 그럴 때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라고 했었다.
그도 그럴 게, 10살 차이다.
게다가 장하양은 성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인간이다.
만약 성필이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양이가 나를? 음, 나도 그럴 거 같더라’라고 하면, 도끼병 말기란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장하양이 성필에게 보이는 미소, 거리감, 손짓을 보고 느낄 때마다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얘가 정말?’
같은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만한 거리감과 분위기였다.
그리고 장하양의 그런 감정은, 성필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이돌이 프로듀서를 사랑한다고?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있는 말 없는 말 다 지어져 나올 것이다. 성필이 권력으로 장하양을 겁박했다거나, 장하양이 성필을 상대로 핑크 비즈니스를 벌였다던가.
영원토록 소녀연맹의 오점이자 가로 엔터의 수치로 남을 것이다.
즉, 장하양이 정말 성필을 사랑하는 게 맞고 성필을 유혹해왔던 거라면…….
‘하양이는 소녀연맹과 가로 엔터가 입을 극적인 피해를 도외시한 거야.’
성필과 장하양의 관계는 일반적인 열애설이 퍼지는 것과 차원이 다른 파급력을 지닐 것이다.
물론 계약이 끝나면?
아, 얼마든지 그러라고 하라.
그런데 연애 금지가 버젓이 이어지는 동안, 소녀연맹에게 오점이 박힐 수 있는 기간 동안, 장하양이 성필에게 연심을 품고 계속해서 유혹해왔단 건 이런 뜻이다.
‘그룹과 회사가 어찌 되어도, 난 내 사랑을 이루고 싶어.’
정말, 피가 확 식을 정도다.
팬들이 아이돌의 열애설이 나오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커리어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연애는 좀 그렇지 않을까?’란 말이다. 그건 질투에서 발원한 감정이기도 하면서, 덕질하는 아이돌이 연애보다 본업에 힘써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아이돌을 응원하는 이유는 그 아이돌이 정점에 서는 걸 바라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정점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돌을 사랑하니까.
그들이 정상을 밟길 바라서 팬이 된 거니까.
그런데 그 아이돌이.
‘사랑은 인생의 대업이라고들 하잖아요. 아이돌도 중요하고 팬분들도 중요하지만, 제 옆에 있는 사랑도 중요해요. 그리고 그분이 제 프로듀서님입니다. 어떻게 보일지는 아는데, 저도 제 마음을 어쩔 수 없네요.’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가로 엔터는 풍비박산 날 것이다.
게다가 만약 장하양이 성필에게 ‘세이코와 관계를 끊어라’라고 한 게 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그건 더 이상 가만히 두어서 좋을 마음이 아니다. 확인하고 조처해야만 한다.
그래서 확인해보았다.
“……으음.”
성필은 거기서 생각을 멈추었다.
방금까지 성필이 줄줄이 욀 것처럼 쌓았던 논리의 성은, 실은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참 오래도 오해했다…….’
장하양이 자신을 사랑할지도 모른다고, 그런 오해를 참 오래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장하양이 보이는 친밀함을 무조건 연심으로만 해석했던 건 아니다. 그랬다면 계속 그녀와 가까운 거리에 있지 못했겠지.
옛날에 성필은 장하양의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했다. 장하양도 성필을 가족으로 여기겠다고 했다.
둘 사이에 이어진 끈은 피 없는 천륜이었다.
그런데 성필은 그러한 거리감을 가끔 오해했다. 어쩔 수 없잖은가. 상대가 장하양인데…….
‘그래, 그렇단 말이지.’
성필은 마른세수했다.
솔직히 부끄럽다.
그렇지, 하양이가 날 사랑할 리가 없지.
아니, 그런 착각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장하양의 속을 떠보겠답시고 ‘세이코 씨가 좋아’란 대담한 선언을 한 데다가, 그녀의 반응을 가만히 기다리기까지 했다.
필요한 일이었다지만 결과는 보는 대로다.
만약 장하양이 성필을 사랑했다면, 그 말을 듣고 평정을 유지하진 못했겠지. 적어도 아까처럼 혐오의 빛만을 띠진 않았을 것이다.
성필이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치, 그럴 리가 없지…….”
전생의 조아라가 성필을 사랑했던 것.
그건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12살이란 차이마저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조아라는 성필에게 취향저격 당해버렸다.
그런 기적이 다시 벌어질 리 없다.
성필은 인정했다. 전생의 경험 때문에 자신의 매력을 과대평가해왔다.
장하양이 보이는 친밀함을 부모 자식 관계로 해석해왔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전에 프라이빗 리조트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던가, 그런 명확하게만 보였던 사인들…….
‘으음, 그래, 친애였구나.’
아니, 장하양이 표현하길 경애라고 했었지.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성필은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꽤 오래도록 창피함을 죽여야만 했다.
창피함이 가시고 나선, 내일부터 장하양의 얼굴을 어찌 봐야 하나 고민했다. 내일부터, 장하양은 이전처럼 성필에게 친절하진 않을 테니.
* * *
토모에는 아침 일찍 작업실로 들어왔다.
불을 켰다.
“꺄아아아악!”
토모에가 비명을 질렀다.
장하양이 퀭한 표정으로 시체처럼 소파에 걸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오, 온니 살아 있어요?!”
“……어.”
목소리도 죽은 사람 같았다.
지금이라면 ‘리빙 데드의 밤’ 같은 영화에 즉시 출연할 수 있을 듯했다. 그만큼 그녀의 얼굴과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어제 작업 끝내고 안 가셨던 거예요? 쭉 회사에 있었어요?”
“어…….”
“어, 그, 그럼 오, 오늘 작업할 수 있는 거 맞아요?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장하양은 눈을 끔뻑이면서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베이스 기타를 들었다.
“나 지금 작업 안 하면…….”
장하양이 두 눈을 꼭 감았다.
건조했던 안구가 눈꺼풀을 만나자 눈물을 뿜어냈다.
“미칠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