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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71화 (571/760)

571화

장하양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기타 줄을 튕겼다. 유려한 손놀림에 비해 눈동자는 넋이 나간 듯 탁하기만 했다.

‘이사님은 지금 뭐 하고 계실까…….’

어제 장하양은 가진 지혜를 모두 동원하여 성필의 덫을 탈출했었다.

성필이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으나, 만약 그때 장하양의 연심이 발각되었다면 이보다 더 심각한 꼴이 되었으리라.

이보다 더 심각한 꼴…….

‘지금보다 더 심한 꼴이란 게 있을까?’

성필에게 아침 인사도 못 했다.

문자나 톡을 보낼 용기조차 없다.

그가 오늘 올지 안 올지도 모른다.

그의 심중을 짐작할 수 없다.

마치 장님이 된 것 같다.

그때 어제의 성필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나는 세이코 씨가 좋아.’

그의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손에 든 기타를 바닥에 내리치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주변에 보이는 건 뭐든 부수고 싶다.

그렇지만 하지 않았다.

장하양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이사님과 나누었던 약속.’

성필은 장하양에게 약속했었다. 그녀가 최고의 아이돌이 되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노라고.

그건 장하양이 오래도록 간직해온 맹세였다.

그녀는 맹세의 실현과 현시를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성필은 기억력이 그다지 안 좋다.

함께 놀이공원에 간다거나, 목마 태우고 회사를 한 바퀴 돌아주겠다는 약속을 죄다 잊어버렸던 게 성필이다.

하지만 이 약속만은 성필이 잊어버리게 두지 않을 것이다. 잊어버려선 안 된다.

장하양이 성필에게 빌 소원은 정해져 있다.

모세가 얻은 계명처럼 명확하고 명백하여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받아들여질지는 또 다른 문제다.

‘나는 최고의 아이돌이어야만 해.’

그게 성필이 꿈에 그리는 이상형이니까.

즉, 최고의 아이돌이란 장하양에게 궁극의 목표인 동시에 최종 목적에 다다를 수단이다.

최후의 날, 장하양은 그에게서 약속받은 승천의 맹세를 지니고 기름 부음 속에 축복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런데 최악의 상황이 두 개나 겹쳤다.

‘절대 있어선 안 될 상황이 두 개나…….’

성필이 장하양에게 실망하여 마음을 거두는 것. 그리고 성필이 부여할 승천의 맹세를 지닌 또 다른 인간의 존재.

성필이 그리는 완벽한 아이돌은 그룹과 팬, 회사를 위하여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다. 즉, 회사 중역에게 연심을 품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단 뜻이다.

대의를 도외시하고, 대의를 망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사욕을 탐하는 건 그가 혐오하는 일임이 틀림없다.

쉽게 말해서.

‘내가 이사님을 사랑한단 걸 들키면 안 돼.’

그래서 어제 그런 짓을 저질렀다.

성필의 의심이 가셨을지는 모르겠으나,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였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위험은, 최후의 날이 오기 전 성필이 다른 인간을 마음에 품는 것이다.

‘나는 세이코 씨가 좋아.’

그 말이 다시 뇌리를 울리자 장하양은 기타를 꽉 붙잡았다. 그것을 바닥에 내리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아냈다.

만약 성필이 마음에 둔 다른 인간이 생긴다면, 장하양이 그에게 요구할 소원은 의미를 잃게 된다.

‘이사님은 세이코를…….’

진실한 사랑의 의미로 좋아한단 걸까?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뇌에 똥만 찬 년을 왜?’

세이코, 세이코, 세이코…….

무려 4년 넘게 쌓아온 장하양의 계획이 바닥에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그 망할 년 때문에…….

“온니.”

토모에의 부름에 장하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

“그거, ‘어나더 원 바이츠 더 더스트’잖아요.”

“아.”

장하양은 토모에의 연주에 맞춰 즉흥으로 베이스 리프를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무의식에 너무 빠져 있던 탓인지, 자기도 모르게 원래 존재하는 곡의 리프를 연주해버렸다.

“나온 김에 연주해볼까요?”

토모에는 언제 장하양을 지적했냐는 듯 퀸의 ‘어나더 원 바이츠 더 더스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장하양은 기억하는 대로 그 곡의 베이스 리프를 연주했다.

이 곡은 심폐소생술 할 때 리듬을 맞추기 가장 좋은 곡 중 하나라고 한다.

미국 어느 협회에서 선정했다던데, 연주하다 보니 거칠게 뛰었던 심장박동이 평상시 때처럼 돌아가는 듯했다.

“온니, 고민 있으세요?”

“……아니.”

“있으시잖아요.”

장하양은 연주를 그만두고 토모에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미안, 집중이 잘 안 되네. 나 방해되지?”

“방해라고 해야 할까…… 그렇네요.”

토모에가 선뜻 인정하자 장하양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긴, 소녀연맹 안의 또 다른 그룹인 ‘브레멘 음악대’ 때문에 록을 많이 연주해보긴 했다. 하지만 겨우 그런 경험으로 진짜배기 록 뮤지션과 작업이 가능할 리 없다.

토모에는 팬심으로 장하양과의 작업을 이어가는 것일 뿐이겠지.

“사실, 온니 앞이라서 좀 자제하고 있어서요.”

“자제?”

“이런 기회 또 없을 테니까, 본격적으로 해봐요. 저도 여기에만 있으려니까 머리가 안 돌아가네요.”

토모에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장하양이 당황했다.

“어디 가?”

“제 진짜 작업실이요.”

“어디?”

“제집이요. 와주실래요?”

“뭐야.”

장하양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나 유혹하는 거야?”

“맞다면요?”

토모에의 눈가가 기분 좋게 휘었다.

“…….”

그걸 보고 장하양은 하나의 의문을 품었다.

‘나 혹시 여자한테 인기 많은 스타일인가……?’

진소유가 떠오른다.

* * *

백설하의 목소리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설하야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성필은 난색을 표했다.

그는 올해 최대의 위기(올해 시작된지 1주일도 안 됐음)를 맞은 참이었다.

그래서 가장 의지가 되는 소녀연맹 멤버이자 리더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연락했다. 그런데 그 멤버이자 리더가 기분이 안 좋은 듯했다.

‘이건 내가 상담을 요청할 게 아니라, 설하의 고민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닐까?’

[아무 일도 없어요.]

하지만 백설하는 워낙 완강하게 기분이 안 좋단 사실을 부정했다. 그래서 성필은 일단 자신의 용건을 먼저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성필은 어제 장하양과 있던 사건을 이야기했다.

장하양이 세이코와 성필의 관계를 안 좋게 보아 그만 끊어내라고 했던 것을, 성필이 단호하게 거부했었다고 말이다.

“하양이가 화가 많이 나선…….”

물론 그때의 장하양을 단순히 ‘화가 많이 났다’로 표현할 수 없긴 했다.

장하양은 성필을 혐오하는 듯 보였다.

그 눈빛을 본 성필은 적잖이 상처받았다.

옛날 장하양이 보이는 라디오에 나가 성필이 자신의 이상형이 아님을 극렬히 부정했던 때보다 더 상처받았다.

“……가버렸어.”

[으음.]

“그, 난 너희들이 세이코 씨를 싫어하는 걸 알긴 아는데. 솔직히 그렇게 공감할 수가 없거든…….”

성필은 오히려 당황스럽다.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고 한 몸 바쳤다. 그 결과 다쳐서 병원 신세를 지냈다. 구해진 사람은 성필에게 감사하고, 성필도 그 사람이 살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성필의 가장 소중한 동료들이 그를 욕하고 구해진 사람을 싫어하는 것.

성필이 체감하는 세이코 사건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냥 ‘대단하다’라고 생각하고 끝…… 그런 이야기 아니야? 아니 물론 내가 뛰어내렸을 때 너희들이 많이 슬펐을 건 알지. 근데 결국은 잘 끝냈으니까…….”

[이사님.]

“응?”

[아름이가 윤상열 프로듀서를 구하려고 빌딩에서 뛰어내려서 병원 신세를 한두 달 지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그 이후에 둘이 친해졌으면요?]

윤상열을 죽인다. 그 생각뿐이다.

적어도 윤상열이 신아름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이사님이 못마땅해서 아름이한테 둘이 안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아름이가 ‘저는 윤상열 프로듀서님이 좋아요’라고 하면요?]

성필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이야기만 들었을 뿐인데 당장 벽에 머리를 처박고 정신을 잃고 싶었다.

[세이코 선배님을 윤상열 프로듀서랑 동일선상에 둘 순 없겠지만, 이사님이 공감할 만한 비유가 이 정도인 거 같아서요. 대충 느낌이 오세요?]

너무 잘 와서 문제다.

성필은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의 생생한 상상력은 해맑게 데이트하는 신아름과 윤상열의 이미지까지 도달했다.

“어…….”

성필이 겨우 답했다.

“느, 느낌이, 오네…….”

[……이사님, 그런데 있잖아요. 이사님이 하양이한테 세이코 선배님이 좋다고 했던 건 충격요법이었을까요?]

“충격요법?”

[그게, 저희가 느끼는 게 어떻든 이사님 입장에서 인간관계가 간섭받는 건 기분이 안 좋을 테니…….]

세이코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건, 장하양의 간섭을 떨쳐내려고 꺼낸 충격요법이었나? 백설하의 물음은 그런 뜻이었다.

“그런…… 느낌도 있지.”

단순히 장하양의 간섭이 불쾌했을 뿐이라면 ‘그만해’라고 단호히 답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성필이 굳이 세이코에 대한 감정을 표현했던 건, 물론 장하양의 간섭 때문이었지만 또 다른 저의가 있긴 했다.

[좋아한다는 건 사랑은 아니고요?]

“그게 중요해?”

[중요해요. 이사님의 한마디로 제 상담의 방향이 전부 바뀔 수도 있어요.]

“……모르겠어. 세이코 씨랑 있을 때 연인이 된 상상을 해보거나, 동거하는 걸 떠올려보기도 했는데. 막 두근거리기보다는 이것도 괜찮겠다 싶은 느낌이었고. 또 결혼하면 아무래도 국적과 문화가 다르다 보니 갈등이 있을…….”

[아주 그냥 상상으로 볼 장 다 보셨네요?!]

“아니, 설하야 내 나이엔 이게 당연해. 난 이 시기에 연애한 사람이랑 결혼할 확률이 엄청 높단 말야. 눈 마주쳤다고 노후까지 상상하는 순진한 청년이랑은 상황이 다르지…….”

[아무튼 사랑은 아닌 거죠?]

“사랑의 의미가 여러 갈래…….”

[세이코 선배님이랑 아침에 한 침대에서 눈 뜨고 싶으세요?]

“너 질문이 너무 거칠다?!”

[이사님이 명확하게 말씀을 안 하시잖아요!]

백설하는 기분이 안 좋은 게 확실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화난 어투를 들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내 마음속엔 너희들이 제일 크단 말야…….”

[…….]

“세이코 씨의 고백을 거절했던 것도 너희들 때문이고. 사실상 난 너희들 팬으로서 너희랑 유사 연애 중인 거나 마찬가지인…….”

[그래서, 아니다?]

“……응.”

백설하가 계속 취조하듯이 물어서, 성필은 겨우 답을 낼 수 있었다.

세이코 앞에서 했던 ‘5년 연애 안 함’ 선언 때 가졌던 마음가짐을 다시 떠올렸다.

사랑이 전심(全心)을 다하는 것이라면, 성필은 소녀연맹을 사랑하고 있다. 그 안에 다른 사랑이 자리할 공간은 없다.

성필이 세이코의 마음을 거절하느라 품은 슬픔은 다른 일이라 치고 말이다.

“지금 난 너희밖에 없으니까.”

[그럼 됐어요.]

“……그래, 뭐, 대답했는데, 이게 어떤 의미에서 중요해?”

[그냥 여쭤봤던 거예요.]

“설하야 너 점점 능글맞아지네.”

[26살이니까요…….]

평범한 인생 루트를 밟았으면 직장인 3년 차인 시기다.

[아무튼 하양이는 상심이 클 거예요.]

“날 싫어하게 됐을까?”

[하양이가 이사님을 어떻게 싫어해요. 이사님이 ‘인도(人道)에 반(反)한 죄(제노사이드 등의 반인류 범죄. 이 죄를 저지른 인간이나 집단에 대해선 내정불간섭 원칙이 무효화되고 무력 침공이 국제법상 정당화된다)’라도 저지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죠.]

“그럼?”

[이사님이 잘하시는 걸 해야죠. 대화요.]

“방향성은?”

[글쎄요. 이사님은 세이코 선배님도 하양이도 놓기 싫어하니까, 서로가 서로의 상황을 모르게 할 수밖에 없겠네요.]

“각자한테 다른 말을 하란 거야?”

[네, 양다리요.]

백설하는 연애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이럴 때 드는 예시도 연애에 관한 것이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돼요.]

“들키면?”

[하양이가 이사님을 더 싫어하게 되겠죠.]

“왜 그렇게 쉽게 말해…….”

[아니면 이사님이 저희를 가장 사랑하신단 말마따나, 세이코 선배님과 거리를 두는 수밖에요.]

“…….”

성필은 고민에 들어갔다.

그는 이번 세이코와의 데이트에서 그녀의 약혼 요청을 물리쳤다.

세이코가 정상적인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성필에게 마음이 떠났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몇 개월 후면 마음이 식겠지.

어차피 성필은 세이코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장하양이 표현하길, 성필은 연애 금지란 맹약을 스스로 걸었으니까.

‘그래, 난 내 꿈을 위해 모든 걸 포기했어. 소녀연맹의 승리만을 바라보면서…….’

온갖 자질구레한 감정의 실타래가 풀어진다. 그 끝에 남은 건 명확한 꿈의 비전뿐이었다.

상상만 해도 성필을 전율케 하는 찬란한 꿈.

복잡했던 머리가 깨끗해졌다.

“고마워 설하야. 내가 잘해볼게.”

[네.]

“그래서 기분은 왜 안 좋았던 거야?”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내 상담 들어줬으니까 나도 해줄게.”

[……괜찮아요. 일 잘 끝내고 빨리 돌아오세요.]

드물게도 백설하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긴 한가 보다.

* * *

홍백가합전을 마치고 일본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백설하는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와 밴에 탔다. 급하게 잡힌 스케줄이 있다고 한다.

“어? 웬일로 경섭 오빠가 운전하시네요.”

백설하는 밴에 타자마자 놀랐다.

매니지먼트 팀장으로서 사령탑의 역할을 하던 민경섭이 직접 운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꽤 큰 건인 듯했다.

‘돌아오자마자 또…….’

백설하는 기분이 좋았다.

홍백가합전 무대에서 느꼈던 전율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었다.

오늘 눈을 뜰 때도 평소처럼 멍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가 시작된 게 기뻤으며, 일어난 즉시 침대에서 뛰쳐나와 환호성을 질렀었다.

올해엔 모든 게 잘 풀릴 듯한 느낌이 강하게 왔다.

“응.”

들뜬 백설하와는 다르게 민경섭은 담담히 운전을 시작했다.

조수석의 백설하는 사탕을 까서 민경섭에게 주었다. 민경섭은 ‘고맙다’는 짧은 인사를 전하곤 다시 운전에만 집중했다.

백설하는 뻘쭘했다.

“저 오늘 어떤 스케줄이에요?”

“……아.”

“네?”

“‘아오아’.”

“……‘아오아’요?”

아이튜브 채널 ‘더 스튜디오’의 콘텐츠인 ‘아티스트 오브 아티스트’를 말하는 건가?

세 명의 아이돌 댄서들이 경합을 펼치는.

조아라가 케이어스의 진저, 글로브의 지유와 맞섰던 그거?

“제가요?!”

백설하가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에 절박한 빛이 맺혔다.

“그, 그거 메인 댄서들이 나오고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거기 나간다구요? 제, 제가 왜요?!”

전후 사정을 모르지만 억울했다.

그도 그럴 게, 백설하는 메인 댄서가 아니라 메인 보컬이다. 보컬 경연 프로그램이라면 얼마든지 나가도 되지만 ‘아오아’라니?

아이돌의 필수 능력 중 하나인 댄스 스킬이 가장 적나라하게 평가받는 자리 아닌가.

당장 이전 ‘아오아’만 해도 진저와 지유, 조아라가 혼신의 무대를 펼치지 않았는가. 박수갈채가 아깝지 않은 무대들이었다.

백설하는 조아라를 떠올렸다. 그곳에 가면 조아라 같은 아이돌 댄서들이 백설하를 반겨줄 것이다. 그리고 백설하는 그들의 먹잇감이 되겠지.

“어쩔 수 없어. 정해진 거야.”

“저, 정해졌다뇨! 누구 마음대로요!”

“성필이 형이 정했어.”

“……으에?”

민경섭이 스케줄의 속사정을 들려주었다.

조아라가 ‘아오아’에서 촬영 한 번을 더 하는 조건으로, 성필이 소녀연맹의 리더이자 귀여움 천재 백설하의 출연을 걸었다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아오아’ 제작진이 요구하기도 전에 성필이 먼저 백설하의 출연을 요청했단 사실이었다.

당연히 ‘아오아’ 제작진은 귀여움 천재의 출연을 쌍수 벌리고 환영했다.

그 결과가 이거다.

백설하는 곧바로 반발했다.

“아, 아라가 출연할 때는 할 거냐고 물어봤잖아요! 그런데 저는 묻지도 않고 이렇게……!”

“설하야.”

민경섭은 차를 멈춰 세우곤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그는 마치 한국 느와르 영화에 나오는 조폭 같은 분위기였다. 위압감마저 느껴진다.

“너 팔린 거야.”

“…….”

백설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민경섭이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괜찮아.’

백설하는 속으로 억울함을 억눌렀다.

‘소중한 동생을 위해 팔린 거고…….’

소중한 동생, 조아라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가 해맑게 달려오며 ‘쌤!’이라고 부르는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이런 역할은 익숙하니까…….’

백설하, ‘아오아’ 출연 확정!

* * *

성필은 백설하와의 통화를 마친 후, 장하양이 토모에와 있을 작업실로 향했다.

웨벡스 내에는 뮤지션들을 위한 작업 공간들이 여러 곳 구비되어 있다. 토모에는 견습 뮤지션임에도 미사토의 총애 덕분에 작업실을 쓸 수 있었다.

“하양아.”

작업실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성필은 문 옆에 붙은 예약표를 보았다. 분명 토모에가 이 시간에 사용한다고 되어 있는데, 없었다.

‘……나 때문에?’

성필은 거의 절망했다.

장하양은 성필이 이곳에 올 거란 사실을 예상했을 것이다. 못 할 리가 없다. 성필이 일본에 남아 있는 이유는 장하양 때문이니까.

그걸 안 장하양은 토모에와 함께 자리를 옮긴 것이다. 혹여라도 성필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

성필은 폰을 꺼냈다. 그리고 장하양에게 톡을 보내려 했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전송 버튼 앞에서 멈추었다.

“……하하.”

성필이 슬픈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거의 쓰러지듯이 소파에 몸을 뉘였다.

‘이런 느낌이구나.’

소녀연맹 멤버에게, 자신의 꿈에게 미움받는단 건 이름 느낌이구나.

마주치는 것조차 싫을 만큼, 성필은 장하양에게 꺼려지고 있다. 그리 생각하니 몸에서 힘이란 힘은 전부 빠져나갔다.

“…….”

성필은 다시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그리고 이전에 받아두었던 토모에의 연락처를 찾았다.

장하양은 성필을 만나길 꺼린다.

하지만 토모에와는 같이 있을 것이다.

지금, 성필은 굉장히 질척한 짓을 하려고 한다.

‘하양이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

토모에를 보러 가는 거다.

토모에의 작업을 도와주는 것뿐이다.

그녀가 옛날에 성필에게 도와달라고 했으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지금 장하양을 만나고 싶다. 그녀에게 미움받는 채론 1분도 더 살 수 없어.

* * *

“아쉽네요.”

토모에의 집으로 가는 중, 그녀가 말했다.

장하양이 물었다.

“뭐가?”

“이사님한테 지도 못 받는단 거요. 대단한 프로듀서잖아요?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지도 몰라요.”

장하양의 머리가 번쩍였다.

‘이사님은 지금 나를 보고 싶지 않으셔.’

그럼, 토모에는?

‘나는 안 보고 싶으시지만, 토모에를 도와주러는 오시지 않을까?’

장하양은 폰을 열었다.

아직까지 성필에게 연락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여러 번 연락을 주고받았을 텐데. 그게 아니더라도 간단한 안부 하나쯤은 왔을 텐데.

텅 빈 성필과의 메신저 창을 보자 장하양은 우울해졌다. 그녀 안의 갈망이 더욱 거세졌다.

“토모에, 그럼 이사님 부를까?”

“에? 괜찮은 거예요?! 그럼 저야 완전 좋죠!”

장하양은 떨리는 손으로 성필의 연락처를 찾았다. 지금 그의 심정이 어떻든, 장하양은 그를 보고 싶었다.

그와의 사이가 암흑 속에 빠진 상태론, 단 1초도 숨을 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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