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화
“근데, 밥부터 먹고요.”
당장이라도 성필에게 연락하려던 장하양.
그녀는 토모에의 제안에 멈칫했다.
배가 고파서는 아니었다.
순수하게 성필에게 먼저 연락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에게 연락해야 하긴 하지만, 그 순간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응, 밥, 알겠어.”
토모에가 사는 곳은 허름한 연립주택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개방된 계단은 층계를 밟을 때마다 기분 나쁜 삐걱 소리를 냈다.
2층 복도 끝이 토모에의 집이었다.
그녀는 열쇠로 문을 열었다.
현관에서 거실이 훤히 보이는 구조였다. 거실 창문으로는 이 연립주택과 다를 바 없이 허름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웨벡스가 있던 도쿄 중심가와 비교하면, 이곳이 도쿄란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노후했다.
“여기 꽤 비싸요.”
장하양의 시선을 읽은 건지 토모에가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응, 알아. 한국도 비슷해.”
서울에서 이런 종류의 집을 월세로라도 구하기 위해선 수천만 원이 필요할 것이다.
도쿄의 사정도 서울과 다르진 않으리라. 토모에의 말대로 이 집은 굉장히 비쌀 게 분명하다.
한국 수도권 인구가 2,000만이라고 하던가.
일본 수도권, 즉 도쿄권역이라고 부를 만한 영역 인구는 5,000만이다.
도쿄의 살인적인 집세를 버티지 못하고 주변으로 흩어진 인구가 5,000만이란 것이다.
“실례할게.”
장하양은 신발을 벗고 방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
집 전체에 담배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그러나 장하양은 내색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담배 냄새 정도야, 옛날에 성필 덕분에 익숙해졌으니까.
가면서 열린 문 쪽을 보니 화장실 겸용 세면실이 보였다.
이쪽도 꽤 옛날식이다.
본격적인 거실 겸 침실로 들어가니, 이젠 토모에의 방이란 게 실감이 났다.
벽엔 온갖 뮤지션들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그중엔 소녀연맹의 비중이 꽤 높았다.
소녀연맹과 비교할 만한 비중의 포스터라면…….
“이 사람은 아이돌이야?”
스모키한 눈화장에 폭발할 것 같은 붉은 머리, 전신에 붉은 가죽옷을 입고 화려한 기타를 든 남자였다.
“아이돌이요?”
토모에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픽 웃었다. ‘이 사람을 몰라?’란 기색이었다.
토모에는 뮤지션에 관한 이야기를 하길 좋아했다. 그녀 덕에 장하양은 몇몇 뮤지션의 비화를 알게 되기도 했었다.
토모에가 이 남자를 설명하기 직전, 장하양의 눈은 포스터 아래쪽으로 향했다. ‘X’란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아, ‘엑스’구나.”
토모에가 놀란 티를 냈다.
“엑스라고 불러주시네요. 보통 ‘엑스 재팬’이라고 많이들 부르던데요.”
“이 사람은 ‘히데’야?”
“와, 이름까지! 소녀연맹 채널에 올라오는 밴드 커버들이 그냥 올라오는 게 아니었네요!”
벽엔 ‘엑스’의 포스터들이 많았다.
하지만 가장 많은 건 ‘히데’의 개인 포스터였다. 여기저기 붙은 포스터 속 히데는 시대를 거스른 아우라를 풍겼다.
“히데 좋아해?”
“좋아하죠. 소녀연맹이 응원하는 우상이라면, 히데는 되고 싶은 우상? 멋지잖아요.”
“잘생겼네.”
“잘생긴 게 다가 아니에요! 아니 물론 비주얼이 큰 역할을 하긴 하지만요.”
히데는 일본에서 비주얼 록의 창시자란 말까지 듣는 뮤지션이다. 개중엔 비주얼 록은 히데와 함께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끝났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솔로로 활동했을 시절의 비주얼은 현대인이 보아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
비주얼 록의 신화이자 최고의 팝 엔터테이너.
“항구에서 태어난 소년, 신화가 되다…….”
토모에가 황홀한 듯 그리 읊조렸다.
제이팝이 글로벌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던 최후의 황금기. 히데는 그 시기를 장식했던 뮤지션이다.
장하양은 성필의 음악사 시간에 그의 이야기를 짧게나마 들었다.
아마 과장이겠지만, 그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제이팝은 지금과 전혀 다른 형태였을 거라고 한다.
“부끄럽고 기쁘네.”
“부끄러워요? 뭐가요?”
“이런 분이랑 같은 높이에 붙어 있다는 게.”
토모에는 히데의 포스터 옆에 붙은 장하양의 개인 포스터를 보았다.
둘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본 토모에가 활기차게 웃었다.
“제 마음속에선 같은 위치니까요.”
“우릴 왜 좋아하게 됐어?”
“별거 아니에요. 다른 뮤지션들이랑 비슷하죠. 지나가다가 봤다, 들었다, 그리고 좋아하게 됐다. 우연히 무대 영상을 봤어요. 정말 열심히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응원하고 싶어졌어요. 특히 그거!”
토모에는 어느새 환복을 마치곤 기타를 조율하는 중이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미쳤죠. 공감이 갔어요. 위로도 많이 받고, 응원도 많이 하고, 그러다 인민이까지 되고. 인민이들 사이에 그런 말 있잖아요. 아실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우리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소련을 만나고 인민이 된다’란 거요.”
토모에는 ‘소련’을 한국어로 발음했고 ‘인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녀가 한 말은 굉장히 정치적으로 들렸다.
“언니가 들으면 좋아하시겠다.”
백설하는 안 그래도 팬들의 응원 메시지를 보면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이다.
면전에서 토모에의 상찬을 들었다면 거의 오열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노래를 듣고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다고 하니, 울지 않곤 못 배기겠지.
“뭐 드실래요?”
토모에가 폰을 내밀었다.
“배달이야?”
“아, 맞다. 온니는 아이돌이지. 식단 관리해야겠네요. 그럼 샐러드로?”
둘은 주문을 마치곤 각자 자리를 잡았다.
토모에는 장하양에게 소파 자리를 양보하고 본인은 오래된 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럼 이사님 불러주실래요?”
토모에가 그리 말하자 장하양은 곧바로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맞다, 그래야지.
성필에게 연락해야 한다.
“……저기.”
“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있잖아, 왜 무릎 꿇고 있던 거야?”
장하양은 여기까지 왔음에도 성필과 만나는 시간을 미루고 싶어 했다. 그를 보고 싶은 동시에, 그가 어떤 상태일지 몰라 연락하기 두려웠다.
“아, 그거요?”
토모에는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 듯 술술 이야기했다. 악마와 계약했다던 로버트 존슨의 으스스한 전설을 말이다.
장하양은 살짝 당황했다.
“악마한테 영혼을 팔아? 그럴 작정이었다고?”
“네.”
“진짜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진짜 나오면 어떡하게?”
“그럼 좋은 거죠! 완전 좋은 거죠!”
“아니…… 빨리 죽잖아?”
“그럼 더 더 더 좋죠!”
장하양은 아연했다.
토모에의 눈동자엔 거짓이 없었다.
“그냥저냥 살다가 적당히 생을 마감하는 건 최악이에요. 전설이 돼서 화려하게 가는 쪽이 훨씬 좋죠. 평범한 삶은 시시해요.”
토모에는 벽을 빼곡히 채운 포스터를 쭉 훑어보았다.
로버트 존슨, 지미 헨드릭스, 커트 코베인, 히데.
그녀의 방을 메우고 있는 건 대부분이 요절한 전설들이었다. 이른 죽음이 그들의 이름에 신화와 전설을 덧씌우고 있었다.
물론 아닌 이들의 포스터도 있었다.
하지만 죽음으로 전설이 된 이들 속, 소녀연맹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당연히 저도 이사님이 악마가 아니란 사실쯤은 알지만, 우연이란 건 없다잖아요. 하필 그때 이사님이 나타나고, 제 기타를 들어서, 현을 조율했어요. 뭔가 의미가 있다구요. 저는 그 의미를 믿어요. 없으면 찾아서라도 갖고 싶어요. 아, 나중에 제가 죽고 평전이 나오면 온니가 말씀 좀 해주세요. 저는 그날 악마를 만났다구요.”
장하양은 이제 할 말이 없었다.
죽음을 갈망하는 뮤지션 같은 건 오래된 음악 역사책에서만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인생에 ‘세상에서 가장 긴 자살’이라는 이름이 붙은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나, 항상 약에 취하여 트럼펫을 불었다던 찰리 파커.
그런 삶을 갈망하는 인간이 지금 장하양 눈앞에 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적대적인 정치인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래 살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은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타락, 영락하지 않는 인간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즉 토모에가 바라는 죽음이란, 추해지기 전에 사라지고 싶단 뜻일 터다.
가장 빛나는 순간만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길…….
“음.”
토모에는 테이블에서 담배를 집어 들곤 기타 거치대가 줄줄이 세워진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며 쇼핑하듯 몇 종류의 기타를 눈으로 훑었다.
웨벡스 작업실에서 집중이 안 된다고 말했던 건, 아마 그녀가 지독한 애연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담배가 없어서 머리가 안 돌아간단 뜻이었겠지.
‘아.’
장하양은 다시금 위기감을 느꼈다.
토모에에게선 세이코와 비슷한 냄새가 난다. 절대 성필 곁에 붙게 해선 안 된다.
그런 생각이 지금 더 강해졌다.
토모에는 성필이 가장 바라는 미덕 중 하나를 지니고 있다.
‘예술을 위해 영혼을 태우는 거.’
토모에는 성필이 지닌 로망의 화신과 같은 존재다. 만약 성필이 토모에의 장광설을 듣게 된다면 어떤 화학 반응이 일어날지 모른다.
“아, 음, 내가 방금 문자로 연락해봤는데, 이사님은 바쁘시다네.”
“어쩔 수 없네요.”
토모에는 마음에 드는 기타를 하나 고르고 앰프와 연결했다.
“하지만 온니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온니는 악마님의 세례를 받은 아기 악마니까요. 온니의 영감을 동경해요. 그 영감을 저한테도 나눠주세요.”
토모에가 웃으면서 앰프 선을 장하양에게 넘겼다. 그 순간 토모에의 폰이 울렸다.
“에, 미사토 본부장님인가. 지금은 싫은데…… 아니 이사님이네?”
“어?!”
“이사님이 연락 오셨어요.”
토모에는 ‘어떻게 할까’란 뜻을 담아 장하양을 보았다.
장하양은 순간적인 판단이 안 됐다. 방금 ‘성필이 바쁘다’란 거짓말을 했는데 그에게서 곧장 연락이 온 것이다.
‘대체 난 어디까지 추해져야 하지?’
장하양은 상황이 점점 더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성필과의 관계, 성필과 세이코와의 관계, 성필의 감정, 토모에와의 만남, 뭐 하나 장하양의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정말, 아예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다.
잔꾀를 내는 것도 이젠 한계야. 그냥 옛날처럼 마음껏 성필에게 어리광 부리고만 싶어…….
“여기요.”
토모에가 폰을 내밀었다. 여전히 폰은 착신음을 요란하게 내뿜는 중이었다.
“온니가 받으세요. 아마 온니 찾으려는 거 같아요.”
장하양은 곧바로 구원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즉시 받지는 않았다.
“토모에, 실례가 안 된다면 다른 데서 받아도 괜찮을까?”
“밀애를 나누는 사이기라도 해요?”
토모에는 농담을 던지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양은 고맙단 인사와 함께 토모에의 집을 나섰다.
현관을 열자마자 보이는 난간에 팔을 걸치곤 심호흡했다.
자, 정리해보자.
‘이사님이 토모에를 만나선 안 돼.’
이건 결정 사항이다.
장하양은 성필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가 토모에를 만나면, 장하양 입장에선 매우 불행한 일이 벌어지리라 확신한다.
토모에와 몇 시간 함께 있다 보면, 성필은 거의 에리카 보듯 토모에를 보게 될 것이다.
리카에게 듣기로 에리카는 거의 아티스트십의 화신이었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회사가 믹스테입 발표를 막는단 이유로 도망갔던 인간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할 건…….’
장하양은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전화를 받았다.
[토모에 씨, 저 박성필 이사입니다.]
“이사님.”
[……하양아?]
그가 이름을 불러주자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장하양은 당장이라도 성필에게 어제의 일을 변명하고 싶었다. 아니, 변명이 아니라 화해함으로써 관계를 원상복구 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성필의 의중은 어떨까.
고작 전화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일단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한다.
[혹시…….]
“이사님, 왜 연락하셨어요?”
[……토모에 씨 작업 도와드릴까 해서.]
예상했던 답변이 돌아왔다.
장하양은 토모에에게 ‘성필이 바쁘다’는 거짓말을 했다.
장하양이 이 이상 추해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세이코의 냄새가 나는 토모에와 성필의 만남을 막기 위해서.
성필이 이곳에 와선 안 된다.
“도움은 필요 없어요. 작업은 막바지에 들어갔어요. 저희끼리 할 수 있어요.”
[아, 그래…….]
가슴이 더욱더 미어진다.
당장이라도 성필을 보고 싶다. 그의 상태가 어떤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그는 자신을 용서했을까?
말투가 그렇게나 날이 섰었는데…….
장하양은 결국 참지 못하고 어제 일을 주제로 올렸다.
“어제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신경 안 쓰니까요. 나중에 이야기해요.”
됐다.
오해를 사지 않도록 최대한 명확하고 중립적으로 이야기했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으니, 성필도 장하양이 그를 미워하지 않음을 알아챘으리라.
[……응.]
성필의 대답은 약간 느렸다.
장하양은 조금이라도 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으나, 이 통화는 되도록 빨리 끊어야 한다.
현대인에게 스마트폰은 신체 일부와 같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불안한 게 당연하다. 토모에가 언제 나와 장하양을 찾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안 오셔도 돼요.”
[내가 도와줄 거라든가…… 없어? 내가 일본에 있는 이유가, 그게, 네가 이번 시즌 프로듀서니까 내가…….]
“없어요. 그리고.”
토모에에게 한 거짓말이 들통나선 안 되니까.
“이 폰으로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일 있으면 저한테 해주세요.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있다고 해줬으면 좋겠다.
오늘 장하양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양가적일 수 있는지 배웠다.
그를 보고 싶은 동시에 보고 싶지 않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으면서도 듣기가 두렵고.
통화를 당장 끊어야 함에도 영원히 끊어지지 않길 바란다.
[아니.]
성필이 간결히 답했다.
장하양은 아쉬움을 억누르며,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는 중립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네. 어디서 쉬고 계세요.”
장하양은 통화를 끊고 다시 토모에의 집으로 들어갔다.
토모에는 창틀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그녀는 연기와 함께 멍하니 풍경을 흘려보내다가, 장하양의 소리가 들리자 빙긋 웃으면서 돌아보았.
“온니……?”
장하양은 부름에 답하지 않고 소파에 두었던 베이스 기타를 들었다.
“뭐,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아니.”
“아니면 화났어요……?”
장하양은 눈을 감고 자신의 감정을 되짚어보았다. 화가 났냐고? 났다. 난 게 확실했다.
‘세이코 그 망할 년 때문에 내가 대체, 왜 내가 이런 꼴을, 내가 어째서…….’
장하양이 베이스에 앰프를 연결했다.
그녀가 줄을 튕기자 사방이 무겁게 진동했다.
“시작하자.”
오늘이 지나기 전에 작업을 마무리하고 성필을 만나러 간다.
* * *
토모에가 전화를 받았다.
[이사님, 왜 연락하셨어요?]
그런데 들리는 목소리는 장하양의 것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난 이제 너랑 상관없는 인간이다’라고 선을 긋는 듯하여, 성필의 심장이 거세게 떨려왔다.
[도움은 필요 없어요. 작업은 막바지에 들어갔어요. 저희끼리 할 수 있어요.]
장하양은 성필의 제안을 칼처럼 끊어냈다.
[어제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신경 안 쓰니까요. 나중에 이야기해요.]
성필이 애매하게 망설이니, 장하양은 적선하듯 그리 말했다.
[그러니까 안 오셔도 돼요.]
이건 어떻게 더 파고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성필은 구질구질하게 매달려보았다.
도와줄 게 정말 없겠느냐고.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없어요.]
역시나 돌아오는 단답.
[그리고 이 폰으로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일 있으면 저한테 해주세요.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
성필은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답했다.
“아니.”
통화가 끝났다.
성필은 폰을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손에서 폰이 빠져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런데도 성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식물로 변한 것만 같았다.
사막에 홀로 선 성필은 신의 자비처럼 주어지는 한 방울의 비를 기다린다. 마른 목이 갈라지는 고통을 참으면서 기다려보지만, 하늘은 맑게 개어 비 한 방울 줄 생각조차 없었다.
“……일.”
성필은 몸을 돌려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일해야지…….”
극한의 고통 속에서, 성필은 도망을 택했다.
사랑하는 모든 게 있는 곳으로.
한국으로 돌아간다.
* * *
저녁이 되자 연립주택 주민들이 돌아왔다.
장하양과 토모에는 자리를 옮겼다.
토모에의 지인에게 합주실을 빌려 그곳에서 또 밤새도록 작업했다.
아침.
두꺼운 겨울의 어둠을 뚫고 빛이 거리를 푸른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토모에는 너무 오래 기타를 쳐서 손이 아팠다. 그런데도 손을 멈추지 못했다.
‘이게 마지막 연주.’
마지막 연주이자 최종 점검이다.
노트북과 연결된 스피커는 둘의 연주에 맞춰 드럼, 신시사이저 음을 내뿜었다. 연주자는 둘뿐이지만 밴드는 완벽히 갖추어져 있었다.
토모에는 장하양은 바라본다.
장하양도 토모에를 보았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2절 벌스 끝.
이후에 나오는 건 반복 후렴구가 아니다.
“내게 돌아와 줘―!”
토모에는 프리코러스를 그대로 내질렀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신들린 듯 기타를 연주했다. 요란하게 조율된 기타 이펙터는 그녀가 현을 튕길 때마다 귀가 아픈 소음을 내뱉는다.
하지만 그 소음 안엔 엄연히 멜로디가 존재했고, 그 멜로디는 야수가 울부짖는 것처럼 거칠었다.
후렴구가 들어왔어야 할 자리를 화려한 기타 솔로가 채운다.
현대 제이팝 메인스트림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파격성. 전형적인 성공 방정식, 대중음악의 송폼을 깨부순 토모에의 입꼬리가 희열로 뒤틀렸다.
“이거, 이거……!”
토모에는 브릿지 파트로 진입하면서 노래하는 대신 장하양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거의 무아지경이었다.
“이런 거 본부장님이 절대 허락 안 해줘요!”
현재 일본 음악계의 화두는 ‘솔로 연주’다.
옛날엔 다들 당연한 듯 넣었던 게 솔로 연주 파트다.
과연 연주가 없는 것보다 더 듣기 좋은가. 넣는 게 옳은가. 넣는 쪽이 곡의 생명력을 담보하는가.
이 화두에서 우세를 점하는 건 ‘솔로 연주는 빼는 게 낫다’ 쪽이다.
웨벡스도 뮤지션의 음반 작업에 관여할 때 연주 파트를 빼는 쪽이 낫다고 조언한다.
심지어 그 연주가 대중음악의 황금률을 일시적으로나마 파괴하는 위치에 들어간다면, 허락해줄 리 만무하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대중음악이란 익숙하지 않은 것을 피하는 작업이다.
“그래?”
장하양은 토모에의 말을 듣곤 픽 웃을 뿐이었다.
“허락이랑 별개로 넌?”
“꼭 이걸로 하고 싶어요!”
토모에는 연주를 멈추었다. 10시간 넘게 작업에 매달리느라 그녀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눈만은 밝게 빛났다.
“이걸로 데뷔 못 하면 음악 그만둬야 할 수준으로 좋아요! 아니, 이걸로 성공 못 하면 전 음악 접어야 해요!”
“그 정도로 좋아?”
“네!”
“다행이네.”
분노를 터뜨리는 듯한 사운드의 기타 솔로.
그리고 가사를 가득 덮은, 사랑인지 증오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은 장하양의 공이었다.
이게 마지막 연주였다. 최대한 완벽하게 연주한 후 끝내려 했는데, 토모에가 흥분해버려서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다시 할까?”
“아뇨, 이젠 진짜 녹다운하겠어요. 그리고 연주 안 해봐도 알아요.”
토모에가 의자에 앉아 늘어졌다.
“이걸로 끝이에요, 완성됐어요.”
토모에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겨우 빨아들였다. 그녀는 거의 20분마다 한 개비를 없앴다. 폐뿐 아니라 목도 시커멓게 변했을 게 틀림없다.
너무 자주 피워서 피워도 좋은 느낌 따윈 없을 것이다. 오히려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면 몰라도.
장하양도 토모에처럼 피로감이 역력했다.
“토모에.”
“네, 온니.”
“이걸로 성공 못 하면 음악 접는다고 했잖아. 진짜는 아니지?”
“진짜인데요?”
“어?”
토모에는 천장으로 향했던 눈을 장하양에게로 돌렸다.
“저는 이 곡이 좋아요. 너무너무 좋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곡을 싫어하면.”
토모에는 절반 이상 남은 장초를 그냥 재떨이에 비벼 꺼버렸다.
“저는 음악을 하면 안 돼요. 제 모든 영혼과 마음이 이 곡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걸 부정 받으면, 저는 아마 너무 슬퍼서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그러지 않기 위해 미사토로부터 100곡 작곡이란 과제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미사토에게 피드백 받는 건 대중적인 색채를 얻는 과정이었다.
대중성을 확보하여,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슬퍼서 죽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이젠 어찌 돼도 좋다.
“이 노래는 내 영혼이에요.”
영혼을 몸 바깥으로 꺼내는 데 성공했다. 이 순수함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무조건 이 순수함을 사람들에게 들이밀고 싶다. 그리고 인정받길 바란다.
장하양이 곤란하단 듯 토모에를 타일렀다.
“죽으면 어떡해. 전설이 돼야지.”
“아, 그르네요.”
토모에가 킥킥 웃었다.
“전설이 되기도 전에 죽으면 안 되는데. 아니다, 상관없나. 제가 죽은 후에 유명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게 의미가 있어?”
토모에의 눈꺼풀이 피로로 반쯤 감겼다.
“온니, 로버트 존슨은 살아 있을 때 안 유명했어요.”
“카네기 홀에서 콘서트 했다면서.”
“죽은 뒤에요.”
“어?”
로버트 존슨의 카네기 홀 콘서트.
수천 명의 사람들이 관객석에 들어찬다.
무대 위로 불이 켜진다.
그곳에 놓인 건 축음기였다.
로버트 존슨의 음반이 축음기에 놓인다. 바늘이 음반을 긁고, 죽은 자의 목소리와 기타 연주가 펼쳐진다.
음반 재생이 끝나고, 사람들은 기립 박수를 바친다.
죽은 후 그는 전설이 되었다. 블루스의 시초로서.
“상상만 해도 갈 거 같아…….”
토모에가 황홀하게 읊조렸다. 그녀는 옅은 황홀함을 담아 말했다.
“온니가 도와줘서 할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앨범 크레딧에 제 이름 바로 다음에 넣어드릴게요. 아니면 아예 곡 제목에 피처링을 넣을까요?”
“영광이지만, 괜찮아.”
“영광은 제가 더 영광이죠.”
장하양은 빈말을 하지 않았다.
토모에와 며칠간 작업하면서 깨달았다. 토모에는 장하양이 본 이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재능을 품고 있다.
토모에는 밴드 악기들의 속성을 꿰고 있다. 작곡하는 데도 망설임이 없다. 어떤 조화가 최선인지 본능적으로 아는 듯하다.
같이 작업해서 영광인 뮤지션이다.
오늘 일은 장하양에게도 큰 양분이 되었다.
동시에 의아하다. 어째서 그녀가 소녀연맹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장하양이 이유를 물었다.
“말씀드렸지 않나요? 우연히 봤다구요.”
“그런데 우리 노래는 네가 하는 장르랑 전혀 다른걸.”
“음악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물론 음악도 중요하지만, 저는 ‘열심히 한다’는 모습 자체에 반했으니까요.”
토모에는 그날을 회상했다.
“음악 프로그램에 소녀연맹이 나온 걸 봤어요. 케이팝 아이돌은 춤을 추잖아요? 그것도 굉장히 힘든 춤을? 그러니까 보여요.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보이는 거예요. 열심히 하는 사람은 보기만 해도 용기가 솟아요. 실은 그때 음악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했거든요. 그만둘까 생각도 했는데, 소녀연맹 덕분에 용기를 얻었어요.”
장하양은 생각했다.
그녀는 딱히 소녀연맹이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음악을 계속했을 것이다.
토모에는 소녀연맹에게서 꿈의 불꽃을 얻은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불꽃은 처음부터 그녀의 마음 안에 있었다.
소녀연맹은 장작일 뿐이었다.
“고마워요 온니.”
“……고맙긴.”
이것도 진심이었다.
장하양이 토모에의 곡, 가제(假題) ‘딥 퍼플 나이트’에 담은 감정과 가사는 성필에게서 따왔다.
이 곡은 상대를 향한 양가적인 감정이 줄기를 이룬다.
상대를 사랑하는지 원망하는지, 보고 싶은지 보기 싫은지조차 명확히 이야기할 수 없다.
장하양은 10시간 넘게 성필을 노래한 것이다. 그렇게 가사는, 감정은, 장하양의 의지는 10시간의 담금질 끝에 날카롭게 벼려졌다.
이젠 헤매지 않는다.
“내가 고마워, 토모에.”
성필을 만나러 가야겠다.
그런데 일단.
“토모에, 미안한데 네 집에서 좀 자도 될까?”
“역시 언니도 피곤하죠? 가요.”
일단 한숨 자고, 만나러 가야겠다.
* * *
잠에서 깨어나고, 씻고, 몸단장을 마친 장하양은 성필을 만나려 했다.
그런데 만날 수 없었다.
장하양을 반겨준 건 가로 엔터에서 온 매니저인 김수희였다.
“응? 벌써 돌아가려구? 더 할 일은 없어?”
장하양은 당황해서 물었다.
성필은 어디 갔냐고.
“아, 너 일 오래 걸릴 거 같다고 한국으로 먼저 오셨어. 네가 ‘우리들의 프로듀싱’ 다음 타자라도, 계속 이사님이 너한테만 붙어 있을 순 없잖아. 우리 쪽 앨범 일도 아니고. 암튼 그래서 내가 너 데리러 왔는데…… 예상이랑 완전 다르게 빨리 끝났네? 작업이 잘 풀렸나 봐?”
“…….”
장하양은 뜸 들인 후 물었다.
혹시 성필이 급히 한국으로 가야 할 일이 있었냐고. 분초를 다투는 일이라, 성필이 직접 가야만 하는 일이 있었느냐고.
“응? 몰라? 그런 게 있단 말은 못 들었는데.”
“…….”
장하양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나를…….’
성필이 장하양을 놔두고 한국으로 먼저 갔다. 그리고 대타를 보내왔다.
‘나를 얼마나…….’
성필은 당연히 웨벡스에 있을 줄 알았다. 그가 끝까지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기다리는 건 확정된 명제였다.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4년간 함께 지내 온 성필이라면, 절대 장하양을 두고 먼저 갈 리 없다.
가더라도 직접 연락해주어야만 했다.
사무적으로 변동사항을 전하고 부하 직원을 대타로 보내는 게 아니라, 친근하게 개인 연락처로 연락했어야만 해서 사정을 설명했어야만…….
성필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데…….
‘나를 얼마나, 미워하게 되셨으면……?’
장하양은 성필을 향해 던져댔던, 혐오가 짙게 묻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성필이 좋아한다고 했던 세이코를 신랄하게 깎아내리고, 그녀를 좋아하는 성필마저 이상인 인간으로 만들었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건 폭언이었다.
하물며 자기네 집 개를 욕해도 발끈하는 게 인간인데, 장하양은 그가 좋아하는 인간을 욕했다. 덩달아 그녀를 좋아하는 그까지 싸잡아서 욕했다.
“하양아?!”
김수희가 기절하여 쓰러진 장하양을 받아냈다. 김수희는 당황하다가 겨우 외쳤다.
“다스케테에(도와줘어)―!”
* * *
‘아오아’ 사전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백설하는 기분이 좋았다. 함께 겨룰 면면을 확인하고 나니 용기가 솟았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 ‘아오아’ 무대를 종횡무진 누리는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나, 좀 강한 편일지도?’
그래.
이건 새해 선물이다.
바로 얼마 전이었던 소녀연맹 팬미팅 콘서트의 끝에서, 백설하는 인민이들에게 약속했었다.
내년은 올해보다 더 엄청난 한 해가 되리라고.
인민이들이 소련을 사랑해주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선물을 선사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아오아에서 우승하는 거야.’
그 우승은 인민이들에게 줄 새해 선물…….
‘아오아’ 공개 시점을 따지자면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선물이 되겠지만. 아무튼 지금 시점으로 보면 새해 선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소녀연맹이 올해 쌓을 거대한 업적의 시작이 되겠지.
백설하는 기분 좋게 웃었다.
벌써부터 자신을 찬양하고 칭찬하는 회사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때 백설하의 폰이 밝은 빛을 뿜어냈다. 톡이 왔다.
‘……이사님이네.’
‘아오아’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것과는 별개로, 그가 자신을 마음대로 팔았단 건 좀 억울했다.
오늘 성필이 ‘왜 기분 안 좋아?’라고 물었던가? 자기가 팔았으면서 눈치 좀 채지…….
백설하는 살짝 새침해져선 톡을 확인했다.
[설하야 도와줘….]
그의 연락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백설하를 당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