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화
“누구를 보낼까.”
성필은 민경섭과 논의에 들어갔다.
케이팝 댄스 커버 대회에 멤버 중 누구를 심사위원으로 보낼지 정해야 했다.
다섯 명을 전부 보낼 순 없다.
일차적으로 스케줄이 있는 멤버가 있으니까.
“아라는 잡지 필름 화보 촬영이 있고, 설하는 ‘아오아’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고…….”
“맞다, 설하는 어때?”
“어떠냐뇨?”
“부담감이라든가 있잖아.”
민경섭이 ‘형이 그런 말을 해요?’란 뜻을 담아 헛웃음을 뱉었다.
“설하 팔아놓고서 이제 걱정하시는 거예요?”
“야, 팔다니 말이 너무 심하다. 난 설하가 나에게 넘긴 권리와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한 건데.”
백설하가 성필에게 넘긴 권리와 의무란, 계약서상의 매니지먼트 권한을 뜻한다.
가로 엔터의 매니지먼트 관리권자는 최종적으로는 홍규헌이고, 그 아래로 성필과 손혜빈, 그리고 민경섭이다.
백설하는 이들의 허가 없이 연예인으로서 활동할 수 없다. 역으로 그들은 백설하가 성공할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매니지먼트해야 한다.
성필은 백설하를 ‘아오아’에 내보낸 게 ‘성심성의껏 매니지먼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라 촬영 1회권이란 교환한 거잖아요.”
“너 은근히 나한테 날 세우네.”
어쩔 수 없다.
민경섭은 그날 백설하를 팔아넘기면서 죄책감을 느꼈다.
조수석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흐느낌을 삼키던 백설하.
아무리 냉혹한 매니저인 민경섭일지라도 그런 모습을 보고 평정을 유지할 순 없었더랬다.
“뭐, 좋은 기회긴 하죠.”
바로 직전 ‘아오아’는 역대급 성공을 거두었다.
글로브의 지유, 케이어스의 진저, 소녀연맹의 조아라가 맞붙었던 3파전은 여러모로 화제가 됐다.
그 세 영상이 시너지를 일으켜 조회 수 신기록을 전부 갈아치울 정도였다.
그녀들 이후의 ‘아오아’도 기대를 모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전보다 화제성이 높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곳에 백설하가 출연한 것이다.
소녀연맹의 활동기가 끝나 아쉬워하는 인민이들에겐 달콤한 선물이었고, 돌판 팬들에겐 군침을 흘릴 떡밥이었다.
“의외로 설하가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해요.”
“그래? 구체적으로는 어떤데?”
“‘더 언노운 싱어’ 때 설하 같다고 하면 느낌 와요?”
“확 오네.”
그때의 백설하는 어딘가 이상했었다.
왠지 나른한 눈빛으로 자주 ‘패배를 알고 싶다’란 말을 하곤 했었으니까.
스승을 꺾었단 성취감이 그녀를 오만함의 늪으로 이끌었다. 오만하다곤 해도, 귀엽게만 보였었다.
“다행이네.”
민경섭은 다음 멤버의 스케줄을 읊었다.
“아름이는 ‘뭐든지 가능한 아름이’ 촬영 있어요.”
소녀연맹 자체 예능 시리즈 중 하나인 ‘뭐든지 가능한 아름이’는 아직까지 연재 중이었다. 무려 시즌3를 끝내고 시즌4에 돌입할 예정이다.
신아름이 온갖 신기한 분야에 도전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플롯의 이 예능은, 소녀연맹 채널의 효녀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어느 그룹이든 대중의 관심을 모으는 이슈 메이커가 있다. 소녀연맹에선 그 역할을 맡은 게 바로 신아름이었다.
“이번에 뭐 한다고 했지?”
“카드 던지기요.”
“카드 던지기?”
“포커 카드 있잖아요. 그걸 표창처럼 던지는 장인? 같은 분이 있대요. 그분이랑 대결한다던데요.”
“아, 그럼 혹시 아름이가 연기 연습하는 게 그거랑 관련된 거야?”
요즘 신아름은 양상헌의 요청으로 몇몇 개의 짧은 대사들을 외우는 중이었다.
‘행운의 여신이 내게 미소를 짓는군’이나 ‘파랑이 좋겠어’라거나 ‘운이 좋다고? 이건 운명이야’ 같은 말을 멋들어지게 하곤 했다.
“네, 무슨 게임 캐릭터래요.”
“어울리네.”
‘웨스턴 불렛’의 시세리를 연기했을 때도 알아봤지만, 신아름은 연기에 재능이 있는 듯하다.
정극 연기 말고 캐릭터 연기 말이다.
“아름이가 러시아 가고 싶어 하면 뺄 수 있나?”
“아뇨.”
민경섭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이제 우리 애들 자체 예능 촬영은, 방송국 나가는 거랑 거의 비슷한 선상에서 봐야 해요. 그만큼 중요하다고요.”
두 사람은 1층 휴게 공간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성필은 소파 위 벽을 보았다.
그곳엔 작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올해의 우수사원
양상헌]
어색하게 웃는 양상헌의 사진이 돋보인다.
그는 가로 엔터의 영상 콘텐츠 담당으로 큰 공헌을 해냈다. 그 덕으로 올해의 우수사원으로 꼽히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큰 공헌이냐면, 뮤직비디오와 같은 아트 종류 영상을 제외하고 소녀연맹 채널이 벌어들인 수익이 10억 원을 넘는다.
양상헌이 기획하는 소녀연맹 자체 예능이 큰 공헌을 했으리란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상헌 씨 혼자만의 공이라기보다는 상헌 씨가 이끄는 콘텐츠팀의 공이고, 또 홍보팀 전체의 공이지.’
무엇보다 소녀연맹 멤버들의 공이다.
특히 ‘행복하게 해줄게, 리카쨩’에 출연한 멤버들은 정말 고생 많이 했다.
‘가로 고등학교’로 눈물을 훔쳤던 백설하를 비롯하여, 리카의 원숭이 손에 희생되었던 다른 멤버들까지…….
그래도 백설하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잠시나마 교복을 입고 과거의 추억을 되새겨볼 수 있었으니.
“그럼 남은 건…….”
두 사람.
“리카랑 하양이네.”
러시아에 갈 수 있는 건 두 사람뿐이다.
꼭 둘 다 갈 필요는 없다.
한 명만 가도 된다.
“하양이는 ‘우리들의 프로듀싱’ 때문에 힘들지 않아요?”
“아마.”
하지만 성필이 보기엔, 장하양이 가는 편이 낫다. 그녀가 정한 ‘우리들의 프로듀싱’ 주제와 부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근데, 애들이 가고 싶어 할까?”
“별로 안 가고 싶겠죠.”
소녀연맹이 정산받게 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회사에서 주는 일을 허겁지겁 해치울 때와는 사고방식 자체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녀들도 어떤 일이 돈이 되는지, 돈이 안 되는지 알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리카는 행사 무대에 설 때마다 ‘이 무대를 마치면 내 손에 들어오는 돈은 XXX만 원’이라고 하나하나 다 계산한다.
당연히 그녀들도 사람이니, 이왕 시간을 쓸 거면 돈 되는 무대에 서고 싶어 한다.
“이 일은 군부대 위문공연이랑 똑같아요.”
기름값 겨우 건진단 뜻이다.
“해외 팬을 만나러 간다는 상징성을 제외하곤, 굳이 가고 싶은 마음이 안 들겠죠. 그마저도 소녀연맹은…….”
이미 충분하고 넘치도록 가지고 있다.
소녀연맹은 국내 팬덤보다 해외 팬덤이 훨씬 많다는 평가를 듣는 그룹이다.
재작년 해외 투어 당시, 칠레 공항에 내리자 그녀들을 맞이하러 온 수많은 군중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모든 투어가 그러했었다.
“누가 갈 거냐고 물어보는 건 별로 안 좋겠죠.”
민경섭은 성필이 하고픈 말을 먼저 꺼냈다.
“그렇지.”
만약 장하양과 리카 둘 다 이 스케줄을 꺼린다면, 둘이 이 일로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
서로에게 ‘네가 가라’고 말하다가 감정의 골이 깊어지겠지.
“저희가 골라주는 쪽이 나을 거예요.”
“음…….”
“하양이는 프로듀싱 일이 있으니까 남고, 리카를 보내는 쪽이 낫겠죠.”
“……하양이가 가자.”
성필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민경섭은 살짝 당황했지만, 그의 설명을 듣곤 고개를 주억였다.
“난 또, 형이 하양이랑 러시아 데이트하고 싶어서 일부러 보내는 줄.”
“뭐?”
“형이 같이 따라갈 거 아니에요?”
“따라갈 거긴 한데 그게 뭔 소리야.”
“아 농담이에요. 그렇게 보지 마요.”
그러면서, 민경섭은 이전에 성필과 장하양이 벌였던 신파극을 떠올렸다.
가로 엔터 홀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뺨을 비비던 모습. 물론 성필이 아니라 장하양이 한 일이었지만.
민경섭이 그런 일을 당했으면 순간적으로나마 아내가 기억에서 지워졌을 것이다.
성필이라고 다를까 싶었다.
“그럼 홍보는 어느 정도로 할까요?”
소녀연맹이 러시아 케이팝 커버 댄스 대회 심사위원으로 나온다더라.
이걸 어느 선까지 홍보할 거냐는 뜻이다.
딱히 민경섭이 성필에게 질문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묻는 건 이런 뜻이었다.
‘중요한 인적 자원을 쓰는 거니, 최소한 자그마한 이득이라도 건져야 하지 않겠느냐?’
즉, 이 일을 부풀려서 소녀연맹에게 유명세를 실어주자는 것이다.
“그냥 언론에 보도자료 돌리는 쪽으로 충분할 거 같아. 뭐, 크게 홍보해봤자 소식 접한 사람들은 ‘그래서 어쩌라고?’ 이상의 반응은 안 줄 거 같고.”
“그래도, 러시아잖아요.”
케이팝으로선 전인미답의 영역이다.
물론 러시아도 세계의 엔터테이너들이 활동하는 땅이기도 하다.
팝스타나 록스타들은 물론이고, 일본의 ‘엑스 재팬’도 러시아에서 콘서트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독 케이팝에겐 차가운 땅이다. 케이팝의 글로벌화가 시작된 지 고작 10년도 안 됐으니, 러시아의 장막이 뚫릴 길이 요원하긴 하지만.
“저희 애들한텐 의미가 나름 깊은 곳 아니에요?”
“이름 때문에? 말도 마라.”
소녀연맹이 이름 때문에 당했던 수모들을 생각하면, 성필은 지금도 자다가 눈이 번쩍 떠지곤 한다.
자업자득이기도 하지만, ‘소련’이란 축약명이나 ‘인민’이란 팬덤명, 그리고 ‘인터내셔널 연맹 대회’라는 팬미팅 이름은 시비 걸릴 여지가 충분했다.
재작년엔 홍규헌이 국정감사에 소환될 뻔하기도 했었다.
운 좋게도 일본의 ‘국뽕연맹’이 터져서, 홍규헌을 소환하려던 의원이 입을 싹 닫았었지만.
아니면 홍규헌의 집안이 무언가를 했거나.
아마 둘 다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러시아니까, 뭘 더 하겠단 마음이 안 들어.”
“하긴.”
민경섭이 씁쓸하게 답했다.
소녀연맹은 유독 다른 팬덤의 견제가 심했다. 그들은 소녀연맹의 팬들을 ‘빨갱이’라고 불렀다.
보통 상대 팬덤을 깎아내릴 땐 ‘정병 팬덤’이란 말을 쓰곤 하는데, 인민이들은 그냥 ‘빨갱이’라고만 불린다.
딱히 이상성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그냥 빨갱이 한마디면 충분한 욕이 된다는 듯한 태도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럼 그냥 하양이가 이런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나간다, 그 정도만 해도 되죠?”
“응. 자료는 홍보팀에 말해서 내 쪽으로 올리라고…… 아니다, 누나가 잘하겠지. 그렇게 해줘.”
“네.”
“그리고 하양이한테는 내가 말할게.”
그렇게 장하양의 참여가 확정됐다.
‘너무 싫어하진 않았으면 하는데.’
아닌가.
멤버들이 돈 안 되는 일이면 싫어할 거란 건 성필의 자의적인 판단일 뿐이다.
무엇보다 장하양은 이 일을 기꺼워할 것이다.
‘이번에 하양이가 정한 주제에도 들어맞으니까.’
영감은 중요하다.
이번 일은 장하양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마이어의 요구를 받아들인 건 그녀의 이야기에 감동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장하양을 위해서였다.
* * *
“항상 그려왔던―.”
리카의 노트북에서 경쾌한 멜로디와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노래를 불렀다.
“드림이 야이야이야아―.”
리카가 정지음과 함께 편곡한 ‘서머타임 드림’이었다.
가사는 경쾌함을 살리느라 일부러 뭉개어서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전부 만회할 정도로 하이라이트 멜로디가 좋았다.
아니, 좋은 정도가 아니다.
끝내준다.
“멈추지 않는 드림이 야이야―.”
리카는 어깨를 들썩거리는 걸 넘어서 스텝까지 쓰기 시작했다.
클래식 극장의 관객처럼 경건하게 앉아 있던 장하양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가슴을 비비적댔다.
“빠빠빰 빠빠 빠빠빰 빠빠!”
리카가 들이대는 것을 못 이기고 짜증 내는 신아름의 고함. 그것을 흥겨운 악기 소리로 변환시킨 보컬찹이 멜로디를 채웠다.
리카가 따라 부르는 ‘빠빠빰’ 파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인간의 목소리로 만들었지만, 인간의 목소리로 재현할 수 없는 사운드다.
인터넷 밈 중에 잘못한 사람이 악기로 변한다는 게 있다.
나라를 가리지 않는 현상이다.
정치인부터 연예인, 심지어 미국의 인터넷 사용자들은 테러리스트의 목소리마저 악기로 변환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신아름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악기가 되었다.
“오(Oh) 너 오 너, 마이 드림이 야아이야―.”
장하양이 반응이 없자 리카는 트월킹을 추었다. 그걸 본 장하양도 결국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같이 일어나 리카와 함께 춤을 추었다.
절로 어깨를 들썩이는 리듬이란 바로 이 노래를 뜻하는 걸지도 몰랐다.
‘애플 크러쉬’마저도 이렇게나 경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항상 꿔왔던 꿈이야이야!”
곡이 끝나자 둘은 격한 춤 탓에 숨을 헐떡였다.
“어떤가요!”
“좋아. 정말 리카가 만들었어?”
“하이(네)! 정확히는 편곡이지만요!”
이 ‘서머타임 드림’은 어느 무명 작곡가가 만든 것이었다. 몇 개월 전에 가로 엔터의 A&R팀이 퍼블리셔를 통해 사들였다.
참고로 가격은 고작 수십만 원이었다.
정지음의 보물창고 한구석에서 먼지 맞던 ‘서머타임 드림’은, 얼마 전 A&R팀 손에 구출됐다.
장하양의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맞아 A&R팀이 소유한 모든 곡을 다시금 확인했기 때문이다.
“원곡은 어때?”
“틀어드릴게요!”
편곡을 거치지 않은 ‘서머타임 드림’은 엉성했다. 일단 녹음부터 그다지 좋은 마이크로 한 게 아닌 듯했다.
사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로 튄다.
그럼에도 멜로디의 원형만은 느껴진다.
“이런 걸 편곡해서 그렇게 만든 거야?”
“하이(네)!”
리카가 자부심을 담아 가슴을 폈다.
장하양은 그녀와 정지음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A&R팀도 대단하다.
‘서머타임 드림’을 사서 쟁여둘 생각을 할 것과 이 곡을 이 타이밍에 꺼낸 것 모두.
솔직히 원곡은 실용음악과 학생이 과제 때문에 만들었단 생각이 들 정도로 엉성했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
고작 수십만 원에 샀다고 하니, 그걸 판 사람은 곡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저작권 자체를 팔았단 건 그런 의미다.
물론 이 곡이 소녀연맹의 타이틀이 된다면 피눈물을 흘리고 후회하겠지.
“원하신다면 다른 방향으로 편곡할 수도 있어요!”
“예를 들면?”
“이 곡은 완전히 EDM이잖아요! 하지만 하양 언니가 뮤지컬처럼 바꿔 달라고 하면 오케스트라나 빅밴드 세션으로 사운드를 갈아엎을 수 있어요! 두 개를 합쳐도 되고요!”
리카는 옛날에 장하양이 ‘프로듀싱을 하게 된다면 뮤지컬 분위기를 내고 싶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장하양은 리카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물론 둘은 키가 비슷하여, 머리를 쓰다듬으려면 손을 머리 높이까지 올려야 했다.
리카가 헤실헤실 웃었다.
“다른 곡들도 많아요!”
“리카, 옛날부터 궁금했는데 EDM이랑 일렉트로닉은 같은 뜻이야?”
“달라요! 다르다구요! EDM은 춤추기 위한 음악이고 일렉트로닉은 듣기 위한 음악이에요!”
“그렇구나.”
“혼용하는 경우가 많긴 하죠! 딱히 지적하고 싶진 않아요! 뜻만 통하면 되잖아요! 그럼 다음 곡 들어보실 건가요!”
“나도 그러곤 싶지만…….”
장하양은 곤란하단 듯 침대 위를 바라보았다. 싸다 만 짐들과 캐리어 가방이 함께 놓여 있었다.
“아직 러시아에 갈 시간은 남지 않았나요? 벌써 짐을 싸는 건가요!”
“음, 뭔가.”
장하양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기대감이 그녀의 심장에서 손끝 혈관까지 퍼진 듯했다.
“진정이 안 돼서.”
“러시아가 그렇게 좋으신가요!”
“아하하, 그렇지.”
“부럽네요! 가로 엔터의 최고 간부 둘을 끌고 가다뇨!”
그 말대로, 장하양은 러시아에 갈 때엔 두 사람과 동행한다.
바로 성필과 한구인이다.
리카의 눈동자에 선망이 박혔다.
“드라마 같아요! 엄청난 커리어 우먼 느낌!”
양편에 회사 간부 둘을 낄 테니, 호화로운 행차라고 할 만하다.
여태껏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있던 건 홍규헌이 고작 아니었을까.
“아, 진정이 안 된단 건 그런 뜻인가요! 하긴, 판타지니까요!”
“응? 판타지라니?”
리카는 곧바로 폰을 들어 화면을 보여주었다.
어느 웹소설의 표지였다. 곤란한 얼굴의 여자가 중앙에 있고, 양쪽엔 순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자리했다.
여자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손으로는 두 사람의 넥타이를 목줄처럼 쥐고 있었다.
‘이사님들, 적당히 집착해주세요’란 제목이었다.
“이런 거요! 낭만이에요!”
“……그렇구나.”
장하양은 로맨스 소설을 많이 읽는다. 그런데 그게 웹소설을 뜻하진 않았다.
한구인에게 교육받은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가정사가 엮여서 지니게 된 아비투스적 열등감의 발현인지, 장하양은 스낵컬처를 선호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목과 표지가 눈에 띄어, 장하양은 궁금증을 드러냈다.
“무슨 내용이야?”
“안 읽어서 몰라요!”
그렇군.
장하양은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리카는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처럼 장하양을 따라 침대 위로 다이빙했다.
장하양이 물었다.
“못 가게 돼서 아쉽지 않아?”
장하양은 잠시 뜸을 들였다.
“로망이잖아.”
“에에, 두 명이 되는 순간 로망이 아니라 단순한 더블 데이트라구요!”
“네가 한 이사님 쪽이야?”
“하이(네)?”
리카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단 듯 고개를 기울였다. 장하양은 혼자 창피해져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타시(저)는 스케줄이 없어도 바쁘니까요!”
말 그대로 리카는 바쁘다.
시간이 남으면 항상 작곡과 프로듀싱에 관해 공부하니 말이다. 마치 춤이 클럽이고 유흥이었던 시절의 조아라 같다.
요즘 조아라는 춤을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 쓰지 않는다. 대신 시간을 정해두고 집중력을 최대한 유지하여 실력을 갈고닦는다.
아이돌의 방송 안무에 어울리지 않는 고난도의 테크닉을 익히는 건 물론이고, 무용에 관한 전문 서적도 읽는다.
리카가 바쁘단 건 안다. 알지만, 장하양은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왜, 연애 사업 때문에?”
얼마 전 리카에게 있던 일 때문이다.
12월, 음악 방송 때문에 방송국에 있을 적이다.
보이그룹 웨이퍼센트의 멤버인 유빈이 리카의 앞에 종이쪽지를 떨어뜨리고 갔다.
소녀연맹은 혼비백산했다. 분명 그 쪽지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을 테니까.
아마 유빈은 평소에도 리카를 눈독 들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애 금지가 풀리길 기다려 접근한 거겠지.
그런데.
“또 그건가요!”
리카가 뾰로통하게 장하양을 흘겼다. 장하양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그때, 리카는 쪽지를 주워 유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떨어뜨리셨어요!’라면서 돌려주었다.
유빈은 넋이 나가 쪽지를 받았고, 멀어져가는 리카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분홍 머리칼이 유달리 쓸쓸하게 흔들렸었다.
하지만 유빈의 공작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얼마 후 다시 리카의 앞에 쪽지를 떨어뜨린 것이다. 리카는 그걸 또 주워서 돌려주었더랬다.
“귀엽지 않아?”
“저보다 오빠잖아요!”
“낭만적인데.”
세상에, 요즘 어떤 사람이 쪽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서 상대에게 주겠는가. DM으로 연락하거나 사람을 통해 소개받겠지.
물론 그 쪽지 안에 든 게 전화번호라는 확증은 없지만, 다들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왠지 순수할 거 같아. 한 번쯤 만나보는 건 어때?”
리카가 옅게 웃었다.
“언니는 다른 사람 연애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장하양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리카는 대놓고 화내지 않는다.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씩 그녀가 꺼내는 제지가, 보통 사람의 욕설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진다.
매일 ‘시발’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그만해라’라고 하는 것보다. 예의 바른 사람이 ‘그만해’라고 깔끔히 말하는 게 훨씬 무서운 것과 같다.
“아라쨩한테도 규영 선배님이랑 잘해보라고 하시잖아요!”
리카가 ‘다른 사람 연애에 관심이 많으시네요’라고 한 건, 간접적인 ‘적당히 해라’ 선언이었다.
장하양은 잠시 얼이 나갔다.
PTSD라고 해야 할까. 부도칸에 섰을 때 리카에게 맞았던 뺨이 쓰렸다.
“아, 미안…….”
리카는 ‘괜찮아요’라고 하는 대신 장하양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러시아는 추울 거예요! 따뜻한 옷을 많이 챙기세요!”
“응.”
“힘내세요! 언니의 이 일이 저희를 보호할 거예요!”
장하양은 힘없이 아하하 웃었다.
“너도 경섭 오빠랑 비슷한 생각이야? 이념적 순수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요!”
리카는 데뷔했을 때부터 누구보다 팬들의 반응에 민감했다. 그렇기에 소녀연맹이 먹는 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룹 이름을 가지고 태클을 걸거나, 회사가 사재기를 했다고 거짓을 지어내는 거나, 멤버들에 대한 악성 루머와 원초적인 비난까지.
견뎌내기 힘들 텐데도 항상 그런 걸 본다. 보고 나면 우울해져서 한숨을 내쉬면서도 말이다.
이를테면, 그녀에게 소녀연맹 바깥의 세상은 악의로 가득한 가시밭길이다.
그 악의는 가만히 두면 무한히 증식한다. 언젠가 소녀연맹을 위협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근거 없고 실체 없는 악의더라도, 미리 싹을 잘라두고 싶어 할 것이다.
리카에게 이번 러시아행은 그러한 작업으로 느껴질 터다.
홍규헌이 국정감사에 불려갈 뻔했던 일이 있었다. 리카에게 ‘이념적 순수성을 증명’한단 건, 절대 멀리 있는 위협이 아니다.
“가서 최고의 심사를 내려주세요! 나라님을 만족시키는 거예요!”
“아하하, 알아주기나 할까?”
정부가 주도한 일도 아니고, 정부 조직 산하 재단에서 벌이는 일이잖은가.
아마 큰 화제가 못 될 것이다.
기자 몇 줄로 적혀서, 언론사 트래픽을 조금 올리는 용도겠지.
그보다는.
“팬분들 만나고 오는 자리라고 생각해야지.”
* * *
투자를 유치하는 방법 중 이런 게 있다.
일단 큰 회사에서 투자받으면 이후는 쉽다. ‘우리는 A그룹에서 투자받았습니다’라고 하면, 다른 투자사들은 자연스레 이렇게 생각한다.
‘A회사가 투자했다면 가망이 있겠구나.’
그리하여 연쇄적인 투자를 받는 게 가능하다.
문화교류원이 했던 일도 그와 비슷했다. 소녀연맹이 모스크바 케이팝 커버 댄스 대회 심사위원으로 나온다고 하니, 그걸 홍보 요소로 쓴 것이다.
교류원은 여러 기획사들의 홍보팀에 접촉했다.
‘소녀연맹이 와요. 그쪽의 그룹이 나오는 것도 손해는 아닐 거예요.’
그리하여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
“와, 뭐냐 이건.”
성필은 보고도 못 믿을 지경이었다. 민경섭 또한 마찬가지였다.
“형은 이해가…… 가요?”
“아니, 전혀 안 간다.”
“그쵸? 하양이가 심사위원으로 나온다 뿐이지, 대회 규모도 안 바뀌고 화제성도 크진 않을 텐데…….”
성필과 민경섭은 교류원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훑었다.
케이팝 커버 댄스 대회, 심사위원 참여 희망 그룹 목록.
무려…….
* * *
KS 엔터 매니지먼트 팀장급 회의.
1팀장을 비롯한 2팀, 3팀, 4팀의 책임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들 모두 KS 엔터를 대표하는 그룹을 하나씩 맡고 있다.
대표적으로 1팀장은 케이어스를 맡고 있다.
그들이 함께 모이는 안건은 매니지먼트 기획 안건 조율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가 그러했는데,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다.
일단 모든 팀장들이 손을 번쩍 들고 있다.
“아니이, ‘부테스’는 애들 휴식기 아니에요? 근데 러시아를 보내겠다고? 가혹행위잖아요.”
2팀장이 비웃음을 보냈다.
3팀장이 발끈했다.
“가혹행위? 애들이 가고 싶댔어요! 어디 러시아가 가기 쉬운 곳이랍니까? 가는 김에 애들 휴식도 겸하는 거죠.”
“솔직히 가서 뭐 하게요? 부테스 이제 늘어날 팬덤도 없구만.”
“뭐요?!”
“아니에요? 슬슬 은퇴할 때 아닌가?”
“아직 7년 재계약도 하기 전이거든요?! 그리고 늘어날 팬덤이 없다니요! 그게 할 말입니까? 그렇게 따지면 PTR―17은 이미 잘나가는데 왜 이래요?”
“잘나가니까 가겠단 거잖아요.”
“지금 성적으로 애들 차별하겠다고? 아니, 차별하네. 아까부터 하는 말이 그렇네!”
KS 엔터의 3세대 보이그룹과 4세대 보이그룹의 신경전이 치열했다. 서로의 자존심이 걸려 있단 듯 누구도 먼저 물러나지 않는다.
‘븨이에스’를 맡은 4팀장이 소심하게 말했다.
“짬으로 정합시다.”
“말이 되는 소릴 해요!”
“죄송합니다.”
4팀장이 쪼그라들었다. 그러고도 눈빛은 총기를 잃지 않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건 기회의 측면이 크다고 봅니다. 이미 잘나가는 그룹은 빼죠. PTR―17은 다음 앨범으로 200만 장 돌파하겠던데, 굳이 러시아까지 갈 필요가 없겠습니까.”
“그거랑 이건 다르……!”
“그리고.”
4팀장은 1팀장을 응시했다.
“케이어스야 뭐, 이런 자그마한 조각에 관심 기울일 필요도 없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손을 든 1팀장은 어금니를 까득 물었다.
어쩌다 다들 초등학생처럼 손을 들고 발언하고 있느냐. ‘러시아 케이팝 댄스 대회 심사위원으로 갈 그룹?’이란 1팀장의 질문에, 다들 기다렸단 듯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손을 든 채로 흥분해서 말싸움하고 있다.
‘이 개자식들이…….’
1팀장은 분을 삭였다.
‘애초에 이 일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게 나였는데!’
이 일은 다른 팀장들과 척을 져서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애초에 내가 먼저 찾았잖아!’
1팀장은 어떻게 다른 이들의 입을 닥치게 할지 고민했다.
반드시 이 일을 따내야 한다.
왜냐하면, 케이어스의 향후 목표가 소녀연맹의 해외 인기를 따라잡는 것이었으니까.
이게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눈앞의 인간들을 죄다 닥치게 하고, 케이어스가 러시아로 가야 하는데.
‘제기랄…….’
그 뒤도 문제다.
생각 없는 교류원과 러시아 공무원들이 한국 기획사 전체에 출연 제안을 보냈다면…….
‘다른 기획사들도 다 같은 생각일 거 아니야.’
현재 소녀연맹이 어떤 이미지인가.
비교불가능, 대체불가능한 걸그룹이다.
빌보드200 14위 이상은 현시점에서 단 하나의 걸그룹을 제외하고 소녀연맹만이 올라 본 곳이다.
그녀들은 거의 한국문화 전도사쯤으로 여겨진다. 일본 활동으로 생긴 ‘국뽕연맹’이란 우스운 별명이 우스워질 정도의 인지도이며, 그만큼 거대한 명성이다.
그러니 소녀연맹이란 이름과 나란히 놓일 수만 있다면…….
‘우리 애들이 고작 비행기 한 번 타는 것으로 얻어냈다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홍보 효과가 발생한다.
그게 소녀연맹이 지닌 이름값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