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5화
일주일 후, 김덕팔은 철저한 자료로 ‘위어스’ 입점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열렬히 주장했다.
그에 손혜빈이 짧게 반박했다.
민경섭은 기권했다.
한구인은 김덕팔 못지않은 자료조사로 김덕팔을 몰아붙였다. 그 자료조사란, 흔히 말하는 ‘감성팔이’였다.
한구인은 팬카페에 올라온 팬들의 진심 어린 응원 글과 소녀연맹의 손 편지를 가져왔다. 김덕팔은 감히 그걸 폄하하지 못했다.
한구인의 프레젠테이션은 김덕팔을 압도했다. 인간을 움직이는 건 이성보다 감성이므로.
민경섭과 손혜빈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거기에 더해 한구인은 살짝의 논리까지 더했다. 그는 팬을 배신했던 그룹의 전말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박 이사는?”
성필은 고개를 저었다.
“기권할게요.”
김덕팔이 낭패한 기색을 보였다.
이 상황을 타개할 건 성필의 개입뿐이었다. 가로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인 그의 도움만이, 반대자 일색인 상황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희망도 사라졌다.
“저는 사업가나 경영자, 홍보자라기보다는 프로듀서고…….”
성필은 쓴웃음을 띠었다.
“제 의견은, 옛날에 이 안건을 기각할 때 충분히 들려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홍규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결론을 내릴 셈이었다.
“입점한다.”
김덕팔의 안색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그건 놀라움이었고, 곧 기쁨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예……?”
“김 부장의 말이 맞아.”
갑자기 튀어나온 반말에 김덕팔이 물음표를 여러 개 띄웠다. 하지만 홍규헌은 말투를 바꾸지 않았다.
그녀는 석상처럼 뻣뻣이 서서 정면만 보았다. 정면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문뿐이었다. 발표하다가 뇌 정지가 와서 굳은 사람 같았다.
“팬카페란 건 올드한 방식이지. 해외의 팬들이 덕질에 주로 이용하는 SNS는 트잇터야. 트잇터 사측(社側)에서 케이팝과 트잇터의 공생을 언급할 정도로 규모가 크지. 하지만 그건 대안이 없어서였어.”
홍규헌은 판결문을 읊는 판사 같았다.
이 결론에 도달한 이유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말해주려는 듯했다. 유려함으로 판단하건대, 오늘의 회의가 있기 전에 결정한 것 같기도 했다.
“트잇터는 인간관계를 쌓는 데 좋은 시스템이지만, 데이터베이스를 보존하고 공유하며 그에 따른 콘텐츠를 즐기는 덴 썩 괜찮은 SNS가 아니야. 해외의 팬들이 트잇터를 많이 이용한 건, 한국 팬들이 만들어둔 생태계 덕이 커. 거기에 아이튜브가 가세하여 팬덤 생태계를 확장했지. 하지만, 여전히 해외팬들에게는 한국의 팬덤 문화가 선망의 대상이야.”
그럴 수밖에.
케이팝 산업이 30년 넘게 이어지며 구축한 시스템과 토양은 무시할 게 아니었다.
그 토양을 트잇터와 아이튜브가 흡수하는 중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팬카페나 팬클럽 시스템도 그중 하나였다. 해외 팬은 언어의 장벽으로 가입하거나 활동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지만, 너무나 매력적인 시스템이다.
“외부로 유출하지 말라곤 하지만, 팬카페에 올라온 멤버들의 글이나 손편지가 트잇터로 번번이 유출돼. 아마 한국어가 가능한 외국 인민이가 가입해서 퍼뜨리는 거 같아. 그만큼, 팬카페의 콘텐츠를 즐기고 싶단 거겠지. 나라도 그럴 거야. 나라도, 좋아하는 아이돌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알고 싶겠지.”
또한 콘서트 우선 예매권, 전용 굿즈 키트 등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그건 일종의 혈통 신분제였다.
사랑하는 마음은 다를 바 없으나, 태어난 나라와 핏줄이 덕질의 범위를 제한한다.
“그런 이들에게 콘텐츠를 개방하는 건, 소녀연맹의 팬덤 확장과 안정성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아무렴, 소녀연맹은 해외의 팬이 더 많잖아. 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코어팬을 무시하는 처사란 덴 변함이 없어.”
소녀연맹이 바닥일 시절부터 받쳐온 이들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배신당한 기분일 것이다.
“이건, 감수해야 한다.”
홍규헌이 단언했다.
“하지만 시간을 둘 거야. 올해 팬클럽 4기 가입 일정은 취소다.”
민경섭이 재빨리 받아적었다.
“저, 그러면 아예 팬클럽을 해산하나요?”
“시간을 두고 해산 절차를 밟을 거야. 팬 매니지먼트 부서가 바빠지겠지만, 팬클럽이 해오던 응원 활동은 시기에 맞춰 뽑는 걸로 대체한다.”
“그, 그걸 바로는 할 수 없…….”
“시간을 두고, 한다고 했어. 올해는 아니야, 어쩌면 내년이고 내후년이겠지. 팬클럽이 누리던 혜택을 조금씩 축소하고, 종국에는 없앤다. 이건 ‘위어스’ 멤버십을 결제한 사람들과의 차별을 제거하기 위함이야.”
“사장님.”
김덕팔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러면, 역차별 논란이 계속 나올 겁니다. 멤버십에 가입한 사람들은 팬클럽에게 반감을 갖고, 역으로 팬클럽이 가로 엔터에 지니는 분노는 그대로일 겁니다. 할 거면 확실하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분노란 건 그런 겁니다.”
“감수한다.”
김덕팔이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일을 겪는 건 우리만이 아니야. 수많은 아이돌이 앞으로 ‘위어스’와 ‘코스모스’에 입점하려 할 거고, 우리와 같은 난관에 마주하겠지. WTP마저도 피해 가진 못해.”
“그, 그러니까 그들을 따라 물 타듯이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특별함이 돋보이는 거야.”
“아…….”
“팬클럽 인민이들은 처음엔 화내다가도 다른 그룹을 보면 ‘우리가 그래도 조금은 선녀였네’ 싶겠지. 그동안의 분노는 가로 엔터가 그대로 감당해야 할 거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야.”
홍규헌의 말은 사업적으로 타당했으나, 사람들을 깔보는 느낌이 있었다. 김덕팔을 설득하려고 일부러 워딩을 과격하게 한 감이 있었다.
여전히 목석처럼 정면만 보는 게 부자연스럽긴 했지만, 그녀의 어투엔 단호함과 결연함이 배어 있어 김덕팔도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그건…….”
하지만 김덕팔은 끝끝내 반론을 던졌다.
“불확실하고 추상적인 이득입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데 있다. 그런 말도 있지.”
“그건 경영학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구절…….”
“아멘.”
한구인이 성호를 그렸다.
김덕팔은 그 부분에 태클 거는 것을 그만두고, 다른 점을 물었다.
“시기는 언제입니까?”
“장하양의 프로듀싱이 끝나고 3개월 후에 예고한다. 이런 결정을 내린 데는 장하양이 제시한 주제인 ‘팬송’이 큰 지분을 차지해.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3가 진행되는 동안, 혹은 컴백 전후에 이 계획을 알리면 평생토록 놀림감이 될 거야.”
팬 여러분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으면서 팬클럽을 버렸다.
KS 엔터 팬덤이 소녀연맹을 개처럼 패버릴 것이다.
“그때쯤이면 KS 엔터의 아이돌들도 두 플랫폼 중 하나에 가입하거나, 아니면 KS 엔터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플랫폼에 입점한 상태겠지. 장하양이 선정한 주제를 가지고 우리한테 쉽게 뭐라고 하진 못할 거야.”
“KS 엔터가 자체적인 플랫폼을 개발합니까?”
“저력이 있는 회사야. 그럴 수도 있겠지. 지금도 각국에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걸로 안정적으로 굿즈를 팔고 있으니.”
얼마 전엔 사상 최초로 인터넷 실시간 콘서트를 중계하기도 했다.
콘서트를 넷상에서만 판 것이다.
콘서트 한 번으로 50억을 넘는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물리적인 콘서트보다 압도적으로 가성비가 높았다.
문화선도자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성과였다.
그런 회사이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대신 자체 플랫폼을 개발할 확률이 높다. 이미 팬과 아티스트의 소통 플랫폼을 개발한 전적도 있으니.
“그럼, 하양 씨의 컨셉 주제를 바꾸면 안 됩니까?”
곧바로 김덕팔에게 임원들의 적대적인 시선들이 쏟아졌다.
김덕팔은 본 적 없을 정도로 놀랐다.
성필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저희의 영혼입니다.”
“여, 영혼…….”
김덕팔은 이해하진 못했지만 이해한 척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은 자신이 감히 어쩌지 못할 역린이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 줄줄이 기각당하자 용기를 잃은 듯했으나, 결국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미 고려하셨겠지만, 이 시기에 입점하지 않으면 절대 지금과 같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없습니다.”
“그것 또한…….”
“감수합니까?”
홍규헌이 끄덕였다.
“대신, 소녀연맹보다 일찍 차기 그룹을 입점시킬 거다. ‘위어스’ 쪽에겐 그나마 희소식일 거야. 우리가 그쪽에 호의적이란 걸 깨닫겠지. 소녀연맹도 이후엔 입점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할 테니. 협상만 잘하면, 시기가 늦어도 어느 정도 양보를 얻어낼 수도 있을 거야.”
“그 말씀은…….”
민경섭이 물었다.
“우리 보이그룹 애들은 팬클럽이 없습니까?”
“그래. 차기 그룹은 팬클럽 시스템 대신, 글로벌 플랫폼을 이용한 멤버십 시스템을 사용한다.”
홍규헌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여기까지.”
여기까지가, 홍규헌이 내린 결론이다.
소녀연맹과 가로 엔터의 미래를 동시에 고려하고, 이득과 손해를 필사적으로 저울질하고, 김덕팔과 기존 임원들의 의견까지 조화하여.
홍규헌이 마침내 도달한 해답.
가로 엔터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소녀연맹의 해외 진출에 날개를 달아줄 최종답안.
“여기까지, 이견이 있거나 질문이 있는 사람은 말해.”
다들 한숨을 쉬었다.
불만이 아니었다.
저마다 만족한 것이었다.
성필이 말했다.
“최선입니다.”
“좋아, 그럼.”
해산.
* * *
회의가 끝난 후, 김덕팔은 긴장이 풀어진 나머지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바들바들 떨며 회의실을 나섰다.
성필은 그를 자연스럽게 부축했다.
“아, 박 이사님. 감사합니다.”
“괜찮으세요?”
“예, 긴장이 한 번에 풀려서, 휴우.”
김덕팔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떨리는 손으로 닦아냈다.
“살아있다는 실감이 드는군요.”
“예?”
“칼날 위에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성필은 어처구니없어서 웃었다.
이런 사람이 있다. 사업과 영업에서의 성취, 그로 인한 갈등을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 말이다.
워커홀릭의 유형 중 하나다.
이러한 성취로만 삶의 실감을 얻는 사람.
퇴직한 김덕팔은 순식간에 생의 즐거움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잘은 몰라도, 자신을 받아준 홍규헌에게 큰 감사를 품고 있지 않을는지.
‘그런 사람이 내린 결단을, 필사적으로 물고 늘어지셨던 건가.’
이건 강심장이라고 해야 할지 충신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신기하고도 대단한 사람이다.
“감사드립니다.”
성필이 말하자, 김덕팔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단 듯 ‘예?’ 되물었다.
“김 부장님이 없었으면, 저희는 입점을 계속 미뤘을 거예요.”
성필도 많은 고민을 했었다. 결국 내린 결론은, 기존의 팬클럽 시스템을 안고 가는 것이었다.
성필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아이돌을 좋아했고, 아이돌 덕질을 누구보다 깊이 해봤기에, 팬클럽이 느낄 실망감을 이해했으니까.
게다가 그 판단을 내렸을 때 후회할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결국 두 개의 길이 있던 것이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시는 갈 수 없는 두 개의 길.
어느 쪽이 더 나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김 부장님은 새로운 물 같은 분이십니다.”
“누구, 저요?”
“아시잖습니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회사에 필요하단 거요.”
“그렇긴 하지만, 과분한 말씀 같습니다.”
김덕팔은 허허 웃었다.
“다 늙은 사람인걸요. 제가 청류라니, 말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박 이사님과 다른 분들께 제가 감사드려야지요.”
“감사요?”
“저는 조직이 끈끈해질수록 가지는 폐쇄성을 잘 압니다. 전에 있던 회사의 부서나 임원과의 관계란 게 그러했거든요. 저마다 너무 깊이 얽혀 있어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항상 적응을 잘 못 했었지요. 저도 그러는 건 아닐까 했습니다.”
쉽게 말해, 왕따당하진 않을까 걱정했단 뜻이다.
“때론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단 것만으로도, 결격사유가 되기도 하는 법이지요.”
“에이, 여긴 스타트업이에요.”
“스타트업?”
성필은 회사 홀을 한 번 둘러보았다.
“뭔가가 시작된 지, 고작 5년인걸요.”
“5년이나 됐군요.”
“5년이나요?”
“6년 이내에 신생 회사 90%가 망합니다. 5년이면 이제 상위 10%에 진입하는 거지요. 가로 엔터가 어떻게 10%에 가까워졌는지, 오늘 알게 됐습니다. 사장님이 정말 현명하시더군요.”
“음.”
성필은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김 부장님의 의견을 절반쯤 받아들여 주셨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허허, 그렇군요. 그렇게 들렸겠습니다. 제 의견을 들어줘서 현명하다니,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느껴집니다.”
“예.”
성필과 김덕팔은 함께 복도를 걸었다.
“존경할 만한 분이에요.”
“그렇습니다.”
“저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어요.”
“예?”
성필은 그날을 떠올렸다.
홍규헌이 성필에게 지분을 선물했던 날. 성필은 울면서 ‘이제 영원히 함께예요……’라고 했었다.
성필은 추억에 잠겨 미소 지었다.
그걸 보며 김덕팔은 오묘한 표정을 띠었다.
‘진짜 가족 같은 회사인가?’
아니, 가족회사가 되는 건가?
‘박 이사님에게 더 잘 보여야겠군…….’
김덕팔은 대기업의 임원이었다.
그 정도 위치에 오르려면 능력만으로는 안 된다. 정치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는 정치력이 충분했으므로, 성필과 더 친한 사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 * *
홍규헌은 사장실의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책상의 뒤쪽에서 벽을 바라보았다.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홍규헌은 아무것도 없는 벽에 기억을 그렸다.
큰오빠야, 홍문헌의 말이었다.
‘규헌아.’
홍문헌의 자택.
서재의 의자에 앉은 그는 갓 성인이 된 동생을 향해 시가를 물었다. 앞쪽을 잘라내고 깊이 빨아들인 후, 연기를 그녀를 향해 뿜었다.
‘내가 알려줄 첫 번째는, 냄새가 권력의 일부란 거다. 이 방은 내 것이고, 나의 공간이며, 너는 이곳의 배치나 형식에 관여할 수 없다. 심지어 냄새마저도. 권력은 시현으로써 확립된다. 기억해라.’
존경하는 오빠의 말이었다.
홍규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너는 가방을 지고 가게 될 거란 거다. 인생의 짐을 가방에 하나둘씩 담아가지. 그 안에 네가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차근차근 쌓아갈 거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많을 거야.’
홍문헌의 눈빛이 오래된 것들을 반추하듯 흐려졌다.
‘그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많지. 하지만 가방의 모양과 색은 네가 고를 수 있어. 아름답고 예쁜 너의 이상 안에, 많은 짐을 담으며 나아가라. 그런데 짐을 담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가방은 닳고 낡아간다. 나중에 돌아보면 내가 고른 가방이 그리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처음보다 색이 바랬거든. 안에 든 짐들도, 원치 않아서 넣은 것들이 많고. 점점 짐이 무겁고, 갖고 싶지도 않고, 버리고 싶어진다. 바로 거기다.’
홍문헌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쿵 두드렸다.
‘그 지점에서 패배자와 승리자가 갈린다. 놓는 인간은 패배자다. 쓰레기든 상패든, 짐은 모두 네 것이다. 그걸 네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짐을 지고 계속 나아가는 거다. 너도 모르는 골인 테이프를 향해. 언젠가, 웃으면서 거길 통과할 수 있도록. 그리고 가방을 열어 확인해라. 거기엔 네가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들이, 주로 싫어하는 것들이 많을 거야. 하지만, 그보다 빛나는 좋아하는 게 반드시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골인 테이프까지 올 수 없을 테니까. 그럼, 이 자리에서 가방을 고르고 나가라.’
참으로 추상적인 대화였다.
그 추상적인 대화에, 홍규헌은 진심으로 임했다.
그녀가 고른 가방은 행복이었다. 행복으로 향하는 길을 세상 곳곳에 놓아두고 싶다고.
홍문헌은 고개를 끄덕였었다.
‘좋은 가방이다. 고급스럽고. 그만큼 빨리 닳겠지. 뭐어, 힘내라.’
홍문헌은 성년이 된 동생에게 쿠바산 시가와 ‘로마네 콩티’ 와인을 선물해주었다.
회상이 끝났다.
홍규헌은 책상 서랍 깊은 곳에서 ‘로마네 콩티’를 꺼냈다. 1,000만 원이 넘는 술이다.
“하아.”
홍규헌은 와인을 따서 아예 병나발을 불었다. 병 주둥이에서 입을 뗀 그녀는 아련하게 읊조렸다.
“오빠야.”
오늘은, 내가 싫어하는 걸로 가방을 채웠어.
하지만 정말 있는 거지?
‘나도 모르는 골인 테이프. 그리고 거기서 내가 미소 지을 만한, 내가 좋아하는 게…….’
가방 안에 들어있는 거겠지.
분명.
“…….”
홍규헌은 책상에 이마를 박고, 오래도록 한숨만을 뱉었다. 그러다가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홍규헌은 눈가를 문지른 후 손거울을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괜찮음을 확인한 그녀는 들어오라고 했다.
성필과 한구인이었다.
“사장님, 드릴 말, 으엉? 회사에서 술 안 드신다면서요!”
“저, 저거 ‘로마네 콩티’입니까?”
성필과 한구인이 서로 다른 이유로 놀랐다.
“내 술엔 관심 끄고, 웬일이야?”
“음, 그게.”
성필과 한구인을 서로를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애매하게 웃었다.
“규헌아.”
성필이 말했다.
“……뭐?”
“아, 아니, 이렇게 셋이 있을 땐 반말해도 된다고 했…… 지 않나요……?”
한구인이 성필의 옆구리를 툭 쳤다.
“성필이가 제안을 하나 했어서.”
“뭐……? 성필이……?”
“네가 놀라면 어떡해!”
한구인이 화난 듯 성필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에휴 한숨을 뱉었다.
“그, 시간 괜찮으면 셋이서 한강 공원에 놀러라도 가자고…….”
“네, 오늘 밤에요.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분수도 구경하고 재밌을.”
한구인이 또 성필의 옆구리를 찔렀다.
“재밌을 거야! 규헌이 너도 좋아할걸?”
“……이 날씨에?”
“이 날씨에라잖아! 이 날씨에라잖아!”
성필이 한구인을 타박했다. 한구인은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뱉었다.
“아니면, 아니면, 어, 성필이 집에? 집들이라도? 아, 어떡하지?”
“크흨.”
홍규헌이 웃자, 두 이사는 얼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홍규헌은 시원하게 웃곤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 가요 오빠들.”
성필과 한구인은 언제 서로를 비난했냐는 듯 하이파이브 했다.
‘오빠야.’
홍규헌은 홍문헌을 향해 마음속으로 말했다.
‘끝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가방 안에 소중한 게 있는 건 확실해.’
아버지가 말했다.
사업은 사람을 남기는 거라고.
그렇다면, 그녀의 가방 안에 가장 소중할 무언가 역시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홍문헌은 아니라고 했었다. 사람을 남기는 일 따위 불가능하다고.
오빠야가 선택한 가방은 ‘돈과 권력’이었다. 영원토록 닳지도, 헤지지도 않을 가방이었다. 왜냐하면, 고른 순간부터 탁한 색의 가방이니까.
‘나는 내 가방으로 조금 더 나아가볼게.’
홍규헌이 남긴, 그리고 남길.
이 둘과.
“영원히 함께…….”
“응?”
“……음?”
홍규헌은 멍한 상태에서 빠져나왔다.
성필이 의아하여 되물었다.
“규헌이 뭐라고 했어?”
“어, 아니.”
“방금 ‘영원히 함께야……’라고 했잖아. 역시, 너도 같은 마음이었구나…….”
“들었는데 왜 물어!”
홍규헌이 성필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소녀연맹, ‘위어스’ 입점 결정.
단, 시간을 들이면서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