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99화 (599/760)

599화

“한 이사님.”

성필이 2층 계단으로부터 내려왔다.

한구인은 테이블에 어질러진 서류를 정리하여 서류집에 정갈하게 넣었다.

“지금 바로 갈까요?”

“예.”

가자고 했지만, 둘의 시선은 현관이 아니라 백설하에게로 향했다.

백설하는 성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호랑이를 마주한 사람처럼 몇 걸음 황급히 물러났었다. 그리고 이제는 목석처럼 굳어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설하야 왜 그래?”

“제, 제가 왜애효오?!”

눈이 사방팔방 한 군데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로 움직였다.

요란스럽게 굴러가던 눈은 성필이 있는 방향도, 한구인이 있는 방향도 아닌 위쪽 사선 45도에 멈췄다.

“……아.”

두 명의 이사가 동시에 ‘아’ 소리를 냈다.

저마다 짚이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설하가 아까 면담할 때 많이 부끄러웠나 보구나.’

그야 눈물을 그렇게나 쏟아냈으면 부끄러울 만도 하다.

‘설하 씨가 박 이사님의 개인정보를 마음대로 본 것에 죄책감을 느끼시나 보군. 정말 금융 정보를 도용하려고 하셨나?’

그야 잠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부끄러워할 만도 하다.

당연히 두 사람의 추측은 모두 틀렸다. 하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백설하의 괴상한 행동을 납득했다. 대처법도 같았다.

“한 이사님, 가실까요?”

“예. 설하 씨, 그럼 가보겠습니다.”

백설하는 여전히 사선 45도 위쪽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 아아, 안녕히, 다녀오세효오오…….”

성필과 한구인은 이상한 백설하를 놔두고 회사를 나섰다. 둘 다 백설하에 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옐로 서브마린 엔터까지는 한구인의 차로 간다. 이유는, 한구인의 차가 성필의 것보다 신형이며 비싸고 보기에도 멋졌기 때문이다.

이사급 둘이 간다고 했으니, 구색을 갖추려면 한구인의 차가 좋을 터였다.

한구인은 회장님의 기사로 취직해도 될 정도로 부드러운 운전실력을 자랑하며 차를 몰았다.

그는 조수석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성필을 보며 물었다.

“박 이사님 요즘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렇게 보이세요?”

“예. 힘이 넘쳐서 수업 시간에 자꾸 꼼지락거리는 고등학생을 보는 거 같습니다.”

“……?”

대충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는 알겠다.

“이게 플라시보 효과일 수도 있는데, 제가 최근에 영양제를 하나 추가로 챙겨 먹게 됐어요. 아르기닌이라고 단백질 합성, 혈관 확장, 근육 생성에 도움이 된…… 왜 그러세요?”

성필이 이야기하던 도중, 한구인은 갑자기 차의 여기저기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너무 광고 멘트 같아서, 어디 카메라라도 설치해뒀나 했습니다.”

“참신한 발상이네요.”

한구인은 고작 영양제 하나로 체력 증진 효과가 있을 거라고 보진 않았다.

물론 비타민 같은 걸 안 챙겨 먹다가 먹던 사람은 효과를 볼 수도 있겠다만…….

‘박 이사님은 안 그래도 건강 관리를 열심히 하시는 분이시니.’

성필의 말마따나 플라시보 효과가 맞을 것이다.

그렇게 한구인은 성필의 영양제 찬양을 들으면서 옐로 서브마린 엔터로 향했다.

* * *

“알겠지 너희들?”

옐로 서브마린 엔터의 대표 신대영은 웨이퍼센트 멤버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오늘 가로 엔터 쪽에서 너희들 보러 오니까, 뭘 물어봐도 잘 대답해야 해. 알겠어? 혹여라도 너희 때문에 책잡혀서 계약 망가지기만 해봐라. 어?”

웨이퍼센트 멤버들은 침묵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옛날부터 신대영은 대표로서 서열에 민감했다. 아이돌이 나름 예술가랍시고 나대지 않고, 부하직원처럼 엄격한 위계를 지키길 바랐단 뜻이다.

그리하여 멤버들은 신대영 앞에 설 때면 군대처럼 열을 맞추어 서서 공손히 손을 모아야 했다.

“대답 안 해?”

“예!”

멤버들이 일제히 답했다.

신대영은 눈을 부라리며 멤버를 한 명씩 쳐다보았다. 멤버들은 그의 눈빛을 받을 때마다 숨이 막히는 듯했다.

“야, 강현이 너.”

“옙.”

웨이퍼센트의 리더인 강현이 바짝 긴장하여 답했다.

“너 임마, 내가 너 딴마음 품고 있는 거 다 알아. 근데 말이다, 이 판까지 초 치면 안 되는 거 알지? 응? 그 정도 정신머리는 있지?”

강현은 씩 웃었다.

신대영은 그 웃음이 마음에 안 드는지, 그의 어깨를 약하게, 그러나 기분 나쁘게 툭 밀었다.

“야, 강현이.”

“예, 대표님.”

“믿는다? 어?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재계약할 거라고, 어?”

“네, 압니다.”

“그래, 아무리 못 배웠어도 머리는 돌아가야지.”

멤버들의 표정이 굳었다.

“너희 식구들 목이 다 네 입에 걸려 있어요. 알지? 잘해야 한다? 알겠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들었던, 그럼에도 상처가 되는 말.

못 배워먹은 놈.

고졸.

부끄러워할 게 아니다. 하지만 대표의 입에서 나오는 ‘못 배워먹은’이란 표현에는 명확한 비아냥과 무시가 섞여 있었다.

“옙,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대표님!”

강현은 여전히 웃으면서 답했다.

대표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면서 거칠게 강현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머리를 쓰다듬는다기보다 머리를 붙잡고 흔드는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혹시 아냐? 네가 가로 엔터 가면 재계약 또 하고 싶어질지?”

대표는 또 멤버들을 한 번씩 부라리곤 좁은 연습실을 나섰다.

그제야 강현은 꾹 쥐었던 손을 폈다.

그는 웨이퍼센트의 리더이지만 유독 대표로부터 취급이 박했다. 이는 그가 옛날에 저지른 일 때문이다.

“형 고생 많다.”

유빈이 곧바로 다가와 강현을 위로했다.

“그래도 이젠 대표님 뭐라 하는 거 없어질 테니 좀 낫겠지. 아니, 내 말은, 남은 2년은 좀 낫겠다고.”

강현은 눈은 찌푸리고, 그러면서도 입가엔 미소를 담아 유빈을 보았다.

그가 대표에게 미움받은 이유는, 옛날에 대표가 ‘재계약할 거냐?’란 질문을 던졌을 때 순간 망설였기 때문이었다.

아이돌은 7년 계약을 기본으로 하고, 계약이 만료됐을 때 3년 추가 계약이 가능하다.

기획사가 아이돌을 장기간 착취하는 것을 막고, 아이돌에게도 기획사와 승부할 패를 쥐여주기 위한 법이었다. 물론 양측의 의사에 따라 조기에 재계약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쨌거나, 강현은 대표가 넌지시 재계약 의사를 물어볼 때 ‘네’라 즉답하지 않았다고 미움받았다.

“적어도 형 배신자 취급은 안 당할 거 아냐.”

“음.”

강현은 손바닥을 몇 번 부딪쳤다. 마치 박수 치는 모양새였지만, 그보다 무거운 태도였다.

이는 그가 마땅히 할 말이 없을 때 취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생각이 깊어 말을 꺼낼 땐 항상 조심스러웠다.

그 간격을 메워주는 제스처다.

“너희도 걱정하지?”

강현의 말에 유빈은 허를 찔린 사람처럼 굳었다. 강현은 이해한단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멤버들은 강현과 달리, 아이돌이 끝난 후 명백한 진로를 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에게 가로 엔터로의 이적은 커다란 기회다.

강현이 ‘재계약하지 않을 예정입니다’란 말을 꺼내면, 가로 엔터는 당연히 옐로 서브마린 엔터를 합병하지 않을 터다.

유통기한이 2년도 남지 않은, 성적도 시원찮은 그룹을 합병할 이유가 없잖은가.

옐로 서브마린 엔터의 직원들이 목적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웨이퍼센트 자신들이 누구보다 잘 안다. 자기네 회사의 직원들이 그다지 쓸모는 없으리란 것을.

“걱정 마.”

강현은 여느 때처럼 리더로서 믿음직한 형을 연기했다.

그는 멤버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재계약 의사가 있다는 듯 연기해야만 한다.

계약이 성사되지 않는 것 자체보다,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을 때가 더 두렵다.

웨이퍼센트가 가로 엔터로 가는 게 기회라곤 하지만, 멤버들은 어느 정도 해탈했다. 5년이나 못 뜬 그룹이 회사만 옮긴다고 달라지겠냐 싶은 것이다.

그러니 가로 엔터에 가고 싶은 마음보다는, 계약이 어그러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깊다. 왜냐하면, 강현이 본심을 드러냄으로써 계약을 망치면 신대영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신대영은 2년 계약을 목줄로 삼아 웨이퍼센트를 개처럼 굴릴 수도 있었다. 지금도 거의 개나 마찬가지였으나, 계약이 파투 나면 이보다 더 심해질 건 명확했다.

그러니까, 동생들을 위해서.

“잘할게.”

강현은 최선을 다해 연기해야만 했다.

* * *

성필과 한구인은 옐로 서브마린 엔터로부터 방을 하나씩 얻을 수 있었다.

평소엔 사무실로 쓰이는 공간과 대표 집무실로 쓰이는 공간이었다.

옐로 서브마린 엔터는 빌딩의 한 층에 세 들어 운영하는데, 따로 내어줄 만한 방이 마땅치 않았다.

“고생했어요.”

성필은 면담을 끝낸 웨이퍼센트 멤버를 내보내곤, 당장 몇 시간 전까지 사무실로 쓰였을 공간을 바라보았다.

책상 몇 개가 벽에 나란히 붙어 있는 게 전부였다. 이 좁은 공간을 쓰던 직원들은, 현재 성필과 웨이퍼센트의 면담 때문에 어디론가 쫓겨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로 엔터로 부를 걸 그랬네.’

직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나마 한구인은 다행이었다. 대표 집무실은 대표인 신대영만 사용하는 공간이었으니, 그만 자리를 비우면 됐으니까.

성필은 남은 멤버를 떠올렸다.

‘리더인 강현이랑 유빈이.’

성필은 유빈과 유독 접점이 많았다.

처음 웨이퍼센트의 로드매니저를 맡았을 때, 가로 엔터 홍보 영상을 촬영할 때, 그리고 러시아에서.

‘또, 나랑은 관련 없는 일이지만 리카가 대시받았다고 했던가.’

신아름에게 듣기로, 유빈은 나름 적극적이었다.

전화번호가 적혔을 쪽지를 리카의 앞에 두세 번 떨어뜨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리카가 주워서 정중하게 돌려주었다던가.

개인적으로 리카에게 몇 번이나 (영입하느라)차여보았던 성필로선, 유빈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안녕하십니까!”

그때 문이 열리면서 유빈이 등장했다.

그는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했다. 그의 상징인 분홍색 머리칼이 찰랑였다.

“유빈입니다!”

“반가워요 유빈 씨. 앉으세요.”

“예엡!”

유빈은 성필 앞의 의자에 앉았다. 그는 성필을 마주 보고서도 주눅 드는 기색 하나 없었다.

이전에 성필과 마주했던 다른 멤버들이 어딘가 어색한 구석이 있던 데 비해, 유빈은 익숙한 사람을 만나는 듯한 태도였다.

붙임성이 좋은 타입니다.

“요즘은 새로 들어온 로드들한테 싸늘하게 안 대하죠?”

“아아 이사니임, 그땐 좀 어렸잖아요…….”

하긴 4년 전이니, 어렸다면 어렸다.

성필은 큭큭 웃으면서 그의 커리어와 인적 사항이 적힌 서류를 꼼꼼히 훑었다.

“예, 그럼 유빈 씨.”

“유빈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형님!”

“형님?”

“이, 이사님?”

“형님은 무슨 형님이에요. 유빈 씨 나이시면 저는 그냥 아저씨죠.”

“아저씨이…… 라고 호칭을……?”

성필이 눈을 부라리자 유빈이 급히 자신의 입술을 착착 때렸다.

“박성필! 이사님!”

“하하.”

성필이 장난스럽게 웃자 유빈의 표정이 밝아졌다.

“음, 개인적으로는 유빈 씨를 좋게 봐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라이브 가끔 보거든요.”

“예?”

유빈은 성필이 빈말을 하는 건가 의심하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이돌의 라이브가 다 그렇지만, 팬을 위해 방송하는 것이다. 그리고 웨이퍼센트의 팬은 대다수가 여자였다.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유빈의 방송은 타깃이 여자였다. 여자 팬을 위한 방송인 것이다.

그런데 성필이 왜……?

“바로 전 방송에서 팬이 다른 남돌 직캠 봤다고 했을 때 삐친 연기 하셨잖아요. 팬 조련 잘하시던데요.”

“아, 그건 진짜 삐친 거였어요.”

“……아.”

“그렇지 않아요 이사님? 그게, 저희랑 팬은 이런저런 관계잖아요? 유사연애…… 그러니까, 저는 만인의 연인이잖아요? 제 세일즈 포인트, 가 아니라 어트렉티브니스거든요? 그럼 팬들도 연인으로 대해줘야 하잖아요? 근데 다른 남돌 직캠을 봤단 건 바람…….”

“네, 알겠어요.”

직업 정신, 굉장히 투철.

유빈은 일본 아이돌이었다면 더 성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이러한 모습이 웨이퍼센트의 10만 장벽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겠지.

“꿈이 있어요?”

“최고의 아이돌입니다!”

소녀연맹 아이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 몇 개만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소녀연맹 멤버들의 꿈이 ‘최고의 아이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이 생겨난 데는 성필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당장 자체 제작 다큐멘터리인 ‘소녀연맹 비긴즈’ 1화의 제목만 보아도 ‘최고의 아이돌’이다.

“제가 면담하러 온다니까 외우신 거예요?”

“아니요! 최고의 아이돌이 단연코 목표입니다!”

“방법은요?”

“……방, 법?”

“꿈이라면 구체적인 방법을 정해뒀을 거 아니에요. 설마 물 떠 놓고 빌기…….”

성필은 볼펜으로 서류를 톡톡 두드렸다.

“기도하는 게 방법은 아니죠?”

“아…… 열심히 연습…….”

“네에, 그리고?”

“라이브…… 열심히…….”

“네, 또?”

“…….”

유빈은 깨달은 듯하다. 최고의 아이돌이 어떻게 되는지,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을.

“조, 좋은 회사 들어가기……? 대형 기획사에…… 스카웃……?”

성필이 박장대소했다.

유빈은 자신의 대답이 옳았는지는 모르지만, 성필이 웃으니 일단 웃었다.

“유빈 씨.”

성필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꿈은 목표처럼 지점이 아니라 풍경이에요. 목표란 건 구체적이잖아요. 판매량 얼마 달성, 무슨 직업 성취, 어떤 직책까지 승진, 이렇게요. 그런데 꿈은 그럴 수 없어요. 풍경인 거예요. 유빈 씨가 그리는 꿈의 풍경은 어떤 거예요?”

유빈은 그의 말을 듣고 머리가 멍해졌다.

꿈은 풍경이다?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다.

최고의 아이돌이 된 풍경.

떠올리려 했으나, 떠올려지지 않았다.

클리셰적인 이미지가 전부였다. 큰 무대에서 수만 명의 팬에게 둘러싸여 노래 부르는…… 그런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풍경이 전부였다.

“다시 물을게요.”

성필이 다리를 꼬았다.

“꿈은?”

“…….”

유빈은 다리 사이에 모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프.”

“프?”

“프로듀서, 입니다…….”

“어떤? 영화? 드라마? 음악?”

“아이돌 프로듀서…… 입니다.”

성필의 얼굴이 아까보다 누그러졌다.

“그럴 거 같았어요. 믹스테입에 쏟으신 정성을 보면, 그쪽에 흥미가 없곤 나올 수 없는 고민이 있었거든요.”

“어, 어? 보셨어요?”

성필이 온화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유빈의 표정은 이제껏 본 적 없을 수준으로 밝아졌다.

“하나사키 인 서울(花咲き In Seoul).”

유빈의 첫 번째 믹스테입 타이틀인 ‘하나사키 인 서울’은, 아이돌 믹스테입 중 독보적인 인지도를 지니고 있었다.

뮤직비디오 조회 수 600만 회 이상이다.

믹스테입이 아이돌의 타이틀곡 수준의 프로모션이 없단 점을 감안했을 때, 그건 업적이라고 불려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 업적은 순전히 예술적 성과라고 보기엔 힘들었다.

“주제를 일부러 그렇게 정하신 거죠? 화제성 때문에요.”

‘하나사키 인 서울’은 처음 발표됐을 때 기대 이상의 주목을 모았다.

아니, 논란이라고 보아야 좋을 수준이었다.

왜색(倭色)이 짙다는 이유였다.

그의 뮤직비디오에선 한국적인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식 식당, 가옥, 그리고 한국이지만 벚꽃이 가득한 거리였기에 일본처럼 보였던 풍경까지.

심지어 가사의 절반이 일본어 랩이었다.

유빈이 분홍으로 염색했던 것도 그때였다.

사람들은 케이팝 아이돌이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수 있냐고 입을 모아 욕했었다.

“예, 그것도 뭐, 계산에 있긴 했죠…….”

앞서 말했다시피 믹스테입은 대대적인 프로모션이 불가능하다. 아이돌의 사비로 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기도 하고.

“제작비는 얼마가 들었어요?”

“300만 원이었나……. 빠듯했어요. 저 도와주시는 형 누나 동생들이랑 프로듀싱 크루를 꾸렸었는데, 그 친구들 없었으면 못 만들었겠죠.”

유빈은 뿌듯함과 씁쓸함을 둘 다 담아서 말했다. 실제로 그가 ‘하나사키 인 서울’에 가지는 감정은 양가적일 것이다.

자신의 음악적 성과를 증명했으나, 그에 비례하듯 비난을 얻어먹었으니까.

“그때 믹스테입은 정말 처음이니까 용감했던 거 같아요. 제 모든 걸 쏟아부었고, 그래서 후회도 없는데, 상처도 많이 받았고, 뭐…….”

유빈은 무거움을 지우려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

“그랬어요! 네, 추억으로 할게요.”

“아이돌 프로듀서가 꿈이시고.”

“네, 하하, 진짜 프로듀서님을 뵙고 말하니까 부끄럽네요.”

“그럼, 유빈 씨가 보는 꿈의 풍경은요?”

유빈은 아까처럼 굳지 않았다.

오히려 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저는 우리나라 노래가 망가처럼 됐으면 좋겠어요.”

“……망가?”

“아, 일본 만화요.”

“야한 거……?”

일본은 ‘성진국’이란 별명이 있다.

성적인 요소에 개방적이고, 또한 성 관련 미디어 산업이 발달했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유빈이 바라는 풍경이…… 망가?

“아뇨 ‘망가’는 그냥 만화예요! 저는, 우리나라 음악이 일본 만화 시장처럼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 맞나요? 일본 만화 시장처럼 된다는 건…….”

중심 문화를 전복하겠단 뜻이다.

일본 만화 산업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그렇기에 유일한 문화적 성공 사례다.

만화는 태생부터 서양권으로부터 시작됐다. 당연히 만화 산업, 그 문화의 중심이자 표준이 서양이었다.

하지만 중심은 어느 순간 전복됐다.

일본 만화 산업은 서양을 따라잡으려 혈안이 됐었다. 그건 마치 90년대 한국의 음악계 같은 흐름이었다. 어떻게든 미국과 유럽을 따라잡으려는 필사적인 열망 말이다.

일본은 서양에서 수입한 만화란 문화에 일본이란 껍데기를 씌웠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여, 마침내 중심과 견줄 퀄리티를 이룩했다.

그 퀄리티를 지니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르면서도 일본풍의 개성을 더했다.

만화 시장의 주류인 ‘소년만화’ 장르는 뿌리가 서양 신화다. 껍데기를 전부 지우고 보면, 소년만화의 주인공들과 그들이 겪는 시련은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 아킬레우스나 다름없었다.

단지 헤라클레스가 닌자고, 테세우스가 사신이고, 아킬레우스가 사무라이였다.

그래서 세계에 통했던 것이다.

이젠 신화라면 당연히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리는 세계인들에게, 통할 수 있었다.

통하는 것을 넘어 만화의 기준은 일본이 됐다.

변방 문화가 중심부 문화를 전복하고 중심을 대신한 유일한 사례가, 바로 일본 만화 산업이다.

그러니까 유빈의 말은…….

“네, 케이팝으로 세계를 정복할 거예요.”

“…….”

성필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놀라서였다.

어릴 때의 농담으로도 하지 않을 ‘세계정복’을, 유빈은 너무나 해맑고 쉽게 입에 담았다.

대중문화 역사상 단 한 번 존재했던 중심 문화 산업의 역전 현상을, 유빈은 스스로 이뤄내겠노라고 선포했다.

어리니까 할 수 있는 치기 어린 이야기인가. 그렇게 치부하기엔, 그의 눈은 맑으면서도 확고한 믿음을 품고 있었다.

동시에 성필은 아연해지는 기분을 막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구체적으로는 정호환이나 홍규헌이 성필을 처음 볼 때 이랬을까?

너무 당연하게 ‘최고의 아이돌’을 만들겠다고 선언하던 성필을 보고, 다른 이들도 현재의 성필과 같은 감상을 품었을까?

‘아니, 얜 나보다 훨씬 더 나갔잖아.’

성필은 이미 존재하는 영역 내에서 톱에 오르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유빈은 영역 밖의 거대한 적을 쓰러뜨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의 꿈은 누구도 본 적 없는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존재하는지, 존재할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아득한 이상향이었다.

“아, 아, 제가 살아서 톱에 앉겠단 건 아니고요!”

유빈은 성필의 경악을 읽었는지 급히 변명했다.

“디딤돌이 될 수도 있잖아요! 데즈카 오사무나 미야자키 하야오처럼요! 아니, 만화가 아니라 케이팝으로 보면 KS 엔터 정호환 이사님이나.”

유빈이 성필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가리켰다.

“박성필 이사님처럼…….”

“허어…….”

만약 이게 계산된 아부라면, 유빈은 아부의 천재임이 틀림없다.

“지금 저를 데즈카 오사무랑 비교하신 거예요?”

리카가 옆에 있었다면 ‘손나(그런)! 아무리 이사님이 대단해도 만화의 신이랑은 비교할 수 없어요!’라고 했을 것이다.

“어, 음, 어.”

유빈도 자신이 너무 나갔다고 느낀 듯했다.

“케이팝 씬의…… 말하자면 그렇단 거죠, 네.”

“…….”

“…….”

“…….”

어깨를 짓누르는 침묵이 둘 사이를 메웠다.

유빈은 제 발 저려 먼저 입을 열려고 했다.

‘너무 거창하죠?’라거나 ‘말이 안 되긴 하죠?’ 같은 말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의 꿈을 말할 때마다, 항상 말미에 이러한 사족을 붙여야만 했었다.

“멋지네요.”

그런데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빈 씨가 그리는 풍경은 정말 멋져요. 저도 어디 가서 꿈이 작단 이야기는 안 듣는데, 유빈 씨에 비하면 한없이 작네요.”

유빈은 ‘정말요?’라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성필을 보니 다른 걸 묻고 싶었다.

모처럼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프로듀서 중 한 명이 눈앞에 있으니까.

“이룰 수 있을까요……?”

“글쎄요.”

성필은 명확한 해답이 아닌 비유로 답을 대신했다.

“20대의 데즈카 오사무도, 자기가 만화의 신이라고 불릴 줄은 모르지 않았을까요? 자기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 답은, 유빈에게 어떤 격려보다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 * *

성필과 한구인은 미처 면담을 끝내지 못하고 가로 엔터로 돌아가야 했다.

예상보다 시간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구인은 몇 직원들과의 면담을, 그리고 성필은 한 멤버와의 면담을 남겨두어야만 했다.

다음 주, 멤버들의 스케줄이 빌 때 성필이 다시 오기로 했다. 면담은 이번 한 번이 끝이 아니었으니까.

“딱 한 분만 남겨두신 겁니까?”

“네.”

돌아가는 길, 한구인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오늘 전부 끝냈으면 그래도 다음 주엔 일이 더 줄어드는 것 아닌가.

하지만 성필은 안타깝거나 아쉽지 않았다.

일부러 마지막 면담 멤버인 강현까지 시간이 남지 않도록 조율했던 것이니까.

‘내가 오늘 웨이퍼센트 멤버분들에게 물어본 건.’

꿈.

가슴 떨리는 단어다.

혹은 목표였다.

성필은 멤버들이 아이돌 활동에 가지고 있는 아쉬움이나 목표 의식을 불태우도록 했다.

지레짐작 ‘안 되겠다’며 포기하고 있던, 먼지 쌓여 있던 꿈을 톡톡 건들였다.

‘재계약을 거부하는 건 리더인 강현.’

면담을 남겨둔 것도 강현이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강현은 성필과의 면담으로 들뜬 멤버들과 마주하고 지내야 할 것이다.

성필은 그 시간이 강현에게 자극이 되길 바랐다. 접은 꿈을 잠시나마 펴 볼 마음이 들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설득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지.’

때론 상대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설득의 비법이 될 수 있다.

“한 이사님은 면담 어떠셨어요?”

“경영지원실에 잘생긴 남자 직원이 있더군요.”

“……?”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여기서 예상치 못한 커밍아웃이 튀어나올까 봐.

“아인 씨랑 어울릴 듯했습니다.”

“아…….”

“아인 씨 나이면 한창 마음의 꽃을 피울 시기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연애를 못 하시더군요. 대학생이셨으면 과팅이나 소개팅도 많이 하셨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그 남직원 분은 굳이 아인 씨가 아니더라도 팀에 들이길 바라지만, 제가 아인 씨의 봄을 가져다주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군요.”

“사려 깊으시네요.”

다른 의미로는 눈치가 없다.

성필이 예상하기로, 권아인은 한구인에게 마음이 있다. 하지만 한구인이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아인 씨는 리카랑 동갑이니까. 그런 애가 마음이 있을 거라곤 보통 생각 못 하겠지.’

어쨌거나 뭐, 둘이 원만하게 지냈으면 한다.

“아, 한 이사님 잠시 편의점 좀 들러도 될까요?”

“예. 마침 저도 살 게 있었습니다.”

둘은 편의점에 들어가 각자 필요한 것을 샀다.

그런데 성필은 고민이 좀 필요했다.

오늘 단백질 음료를 못 마셔서, 임시방편으로나마 편의점에서 파는 것으로 때워야 했다.

“아직이십니까?”

“아…… 죄송해요. 먼저 차에 가 계세요.”

성필은 약 10분의 고민 끝에, 칼로리 100짜리 단백질 14g 함유 음료를 골랐다.

편의점 밖으로 나가니, 한구인은 문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추운 날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가. 미안해지려던 순간, 그의 어깨 너머로 다른 사람이 보였다.

“여자친구는 없으신…… 거죠……?”

“없긴 한데, 그…….”

여자였다.

한구인이 여자에게 번호 따이고 있다.

심지어 그냥 봐도 20대처럼 보이는데.

성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아인 씨 마음을 모르긴 개뿔. 저런 얼굴로 살면 나이가 뭔 상관이야?’

옛날에 한구인이 도끼병인 것 같다고 생각한 적 있었는데, 도끼병일 만하다.

왜 도끼병이 권아인에게만 안 발동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한구인이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걸 수도 있겠다.

한구인은 성필이 나온 것을 보곤 살았단 듯 여자 쪽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동료분이 나오셔서, 죄송합니다.”

“그, 그러면 제 번호만이라도 받아가세……!”

둘은 재빨리 차 안으로 들어왔다.

한구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성필은 폰을 꺼내어 성형외과를 검색해보았다.

* * *

성필은 요즘 기분이 좋았다.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영양제 덕이었다.

유하음이 추천해준 아르기닌 말이다.

아침마다 회춘한 듯했다.

샤워할 때도 힘이 넘쳤다.

그런데.

“허읏.”

성필은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책상틀에 아래쪽이 살짝 쓸렸다. 그것만으로도 반응이 왔다.

성필은 곧바로 다시 앉았다.

“성필아 왜 그래?”

옆자리의 손혜빈이 쳐다보았다.

성필은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아냐. 잊어먹었던 일이 생각나서.”

“뭔데?”

성필은 아이튜브로 접속해 케이어스 직캠을 검색했다.

“신곡 떴어?”

“어? 아아, 아니. 어, 소유 씨가 솔로 앨범 낸다잖아. 그래서 어…… 컨셉 분석하려고.”

“열일한다.”

손혜빈은 다시 본인의 모니터에 집중했다. 그녀의 모니터에는 A반 연습생들의 목록이 떠 있었다.

성필은 그녀의 주의가 분산된 것을 확인했으나,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엄격, 근엄, 진지한 얼굴로 모니터에 떠오른 진소유의 직캠만 보았다. 이 기분이 가라앉기를 바라면서.

‘……역효과잖아?! 마, 말도 안 돼. 내가 아이돌 영상을 보면서?!’

성필은 당장 직캠을 끄고 애국기 사진을 띄웠다. 그리고 눈을 감은 후 애국가를 조용히 읊조렸다.

약 5분간의 투쟁 끝에 간신히 성공했다.

성필은 조심조심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진짜야?”

“그렇다니까요!”

평범한 리카와의 담소 시간.

“연금형 노년 보장 연금이 겨우 이 가격밖에 안 해요! 매달 100,000원씩 넣으면 34년 후에는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어요! 당장 국민연금 체납하고 여기에 돈을 부으세요!”

“그 전에 회사가 망하면 어떡해.”

“에? 한국은 대기업이 안 망하는 나라 아닌가요? 망할 위기가 오면 정부가 필사적으로 세금을 투입해서 살려내잖아요?”

“그래도 100,000원은 너무 크잖아.”

“대책도 있어요! 놀랍게도 이 보험은 저축형도 겸하고 있어서 중도 해지하면 이자와 함께 돌려준다구요!”

“너 보험판매원이…….”

성필이 갑자기 늘어진 테이프처럼 말을 끌었다.

“이이이yeeee…….”

“이사님?”

“아, 나, 화장실.”

“에에, 그런 건 하나하나 말씀 안 하셔도 된…….”

성필은 달렸다.

달려서 사라졌다.

리카는 멍하니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다가, 폰을 꺼내어 아까 설명했던 보험 약관을 꼼꼼히 체크했다.

한편 화장실로 온 성필은 칸 안에 들어가 털썩 앉았다.

‘내 몸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중학생이냐? 고등학생이냐?

사춘기냐?!

“유하음 이 미친놈아 너 나한테 뭘 먹인 거야!”

[내가 먹였냐? 아니, 근데 그게 그렇게 효과가 좋아? 난 안 그렇던데.]

“안 그렇긴 뭐가! 이거 때문에 내가, 내가…….”

[일상생활이 안 돼? 부럽네.]

“부럽다고?! 너 이……!”

[그거 약 때문이 아니라 쌓일 대로 쌓인 거 아니야? 너 솔로로 지낸 지 7년째라면서. 와, 진짜 대단하다 너. 근데 이런 자랑은 네 애인한테 하세요. 맞다, 없댔지? 나 바빠. 끊는다.]

뚝.

전화가 끊기고, 성필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심호흡만 했다.

‘진정하자.’

성필은 전생에 윤상열에게서 배웠던 명상법을 실천했다.

눈을 감고 호흡에만 집중한다. 숨이 들어갔다 나오는 코와 인중의 촉각에만 집중한다.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하는 감각. 코로 숨을 쉴 때마다 인중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약한 바람의 느낌. 성필은 그 미세한 감각에 집중했다.

스읍, 후우, 스읍, 후우.

약 10분 후, 성필은 조심조심하면서 화장실을 나왔다. 그는 세면대 거울을 바라보면서 깊이 한숨을 쉬었다.

“혈색 더럽게 좋네…….”

아무래도 그 영양제는 끊어야겠다.

* * *

“회의 끝, 해산하자.”

임원 회의가 끝나고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성필은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홍규헌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성필은 움찔했지만, 여전히 근엄한 표정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박 이사 뭐 해? 안 나가?”

“저는 고민할 게 더 있어서요.”

“고민? 여기 앉아서?”

“네. 지금 다른 행동을 하면 집중이 끊길 거 같아요. 저는 여기 좀 더 있다가 갈게요.”

“뭐어…… 그래.”

홍규헌은 임원들과 나가며 성필을 칭찬했다.

“박 이사 옛날에도 그랬는데 요즘은 더 열심인 거 같아. 너무 무리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정적에 잠긴 회의실 속, 성필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돌겠다. 진짜 일상생활이 안 돼.’

이건 거의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의 컨디션이다.

사람마다 잘 받는 약이나 영양제가 다르다던데, 성필에겐 아르기닌이 그러했던 모양이다.

성필이 인터넷에서 찾아본 사례 중에서도 성필만큼 극적으로 기능(?)이 향상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있다면, 광고일 게 분명한 ‘남편이 달라졌어요’ 종류의 글뿐이었다.

‘어디 스쳐서 자극이 오는 건 이해하는데, 가만히 있어도 반응이 오는 건…….’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성필은 짜증이 나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욕구가 강해지고 해소가 안 되니, 스트레스가 점점 커진다.

‘아무것도 안 해도 답답하고 짜증이 계속 나네.’

다시 훈련소에 들어온 기분이다.

아니, 훈련소는 사람을 계속 굴려서 이런 생각이라도 안 나게 했으니 낫지…….

성필은 어쩔 수 없이 눈을 감고 윤상열 명상법을 실천했다.

그때였다.

“이사님?”

노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

“계세요?”

백설하였다.

성필은 움찔하면서 의자를 앞으로 당겨 테이블에 몸을 꽉 붙였다.

“저,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백설하가, 다가온다.

“이야기, 좀 길 수도 있는데, 이야기를…….”

다가올 뿐인데.

“제에, 제가…….”

“안 돼.”

다가오던 백설하가 우두커니 멈춰 섰다.

“……네헤?”

성필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그리고 공포에서 비롯된 서늘한 목소리로 칼같이 말했다.

“지금 안 된다고. 나가.”

백설하는 당황하여 ‘아, 아’란 말만 반복하다가, 눈물이 핑 돌아 눈가를 아련하게 떨었다.

그녀가 말했다.

“네헤, 죄송합니다하아…….”

그리고…….

* * *

“…….”

성필은 눈을 감아, 오랜만에 본 미래를 되새겨보았다.

앞에선 여전히 백설하가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성필이 아무런 징조 없이 눈을 감자, 이상하게 여겼는지 발소리가 멎었다.

“이사님?”

성필은 눈을 떴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인자하고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응, 설하한테 내줄 시간은 언제든지 있지.”

백설하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성필을 향해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성필은 골리앗을 마주한 다윗처럼 용기 있고 싶었지만,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견뎌내야 한다.

해병대 시절처럼,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만 하는 순간이 다시 찾아왔다. 잠 못 자고 밥 못 먹고 천자봉을 올랐던 순간을 떠올려라, 박성필! 그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

“설하야, 옆 말고.”

“네?”

“내 옆 말고, 맞은편에 앉아. 그래야 마주 보면서 얘기할 수 있지.”

“아…… 네.”

악으로, 깡으로, 하지만, 최소한의 거리는 확보해두어야만 했다.

백설하는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아 성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성필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정면에 앉은 백설하를 보았다.

“…….”

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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