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9화
약 한 시간 후, 성필은 숙소로 돌아왔다.
다시 문을 열어준 백설하는 아까보다 훨씬 깔끔한 모습이었다. 눈도 멀쩡히 떠 있었고 머리칼도 부스스하지 않았으니.
성필은 현관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고 복도에 발을 디디니 백설하가 버릇처럼 한쪽으로 물러났다. 성필이 나아가면 뒤를 따를 생각이었다.
“설하가 집 주인 아니야?”
“아.”
백설하는 허둥지둥 복도를 걸었다. 성필이 그녀를 따랐다.
복도 끝의 문을 여니 거실이 나왔다.
성필은 문을 열자마자 왼쪽 벽을 보았다. 그곳엔 멤버들이 처음 입주했을 때 걸었던 화이트보드가 있었다.
옛날에 성필이 숙소에서 지켜야 할 규칙들을 죽 써두었다. 이젠 성필이 쓴 것보다 멤버들이 추가한 규칙이 훨씬 많았다.
[2. 일주일에 한 번 회사 직원이 숙소 상태를 점검합니다.
3. 청소 잘하자.
…….
21. 아침에 일어나 먼저 거실로 온 멤버는 창문을 열어 환기하기.
24. 생필품을 빌릴 때는 그냥 가져가지 말고 확인받기. 취침 시간에는 말없이 가져가도 괜찮으나 다음 날 꼭 주인에게 말하기.
28. 휴일 AM09:00 이전에 큰 소리를 낸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
40. 멤버 조아라의 맥주는 야채칸 절반 이상을 채울 수 없다.
41. 멤버 신아름은 냄새나는 음식을 방 안에서 먹지 않는다.
42. 멤버 조아라는 신아름의 옷을 말없이 입을 시 리더 백설하의 제재를 받는다.
43. 멤버 신아름은 조아라의 옷장을 무단으로 점거할 시 멤버 장하양의 제재를 받는다.
44. 멤버 조아라와 신아름은 임의로 규칙을 추가할 수 없다.
…….]
규칙만 수십 개였다.
규칙의 숫자는 중간에 없는 부분이 몇 개 있었다. 원래 있었으나 없어진 규칙이었다.
멤버들이 말 없어도 잘 지키게 되었거나, 규칙의 무용함이 증명되었거나.
처음 들어왔을 땐 백지 같던 숙소도 이젠 사람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사님?”
백설하가 부르자 성필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앉으란 듯 식탁을 손으로 가리켰다.
백설하가 앉았다.
성필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둘은 잠시 탐색하듯 서로를 보았다.
성필이 무의식적으로 코를 찡그렸다. 백설하의 샴푸 냄새가 은은히 풍겨왔다. 그는 일어나며 말했다.
“환기할게. 괜찮아?”
“아, 보일러 끌까요?”
“아냐, 조금만 열 거야.”
성필은 창문을 1/4쯤 열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창문으로 불어온 겨울바람이 숙소 안의 훈기를 점점 지워갔다.
“숙소 일은 어떡할지 정했어?”
앞으로 이삼 주 이내에 소녀연맹에게 큰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그녀들은 4년 이상 살아온 정든 숙소에서 나가야 한다.
이 숙소는 소녀연맹의 후배 그룹이 쓸 것이다.
대신 소녀연맹에겐 선택지가 있다.
독립, 혹은 이 숙소보다 훨씬 넓은 38평 아파트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 만약 독립하고 싶은 멤버가 과반수를 넘는다면 새 숙소는 없는 일이 된다.
두 명을 위해 숙소를 따로 구해주는 건 비효율적이다. 그럴 바에야 독립하는 게 낫다.
그야말로 대사건이다.
“아직요…….”
“이 일로 갈등이라든가…….”
성필은 말을 멈추었다.
오늘은 리더 백설하를 보기 위해 온 게 아니었다. 일적인 이야기를 꺼내선 안 됐다.
성필이 백설하를 찾아 숙소까지 온 건 그녀와 쌓아왔던 모든 오해를 풀기 위함이었다.
“천천히 생각해봐. 아직 시간은 남았으니까.”
“네…….”
“설하야.”
이름이 불린 백설하가 허리를 바짝 세웠다.
“네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을지 알아.”
“……오해, 요?”
“네가 옛날에 한 말 때문에 상처받은 내가 휴가를 떠났다, 그런 거지?”
“…….”
“그리고 이건 내 망상일 수도 있는데, 븨이에스 수련 씨의 예능에 출연한 건 KS 엔터로 이적할 마음을 조금이나마 품었기 때문이고. 직설적으로, KS 엔터에 간 보려고 갔다가 섭외된 거라고.”
성필은 백설하의 오해를 여러 번 보아왔다.
가장 대표적인 건 ‘음악을 위한 동행’ 사전 미팅 당시. 에리카가 성필을 홀려 KS 엔터로 데려갈 거라고 오해했을 때였다.
정호환이 정지음도 영입하려고 했었는데 성필이라고 안 될 건 뭐냐, 그런 마음에서 촉발된 오해였었다.
그때 백설하는 에리카가 성필에게 정을 떼게 만들려 ‘이사님 기분 나쁘다’란 말까지 했었다.
성필이 보기엔 정말 말이 안 되는 오해였지만, 백설하는 말이 안 되는 오해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건 좀 너무 나갔지?”
성필은 농담이란 뜻을 피력하듯 헤실헤실 웃었다. 실제로 이건 분위기를 풀려고 한 농담이었다.
그런데 백설하의 얼굴이 거무죽죽한 것을 보니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듯하다.
성필은 헤실헤실한 웃음을 즉각 지웠다.
“……그럼, 또 우리 아침마다 안부 주고받았었잖아. 예능 나간 다음 날 연락이 늦었던 게, 정말 KS 엔터로 마음을 돌려버린 거 아닐까 오해한…… 그래서 답을 늦게 한 거다……. 그랬어?”
얼굴을 보니 그런 듯하다.
“미안. 내가 설하를 너무 걱정시켰네.”
“이, 이사님이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백설하는 고개 숙인 성필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의 고개를 들게 하고 싶었으나, 마주 보고 앉은 식탁의 거리가 멀어 손이 닿지 않았다.
“그러, 그러엄…….”
백설하가 지뢰밭을 나아가는 병사처럼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녀가 극도로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다 오해…… 였나요오……?”
“역순으로 답을 줄게. 그날 답이 늦었던 건 아침에 고등학교 은사님을 봬서였어. 설하 연락이 그날은 조금 늦었기도 했었잖아. 도중에 바로 답을 못한 거야.”
“아…….”
“수련 씨 자체 예능에 출연한 건, KS 엔터에 갔다가 섭외된 거야. 그런데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직 때문은 아니고, KS 엔터에서 운영하는 워크숍이 있거든. 거기 매니지먼트 분야 쪽 워크숍에 참석했었어.”
백설하는 가슴에 품던 의문이 하나둘씩 사라지자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혼자 끙끙 앓았을 땐 온갖 부정적인 상상만 했건만, 실제로 사정을 들으니 정말 별거 아닌 일들이었다.
“그리고.”
하지만 아직 마지막 의문이 남았다.
성필이 자아 찾기 여행을 떠난 이유.
정확히는 그 시기가 문제였다.
성필은 백설하의 사과를 받은 후, 아니. 사과도 제대로 받지 않은 꺼림칙한 상황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었다.
백설하는 성필이 불현듯 사라진 게 자신 때문이라고 여겨 괴로워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자신 탓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째서?
“내가 자아 찾기 여행을 떠났던 건…….”
“……떠났던 건, 요?”
백설하는 성필에게 편지를 전했던 그 날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은 괴로운 듯 시종일관 일그러져 있었다. 그 순간이 도저히 잊히지 않는다.
성필이 처음 보여주었던 진심으로 고통스러운 표정. 그의 고통이 백설하 자신으로 말미암았단 사실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었다.
만약 후회하는 순간 과거로 돌아가는 능력이 있다면, 당장 돌아가 과거의 자기 자신을 후려쳤을 것이다.
만약 성필이 그토록 아파했던 게 자신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 때문인가?
“먼저, 난 설하한테 아무런 원망도 억하심정도 없단 걸 말해주고 싶어. 진짜야. 모르는 상태에서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잖아. 그리고 알고 있었다면 안 했을 거고. 그리고 뭐…… 나한텐 사실 그렇게 충격적인 것도 아냐.”
성필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단 듯 유쾌하게 눈썹을 올렸다. 평소 그가 백설하에게 농담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나 학생 땐 그보다 심한 말 엄청 많이 들었어. 뭐, 가정교육을 독학해서 그따위로 자랐냐. 부모 없는 티가 난다. 애가 엄마 없이 커서 그런지 섬세함이 없다. 그런 거 있잖아. 그러니까 설하가 한 말 정도는…….”
“아녜요!”
백설하가 발작하듯 외쳤다.
성필이 깜짝 놀라 눈만 깜빡이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튀어 나갔던 상체를 천천히 뒤로 당겼다.
“아니, 에요. 상처에 또 상처가 덧입혀지고, 시간이 지나 딱지가 앉고, 상처에서 흉터로 바뀌었다고 해도, 또 다른 상처가 아프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
성필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 아이 같던 백설하가 언제 이렇게 훌륭한 어른이 되었을까. 자아 찾기 여행을 마치고 새롭게 그녀와 마주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는 흐릿한 눈빛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 려다가 급히 다시 올려 백설하와 눈을 맞추었다.
“맞아. 설하한테 또 배우네. 그렇지. 무뎌졌을 뿐이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지. 하지만 설하야, 설하라면 나를 얼마든지 상처입혀도 돼.”
“……네?”
“나를 얼마나 괴롭게 하든, 그게 설하라면 참을 수 있어. 차마 기쁘게 받겠단 말은 못 하겠는데, 암튼 그래. 그만큼 설하는 나한테…….”
성필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자신의 말이 이성을 대하는 듯이 느껴지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맨틱한 분위기가 풍기지 않았으면 했다.
즉, 플러팅 같지 않길 바랐다.
안 그래도 이 공간엔 둘만 있다.
게다가 이후의 이야기 흐름을 고려하면, 성필은 백설하가 위협을 느끼지 않길 원했다.
“나한테…… 그만큼 소중한 거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성필은 어느 정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로밖에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야만 했다.
소중하다.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 이상으로 성필의 진심을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설하가 전에 나한테 했던 말? 얼마든지. 몇 번이고 다시 말해도 돼. 겨우 그런 걸로 설하한테 앙심을 품진 않아. 아마 설하가 나를 때려도 앙심은 못 품겠지. 난 그래.”
“……소중해서요?”
“소중해서. 너희는, 너는, 설하 너는 내 꿈 그 자체야. 최고의 아이돌이란 말을 들으면, 나는 너희들 외에…….”
성필의 뇌리에 다키스트가 스쳐 지나갔다.
“현세대에선 너희들 외에 누구도 꼽을 수 없어. 다른 누구의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아. 너희들인 거야. 나에게 있어 최고의 아이돌은, 내 꿈이 바로 너야.”
백설하는 성필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전신이 간질거렸다. 인간의 정신이 피에 들었다면, 정신 전체가 환희로 떨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백설하는 짓궂은 생각이 떠올랐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순 없어서 성필을 힐끔거리기만 했다.
성필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케이어스는 어떠냐고 묻고 싶은 거야? 아니지. 지금의 너희랑 비교하면 한참 모자라지.”
성필의 뇌리에 전생의 케이어스가 스쳐 지나갔다. 그건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이니, 지금은 무시하자.
“그런 내 꿈의 현신이 내게 야박하게 굴어도, 내가 감히 어쩌겠어? 난 내 꿈의 포로인데. 그러니까 설하야, 네가 전에 했던 말 따윈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벌써 잊어버린 지 오래였어. 네가 편지를 전해주기 전까지는.”
“편지…….”
“설하의 섬세함에 또 감탄했지. 내가 설하였으면 사정을 알았어도 쉬쉬했을 거야. ‘이사님은 이미 잊으셨겠지’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런데 설하는 굉장히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라서, 나처럼 무시할 순 없던 거겠지. 고마워. 그리고 여기서 다시 답할게.”
성필이 말했다.
“괜찮아.”
그는 정식으로 백설하의 사과를 받았다.
그러나 부족한 답이었다.
성필은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그, 그러며언…….”
어째서.
“그때…….”
그때, 포옹은커녕 악수조차 해주지 않은 것인가?
“싫었던 거 아닌, 가요? 저, 저 같은 사람이랑 손잡는 게…… 혀, 혐오스러워서……. 이사님의 일을 입에 올린…… 저를 용서할 수 없어서…….”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다 거짓말 아닌가?
백설하는 그리 묻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성필의 이야기로는 수수께끼가 전부 풀리지 않았다.
백설하는 소중한 사람이다. 얼마든지 상처 입더라도 괜찮은 사람이다. 그런데 왜 그땐 그랬지?
“그래.”
“맞다구요?!”
“아, 아니, 혼잣말이었어. 그래, 이게 본론이지. 그때 네가 사과했을 때 내 태도가 미적지근했던 걸 해명해야겠지.”
백설하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당시 성필의 태도는 어중간한 변명 따위로 퉁 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어낸 거짓말이라면 백설하가 쉽게 간파해낼 것이다.
만약 성필이 백설하를 달래려고 ‘괜찮다’고 해왔던 거라면, 차라리 이쯤에서 진실을 밝히는 게 나았다.
‘그땐 정말 네가 미웠다’라고.
백설하는 그 말을 들을 준비를 했다. 성필이 미웠다고 말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해질 것 같기도 했다.
거짓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건 마치 ‘네가 밉지만, 난 프로듀서니까 담당 멤버의 멘탈을 케어해야 해서 억지로 달래는 거야’란 것 같으니까.
성필은 코트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다.
흰색의 플라스틱 원통이었다.
“요즘 내 상태가 이상했던 거, 혹시 알고 있었어?”
“네에…….”
“역시, 그랬구나.”
성필은 우울해졌다. 숨긴다고 숨겼건만, 역시 이상하게 보였던 거구나.
그렇다면 학생 시절 여학우들도 사춘기 남학우들의 이상행동을 모두 눈치챘던 거겠구나. 선생님들도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성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떠오르는 학생 시절의 흑역사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각오를 담아 눈을 떴다.
“이건 아르기닌이란 거야.”
“……네?”
성필은 백설하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네?’가 아니라 ‘……네?’였다.
‘그게 뭐예요?’가 아니라 ‘이게 그거라구요?’라는 듯했다.
“알아? 이거?”
“…….”
백설하의 눈이 사선 45도 위를 향했다.
“아, 아니요……. 영양제…… 예요?”
영양제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뭔지 알고 있단 뜻이었다.
성필은 이해했다. 스타그래프 광고 피드에 무작위로 뜨거나 몇몇 유명 운동 아이튜버들이 홍보했던 영양제였으니.
게다가 요즘엔 광고의 반발로 부작용 사례나 허위, 과대광고 논란도 뜨고 있다.
백설하도 우연히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저렇게 모른 척하는 걸 보니 따로 찾아본 적이 있는 듯했으나, 성필은 모른 척했다.
“최근 이걸 정기적으로 복용했어.”
“아…….”
백설하는 우두커니 있다가.
“아……?”
뭔가 깨달았는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성필은 학창 시절 흑역사를 떠올렸을 때보다 더 우울해졌다.
지금부터 성필이 할 말은, 이 시각 이후로 백설하가 그를 혐오하게 만들지도 모를 것이었으니.
성필은 이 숙소에 그런 각오로 찾아왔다.
백설하에게 미움받을 각오로, 온 것이다. 그녀에게 미움받더라도 그녀가 지닌 마음의 짐을 덜어주기 위하여.
“서, 설마…….”
“맞아.”
성필은 당당한 말투를 꾸며냈다.
내심 당장 무릎 꿇고 그녀에게 온갖 변명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 변명, 아니, 해명은 그다음이다.
“난 그때, 네가 사과할 때, 네가 화해의 의미로 포옹해달라고 했을 때…….”
성필은 수치스러워서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이대로 더 힘을 주면 피가 나오겠다 싶을 정도로.
창피함으로 전신이 바들바들 떨린다.
여자 앞에서, 그것도 아직 소녀티가 가시지 않았을 시절부터 보아왔던 그녀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자 꿈 자체인 백설하 앞에서.
성필은 남자의 생리를, 자신의 생리를 설명해야만 한다.
“바.
절로 목소리가 흔들린다.
“바, 브, 발…….”
“…….”
“으아, 아, 아…….”
성필은 무릎 위에 올려둔 손으로 바지를 꽈악 쥐었다. 고문당하는 것처럼 몸이 배배 꼬인다.
그가 쌓아온 명예가 유린당한다.
윤상열이 한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성필이 에로스적 감정을 억압하여 꾸역꾸역 꿈으로 꾸며냈다고 말했었다.
그건 곧 성필이 성적인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단 뜻이었다.
특히 아이돌을 성적으로, 물론 대중문화의 우상으로서 지니는 섹슈얼리티를 제외하고, 아이돌을 성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금기시해왔다.
그런데 성적인 단어를 아이돌 앞에서 꺼내려고 하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거부감이 든다. 거부감을 넘어 생리적인 혐오감이 치밀어오른다.
마치 죄를 저지르는 기분이다. 지은 적도 없는 죄악이 전신의 혈관을 타고 가속한다.
아니, 실제로 죄를 짓고 있다.
자신을 한없이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인간 앞에서, 그녀를 상대로 감히 욕정을 느꼈다고 고백해야만 한다.
심장에 매인 윤리와 도덕의 사슬을 끊어내야 한다. 성필의 전신에 식은땀이 배어 나온다. 벤치 프레스 150kg을 치는 것보다 훨씬 더 힘겹다.
‘죽는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필은 생존본능의 알람까지 켜졌다.
그가 지켜온 윤리, 도덕, 원칙, 신념, 사회적 위치, 명예, 관계, 그 모든 것을 파탄 낼 단어를 꺼내야만 한다.
뇌가 외친다.
그만하라고. 이만하면 됐다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그럴 순 없어.’
이쯤에서 미소를 지으며 ‘대충 알겠지?’ 같은 말 따위 할 순 없다.
그게 무슨 사죄인가.
그게 무슨 고백인가.
그딴 질 낮은 인간이 될 순 없다.
만약 그따위로 어영부영 넘어간다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미래를 보지 않아도 알겠다. 영원토록 도망자의 낙인을 지니고 후회 속에서 살아가겠지.
그러니 해야만 해.
‘그렇지만.’
이건 너무, 너무…….
‘너무 괴로워…….’
그 순간, 은사인 허은설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이것이 인생인가? 그렇다면.’
한 번 더…….
니체의 말이다.
인생이 고통스럽더라도, 그 고통 속에 다시 한번 뛰어들 수 있는 용기.
설령 인생이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의 수레바퀴에 갇혀 같은 생을 영겁토록 반복해야 하는 것이라도, 흔쾌히 ‘다시 한번’을 외칠 수 있는 삶.
때때로 비굴했을지언정 결국엔 당당했었노라고 외칠 수 있는 삶.
자신에게서 도망가지 않는 자.
그렇기에 자신을 사랑하는 자.
그런 삶을 만드는 자.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
“…….”
성필은 망치를 든다.
그리고 부순다.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도덕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인간이 되기 위하여.
인간답게, 다시금 그녀와 마주하기 위해서.
“발기…….”
각고의 노력 끝에 꺼낸 단어.
“했었, 어…….”
그건, 맥없을 정도로 탁 풀린 목소리였다.
“설하야, 난 그때.”
성필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네 앞에서…….”
인생을 지탱하던 신념을 스스로 부순 남자.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던 도덕의 사슬을 부수어 초인이 된 자.
그렇기에 이젠 아무것도 가진 게 없게 된 자.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었던, 하지만 이젠 부서진 사슬을 보며 망연자실한 남자.
“네 앞에서 발기했었어…….”
성필은, 울었다.
눈물은 그의 마음에 떨어져 홍수가 되었다.
하나의 세상을 휩쓸어 무(無)로 돌린다.
“설하야…….”
창세기
7:21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사람이라.
“난 네 생각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7:22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너를, 감히, 아, 흑, 미, 안…….”
7: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나를, 믿었을 텐데, 미안, 설하야, 미안해…….”
7:24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이사님.”
8: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괜찮아요.”
8:2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괜찮으니까.”
8:3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울지 마세요.”
백설하가 성필을 안아주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