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12화 (612/760)

612화

성필의 휴가는 아직 하루 남았다.

정확히는, 오늘이 휴가의 마지막 날이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원님!”

권강철 트레이너는 탈진하여 벤치에 누운 성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성필은 ‘흐에’라고 답한 후 일어났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권강철의 뒤를 따랐다.

PT가 끝나고 둘은 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확인서에 체크했다.

“자, 회원님.”

성필은 오늘 PT를 마쳤다는 사인을 적었다. 오늘로 그가 등록했던 PT 횟수가 모두 소진됐다.

“이번엔 몇 회 결제하시겠습니까?”

성필은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죄송한데, 이제 PT는 그만하려고요.”

“예?!”

권강철 트레이너는 경악했다.

성필이 어떤 인간인가. 장장 2년이 넘어가도록 PT를 받았던 사람이다.

‘이제 홀로서기를 하시려는 건가?’

성필은 운동을 배우려 PT를 한다기보다, 본인의 게으름과 맞서 PT를 받아왔다.

물론 운동이란 마치 무협지 속의 무공처럼 배우면 배울수록 깨닫는 바가 있으니, 돈을 버린 건 아니었다.

성필은 누가 강제하지 않으면 ‘나 몸 꽤 좋은데?’라며 게을러질까 경계했던 것이다.

‘그런 회원님이 PT를 그만두신단 건…….’

권강철 트레이너가 2차로 경악했다.

“우, 운동을 그만하시려는 겁니까? 저와 함께 피트니스 대회를 제패하겠단 꿈은 포기하시는 겁니까!”

“그거는 부끄러워서 안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만두는 건…….”

성필은 권강철의 뒤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밤 9시에 가까워진 시각이다.

“다른 배우고 싶은 게 생겼어요. 운동을 그만두는 건 아니에요. 전보다는 줄일 수밖에 없겠지만요.”

“……그렇습니까.”

권강철 트레이너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회원님의 앞길을 응원하겠습니다. 운동이야 이젠 회원님 혼자서 잘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다만, 전에 부상을 당하신 적이 있으니 무리한 중량에 도전하는 건 삼가주십시오.”

“네. 지금까지 신세 많이 졌습니다.”

“신세는 제가 더 졌습니다. 그럼, 득근하십시오.”

“트레이너님도요.”

성필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엔 추가로 운동을 한 후 러닝머신으로 갈 텐데, 오늘은 바로 탈의실로 향했다.

권강철 트레이너는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사라지는 그를 보았다.

오랫동안 PT받은 회원을 떠나보내는 건, 졸업하는 학생을 바라보는 선생의 마음과 닮았다. 심지어 그 학생이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면 더욱 서글퍼진다.

‘회원님, PT를 받으시는 목적은 무엇이실까요?’

‘바디 프로필 찍으려고요.’

그랬던 성필은.

‘트레이너님, 더 강해지고 싶어요…….’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점점 더 성장하고.

‘트레이너님, 이거 보세요! 전거근이 나왔어요!’

‘으하하하하하!’

마침내 괄목할 성과를 이룩해냈다.

그와 함께 보낸 세월은 권강철에게도 뜻깊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감상을 언제까지고 음미할 순 없는 노릇이다. 당장 11분 뒤에 새로운 회원을 상대해야 하니까.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회원님!”

그 회원은 압도적으로 키가 컸다.

눈대중으로도 키가 190cm는 넘을 듯했다.

그와는 프로모션의 일환인 무료 PT를 진행한다. 보통 인바디를 재고 체형과 엇나간 체형을 진단한 다음 간단한 상담을 한다.

권강철은 회원의 인바디 프로필을 읽었다.

‘보기엔 말랐지만 지방이 평균 이상이고 골격근량이 상당히 적군.’

사무직이 대부분인 현대인들 모두가 그러하지만, 이 회원은 그중에서도 꽤 심각한 편이었다.

직장에서 상당히 혹사당하는 듯하다.

“회원님, 이쪽으로.”

인바디 다음은 자세를 바꾸어가며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몸의 비틀린 균형을 파악하여,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겁을 줘서’ PT 결제를 유도한다.

이대로 계속 지내면 늙어서 몸이 망가질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현대인 대부분이 운동 부족이다. 그대로 나이가 들면 골병 나는 건 순식간이다.

“저.”

개인 PT룸으로 들어오자 회원이 쭈뼛거렸다.

“예 회원님?”

“저, 저기, 그.”

그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다가, 유리문 밖으로 사람들이 안 보이는 것을 확인하곤 용기를 냈다.

“운동이 저, 저, 정력 같은 데 도움이 될까요……?”

“아아.”

권강철은 그의 목적을 간파했다.

이 회원은 30살을 넘었다. 팔팔했던 20대처럼 열정만으로 애인과의 관계를 만족스럽게 가질 수 없던 것이리라.

돈에 눈먼 트레이너라면 ‘당연하죠’라 할 수도 있겠으나, 권강철은 아니었다.

“흔히 ‘정력’이라고 표현하는 능력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다만 운동의 부수적인 효과로 능력 향상이 이뤄질 ‘수도’ 있습니다.”

“확실하진 않고요?”

“회원님.”

권강철 트레이너가 그와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골반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척추 후만 상태입니다. 흔히 ‘찌르는’ 동작이라고 하죠. 둔부와 복부에 힘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권강철이 골반을 뒤로 뺐다.

“이 동작에서도 마찬가지로 근육이 쓰이고요. 이외에도 사랑을 나누는 순간엔 전부 근육이 쓰입니다. 그러니 회원님이 바라시는 효과를 볼 수 있는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좀 더 다이나믹한 생활을 보내실 수 있을 건 확실합니다.”

권강철은 그 동작을 한 번 더 반복했다.

트레이너들의 복장은 피부에 딱 달라붙는다. 그래서 회원은 그의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을 전부 볼 수 있었다.

그가 바라는 워너비 그 자체였다.

“트레이너들끼리 모이면 장난으로 말하고 그럽니다. 운동 안 한 사람이랑 못 사귀겠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대답이 되셨을까요?”

“예.”

회원의 눈에 결연한 의지가 깃들었다.

권강철이 싱긋 미소 지었다.

“좋습니다, 정지음 회원님.”

정지음 헬창 전설, 시작.

모든 건 여자친구인 이수연 작사가를 위해.

그렇게 권강철은 한 명의 회원을 잃고, 다른 한 명의 회원을 얻었다.

* * *

‘안수정 실용 댄스 학원’.

원생은 예고를 준비하는 중학생이나 춤에 흥미를 느끼는 초등학생, 혹은 취미로 춤을 배우고자 하는 직장인이 조금 있는 곳이다.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한 동네 댄스 학원이다.

10시가 넘은 밤.

학원의 원장이자 강사인 안수정은 카운터 테이블에 앉아 멍하니 턱을 괴고 있었다.

안쪽의 연습실에선 밤새며 과제를 준비하는 원생들이 춤추는 중이었다. 그들에겐 특별히 11시까지 연습실을 개방해준다.

‘직원을 한 명 더 뽑을까…….’

학원엔 알바생 개념의 강사가 몇 있다.

그들이 마감하는 경우가 있지만, 안수정은 인건비 한두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스스로 마감하기도 한다.

그렇게 밤 11시까지 카운터에서 죽치고만 있는 것이다. 자영업이 쉬울 거라 생각한 적은 없지만, 사생활이 너무 없으니 때때로 우울해진다.

‘나도 성공해서 직원 막 뽑고 싶다.’

우리 학원 원생 중엔 유명 아이돌로 데뷔하는 애 없으려나.

‘에휴, 유명 아이돌은 무슨. 기획사 연습생으로 뽑힌 애도 없는데.’

연습생 목적으로 학원에 오는 이들도 없다.

흔히 ‘아이돌 고시’라고 불리는 연습생 오디션에 도전하는 이들은 이런 곳에 안 온다.

동네 학원은 동네 학원의 역할이 있다.

딸랑.

현관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안수정의 흐트러진 초점이 제대로 잡혔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아메리칸 트레디셔널 스타일로 옷을 입은 남자였다.

체크무늬의 세미 버튼 다운 코트가 인상적이었다.

그가 걸친 모든 의복이 세련되었지만, 목도리만은 엉성한 티가 났다. 마치 솜씨가 부족한 초보자가 짠 것만 같았다.

안수정은 가죽 장갑을 벗으며 다가오는 그를 자기도 모르게 넋 놓고 보았다. 드라마에서 캐릭터가 처음 등장할 때 온갖 강조 효과를 넣으며 소개하는 장면 같이 느껴졌다.

“……러 왔는데요.”

“……네?”

“견학이요. 오늘 끝났나요?”

“아, 견학, 이요? 따님…….”

안수정은 ‘따님’이란 말이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보아도 댄스 학원에 다닐 만한 딸이 있을 나이로는 안 보였다.

“조카분이라거나…….”

그는 수줍은 듯 눈가에 웃음기를 걸었다. 그의 눈가에 주름이 잡혀서야, 안수정은 그가 30대 초중반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제가 다니려고요.”

“아, 어, 네. 그냥 견학이랑 시험 수업, 두 개가 있는데 견학은 지금 수업이 없어서 불가능하세요.”

“시험 수업은요? 지금 가능한가요?”

“네, 제가 지금 봐 드릴 수 있어요.”

안수정은 테이블 아래에서 견학 신청서와 볼펜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견학 시간은 이미 끝났지만, 어차피 원생들이 연습을 끝낼 때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평일에 따로 오면 따로 시간을 내어야 하니, 이왕이면 지금 한 타임 봐주는 게 나았다.

안수정은 신청서를 작성하는 그의 손을 눈으로 좇았다.

‘박성필.’

목적, 취미.

그리고 그의 펜 끝은 수업 장르에서 한동안 헤매었다.

걸스 힙합, 방송 안무, 케이팝 댄스.

수업은 이 세 개뿐이었다.

“걸스 힙합은 이름이 걸스 힙합이긴 한데, 그냥 힙합이에요. 여자가 힙합을 추는 거뿐인데 걸스 힙합이란 이름을 붙인 거거든요.”

그가 낮게 웃었다.

안수정은 당황하며 자기가 한 말 중 웃긴 게 있었나 되짚어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할 법한 말 같아서요. 힙합, 걸스 힙합.”

“지인분 중에 춤추시는 분이 있으세요?”

“네, 그렇죠. 그런데 케이팝 댄스랑 방송 안무는 뭐가 다른가요?”

“케이팝 댄스는 커버 댄스예요. 동작을 따서 커버 댄스 영상 찍는 걸 목적으로 해요. 원생들끼리 조를 나누어서 연습하고…… 취미반으론 제일 많이들 선택하세요.”

“음…….”

“춤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으시면 방송 안무 쪽이 나으세요.”

“힙합…… 은 정말 힙합만 배우나요? 아님 스트릿 댄스 종합인데 힙합으로 표시해둔 건가요?”

안수정은 살짝 놀랐다.

스트릿 댄스란 명칭을 알고 있는 게 신기했다. 지인 중에 춤추는 사람이 있다더니, 확실히 들은 게 있나 보다.

안수정은 멋쩍게 웃었다.

“제가 전공? 배운 게 힙합밖에 없어서요. 스트릿 댄스 다른 것도 출 줄 알긴 하는데, 가르쳐줄 깜냥은 안 돼요.”

“겸손하시네요. 그러면 방송 안무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안수정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방송 안무는 수강생이 적다. 수강생들의 수준 차이도 커서, 소수의 수강생들을 따로 가르치느라 안수정의 고생이 더 컸다.

아예 초짜가 하나 더 들어왔으니 또 고민이 생겼다. 그를 위해 거의 개인 교습 형태로 가르쳐주거나, 무리해서라도 약간 윗수준의 이들의 반에 넣어야 할 텐데.

‘그것도 등록하실 때 이야기지.’

안수정은 그를 데리고 빈 연습실로 들어갔다.

“원래는 이렇게 1대1로 안 봐주시죠?”

“원랜 수업 중인 반에 끼어서 해요. 회원님 인상이 좋으셔서 개인 교습 해드리는 거예요.”

“늦게 와서 다행이네요. 원장님께 직접 사사받고.”

덕담을 주고받자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성필은 코트와 니트를 벗었다.

와이셔츠 차림이 된 그는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움직임이 불편해지자 그는 옷을 또 벗었다. 이윽고 와이셔츠까지 벗자 반팔 티만 입은 모습이 됐다.

안수정은 그가 옷을 한 꺼풀씩 벗을 때마다 동공이 흔들렸다.

“운동하셨어요……?”

“네. 오늘도 운동 끝내고 왔어요.”

“아, 다행, 아니, 잘됐네요.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시는데 춤에는 근력이 중요하거든요.”

성필은 ‘안다’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안수정은 거울 속의 그를 흘끔흘끔 보았다. 성필도 그 시선을 알아채고 ‘아’ 소리를 내며 목걸이를 벗었다.

춤출 때 하고 있기엔 거추장스러운 스타일이다.

안수정은 그 목걸이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어울리긴 하지만, 남자가 제 손으로 살 건 절대 아닌데. 여자친구분 취향이 참…….’

거의 ‘내 거니까 건들면 죽여버린다’ 수준의 목걸이다. 안수정은 그게 목줄처럼 보이기도 했다.

둘은 거울을 보며 나란히 섰다.

“50분 동안 동작 5개를 배울 거예요. 그걸 이어서 짧게 춤을 추는 거죠. 계속 반복해서 알려드릴 테니까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크게 크게 움직이셔야 해요. 자, 먼저 크랩(Crab).”

안수정의 발이 자동차 와이퍼처럼 바닥에 붙은 채로 좌우로 움직였다. 그러자 발을 떼지 않았음에도 좌우로 쭉쭉 미끄러져 이동했다.

“문자대로 게처럼 좌우로 움직이는 거예요. 근데 이건 응용 동작이고, 먼저 제자리에서 하는 것부터 아니 어떻게 한 거예요?!”

성필은 응용 동작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왼쪽 오른쪽으로 물 흐르듯 움직였다. 이윽고 그는 단순히 좌우로 움직이는 것을 넘어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성필은 멈춰서 다시 거울을 보았다.

“자주 봤어서 ‘이렇게 하는 건가?’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했었거든요. 직접 한 적은 없고요. 아, 그런데 진짜 생각해도 하니까 되네요.”

“자주 봤다구요……?”

“지인 중에 춤추는 사람이 있어서…….”

사실, 춤추는 사람이 아주 많아서…….

게다가 성필이 연습했던 케이팝 안무 중에 이 동작을 포함한 게 있었다.

그건 좌우로 짧게 왔다 갔다 하는 게 전부였으나, 그때의 경험을 살리니 쉽게 응용이 됐다.

“다시 해보실래요?”

성필은 그녀의 말대로 했다.

그러자 안수정은 살짝 안심했다.

성필의 방법은 야매(꼼수)였다.

“이게 결과는 같은데, 이러면 더 상급 동작으로 넘어갔을 때 무리가 와요. 기초부터 해볼까요?”

“넵, 선생님!”

“먼저 무릎을 까딱까딱.”

크랩은 몇 분의 교습으로 쉽게 습득했다.

그리고 다음 동작도 성필이 아는 것이었다.

“점프! 점프!”

한쪽 발로 뛰고, 다른 발은 달리는 것처럼 뒤로 접어 보낸다. 토끼처럼 겅중겅중 뛰는 모양새다.

‘기본 동작이다.’

케이팝 댄스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수십 개의 동작들이 있다.

회사가 강점으로 하는 컨셉과 스타일이 다르니, 회사마다 가르치는 기본 동작은 일정 부분 차이가 있다.

그러한 기본 동작을 완성해야 비로소 아이돌 안무를 소화할 최소한의 자격이 생긴다.

기본을 마스터하지 않고 안무만 카피하면 과정이 쉽지 않을뿐더러 이상하게 보인다.

성필은 안수정을 따라 겅중겅중 뛰면서, 장하양이 처음 가로 엔터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렸다.

기본 동작만 몇 시간 동안 반복하던 그녀를.

직접 춰보니 알겠다.

‘하양이는 정말 배움이 더뎠던 거구나…….’

물론 지금은 어엿한 아이돌이 됐다. 성필이 몇 년 춤을 배우는 정도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실력일 것이다.

약 45분에 걸쳐 성필은 다섯 개 동작을 모두 습득했다.

“이걸 연결해서 춰볼게요.”

안수정이 음악을 재생했다.

케이어스의 ‘IWY’였다.

이 기본 동작의 집합은 비록 ‘IWY’의 안무와 180도 다르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어울렸다.

‘IWY’의 안무가 1등급이라면 이 기본 동작의 연결은 5등급이라고 할까. 문외한에게 곡을 던져주고 움직임을 붙여보라고 하는 것보다야 낫단 뜻이다.

“시작!”

둘은 이제까지 배운 것을 활용하여 춤을 추었다. 동작과 동작이 이어지고 마침내 춤으로 변하자, 성필의 가슴에 훈풍이 불어왔다.

‘즐거워.’

성필이 춤을 배우려고 한 건 백설하와 춤을 추었던 경험 때문이었다. 연습실에서 함께 나누었던 춤사위는 성필을 황홀경으로 이끌었었다.

그럼 왜 사교댄스가 아니라 케이팝 댄스를 배우러 왔느냐. 성필은 예로부터 본격적으로 케이팝 댄스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용기를 냈을 뿐이다.

여태껏 성필에게 케이팝 댄스란 일종의 성역이었다. 아이돌들이 추는 춤, 따라서 성필이 그걸 본격적으로 배우는 덴 거부감이 있었다.

마치 성역을 침범하는 것처럼 말이다.

커버 댄스 정도야 몇 번 할 수 있겠으나, 본격적으로 배울 엄두는 없었다.

“와, 잘하시네요. 센스가 되게 좋으세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그래요.”

그러나 성필은 용기를 내기로 했다.

신성시했던 성역에 발을 디뎠다.

바라보기만 해왔던, 성필에게는 꿈이었던 영역에.

“그런가요?”

“네. 제대로 배우시면 더 잘하실 거예요.”

“하하.”

“그러면 가장 중요한 거.”

“어떤 거요?”

“즐거우셨어요?”

알을 깨고 나온 세계는.

“네, 즐거워요.”

성필의 상상보다 훨씬 살가웠다.

* * *

“어? 성필이다!”

성필이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손혜빈이 호다닥 달려왔다. 그리고 권투 선수처럼 자세를 잡곤 그의 어깨에 툭툭 주먹을 날렸다.

“야, 혼자만 쉬니까 좋냐? 야, 좋냐고. 야, 대답 안 해? 야, 야, 야야!”

“누나 왜 이래…….”

“넌 진짜, 어우 씨. 이사만 아니었으면, 아오. 어떤 프로젝트 담당자가 프로젝트 막바지에 연차를 몰아서 쓰냐? 아오 팍 씨!”

“미안해…….”

성필은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처음으로 당한 일이 주먹질이란 게 우울해졌다.

그가 자리에 앉자 테이블에 커피가 올라왔다. 돌아보니 한구인이 있었다.

“잘 쉬셨습니까?”

“네. 한 이사님 고생 많으셨어요. 저 없어서 많이 힘드셨죠? 역시 제가 없으니 회사가 안 돌아가죠? 이젠 제가 돌아왔으니 안심하세요.”

“옐로 서브마린 엔터 합병 절차는 거의 다 끝났습니다.”

“아…….”

성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임원들이 가진 병 중 하나가 ‘나 없으면 회사 안 돌아감 병’이라고 한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처럼 느껴진다던데, 성필도 그와 비슷했다.

올해 가로 엔터 최대의 난제 중 하나일 거라고 예상됐던 옐로 서브마린 엔터의 합병이, 설마 휴가 중에 끝날 줄이야…….

한구인이 그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렸다.

“농담입니다. 가장 중요한 게 남지 않았습니까? 웨이퍼센트분들 말입니다. 다 끝났단 건 그룹이 아니라 회사 쪽 이야기였습니다.”

“아, 그래요? 멤버들 면담은 경섭이가 대신 진행했나요?”

“오늘 회의 때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들으시면 깜짝 놀랄 일이 있습니다.”

“기대되네요.”

주간 회의.

회의실에 가로 엔터의 중역들이 모두 모였다. 그리고 의례대로 홍규헌이 가장 늦게, 즉 정시에 도착하여 상석에 앉았다.

홍규헌은 안자마자 성필에게 물었다.

“박 이사, 휴가는 어땠어?”

“좋았습니다.”

“다행이네. 휴가 전에는 눈이 죽은 생선 같았는데, 이젠 제법 총기가 돌아.”

“사장님의 배려엔 언제나 감사할 뿐이죠.”

“아, 형.”

민경섭이 성필을 불렀다.

“휴가 중에 애들이 형 찾아갔다면서요? 자아 찾기 여행 그걸로.”

조아라는 민경섭에게 본인이 느끼는 갈등을 고백했었다. 성필이 자아 찾기 여행을 떠난 게 본인 때문이라면서 눈물까지 글썽였으니.

“휴가 보내는데 괜히 일하게 했네요. 미안해요. 내 선에서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아냐.”

“자아 찾기 여행은 진짜 아라 때문이었어요?”

“당연히 아니지.”

“그러면요?”

“민 이사, 됐어. 이런 일은 꼬치꼬치 캐묻는 거 아니야. 중년의 위기겠지.”

“저는 45세가 아니라 35세인데요.”

“아무튼, 잘 해결된 거지?”

성필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 그럼.”

홍규헌이 개회를 알렸다.

“시작하자.”

* * *

[그날을 상상하곤 해

도전을 포기한 삶으로

나는 아이돌이었지

노래를 불렀었지

내 꿈의 주인은

낮이 아닌 밤이었겠지

관객 하나 없는 들판에

홀로 소리치는 나를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영원히 기다리는 삶을

이젠 노래해 내 목소리가

너에게 닿을 걸 알아]

백설하가 코를 훌쩍였다. 그녀 앞의 장하양은 찬찬히 가사지(紙)를 읽고 또 읽었다.

백설하가 다시 코를 훌쩍였다.

“가사가 너무 개인적인가? 헤헤, 에, 헤엑, 에취!”

백설하는 재채기를 하곤 손등으로 코를 문지르려 했다. 코로 향하는 그녀의 손을 장하양이 콱 잡았다.

“하, 하양아?”

“언니 손.”

“아.”

백설하는 방금까지 걸레로 침대 밑을 닦았다. 손이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장하양은 물티슈를 꺼내어 백설하의 코와 인중을 닦아주었다. 백설하는 부끄러워서 눈을 정면으로 두지 못했다.

“좋아요.”

“아, 진짜?”

“과거랑 현재의 대비가 눈에 띄네요. ‘노래를 불렀었지’에서 ‘이젠 노래해’로 바뀌는 거요. 이미지가 그려져요. ‘관객 하나 없는 들판’에서 ‘너에게 닿을 걸 알아’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메아리를 돌려줄 사람이 나타나는 걸 상상하게 해요.”

“그으, 그래?”

“꿈의 주인이 낮이 아닌 밤, 이란 문장도 좋네요. 꿈에 사는 게 아니라 꿈을 꾸기만 하는 삶…….”

백설하는 점점 불안해졌다. 장하양이 칭찬만 하다가 막판에 ‘그런데’라고 할까 봐 두려웠다.

“무엇보다 좋은 건, 이게 언니의 이야기라는 거예요. 언니만의 이야기요. 동시에 감정 이입이 돼요. 꿈이란 단어는 누구에게나 설레고, 누군가에겐 추억할 거리니까요.”

“그럼…….”

“네, 이걸로 해요.”

백설하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이윽고 그녀는 가사가 통과됐단 게 기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아직도 덜 끝냈어요?”

더러워진 앞치마를 걸친 조아라가 문틀을 짚고 섰다.

“빨리 각자 방 끝내야 거실 할 수 있다니까요.”

“아, 미안 아라야. 빨리 끝내고 갈게.”

“곧 점심이에요. 밑에 국밥집 사장님이 수육이 가장 맛있을 타이밍으로 삶았댔단 말이에요. 빨리빨리.”

“응.”

조아라는 물 양동이를 들고 본인의 방으로 갔다. 잠시 후 리카의 ‘그건 버리면 안 돼애애애!’란 절규가 들려왔다.

백설하는 감격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가사를 끝냈으니 감상에 잠기고 싶었건만.

“언니.”

그때 장하양이 백설하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아…….”

장하양은 백설하가 최근에 겪은 심정적 고난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장본인이다.

백설하가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가사를 완성했으니, 장하양 또한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고마워 하양아…….”

“축하는 나중에 하고, 일단 청소부터 끝내요.”

“응.”

“그거 주세요. 제가 빨아올게요.”

“아냐! 내가 할게!”

백설하는 장하양이 걸레를 뺏어갈까 봐 재빨리 방을 나섰다. 현재 화장실은 신아름이 필사적인 대청소를 감행하고 있기에 쓸 수 없었다.

백설하는 거실 주방으로 향했다.

거실 문을 열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좌측에 걸린 화이트보드로 눈길이 갔다.

그렇게 우두커니 멈춰 서서 1번 규칙부터 쭉 아래로 내려갔다.

[1. 사이좋게 지냅시다.]

숙소에 들어올 때 성필이 써주었던 규칙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화이트보드엔 자질구레한 규칙들이 참으로 많았다.

백설하는 그걸 찬찬히 읽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폰을 꺼내어 화이트보드를 사진으로 찍었다.

곧 그녀의 눈은 가장 마지막에 다다랐다.

[99. 박성필 이사님의 자아 찾기 여행을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아르기닌’은 영구 금지어다.]

소녀연맹 숙소의 최후의 규칙이다.

이 규칙은 조아라 때문에 생겨났다.

회사에서 성필을 마주한 조아라가 ‘아저씨 오늘은 몸 괜찮아요? 이상하진 않고?’라는,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발언을 했었기 때문이다.

성필은 조아라에 뭐라 하지 못하고 계속 놀림받기만 했다.

성필이 수치심에 바들바들 떨고만 있자, 그걸 발견한 장하양과 리카가 성필을 구출했고 조아라를 호되게 혼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조아라의 과거가 드러났다.

연습생 시절에 성필은 물론이고 한구인에게 ‘성욕이 생겨요?’란 성희롱을 했던 게 밝혀진 것이다.

조아라는 징계 건의서를 받을 뻔하다가, 성필과 한구인이 커버를 쳐줘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놀라운 점은, 조아라가 진심으로 억울해했다는 것이었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본인은 학구적인 목적으로 질문을 던졌단 모양이다.

“…….”

화이트보드를 훑는 백설하의 눈에 우수가 깃들었다. 이 규칙들은 소녀연맹 4년간의 기록이니까.

백설하는 지우개를 들었다.

그리고 모든 규칙을 지워버렸다.

화이트보드는 이름대로 완전한 흰색이 되었다.

백설하는 보드마카를 들어 글자를 적었다.

“언니 아직이세요?”

방 쪽에서 장하양이 큰 소리로 불렀다.

“아, 미안! 지금 갈게!”

백설하는 마카를 내려놓고 주방 싱크대로 달려갔다.

소녀연맹은 정들었던 숙소를 떠난다.

하지만 헤어지는 건 아니다.

그녀들은 이보다 더 좋은 숙소에서 다 같이 살기를 택했으니까.

오늘은 이사를 위한 대청소였다. 가져갈 물건을 정리하고, 후배들에게 깨끗한 숙소를 물려줄 것이다.

또한, 연습생 시절까지 합하여 4년 동안 신세를 졌던 숙소이니 반짝반짝 청소해주는 게 숙소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백설하가 떠난 자리, 화이트보드엔 한 가지 규칙만이 쓰여 있었다.

[100. 후배님들 힘내세요! ― 소녀연맹 백설하]

모든 추억을 머금고서, 그리고 새로운 추억을 기다리며.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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