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15화 (615/760)

615화

“혀, 협박으로, 강제로 사인한 계약서는…….”

“알아. 효과가 없지. 그래서 기회인 거다. 네 반성을 사장님이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효과는 그거 하나가 전부다.”

사장님, 홍규헌의 용서.

웨이퍼센트에게 저지른 죄악을 최소한의 희생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

“그래, 네 판단이 옳아. 여길 나가서 머리를 굴리다 보면 시간을 끌 수 있겠지. 그런데 그게 전부야. 넌 남은 재산을 전부 털리고 범죄자가 된 후 어디에서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아가게 될 거다. 내가 30분 동안 읊은 너의 죄는, 그런 결과로 돌아온다. 그게 전부인 이야기야.”

신대영은 눈물이 나올 듯했다.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나 압박감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숨이 제대로 안 쉬어진다.

땀이 쉴 새 없이 난다.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외부 감사를 받아 웨이퍼센트에게 지불하지 않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라. 계약을 해지해라. 네가 손에 쥘 수 있는 대가란, 조기 계약 해지에 따른 위약금이 전부다.”

신대영은 협박받고 있다.

강압으로 행해진 동의에는 효력이 없다.

물론, 신대영이 협박을 받았단 증거가 있다는 전제하에 그러하다.

그런데 어쨌든 그의 앞에 내밀어진 계약서엔 하나의 명백한 효력이 존재한다.

재벌집 막내딸 홍규헌의 용서다.

사회적으로 죽지 않고 최소한의 대가만 치른 채 빠져나갈 구멍이다.

‘전부, 전부 거짓말일 가능성은?’

이 회사를 차리는 데 돈을 얼마나 썼는데.

새 인생을 살려면 고작 위약금으론 턱도 없다.

최소한 가로 엔터가 처음 제시했던 합병 금액 정도는 있어야…….

‘대화를, 물어봐야 해. 변호사, 형, 내 가족들, 아아, 동업자들한테 물어보고…….’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지 알아야…….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다.”

신대영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이 줄줄 흐르던 땀이 튀었다. 거의 물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았다.

“여기서다.”

네가 용서받을 수 있는 장소는.

“지금이다.”

네가 용서받을 수 있는 시간은.

“이 순간뿐이다.”

네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는.

“결정해라.”

바들바들 떨던 신대영은.

“죄송, 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오열했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에,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한구인은 다리를 꼬고 소파에 등을 깊이 묻었다. 그리고 경멸하듯 신대영을 흘겼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군.”

* * *

“뭐냐 저게.”

조아라와 리카는 2층 난간에서 1층 홀을 지켜보았다.

현관 옆의 휴게 공간엔 성필과 한구인이 있었다. 둘이 서로를 마주 보며 기쁨이 흘러넘치는 막춤을 추고 있었다.

“아저씨랑 한의사님 왜 저래?”

“시라나이(몰라)…….”

“오, 근데 아저씨 춤 그루브가 좀 있네?”

“도촬은 범죄얏!”

* * *

펑펑!

웨이퍼센트 멤버들이 가로 엔터 현관을 넘자마자 사방에서 폭죽이 터졌다.

“식구가 된 걸 환영합니다!”

사장인 홍규헌을 비롯하여 모든 임원들이 모여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강현을 필두로 한 웨이퍼센트 멤버들은 쑥스러워서 미소 짓기만 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사장인 홍규헌이 그들과 한 번씩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그때마다 멤버들은 긴장했다. 마치 홍규헌을 처음 봤던 유우토처럼 말이다. 미녀 앞에서 긴장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럼 박 이사?”

“옙.”

“부탁할게.”

그리고 임원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웨이퍼센트 멤버들이 당황할 만큼 빨랐다.

성필이 그들 앞에 섰다.

“자, 그럼 회사 안내 겸 프로듀싱 계획 브리핑을 시작할게.”

“넵!”

웨이퍼센트는 기합이 바짝 들어 성필의 뒤를 따랐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지하의 정지음 작업실이었다.

“안녕, 뮤직 프로듀서 정지음이야.”

미리 준비하고 있던 듯 정갈한 인사였다.

“하는 일은 뭐…… 알지?”

멤버들은 뮤직 프로듀서란 직함으로 대강 역할을 짐작할 뿐,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몰랐다.

옐로 서브마린 엔터에는 뮤직 프로듀서란 직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대영이 성필과 처음 면담할 때 밝혀진 사실이지만, 옐로 서브마린 엔터엔 A&R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확립되지 않았다.

‘그냥 음, 퍼블리셔에서 곡 구하고, 작사가 한 명 불러서 가사 쓰고, 스타일리스트한테 옷 맡기고, 뮤비 감독한테 뮤비 맡기고……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놀랍게도 대표가 직접 한 말이었다.

성필은 그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었다.

세계관은 있는가?

앨범으로 표현하려던 메시지는 있는가?

곡마다 가사에 넣어두었던 상징적인 단어나 표현, 문구가 있는가?

뮤직비디오의 서사 흐름이나 신경 써서 배치했던 심볼은?

웨이퍼센트만의 사운드 장치는 있나? 혹은 시그니처 안무라거나?

그것들이 모두 없으면, 장기적인 계획은? 아니면 중기적인 방침은? 단기적인 방향은?

답은, ‘모두 없다’였다.

‘그거 그냥 전문가들한테 다 맡기면 되지 않습니까. 저희가 디테일을 정하는 것보다 나은 게 당연하죠. 어차피 컨펌은 저희가 하니, 통일성은 유지될 거 아닙니까?’

참 속 편한 답이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중소 기획사 대부분이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간다.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낫단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비전을 지닌 총괄 프로듀서가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요즘 뭐 아이돌이야 얼굴이랑 노래가 제일 아닙니까. 그거만 잘해도 되지요. 저희야 뭐, 좋은 곡이랑은 영 연이 없어서. 근데 애들 얼굴도 그저 그렇고…….’

이 사람은 대형 기획사가 한 해에 제작비로 수천억 원을 쓰는 게 회식비인 줄 아는 건가 싶었다.

아무튼, 그런 회사에서 커온 웨이퍼센트는 체계적인 A&R과는 연이 없었다.

“소개는 생략하고, 이게 너희 곡이야.”

“벌써 곡이 나왔나요?”

질문한 건 유빈이었다.

정지음은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답했다.

“너희 오기 전에 프로듀싱 계획 다 끝냈어.”

유빈이 성필을 보았다. 성필이 브이를 그렸다.

“천재 총괄 프로듀서 박성필을 찬…….”

“음악 틀게. 가이드는 사무엘이라고, 우리 연습생 애가 한 거야.”

곡이 재생됐다.

멤버들의 귀가 쫑긋했다.

확실히 옐로 서브마린 엔터에서 받아온 곡들과는 다르다.

이전에 받았던 곡들은 트렌드를 따라가긴 하지만 진부한 느낌이 강했었다. 퍼블리셔를 찾아가서 ‘성공한 그룹들이 낸 곡이랑 비슷한 걸로 해주세요’라고 말하면 줄 법한 것들 말이다.

오리지널리티가 없는 복제품.

그런데 정지음이 들려준 곡은 귀에 꽂히는 키치함과 새로움 두 가지를 모두 다 잡은 듯했다.

비록 ‘10만 장벽’이라고 불리지만, 아이돌답게 음악 듣는 귀는 꽤 발달되어 있었다.

“어때?”

곡이 끝나자 정지음이 물었다.

멤버들은 서로를 보다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좋아요.”

정지음과 성필이 서로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그래, 지금은 이러는 거지.”

지금은?

멤버들이 의구심을 품기도 전에, 성필은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안녕 얘들아, 난 이유이라고 해. 비주얼팀 중에서 의상을 맡고 있어. 그리고 짠!”

이유이는 프로젝터에 사진을 띄웠다.

“이게 너희들 옷이야!”

웨이퍼센트의 신곡 의상 기획서였다.

그곳엔 콘셉트를 비롯하여 이 콘셉트에 도달하게 된 경위, 그리고 의상의 특징을 간단하게 기술해두었다.

또한 의상의 정면 스케치와 디테일 부분 도식화도 있었다.

“자, 한 명씩 보여줄게.”

이유이가 리모콘을 누를 때마다 그림이 휙휙 지나갔다.

“어때?”

“어…….”

멤버들은 서로를 보곤 입을 모아 대답…….

“저, 질문이 있는데…….”

유빈이 손을 들었다. 다른 멤버들은 화들짝 놀랐다. 안 그래도 막 들어와서 눈칫밥을 먹어야 할 텐데, 감히 질문을 해?

“옷이 되게 상·하의가, 언밸런스하게 보이는데…… 그, 원래 이런가요? 아니, 진짜 몰라서 여쭤보는 거예요! 뭔가 조화가…….”

“그렇지?”

이유이가 웃으면서 눈을 빛냈다.

“이게 대조 감각 코디네이션이란 거야. 서로 공통적 특징이 없는 스타일로 상·하의를 일부러 세퍼레이트하는 거지. 나는 특별히 텍스처랑 패턴까지 다르게 했어. 자 여기 봐봐, 위는 올드 스쿨인데 아래는 컨서버티브 스타일이지? 그리고 또 너희들 상·하의 스타일이 엇갈리지? 다른 디자인 엇갈림 배치라고 하는데, 말이 어렵잖아? 쉽게 설명해서 자, 이것도 또 보면 위아래랑 스타일이…….”

“유이 씨, 이제 됐어요.”

이유이가 시무룩해졌다. 처음으로 보이그룹을 맡게 되어 들떴던 모양이다.

“다음으로 가자.”

다음 웨이퍼센트를 맞이한 건 손혜빈이었다.

“안녕, 난 손혜빈 이사님이야. 누나라고 불러. 난 프로듀서긴 한데, IP사업부가 따로 없어서 굿즈 디자인 개발까지 맡고 있어. 그리고 여기 이거.”

손혜빈이 스마트 패드를 들어 간단한 스케치를 보여주었다.

“너희들 응원봉이야.”

응원봉은 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아담한 크기였다.

봉의 끝부분에는 0부터 100까지 눈금이 표시된 게이지 실린더가 붙어 있었다. 봉의 첨단엔 100이란 숫자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다.

“게이지 눈금에 따라 색이 막 변한다? 100퍼센트는 빨간색으로 할지 파란색으로 할지 고민 중이야. 어때, ‘헌드레드’들이 좋아하겠지?”

‘헌드레드’는 웨이퍼센트의 팬덤 이름이었다.

그걸 본 유빈은 감격했다.

“드, 드디어 우리한테도 응원봉이…….”

사실 웨이퍼센트에겐 응원봉이 있었다.

싸구려 업체에서 생산한 것으로 디자인과 성능 둘 다 거지 같았다. 물론 ‘헌드레드’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구매했었지만, 워낙 결함이 많아 민심이 안 좋았다.

결국 판매가 중단되었다는 슬픈 전설이다.

“자, 다음으로 가자.”

다음은 해외사업부 부장 김덕팔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해외사업부의 김덕팔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예, 그럼 이만.”

김덕팔이 떠나갔다.

“……?”

웨이퍼센트 멤버들은 설명을 요하듯 성필을 보았다.

“그냥 인사드리려고 데려온 거야.”

아직 해외사업부는 웨이퍼센트와 연이 없다.

“다음.”

다음은 매니저 대기실이었다. 그곳에선 민경섭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내기들 안녕. 매니지먼트 총괄 민경섭이라고 해. 너희들 진짜 한 이사님이랑 형한테 고마워해야 해. 원래 너희들 우리 회사 오기 전까지…….”

“경섭아.”

“아, 네. 조용할게요.”

원래 웨이퍼센트 멤버들은 가로 엔터로 오기 전까지 개처럼 밤낮없이 스케줄을 소화할 예정이었다.

신대영이 그들을 가로 엔터에 팔아버리기 전까지도 착취하려던 속셈이었다.

그런데 한구인의 협박에 힘입어 그 스케줄이 전부 사라지고, 성필의 요청에 힘입어 합병일 이전에 웨이퍼센트를 들이게 됐다.

“너희들 앨범 활동기 스케줄 브리핑할게.”

민경섭은 차근차근 웨이퍼센트 멤버들의 컴백 스케줄을 설명했다.

벌써 음악 방송 스케줄이 잡혀 있다. 그것도 6개 음악 방송에 모두 출연한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이제까지 꿈도 못 꾸었던 나름 메이저 예능 출연까지 있단다.

“여기까지. 질문?”

“……흐끅.”

한 명이 눈물을 흘렸다.

강현이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민경섭은 씩 미소 짓곤 성필을 보았다. 성필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곤 다시 웨이퍼센트를 이끌었다.

이번 목적지는 3층의 연습실이었다.

“얘들아. 너희 컴백까진 5개월 남았어. 좀 촉박하긴 한데 짬바가 있잖아. 할 수 있지?”

“넵!”

“오케이.”

성필이 문을 열었다.

“어?”

웨이퍼센트 멤버 전원이 놀랐다.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왔냐 내 새끼들아.”

유하음이었다.

그는 멋쩍은 미소로 웨이퍼센트를 맞았다.

“여기 돌아보니까 어때? 난 좋아 죽겠는데.”

“실장님이 왜…….”

“나 재취직했어. 매니지먼트 2팀 팀장. 너희들 담당. 왜, 다시 봐서 실망했냐? 임마들, 얼굴이 감정 그대로 드러나는 꼴하곤.”

웨이퍼센트 멤버들이 유하음에게 달려가 감싸 안았다.

유하음은 사방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포옹 세례에 당황하다가, 곧 기뻐하며 그들을 한꺼번에 껴안았다.

“너희들 진짜 열심히 해야 해. 아니, 지금까지도 열심히 하긴 했다만 이전보다 훨씬 더 열심히. ‘펑크 내고 싶은 날’보다 훨씬 좋은 곡 받았으니 그래야지.”

멤버들이 울면서 웃었다.

성필은 그 감동적인 재회를 보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손뼉을 쳤다.

“다들 주목.”

멤버들이 그에게로 돌아 보고 섰다.

“내가 좀 격한 안무가 취향이라, 연습하는 게 힘들 수도 있어. 보컬 연습도 힘들 거야. 퍼포먼스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발전해야만 소화할 수 있어. 예를 들면, 러닝머신에서 시속 8km로 달리면서 깔끔하게 노래 부를 수 있는 정도. 살짝 어렵지?”

달리면서 어떻게 노래를 깔끔하게 부를까.

멤버들은 그리 질문하고 싶었지만, 이미 의심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성필이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미리 포기하진 마. 최고의 선생님을 모셨으니까.”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최고의 선생님이 나타났다.

웨이퍼센트 전원은 이제까지 없던 수준으로 놀랐다.

선생님은 멤버들을 향해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다가왔다. 이윽고 그들 앞에 서서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이번 프로젝트에 퍼포먼스 디렉터로 참가하게 된 서유선이라고 합니다.”

“다, 다, 다…….”

“넵, 다키스트의 서유선입니다. 잘 부탁해요.”

“아아…….”

여태껏 울음을 꾹 참고 있던 강현이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꿈이죠, 이거?”

성필이 고개를 저었다.

“꿈 같은 현실이야.”

너희는 최고가 될 거다. 최고의 프로듀서와 최고의 스태프들이 있으니까.

“정당한 노력으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시간이야. 그리고 노력의 목표, 내가 너희들에게 올해 기대하는 건.”

성필이 검지를 들었다.

“시상식 본상 수상이야.”

웨이퍼센트가 한 번 나가떨어졌던 4세대로의 길. 필터를 돌파한다.

현재엔 3세대의 톱 중 하나였던 ‘븨이에스’마저 필터 돌파에 실패하고, 최고 초동 기록 10만 장에 머무른 상태다.

만약 성필이 웨이퍼센트로 필터를 뚫을 수 있다면, 그 업적은.

‘정호환 이사님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 된다.’

가로 엔터, 웨이퍼센트 영입.

목표, 4세대의 틈바구니 속에서 본상 수상.

* * *

그건 평소와 다름없는 어느 날이었다.

성필과 리카는 1층 휴게 공간 소파에 나란히 앉아 적당히 담소를 나누었다.

“리카, 그거 들었어?”

“어떤 거 말인가요?”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철거하고 새 작품을 전시한대.”

“에엑?! 역사와 전통의 모나리자를 말인가요! 어떤 작품이 모나리자를 대체할 수 있나요!”

“네 초상화가 걸린다던데?”

“손나(그런)!”

리카는 해맑게 웃었다.

웃다가 웃음이 천천히 멎었다.

이윽고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사가 잘 안 쓰여?”

“이에(아뇨)…….”

“영어식 부정이야? 잘 쓰인단 거야 안 쓰인단 거야?”

“일본어 부정법은 한국어랑 똑같다구요! 아직 가사가 안 나오긴 했지만 잘 안 쓰이는 건 아니에요! 그냥…….”

리카는 성필을 흘끗 보더니 또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말해.”

“3년 전이었으면 ‘리카 왜 그래? 힘든 일 있어? 내가 도와줄 게 있을까?’라고 하셨을 텐데……. ‘뜸 들이지 말고 말해’는 애정이 없어 보여요…….”

“시간 없으니까 빨리.”

“더 심해졌다?!”

리카는 스읍, 후우 심호흡하더니 성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장난이 아니에요!”

“내 권력으로 새 숙소에서 독방 쓸 수 있게 해달란 건 안 돼.”

“장난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미안 미안. 뭔데?”

“그게에…….”

리카는 앉음새를 고친 뒤 수줍음이 흘러나오는 미소를 머금었다.

“할 얘기가 있는데…… 술 한잔…… 하실래요?”

“……우리 둘만?”

“하이(네), 후타리데(둘이서).”

“…….”

그래, 그건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리카의 예상치 못한 요청이 없었다면 말이다.

“역시…… 안…… 될까요……?”

리카, 최초로 성필과 대작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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