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20화 (620/760)

620화

응접실.

성필과 조아라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할 말이 뭔데요?”

“그게, 아라한테 약간 비협조적인 느낌을 받아서. 혹시 뭔가 걸리는 일이 있어?”

“비협조적이긴 뭘요.”

조아라는 회의실에서 장하양과 함께 있었을 때처럼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팔짱을 낀 채 꼰 다리를 까딱였다.

“난 패션 잘 모르니까 프로듀서인 아저씨 맘대로 하란 건데요.”

“……질문을 바꿀게. 혹시 내가 네 기분을 상하게 한 일이 있었어?”

“그렇게 느껴요?”

“어?”

그야 지금도 그렇고 아까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기분 상한 상태가 아닌가.

아니, 지금이 훨씬 더 상태가 나쁘다.

아깐 장하양이 있어서 절제했다면, 이곳은 성필밖에 없기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저씨, 아이돌로서 쌤 체형 어때요?”

“아이돌로서 설하? 매력적이지.”

“나는요?”

“너도 매력적이지.”

“아니, 그런 입에 발린 대답 말고요. 아저씨 주관을 써서 대답해 봐요.”

조아라는 성필에게서 어떤 답을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성필은 그런 느낌을 진하게 받았다.

그런데 조아라가 무엇을 의도하는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신체에 대한 열등감은 옛날에 떨쳐낸 줄 알았는데…….’

최근에 또 어떤 일을 겪은 걸까.

‘인터넷에서 비교 글이라도 본 건가?’

네이트랑 디씨는 들어가지 말라고 그렇게나 말했거늘…….

‘아니야, 아라는 나한테 기분이 상한 거잖아.’

성필은 멤버들의 신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비주얼 관련 프로듀싱 회의처럼 업무적인 부분에서라면 몰라도, 멤버들을 앞에 두고선 비교하는 듯한 뉘앙스를 절대 안 쓴다.

즉, 필요하지 않다면 신체에 관한 걸 입에 안 올린다.

애초에 사람을 앞에 두고 몸이나 얼굴에 대해 이리저리 비교하듯 말하는 게 예의가 아니기도 하다.

그렇게 자신하는 성필이었기에 조아라의 태도가 혼란스러웠다.

‘뭐지 대체?’

모르겠으니, 일단 성필은 조아라의 질문에 협조적으로 대응했다.

“쌤 체형은 이상적이에요?”

“이상적이란 건 개인마다 다른 가치잖아.”

“그러니까 아저씨 주관으로 어떻냐고요.”

“……내 주관으로 이상적인 체형은.”

조아라는 뚫어져라 성필의 입을 보았다.

“애슬레틱(Athletic)한 느낌…… 이야.”

“…….”

Athletic.

운동의, 운동경기의, 운동선수 같은, 장장한.

“아니, 들어봐.”

성필은 부끄러운지 갑자기 변명을 시작했다.

“이게 내 주관이라지만 의외로 인류의 공감대 안에 들어있거든? 그리스 조각상들도 봐봐. 전부 근육질이잖아? 단련된 몸은 문화 불문 인간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와.”

“그리스 조각상 중 근육질인 건 남자밖에 없어요.”

“아…….”

“여자는 살집이 있지.”

“아아…….”

조아라는 성필의 논리를 단숨에 격파했다.

결국 성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인류의 본능적인 공감대가 아니라, 내가 선호하는 이상적인 신체야 그게. 됐어? 이제 왜 뚱했는지 말해줄 수 있…….”

“거짓말하지 마요.”

“아니 용기 내서 말했더니 왜 거짓말이래…….”

성필은 조아라가 불만을 품고 있다면 최선을 다해 풀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타인에게 말한 적 없던 자신의 취향까지 공개했다.

“내가 다 알고 묻는 거거든요? 아저씨 내심…… 그, 급을 가르고 있지 않아요? 우리들 사이에?”

“급을 가룬다고? 내가 너희들을?”

성필은 거의 경악하듯 놀랐다.

인간 개개인은 유일무이한 존재다. 서로가 저마다 다른 이유로 특별하고 개성 있다.

우주에 단 하나뿐인 존재.

그리고 단 하나, 유일무이한 희소성을 가지기에 모든 인간은 가치가 있다.

그런데 성필이 멤버들 사이에서 급을 가리겠는가? 그녀들이 지닌 재능인 미(美)의 희소성은 급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슨 뜻이야 그게. 뭐 헛소문이라도 들었어? 내가 너희를 편애한다거나 그런 거?”

조아라는 허 숨을 뱉었다.

성필이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변명을 이어가니 기가 찬 것이다.

이렇게나 몰아붙이면 ‘사실 그래, 설하가 나에게 있어선 이상적인 체형’이라고 말할 법하다.

조금이나마 찔리는 구석이 있는 표정이었으면 조아라도 그를 이해했을 것이다.

‘알아.’

백설하가 지닌 천부의 재능을, 조아라도 뼈저리게 느낀다.

아까 성필이 그리스 조각상을 예시로 들었던가.

황금률에 대한 집착으로 완벽한 균형의 미를 추구했던 그리스의 예술가들. 그들의 집념은 수천 년의 세월을 넘어 현대에도 전해진다.

그리고 그들의 집념이 구현된 미의 표본이 바로 백설하였다.

조아라는 그리 여겼다.

“아저씨가 우리 정보 적어둔 스타일링 자료 봤어요.”

“어?”

이제야 성필의 표정이 조금 바뀐다.

“거기에 떡하니 적어놨잖아요. 쌤이 ‘이상적인 체형’이라고요.”

성필은 멍하니 조아라를 쳐다보았다.

정곡이 찔려 말이 안 나오는 것이겠지.

그가 천천히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그는 그대로 조아라를 쭉 응시했다.

조아라가 도전적으로 그의 시선을 받아쳤다.

“이제 뭐라고 할 거예요?”

“아라야.”

“뭐요.”

“객관적으로 ‘이상적인 체형’이라는 기준이 존재해.”

“…….”

조아라는 꿈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답이 나오자 어안이벙벙해졌다.

방금 성필이 뭐라고 한 거지?

‘객관적’으로 ‘이상적인 체형’이라는 ‘기준’이 존재한다고?

“아니.”

성필이 피식 피식 웃었다.

“그거 보고 나한테 꿍해 있던 거야?”

“개, 객관적인 기준이요? 아저씨가 아까 했던 말 잊어버렸어요? ‘이상적이란 건 개인마다 다른 가치잖아’라고 했어요! 근데 이제 와서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고요?!”

“있어.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의 인체치수 조사 사업인 ‘Size Korea’의 분류 방법으로, 기준이 있어. ‘Size Korea’는 의류학회의 보편 체형 분류법인 ‘라스밴드 분류법’을 써서 체형을 분류해. 거기에 ‘이상적인 체형’이 있어.”

“…….”

조아라는 말문이 막혀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녀는 그렇게 시간을 벌며 방금 성필이 설명한 것을 되새겼다.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

인체치수 조사 사업.

Size Korea.

의류학회.

보편 체형 분류법.

라스밴드 분류법.

이상적인 체형.

진짜, ‘이상적인’의 객관적 기준이 존재한다고?

“스타일리스트분들이 뮤지션 체형을 크게 그걸로 분류하셔. 그 분류로 체형에 따른 배색, 코디, 의상 재질을 결정하는 거야.”

“…….”

“내 스타일링 자료를 본 거지? 거기에 적혀 있으니까. 내가 설하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분류법을 따라 ‘이상적’이라고 적어둔 거야.”

조아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럼 내, 내 체형은, 뭐, 뭔데요?”

“진짜 설하 거 딱 하나만 봤나 보네.”

성필은 웃음을 자제했다. 조아라를 더는 창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무미건조하게 설명했다.

“삼각형 체형.”

“……삼각형?”

어깨의 폭이 엉덩이 폭보다 좁고, 엉덩이와 다리의 부피가 커 실루엣이 삼각형을 그린다.

“하양 언니는요?”

“역삼각형.”

삼각형과 반대로 어깨 폭이 넓고 골반 폭이 상대적으로 좁다.

“하양이가 막 ‘명품 직각 어깨’같은 수식어 붙고 그러잖아? 어깨가 예쁜 선을 그리기는 한데, 하체랑 균형이 안 맞으면 실루엣이 불균형하거든. 하양이가 운동하러 가면 몇십 분 동안 어덕트 머신에 앉아서 둔부 운동만 하고 그러지? 체형을 운동으로 보정하려는 거야.”

그러고 보니, 조아라는 옛날에 장하양에게서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장하양 자신은 대퇴사두가 잘 발달하는 체질이니, 골반이 안 좁아 보이려면 둔부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니 뭐라니…….

그게 어깨와도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체형 분류는 많아. 사각, 마름모, 튜브, 둥근 체형 등등. 그중에서 현재는 ‘모래시계형’을 ‘이상적인 체형’으로 분류해. 다시 말하지만, 내가 설하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야. 현대 사회의 통념과 트렌드가 모래시계형을 이상적으로 판단하는 거야. ‘이상적인 체형’은 시대마다 바뀌고, 바뀌어 왔어. 자, 이제 고민은 해결됐어?”

“…….”

성필은 조아라가 부끄러움에 침묵을 지키거나 어수룩하게 둘러대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수줍음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아무 일 없단 듯 돌아갈 생각이었다.

성필은 오해 때문에 몰아붙여지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았다.

‘당장 나부터가 그럴 뻔했으니.’

만약 조아라가 계속 뚱하니 입을 닫고 있었다면, 성필은 그녀와 정호환의 관계를 질문했을 것이다.

그녀가 부정하면 정호환에게 직통으로 전화할 생각까지 했었다.

끝까지 조아라가 모르겠다고 하면 무릎을 꿇고 자신이 못 해준 게 있냐면서 애걸복걸할 결심마저 했었다.

그 일을 빌미로 조아라가 성필을 놀린다면, 그는 수치심에 혀를 물고 손혜빈에게 달려가 펑펑 울 것이다.

그럼 손혜빈도 성필을 놀리겠지.

‘다시 생각하니까 누나한테 위로받는 건 악수(惡手)네.’

홍규헌에게 달려가서 우는 걸로 바꾸자.

“아.”

기나긴 침묵 끝에 조아라가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그리고 그 반응은 성필의 예상을 벗어났다.

조아라는 어수룩한 변명을 하지도, 부끄러워서 역으로 성필에게 뭐라 하지도 않았다.

“난 또…….”

안심한 것처럼 가슴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곧 그녀는 고개를 까딱 가볍게 숙였다.

“오해해서 미안해요. 진짜요.”

조아라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매우 정갈하고 성숙한 사과였다.

그녀 나이대의 아이들은 채 혈기가 죽지 않았다. 진중하게 사과하는 법을 배우기 어려운 나이다.

친구와 싸우고서도 짐짓 장난스럽게 사과를 입에 담을 뿐. 그 부끄러움을 진정으로 이겨내는 덴 시간이 필요하다.

아니, 시간을 얻고서도 그 방법을 얻지 못한 어른이 널리고 널렸다.

“미안해요.”

조아라는 가타부타 변명을 덧붙이지 않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성필은 신선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미안하긴. 그럼, 우리 이제 괜찮은 거지?”

“아저씨가 용서해주면요.”

“용서하고 말 게 뭐 있어. 모르고 한 거잖아. 내가 너흴 주관적으로 이상적이다, 비이상적이다, 그렇게 구분해놨다고 생각했으면 충분히 불만이 있을 만해.”

“고마워요.”

“돌아갈까?”

“네.”

성필과 조아라는 다시 장하양이 기다리는 회의실로 돌아갔다.

* * *

“아저씨랑 언니 맘대로 해요.”

회의실로 돌아와서도 아까와 같은 답이 나왔다.

답은 같지만 태도는 이전보다 살가웠다.

“난 옷 관련해선 진짜 모르잖아요.”

성필과 장하양이 서로를 보곤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조아라는 신아름과 달리 옷에 큰 관심이 없는 성격이다. 조아라의 일상복은 심미성보다 편의성으로 결정되곤 하니.

“아, 근데.”

만남을 끝내려던 분위기가 감돌던 때, 조아라가 씩 미소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파란색이면 좋을 거 같아요.”

* * *

3층, 이유이가 창고 공간을 개조해서 사용하는 일명 ‘작업실’. 그곳에선 하나의 거대한 혁신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이유이와 장하양이 서로를 보면서 씩 웃었다.

“잡혔다, 메인 컨셉 의상!”

둘은 서로를 부여안고 방방 뛰었다.

길었던 인고의 시간이었다.

온갖 레퍼런스를 보아가며 마침내 메인 컨셉 의상을 디자인해냈다.

물론 둘만의 업적은 아니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 맡은 스타일리스트팀과 토의에 토의에 토의를 거쳐 도출해낸 결론인 것이다. 그 외에도 회의에서 영감을 주었던 가로 엔터의 직원들이 있었다.

어느 프로젝트든 특정한 몇 명의 공만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유이는 자랑 좀 하고 싶었다.

주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건 그녀와 장하양이었으니까.

“하양아 고생했어어…….”

“유이 언니도요…….”

감격에 겨워 껴안고 있던 것도 잠시.

둘은 금방 떨어져 테이블에 흩어진 자료들을 품에 안았다.

“의상 비주얼팀 회의, 시작!”

이유이의 소집령에 의상 비주얼팀이 총출동하여 그녀의 작업실로 모였다.

배헌용 한 명이 왔다.

“이게 피니시(패션을 마지막 단계까지 완전하게 표현한 최종 일러스트레이션)예요?”

“응. 헌용아, 어떤지 감상 좀 부탁해.”

“저도 중간 과정 다 봤는데 여기까지 와서 감상이랄 게…….”

“너, 나한테, 토, 다는, 거야?”

“저는 감상문에 재능이 있어요.”

배헌용은 자리에 앉아 경청 모드를 취했다. 그의 앞으로 이유이와 장하양이 피니시를 들고 섰다.

“주요하게 영감을 받은 건, 후후.”

이유이가 자랑스럽게 웃으며 가슴을 폈다.

“내 모교인 파리 의상 조합 학교의 선배님! 바로 이브 생로랑(Yves Saint Laurent) 디자이너님의 컬렉션이야.”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 브랜드인 ‘입생로랑’으로 유명한 디자이너다.

“바로 ‘르 스모킹’!”

이유이의 옆에 서 있던 장하양이 참고 자료를 펼쳤다.

입생로랑이 최초로 선보였던 ‘르 스모킹’ 컬렉션부터, 그의 정신을 계승하여 ‘입생로랑’의 그랑 쿠튀리에(그랑드 쿠튀리에르, 대재봉사大裁縫師)들이 디자인한 최신 르 스모킹 컬렉션까지.

“특히 여기, 2017년 F/W 입생로랑 쇼에서 발표했던 르 스모킹 컬렉션 중 하나.”

‘르 스모킹’의 시작은 이러하다. 남성용 턱시도를 여성용으로 개조하여 여자에게 입힌 것이다.

그래서 남성용 턱시도보다 몸의 굴곡을 더 잘 드러낸다. 동시에 턱시도의 깔끔하고 날카로운 스타일을 잘 살렸다.

초창기엔 그냥 남자 옷을 가다듬어 여자에게 입힌 것이었으나, 후배 그랑 쿠튀리에들의 창의성에 힘입어 르 스모킹은 점점 진화해나가게 된다.

이윽고 남성복인 턱시도를 ‘여성용 턱시도’라는 경지까지 도달시켰다.

단 한 사람의 어수룩한 아이디어가 세대를 거쳐 완성의 경지까지 오른 예시 중 하나다.

“여기 2017년 컬렉션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어. 물론, 이걸 먼저 입고 싶다고 한 건 하양이야.”

장하양이 브이를 그렸다.

참고 자료 속의 상의는 굉장히 공격적이었다.

모델은 와이셔츠와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턱시도 상의만 입었다.

턱시도 상의는 단추를 잠그면 목부터 가슴의 중앙, 명치까지 노출하는 디자인이다. 그러니 안에 와이셔츠를 입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2017년의 컬렉션은 그 발상을 내던졌다.

‘입생로랑’의 위대한 그랑 쿠튀리에는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브래지어를 안 차고, 와이셔츠를 안 입고, 턱시도를 입으면 어떨까?’

그 결과가 장하양이 손에 든 참고 사진이었다.

이유이가 진중하게 말했다.

“나 혼자 레퍼런스를 봤다면, 이 사진은 보자마자 던졌을 거야. 우리 사랑스러운 소련이들에게 이런 옷을 입히진 않을 테니까…….”

그런데 장하양이 먼저 이 사진을 가져왔다.

배헌용이 떨떠름하게 질문했다.

“어, 누브라 쓰죠?”

“당연히 차지 헌용이 너 제정신이야?! 진짜 브래지어를 벗기고 턱시도 상의만 입힐 리 없잖아! 누브라 없으면 춤출 때 상의 가슴께가 흔들려서 안이 보이잖아!”

“죄송합니다. 당연한 걸 물었네요.”

물론, 이런 과감한 복장을 받아들일 멤버는 많지 않을 것이다. 2017년 컬렉션 스타일을 소화하는 건 장하양뿐이겠지.

그렇지만 어쨌건, 장하양의 건의 덕분에 이유이는 ‘르 스모킹’이라는 영감을 붙잡을 수 있었다.

“상의는 일반적인 턱시도뿐 아니라 블레이저, 블루종, 테일러드까지 다양하게 활용할 거야.”

“그럼 ‘르 스모킹’이 아니…….”

“틀에 박힌 생각은 그만해! ‘르 스모킹’은 크게 봐서 여성용 정장이야!”

“저는 감상문에 재능이 있어요.”

배헌용이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영감.”

장하양이 다른 참고 자료를 보였다.

“‘꼼데가르송’의 옷 중 하나.”

그건 분홍색의 원피스였다.

원피스인데, 여기저기 원형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다.

배헌용은 그 디자인을 보고도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옷에 진짜 구멍을 뚫어 디자인 패턴을 만들었는데, 뭐…… ‘타공패턴(打孔Pattern)’이라고 불러야 하나.

“안타깝게도 이 옷은 컬렉션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고, 금방 단종됐어서 정보가 적어.”

그럴 거 같다. 어떤 인간이 구멍이 숭숭 뚫린 옷을 입으려 하겠는가.

물론 저 원피스는 안에 다른 옷을 입고 위에 덧입는 용도다. 븨스티에(bustier)처럼 말이다.

‘아, 아니지.’

배헌용은 생각을 다잡았다.

‘이상한 옷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난 패션 업계 종사자잖아.’

배헌용은 여자 연예인들이 처음 븨스티에를 입고 방송에 나왔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예능인들은 그 차림을 볼 때마다 ‘왜 속옷을 옷 위에 입어요?’라며 웃었었다. 유머 소재로 썼던 점에서 그건 비웃음이었다.

배헌용은 그걸 보면서 ‘패션에 무식한 걸 대놓고 티 내네’라면서 혀를 쯧쯧 찼었다.

‘나는 그러면 안 되지.’

저 타공패턴을 쓴 디자이너도 무언가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걸 가지고 온 이유이도.

“이 꼼데가르송 원피스처럼 턱시도에 원형 구멍을 패턴으로 새기는 거야!”

“오오.”

“그리고 하의에도!”

“저는 감상문에 재능이 있어요.”

배헌용은 그냥 듣기로 했다.

“당연히 속옷은 안 보여야겠지? 헌용이 너, 또 음흉하게 그런 생각했지?”

안 했다.

상식적으로 그럴 리 없잖은가.

청바지를 일부러 찢어 입는 것처럼 받아들였다. 스키니진이나 청바지에 구멍을 여럿 내는 정도야 과거부터 있던 디자인이니.

다만 정장 바지에도 타공패턴을 낸단 건 예상 밖이었다. 새삼 패션이란 아주 사소한 게 커다란 아이디어가 되는 세계란 걸 느꼈다.

“환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구멍 크기는 크게 크게 하기로 했어. 찢청처럼.”

배려심까지 완벽하군.

감상문에 재능이 있는 배헌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의상은 아이돌계에 파란을 일으킬 거예요. 박 이사님도 제 아티스트십과 도전 정신을 칭찬해주시겠죠…….”

장하양이 꿈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이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양아, 너랑 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섹스 피스톨즈’가 될 거야.”

‘섹스 피스톨즈’는 70년대를 풍미했던 펑크록 밴드다. 이름에서부터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기성체제에 대한 반항 정신이 드러난다.

“아하하.”

장하양은 성필의 음악사 수업 덕분에 ‘섹스 피스톨즈’는 알았지만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몰랐다.

그래서 대충 ‘수어지교(水魚之交)’ 비슷한 뜻인가 보다 하고 아하하 웃었다.

“음, 요컨대.”

배헌용이 최종적인 감상을 말하려는 듯했다.

이유이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그의 감상을 기다렸다.

“‘입생로랑’이랑 ‘꼼데가르송’의 파쿠리(베낀 것)…….”

“이게 어떻게 파쿠리야아아!”

이유이가 극대노했다.

“그럼 입생로랑도 파쿠리야?! 그냥 남자 옷을 여자한테 입힌 것뿐인데 왜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추앙받는데! 그 자그마한 발상이 위대한 거야! 남자 옷을 여자한테 입힌단 발상 자체가! 앤드로지너스(Androgynous) 스타일의 지평을 열었단 게! 그게 대단한 거라고!”

이유이가 같은 학교 선배를 필사적으로 옹호했다. 물론 입생로랑을 논쟁의 장으로 데려온 건 이유이였다.

“이게 파쿠리면 모노그램 디자인은 전부 에르메스 파쿠리야?! 그럼 에르메스가 모든 명품 브랜드한테 저작권 소송 걸어야 해? 아니잖아!”

사실 이유이의 말이 옳다.

장하양이 가져온 ‘르 스모킹’의 아이디어는 소녀연맹 멤버들에게 턱시도를 입히겠단 것이다.

딱히 ‘르 스모킹’ 컬렉션 디자인을 훔치겠단 뜻은 아니다.

옷에 구멍을 뚫는 것도 저작권이 있는 디자인은 아니다.

그 두 가지를 합치는 건 당연히 저작권 위반이 아니고 파쿠리도 아니다. 패션 정신적으로 표현하자면, 영감을 얻은 것이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들도 다른 브랜드의 컬렉션이나 민속 의상, 심지어 건축물에서도 영감을 받았다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그, 그, 아니, 파쿠리라고 말하려던 게 아니라요. 제가 마땅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어서……. 그러니까 두 개에서 영감을 받아서 조합했단 거죠? 아, 그래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

이유이는 순식간에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헌용아, 두고 봐. 우리는 아이돌의 패션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길 거야.”

나, 명품 브랜드 ‘후쿠요 히다카’의 전속 디자이너 제안마저 거절하고 가로 엔터로 온 이유이가!

“입생로랑을 뛰어넘는 디자이너가 될 거야!”

“오오.”

배헌용과 장하양이 박수를 쳤다.

배헌용은 박수를 치며 물었다.

“그럼 이대로 의상 제작 단계로 들어가나요? 의상 지시서 쓸까요?”

“음, 아니. 일단 박 이사님한테 비주얼팀 회의에서 컨펌을 받아야 해.”

“아, 바로 되는 게 아니었구나.”

배헌용은 가로 엔터에 들어오기 전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시청했었다.

시즌1과 시즌2 때 멤버들에게 의상 관련 아이디어를 받는 것을 보곤 입사를 결정했었다.

‘영상에선 짧게 다뤄졌었는데, 컨펌받는 과정이 있긴 하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멤버들의 아이디어로만 계획이 굴러가는 줄로만 알았다.

하긴, 회사란 원래 이런 거니까.

멤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할 거였으면 프로듀서가 왜 있겠는가.

그리고 이유이와 장하양이 힘을 합친 디자인을 보니, 컨펌하는 프로듀서가 꼭 필요할 것 같았다.

오늘 본 디자인 이전에도 얼마나 충격적인 디자인이 많았을지…….

“헌용아, 회의 때 나랑 하양이가 프레젠테이션하는 걸 잘 봐둬. 스타일리스트한테는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꼭 필요해. 클라이언트는 패션의 전문가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우리의 스타일링을 논리적이고, 때론 감성적으로 설명해서 설득할 수 있어야 해.”

배헌용은 긴장했다.

지금까지는 이유이에게 업무를 배우고, 그녀와만 줄곧 회사를 돌아다녔었다.

그런데 드디어 업무다운 업무에 들어섰다.

“네.”

배헌용이 굳은 결심을 담아 말했다.

“선배님, 그리고 하양 씨의 프레젠테이션,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겠습니다.”

* * *

제1차 비주얼팀 의상 피니시 컨펌 회의.

회의실에서 이유이와 장하양은 필사의 프레젠테이션을 펼쳤다.

고도로 정련된 PPT로 시인성을 강화하고, 감성을 움직이는 설득을 병행하여 설명을 이어갔다.

스크린에선 둘의 이야기 방향에 맞춰 적절한 사진이 떠올랐다.

마침내 프레젠테이션이 끝났다.

장하양과 이유이는 만족하여 서로를 보며 씩 미소 지었다. 그리고 둘 다 기대감에 두근거리며 성필을 바라보았다.

“쓰읍, 난 좀 반대인데.”

성필이 말했다.

구석 자리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던 배헌용은 이유이와 장하양에게 주목했다.

‘과연 선배님과 하양 씨는 어떻게 반응하실까.’

입생로랑을 뛰어넘겠다고 선언한 이유이.

아티스트십으로 성필에게 칭찬받을 생각으로 가득했던 장하양.

과연 둘이 어떤 독창적인 설득법을 사용할지, 배헌용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으, 그렇겠죠오…….”

이유이(미래에 입생로랑을 뛰어넘을 디자이너)가 찌그러졌다.

“저, 저도 쪼금은 불안이 있었어요오…….”

장하양(아이돌리즘과 아티스트십의 화신)도 덩달아 쭈그러들었다.

“……?”

배헌용은 어안이벙벙했다.

‘뭐야, 설마 이 사람들…….’

성필에게 쫀 건가? 이대로 포기라고? 말 한마디에?

배헌용은 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성필을 보았다.

‘아.’

그곳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기적을 만들어낸 불패의 프로듀서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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