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화
연습실 문엔 ‘탈의, 착의 중’이란 팻말이 걸려 있었다. 문에 난 작은 창에도 종이가 붙어 있어 안을 볼 수 없었다.
연습실 안, 이유이가 리카의 치수를 열심히 재고 있었다. 곁에는 시험용으로 입힐 옷이 어지러이 쌓여 있었다.
조아라는 근처에 앉아 이유이가 가져다 둔 잡지를 파르륵 넘겨 보았다.
“이 잡지는 왜 이래요?”
잡지 안엔 옷 입은 사람밖에 없었다. 한 페이지에 12개 칸으로 나누어 각각 한 명씩 있었다.
일반적인 잡지처럼 광고, 개인 화보, 인터뷰 같은 건 없었다.
이유이는 리카의 치수를 재며 답했다.
“‘마리클레르 패션쇼즈’라고, 패션쇼 룩을 모아 편집한 잡지야.”
“아, 글쿠나. 난 또 패션 업계 사람들은 패션쇼 전부 다 보는 줄 알았어요.”
“못 보지. 패션쇼가 얼마나 많은데.”
“머리 좋네. 내가 이걸 먼저 생각해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우리 아라 부자 됐을걸.”
조아라가 잡지를 내리고 이유이를 노려보았다. 이유이는 웃으면서 사과했다.
이유이는 쌓인 옷을 보지도 않고 척척 집어 리카에게 주었다. 리카는 옷을 들고 간이 탈의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리카가 나왔다.
리카는 검은색 슬림 크롭 티셔츠에 턱시도 바지를 입었다. 전체적으로 신체에 밀착하여 리카의 몸 선을 드러냈다.
“음?”
조아라는 의아해하며 리카의 바지를 가리켰다.
“너 왜 바지를 골반에 걸쳤어?”
“원래 바지는 골반에 걸쳐 입는 거야! 골반까지가 하체니까!”
“아니…….”
몇 년간의 트렌드는 하이웨이스트, 즉 바지를 골반 위까지 끌어올려 입는 것이었다. 바지가 배꼽까지 가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 패션이 유행한 건 다리가 길어 보인단 이유 때문이었다.
걸그룹에겐 공중파 음악 방송 규제 중 하나인 ‘배꼽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본격화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리카의 바지는 배꼽은커녕 골반까지밖에 안 왔다. 배꼽이 훤히 보인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이유이가 주었다.
“이렇게 입는 건 ‘로우라이즈’라고 해. 거기 ‘마리클레르 패션쇼즈’에서도 자주 보이지 않아?”
잡지엔 S/S(Spring/Summer) 시즌 패션이 모여 있다. 그렇기에 여성복은 노출도가 있는 게 꽤 있었다.
조아라는 잡지를 빠르게 넘겨 보았다.
이유이의 말마따나 정말 로우라이즈 스타일로 바지를 입은 모델이 많았다. 이게 올해 봄, 여름 시즌의 트렌드가 될 모양이다.
조아라는 납득하면서도 동시에 걱정했다.
“근데 이러면 다리가 짧아 보…….”
조아라의 걱정은 리카를 보자마자 바로 사라졌다. 그 시선을 캐치한 리카는 곧바로 골반을 빼서 뇌쇄적인 자세를 취했다.
“유후, 아라쨩, 아타시(나)한테 반해버린 거야?”
“쟤 다리 길이가 얼마예요?”
“음.”
이유이는 아까 잰 리카의 치수를 읊었다.
“리카 인심(발바닥부터 사타구니까지의 길이)은 83cm야.”
“인심만 83cm요?”
인심이 거의 몸의 절반이란 거 아닌가?
그렇다면 아웃심(발바닥부터 골반까지의 길이)은 110cm에서 120cm는 되겠다. 거의 신체 2/3가 배꼽 아래에 있다.
“뭔 괴물임?”
“아라쨩 히도이(너무해)!”
괴물 리카가 우는 척하면서 조아라에게 안겨 왔다. 조아라는 정면의 거울로 리카의 뒷모습을 보았다.
평소부터 비율 좋다고 생각은 해왔는데, 제대로 보니 장난 아니게 좋다.
현재 조아라의 키가 리카처럼 커지고, 그 키가 전부 하체로 가야 리카와 비슷해질 지경이다.
“너 아저씨랑 마주 보고 서면 아저씨보다 골반이 높은 거 아니야?”
“으음, 4cm 차이긴 한데 아마? 그렇지? 않을까? 왜냐하면 나는 연예인이니까! 나 같은 사람이 연예인을 해야 아얏! 왜 때리는 거야!”
“나도 연예인이니까.”
“아라쨩은 지금 이대로인 게 제일 예쁜걸?”
“유이 언니, 나도 로우라이즈예요?”
조아라가 미약한 희망을 품고 물었다. 그녀도 나름 연예인에 나름 아이돌이니 비율에는 자신이 있었다.
“아니, 아라는 하이웨이스트야.”
조아라, 시무룩.
과거 진저를 보았을 때 느꼈던 열등감이 다시 자라 올라오려고 한다. 재능이란 봉건제와 같아서,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진다.
“허나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던가? 한고조 유방이 태어날 때부터 천자였던가? 천명은 내 스스로 쥐는 것이다.”
“쥬니뵤(중이병).”
조아라가 리카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리카는 행복한 비명을 내지르며 발버둥 쳤다.
짧은 응징을 끝낸 후, 조아라가 이유이에게 물었다.
“유이 언니. 그런데 공중파 음방은 배꼽 나오면 안 되지 않아요? 리카 얘 이 옷은 케이블용이에요?”
“아…….”
이유이가 곤란한 미소를 띠었다.
“아직은 몰라.”
오늘 성필이 방송국으로 갔으니, 답을 가지고 올 것이다. 하지만 이유이는 이미 결말을 알았다.
‘안 되겠지…….’
장하양이 성필을 설득할 때 이렇게 말했었다. 만약 첫 주차 때 소녀연맹판 ‘르 스모킹’을 쓸 수 없다면, 공중파 음악 방송엔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그건 진심인 동시에 진심이 아니었다.
단지 장하양의 의지를 보여주려는 것일 뿐.
‘공중파 PD한테 강짜 부릴 순 없겠지…….’
아무리 뉴미디어의 시대라지만 방송국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현재는 아이튜버들의 전성시대.
그러나 텔레비전에 얼굴을 비춘 연예인이 아이튜브에 등장하면 그 화제성은 인기 있는 아이튜버를 가볍게 앞지른다.
그게 텔레비전의 힘. 비록 몰락했다지만 한때 대중문화의 중심이었던 레거시 미디어가 지닌 잠재력이다.
‘아마 박 이사님은 타협하실 거야.’
오늘 성필은 방송국으로 갔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민경섭이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사안이 워낙 중대했다.
민경섭이 매니지먼트 이사라지만, 성필이 직접 가는 쪽이 훨씬 무게감이 있다.
표면상으로는 PD들을 설득하겠단 이유였다. 장하양은 옆 방에서 초조하게 성필이 가져올 대답을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유이는 알고 있다.
성필은 설득하러 간 게 아니다. 장하양에게 체면치레할 생각으로 방송국에 얼굴을 비춘 것뿐이다. 직원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타협안을 가져오시겠지.’
그리고 장하양을 설득할 것이다.
예전엔 새파랗게 벼려져 있던 장하양의 의지도, 성필이 직접 가져온 PD들의 답에 무뎌질 것이다.
그리고 그게 옳을 것이다, 아마도.
신념이 중요하다지만, PD의 권고를 무시하고 아예 출연을 거부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할까.
대형 기획사들이야 방송국과 기 싸움을 벌일 힘이 있으니 예외다.
WTP마저도 7년 활동 중반기에 방송국과 사이가 틀어졌다가 여러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그러니…….’
이유이는 벽 너머에 있을 장하양을 보았다.
‘하양이가 잘 받아들여야 할 텐데.’
아니, 장하양도 알 것이다.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 * *
3대 공중파 중 하나.
성필은 A 음악 방송의 PD를 찾았다. A PD는 반갑게 성필을 맞아주었다. 그리고 성필이 사 온 커피를 직원에게 시켜 사무실에 돌리도록 했다.
“어, 기다리고 있었어요. 슬슬 올 줄 알았지. 언제 컴백해요?”
성필이 기간을 말하자 A PD는 ‘으음’ 의미심장한 신음을 흘렸다.
“잘 잡았네. 운인가? 아니면 다른 기획사들이랑 접촉해서 알아냈어요? KS랑 SMS 애들 컴백하는 시기를 진짜 좋게 빗겨났어요. 몰랐어요? 자신감이 느껴져서 멋지네요. 겹쳤어도 괜찮다, 그런 거예요? 하기야, 소녀연맹이니까.”
성필이 용건을 말했다. 그가 종이백에서 무언가를 꺼내자 A PD가 소탈하게 웃었다.
“데모 CD 같은 거 안 줘도 소녀연맹 이름이면 그냥 출연시켜주죠. 뭘 이런…….”
성필이 가져온 건 피팅 모델이 입은 의상 사진들이었다. 아트지(Art紙, 잡지에서 주로 사용하는 광택 재질 종이)에 인쇄되어 있었다.
A PD는 의상 인쇄지를 여러 장 받아 들곤 천천히 넘겨 보았다. 그가 의상을 보는 동안 성필은 이야기를 했다.
이건 소녀연맹이 컴백 첫 주 차에 입을 메인 컨셉 의상이라고. PD님이 허락만 해주신다면 반드시 이 옷으로 무대에 오르고 싶노라고 말이다.
의상을 전부 확인한 A PD가 길게 한숨을 뽑아냈다.
“성필 씨, 의상 규제는 알고 있죠? 아니다, 모를 리가 없지. 으아…… 뭐라고 하나. 성필 씨 의지는 잘 알겠는데요.”
PD가 거절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성필은 2차 설득을 시작했다.
장하양의 의상 선택이 어떠한 마음으로 이루어졌는지. 이 의상으로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이 의상에 어떤 의지가 담겼는지.
그 설명은 패션의 역사까지 이어졌다. 여성의 바지 착용을 금지하는 판탈롱 조례에 반기를 들고, 여성을 위한 슈트 팬츠인 르 스모킹을 정식 컬렉션에 포함한 이브 생로랑의 이야기를…….
“아니, 아니, 알겠는데요. 충분히 알겠는데요. 이거 무대에 올리면 저 방통위(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불려가요. 거기 어떤 데인 줄 알죠?”
* * *
“거기 가면 진짜 돌겠다니까?”
B PD가 과장스럽게 말했다.
“진술장 들어가자마자 숨이 턱 막혀. 아니 진짜 별것도 아닌 걸로 꼬투리 잡고 미쳤다니까? 거기 꼰대 여럿이 나 둘러싸고 말로 두들겨 패는데, 아니 진짜. 교무실에 불려간 중학생이 된 거 같아. 기분 차치하고서도, 거기 간단 거 자체가 이런 뜻이야. 조심스럽지 않고 세심하지도 않은 PD다. 그러니까 응? 내 향후 커리어에 조금 타격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말이지.”
성필아 알겠지?
그 물음에 성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상을 다시 한번 봐주길 요청했다.
B PD는 탐탁잖은 얼굴로 의상을 다시금 보았다.
“근데, 몇 번을 봐도 이건 100퍼 심의에 걸려. 이거 가슴에 이거 뭐냐, 비키니야? 속옷만 입고서, 단추도 안 채우고 재킷을 입겠다니. 이거 자체가 좀…… 불특정 다수가 시청하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에 합당하지가 않아요.”
B PD는 달래듯 성필의 팔을 꾹꾹 주물러주었다.
“이게 한 15년 전이었으면, 아 나도 바로 도장 찍고 나오라고 했겠지. 그런데 그런 시대가 아니잖아. 미안해.”
성필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그는 PD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 *
C PD가 어처구니없단 듯 코웃음을 쳤다.
“박 이사님. 아…… 보통은…… 저희가 ‘안 된다’고 하면 이런 답이 돌아와야 하지 않나요?”
고쳐서 오겠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떤 의식의 흐름으로 ‘PD님께서 여의치 않으시다면 첫 주차 출연을 비울 수 있겠습니까’란 답이 나옵니까? 첫 주차 출연을 비워요? 그럼 대놓고 케이블 방송에서만 컴백 무대를 하겠단 거 아닙니까. 그동안 우리는 손가락만 빨라고? 우리 아이튜브 채널들은?”
C PD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저랑 오래 봤잖아요. 뭐, 박 이사님 마음 이해해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한 번 협상을 해보겠다, 그런 마음을 먹을 수도 있어요. 근데 이건 협상하고 말고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요. 명백히 규정에 있는 걸 안 된다고 한 겁니다. 협상으로 어떻게 할…….”
규정으로 안 된다고 하니, 첫 주차 출연은 힘들겠습니다. 저희 소녀연맹은 이 메인 컨셉 의상으로, 반드시 컴백 무대를 가져야만 합니다.
무리한 부탁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거듭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며언.”
C PD가 기어코 목소리에 비아냥을 담았다.
“의상을 좀 가리면 끝나잖아요? 천 조금만 덧대면 되는데, 출연을 안 하겠다? 이걸 제가 어떻게 죄송함의 표시로 받아들입니까. 저희랑 싸우자는 거지?”
C PD는 고개 숙인 성필을 물끄러미 보았다.
마주 앉은 상태에서 사람의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답답함이 몰려온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C PD가 어처구니없단 듯 짧게 웃었다.
“끝까지 고쳐서 오겠다고는 안 하시네요? 진짜 출연 안 한다고요? 참…….”
* * *
B PD가 기어코 언성을 높였다.
“우리도 정말 소녀연맹을 돕고 싶어! 응? 멋지잖아! 편견과 억압에 저항하는 소녀들! 근데 그 저항이 우리를 향하면 어떡해!”
답답했다.
B PD는 부하를 향해 히터 온도를 낮추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누가 보아도 화난 태도로 패딩을 벗었다.
“성필아, 네 부탁 알겠어. 알겠는데 못 들어주겠단 거 아니야. 규제가 있어. 네가 이걸 이해 못 하면 어떡해? 그리고 내가 못 할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아티스트적인 신념 다 좋은데, 둘 다 좋게 자그마한 양보를 하자는 거지. 여기 보이지?”
B PD가 의상 인쇄지를 들고 여기저기 검지를 가져다 댔다.
“여기, 여기, 여기, 이만큼. 이만큼만 첫을 덧대란 거잖아. 여기 구멍 뚫린 거 조금 메우고, 옷에 천을 덧붙이고. 아니, 알아. 구체적인 규제가 아니지. 근데 PD의 감이 있잖아. 이거 백퍼 경고 딱지 받는다고.”
B PD는 패딩을 벗었는데도 더웠다.
답답함 때문일 것이다.
“이 자그마한 부탁이 못 할 만한 거야? 성필이 네가 살짝 눈을 흐리게 뜨면 해결될 일이잖아. 조금만 물러나면 될 일이잖아.”
조금만 양보하면 되는데, 왜 그걸 못 하겠다는 거지?
“……야, 고개 들어. 네가 자꾸 그렇게 숙이고 ‘죄송합니다’만 반복하면 내가 나쁜 놈 같잖아. 응? 일어나. 일어나고.”
B PD가 의상 인쇄지를 그러모아 성필의 품에 안겼다.
“다시 해서 가져와. 소녀연맹 출연은 확정해놓는다?”
B PD는 성필에게서 모니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몇 달 후 스케줄에 소녀연맹을 적어넣으려 할 때, 성필이 입을 열었다.
십수 초간, 성필은 그에게 사죄했다.
몇 번이고 죄송하단 말을 반복했다.
고개를 몇 번이고 숙였다.
비굴하리만치.
“……아하니, 나는 진짜 나쁜 사람이 아닌데.”
B PD가 다시 성필에게로 몸을 돌렸다.
“네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네. 네가 이러면 선례가 남는 거야. 내가 이 자리에서 없어져도, 내 후배들이 기억해. 이 회사가, 방송국이 기억한다고. 네가 우리한테 이런 거. 소녀연맹은 그렇다 쳐, 가로 엔터 다른 애들은? 그 족쇄마저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옷이 대단해?”
고작 옷 따위가?
* * *
고작 옷 따위, 가 아니다.
옷은 세상을 바꾸며, 동시에 바뀐 세상의 상징이다.
인간의 내면이 표현된 형태라는 점에서, 옷이란 인간 정신의 표상이다.
이브 생 로랑이 위대한 디자이너인 이유는 단순히 남자 옷을 여자에게 입혔기 때문이 아니다.
수천 년간 옷으로 규정되었던 박제된 여성성을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록이 시대정신이었던 건 그냥 유행했던 음악 장르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유와 저항, 록의 기치는 항상 거무튀튀하고 단정하기만 했던 남자의 옷을 바꾸었다. 남자의 꾸미기 혁명, 공작새 혁명을 촉발시켰다.
패션의 변화는 정신의 혁명을 상징한다.
“언더붑 패션 알죠?”
A PD가 숙고 끝에 입을 열었다.
“탱크톱이랑 크롭인데, 가슴 아래쪽을 노출한 옷이요. 그건 딱히 규제에 없어서, 얼마 전에 무대에 내보냈었어요. 그런데 귀신처럼 경고받았어요. 방통위까지도 갔다 왔고요. 뭐, 여러 말을 들었는데 순화해서 말하면 국민정서상 불건전하다는 거였어요. 국민정서, 라…….”
A PD의 눈동자엔 깊은 고민이 일렁였다.
“그거 알죠. 외모를 규제하는 건 예로부터 억압의 가장 기초적인 수단이었어요. 귀천에 따라 입을 수 있는 옷의 종류, 색, 재질이 다르고. 빈부에 따라 헤어스타일이나 장신구에 제한을 두는 것. 사소한 규칙과 규제, 그 사소한 게 지배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해요.”
당장 북쪽에 있는 그 나라도 국민의 헤어스타일과 옷을 규제한다.
“정도는 있죠. 안전벨트 같은 거. 개인의 자유냐, 아니면 생명권을 위한 조치냐. PD가 되는 시험을 흔히 ‘방송고시’라고 하죠. 여러 가지 공부하는데, 공부한 거 중에 이런 말이 떠오르네요. 철학의 가장 큰 적이 미디어라고. 철학은 인간을 의심하게 하지만, 미디어는 인간을 확신케 한다고. 그중에서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모습은 표준 역할을 해요.”
그리고 이 표준이란 국민정신의 표준인가?
A PD는 고개를 저었다.
“높은 사람들이 국민에게 바라는 표준이죠. 그건 어쩌면 진짜 표준과 굉장히 멀어져 있어요. 저는 미디어를 계몽이나 선동의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식으로 써먹기엔, 텔레비전은 이미 한물이 가버렸죠. 그러니 텔레비전 방송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저기 저 위에 있는 소수 어떤 분들이 규정한 ‘표준’이 아니라.”
최소한 진짜 존재하는 ‘표준’을 나타내야 하지 않을까.
미디어(매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징검다리라면 응당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성필 씨, 이게 제 최후통첩이에요.”
A PD는 검은 펜을 들어 의상 인쇄물의 어느 부분을 새까맣게 칠했다.
배꼽이었다.
“이것만은 안 돼요. 그리고 또 조건이 하나 있어요. 우리 방송에서 첫 컴백무대를 가져주세요. 이게 두 번째 조건이에요. 네? 방통위는 뭐…… 한 번 더 갔다 오죠. 저 여기 메인 PD 단 지 얼마 안 돼서 더 가도 상관없어요.”
A PD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불안한 듯했다. 이 결정이 맞는가 의심하지만, 끝내 결정을 내렸다.
“나름 젊을 때 이런 짓도 해보는 거죠. 아무튼, 네, 이게 제 최후통첩이에요. 어떡하실래요?”
A PD가 이번에야말로 정말 곤란하단 듯, 난처함이 가득 배인 눈웃음을 지었다.
“여기부터는 저도 더 물러날 수가 없는데.”
* * *
성필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곤 신음을 흘렸다. 시트에 등을 기대고 있자니 피로가 쫙 번진다.
피로를 흐릿한 한숨으로 겨우 지우곤, 성필은 힘겹게 차에서 내렸다. 그는 재킷을 어깨에 걸치며 가로 엔터를 향해 걸었다.
확실히 봄이 다가오는지 저녁에도 나름 햇볕이 빌딩 끄트머리에 걸려 있다.
성필은 짙은 피곤함 때문에 비틀거리며 걸었다. 하지만 가로 엔터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등은 펴지고 걸음엔 자신감이 넘쳤다.
이윽고 문에 앞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표정에서 근심을 지운 후,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박 이사님.”
들어가자마자 장하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관에서 우측, 휴게 공간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는 벌떡 일어나 성필에게 다가왔다.
사람에게 품을 만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성필은 그녀를 보곤 반려견을 떠올렸다. 주인이 퇴근할 시간이면 현관 근처를 맴돌다가, 도어락 소리가 들리면 현관문을 긁는 강아지.
강아지는 무서워하지만, 아이튜브에서 영상은 자주 본다.
“어, 하양아. 안녕.”
장하양은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가장 처음 나온 말은.
“고생하셨어요. 많이 힘드셨죠?”
그 말만으로 성필은 피로가 전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힘들긴 뭘. 하던 일 하고 온 건데.”
“아하하…….”
“그…….”
성필이 결과를 말해주려하자 장하양이 바짝 긴장했다.
“역시 PD님들이 안 된다고 하시더라. 출연은 힘들겠다고, 미안하다고 하셨어.”
“아…….”
“근데, 한 분은 허락해주셨어.”
“……정말요?”
“응, 정말요. 당연하지. 아름다운 하양이의 착샷을 보고 어떻게 안 넘어가? 눈 딱 감고 허락해주실 만도 하지.”
“그게 끝이에요?”
“끝이냐니?”
“정말 저희…… 출연 안 하는 걸로…… PD님들이…… 뭐라고 안…… 하셨나요?”
장하양의 물음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뚝뚝 묻어났다. 흘러내리는 걱정들을 지우려는 듯, 성필은 평소와 다름없이 인자한 미소를 보였다.
“뭐라고 하긴. 그분들도 다 일이잖아. 되면 되는 거고,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PD님들도 우리 애들 옷 꼭 무대에 세우고 싶다고 하셨어. 근데 규제가 있어서 안타깝다고 하시더라.”
“…….”
“아 정말 괜찮다니까? 내가 욕이라도 얻어먹었을까 봐? 막 내가 비굴하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개 숙이고? 그런 거 다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거야. 그리고 좋게 끝났으니까 하양이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것보다, 내가 음방 하나 따온 거 칭찬해줬으면 좋겠는데. 응? 나 진짜 노력 많이 했어. 하양이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에.”
성필이 목소리에 애교를 넣었다. 그답지 않은 장난이었다.
장하양은 바싹 마른 입술을 꾹 다물었다. 허나 그 핼쑥한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은 화사한 기쁨만을 비추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성필도 그녀를 따라 기쁘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
“그리고, 또.”
“또?”
“……감사합니다.”
“음, 두 번이나 감사받으니까 좀 뭐하네. 원래 내 일인데.”
“꼭 최고의 무대로 만들게요. 성공할게요. 반드시.”
성필은 웃고 있었지만 이젠 씁쓸함이 더해졌다. 아무래도 장하양이 그의 말을 믿지 않는 듯했으니까.
옛날부터 참 눈치가 빠른 아이다.
성필이 나름 감춘다고 감췄건만, 심란한 마음을 이렇게 쉽게 간파해내다니.
그래서 장하양의 성공한다는 선언이 더욱 고맙게 느껴졌다. 그녀가 이 고생을 몰랐으면 했으나, 고생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단 건 썩 기분이 좋았다.
“……어깨라도 주물러드릴까요?”
“……그렇게 사적인 감사는 안 해도 괜찮아. 하양이 마음은 알겠지만, 최고의 무대로 보답해주는 게 제일 기뻐.”
“아하하…….”
이미 정해진 퇴근 시간은 지났으나, 성필은 자연스럽게 2층으로 향했다. 뒤따르는 장하양도 그가 회사에 남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2층에 오르자마자 연습실 문이 열렸다.
신아름이었다.
그녀는 성필을 보더니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을 드러냈다.
“팀장님 일 끝났어요?”
“응. 애들 다 모여 있어?”
“조아라랑 쌤만 있어요. 아, 들어가면 안 돼요.”
“유이 씨 작업 아직도 안 끝났어?”
“이것저것 얘기하다 보니……. 맞다, 이거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저희 올해 케이콘에서 아카이브랑 곡 바꾸기 무대 하잖아요?”
“그렇지.”
언제쯤 아카이브가 컴백할 지는 모르겠지만, 이왕이면 소녀연맹보다 서너 달은 빨랐으면 좋겠다.
아카이브의 컴백곡을 연습할 시간도 확보해둬야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시기를 정확히 유추할 순 없었다. 그게 성필의 가슴속에 자그마한 짐으로 남아 있었다. 확실하게 ‘이때다’라고 말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경민이가요.”
아카이브의 리더, 유경민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날 컴백 무대 구경하러 오라고 했거든요. 컴백 날짜 확정된 거 같아요.”
신아름이 폰으로 달력을 보여주었다.
성필은 표시된 날짜를 보자 곤란한 웃음을 흘렸다.
“우리 컴백 예정일이랑 겨우 두 달 차이 …….”
정확히는 두 달 약간 안 된다.
아카이브의 활동기가 끝나면 바통 터치하듯이 소녀연맹이 들어갈 정도의 시간이다.
소녀연맹의 ‘오토마타’는 발매한 지 벌써 몇 개월이나 흘렀다.
아카이브는 마음만 먹으면 당장 오늘이라도 연습을 시작할 수 있다. 어쩌면 강성욱은 성필과 술자리를 가진 바로 다음 날 아카이브에게 연습을 지시했을 수도 있다.
‘겨우 몇 주…… 아니지.’
소녀연맹이 컴백곡을 연습할 시간을 제외한다면, 순수하게 투입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일이 주가 전부이겠지.
‘그 짧은 시간 만에 남부끄럽지 않은 퀄리티를 보여야 하는 건가.’
강성욱은 이 곡 바꾸기 무대를 대결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공평하지가 않다.
이번 아카이브의 컴백곡은 ‘오토마타’에게서 받은 영감을 일부 투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퍼포먼스가 힘들 텐데, 연습할 시간 고작…….
‘선배 그룹이니까 페널티를 안고 가란 건가.’
아니, 이건 과한 억측이다.
강성욱이 소녀연맹과의 대결에서 유리함을 점하려고 일부러 컴백일을 미뤘단 뜻이 되니까.
만약 아카이브가 저 때 컴백하는 게 사실이라면 공백기가 상당히 길다. 성필은 아카이브의 컴백이 최대 봄쯤은 될 줄 알았건만, 초여름이라니.
프로듀싱이 예상보다 길어진 거겠지.
“팀장님 혹시 불안해요? 걱정 마요.”
신아름이 자신감을 가득 머금었다.
“두 달이면 떡을 쳐요.”
“너 그 말 누가 가르쳐줬어?!”
“이게 왜요? 충분하단 뜻이잖아요.”
“‘떡을 치고 남는다’라고 하잖아 보통!”
“아…… 그래요?”
신아름이 은근슬쩍 연습실 안을 가리켰다.
“조아라가 알려줬어요.”
조아라, 어린아이 핸드폰 관리 어플 설치 결정.
유해 사이트 차단!
* * *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역으로 모든 원인은 결과를 만든다.
‘어째서 이런…….’
노아는 최근의 짧은 사건들을 반추했다.
윤상열은 글로브의 이번 앨범 프로듀서로 연임했다. 연임이라고 하니 어감이 이상하지만, 실제로 선출된 것이니 연임이 맞았다.
아무튼 윤상열은 연임했다.
‘어쩌다 이렇게…….’
커다란 외침.
그 소음에 노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가롭게 과거를 반추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눈앞의 광경과 귀를 때리는 소리는 다른 모든 자극을 압도했다.
노아는 압도됐다.
“정신병 있어요? 허구한 날 최고의 아이돌, 최고의 아이돌, 최고, 최고, 정상, 정상, 아니 진짜 미친 거냐고요. 무슨 우리 동기 부여하려는 정도면 모르겠는데, 진심으로 ‘정점’ 이러니까 미친놈 같다고요. 알아요? 여기서 진심으로 최고의 아이돌 되려는 인간 하나 없어요. 피디님의 그 미친 소리는 피디님 머리에만 있다고요.”
윤상열과 글로브의 정기 미팅.
지유의 힐난이 사나운 불길처럼 윤상열을 덮쳤다. 그걸 보는 윤상열의 눈빛엔…….
‘아무것도 안 보여!’
윤상열의 눈동자가 새까맣다(원래 검은색임).
노아는 벌벌 떨었다. 그리고 이번엔 지유를 보았다.
“아시겠어요?”
지유가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피디님은 정신이 나갔다고요.”
2차 지유의 난, 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