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화
10년도 더 전이었다.
다키스트의 주간 평가.
정호환은 다키스트의 퍼포먼스를 보곤 짤막한 평가를 내렸다.
‘춤이 아깝다.’
리더인 서유선을 위시한 멤버들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정호환은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건 침묵이었으나 백 마디 말보다 따가웠다. 침묵은 바늘로 메워진 바다였다. 멤버들의 숨통은 물론 전신을 고통스럽게 찌르고 꿰뚫었다.
정호환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고 일어났다. 그리고 연습실을 나서려던 순간.
‘너무하잖아요…….’
하민이 말했다.
정호환은 우뚝 멈추곤 천천히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호환을 따르던 윤상열, 그리고 하민의 곁에 있던 멤버들도 하민을 보았다.
바늘의 바다에 모두의 시선이 겹쳐졌다.
하지만 하민은 더 주눅 들기는커녕 울분이 가득한 눈빛으로 정호환을 쏘아보았다.
‘이렇게 어려운 걸 어떻게 노래까지 부르면서 하라는 거예요…….’
‘너, 하민이.’
정호환은 이젠 완전히 하민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말을 내가 몇 번이나 들었다고 생각하지? 어렵다는 말이 하기 싫음의 핑계가 될 순 없지.’
‘다쳤다고요. 아프다고요. 제가 어깨 때문에 입원했던 거 잊으셨어요? 유선이도요. 이러다가 저희 전부 다 쓰러져요…….’
동정심을 일으키려는 것일까.
아마, 아니다.
하민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더 이상 했다간 누구 하나 큰일 나겠다고 여긴 거겠지.
‘춤이 이렇게 어렵고 힘들어야 할 이유가…….’
‘있다. 무용 관객들은 무용에 조예가 있어. 간단한 움직임에서도 의미를 찾는다. 스트릿 댄스도, 발레도, 클럽 댄스도, 프로의 무대를 찾는 관객들은 전부 보는 눈이 있어. 그런데, 너희의 무대를 보는 관객들은 어떨까?’
정호환이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춤의 치읓도 몰라. 눈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 인간들이 춤을 추기나 해봤을까, 무용 작품을 감상해보기나 했을까. 하물며 무용에 관한 책을 단 한 줄 읽어보기라도 했을까. 동태눈, 죽어버린 물고기를 향해 춤춘다고 생각해라.’
정호환의 목소리엔 짙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하민을 향한 게 아니었다.
그의 생각으로, 예술적 소양 따위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대중을 향한 분노였다.
‘그런 멍청이들에게 너희의 가치를 알려주려면 직관적이어야 한다. 갓 태어난 아기조차 대단하다고 느낄 춤이어야만 해. 죽은 물고기를 펄떡이게 할 아우라가 필요하다.’
정호환이 눈을 가리던 손바닥을 내렸다.
‘아니, 아니야. 대단하다고 생각하면 다행이지. 대중이란 애새끼들은 너희의 퍼포먼스를 보고도 그냥저냥 괜찮다고만 생각한다. 예술에 대한 감수성과 공감성이 결여돼 있거든. 대중이 감탄하는 건 작품이 아니라 미술관의 이름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으면 잘 몰라도 박수나 날리지. 그런데 뭔가 새로운 걸 보면 주변 눈치나 봐. 왜냐면 주관이 없거든. 판단할 능력도 없고. 그런 대중이 순수하게 감탄하는 유일한 게 바로.’
‘어려운 것’이다.
척 보아도 ‘난 못 할 거 같아’란 마음이 들면 감탄한다.
해석하기 위한 기반 지식 없이도, 감동하기 위한 예술적 감수성이 없어도, 좋다고 판단할 지적 능력이 없어도.
인간에게 생득적으로 주어진 직관에 호소하여 감동을 끌어내는 것.
‘그걸 대중문화라고 부른다. 멍청이들도 이해하기 쉽게, 예술의 정수를 가공하고 또 가공한 거. 그리고 너희는 한국 대중문화의 정점에 설 거다. 대중의 평균을 끌어 올리는 거야. 이 정도 수고로움은 감수해야지. 대답이 됐나?’
‘우리는…….’
하민의 목소리는 작았다.
정호환이 반문했다.
‘뭐?’
‘우리는…… 그냥…… 안중에도 없으시네요…….’
‘오히려 내가 당황스럽구나. 너희가 어떤 위치에, 어떤 시대에 있는지 전혀 모르겠단 거냐? 전 세계적으로 아이돌 문화는 사멸하기 직전이야. 그런데 바로 이곳, 한국에선 부활하고 있다. 너희는!’
영원히 한국의 대중음악을 뒤바꿀 것이다.
향후엔 세계의 문화적 흐름마저 비틀 것이다.
‘너희가 표준이야! 다키스트가 분기점이야! 너희의 후배들이 더 높은 지점으로 나아가도록 다잡아줄 최초의 방향타다!’
과거 황금기를 향유했던 영미권의 보이밴드와 걸그룹, 그리고 현재 일본의 아이돌처럼 영락(零落)하지 않기 위해선 다키스트가 공전절후의 대히트를 기록해야만 한다.
절대 쓰레기 대중가수나, 시류에 올라 한몫 챙겨보려는 쓰레기 아이돌 따위가 정상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
다키스트가 정점에 서서 모든 아이돌의 표준이 되어야만 한다. 한국 대중의 눈과 귀를 뜯어고치는 것이다.
‘그게 사명이야! 너희와 내게 주어진 문화적 사명! 다신 돌아오지 않을 기회와 시대다! 대체 내가 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더 해야 칭얼거림을 그만둘……!’
‘이사님.’
하민이 낮게 웃으면서 정호환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사람을 상대하는 공손함이나 두려움 같은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치셨어요?’
정호환은 얼이 나갔다.
‘문화적인 사명이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이니……. 그딴 걸 말하기 전에, 저희가 어떤지 봐주시면 안 돼요? 저희가 다치고 아픈 건 신경도 안 쓰시죠? 아니, 신경은 쓰시겠다. 기삿거리가 늘었다며 좋아하시겠죠. 다키스트, 과격한 안무에 연습 중 부상, 하지만 무대에 오르는 부상 투혼. 이런 기사 올릴 생각에 아주 싱글벙글하시겠다, 그죠?’
하민이 활짝 웃었다.
‘저희는 기계가 아니에요, 이사님.’
웃음 속에 눈물이 맺혔다.
‘이대로는 못 해요. 안 해요. 진짜, 못 해먹겠다구요……. 천만금을 주더라도…… 더는…….’
정호환은 얼이 빠져선 흐느끼는 하민을 바라보았다.
‘최고가 되는 길이 이딴 거면, 저는 최고 같은 거 되기 싫어요…….’
바라보기만 하다가, 조용히 연습실을 나섰다. 윤상열이 급히 정호환의 뒤를 따랐다.
집무실로 들어온 정호환은 의자에 앉아 멍하니 책상 어딘가를 응시했다.
윤상열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정호환이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윤 피디.’
‘예, 이사님.’
‘독립운동가 말일세.’
‘독립운동가 말입니까?’
‘운동가가 되고 나서, 태극기를 향해 맹세를 했겠지. 대한독립을 위해 헌신하겠다, 그런 말로.’
‘예, 아마…….’
‘그거 아나? 일제의 종로경찰서에 잡히면, 자백하기까지 24시간이 안 걸렸다더군. 고문당한 거야. 협박도 당했겠지. 일제 만세, 그런 말을 하라고. 더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예…….’
‘어느 쪽이 진심일까?’
태극기 앞에서 조국 독립을 맹세했을 때인가.
고문당하며 일본 제국 만세를 외쳤을 때인가.
‘어느 쪽이건 진심일까?’
‘……정상적인 상태에서 한 결심이 진심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렇겠지…….’
정호환은 눈에 띄게 혼란스러워했다.
그걸 바라보는 윤상열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생각했다.
‘너는 프로듀서잖아.’
모두를 이끄는 위치잖아.
‘그런 네가 어린애가 뱉은 말 몇 마디로 이러면 안 되지.’
네가 이러면 다른 사람들은 뭐가 되는 거야.
네 신념이 흔들리면, 너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떡하는 거야.
윤상열이 아는 정호환은 이래선 안 된다.
아니, 진짜 이래선 안 되는 건.
‘하민.’
다키스트.
찬란한 사명을 부여받은 이름을 가졌음에도, 분에 겨운 행복을 쥔 줄도 모르고 찡찡거리기만 하는 애새끼.
윤상열이 분노를 태우던 순간.
‘상열아.’
정호환이 물기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하민이 말처럼, 정말 내가 심했던 걸까…….’
윤상열은 질겁했다.
설마 우는 건가? 정호환이?
하지만, 정호환은 끝내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어른답게 울음을 갈무리했다. 그럼에도 윤상열은 그가 울먹였다는 사실 자체가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어린애한테 몇 마디 들은 걸로.
그런데 이젠…….
“나는 지금까지, 뭘 하고 있던 거지……?”
윤상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떨어져 턱에 맺혔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건, 대체 뭐야……?”
그런데 이젠, 그때의 정호환이 이해가 안 된다. 이런 말을 얻어먹고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아기는 우는 게 일이라고 한다. 감정과 생각을 표현할 유일한 방법이 우는 것뿐이다.
사람은 언어와 표정, 이해력과 판단력이 무르익을수록 눈물이 줄어든다. 눈물이 아니어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할 방법이 많으니까.
그러니 어른이 운다는 건 특별하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이 눈물이란 형태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나는 뭘 위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뭉개진 꿈이, 윤상열의 눈에서 흘러나왔다.
* * *
“윤상열한테 그런 말을 했어? 지유가?!”
성필은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지유가 과격한 성격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랬으니 회사를 뛰쳐나온단 생각을 했었겠지.
그런데 설마 윤상열의 면전에서 ‘미쳤다’, ‘정신이 나갔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 그래서? 윤상열이 뭐래?”
설마 그 자리에서 바로 퇴출을 명령했나?
신아름을 데뷔조에서 내쫓았던 때처럼?
“아뇨, 말은 딱히…….”
“그러면?”
양소민은 정진의 눈치를 보곤 작게 말했다.
“우, 울었어요…….”
“윤상열이?!”
성필은 펑펑 우는 윤상열을 상상했다.
상상하려고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윤상열이 울었다고?
‘아, 소민이가 사건을 축약했구나.’
어떤 점을 축약했을까. 짐작해보자면, 지유가 윤상열에게 쏟아부었던 욕설이 아닐까.
단순히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울기에는, 윤상열이 보통 인간이 아니다. ‘미쳤냐’고 하면 콧방귀를 뀌면서 응수할 게 분명하다.
‘그런 윤상열이 울 정도면…….’
지유가 어마어마한 욕설을 퍼부었을 수도 있다.
문득 지유의 집을 방문했을 때가 떠올렸다. 게임을 하면서 거의 1초에 한 번씩 욕설을 뱉었었지.
‘야 죽여 그냥 죽여 이 개새끼. 죽여 이 개새끼! 죽여 이 씨바알 새끼! 야 일로 와 이 개시키야. 이 X만한 새끼야. 이 X만한 새끼. 죽어 이 간나 새끼들아!’
라고 했던 것 같다. 그만한 욕을 얻어먹었으면 성필도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 뒤론 냉전이에요…….”
윤상열은 멤버들의 퍼포먼스 평가나 정기 미팅도 하지 않고 작업실에 박혀있다는 소문이다.
소문인 이유는, 윤상열이 작업실에 있는 게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업실은 이미 텅 비어 있고, 윤상열은 집에서 이불을 덮어쓴 채 질질 짜고 있을 수도 있다.
“윤 피디님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지유는 계속 저기압이구요…….”
양소민은 해답을 갈망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성필을 바라보았다.
성필이라면 답을 알 것이다. 그런 마음이 선명히 느껴진다.
‘근데 나라고 답이 있진 않은데…….’
조언을 주는 대상이 양소민이란 점부터 그러하다. 만약 상담 상대가 지유이거나, 절대 그럴 리는 없지만, 윤상열이었다면 할 말이 꽤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민이한테 이러쿵저러쿵 말해봤자, 소민이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양소민이 바라는 건 이 상황의 궁극적인 해결이다. 어떤 식일지는 몰라도 위기가 해결되고, 다 함께 손잡고 하하호호 웃는 해피 엔딩을 원한다.
성필은 양소민으로 하여금 해피 엔딩에 닿을 방법을 제시할 수 없다.
“일단 내가 이해한 대로 말해볼게.”
“네.”
“사건의 원인은 윤상열이 지유에게 파트 분배를 적게 한 거지? 소민이 네 생각은 어때?”
사실 특정 멤버가 파트 분배에서 소외되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다키스트마저도 보컬 파트는 서유선과 하민에게 몰려 있지 않았던가.
중요한 건 편중된 파트를 상쇄할 요소가 있냐는 점이다. 다키스트는 눈에 띄는 댄스나 킬링 파트를 골고루 배분함으로써 그러한 문제를 없앴다.
만약 프로듀서가 균형을 생각하지 않으면…….
‘소녀 가장 그룹 소리 들어먹거나, 심하면…….’
성필이 정말 싫어하는 말이지만, ‘OOO발사대’ 같은 말을 들어 먹는다.
발사대가 무슨 뜻이냐면, 인기 있는 특정 멤버를 제외하고 다른 멤버들은 인기 멤버를 쏘아 올리기 위한 발사대가 된단 것이다.
소녀연맹의 데뷔 초반을 예시로 들자면, 소녀연맹은 ‘신아름 발사대’가 되는 것이다. 신아름은 프로젝트 포유 출연으로 인기와 인지도를 얻고 있었으니 말이다.
외모와 실력이 받쳐주니, 그녀의 미디어 노출도를 압도적으로 높일 수도 있었다.
“정말 윤상열이 지유한테 일부러 파트를 적게 준 거 같아? 전에 했던 일을 보복하려고?”
“…….”
양소민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때 줄곧 입을 닫고 있던 정진이 용기를 냈다.
“그럴 가능성이 많지 않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
“네? 어, 아름이 때도 그렇고…….”
윤상열에게 신아름은 눈엣가시였었다. 그는 그룹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프로듀서로서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 신아름을 방출했었다.
물론 윤상열 눈에 신아름은 글로브에게 어울리지 않는 재원이었다.
그렇더라도 신아름을 내보낸 게 글로브의 그룹색을 고려하기만 한 조치는 아닐 것이다. 윤상열이 신아름을 사적으로 미워했던 건 확실하니까.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정진은 자신의 대답이 괜찮았나 판단하듯 성필의 눈치를 보았다.
“애초에 윤상열은 신뢰가 없구나.”
윤상열도 그걸 알 터다. 그렇다면 나름 신뢰를 확보하려고 프레젠테이션을 했을 텐데.
“윤상열이 지유를 달래려고는 안 했어?”
“아…… 지유가 있는 파트가 중요하다고는 했어요…….”
“정확하게는?”
정진은 폰을 꺼내어 ‘케미컬 임패트’의 송폼(Song form)을 적었다.
인트로(20초).
“인트로가 20초?”
“아, 네. 왜요?”
“아…… 아니야.”
파격적이어서 그런다.
요즘 리스너들은 초반에 꽂히지 않으면 금방 다음 곡으로 넘기곤 한다.
그래서 작곡가와 프로듀서들은 인트로를 극단적으로 짧게 하거나, 아예 하이라이트를 인트로에 박아 넣기도 한다.
그런데 인트로만 20초라니, 성필로선 윤상열의 곡이 어떤 형태일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인트로가 20초고…….”
1절 벌스+프리코러스(30초)
1절 하이라이트(20초)
2절 벌스+프리코러스(40초)
“…….”
2절 벌스와 프리코러스가 1절에 비해 10초가 늘었다.
‘어떤 구조로 된 곡이지?’
2절이 시작될 때, 1절과 구조를 통일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긴 하다. 1절과 2절이 같다는 건 외우기는 쉬워도 질리긴 쉽기 때문이다.
‘2절 시작에 변주를 줘서 10초가 는 건가?’
성필은 ‘케미컬 임팩트’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2절 하이라이트(20초).
브릿지(30초).
라스트 하이라이트(20초).
아웃트로(30초).
“이게 ‘케미컬 임팩트’의 송폼인데요. 보컬이 있는 시간만 따지면 2분 30초 정도 될 거예요. 지유가 받은 시간이 10초고, 윤상열이 말했던 센터 댄스 퍼포먼스는 이 부분.”
인트로(20초).
1절 벌스+프리코러스(30초).
1절 하이라이트(20초).
2절 벌스+프리코러스(40초).
2절 하이라이트(20초).
브릿지(30초).
라스트 하이라이트(20초).
―지유의 센터 댄스 퍼포먼스(6초)
아웃트로(24초)
“지유의 퍼포먼스는 아웃트로에 있는 거네?”
“네. 모든 보컬이 끝난 시점에요.”
고전적인 송폼이다.
이런 송폼은 요즘도 많이 쓰인다. 성필이 고전적이라고 표현한 건, 각 파트마다 분배된 시간 때문이었다.
특히 인트로와 아웃트로가 그러했다.
‘노래가 끝나고도 아웃트로가 30초 이어져. 이 30초를, 무대에선 어떻게 표현하려는 거지?’
30초 동안 춤만 추겠지. 춤을 안 추면 딱히 할 게 없으니까.
‘지유가 얻어낸 가장 중요한 파트는, 아웃트로를 알리는 6초의 댄스야. 그런데 지유는 독무는 아니란 거지. 그냥 중앙에만 있을 뿐이고.’
센터라면 1절 하이라이트에도, 2절 하이라이트에도, 라스트 하이라이트에도 자리가 있다.
확실히 아웃트로를 알리는 중앙이란 건 위의 셋에 비해 무게감이 적다. 하지만 노래를 들어보지 않았으니 정확한 판단은 힘들다.
“소민이랑 정진이는 곡을 듣고 춤도 봤을 거잖아. 어때, 중요한 부분 같아?”
“……모르겠어요.”
양소민이 애매하게 답했다.
성필은 질문을 바꾸었다.
“네 파트랑 바꾸자고 하면, 바꿀 거 같아?”
“……아니요.”
“소민이가 지유보다 보컬 파트가 많으니까야? 지유의 파트랑 바꾸면 손해란 느낌이야?”
“그, 그것보다는, 저는 지유만큼 춤을 못 추니까…….”
“정진이는 어때? 지유랑 파트를 바꾸고 싶어?”
“……아뇨.”
양소민과 정진, 둘 다 지유와 파트를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다. 딱히 멤버들이 군침 흘릴 만한 자리는 아니란 건가.
“그럼 바꾸고 싶은 멤버는?”
“…….”
“있나 보구나.”
“아, 아…….”
실력으로 보면 라희나 위세라가 파트를 많이 분배받았을 것 같다. 정진도 보컬과 댄스가 동시에 수준급인 리드 포지션이니, 센터에 섰을 가능성이 크고.
대충 감이 온다.
‘다른 멤버들이 보기에도, 지유의 파트는 그저 그런 느낌인가.’
만약 다른 멤버였다면 ‘이번 곡은 내가 덜 눈에 띄네’라며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유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윤상열이 이때까지 해온 짓거리를 보아왔고, 멤버들의 처우 향상을 위해 투쟁해온 게 바로 지유다.
지유라면 이걸 보자마자 ‘불공평하다’고 느꼈을 법하다. 실제로 양소민과 정진도 지유의 파트를 고평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아이돌의 눈이잖아.’
아이돌이야 어떻게든 자기 파트가 많으면 좋아할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파트가 적으면 실망한다.
아이돌의 무대는 중앙으로 눈이 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중앙에 서는 건 노래 부르는 멤버다. 그래서 아이돌이 보컬 파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프로듀서의 눈은 다를 수 있어.’
프로듀서는 파트 시간만으로 멤버의 중요성을 판단하지 않을 테니.
윤상열은 진심으로 지유의 파트가 보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문제는 지유가 납득하지 않는단 것이다.
“소민아, 미안.”
“네?”
“모처럼 나를 의지해서 상담을 요청해줬는데, 해결책을 줄 수가 없네.”
순간 우울해졌던 양소민의 얼굴은 금방 환하게 펴졌다.
“괘, 괜찮아요. 어려운 문제인 거 알아요. 매니저님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시구…….”
“해결책은 줄 수 없지만, 소민이의 마음에 대해 내 나름의 답을 들려줄게.”
“제 마음이요?”
“소민이는 지유가 다시 옛날처럼 연습에 열심히 참여해주길 바라는 거지? 옛날처럼, 글로브에 정을 붙이고 다 함께 나아가길 바라.”
“네, 네…….”
“그럼 그 마음을 지유한테 전해보면 어떨까?”
양소민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짜증으로 일그러진 지유의 표정을 떠올린 모양이다.
“너희가 정말 윤상열의 판단을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들 힘을 모아 성토할 수도 있을 거야.”
“…….”
“혹은, 반대일 수도 있어.”
“반대, 요?”
“‘얘가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 떠네’.”
“저, 저느은……!”
“내가 살면서 배운 것 중 가장 값진 게 있어. 마음은 말로 하지 않으면 안 전해진단 거야. 지유가 지금 소민이 마음을 알까? 연습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안달복달하는 소민이의 마음을 1/10만큼이라도 느낄까?”
“…….”
“지유도 그걸 깨달은 거야. 마음은 말로 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단 걸. 그걸 알아서 윤상열한테 미쳤냐고 한 거지. 사람은 좋은 거든 나쁜 거든 감정을 숨기곤 해. 그 감정을 전했을 때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까.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래서 감정을 말로 전한단 건 용기가 필요해. 해결책을 찾는 건, 먼저 서로가 어떤 마음인지 알고 난 후여야 하지 않을까.”
윤상열과 글로브의 문제점이 이것이었다.
윤상열의 감정만 글로브에게 일방통행으로 전해진다. 글로브는 그에게 감히 뭐라 하지 못했다.
그걸 바꾼 게 지유의 난이었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글로브에겐 선택권이 생겼으니.
윤상열과 글로브의 관계는 극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어떤 관계든 그러하지만, 한 번 바뀌었다고 끝이 아니다.
끊임없는 조율이 필요하다.
잡음은 필연적이다.
“어쩌면 말 한마디로 서로의 사이에 난 얇은 다리가 끊어질 수도 있지. 그게 무서워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지유는 계속 소민이에게 공감하지 못할 거고, 소민이도 답답함을 품고 지내게 될 거야. 당장은 삐걱대면서도 나아가겠지. 그런데 결국은 파국이 와. 이 상황이 그대로 이어지고, 이 상태로 나아간 미래가 소민이의 바람대로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하지만.”
“제가 말을 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가능성이 생긴다.
“이게 소민이의 마음에 대한 내 답이야. 편한 소리만 하지? 당사자의 입장에선 피하고만 싶은 일인데, 부외자는 왜 그것도 못 하냐고 다그치기만 하니까.”
양소민은 무릎 위에 얹은 손을 보았다. 고개를 숙이곤 손을, 그 너머의 바닥을, 아무튼 거의 눈으로 핥듯이 아래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아니에요. 용기가 조금 생긴 거 같아요. 네, 정말, 지유한테 말하는 것밖에 답이 없었네요…….”
“다행이네. 그리고 또 이건 들은 건데, 다키스트 멤버들끼리도 이런 적이 있었대.”
리카가 RRBKZ 아지트에서 하민에게 들었다고 했던가.
“하민 씨도 지유처럼 프로듀서한테 막 화냈던 적이 있었어. 그때 리더인 유선 씨가 하민 씨랑…….”
남자의.
“대화를 나누어서 어떻게든 해결이 됐대. 그걸 해결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안 좋게 끝났어요?”
“결국은 하민 씨가 참는 형태였다고 들었어.”
“그런데 유선 선배는 은퇴하고 하민 선배는 계속 솔로로 활동하고 계신 거예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니까. 누가 알았겠어. 눈앞의 갈등만 해도 속이 쓰린데, 미래를 어떻게 볼까.”
“저, 정확히 유선 선배가 뭐라고 하셨는데요?”
“……응?”
“도움이, 조금은 도움이 될 거 같아서…….”
“아…….”
성필은 살짝 난색을 표하면서도, 서유선이 하민에게 했던 말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양소민은 깜짝 놀랐다.
“선배님들도 욕하고 싸우는구나…….”
“아닐 줄 알았어?”
“미디어에 보이는 건…….”
“전부 친한 모습뿐이니까. 사람을 거의 24시간 붙여놓는데 안 싸우는 게 힘들겠지. 그냥 친구 사이도 아니고, 친구이면서 비즈니스 파트너잖아.”
“비즈니스…….”
“맞아, 비즈니스. 가까운 사이라서 할 말을 아끼는 건, 그래, 친구 사이면 그럴 수 있지. 그런데 함께 돈을 버는 사이기도 하잖아. 미안해, 오늘 되게 피상적인 얘기만 해줬네.”
“아니에요, 도움 많이 됐어요. 정말루요.”
석세스 엔터의 매니저들도 비슷한 말을 하긴 했다. 그런데 성필이 해준 말과 어감이 전혀 달랐다.
매니저들은 ‘너희들이 그래도 같은 멤버니까 얘기 잘 좀 해봐라’ 같은 말만 했다.
마치 교사가 학생 간의 교우관계에 신경 쓰기 귀찮아서, 교무실에서 악수시키며 화해하라고 하듯이.
물론 양소민은 매니저들을 이해한다. 석세스 엔터의 황금알 낳는 거위, 글로브를 매니저가 가볍게 건드렸다가 상황이 악화되면 어떡하는가.
월급쟁이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리고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기 마련이다. 목숨과 커리어를 걸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이상한 거겠지.
‘그래도…….’
최소한 한 명이라도, 성필처럼 말해주었더라면 진작 지유와 대화를 나눠봤을 텐데.
아니, 성필이 석세스 엔터에 있었다면 성필이 먼저 지유를 붙잡고 대화를 나누었겠지.
아니 아니, 성필이 석세스 엔터에 있었다면 성필이 먼저 윤상열에게 뭐라고 했었겠지. 그래서 이런 일 자체가 안 벌어졌겠지.
“…….”
“디저트입니다.”
어느새 메인 메뉴마저 끝나고 디저트가 나왔다. 양소민은 디저트를 스푼으로 살짝 덜어 입 안에 넣었다.
“달다…….”
식사가 끝났다.
셋은 함께 가게를 나섰다.
“맞다, 이건 아까 얘기랑 상관없긴 한데.”
성필이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며 말했다.
“내가 해준 조언이 가장 도움이 되는 건 사랑에서야. 마음은 말로 안 하면 몰라. 35년, 짧은 인생이지만 가장 큰 후회는 사랑 때문에 생겼었어.”
“마음을 못 전하셨어요?”
“응. 부끄러워서. 하아, 아니, 부끄럽기도 했는데, 마음이 저절로 전해지진 않을까 기대했었거든.”
“부끄러워하는 이사님은 상상이 안 돼요.”
“나도 그래. 둘 다 숙소 가는 가면 태워줄까? 그 데뷔조 숙소 너희가 이어받아서 쓰는 거지?”
정진은 회사 규칙을 떠올렸다.
친족을 제외한 외부인에겐 어떤 이유든 숙소 위치를 알려주어선 안 된다. 즉, 성필의 차를 타고 숙소로 가선 안 됐다.
그런데 성필은 외부인이긴 하지만 숙소 위치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차를 얻어 타도 되는가?
무슨 논리 문제 같다.
‘나중에 말 나오면 안 되니까 거절해야 하…….’
“감사합니다.”
양소민이 차 뒷좌석에 쏘옥 들어갔다.
정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진이는?”
“저, 저요? 저, 저도, 네…….”
정진도 양소민을 따라 뒷좌석에 쏘옥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정진이 목격한 건, 창문에 머리를 박고 잠든 양소민이었다.
“소민이 술을 잘 못 마시나 보네. 와인 두 잔으로 곯아떨어졌어.”
“그, 그, 그런가 봐요, 네…….”
정진은 양소민이 술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양소민의 주량도 몰랐다.
보통 레드와인이 도수가 높다지만, 두 잔으로도 취하는 건가? 적어도 정진은 살짝 몽롱할 뿐, 양소민처럼 곯아떨어지진 않았다.
“숙소 근처까지만 갈게.”
차가 출발했다.
정진은 그리운 기분이었다. 옛날엔 성필이 운전해주는 차를 자주 타곤 했었다.
성필이 나가고 회사가 커진 후, 정진은 성필이 운전을 잘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운전은 여타 매니저들과 달리 매우 부드럽다.
정진은 차 시트를 만지작거리다가 백미러를 흘끗 보았다. 성필의 눈이 비쳐 있다.
정진은 우물쭈물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입을 열었다.
“그, 아까 얘기요.”
“아까? 어떤 이야기?”
“마음이 저절로 전해질까, 기대했다는 거요.”
“아, 그거.”
“상대분이 눈치채셨을 거예요. 보통은 보이더라구요. 아마 무시했을 걸요, 하하…….”
성필이 바로 답하지 않았다.
1초.
정진의 가슴이 철렁였다.
2초.
정진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3초.
정진의 표정까지 창피함이 번졌다.
왜 3초 전의 자신은 그딴 말을 한 거지?
“알아.”
“네?”
성필이 웃으면서 말했다.
“보였다고 하더라. 그래, 그렇게 부끄럼 타면서 티를 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
정진은 성필이 기분이 상하지 않았나 기색을 살폈다. 다행히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감돈다.
이왕 대화가 이어졌으니, 사회성을 발휘하여 적당한 질문을 돌려줘야겠다.
“고백하셨어요? 근데 차였죠? 말하는 거 보니 그런 거 같은데.”
아, 그냥 죽어버릴까.
“응, 차였어.”
성필의 입가에 걸려 있던 은은한 미소에 쓴맛이 배어들었다.
‘아, 진짜 그냥 죽어야겠다.’
“여, 여기 아니야.”
그때 양소민이 꼬부라진 발음으로 무언가 말했다.
“여기 아니에요. 다른 데, 여기 아니라, 오른쪽, 여기서 대교 타고 내려가서…….”
“숙소 가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다른 데 갈 거예요. 여기 아니야. 아니에요.”
“어딘데?”
“아, 여긴 어디야……? 진아? 우리 여기 어디지? 어, 팀장님이다. 팀장니임……. 저, 5년 전으로 돌아온 거예요……? 그럼 아직 소녀연맹도 데뷔 안 했어? 아, 드디어 회귀에 성공했구나…….”
그냥 취해서 아무 말이나 하는 듯하다.
“회귀한 천재 아이돌의 퍼펙트 연예계 정복기…….”
“소민이한테는 술 먹이지 마.”
“네.”
“노아가 자장면 시키는 걸 막아야 해…….”
* * *
지유는 휴일을 맞아 본가로 돌아왔다.
본가로 와 봤자 하는 일은 게임이 전부였다.
[야, 지유 지유. 용. 아니, 쫓아가지 말고 용 때려!]
“스마이트 있잖아.”
[두 명 살아 있어! 쫓으면 안 돼! 아, 아악! 뺏겼잖아! 용 때리라니까! 아 진짜 말 왤케 안 듣냐!]
“스마가 있는데 왜 뺏기냐고.”
[네가 같이 때렸으면 안 뺏겼잖아!]
“…….”
지유는 항복을 눌렀다.
[야 미안. 내가 잘못했다. 맞네, 스마이트가 있었는데 뺏긴 내가 쓰레기야. 블츠한테 뺏겼으니까 씹쓰레기다. 응? 내가 잘못했어.]
항복 4/5.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악!]
패배 화면이 나왔다.
어차피 질 게임이었다. 지유와 친구가 억지로 항복을 안 누르고 이끌어가던 것뿐이다.
안 그래도 채팅창에서 팀원들이 다채로운 욕설을 뿌리던 중이었다. 왜 진작 항복 안 했냐고. 주제 파악이 그렇게 안 되냐고.
[아 씨 한 판 더해.]
“그만해.”
[어? 세 판밖에 안 했…….]
“나갈게. 다음에 하자.”
지유는 게임을 끄고 침대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인생과 아무런 상관도 없건만, 아까 팀원들이 쳤던 채팅이 자꾸 떠오른다.
왜 항복 안 하냐.
주제 파악이 안 되냐.
이거 못 이기는 거다.
이러니까 아직도 플딱이지.
항복하고 다음 겜이나 돌려라.
‘……아니야.’
이길 수 있었다.
이길 수 있음을 팀원들에게 직접 보여주려고 했다. 멍청한 녀석들은 직접 보여줘야 알아먹는다. 말로 아무리 해봤자 비웃음만 날릴 뿐이다.
‘이길 수 있었는데.’
왜 진 거지.
친구가 스마이트가 있는데도 블츠에게 용을 빼앗긴 거 때문인가?
아니다, 그 이전으로 돌아가서.
‘게임 중간에 차단 박은 게 문제였나.’
팀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소통했어야 했던 걸까.
지시를 내리고, 자신의 판단을 들려줬어야 했나.
그럼 조금이라도 게임이 나아졌을까.
‘귀찮아.’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다.
지유는 폰을 보았다. 멤버들에게서 온 연락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라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가장 마지막에 온 건 이거였다.
[휴일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 잠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잠깐이어도 괜찮아]
[숙소가 불편하면 네가 편한 곳으로 정해줘 내가 갈게]
[계속 연락해서 미안해 휴일 잘 보내:)]
“…….”
인간관계는.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다.
동시에 힘들다.
그렇기에 잘해 내는 사람이 드물다.
회사에서 평판이 좋은 사람도 가정 내에선 불편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친구에겐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 직장에선 싸가지 없는 직원일 수 있다.
가족에겐 천사 같은 사람도 친구 하나 없는 성격파탄자일 수 있다.
인간관계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같은 관계라도 시기에 따라, 사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인간의 마음이란 변화무쌍하기에 경험이 통하지 않을 때마저 있다.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 거겠지.’
가장 처음 만나는 타인, 부모.
유치원에서부터 학창 시절까지 수없이 즐거운 추억과, 수많은 상처를 품에 안고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어서도 해결하지 못할 문제를 마주하고 방황한다.
노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지유가 상상할 수 없는 아득히 긴 시간을 살아서도, 인간은 쉬이 파악하기 힘든 것이겠지.
거기에 더해 세상의 눈이란 것까지 있다.
세간의 인식이란 또 다른 의미의 인간관계다.
인간은 다 이렇게 복잡한 거미줄 위에서 살아가서, 쉽게 피곤해진다.
“아이돌은 고고한 줄로만 알았어.”
지유가 혼잣말했다.
“시키는 것만 잘하면 만사형통인 줄 알았지.”
이런 사소한 고민 따위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고고하긴 개뿔.
결국 아이돌도 인간이 만들어낸 거다.
꿈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가고, 동료들과의 우정으로 위기를 극복하며, 마침내 수많은 팬의 사랑으로 최고의 무대에 오르는.
그런 스테레오타입은 단순한 드라마였다. 인생의 재미없고 짜증 나는 부분을 잘라낸 것에 불과했다.
“아가씨, 글로브의 소민 씨가 오셨습니다.”
가정부가 문밖에서 말했다.
지유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소민이가요?”
“예, 아가씨와…….”
지유는 가정부의 말을 무시하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양소민이 격자무늬 대문 너머에 서 있었다.
“……오라고 하세요.”
“예.”
잠시 후 대문이 열렸다. 양소민이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지유는 커튼을 치고 다시 침대에 앉았다.
‘소민이가 올 줄은 몰랐어.’
만약 멤버가 찾아온다면 라희일 줄 알았다. 그리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나 지껄이겠지.
적어도 지유에게 공감하진 않을 듯싶었다.
‘그런데 소민이가?’
양소민은 말수가 적다. 평소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쉴 때도 숙소에서 홀로 체스나 두고 있으니.
노크 소리.
문이 열렸다.
지유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소민아 왔어? 들어와.”
“지유야.”
양소민이 지유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지유는 일순 당황해서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만큼 양소민의 기세가 강했다.
가정부도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문 앞을 뜨지 않았다.
양소민이 지유의 앞에 섰다.
“어, 왜…….”
그때였다.
양소민이 지유의 멱살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양소민의 키가 지유보다 훨씬 작았기에, 마치 얼굴이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었다.
저항할 새도 없이, 지유는 양소민과 이마를 마주하게 됐다.
고작 수 센티미터 거리에 양소민의 눈동자가 보인다. 그녀의 눈동자는 디오니소스의 술잔에 담긴 포도주처럼 격렬하게 일렁였다.
눈에 담긴 건 물이었지만, 눈동자에 비친 건 빛이 아니라 불꽃이었다.
“뒈지려면 너 혼자 뒈져.”
“……뭐?”
“나는 올라갈 거야. 올라가고 올라가서 최고가 될 거야. 도와줄 생각 없으면 그냥 구석에 짜져 있기라도 해. 분위기 조지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