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5화
소녀연맹은 컴백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여러 일정이 세분화되어 있었지만, 통합하여 표현하자면 사진과 영상 촬영이었다.
영상과 사진은 뮤직비디오, 티저, 홍보 기사, 앨범 구성품 등 많은 방면에서 쓰인다.
이는 소녀연맹이 선보이는 작품이자,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홍보 수단 즉 출입구로 작용한다.
퍼포먼스 연습과 동등한 수준으로 중요한 스케줄이기에, 멤버들에게 마음 놓고 할 일이란 하나도 없었다.
신아름이 밴 뒤에 흐물흐물 앉아 말했다.
“경섭 오빠가 전에 그랬었잖아. 우리 건강 안 상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근데 이 스케줄이면 이미 상하고 있는 거 아닌가?”
“아름아, 고생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신아름이 소름 돋은 듯 어깨를 쓸었다. 방금 그 말을 한 게 리카였기 때문이다.
리카는 신아름의 과민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었다.
“엄밀히 표현하자면 우리가 현재 바쁜 건 건강을 상하게 하는 게 아니라, 체력을 소진하는 거겠지.”
“너 왜 그래……?”
“응? 뭐가?”
리카는 무릎 위에 수첩을 두고 무언가 끄적이는 중이었다. 자세히 보니, 이번 앨범 구성품에 포함된 엽서 카드 문구였다.
이번 소녀연맹 ‘송 포 피플’ 앨범엔 엽서 카드가 20장 정도 들어갈 예정이다. 그 모든 카드엔 멤버들이 직접 쓴 손글씨 문구가 랜덤으로 쓰여 있다.
‘이왕 구성품을 넣는 거, 의미가 있으면서도 실용적인 걸로 주자.’
손혜빈이 그리 주장함으로써 구성품엔 엽서 카드가 20장 이상 포함됐다.
어느 인민이가 소련이들의 손글씨 문구가 들어간 엽서를 진짜 쓰겠냐마는. 아무튼 쓸 마음만 먹는다면 실용적이긴 하다.
그 때문에 리카는 엽서 카드에 랜덤으로 새겨질 문구를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 리카 네 말투.”
“아타시(나)……?”
“너 몰랐냐.”
폰으로 ‘클락’ 영상들을 무의미하게 넘기고 있던 조아라가 말했다.
“얘 뭐 하나 집중하고 있으면 컨셉 깨져.”
“컨셉……?”
“아앗!”
그제야 리카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모양이다.
“아라쨩 컨셉이라니! 아타시(나)는 원래 이렇다구! 컨셉이 깨진 게 아니라 집중 때문에 의식이 흩어진 거야!”
“그래, 정신이 흩어져서 컨셉이 깨진다고.”
“지가우(틀려)!”
리카가 애교스럽게 조아라의 어깨를 토닥토닥 마사지했다.
“원래부터 속 검은 애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게 다 컨셉이라니…….”
“아름이 말이 심한데?! 것보다 나를 속 검다고 생각한 거야? 너무해!”
“웬만한 어둠을 품지 않고서야, 매사에 그런 말투를 쓸 순 없겠지.”
“네 말투는 왜 그런데.”
“어?”
신아름은 방금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려보았다. 웬만한 어둠을 품지 않고서야…… 라고 했나?
“씹덕 같애…….”
신아름 스스로 말하고도 놀랐다. 그리고 이유도 익히 알 수 있었다.
올해 일본에서 ‘웨스턴 불렛’의 극장판이 개봉할 예정이라고 한다.
신아름은 그 소식을 듣자 책장에 잠들어둔 ‘웨스턴 불렛’ 전권이 떠올랐다. 만화책을 모두 보고 애니메이션까지 재탕하고 나니, 그만 주인공 시세리의 말투가 입에 익어버린 것이다.
신아름은 자기도 모르는 새 ‘웨스턴 불렛’을 볼 때 시세리에 감정이입을 크게 하고 있었다.
“아, 그 부분 멋졌어!”
씹덕 리카가 금세 반응했다.
“시세리가 처음으로 적을 동정하는 장면이었어! 음음, 아름이도 거기가 좋았구나!”
신아름은 으엑 하는 표정을 짓곤 그냥 리카를 무시했다.
“앗! 문구가 생각났어!”
[아타시는 괴도다!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지! 낄낄 네 마음은 벌써 내 손에 있어!]
옆엔 복면을 쓴 귀여운 토끼를 그렸다.
“다음은 뭘로 할까? 아라쨩 아이디어 있어?”
“‘아름이는 웨스턴 불렛의 주인공 시세리에 과몰입해요’는 어때?”
“좋네!”
“안 좋거든?!”
동생 라인이 왁자지껄 떠드는 중에도 백설하는 곤히 숙면을 취했다. 그리고 그 옆자리의 장하양은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째서 장하양이 긴장하고 있을까.
며칠 후 케이콘 때문에 프랑스로 가야 해서?
아니다.
지금 당장 가로 엔터를 돌아가면 큰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릎 위에 올려둔 장하양의 두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인터뷰…….’
가로 엔터에 돌아가면 인터뷰이로서 인터뷰에 임해야 한다.
잡지 인터뷰가 아니다.
서적 인터뷰다. 장하양의 인터뷰는 종이책에 실리게 될 것이다.
잡지 인터뷰 정도야 수십 번도 더 해봤지만, 서적에 실리는 경험은 처음이다.
‘잡지와 달리 책은 한 번 읽더라도 몇 번이든 다시 읽을 마음이 드니까.’
집에 각국의 보그(Vogue)를 쌓아두는 이유이가 듣는다면 화낼 법한 발언이지만, 실상 잡지의 역할이 그것이다. 유연하고 민감하게 현재를 다루는 것 말이다.
책도 그런 면모가 있긴 하지만, 잡지보다 퇴고 횟수도 많으며 저자의 자아와 통찰이 들어간다.
저자의 판단으로 하나의 완결된 짜임새를 지녔을 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바로 책이란 물건이다.
들어간 노력과 사려는 잡지보다 높고, 물론 각자 용도와 사람에 따라 판단 기준이 제각각이겠지만, 일반적으로 책의 가치가 높다.
‘책에 내 인터뷰가 실리는 거야.’
그리고 운이 좋다면, 책이 많은 사랑을 받아 오랜 시간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100년 후, 케이팝 아이돌에 대해 궁금해진 사람이 데이터베이스에서 그 책을 발견하여 장하양이란 사람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무엇보다 그 서적의 저자이자 인터뷰어는, 어찌 보면 장하양에게 은인이다.
‘가로 엔터와 박 이사님을 만나게 해주신 분이니까.’
그 말은 즉, 장하양과 성필을 만나게 해준 사람이란 뜻도 된다.
* * *
응접실 앞.
장하양을 필두로 모든 소녀연맹 멤버들이 서 있었다.
“…….”
그래, 그렇겠지.
오늘의 인터뷰어는 장하양에게 특별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멤버들에게도 특별한 게 당연하다.
성필과 가로 엔터와의 인연을 만든 사람. 곧, 모든 멤버와 성필의 인연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신아름은 살짝 애매하지만, 어쨌거나.
‘안엔 이사님과 그분이 같이 계시겠지.’
그럼 장하양이 붙임성 좋게 인사한 다음, 성필과 만날 계기를 만들어주어 고맙다고 인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들 모였으니…… 성필에게 감동을 줄 인사말을 나중으로 미루는 편이 낫겠지.
“쌤은 고맙단 인사 꼭 드려야겠네요.”
“응?”
“쌤 ‘애플 크러쉬’ 앨범 리뷰 좋게 써주셨잖아요.”
황송하게도 소녀연맹에게 ‘여름의 여왕’이란 수식어를 붙여주었더랬다.
앨범 평가는 ‘MUST BUY’였던가.
백설하는 읽으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렸었다. 그 후로도 30번 정도 리뷰를 읽었었는데, 그때마다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문 열게.”
장하양이 응접실 문을 열었다.
당연하지만 안엔 선객이 있었다.
성필. 그리고 맞은편에 그 인터뷰어가 있다.
노신사(老紳士)란 단어가 그대로 인간으로 변한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아.”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 즉시 감탄이 튀어나왔다. 그의 키 때문이었다.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등이 굽어 있었으나, 그럼에도 한구인보다 키가 컸다.
아니, 키가 크다는 말론 그를 묘사하기 힘들었다. 그는 기골이 장대했다.
수백 년 전에 태어났다면 리카 키보다 더 긴 창을 휘두르며 전장을 휩쓸었을 법하다.
“왔구나.”
성필도 맞은편의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가 공손히 노신사를 가리켰다.
“남태섭 교수님이셔.”
남태섭은 느긋한 손길로 넥타이를 바로 맸다.
안 그래도 깔끔한 정장을 다시금 다듬은 그는 세월이 인자하게 새겨진 얼굴을 풀었다.
느슨하게 풀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남태섭 교수, 예, 패, 팬입니다.”
천하 대장군처럼 보이는 외견과 다르게, 그의 첫마디는 소심했으며 목소리엔 긴장이 역력히 서려 있었다.
“……늙은 박 이사님이다.”
리카가 자기도 모르게 그리 말했다.
멤버들에게 성필에게 어울리는 단어를 하나 고르라고 하면 아마 ‘수줍음’을 고를 것이다.
성필은 나이에 맞지 않게 부끄러움을 잘 탔고, 그렇기에 능글맞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줍음을 간직했고, 동시에 순수했다. 세태의 먼지는 그의 유리 같은 눈동자에 단 한 점 끼지도 못했다.
남태섭의 눈 또한 성필과 비슷했다. 단지 눈가엔 성필보다 더 깊은 세월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직접 봬서 영광입니다, 예…….”
남태섭이 짐짓 진땀을 흘리며 성필을 흘겼다.
성필은 씩 웃으며 멤버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멤버들이 정신을 차리곤 허리를 숙였다.
“하나 둘, 안녕하세요! 우리들의 연맹, 소녀연맹입니다!”
남태섭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 확연한 변화에 멤버들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성필이 말했다.
“교수님이 너희 본다고 평소보다 옷도…….”
“차려입으신 건가요!”
“자제하셨어.”
“에?”
말끔한 정장이 자제한 거라고?
남태섭은 평소에도 저렇게 입고 다닐 것처럼 보였다. 교수라고 하지 않던가. 항상 저 모습으로 대학에 갈 것만 같은데.
“평소엔 힙합 스타일로 입고 다니시거든.”
“에엑?! 상상이 안 돼요! 트렌디하시네요! 대중음악 일을 하시다 보니 유행에 민감한 건가요! 꼭 보고 싶어요!”
갑자기 남태섭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화가 난 지옥견(地獄犬) 치와와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힙합은 내 세대의 문화다…….”
뭔가 중얼거렸다!
성필이 강아지를 진정시키듯 남태섭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교수님 교수님.”
“아.”
남태섭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교수님이 옛날에 래퍼로 활동하셨었거든.”
리카는 또 ‘에엑?!’이라며 놀라고 싶었다. 남태섭의 시대에 힙합 래퍼가 있었냐며 말이다.
그런데 그리 놀라면 지옥견 치와와 남태섭이 이번에야말로 이빨을 들이밀 것만 같았다.
“한국 힙합 세대론은 주장자에 따라 차이가 크지만, 기본적인 합의가 있는 1990년대 후반을 1세대로 잡았을 때 교수님은 그보다 앞선 세대이면서도 1세대에 활동하신 래퍼라고 하실 수 있지.”
성필이 굉장히 자세한 구분법으로 남태섭을 소개했다. 평소 그가 남태섭에게 어떤 태클과 교육을 받아왔는지 알 만한 대목이었다.
성필이 ‘1세대 래퍼셨어요?’란 말을 하면 지옥견 치와와로 변해서 대중음악사 강의를 하진 않았을지…….
“그런데 너희들 왜 다 같이 왔어?”
성필이 중요한 질문을 꺼내자 장하양이 움찔했다. 자칫하다간 남태섭에게 성필과 만나게 해준 데 대한 감사를 자신이 못 하게 되어버린…….
“교수님은 저희와 가로 엔터를 만나게 해주신 일종의 은인 아닌가요! 감사를 전해드리러 왔어요!”
장하양이 차게 식은 눈으로 리카를 흘겼다.
“아…… 어떻게 보면 그렇지.”
“그게 무슨 말인가?”
“교수님한테 말씀 안 드렸었나요? 저희 회사에 한 이사님이란 분이 교수님 책 보고 저를 찾으셨거든요.”
“혹시 ‘연예 비즈니스 경영론’인가?”
“네, 그거예요.”
“소녀연맹 데뷔를 준비할 때도 낡은 책이었는데, 그걸 읽고 자네를 찾다니 신기하군.”
“듣고 보니 애들 말이 맞네요. 교수님이 아니었으면 제가 가로 엔터로 올 일도, 애들과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허허, 그게 그렇게 되나…….”
“감사합니다!”
리카가 큰소리로 감사를 전하자 멤버들이 하나둘씩 또 허리를 숙였다.
남태섭이 쑥스러운지 미소를 띠었다.
“쌤.”
조아라가 백설하를 쿡쿡 찔렀다.
“아! 그리고 ‘애플 크러쉬’ 리뷰도 감사합니다.”
“…….”
남태섭의 눈망울이 젖어갔다.
백설하가 기겁했다.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30대 남자를 울린 기록에 더해 노인을 울린 기록까지 추가할 수도 있다.
“리뷰를 쓰는 건…… 당연한 일인데…… 이걸로 감사를 받다니……. 성덕이 되어버린 건가, 나는…….”
“아, 아뇨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여름의 여왕이란 표현 너무 좋았어요! 정말 좋아서 50번도 더 읽어봤을 거예요!”
“천사 같은 마음씨다…….”
“천사라니, 아니, 아녜요! 제가 어떻게 천사가…….”
남태섭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신이시여…….”
돌판엔 덕계못(덕후는 계를 못 탄다)이라는 속담이 있다. 계를 탄단 건 주로 아이돌 멤버와 만나거나 멤버가 자신을 알아보는 일을 뜻한다.
그런 우연은 보통 사람에게만 주어지고, 덕후만을 보기 좋게 빗겨나간다.
그런데 남태섭은 그 속담을 깨부수었다. 그는 계를 아주 거하게 타버렸다. 너무 큰 행운을 누린 나머지 훗날 재앙이 찾아올지도 몰랐다.
허나, 남태섭은 그 재앙을 기쁘게 받아들이리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가 다른 멤버의 감사보다 백설하의 감사에 더 큰 감동을 느끼는 건, 어쩌면 그가 백설하를 최애로 두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성필이 흐느끼는 남태섭을 포옹하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같은 아이돌 팬으로서 그의 심정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멤버들은 둘을 보며 생각했다.
‘초록동색(草綠同色)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구나.’
다른 말로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그럼 슬슬 시작할까요?”
성필이 말하자 남태섭은 눈가를 문지르며 답했다.
“하양 씨가 괜찮으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아이돌 인터뷰집 ‘커튼과 무대 사이, 아이돌’.
그 첫 번째 인터뷰이, 장하양.
“네, 바로 시작하셔도 괜찮아요.”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뮤지션의 인터뷰란 게 항상 그렇지만, 중간에 부적절한 발언을 커트할 매니저가 필요하다.
뮤지션 인터뷰라면 가감 없이 그 사상을 드러내야 하는 게 아니냐, 라 할 수 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뮤지션 혼자 있다고 가감 없이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뮤지션과 레이블, 아이돌과 기획사는 이를테면 이인삼각이자 상부상조 관계다.
기획사의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는 생각을 아이돌이 ‘응 이게 내 아티스트십이야’라며 주장할 수 없고.
아이돌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을 기획사가 ‘너흰 상품이고 인형이야 내 말대로 해’라며 강행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인터뷰에 성필이 동석(同席)한 건 그가 기획사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이었다. 장하양과의 이인삼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녀연맹도 당연히 무뎌졌을 때가 있어요. 어떤 일이든 그렇잖아요. 오랫동안 하다 보면 틈새가 있고, 그 틈새를 통하는 게 반복되고, 나중엔 관성으로 굳어져요.”
남태섭은 좋은 인터뷰어였다.
한 번 질문을 던지면 장하양이 고민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설령 고민이 몇 분을 이어지더라도 인자한 미소와 함께 긴장감을 없애주었다.
충분히 숙고할 시간을 주자, 충분히 좋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해’라고 생각하던 시기가, 분명 있었어요. 2년 차였죠. 그땐 저희 앨범 활동이 없었잖아요. 있었다면 일본에서의 리패키지 앨범 발매였겠죠.”
“아, 소녀연맹이 일본 진출에 사활을 걸던 때로군요. ‘뉴아사’에 출연해서 가후 세이코 씨와 맞붙은 게 큰 이슈가 되었었죠.”
“네. 그건 분명 저희에게 커다란 도전이었지만, 동시에 앨범 발매가 없으니 뮤지션으로서의 압박감이 없기도 했어요. 일 년 내내 그랬으니까요.”
한국 인민이들에게 소녀연맹 2년 차는 공백기로 불린다. 콘서트와 일본 진출 대성공 등의 성과는 있었지만, 정작 신보(新譜)가 나오지 않았으니.
“‘아니’와 ‘롱 포’, 그리고 ‘아라베스크’. 익숙해서 몸에 익은 곡들로 공연과 행사를 돌았어요. 몸에 익었으니 연습도 옛날보다 타이트하지 않았고요. 어느 정도 퀄리티는 있었지만, 옛날만큼의 날카로움은 잃었어요.”
“그게 ‘무뎌졌을 때’네요.”
“네. 그때 설하 언니가 참다 참다 말씀하셨어요. 저희 직캠 보여주시면서요.”
너희 이거 보여?
부끄럽지도 않니?
나는 부끄러워.
부끄러워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
이런 게 남아 있단 게 얼마나 끔찍한지 알아?
“리더가 그런 말까지 했으면 심각했겠네요.”
“심각했죠.”
“더 일찍 할 수 있던 말인 건…….”
“아니에요. 사실 ‘열심히 해라’란 말은 회사 분들께 항상 듣던 말이거든요. 저희는 그게 큰 압박감이란 걸 알아요. 그 ‘열심히’란 말을 그대로 들었고, 그 결과 소녀연맹의 1년 차는 그야말로 투쟁이었어요.”
아니, 롱 포, 아라베스크로 이어지는 3연타.
소녀연맹을 반석 위에 올려준 1년 차였다.
하지만 그 타이트한 스케줄은 소녀연맹의 영혼을 태우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다들 재가 되어버린 열정에 어떻게든 불을 지피면서 버텨냈다.
“그랬던 언니니까, 저희에게 말할 수 없던 거였죠. 다들 성인이니까. 이 정도만 해도 괜찮은 수준이긴 하니까.”
“하지만, 설하 씨는 그걸…….”
“네. 언니가 보는 풍경은 더 높았던 거죠. 괜찮은 정도론 안 됐어요. 학생으로 치면 방학 때도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하는 걸까요. 남들이 보면 ‘과하지 않아?’라고 할 테지만, 아시잖아요. 저희 목표.”
“최고의 아이돌.”
장하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1위를 노리니까, 1위에 합당한 노력이 필요해요. 언니는 정말 눈물을 머금고 저희에게 말씀하신 걸 거예요.”
너희가 힘든 건 알고, 휴식이 필요한 것도 알지만, 우리의 목표를 위해선 휴식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컴백 준비 기간, 앨범 활동기에만 연습하는 걸론 한참 부족하다. 진짜 최고를 노린다면 그 고난을 기꺼이 짊어지자.
“언니에겐 항상 배워요. 소녀연맹의 리더이자 정신적 지주이시고, 저희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나기도 하세요.”
“노래를 뜻하시는 걸까요?”
“네?”
“설하 씨가 소녀연맹의 메인 보컬이시고, 아라 씨가 메인 댄서시잖아요. 그런데 가장 실력이 뛰어난 멤버를 설하 씨로 꼽으셨어요. 그럼 아이돌은 댄서보다 가수에 가깝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걸까요?”
이 질문은 성필에게도 흥미로웠다.
장하양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종합 퍼포먼스예요. 춤만 춘다면 아라가 더 실력이 뛰어나겠지만, 노래 부르며 춤추는 종합 퍼포먼스에선 언니가 가장 뛰어나세요. 아이돌은 그런 퍼포먼스를 하는 직종이니, 뛰어나다면 노래와 춤을 나눠선 안 되겠죠.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데뷔할 때 소개말이 이거였었죠.”
아이돌의 시초라 불릴 수 있는 그룹이 등장할 때, 이 말과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노래하며 춤추고, 춤추며 노래하는 미래의 밴드입니다.”
“미래의 밴드……. 요즘은 그룹이란 단어를 더 많이 쓰긴 하지만, 예, 밴드가 맞군요.”
악기 대신 춤을 선택한 밴드.
“아이돌은 가수이거나 댄서가 아니다…….”
“네, 뮤지션의 분류로 따지면 댄스 가수잖아요. 댄스 가수로서, 설하 언니가 가장 뛰어나요.”
남태섭은 키보드를 쉴 새 없이 두드렸다. 심지어 장하양이 말하지 않을 때도 그러했다.
아마 떠오르는 생각을 전부 적어 넣는 듯했다.
인터뷰는 무려 2시간이 넘게 진행되었다.
이쯤이면 질문이 없겠다 싶은 시점에서도, 남태섭은 장하양의 발언을 길게 끌고 가 또 질문을 만들어냈다.
말꼬리를 잡는 것과는 달랐다. 남태섭은 의미 있는 질문을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인터뷰어로서 상당한 관록이 있었다.
“흐아!”
3시간이 넘진 않을까 싶은 순간, 남태섭이 짧은 한숨을 토하곤 씩 웃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네.”
장하양은 시계를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간 게 놀라운 기색이었다.
인터뷰 동안 거의 무아지경이었던 듯하다. 그녀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도 자각하지 못했던 생각을 알게 되었다.
남태섭의 질문들은 강한 몰입을 이끌어냈었다.
그 결과 거의 3시간이 매우 짧게 느껴졌다. ‘이렇게 짧아도 되나?’라며 시계를 쳐다봤는데, 3시간이 지난 걸 보고 놀랄 정도로 몰입했다.
“교수님 고생하셨어요.”
“자네도. 공사다망한 이사님을 참 오래도 잡아뒀구만. 미안하네.”
“미안하긴요. 저도 하양이의 속마음을 알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런 얘긴 안 하는 모양이지?”
“진지한 이야기는 웬만해선 피하죠.”
“왜요?”
“응?”
장하양이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왜 피하세요?”
“어? 할 이유가 없으니까……?”
“자네 정말 신경이 없군.”
“네?”
“이럴 땐 빈말이라도 ‘널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라고 해야지. 딱 봐도 자네가 진지한 얘기라든가 의지해주지 않아서 속상한 눈치인데.”
드물게 장하양이 당황했다.
이럴 때 성필은 그냥 ‘어? 응?’이러고 끝인데, 남태섭은 장하양의 심리 기저까지 알아보곤 성필에게 일러준 것이다.
“아, 그런 거구나. 근데 교수님 같으신 인터뷰어가 할 만한 질문을 내가 너한테 할 기회가 정말 없긴 하잖아.”
“자네 MBTI가 뭔가?”
“어, 뭐였더라. 음, 아! INFP일걸요?”
전생에 조아라가 계속 해보라고 귀찮게 굴어서, 정말 하기 싫은데 억지로 했던 기억이 있다.
“다시 검사해보게.”
“아, 네, 뭐…….”
“그리고 소녀연맹 MBTI 검사 콘텐츠도 채널에 올리도록 하게. 그런데 하양 씨는 MBTI가 혹시…….”
남태섭은 아까 인터뷰할 때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호기심으로 물었다.
“저는 INTJ예요.”
“아!”
“아하하, 근데 전 MBTI에 관심이 크게 없어서 뭔지 잘 몰라요. 사람들이 어울리는 거 같다고 하긴 하던데.”
“정말 그래요!”
“아…… 그런가요?”
“혹시 다른 멤버분들 MBTI도 알고 계십니까?”
“잠시만요.”
장하양은 멤버들과의 톡방을 뒤졌다. 옛날에 각자 검사결과를 올려둔 게 있었다.
“리카는 ISFP.”
남태섭은 빠르게 결과들을 노트북에 기록했다.
“설하 언니는 ISFJ. 아라는 ENFP. 아름이는 ENFJ요.”
남태섭은 결과들을 듣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럴 수밖에.
소녀연맹은 따로 MBTI를 공개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순간, 남태섭은 소녀연맹의 MBTI 정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민이다.
“그럼…….”
남태섭은 미소를 지어 보이곤 노트북을 덮어 가방 안에 넣었다.
“오늘 인터뷰에 임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뇨, 당연히 해드려야죠. 은혜를 갚는다…… 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요. 지금의 저희를 만나게 해주신 분이기도 하시니까요.”
“참…… 감사합니다.”
남태섭은 장하양, 성필과 차례로 악수한 이후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나선 왠지 모르게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성필은 그가 멤버들의 사인을 못 받아서 그러나 싶었다. ‘사인’이란 말을 꺼내려던 순간.
“저,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까 여쭤보려고 했었는데, 인터뷰가 이어지다 보니 타이밍을 못 잡았어서요.”
장하양이 성필의 눈치를 보았다. 성필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수락했다.
“네. 얼마든지요.”
남태섭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까 아티스트로서 보여주시고 싶은 모습. 그리고 대중에게 비치는 이미지와 자아 사이의 괴리감. 이른바 ‘비전’에 대해 질문드렸습니다.”
“네.”
“그런데 제가 느끼기로, 그 비전에 하양 씨의 미래가 포함되지 않은 것 같았어요.”
“……정확히 어떤 의미이신지.”
“소녀연맹으로서의 하양 씨만 보였다고 할까요. 하양 씨 본인이 지니는 아티스트로서의 이미지, 즉 하양 씨 자신만의 비전이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의도된 걸까요?”
남태섭은 묻고 있었다.
장하양에게 ‘소녀연맹 이후’가 있느냐고.
소녀연맹이 끝난 후 그녀가 대중에게 선보이고 싶은 그녀만의 아티스트십이 존재하느냐고.
아이돌 그룹을 넘어선 자아가 현재 그녀의 가슴 안에 잠자고 있느냐고.
“…….”
장하양의 고민은 길었다.
대답해야 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걸까?
비전이 있긴 하지만, 성필의 앞에선 하긴 꺼려지는 걸까? 어쩌면 그 비전에 가로 엔터에서 나오는 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아니면 현재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예 없어요. 저는 소녀연맹이 아닌 하양을 상상할 수 없어요.”
“아…… 그럼 솔로 데뷔 계획은?”
“아직까지는 전무하고, 이 마음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훗날에도 없을 가능성이 높아요. 뮤지션으로서 제 꿈은 어디까지나 최고의 아이돌이에요. 그 꿈 이후의 경치를 상상할 순 없네요. 지금은 그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요.”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기 때문, 이라고 받아들여도 괜찮을까요?”
“그거랑 조금 달라요. 어쩌면 제 꿈에 솔로 뮤지션은 없는 걸지도 몰라요.”
“하양 씨에게 뮤지션이란, 소녀연맹의 하양뿐이니까요?”
“아마도요.”
성필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 시점에서 ‘소녀연맹이 끝나면 어떡할 거야?’라고 묻긴 껄끄럽다.
또한 그녀들은 성인이니 나름 자신만의 비전이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존중하는 차원에서 묻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내심 배우로 재도약을 꿈꾸지 않을까 추측하긴 했다. 그런데, 아예 소녀연맹 하양이 아니면 상상조차 불가능하다니.
“알겠습니다.”
남태섭은 납득한 듯 미소 지었다.
“노트북에 안 쓰셔도 돼요?”
“제 마음에만 두면 될 것 같습니다. 책에 실을 내용은 아닌 것 같아서요. 이걸 제 책에서 밝히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요. 하양 씨의 미래는 하양 씨의 입으로 밝히시는 게 가장 올바른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려 깊은 답변에, 장하양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했다.
남태섭은 그 감사를 받곤 은근한 투로 성필에게 말했다.
“자네 목표에 어울리는 인재 아닌가?”
“박 이사님의 목표요? 최고의 아이돌?”
“모르시나 보네요. 성필이의 목표는 그거 하나가 아닙니다.”
“아 부끄러워요.”
성필이 장난스럽게 남태섭을 말렸다.
“성필이는…… 박 이사는 댄스 가수 트레이닝 시스템 확립을 바랍니다.”
“댄스 가수 트레이닝 시스템이요?”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걸 뭐라고 부를까요?”
“어…… 음, 종합 퍼포먼스?”
“애매한 단어입니다. 댄스 가수 본인조차 춤추고 노래하는 걸 뭐라고 부를지 헷갈리죠.”
장하양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챘다.
남태섭은 말하려다가, 그 키를 성필에게 넘겼다.
“자네 목표니까 자네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
“목표라뇨. 목표라기엔 명확하지도 않고, 지금은 꿈만 같은 거라서…….”
“듣고 싶어요.”
장하양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보자 성필은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또 당황했고, 이윽고 한숨과 함께 술술 입을 열었다.
“하양아, 보컬 트레이너는 있지?”
“네.”
“댄스 트레이너도 있고.”
“네.”
“그런데, 네가 일컬은 단어대로라면, 종합 퍼포먼스 트레이너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아.”
보컬리스트가 춤까지 숙련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니, 그것보다 더 초기로 돌아가서 노래에 흥미를 둔 아이가 춤까지 연습할 확률은?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낮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춤추면서 노래도 한다’는 괴상한 발상까지 닿아, 그걸 연습할 확률은 그보다 훨씬 낮다.
“그걸 연습해서 어디 쓰겠어. 아이돌이 되지 않을 바에야. 그러니 종합 퍼포먼스를 배우는 건 아이돌 연습생이 되고 나서야.”
기획사 오디션에서도 심사하는 건 대부분 보컬 혹은 댄스일 뿐이다.
장하양은 단숨에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걸로, 외람되지만, 충분하지 않나요?”
“충분하지 않다고, 박 이사는 생각하는 거지요.”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의 아이돌 퍼포먼스는 엄밀히 말하자면 기술이 아니야.”
“네……?”
“기술이 아니야. 이 세계는 순수하게 재능의 영역이야. 왜냐하면, 가르칠 수 없으니까.”
“그럼 저희가 한 건…….”
“시킨 거야. 가르친 게 아니야.”
장하양의 머리가 트였다.
가르친 게 아니다.
시킨 거다.
시키면, 되니까.
“너희를 가르쳐준 그 어느 보컬 트레이너도 춤까지 고려하진 않아. 너희를 가르친 어느 댄스 트레이너도 노래까지 고려하지 않아. 너희는 그 두 개를 따로따로 배우고, 우리가 시켜서 동시에 한 것뿐이야.”
“할 수 있으니까…….”
많은 선배들이 해냈으니까.
아무튼 노래와 춤을 가르친 후 동시에 시키면 ‘종합 퍼포먼스’란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니 기술이 아니야. 기술이란 건 신화의 시대가 끝나야 시작되는 거거든.”
신화의 시대.
한 번의 점프로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는 발레리노 니진스키의 전설.
무대에서 춤을 추자 모든 관객이 영혼을 잃고 오열했다는 이사도라의 전설.
악마에게 영혼을 판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전설.
마찬가지로 삼거리에서 악마와 계약하여 신들린 기타 솜씨를 가졌다니 로버트 존슨의 전설.
“기술은 신화의 시대, 천재들의 황금시대가 끝났단 증표야. 나는 기술을 만들고 싶어.”
맨바닥에서 재능만으로 황금을 만들어 내는 천재가 사라진 시대.
그건 곧, 보통 사람이 맨바닥에서 밟고 올라갈 계단이 만들어졌단 뜻이다.
그 계단의 높이는, 천재들이 바닥에서 도약한 높이보다 높다.
계단의 이름은 ‘교육’이다.
“나는.”
영웅의 황금시대가 끝장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