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56화 (656/760)

656화

“무용의 신 니진스키든 악마의 기타리스트 로버트 존슨이든 현대 교육을 받은 인간에 비하면 실력이 떨어지겠지. 어쩔 수 없어. 현대 교육은 재능 있는 인간에게 인류가 쌓아온 정수를 쏟아부어 넣는 거잖아.”

교육 내용은 천재들의 위대한 업적을 양분 삼아 점점 더 진보한다. 이윽고 과거엔 천재라고 불렸을 인간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대형 기획사가 유리한 점이 그거죠. 흔히 노하우라고 부르는 것이 생기고. 수많은 선배들이 있으니 경험이 쌓이거든요. 많은 연습생 지망생이 모이니 인재풀이 넓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성필은 남태섭의 말에 설명을 덧붙였다.

“아이돌 문화의 정수라고 부를 수 있는 KS 엔터에서조차, 천재의 시대는 저물지 않았어.”

“다키스트의 서유선을 뛰어넘는 사람이 아직도 나오질 않았으니.”

아예 다키스트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이는 그룹이 등장하질 않는다. 그들의 탄생 자체가 기적이었다.

“선배들이 있지만, 그 선배들은 무대 위의 플레이어지 교육자가 아니야. 종합 퍼포먼스엔 ‘교육 방법론’이 존재하지 않아.”

교사들은 전공 지식만 배우지 않는다.

교육학은 물론이고 전공마다 ‘교육 방법론’이라는 게 따로 있다.

수학은 이렇게 가르쳐야 이해할 수 있다.

국어는 이렇게 가르쳐야 이해할 수 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생을 쏟아 이룩해낸 방법론이 있기에, 교사들이 문제를 만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춤과 노래도 마찬가지다.

무대 위의 플레이어가 되는 대신 타인을 가르치는 데 생을 바쳐온 수많은 공로자들이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오랜 역사의 춤과 노래는 전문적인 트레이너가 있고, 교육 방법론이 있지만, 종합 퍼포먼스는 아니거든. 현재의 최선은 각자 따로 배운 후, 그냥 시키는 거야. 안 되면 조금씩 수정하고. 그런데 만약 교육론이 확립된다면, 그래서 종합 퍼포먼스를 가르칠 수 있게 된다면…….”

이 종합 퍼포먼스는 신기원을 맞게 된다.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노력으로 천재의 영역에 닿는 게 가능해진다.

“그렇기에 현재 최고의 아이돌을 만드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많은 사람들 중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뽑는 거야.”

인재풀이 넓으면 그 안에 반드시 재능 있는 아이가 있다. 그 재능 중에서도 확연히 뛰어난 이들을 뽑는다.

얼굴이 아름답고, 몸매가 좋고, 춤을 잘 추는 동시에 노래도 부를 수 있으며, 팬서비스 정신이 투철하며 인성이 보장된.

기적적인 확률의 아이돌을 탄생시킬 수 있다.

“나는 이런 시대를 끝내고 싶어.”

첫 번째 무용학교의 탄생. 혹은 첫 번째 성악 전문학교의 탄생.

그런 업적을 이루고 싶다.

“우연히 재능이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고, 재능이 없다면 ‘안타깝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환경을 바꿀 거야.”

“그 말씀은…… 학교를 세우시겠다는……?”

“학교란 이름은 거창하겠지. 처음은 아카데미일 거야. 학원. 다만, 전문적인 트레이너가 존재하겠지.”

장하양은 남태섭이 성필에게 했던 말을 이해했다. 장하양이 성필의 꿈에 들어맞는 상대가 아니냐고 했던 건, 아마…….

‘강사.’

전문적인 종합 퍼포먼스 강사.

일반인 중에 이 기술을 습득한 인간은 없을 것이다. 아이돌이 아니고서야, 누가 춤추면서 노래하는 걸 연습하고 숙달할까.

필연적으로 강사는 아이돌 출신이어야만 한다.

심지어 남을 가르쳐야 하니, 그 실력은 일반적인 재능의 영역을 넘어서야 한다.

“……아?”

거기까지 깨달았을 때, 장하양은 당황했다.

“제가요? 교수님은 저보고 강사를…….”

장하양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실력이 안 될 텐데요?”

그러자 남태섭이 당황했다.

“하양 씨가 안 되면 누가 될까요?”

“……네?”

장하양이 2차로 당황했다.

남태섭도 또 당황했다.

“아…… 하양 씨가 본인의 위상을 전혀 모르시네. 박 이사, 칭찬이 너무 박했던 거 아니야?”

“제가요?”

“하양 씨, 소녀연맹은 흐름을 바꿨습니다.”

남태섭이 설명을 시작했다.

3세대에 이르러 아이돌의 춤이란 격렬함을 더해갔다. 2세대의 다키스트는 왕성하게 활동할 시절부터 모든 그룹에 영향을 주었으니.

군무는 점차 발전하여 복잡하고, 어렵고, 화려하고, 힘들어졌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기획사들은 타협했다. 이런 춤은 도저히 노래 부르며 할 수 없으니 AR을 쓰는 것이다.

전체 AR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부분 AR은 쓰게 되었다.

격렬한 춤엔 자연스레 격렬한 호흡이 뒤따른다. 격렬한 동작엔 자연스레 격렬한 근육 수축 이완이 뒤따른다.

자고로 노래란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모든 호흡 근육을 통제하며, 호흡 또한 가수의 제어에 따라 세심해야만 한다.

그런데 아이돌은 그 모든 게 춤 때문에 불가능해지니,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춤도 노래로 인해 빼앗기는 호흡과 경직된 근육 탓에 온전한 상태로 펼칠 수가 없다.

“춤은 만전의 신체 상태를 가정합니다. 노래도 만전의 신체 상태를 기반으로 하죠. 춤의 만전이란 오로지 춤에만 근력과 호흡을 쓸 수 있는 것이며,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이돌의 세계란 재능의 세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열악한 상태에서 춤추는 법’ 따위를 연구하지 않았다.

이 세상 누구도 ‘열악한 상태에서 노래하는 법’ 따위를 연구하지 않았다.

춤추느라 호흡이 벅찬 상황에서의 발성.

노래하느라 부족한 호흡을 지닌 상태에서의 움직임.

기술적 기반이 없으니, 아이돌들은 타고난 재능에 의지해야만 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러한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

결국 케이팝은 안무와 노래가 격렬해지며, 타협했다.

“팬들도 이해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무대에서 입 뻐끔거리는 게 무슨 가수냐며 비아냥거리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소비자들은 넘어갈 수 있게 됐어요.”

아예 안 부르는 경우는 없으니까. 게다가 몸 상태가 좋으면 신들린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노래하며 동시에 춤까지 항상 완벽한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모두가 이해했다.

“그걸 소녀연맹이 뒤집은 겁니다.”

설령 다키스트가 살아 돌아와도(안 죽었음) 현대 아이돌 퍼포먼스는 못 할 거다.

사람들은 그리 말하곤 했다.

그런데, 댄스 가수의 미학을 버리지 않고 집요하게 추구한 아이돌이 다시 탄생했다.

무려 ‘아라베스크’나 ‘오토마타’와 같은 고난도의 안무까지 소화하며, AR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그룹이 등장한 것이다.

심지어 거의 모든 무대에서 말이다.

집념이자 집착이고 광기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떠올렸다.

‘그래, 다키스트는 원래 이랬어.’

케이팝의 판도를 뒤바꾼 그룹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했었다.

곡이 2절에 들어서면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처절하게 노래를 부르짖느라 삑사리까지 내고, 그럼에도 노래를 포기하지 않던 댄스 가수가 존재했었다.

다들 그걸 기억해냈다.

“소녀연맹이 증명한 겁니다. 현대에도 된다고. 그게 가능하다고.”

몇 년 전부터 아이돌은 다른 방향의 진화를 추구해나갔다.

그건 방송 안무의 진화라고도 볼 수 있었다.

아이돌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그나마 노래를 부르기 위해 안무를 간소화하기.

혹은 안무가 격렬한 상태에서 AR에 의지하기.

안무를 간소화한 쪽에서 진보가 일어났다. 카메라 무빙으로 안무의 간소화를 커버한 것이다. 그야말로 방송 안무, 카메라 안에 담기 위한 춤으로 발전했다.

멀리서 보면 손만 살랑거리는 걸로 보이던 춤은, 카메라로 가까이서 찍으면 화려하고 포인티한 안무로 변모한다.

숏폼의 발전으로 그렇게 짧고 간단한 안무가 큰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한다.

“그게 나쁘단 건 아닙니다. 실제로 요즘 그러한 방송 안무가 큰 인기를 끌죠. 하지만, 무대 위에서의 박력을 포기하지 않은 그룹들도 있었습니다. 소녀연맹의 대성공을 보고 그 뒤를 따르기로 결심한 프로듀서들이, 생긴 겁니다.”

남태섭이 ‘소녀연맹이 흐름을 바꿨다’고 한 건 이런 의미였다.

“하양 씨는 그러한 소녀연맹의 멤버입니다. 그런데 하양 씨가 종합 퍼포먼스를 가르칠 수 없다면, 누가 할 수 있을까요?”

돌고 돌아, 남태섭이 장하양의 ‘제가요?’란 질문에 답해주었다.

장하양은 남태섭을 보고, 성필에게로 시선을 천천히 옮겨 갔다.

성필이 이러한 꿈을 가지고 있단 건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의 꿈을 이룰 조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단 사실은, 장하양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도 했다.

동시에 오랜만에 느끼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아주 옛날에 느꼈던, ‘성필을 만족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자신은 성필이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열등감이 다시금 찾아왔다.

“……저는, 소녀연맹 내에선 가장 뒤떨어져요.”

장하양이 담담히 자조를 입에 담았다.

“항상 그랬어요. 옛날에도, 지금도. 뭐 하나 나은 게 없어요. 그나마 이 반반한 얼굴 하나 때문에 뽑힌걸요. 그런 저는 누군가를 가르칠 깜냥이 안 돼요. 지금도 다른 멤버들한테 배우는 처지예요. 가르친다는 건, 학생보다 잘해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더 잘하시지 않을까요?”

“네?”

“바닥에서 이만큼 성장하신 경험이 있으니, 다른 멤버들보다 훨씬 더 잘하실 거예요.”

천재는 수재의 마음과 고충을 모른다. 당연히 범재의 마음을 알 턱이 없다.

누군가를 잘 가르칠 리도 만무하다. 만약 숙련도가 곧 가르치는 능력으로 전환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잘 가르치는 사람은 교사가 아닌 교수겠지.

“교수님 그만하세요.”

어느새 분위기는 장하양을 압박하는 지경까지 이른 듯했다. 성필은 남태섭을 제지했다.

“하양이가 곤란하잖아요.”

“하하, 그렇네. 죄송합니다. 박 이사가 술 마시면 자주 하는 말인데, 워낙 인상에 남아서. 자기가 종합 퍼포먼스를 배워서 가르쳐야 하나 고민했다니까요.”

“그걸 왜…….”

“그러면!”

장하양이 퍼뜩 입을 열었다.

성필과 남태섭이 놀라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면, 박 이사님이 만드는 아카데미엔 교직원이 저 하나뿐이겠네요. 처음이면…….”

“어…….”

성필은 그렇게까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야 뭐, 강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꼭 도전해보고 싶은 과제이긴 하다만.

“아마 그렇겠지?”

“이사장이 이사님이고, 제가 유일한 강사면, 둘이서 아카데미를 꾸리는 게 되네요.”

“사무직 직원분들이 계실…….”

“좋아요.”

“응?”

“아이돌 다음 직업으로 교육자가 되는 건, 좋을 거 같아요.”

성필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듣자 멍해졌다. 멍해졌다가, 얼굴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비록 현재의 변덕일지라도, 이런 말을 듣는 것 자체가 기쁘기 그지없었다.

“고마워.”

“축하하네. 벌써 가장 큰 난관이 사라졌으니.”

“그러게요. 정말 꿈속의 꿈으로만 그렸던 건데, 정말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하양아 미리 말해두지만, 너무 부담가지진 마. 너도 나중에 다른 목표가 생길…….”

“아, 소녀연맹 계약이 종료되고 바로는 안 돼요.”

“어?”

“저도 아무 지식 없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순 없어요. 일단 춤과 노래의 방법론을 배워야 해요. 춤은…… 미국의 현대무용 전문학교에서 테크닉을 배우는 게 좋겠어요. 노래는 한국에서 배워도 괜찮을 거 같구요. 그걸 제가 교육방법론으로 종합하면…….”

장하양은 상상 이상으로 진심이었다.

남태섭이 그녀를 바라보며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학자가 되겠구만, 하양 씨는.”

“……어쩌면요.”

만약 장하양이 정말 ‘댄스·보컬 종합 퍼포먼스 교육론’을 완성시킨다면, 엄청난 업적이 될 것이다.

훗날 케이팝 아이돌 문화가 사멸하더라도, 그녀의 교육론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종합 퍼포먼스의 불씨를 되살릴 것이다.

마이클 잭슨이 창조해낸 댄스 가수의 흐름은,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하고 미국에서 사멸했다. 그게 매우 기묘하게도 한국에서 되살아났다.

한국에서도 언젠가 케이팝이 사멸할 것이다. 하지만 성필이 꿈꾸는 방법론이 정립된다면, 댄스 가수는 또 세계 어디에서건 다시 타오를 수 있겠지.

“정말 마지막으로.”

남태섭이 손뼉을 쳤다.

“하양 씨 인터뷰 파트 소개말은 정말 그걸로 괜찮을까요?”

망상에 빠져 있던 장하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괜찮아요.”

[“내가 하늘에 서겠다”

정상을 향한 야망, 하양]

“소녀연맹이 최고의 아이돌이 되려면, 나중에 무를 수 없게 최대한 많이 떠벌리고 다니는 편이 좋잖아요.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테니까요.”

“하하하, 멋지네요.”

“그리고 미래의 아카데미 수강생을 늘리려면 꼭 최고의 아이돌이 돼야 해요.”

얼마나 진심인 거야?

성필보다 진심인 거 아닌가?

인터뷰가 끝나고 성필은 남태섭을 배웅했다.

“이야, 첫 번째 인터뷰부터 느낌이 좋아.”

“연락받고 놀랐어요. 아이돌 인터뷰는 보통 잡지랑 웹진에서만 다루잖아요.”

“그것도 홍보용 정도지.”

아이돌의 자아를 탐구하는 인터뷰는 매우 드물다.

“개인에 관심을 두는 인터뷰는 정말 드물어.”

“그 드문 인터뷰를 묶어 아예 책으로 집필한다니, 웅장한 계획이네요. 팔릴까요?”

“적어도 팬들은 사지 않을까?”

“타산적이시네요.”

둘은 크게 웃었다.

“이번에 내가 ‘케이팝의 이해’란 강의를 맡게 됐어.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학에서 말이야.”

“저도 들어보고 싶은데요?”

“자네가 들으면 시시할 내용이 대부분이겠지. 그리고 영어 강의인데, 괜찮겠나?”

“80%는 들을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자신감이 넘치는군. 하긴, 내 콩글리쉬가 그렇겠지. 아마 외국인 교환 학생들이 많이 신청할 텐데, 긴장되는구만.”

“래퍼셨잖아요.”

“언제 적 이야기야.”

둘은 입구에 멈춰 섰다.

“KS 엔터에도 가시는 거죠?”

“아직 인터뷰 요청을 안 보냈어.”

“네? 그게 가장 중요하시잖아요.”

남태섭이 흐릿한 미소와 함께 양손을 모았다.

“그래도, 무섭다네.”

이 책을 쓰기로 한 건 1/3은 돈을 벌기 위해서고, 1/3은 학구적인 목적이었고, 1/3은 사적인 목적 때문이다.

사적으로.

“과거에 매듭을 맺는단 건, 무서운 일이야. 과거 친구에게 저질렀던 몹쓸 말 때문에 거진 30년을 얼굴도 못 보고 있다네. 그 친구는 내가 죽었단 말을 듣더라도 ‘그렇군’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만한 시간이야. 그만한 시간 동안 연락 하나 안 했으니, 나는 정말 몹쓸 친구지.”

“친구라고 생각하긴 할까요?”

남태섭이 우울해져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농담이에요.”

“누구한테 배운 농담인지, 자네가 못 써먹겠구만.”

장하양에게 배웠다.

“싸운 이유도 참 유치했어. 그냥 내가 인정해주면 될 일이었는데, 욕이란 욕은 다 퍼붓고 떠나갔지. 결과적으로는 그 친구가 옳았고. 떠올리는 지금도 창피해서…….”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지셨어요.”

“그래, 말해줘서 정말 정말 고맙네. 창피해서 인터뷰란 변명이 없으면 갈 용기도 못 내지. 새삼 알게 해줘서 참 고마워.”

남태섭이 으잉 혀를 차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가 나간 순간, 성필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저와 가로 엔터를 만나게 해주셔서요.”

“내가 한 게 뭐 있나. 거기에 쓴 자네 글이 워낙 멋져서 연락한 거겠지.”

“이번 저희 애들 앨범 리뷰도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 청탁하는 겐가?”

“잘 써주실 수밖에 없으실 테니까, 이왕이면 심혈을 기울여서 써주십사 하고요.”

“정말…….”

남태섭이 픽 웃었다.

“자신감이 넘치는군. 그럴 만하긴 하지만 말이야. 하기사, 전설의 프로듀서님이시니.”

“비꼬지 마세요.”

“인정하는 거야.”

* * *

백설하는 연습실 구석에 꿍하니 앉아 동생 라인이 퍼포먼스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요즘 그녀는 욕구 불만에 사로잡혔다.

‘이번 안무는 쉬운 편이라서…….’

백설하가 마땅히 가르쳐줄 게 없다. 애초에 무대 위에서 신나게 노는 분위기를 내려 했기 때문에, 특정한 군무에만 집중하면 됐다.

군무 중 부르는 노래의 수준은 현재 멤버들이 하기에도 딱히 어렵지 않다.

안무가 쉬운 동시에 멤버들의 실력이 올랐기에 이런 상황이 펼쳐졌다.

옛날이었으면 복횡근이 어떻니 복직근이 어떻니, 성대의 내전근으로 성대폐쇄율을 높여서 어쩌라느니, 하나하나 짚어줬을 텐데.

백설하가 마땅히 가르칠 게 없는 상황. 그렇기에 왠지 소외받는 기분이고, 노는 느낌. 그리고 이 욕구를 해소하지 못해 불만에 차 있다.

‘카오틱 에너지 후배님들은…….’

댄스 가수의 정점이자 신아름이 비르투오소(초절기교의 음악가)라고 표현했던 손혜빈이 전담으로 마크하고 있다.

백설하는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젠 멤버들도 자신의 손을 떠났구나. 훌륭한 아이돌이 되어, 더는 건드릴 부분이 없다.

‘나랑 아라의 프로듀싱을 거치면서 노래, 춤 양쪽으로 단련이 됐으니까.’

성필은 ‘우리들의 프로듀싱’ 개막을 알리며 백설하에게 이렇게 주문했었다.

모든 멤버들이 메인 보컬이자 메인 댄서이길 바란다고. 이는 기교적인 측면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곡과 안무를 소화한단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만약 멤버들의 기량이 전체적으로 상승한다면, 뮤직 프로듀서인 정지음도 한계를 돌파하는 게 되니 말이다.

비유하자면 개방현으로만 연주할 수 있던 바이올리니스트가 현을 손으로 짚을 수 있게 되는 정도의 차이다.

멤버들의 기량이 부족했을 때 바이올리니스트 정지음은 한정된 음으로 어떻게든 좋게 편곡해야만 했다.

그런데 멤버들의 기량이 높아진 지금은, 음의 활용도가 훨씬 큰 폭으로 증가했다.

‘처음엔 기량을 그렇게까지 상승시켜야 할 필요가 있나 싶었는데.’

이젠 성필의 뜻을 알겠다.

그 덕에 이렇게 백설하가 놀게 됐지만.

“언니.”

“아, 하양아.”

인터뷰를 끝내고 온 장하양이 백설하의 옆에 앉았다.

“인터뷰 잘했어?”

“네.”

장하양이 백설하의 허벅지 위에 쿠키와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선물이에요.”

“응? 선물? 나한테? 갑자기?”

“네. 지금까지 가르쳐주셔서 감사하다구요.”

“아, 아아, 하양아…….”

백설하의 눈가가 젖어갔다.

장성한 제자가 찾아와 밥을 사주는 기분이다. 비록 쿠키와 음료일 뿐이지만. 이 쿠키와 음료도 회사 휴게실에 비치된 것이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그녀의 감사가 기쁘기 한량없었다.

“오늘 인터뷰 때 느꼈어요. 언니가 저에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요. 제가 언니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아왔는지요. 언니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겠죠.”

“끄흐으윽…….”

백설하가 남몰래 눈물을 삼켰다.

입에서 나오는 울음은 삼키지 못했다.

장하양이 그녀를 토닥여주었다.

“언니, 보컬 트레이너이실 땐 어떠셨어요?”

“어? 너, 너희 가르칠 때만큼의 성취감은 없었어!”

백설하는 장하양의 질문을 자기 멋대로 곡해해서, 자기도 모르게 변명해버렸다.

“너희가 최고의 학생이야!”

“그래요?”

“으, 응. 그게, 원래 내 꿈은 아이돌이었고, 트레이너일 때도 내심 아이돌을 하고 싶었으니까…….”

“아이돌을 그만두셔도 트레이너가 되실 일은 없으시겠네요?”

백설하는 큰 눈을 끔뻑였다.

“이 인지도를 가지고 트레이너가 되면…… 손해 아니야? 다른 길이 많잖아.”

“음, 돈벌이로서 트레이너는 고려할 가치가 없단 뜻이시죠?”

“음, 어, 아, 아마?”

백설하는 장하양이 질문하는 의도를 몰라 버벅이며 답했다. 그에 장하양은 만족한 듯 백설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백설하는 영문도 모르고 좋아했다.

‘이사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만약 정말 종합 퍼포먼스 아카데미란 게 생긴다면, 최적의 강사는 백설하다.

성필은 천재들의 신화시대를 끝내겠다고 했다. 그 천재 중 한 명이 바로 백설하다. 천재 중에서도 가르치는 재능은 으뜸일 것이다.

‘하지만 언니는 트레이너엔 관심이 없으시다고 하니. 이 이야기를 박 이사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건 딱히 잘못은 아니야. 언니는 어차피 거절하셨을 테니까.’

즉, 성필에게 백설하가 최적의 강사라고 말하는 거나 안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맞아, 트레이너는 가성비가 안 나오지.

이게 백설하에게도 더 좋은 길이다.

아이돌로서 얻은 유명세로 천년만년 떵떵거리면서 살도록.

“언니, 저는 아직도 배움이 부족해요. 오늘부터 제대로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요?”

백설하의 눈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하양이가 원하면 얼마든지! 궁금한 거 있어?”

“괜찮으시다면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요. 지금 당장 떠오르는 궁금증은 공명통에 관해서예요.”

“아! 바로 알려줄게!”

“옛날에 들은 거 같은데 명확하지가 않아서요. 흔히 공명통이 크면.”

“너 어디 봤어?!”

“유리하다고 하잖아요. 성악가도 몸집이 큰 쪽이 유리하다고 하고요.”

“너 옛날에 가르쳐준 거 다 잊어버렸구나……. 공명통이 큰 게…… 먼저 가슴은 공명통이 아니야……. 이 지방이 공명통이 아니라구…….”

“농담이에요.”

“……공명이 일어나는 건 성대 위 인두강이랑 구강이 거의 대부분이야. 몸이 크다고 공명통이…… 아니, 울림통이…… 아니, 통이…… 하양이 너 때문에 이상하게 들리잖아?!”

“아하하, 언니 변태.”

“변태?!”

“쌤 엣찌(음란)!”

퍼포먼스를 마친 리카까지 가세했다.

“그런데 뭔가요! 쌤이 음담패설 했나요!”

“가슴이 크면 공명이 잘돼서 노래에 유리하대.”

“어쩐지! 몸집이 큰 기타는 공명판도 크니까 소리가 큰 거랑 같은 원리네요! 역시 소녀연맹의 메인 보컬이에요!”

“하양이 너 뭘 들은 거야?!”

장하양은 결심했다. 오늘부터 백설하의 지혜 주머니 안에 든 걸 모두 흡수하기로.

조아라는 멀리 떨어져 셋이 벌이는 만담을 들었다. 그녀는 상쾌하게 물을 마시곤 신아름에게 자랑스레 말했다.

“봐봐, 내가 노래 못하는 건 당연하다니까? 쌤이 인정해줬잖아.”

“가슴은 공명통이 아니라고. 제대로 좀 들어. 네가 노래를 못하는 건 그냥 못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 노래하는 데 공명이 뭐가 중요해? 공명은 마이크랑 스피커가 다 시켜주는데.”

“네다서(네 다음 서브 보컬).”

“리드 보컬이거든.”

“나보다 파트 훨씬 적죠?”

“넌 이번에 랩하잖아! 글고 상대적으로 분량 적은 건 네가 가사 분량 초과해서…….”

“네다서.”

신아름이 조아라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쥐어뜯었다.

* * *

‘또다.’

또 여기다.

유경민은 입술을 꽉 물었다.

‘오토마타’의 2절 하이라이트.

유경민은 왼발로 지면을 꽉 밟았다. 오른 다리를 든다. 발을 든다고 표현하지 않은 건, 다리를 너무 높이 들기 때문이다.

무릎이 허리를 넘어서는 지점까지 들고, 45도 사선으로 아래를 향해 쿵 찍는다.

땅을 찍는 동작.

그걸 반복한다.

“워우 워우 워 워 워―!”

의미 없는 하이라이트의 추임새.

그걸 한 번 내뱉는 것만으로도 예비흡기량(Inspiratory Reserve Volume, 일반적인 숨쉬기의 일 회 환기량에서부터 약 2L에서 3.5L 더 들이마시는 호흡량)이 바닥났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상체를 살짝 오른쪽으로 틀며 오른팔을 들어 올린다. 그로부터 폐를 지탱하던 호흡 근육들이 전부 어긋나기 시작한다.

복근, 즉 복직근 옆의 복횡근과 내복사근, 외복사근이 정상적인 위치로부터 뒤틀린다. 그 사소한 뒤틀림이 치명적이다.

늑간근, 전거근, 횡돌극근, 대흉근. 폐를 감싸고 있으며, 그렇기에 호흡에 관여하는 모든 근육들이 정렬된 결을 잃는다.

이는 폐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고, 노래하는 데 심대한 결함을 일으킨다.

다음 노래를 위해 허겁지겁 또 숨을 들이켠다.

“워우 워우 워 워 워―!”

뒤틀린 근육은 삼킨 공기를 안정적으로 잡아두지 못한다.

예상한 것보다 많은 공기가 빠져나가거나, 뱉어야 하는 것보다 적은 공기가 나오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노래가 나온다.

고작 ‘워’라는 발음으로 소리치는 게 전부인데.

그게 미칠 듯이 어렵다.

발로 계속 땅을 박차면서, 상체를 살짝 뒤튼 상태에서, 팔을 움직이면서, 노래하라고?

그것도 단단한 목소리와 2옥타브 후반의 고음을 유지하면서?

‘이게, 노래라고 할 수도 없는 이런 간단한 부분에서 대체 몇 달을……!’

대체 몇 달이나 발목 잡히고 있는 건가!

근데, 또 여기서 X같은 부분이 끝나는 게 아니다. 아직 하이라이트의 반도 안 왔다.

더 X같은 게 있다.

“쓰아!”

같잖은 기합을 내지르자 간신히 폐 안에 간직하던 공기가 한 번에 빠져나갔다.

그리고 바로.

“승리! 투쟁! 해방! 이야악!”

명확한 발음의 가사를 내뱉어야 한다.

그 와중에 땅을 박차며 팔을 움직이는 개X같은 안무는 끝났다. 여기서 나아지면 좋겠지만, 더 힘들어진다.

하이라이트 2페이즈.

현란한 스텝을 제자리에서 밟으며 또 팔은 얼마나 쫙쫙 펴 대는지. 출 때마다 힘들어서 혼절하고 싶은 지경이다.

이미 멤버들은 정신이 나가서 노래가 아니라 악을 쓰고 있다. 저마다 ‘워억! 왁! 와아아아악!’ 그냥 비명을 지른다.

힘들어서 정신을 놓은 거다.

그나마 편한 브릿지에 들어가자 유경민이 성을 냈다.

“제대로 해!”

아카이브 멤버들이 움찔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유경민은 방금 소리친 걸로 기운이 또 바닥났다. 힘 빠진 목소리로 가사를 읊다시피 노래한다.

“감탄했으면, 이제, 숨 쉬어. 숨 쉬어. 쉬어…….”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

무대를 보았을 때도 ‘저건 힘들어서 자기들한테 하는 얘기인가?’하며 웃었는데.

직접 보니까 웃을 게 아니다.

정말 이 파트는 자기 최면이다.

더 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

브릿지가 끝나면 이젠 개 시X 개X같은 파트로 또 넘어간다.

라스트 하이라이트.

1페이즈.

“워우 워우 워 워 워!”

2페이즈.

“으헉, 헉, 크흐어억.”

그리고 대망의 3페이즈.

“……!”

노래 부를 정신도 없어서 이를 악물고 춤만 추었다. 그렇게, 끝난다.

유경민이 무릎을 꿇고, 다른 멤버들은 엔딩 포즈를 취할 새도 없이 바닥에 쓰러지듯 눕는다.

충혈될 듯 눈을 크게 뜬 유경민. 그녀의 이마 위로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려서 눈꺼풀까지 적셨다.

시야가 흐릿했다.

‘왜, 어째서, 이게.’

될 줄 알았다.

몇 달이나 연습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안 된다.

‘이거 전부 다 AR 아니야? 이걸 라이브로 부를 수 있는 거 맞아?’

그리 생각해서 영상을 찾아보면, 의심할 나위 없는 라이브다.

도피하려고 찾아본 소녀연맹의 ‘오토마타’ 라이브 영상. 그걸 볼 때마다 유경민을 감싸는 건 무력감뿐이다.

저들은 하는데, 자신은 못 한다.

‘오토마타’의 정수라는 잔상 파트나 조아라의 절대무용 파트는 양반이다.

그땐 노래를 안 부르니까 차라리 편하다. 그건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저히.

‘라이브로, 라이브로 끝까지 할 수가, 없어…….’

유경민은 한 번뿐이라면, 만전을 기한 상태라면 어떻게든 맡은 파트를 전부 소화할 수 있다.

그런데 멤버들이 안 된다.

지금도 유경민이 다른 멤버들의 파트를 꽤 많이 가져간 상태이다. 그런데도 멤버들이 잘 따라오지 못한다.

파트를 과도하게 부담한 유경민과 성공 확률이 비슷하다.

유경민은 엉금엉금 기어서 구석에 둔 폰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녀연맹의 ‘오토마타’ 컴백 무대를 보았다.

그러면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라이브로 연습하자 드디어 눈에 들어오는 광경.

힘들어서 미치고 팔짝 뛰며 죽고 싶은 퍼포먼스 보컬 파트에는 항상.

‘백설하.’

이 사람이 있다.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의 백설하가, 있다.

신아름 어쩌고 할 상황이 아니다. 그녀가 문제가 아니다.

아카이브의 케이콘 무대는.

‘이 사람이 없어서, 아카이브엔 설하 같은 인간이 없어서…….’

소녀연맹의 열화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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