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9화
평상시였으면 구단과 구장 스태프들이 썼을 온갖 방은 케이콘 출연 아이돌의 것이 되었다.
소녀연맹은 그중 한 곳에서 스크린으로 케이콘 생중계를 보았다.
“이거 보고 있으니까 더 떨려…….”
백설하는 오랜만에 청심환을 먹었다. 신아름이 그녀의 등을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효과 없는 거 아니에요? 이러다가 무대 위에서 효과 돌면 어떡해요?”
“그, 그러진 않아. 자주 먹어봐서 알흐어…….”
“자요?!”
백설하가 눈을 감고 축 늘어졌다. 신아름이 뺨을 약하게 찰싹 찰싹 때리자 백설하는 겨우 눈을 떴다.
“아, 무대 끝나니까 긴장이 풀려서……. 헤헤, 어떻게 되나 걱정했는데 결국 잘 끝났네. 다행이다. 공항에서 회사 분들 선물 뭐 사지?”
“리카, 쌤이 먹은 거 확인해봐. 저거 청심환 절대 아니야.”
“큐피트의 묘약이라고 써져 있어! 기억을 잠시 잃고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대!”
신아름과 백설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백설하가 쪽 키스를 날리자 신아름이 허공에서 붙잡아 땅에 내팽개쳤다.
“몸에 이상은 없죠?”
“응. 아까보다 기분이 훨씬 좋아.”
“아름이를 봐서 그런 거 아닌가요! 큐피트의 묘약이니까요!”
“그런가 봐. 아름아 나 몸이 뜨거워…….”
백설하가 달라붙자 신아름은 소름이 돋아선 그녀를 뿌리쳤다. 백설하는 도망간 신아름을 보곤 즐겁게 웃었다.
조아라는 백설하의 대사를 듣고 뭐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쌤, 방금 대사 잘 어울리는데 그거 해줘요.”
“그거?”
“글로브 ‘케미컬 임팩트’요.”
“어?”
“쌤이 추는 거 보고 싶어요.”
“맞아요! 아타시(저)도 말은 못 했지만 계속 보고 싶었어요! 큐피트의 묘약에 당한 쌤에게 가장 어울리는 퍼포먼스예요!”
“쌤 혼자서 몰래 연습했잖아요.”
“알고 있었어?!”
“지금 아니면 어디서 보여주게요.”
“지, 진짜 추라고?”
조아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춰줘요. 안 그러면 나 무대에서 실신해요.”
“…….”
소녀연맹의 리더인 백설하는 눈물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몇 번 연습한 ‘케미컬 임팩트’를 엉성하게 따라했다.
“오, 오오, 어중간한 마음으로
얻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지 예에.
네가 만진 내 숨결의 촉각
거침없이 네 몸을 찔러 들어
우리가 같은 마테리얼이었단 걸
별의 자식인 걸 증명해보자.”
“하이라이트다 하이라이트!”
“세쿠시(섹시)!”
백설하는 동생들이 환호해주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미묘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살짝 붉어진 얼굴이 ‘케미컬 임팩트’의 주제를 더욱 강조했다.
‘케미컬 임팩트’의 공식 설명은 인간의 근본적 가치를 향한 갈망이지만, 소녀연맹 멤버들이 생각하기에 이건 아무리 보아도.
‘황홀경인데…….’
케미컬 임팩트의 하이라이트 안무가 펼쳐진다.
백설하는 상체를 뒤로 빼고 몸을 느슨히 뒤로 뉘였다. 그리고 상대를 향해 팔을 펼치고, 파도치는듯한 웨이브가 위에서 아래로 이어진다.
“영원히 잠기도록
끊임없이 너를 몰아쳐―!
한계없이 자극하는
퍼펙트한 임팩트―!
완벽한 선의 케미스트리
전부 벗어둔 다이빙!”
온다, 하이라이트의 끝이.
백설하도 신이 나서, 이젠 완전히 즐기고 있다. 그녀의 얼굴에 즐거움이 감돌았다.
“감추지 않은 격정의 파도
우리의 케미컬 임팩……!”
노크 소리.
연습실 문이 열리고 경호원이 고개를 내밀었다.
“소녀연맹 여러분, 아카이브의 경민 씨가 인사를 오셨…….”
백설하가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자는 척했다.
“드르렁.”
“아, 딱 좋았는데.”
조아라가 품 안에 숨긴 폰을 꺼내어 녹화 종료를 눌렀다. 오랜만에 채널에 올릴 건수가 생기나 했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잠시 후 유경민이 연습실로 들어왔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의아해했다. 아카이브 전원이 올 줄 알았는데 유경민만 왔기 때문이다.
유경민은 소녀연맹 멤버들이 모두 시야에 들어오는 자리에 섰다. 그리고 허리를 숙였다.
“우리, 오토마타에서 라이브 AR 써요.”
“……그래?”
신아름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납득했다.
“알겠어.”
“……너희는 라이브로 해?”
“승부잖아.”
강성욱과 성필이 있던 자리에서 정했던 승부였다. 신아름은 성필과 소녀연맹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압도적으로 아카이브를 이기고자 했다.
“안 어려웠어?”
“어려웠지. 근데 오토마타에 비할 바는 아니었어. 칠링은 프리코러스 빼면 전부 랩이잖아.”
랩은 음절의 분절이 명확한 편이다. 발음이 뭉개질지언정, 호흡을 관리하기엔 보컬보다 낫다.
하지만 오토마타는 다르다.
신뢰의 리드 포지션인 리카와 신아름, 그리고 묵직한 부동의 메인 보컬 백설하가 있으니까.
오토마타를 만들어냈던 정지음은 이 세 사람을 믿고, 과격한 안무임에도 보컬에 힘을 주었다.
비록 랩과 다를 바 없는 추임새가 보컬 하이라이트의 대부분일지라도, ‘칠링’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비할 바가…… 아니라고…….”
유경민은 라희가 했던 바이올린의 비유가 떠올랐다.
이른바 아카이브는 미텐바흐, 몇백만 원짜리 프로페셔널용 보급품이다. 하지만 소녀연맹은 세기의 명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다.
라희가 어제 했던 말이, 오늘은 이렇게 들렸다.
“고작 몇 주 만에 라이브로…… 가능하게 됐다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잠자던 척하던 백설하가 일어났다. 그리고 신아름의 어깨를 짚으며 뒤로 천천히 물렸다.
가만히 뒀다간 싸움이 일어날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유경민은 크게 심호흡했다.
그녀는 어제 라희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바이올린의 비유 다음에 했던 이야기였다.
현재에 값을 매기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바이올린과 달리 성장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유경민이 말했다.
“지금은 안 되지만, 우린 언젠가 할 수 있을 거야. 언젠가, 소녀연맹처럼 할 수 있게 될 거야.”
신아름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모두가 이변을 알아차렸다.
가장 먼저 안 건 장하양이었다. 테이블 위에 펼친 잡지 옆, 올려둔 물병 안이 떨린다. 그 떨림은 물병 안에 옅은 흔들림을 만들었다.
이어서 방 전체가 울렸다.
소리의 폭풍이 몰아친다. 그 함성은 몇 겹의 콘크리트 벽을 뚫고 이곳까지 들이닥쳤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함성이었으나, 잠시 후 명확한 어감을 갖게 되었다.
“……설마.”
유경민은 연습실을 나섰다.
복도를 뛰어 밖으로 나갔다.
관객석으로 들어가는 입구.
그곳에 서는 것만으로도 폭풍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수만 명의 관객이 하나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무대 위에 오른 그룹에게.
글로브.
수만 명이 동시에 내뱉는 ‘글로브’는 하나가 되어 소리의 폭풍을 만들어냈다. 그 소리가 너무나 거대하여 피부를 찌른다. 드러난 살결이 저릿거린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유경민은 감탄할 수조차 없었다. 수만 명의 염원과 행복, 기쁨이 실체화하여 그녀의 몸을 찌그러뜨리려 하고 있었다.
구깃구깃, 찌그러진다.
* * *
글로브가 첫 번째 곡인 ‘후 어(Who uh)’를 마치자마자 기다렸단 듯 환호성이 튀어나온다.
수백 미터 밖에 있던 관객의 환호는 자그마한 오차를 두고 지유를 덮쳤다. 그렇기에 수만 명의 환호는 해일처럼 한 번에 밀려오는 게 아니라,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맞아도 맞아도 끝나지 않는다.
이윽고 무대 위를 함성과 박수의 소용돌이가 휩쓸었다. 글로브 멤버 전원은 생전 받아보지 못한 환호의 폭풍 안에서 허우적거렸다.
‘유럽은 고전을 중시하는 느낌이 있지만, 예로부터 새로운 것에 가장 민감했다. 새로운 것이 가장 먼저 가치를 인정받았던 곳이지.’
윤상열은 글로브의 정규 1집인 ‘후 어’의 성공을 두고 그리 말했었다.
‘너희의 곡이 국내 시장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단 건 아무런 문제가 안 돼. 이미 케이팝 시장은 국내보다 해외를 더 신경 써야 할 정도가 되었으니. 그리고 내가 노리는 건 유럽이다.’
미쳤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식어버렸던 재즈는 유럽으로 건너와 예술의 경지로 진화했다. 록의 기술이 예술성을 입었던 것도 유럽이고. 일렉트로닉 디제이가 가장 먼저 아르티스트(Artiste)로 인정받았던 것도 유럽이다.’
이해가 안 된다.
‘내가 너희에게 입히려는 소리의 질감은, 시대를 앞섰으면서도 현대의 감성에 맞게 세련됐다.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이해할 수 없을 테니.’
이해가 안 됐기에 미쳤다고 생각했다.
만약 윤상열이 한 말이 진심이고, 만약 그게 실현된다면.
‘너희의 음악은 첨단이 된다.’
윤상열은 진정한 천재가 된다.
공략할 시장을 정하고, 타깃층을 결정하고, 그에 맞춰 상품을 개발한다.
듣기엔 쉽다. 그 쉬운 일을 이름난 대기업이 번번이 실패한다. 그럼에도 대기업이 망하지 않는 건, 수십 번의 실패 중 보석 같은 성공이 있기 때문이다. 실패를 견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실패의 연쇄와 탑으로 닿을 수 있는 시장 공략을, 몇 번의 도전만으로 일구어냈다면 정말로.
‘소녀연맹이 일본으로부터 성공을 다졌고, 케이어스가 KS 엔터 팬덤을 기반으로 아시아권에서 성공을 구가한다면, 너희의 시작은 유럽이다.’
정말로.
그에겐 천재란 이름이 아깝지 않다.
‘후 어는 시작이었고, 케미컬 임팩트는 쐐기다.’
케미컬 임팩트.
퍼포먼스가 시작됐다.
지유는 다른 멤버들에 비해 파트가 확연히 적다. 곡이 끝날 때까지 중앙에 나서는 시간이 고작 10초다.
그렇기에 다른 멤버들보다 여유가 있어서, 객석을 더욱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관객의 눈에 새겨진 행복과 기쁨을, 볼 수 있었다.
‘달라.’
다른 그룹이 나왔을 때와 확연히 달랐다.
저들의 눈빛이, 방금의 함성이, 글로브를 부르는 목소리가.
전부 다르다.
“영원히 잠기도록
끊임없이 너를 몰아쳐―!”
관객들이 한국어로 노래를 부른다.
발음은 불명확하고 뭉개졌으나, 그건 분명 케미컬 임팩트의 가사였다.
객석과의 거리 때문에 같은 가사가 시간 차를 두고 무대를 덮쳤다. 그럼에도 멤버들은 혼란 없이 퍼포먼스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인이어를 뚫고 소리가 들어오지만, 옅었다.
‘대단해.’
대단하다.
스타디움급 공연에 맞춰 인이어 볼륨을 최대한으로 올려뒀건만, 그 소리를 뚫고 함성이 들리다니.
‘듣고 싶어.’
이 소리를 듣고 싶어.
느끼고 싶어.
[도망칠 순 없어
같은 감각에 빠져
우린 하나일 때
가장 거대해져]
브릿지가 끝나고 곡이 라스트 하이라이트, 피날레에 도달했다.
정면에 나선 위세라가 어마어마한 성량으로 고음을 내지른다.
[네가 손에 쥔 향기가
더 선명하게 아른거리지
우릴 뒤흔드는 이
케미컬 임팩트]
이어서 정진과 라희가 위세라를 앞질러 무대의 중앙을 차지했다. 그녀들의 하이라이트 멜로디가 번갈아 공간을 뒤흔들었다.
[영원히 잠기도록
끝없이 너를 몰아치는]
[한계 없이 자극하는
퍼펙트한 임팩트]
[완벽한 선의 케미스트리
전부 벗어둔 다이빙]
[감추지 않은 격정의 파도
우리의]
케미컬 임팩트.
정진과 라희가 양옆으로 갈라졌다.
드러난 중앙엔 지유가 있었다.
그제야, 지유는 어째서 윤상열이 그녀의 파트가 중요하다고 했는지 깨달았다.
쉴 새 없이 몰아쳤던 노래의 파도가 물러난 자리, 고요해진 곶 위에 지유만이 서 있었다.
관객이란 이름의 별이 사방에 총총히 박혀 빛났다. 그 빛은 지유에게 향했다. 지유만을 향했다.
5만 명의 시선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지유가 인이어를 양쪽 귀에서 빼버렸다.
곧바로 온몸을 쳐부술 듯한 5만 명의 함성이 지유를 덮쳤다.
5만 명에게 노래를 들려주기 위한 스피커의 음향이 피부를 뚫고 심장으로 쇄도했다.
‘부서질 거 같아.’
무형의 시선에, 형태 없는 소리의 칼날에, 전신이 갈가리 찢길 것만 같다.
육체가 힘을 잃고 굴복하는 시간.
그리고 정신만이 또렷하게 빛나는 순간.
지유의 뒤에 걸린 초대형 스크린에 밤하늘 별의 일주가 그려진다. 하늘을 물들인 별의 레이스가 아름다운 원형을 만들며 그녀를 감쌌다.
또렷이 빛나는 정신이 굴복한 육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펼쳐진다.
6초의 댄스 브레이크.
거기에 더해.
“꺼지지 않는 불씨가―!”
3옥타브 초반의 고음 보컬 애드리브.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육체를 이끌고, 호흡을 전에 없던 수준으로 토해내게 만드는 격렬한 춤과 함께, 그녀는 있는 힘을 쥐어 짜내 외친다.
유경민에게 자신 있게 말했었다.
전쟁터가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기술.
무대에 서지 않곤 알 수 없는 힘.
아우라.
“너를 태워 가―!”
그건 시각과 동시에 청각의 폭력이었다.
수백 미터 떨어진 인간조차, 면봉 크기에 불과한 지유의 춤을 인지할 수 있었다.
파르크 데 프랭스 밖의 인간조차 지유가 내지르는 영혼의 환호성을 들을 수 있었다.
모두의 눈에 박아 넣는다.
모두의 귀에 쑤셔 넣는다.
춤과 노래, 퍼포먼스는 쐐기가 되어 수만 명의 영혼에 새겨진다.
이윽고 장대비가 내렸다. 지유의 영혼에 보답해주려는 듯한 박수와 환호가 폭우가 되어 내렸다.
그 폭우는 물리적으로 지유를 적셨다.
전신이 땀범벅이다.
‘이게…….’
우리들의 프로듀서가 보았던 풍경.
그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던 환상.
실제로 펼쳐질 때까지는 누구도 볼 수 없었던 기적.
글로브의 3년이다.
* * *
곡 바꾸기 무대.
유경민이 낀 왼쪽 인이어로 ‘오토마타’의 MR이 흘러나왔다. MR엔 메트로놈 소리가 섞여 있어 타이밍을 맞출 수 있게 해두었다.
타이밍을 맞추어, 유경민이 노래했다.
아니, 입을 뻐끔댔다.
오른쪽 인이어엔 마이크가 잡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야 했지만, 오늘만은 침묵을 유지한다.
아카이브 중 누구도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라이브 AR이니까.
‘그런데도.’
그런데도 관객들은 웃고 있다.
폰을 꺼내 아카이브를 화면에 담는다.
오토마타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한다.
아카이브의 립싱크는 완벽하다. 당연하다. 레코딩 때의 영상을 찍어, 라이브 AR 음원과 입술 움직임을 맞추도록 연습했으니까.
완벽할 수밖에 없어서, 모두 속아 넘어간다.
‘내가 노래하지 않아도 팬들은 행복해.’
그리고 노래하지 않아도.
‘숨이 차.’
오토마타의 춤은 극악하다.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힘들다.
극적인 체력 소모를 요구하는 춤이다.
다른 멤버들의 파트를 조금씩 더 떠맡은 유경민에겐 더더욱 힘들었다.
떨어지는 체력에 비례해 근육에는 피로가 쌓인다. 피로가 쌓인 근육은 가동 범위를 점점 줄여간다.
뇌가 움직이라고 명령해도, 고통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범위를 줄이는 것이다.
그게 유경민에게는 이렇게 보였다.
‘오토마타’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어떻게 너 따위가 나를?’
춤은 추는 사람이 없어도 존재한다.
존재를 획득한 춤에는 자아가 있다.
자아가 있어서, 어울리지 않는 인간을 밀어낸다. 유경민은 연습할 때도, 무대에 선 지금도 오토마타에게 거부당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동인형이라는 이름을 가진 춤에게, 추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다.
그런 퍼포먼스인데도, 관객들은 환호한다.
이게 강성욱이 말했던 ‘꿈의 세계’다.
‘기쁘지 않아.’
그 꿈의 세계를 만들었음에도 유경민은 기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건 그녀의 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런 아이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오토마타의 정수가 다가온다. 2절이 끝난 이후의 브릿지. 그리고 펼쳐지는 ‘잔상 파트’와 그게 끝났을 때의 ‘절대무용’.
포지션이 바뀐다.
유경민은 멤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그 표정 안에는 고통이 도사리고 있다. 압박감과 긴장감과, 그리고 죄책감이 있다.
‘너희들도 기쁘지 않구나?’
꿈이란 이름의 거대한 사기극이다.
‘대표님, 이게 대표님이 말씀하신 꿈입니까?’
이런 꿈, 저는 꾸고 싶지 않습니다.
유경민은 왼쪽 귀의 인이어를 떼어냈다.
그 순간 스피커의 음향과 수만 관객의 함성이 유경민을 덮쳤다.
몸이 부서질 듯한 압박감이다. 그러나, 아까 글로브의 무대보다 확연히 덜한 힘이다.
‘이게 대표님이 만드신 꿈의 무게입니다.’
확신이 생겼다.
이젠 용기를 새긴다.
‘난 포기하고 있었어.’
소녀연맹을 꺾겠다고 호언장담했음에도, ‘오토마타’를 연습할수록 마음만 꺾여갔다.
오늘 그녀들에게 라이브 AR을 쓴다고 고백했다.
그때도 분하진 않았다. 소녀연맹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다른 차원의 존재, 격이 다른 아이돌에게 질투나 시기를 품는단 게 말이 안 된다.
그런데, 그 마음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글로브, 고맙다.’
아직 너희라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거든.
글로브를 발판 삼아 소녀연맹을 따라잡겠다.
용기가 새겨졌다.
유경민이 노래했다.
이번엔 입술만 움직이지 않았다.
“감탄했으면, 숨 쉬어.”
노래하자 바로 반응이 왔다.
벗지 않은 오른쪽 인이어에서 연출 감독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뭐 하는 겁니까.]
“숨 쉬어.”
[노래하면 안 됩니다. 보컬이 섞이면 음향이 엉망이 될 겁니다.]
“쉬어.”
[당장 그만두…….]
그래, 그만둬야지.
이 거짓말을.
유경민의 두 눈에 끝을 모르는 불꽃이 빛을 발했다. 그녀의 기본자세부터 목의 근육까지 전부 평소의 형태를 잃었다.
이제 어린애들에게 맞춰주는 건 끝이다.
‘경민아, 너는 특별하단다.’
강성욱이 말해주었다.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겠어. 네 나이대에선 그 노력과 비교할 만한 사람을 찾기 힘들겠지. 힘들었겠구나.’
힘들었다.
이만한 노력을 쌓아 이만한 실력에 도달한 게 쉬울 리 없었다.
고통을 참았다.
신아름 때문이었다.
그녀의 재능은 마치 소설에 나올 것처럼 비현실적이어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 같은 인간은 존재해선 안 되고, 그녀 같은 인간은 성공해선 안 된다.
신화 속 영웅은 사라져야 한다.
유경민은 평범한 전사로서, 신화의 영웅을 지우기 위해 칼을 갈아왔다.
‘네 퍼포먼스는 개성 과다야. 하모니가 없어. 그 상태로 그룹에 끼면 민폐일 뿐이야. 네 개성은 존중하고 감탄하지만, 네가 데뷔조가 되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해.’
리드 포지션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
모두를 이끌어줄 것.
반대로 말해서, 너무 튀지 말 것.
‘나는 솔로 뮤지션이 필요한 게 아니야. 그룹 멤버가 필요해. 팀플레이가 불가능한 축구선수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안다.
그렇다면 팀플레이를 하지 않고 월드컵에서 팀을 우승시키겠다. 그럼 불만은 없겠지.
잔상 파트 포지션.
다섯 명이 한 줄로 겹쳐 선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한 사람으로 보이는 위치.
유경민은 잔상에서 가장 어려운 가장 앞자리였다. 다섯 개의 잔상을 모두 표현해야 하는 자리.
뒤는 보이지 않는다.
보지 않는다.
어차피 멤버들은 떨고 있을 테니까. 유경민이 사고를 칠 거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하고 있다.
‘걱정하지 마, 얘들아.’
최소한 하모니를 망치진 않는다.
대신, 눈에 굉장히 많이 띄겠지.
라이브 AR이다. 유경민의 목소리가 섞이면 음향이 엉망이 된다. 그러면 엉망이 되지 않도록 한다.
‘같은 음정으로 불러봤자 공명이 일어날 뿐.’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마.
‘정해진 음정의 배음(倍音)인 2·3도 장·단음(長·短音)으로 부른다.’
보통 사람은 ‘도’에서 ‘도’만 듣는다.
하지만 모든 음은 배음을 지닌다.
‘도’의 배음은 미·솔·시 마이너·2옥타브 도·레·미 샵…… 이런 식으로 올라가서 ‘도’ 아래의 3음과 합쳐 16배음을 이룬다.
‘도·미·솔’이 모이면 가장 간단한 화음이 된다.
즉, 배음에 맞춘 음은 동시에 연주되면 화음이다. 더 아름답고 풍성한 소리를 전해준다.
그러니 지금부터 유경민은, 모든 가사의 음을 2·3계단 높여 배음으로 부를 것이다. 원래 오토마타보다 더 높은 고음으로 부른다.
‘미친 짓이지.’
유경민은 피아노를 치는 게 아니다.
음을 시각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믿을 건 자신의 감각뿐이다.
절대음감이 아닌 이상에야 정해진 음정의 배음으로 노래 부른다는 건 감히 생각할 수도 없다.
만약 음정이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사람들은 곧바로 불협화음을 알아챌 것이다.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함을 표현하겠지.
삑사리와 다름없다.
그래, 미친 짓이다.
‘미친 짓이지만, 나는 할 수 있어.’
잔상이 시작됐다.
한국 무용. 이어서 발레. 그리고 멤피스 주킹.
모든 멤버들의 기교를 압도하는 아름다운 몸짓이다. 그녀 뒤의 멤버들은 진정한 의미의 잔상으로 변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춤을 바꿔가며 유경민은 미소를 지었다.
‘이걸 성공하면 스스로 이렇게 불러도 되겠지.’
초절기교(超絶技巧).
유경민은 다키스트의 HPT 뮤직 어워드 무대 중 ‘더 킹’을 보고 팬이 됐다. 그러니 그들을 목표로 삼겠다.
잔상이 끝나고.
라스트 하이라이트, 피날레 1페이즈.
‘당신들이 알아줄까.’
유경민은 감탄하는 관객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의 심장은 뛰었을까.’
뛰게 할 수 있을까.
아니, 뛰게 한다.
이게 나의.
‘아이돌리즘.’
내 마음이여, 닿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