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화
봉사활동 동아리 멤버들은 저녁이 되자 비척비척 마을회관으로 몰려들었다.
2층으로 올라가 차례대로 샤워했다. 그동안 손이 노는 인원들은 주방에서 요리했다.
일이 끝났건만 모두의 얼굴엔 기쁨이 없었다.
곧 이유가 찾아왔다.
“학생들!”
어르신들이 모여 술 파티를 벌였다. 젊은이가 된 도리로 어르신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광란의 술자리가 끝난 건 9시가 넘어서였다.
하지만 여기서 또 끝나지 않았다.
“영어 쓰는 사람 마셔!”
술을 들이켠 대학생들은 무적이었다.
오늘의 피로는 죄다 잊어버리고 자신들만의 술자리를 이어 나갔다.
김채현은 어지러워서 중간에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와 정자에 걸터앉았다. 술기운과 여름의 훈풍이 섞여 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다음 학기에 여기서 탈출한다.’
이건 봉사 동아리인지 술 동아리인지 모르겠다.
다들 봉사는 뒷전이고 인연을 만들러 온 듯했다. 똑같은 목적으로 들어온 김채현이 뭐라고 할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젠 목표로 했던 그 잘생긴 선배도 없으니.
폰을 꺼내어 소녀연맹의 교차 편집 무대를 멍 때리면서 보았다.
“취했어?”
목소리가 들렸다.
김채현이 누운 채로 고개를 돌리자, 같은 학과 1학년 장민준이 보였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정자 끄트머리에 앉았다.
김채현은 다시 폰을 보았다.
“뭐 봐?”
“정통 뮤지컬 연출하고 싶은 우리 고귀하신 민준 님은 관심 없을 거.”
“너 그거 아직도 담아두냐?”
공연예술학과 신입생 환영회.
둘은 같은 테이블에 앉았었다.
김채현이 케이팝 엔터테인먼트 프로듀싱을 목표로 한다고 했더니, 장민준이 으스대며 이렇게 말했었다.
‘제일 커머셜한 시장에 가려고? 꿈이 작네. 이 학과에 왔으면 예술을 해야지.’
죽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더랬다.
그 후로 같이 놀며 친한 사이가 됐지만, 김채현은 그때의 일로 자주 놀리곤 했다.
물론 그도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농담을 한 것이었다.
“뭐, 남자 아이돌?”
“소녀연맹.”
“아, 소녀연맹.”
“알아?”
“이름 듣고, 노래 듣는 정도?”
무대는 본 적 없구나.
하긴 그렇겠지.
그때 근처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장민준이 가까이 다가와 김채현의 폰을 보고 있었다.
“나 이거 알아. 애플 크러쉬. 젤 최신곡이지?”
“오토마타가 최신곡이야.”
“그래……?”
오토마타는 국내 차트에서 참패했었다. 모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김채현은 술기운이 짙어 답해주는 것도 귀찮았다. 바람을 느끼며 멍하니 소녀연맹의 영상만 보았다.
“대학에 오길 잘했어.”
“……뭐라고?”
김채현이 한 박자 늦게 답했다. 방금 장민준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로맨틱하게 들렸다.
설마 얘 지금…….
“멋져.”
……멋져?
단어에 고정관념을 느끼고 싶진 않지만, 여자에게 할 법한 말은 아닌 거 같다.
즉, 김채현 자신에게 할 말은 아니다.
장민준은 다른 걸 보고 말했다.
“나 혼자였으면 절대 안 찾아봤을 거야.”
장민준은 소녀연맹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는 액정에 떠오른 소녀연맹의 무대를 눈으로 핥듯이 했다.
장민준이 이 학교에 온 이유는 어느 교수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뮤지컬 연출가라고도 할 수 있는 전설적인 교수에게 배움받는단 이유만으로 온 것이다.
그의 목표는 뮤지컬 총괄이었고, 그엔 무대 연출도 포함되어 있다.
“진짜 멋진데? 이거 화면 막 바뀌는 거 뭐야?”
“교차 편집이라고, 여러 무대를 교차로 편집한 영상.”
“어…… 오…… 와…….”
영상이 끝났다.
“아이튜브에 교차 편집 치면 볼 수 있어?”
“어, 많이 나와.”
“너 수강 신청 뭐 한다고 했었지? 케이팝…… 뭐였는데.”
“케이팝의 이해.”
“나도 들어보고 싶다.”
“그거 영어 강의야. 들을 수 있어?”
“1학기 실용영어1 A+.”
“그게 뭐라고 글케 자신만만해?”
“플러스 수능 영어 100점. 모의고사도 100점 아닌 적 없었어.”
“자랑이다.”
생각해보니 진짜 자랑이다.
“케이팝 관심 생겼으면 앨범 하나 사봐. 의외로 까는 재미가 있어.”
“뭐 살까?”
“진짜 사게?”
“사라면서.”
“아니…….”
얘 나한테 관심 있나? 이렇게 적극적으로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려는 걸 보면, 관심 있는 거 같기도 한데.
“뭐…… 사봐. 소녀연맹 2주 정도 뒤에 새 앨범 나와. 예약 구매하면 특전 줘.”
“이거야?”
벌써 검색해서 찾아냈다.
‘얘 진짜 나 좋아하나 본데?!’
아니고서야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모르는 분야에 뛰어들 리 없잖아!
김채현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술 때문일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아 왔던 그가 조금은 멋져 보이기도 한다.
“사, 삼 종이니까 걍 제일 싼 거 사……. 초동은 그래도 집계되니까…….”
“초동이 뭐야?”
“일주일 동안 판매된 앨범의 양…….”
김채현은 괜히 장민준을 의식하게 됐다. 장민준은 진짜 학구열이 불탄 것에 불과했는데도 말이다.
여름이었다.
* * *
여름이다.
이선주는 카페 카운터 안쪽의 방에 앉아 무료하게 책을 읽었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손님이 없어 쉬는 중인가? 아니었다.
“사장님, 바닥 한 번 닦을게요.”
“그래요.”
이선주가 사장이었다.
20세.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모님이 카페를 차려주었다. 이선주는 속성(速成) 경영 강의와 카페 운영 컨설팅을 받은 후, 곧바로 사장이 됐다.
부모님이 운영하는 카페 중 하나에서 매니저급 인물도 6개월간 빼왔다.
덕분에 이선주는 경영이 나름 익숙해졌고, 이젠 처음의 떨림은 온데간데없었다.
“희아 씨.”
“네?”
바닥 청소를 마치고 온 알바생, 임희아에게 이선주가 나른한 투로 물었다.
“대학 재밌어요?”
“어…… 재미가…… 글쎄요, 헤헤…….”
둘의 나이는 같다.
한 명은 대학생이고, 한 명은 사장이다.
이선주는 지금쯤 농촌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을 친구, 김채현을 떠올렸다.
‘나도 대학교를 갈 걸 그랬나.’
간다면 이름도 못 들어본 시골 어딘가 한적한 곳밖에 못 갔겠지만. 때때로 캠퍼스 라이프를 누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현재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다.
‘2호점을 내는 게 목표니까, 열심히 해야지.’
이선주, 목표는 최고의 경영자!
언젠가 솔라벅스를 앞지를 최고의 프랜차이즈 카페로 성장할 것이다.
그 목표를 위해 이탈리아에 바리스타 연수(싹수가 보이는 정직원을 뽑아 보낼 예정)도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것보다 본고장에서 커피를 배운 사람을 뽑는 게 더 쉬울 것이다.
또한 내부 인테리어와 뮤직 인테리어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쉬는 날마다 다른 카페를 탐방하는 건 이제 일과가 됐다.
‘그러고 보면, 처음엔 많이 당황했지.’
이선주의 눈이 카페 한쪽으로 향했다.
한 테이블.
그곳은 가게의 모서리였다.
모서리를 이루는 두 면, 테이블 가까이 소녀연맹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게다가 선반엔 소녀연맹의 굿즈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비장의 인테리어는 백설하 솜뭉치(모에화한 캐릭터 인형. 솜뭉치에 옷을 갈아입히며 꾸미는 것을 ‘마망 놀이’라고 한다)인 ‘설하잉’이 놓여져 있었다.
트잇터에서 발견한 금손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조아려 산 물건이다. 이미 판매 기간이 지난 데다가 재고도 없었지만, 돈에는 장사가 없었다.
2등신의 귀여운 ‘설하잉’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반기에 그 금손분이 또 다른 소녀연맹 잉 시리즈를 낸다고 하셨지. 이번엔 누굴까? 하양이? 리카? 아라? 아름이?’
전부 다 좋다.
이번엔 열 개 백 개씩 살 거다.
한 테이블을 둘러싼 소녀연맹의 공간. 저 장소는 이선주를 치유하지만, 카페를 막 열었을 땐 당혹감을 전해주었다.
굿즈 공간 사진 SNS를 떠돌며 이선주의 카페에 문의가 온 것이다. ‘생일 카페’로 이용할 수 있냐는 문의가 쇄도했다.
이선주는 몰려오는 주문에 정신을 못 차렸었다.
‘저, 저희는 생일 카페 이벤트용으로 카페를 대절하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소녀연맹의 사진을 들이밀며 성내는 손님마저 있었다.
소녀연맹은 되고 우리 애들은 왜 안 되냐면서. 지금 아이돌 성적으로 차별하는 거냐면서 말이다.
그 때문에 트잇터에 이선주의 카페를 규탄하는 바람이 불기도 했다. 불매하겠다고 말이다.
생일 카페 대절 자체를 안 하니 파는 게 아닌데 어떻게 불매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불매한다고 했었다.
한때의 바람이었고, 이선주의 덕친들이 힘을 써주어 어떻게든 수습이 됐지만…….
‘진땀깨나 뺏었지.’
하지만 초보 사장 시절의 고통은 끝이다.
이젠 이선주도 그런 세상의 풍파쯤은 웃으면서 넘길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요즘도 생일 카페인 줄 착각하고 문의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럴 때면 살짝 아쉽긴 하다.
‘차라리 생일 카페 문의를 받는 게 수익적으로 더 낫지 않을까?’
이선주가 픽 웃었다.
어차피 단기적인 돌풍이었을 뿐이겠…….
“걸스 리그!”
서양인 셋이 카페로 들어왔다.
험상궂게 생긴 근육질의 남자.
호리호리하게 말랐으나 역시 근육이 선명히 부각되는 남자.
그리고 모델처럼 크고 날씬하며 예쁜 여자.
그 셋은 이선주의 힐링 플레이스인 소녀연맹 공간을 보곤 감탄을 터뜨렸다.
다들 카메라를 꺼내어 그곳을 찍기 바빴다.
‘X발 뭐야. 진짜 생일 카페를 했어야 했나?’
케이팝 관광지 사이트 같은 데 등록된 건가?!
* * *
플레하노브와 로자, 선전관은 주문한 음료를 받아와 소녀연맹의 굿즈로 가득한 공간에 앉았다.
“아, 플레하노브! 여길 보고 배우세요! 본토의 케이팝 인테리어예요!”
“흥, 내 카페는 모든 공간에 소녀연맹 굿즈가 있다. 이렇게 찔끔찔끔 놓진 않아. 이 카페 주인, 소녀연맹이 부끄러운 건 아닌가?”
플레하노브도 카페 주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카페의 주인을 향한 경쟁심을 태웠다.
케이팝의 고향에게 밀리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의 발현이었다.
그 때문에 카운터에 선 알바생이 바들바들 떨었다. 플레하노브의 시선이 이어지자 이빨까지 따닥따닥 부딪쳤다.
“플레하노브는 미학을 모르는군요.”
선전관이 핫초코를 홀짝였다.
“비어 있기에 집중할 수 있는 겁니다. 여백의 아름다움을 모르십니까? 흰 종이에 찍힌 하나의 점, 가장 아름다운 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플레하노브가 말싸움에서 졌다.
로자가 둘의 대화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 채광은 뭔가? 눈이 부셔서 죽을 거 같잖아.”
“플레하노브의 카페는 음침하니까요.”
“음침?! 내 카페엔 ‘소련이’가 있는데?”
“본토에서 보니까 확실히 알겠어요. 플레하노브네의 굿즈들은 격이 떨어져요.”
“격이……!”
이곳엔 신기한 것들이 가득하다. 로자조차 처음 육안으로 본 소녀연맹의 굿즈가 한가득이다.
그럴 수밖에.
예를 들어…….
“이 시즌 그리팅 박스…….”
소녀연맹의 종합 굿즈 세트인 시즌 그리팅 한정판 박스다.
나라를 건너서 사야 하는 로자로선 과한 지출이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단념했던 것이었다. 하필 그때 클라이언트가 급료를 명품 옷으로 지불해선…….
“아, 그야말로 보고(寶庫)예요 플레하노브! 특히 이 인형을 보세요!”
“누구지?”
“보면 몰라요? 설하잖아요!”
“하지만 흉부가 평평한데…….”
“이런 인형은 원래 섹슈얼한 특징이 없어요!”
“왜? 본체를 모방하면 할수록 좋은 거 아닌가?”
“옷을 갈아입혀야 하니까요!”
“옷을……!”
플레하노브는 ‘설하잉’ 솜뭉치를 보았다.
20cm 체고의 설하잉은 헤실헤실 미소를 지으면서, 인형 특유의 큼지막한 눈으로 플레하노브를 바라보고 있다.
플레하노브의 볼이 발갛게 달았다.
“귀엽군…….”
선전관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알았을까.
이 사람이 4년 전까지만 해도 PTSD에 우울증, 대인기피증을 겪었던 인간이라고.
“소녀연맹이 컴백한 후에 왔으면 좋을 뻔했군. 그랬으면 이곳의 굿즈도 더욱 풍성했을 거 아닌가.”
“제가 시간이 안 나는데 어떡해요. 대학교 4학년을 끌고 여행 온 것만 해도 기적인 줄 알아요.”
“로자 네가 오자고 했지 않나.”
“쓰읍! 그래서 싫어요?”
“오길 잘했지…….”
플레하노브는 소녀연맹의 앨범 패키지가 줄줄이 늘어선 선반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항상 그랬듯이,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소식을 들고 찾아올 거야. 비록 밀리언셀러의 영광은 케이어스에게 뺏…….”
“케이어스 같은 건 신경 안 써도 돼요.”
로자가 경쾌하게 말했다.
“소녀연맹은 반드시 케이어스보다 훨씬 더 엄청난 아이돌이 될 거니까요. 약속했어요.”
“약속, 말인가…….”
그랬다.
로자는 소녀연맹과 약속했다.
정확히는 장하양과.
“그래, 하양이 약속했으니 믿어야지.”
모스크바 케이팝 커버 댄스 대회.
수상의 영예를 얻은 로자의 팀은 장하양과 대면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로자는 매우 사적인 부탁을 했었다.
부탁이었나, 확실하지도 않다.
장하양을 대면한 기쁨에 울면서, 거의 오열하면서 영어로 중얼거렸던 것이니까.
‘러시아로 콘서트를 와주세요…….’
장하양은 로자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럴게요.’
그때를 떠올린 로자가 다시금 미소 지었다.
“케이팝 아이돌이 러시아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려면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매우 유명해져야 하니까요! 수지타산이 맞을 정도까지 사람을 모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훨씬 훨씬 훨씬 더 유명해져야 해요!”
러시아의 케이팝 시장은 지금으로선 그리 크지 않다.
“그런데 하양이는 온다고 했으니까, 저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유명해질 거예요. 약속을 지키러, 꼭 올 거예요.”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순간 모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셋이 손을 모았다.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와아아아악!
“사, 사장님…….”
아르바이트생 임희아가 겨우 울음을 참으며 이선주를 보았다. 이선주는 카운터 테이블 아래에 머리를 숨긴 채, 핸드폰으로 ‘112’를 띄우고 있었다.
“아직이야, 기다려요.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았어요. 소련이들을 좋아하는 걸 보니 좋은 사람들이에요. 그럴 거야 꼭.”
“‘112’는 지우고 말씀하세요…….”
다행히 러시아인 손님들은 조용히 핫초코를 마시곤 밖으로 나섰다.
“자, 오늘의 하이라이트로 가요!”
* * *
“형, 사람이 꽤 모여요.”
민경섭이 1층 통유리 바깥을 가리켰다.
가로 엔터의 주차 구역.
그곳엔 ‘PEOPLE’ 모양의 거대한 네온 구조물이 있었다. 소녀연맹의 뮤비 촬영 때 쓰인 것이다.
큰돈을 들여 만들었는데, 바로 해체하긴 아까워서 주차장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송 포 피플’의 활동기가 끝나면 회수해서 해체할 예정이었다.
“진짜 광고가 되네요.”
“그렇겠지. 지나가는 사람도 보고, 인민이들은 성지 순례처럼 찾아오기도 할 거고.”
회사 앞이 북적이는 건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 홍보에 도움이 된다면 감수할 만한 불안이다.
성필은 PEOPLE 네온에 대해선 신경을 끄고 다시 리카에게 집중했다.
“자, 리카. 다시 해.”
“…….”
리카는 크게 심호흡했다.
성필이 폰 카메라를 그녀에게로 향했다.
리카가 펼친 손을 입 가까이에 두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 아타시(나)?”
‘에, 아타시? 소오, 아타시?’의 경쾌한 음악이 흐르자 리카가 윙크와 함께 혀를 빼꼼 내밀었다.
“소오(그래), 아타시(나)!”
리카가 특유의 의기양양하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위로 까딱했다. 이마에 쓴 선글라스가 톡 그녀의 눈가로 내려왔다.
약 10초의 영상.
리카의 퍼스트 트랙이 공개되자, 클락에 밈이 형성됐다. ‘에, 아타시?’ 챌린지란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이러한 영상을 찍어 올렸다.
즉, 리카의 곡과 리카가 중심이 된 밈이 탄생한 것이다.
“으음, 느낌이 안 나는걸? 다시 찍자.”
“아타시(제)가 원작자인데 제가 느낌을 못 낸다는 게 말이 되나요?! 저는 완벽하다구요!”
“으음, 아닌걸? 프로듀서인 내 눈에는 완벽하지 않은걸?”
“나쁜 사람! 독재자! 개구리 똥! 나쁜 이사님!”
리카가 성필의 어깨를 토닥토닥 마사지하듯 때렸다.
“됐어요! 저 삐쳤어요! 앞으로 30초 동안 말 거는 거 금지예요!”
“에이, 그럼 나 외로운데.”
“감수하세요!”
“세계 최고 미소녀 리카와 30초간 대화 못 하면 외로워서 죽어버릴 거…….”
그때 저 멀리, 리카의 뒤로 지나가는 장하양이 보였다. 물병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는데, 시선이 이쪽으로 고정되어 있다.
“죽어, 버릴, 거…….”
“진짜 죽을 사람처럼 말씀하시면 어떡하나요! 반칙이에요!”
리카가 흥 하며 어쩔 수 없단 듯 다시 선글라스를 이마에 걸듯이 썼다.
“외로우면 죽어버리는 토끼 같은 이사님을 위해 한 번만 더 해드리는 거예요! 잘 보세요, 원작자의 아우라를!”
리카가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 아타시(나)?”
“형 형 형 형 형 형 형 형!”
민경섭이 헐레벌떡 달려와 성필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에, 와타시(나)?”
“아앗! 저 따라 하지 마세요!”
“소오(그래), 아니키(형)!”
“경섭 오빠가 일본어를 제대로 썼다?!”
“빨리 와서 저거 봐요!”
민경섭이 성필을 끌고 현관문으로 갔다.
현관문은 유리로 되어 있다. 하지만 안에선 밖이 보이고, 밖에선 안이 안 보인다.
민경섭이 PEOPLE 네온 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서양인 세 명이 있었다. 남자 둘, 여자 하나의 조합이었다.
“오, 외국인이 여기까지 관광 온 거야? 케이팝 관광이 정말 있는 거였구나.”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저 사람들 러시아인이잖아요! 이건 커다란 이념적 문제가 될 수 있어요! 국정원에 이념의 순수성을 증명해야 할 수도 있다고요! 민간인 사찰을 당할 거라고요!”
“너 아직도 그래? 이젠 컨셉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솔직히 질리는데.”
“컨셉이 아니라 진짜 걱정된다고요오오오오!”
“저 사람들이 어떻게 러시아인이라고 확신해? 내가 봤을 땐 미국인 같은데.”
민경섭이 현관문을 열었다.
“흐어로쇼(멋지다)!”
민경섭이 문을 닫았다.
“러시아인 맞잖아요!”
“저게 러시아어라고 어떻게 확신해?”
“형 그냥 내 말에 반박하고 싶은 거죠?!”
“저건 러시아어가 확실해요!”
선글라스를 낀 리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러시아인 스쿨 아이돌이 ‘하라쇼’라고 말하는 걸 봤어요!”
“스쿨 아이돌은 뭐야?”
성필이 눈을 빛냈다. 그러자 리카는 왠지 모르게 성필의 기대를 배신하는 거 같아서, 살짝 움츠러든 채 말했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거예요…….”
“너 죽을래?”
“이게 그렇게 잘못한 건가요?!”
“형, 이건 정말 조심해야 해요! 숨소리도 내지 말고 이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추억을 만들어드려야겠어요!”
리카가 목줄 풀린 강아지처럼 뛰쳐나갔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민경섭이 비명을 내질렀다.
리카는 약 2분에 걸친 팬서비스 끝에 회사 안으로 돌아왔다.
“SNS에 게시하지 않는단 조건으로 사진을 찍어드렸어요! 이제 저희가 해체할 때까지 떠나가지 않으실 팬 세 분을 확보했어요!”
리카가 음흉하게 미소 지으며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영원히 아타시(저)의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하실 거예요! 그런데 경섭 오빠는 왜 주무시나요!”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그때 성필의 폰이 울렸다.
홍보팀 강지혜에게서 온 것이었다.
“경섭아, 리카 ‘에, 아타시?’ 챌린지 좀 찍어줘. 아까 건 장난이었으니까, 제대로 된 카메라랑 장소 준비해서 찍어 올려.”
“……장난? 그럼 이때까지 저를 가지고 논 건가요! 나쁜 사람! 개구리 똥! 독재자!”
“그럼 부탁할게.”
“경섭 오빠 어서 일어나세요! 기절해봤자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요! 정신 차리고 현실과 맞서세요!”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성필은 2층으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강지혜는 기다리고 있던 듯 일어나 성필에게 용건을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성필은 ‘음…….’ 말을 줄였다.
강지혜가 낮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이사님께 배운 필승의 설득 전략을 썼는데도 안 먹혔어요…….”
소녀연맹은 입생로랑의 ‘르 스모킹’과 꼼데가르송의 ‘타공 패턴’에 영감을 받아 첫 주차의 메인 무대의상을 만들었다.
이엔 입생로랑과 꼼데가르송에 양해를 구했다.
턱시도와 구멍 뚫린 패턴엔 저작권이 없으니, 양쪽에서도 긍정적인 답이 돌아왔다. 영감을 받았음을 알려준다면 좋을 거라면서 말이다.
그에 가로 엔터가 역제안을 했다.
“공식 SNS 계정에 올려달라는 제안이 거부…… 당하는 건 뭐, 어찌 보면 당연하죠.”
그들 입장에서 소녀연맹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스타이다. 고작 요청 한 번, 설득 몇 번으로 SNS 계정에 소녀연맹의 의상을 게시해줄 리 없다.
명품 브랜드의 SNS 계정은 고도의 프로모션 전략하에 관리된다.
당사(當社)의 브랜드 이미지와 맞고, 홍보하려는 스타의 격이 높으며, 또한 문제가 없을 때.
그제야 스타가 사측의 옷을 입으면 리스펙트를 표하며 SNS에 게시해 주는 정도다.
앰배서더도 아니니, 팝스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부족한 소녀연맹을 SNS에 올릴 가능성은 없겠지.
“한국 지부 계정도요?”
“예, 그렇다고…….”
음, 으음.
성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셨어요.”
“예, 감사합니다.”
강지혜는 우울한 기색이었다.
성필은 그녀가 처음으로 손혜빈에게 자율적인 일감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어바이비 그리고 후쿠요 히다카와 연을 맺게 된 건 강지혜 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바이비를 설득하고 수많은 난관을 헤친 강지혜가, 이 순간 우울해하고 있다.
그녀도 ‘송 포 피플’에 걸린 책임의 무게를 아는 것이다. 게다가 텔레비전 프로모션이 죄다 막히게 생겼으니, 이 일 하나라도 꼭 따내야 한다며 고군분투했겠지.
성필은 그녀를 두고 가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지혜 씨, 마음 쓰지 마세요.”
“하지만…….”
“어차피 안 올려줄 수 없을 거예요.”
소녀연맹이 컴백하고, 그 파급력을 보게 된다면.
“그쪽에서 알아서 게시해 줄걸요?”
강지혜는 ‘그럴까요?’라고 물으려다, 관두었다.
‘송 포 피플’ 컴백 준비는, 홍보팀인 그녀로선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레거시 미디어도.
웹 미디어도.
뉴미디어도.
전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소녀연맹과 거리를 두었다. 그나마 예외는 케이블 음악 방송국인 HPT 정도일까.
이런 상황에서, 홍보팀 강지혜는 매일 매일이 절망이나 다름없었다.
가로 엔터의 모두가 소녀연맹의 성공을 위해 전진하는데, 홍보팀만 손발이 잘려 응원밖에 할 게 없으니까.
“죄지었어요?”
“……네?”
뜬금없는 질문에 강지혜가 고개를 들었다.
절망적인 상황과는 전혀 다르게,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은 성필이 보였다.
“그래요, 그렇게 고개 올리고 다녀요. 죄지은 것도 아닌데 고개는 왜 자꾸 숙여요? 걱정하지 마요. 이 타이밍이 지나가면, 퇴근할 새도 없이 바빠질 거예요.”
성필은 격려하려는 듯 강지혜의 어깨를 손을 가져가, 려다가 부자연스럽게 멈추었다.
그리고 고장 난 것처럼 손을 이리저리 옮기더니, 이윽고 그녀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경쾌한 딱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지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이사의 앞임에도 풋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샌가 걱정이 모두 사라졌다.
“네, 일 많이 주세요. 기다릴게요.”
소녀연맹, 컴백까지 D―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