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69화 (669/760)

669화

KS 엔터 주주총회.

총 300석의 컨퍼런스 룸엔 서늘한 눈빛의 주주 혹은 투자사·기관 대리자들과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단상 위엔 회장 문규완의 대리로 최고 운영 책임자인 구유한이 중앙에서 살짝 가외에 자리했다.

이어서 사업부의 중역들과 프로듀싱 총괄 정호환, 매니지먼트 총괄 남홍범이 양측에 있었다.

“최고재무책임자(CFO) 강한섭입니다.”

그는 KS 엔터 창사 이래 최고 실적에 대해 언급했다. 지지난 분기의 것이었다.

KS 엔터의 당기순익은 올해 1분기에 하락을 기록했다가, 2분기에 반등했다.

“케이어스가 앨범 활동을 마치고 투어에 돌입하면 또다시 최고 실적을 기록할 걸로 예상됩니다.”

강한섭 CFO는 일부 주주들이 제안한 배당금에 관한 경영진의 생각을 피력했다.

“배당에 관해선 시기를 미뤄주셨으면 합니다. 경영진을 믿고 표를 주신다면, 믿음에 대한 훗날의 보답과 함께 케이어스 친필 사인 앨범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농담이었다.

농담이었는데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강한섭만 억지로 웃었다.

그가 매니지먼트 이사 남홍범을 흘끗 쳐다보았다. 남홍범이 일어나 그 대신 단상 중앙으로 나왔다.

“자사(自社)와 아티스트들의 노력에 힘입어 얻어낸 초국적 성과는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경영진은 본격적으로 해외 시장 공략에 나설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시작은 케이어스입니다.”

남홍범이 케이어스의 해외 진출을 위한 계획들을 읊었다. 해외 진출 전략이라지만, 그 전략은 미국에 한정되어 있었다.

“세계 최대의 에이전시인 AMC와 케이어스가, 케이팝 아티스트 최초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웅성거림이 사방으로 번졌다.

남홍범은 주주들이 놀랄 시간을 충분히 준 후 이야기를 이어갔다.

“또한 3대 글로벌 유통사 중 하나인 스피너 뮤직과도 배급 계약을 맺은 상황입니다. 유통·마케팅·프로모션에 대하여 글로벌 파트너십을 체결하여, KS 엔터의 부족한 글로벌 영업력을 보충하였습니다. 스피너 뮤직의 회장님은 글로벌 뮤직 장르로 성장한 케이팝 아티스트 중 첫 번째로 케이어스와 계약하게 되어 영광이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또한 케이어스가 세계적인 그룹으로 성장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씀도 전하셨습니다.”

남홍범의 말솜씨는 굉장히 유려했다.

하지만 목소리 안엔 스스로만 알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남홍범이 리모컨을 조작하자 스크린의 화면이 바뀌었다.

“이게 그 첫 번째 지원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스트리밍 플랫폼들인 애플 뮤직과 스포티파잉.

그 두 플랫폼의 글로벌 버전 메인 리스트에 케이어스가 걸렸다. 남홍범은 메인 리스트가 걸린 다른 이들도 차례로 보여주었다.

“아시겠지만, 케이어스를 제외한 네 명 모두 영국과 미국의 팝스타들입니다.”

주주들이 또다시 놀라움을 내비쳤다.

글로벌 배급사·에이전시와 계약했다. 물론 그 두 개 모두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처음엔 이런 반응이었다.

케이팝 그룹들 중엔 저러한 유통사·에이전시와 계약한 사례들이 있었다. 하지만 크게 체감이 될 정도로 홍보면에서 도움이 되진 않았었다.

“어떤 의미인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제가 굳이 한 말씀 더 올리겠습니다.”

남홍범이 심호흡하고, 아까보다 견고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은 진심입니다. 이들은 진심으로 케이어스를 톱 아티스트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 이유는, 저희 KS 엔터도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수차례 깜빡였다.

“언론 플레이용으로 ‘월드 스타’ 같은 닳아 빠진 이름을 붙이려는 게 아닙니다. 진정으로 세계를 상대로 케이팝을 팔 겁니다. 이게 저희 진심의 성과입니다.”

빌보드 월드 앨범 차트 1위.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한 주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105만 장이니 당연했다.

“그리고 또.”

빌보드 200 차트 10위.

일주일 동안 미국에서 열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

역대 케이팝 걸그룹 중 1위 기록이다.

‘그 소녀연맹을 누르고서, 1위다.’

KS 엔터의 힘을 전력 투사했음에도 미국에서 작년 소녀연맹과 비슷한 성과를 냈단 건 속이 쓰리긴 하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이미 아시아권을 제패한 케이어스가 서양권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지표로서, 의미가 있다.’

시작은 성에 안 차지만, 당장 다음 앨범만 해도 이와 비교할 수 없을 성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매니지먼트는 구멍가게 수준에서는 어린애들 뒤치다꺼리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KS 엔터쯤 되면 세계를 상대로 하는 장사판이 된다.

소녀연맹처럼 운으로만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성과를 낸다. 이번에야말로 가로 엔터는 체급 차이란 걸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외에도 케이어스의 성공을 나타내는 수많은 지표들이 있었다. 남홍범은 그 차트의 이름들을 술 쉴 틈 없이 전부 읽어댔다.

“케이어스의 3년 6개월. 절반에 도달한 시점에서 이룬 성과입니다.”

남홍범이 능글맞은 미소를 보였다.

“저희는 미국을 너무너무 좋아하시는 어떤 분처럼 맨땅에 헤딩하려는 게 아닙니다.”

주주들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SMS 엔터의 강성욱 대표를 언급한 것이다. 그가 과거 SMS 엔터의 일 년 영업익과 보유 자금을 전부 태우면서 도전했던 미국 진출의 실패를 비꼬는 말이었다.

“이건 꿈이 아닙니다. 실재입니다. 앞으로 더욱더 엄청난 걸 보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주주님들이 보고 계시는 이 꿈은 공짜가 아닙니다.”

그제야 아까 강한선 CFO가 ‘배당금 지급을 미뤄달라’고 했던 것의 의미가 밝혀졌다.

KS 엔터는 돈을 써야 한다. 다신 오지 않을지도 모를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꿈엔 값이 필요합니다. 주주님들이 지불하신 값은 현재의 가치를 훨씬 뛰어넘을 겁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미래에 손에 쥐게 되셨을 때, 그때야말로 진정으로 웃으시게 될 겁니다. KS 엔터는 이보다 훨씬 더.”

더.

더.

더.

“더, 위로 올라갑니다.”

표결이 시작됐다.

대주주들은 배당금 지급에 전부 반대했다.

소액 주주 중 일부는 찬성했으나, 반대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이후로도 수 시간 총회가 이어졌다.

총회가 이어지는 동안 기사가 끊임없이 나갔다.

KS 엔터의 주가는 장 마감까지 10% 상승했다. 기사를 보고 산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다. 총회에 참석한 이들이 더 매수한 게 대부분이었다.

총회가 끝나자 임원들은 서로 웃으면서 악수한 후 각자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정호환과 남홍범은 진이 다 빠져서 세단 뒷좌석에 탔다.

남홍범이 담배를 빼 물며 운전수에게 말했다.

“회사.”

“예.”

차가 출발하자 남홍범은 담배를 빨았다. 10초도 넘게. 그리고 뱉어내자, 그의 눈동자가 젤리처럼 흐물거렸다.

“죽는 줄 알았네…….”

“수고했다.”

“수고는 씨. 난 잠깐 일어나고 걷기라도 했지, 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기만 했잖아. 허리 안 아프냐?”

“아파. 너 ‘아시겠지만’이란 말 20번도 넘게 쓴 건 알아?”

“내가? 아…… 그랬던 거 같기도 하네.”

남홍범은 계속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스프레이를 잔뜩 뿌렸던 헤어스타일이 전부 망가졌다.

“너 이 뒤에 일 있어? 오랜만에 내 집 와서 술 마실래?”

“형수님이 싫어하시지 않겠어?”

“걔가 널 왜 싫어해. 나보다 널 더 좋아할 수도 있어.”

남홍범이 킬킬 웃으며 말하자 정호환은 쓴웃음만 머금었다. 남홍범은 다시 정색하곤 담배를 빨았다.

“일 있구만. 뭔데?”

“……친구.”

“뭐?”

“친구, 만나러 가.”

“이야, 아직도 내가 네 친구 중에 모르는 사람이 있어? 누군데, 나도 좀 보자.”

“나도 30년 만에 만나는 거야.”

“설마…… 대학 때 첫사랑 같은 거야? 으아, 큰 거 온다.”

“첫사랑은 무슨. 난 여보야가 첫사랑이야.”

남홍범이 연기를 들이마시다 말고 거센 기침을 토해냈다. ‘여보야’란 말은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암튼, 그래. 야, 나 방금 재밌는 거 떠올랐다? 구유한 이사 우리집에 데려가볼까?”

“1시간 만에 사색이 될걸.”

“난 30분 본다.”

“아무튼 오늘은 안 돼.”

“알았어 야. 그 친구잖아.”

“……그 친구?”

“너 질질 짜면서 회사 돌아왔을 때 만났다던 그 친구.”

30년 정도 전 일이다. 정호환은 답지 않게 창피함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너, 기억하냐?”

“기억하지. 자장면에 눈물 뚜욱 뚜욱 흘려대는 걸 어떻게 잊어?”

“하아 씨…….”

“얼레리꼴레리, 호환이 또 운대요.”

“하지 마라.”

“흐즈 므르.”

운전수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어안이 벙벙했다.

둘을 동시에 모시는 건 처음이었기에 이런 상황도 처음이었다.

저게 정말 KS 엔터의 정상에 앉은 사람들인가?

* * *

총괄 프로듀서 집무실.

문 앞에 총괄 프로듀서 본인이 서 있다.

정호환은 손에 배어나온 땀을 재킷에 닦았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문고리를 잡고, 돌리고, 당겼다.

문이 열리자 그가 보였다.

“오.”

남태섭.

그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정호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움직임이 매우 어색했다.

정호환은 문을 연 채로 멈췄다.

아주 잠깐의 정적 끝에, 정호환이 문을 닫은 후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이윽고 정호환은 남태섭과 가까이서 마주 보았다.

정호환은 남태섭의 차림새를 훑었다. 펑퍼짐한 상의와 기장이 길어 신발까지 덮는 바지. 머리칼 한올 한올이 반달처럼 휘어 어지러운 펌헤어.

“태섭, 아.”

“어, 호환이.”

정호환은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서울의 전경을 보여주는 통유리로부터 비쳐 들어온 태양 빛이 시야를 흔들었다. 그 빛 너머의 남태섭은 30년 전과 똑같이 보였다.

똑같다.

그때의 투명한 눈동자도. 그 눈동자 안에 담긴 순수한 열망도.

다른 점이라면 입술과 귀를 채웠던 피어싱이 없어진 정도였다. 그래서 옛날보다 훨씬 순박한 인상의 남태섭을 보고, 정호환은 과거로 돌아온 것만 같아서, 그만 눈가를 적셨다.

“넌 진짜 옛날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구나…….”

“너야말로, 재수 없는 양복쟁이 스타일 그대로네. 사람이 이렇게 지독하게 안 바뀔 수도 있구나 그래.”

“넌 옷이 그게 뭐냐? 여전히 하나도 안 어울려…….”

“하하.”

남태섭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유 없이 모은 손을 비비는 모습에서 초조함과 어색함이 느껴졌다. 그는 꽤 오랫동안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에 도착하기 전부터 준비한 말이지만, 직접 꺼내려니 용기가 나지 않는 말.

그걸 입 밖으로 내려 필사적이었다.

“네가…….”

남태섭이 말했다.

“네가, 옳았다.”

“아니야. 나는 그냥…….”

남태섭은 정호환의 말을 듣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정호환의 눈은 유리창으로 다가가는 남태섭을 쫓았다.

남태섭은 유리창 앞에 서서 아래를 보았다.

수십 층 위에서 본 서울의 전경이다. KS 엔터 사옥의 정점에서 보는 서울의 풍경은, 정호환이 30년간 쌓아온 피, 땀, 눈물을 증명하는 듯했다.

“말은 필요 없어. 여기서 밖을 보기만 해도, 누가 옳았던 건지 바로 답이 나오잖아.”

“…….”

“빠순이들이나 광적으로 숭배하고, 소아성애자들한테 앨범 팔아먹는 저질 문화……. 아마, 그런 식으로 말했었지.”

정호환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걸 아직도…….”

“미안하다. 남이 좋아하는 걸 함부로 헐뜯으면 안 된다는 너무 당연한 예의를, 난 시간이 훨씬 더 지나고야 배웠어.”

정호환은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곧 득의양양한 표정을 꾸며냈다.

“사과 받아줄게.”

“고맙다.”

“세월이란 게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구나. 반항밖에 할 줄 모르는 애가 대학 교수가 됐다지?”

“그러게나 말이다. 머릿속이 먹물로 꽉 찼던 네가 예술가로 일가(一家)를 이루다니.”

둘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제야 둘은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다음 목표는 아메리카냐?”

“이거, 친구가 아니라 기자가 왔네.”

“케이어스를 좋아하거든. 미리 알고 싶다.”

“미국밖에 없지.”

세계 음악 시장 규모 1위.

“일본은?”

“성공하면 알아서 반응할 거야. 지금은 미적지근하지만, 곧 반응이 오겠지. 케이팝이 자리 잡은 나라니까.”

90년대와 00년대의 제이팝이 아시아를 제패했었던 것처럼. 그리고 제이팝이 별다른 홍보 없이도 아시아 각지에서 소비되었던 것처럼.

“아메리카면, 영어로 곡을 낼 셈이냐?”

“그래야겠지.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 깔보는 게 얼마나 심한지 몰라.”

“우리나라도 세계 1위 돼봐. 지금도 차별이 만연한데, 그땐 더하겠지. 미국이야 원래부터가 힘세고 돈 많은 야만인들 나라였고. 그런 데서 어떻게 숨 쉬듯이 위대한 예술가들이 나오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이해할 수 있었으면, 어느 나라든 미국처럼 했지 않겠어?”

“호환이 너, 모르는 건 아니지?”

남태섭은 걱정을 담아 말했다.

“미국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데가 아니야. 불러 줘야 갈 수 있는 데야.”

“알아.”

“……그래,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네가 30년 앞을 보고 이 자리에 앉은 것처럼, 다음 30년도 네 머리 안에 들어 있단 거 안다. 기대하마.”

정호환이 낮게 끅끅 웃었다. 남태섭은 어안이벙벙해서 물었다.

“내가 뭐 웃긴 말 했던가?”

“아니, 네 말 들으니까 알겠다.”

“뭘?”

“내 밑에 애들이 왜 그렇게 날 신처럼 떠받드는지.”

30년 전.

척박하기 그지없는 토양에서 현재의 기적을 일구어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정호환은 왕이며 신이다.

“그래, 기대해라.”

그가 정한 다음 정복지는 미국이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 * *

새벽 1시.

성필은 가로 엔터 바깥 테라스에 앉아 밤하늘을 보았다.

달이 좋다.

전생과 비교하여 유일하게 달라지지 않은 것 중 하나다. 태양도 있긴 하지만, 태양은 볼 수 없다.

그래서 달이 좋다.

처음 그걸 인식한 건.

‘리카랑 낙산 공원에 놀러 갔을 때.’

연습생 시절의 일이다.

지금은 왜 리카와 낙산 공원으로 놀러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리카가 놀고 싶다고 졸라서가 아닐는지.

함께 달을 바라보며 리카가 했던 말은 기억난다. 일본어로 ‘달이 아름답다’고 했었다.

그때 성필은 생각했다.

‘어, 그러게. 정말 아름답다.’

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묘한 향수까지 자극하는 은은한 빛이었다.

그 달을 보고 있으면 전생이 떠오른다.

전생의 성필도 최고의 아이돌을 만드는 게 꿈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리는 최고의 아이돌이란 한 가지 정형화된 형태가 아니었다.

‘다키스트도, WTP도, 케이어스도 있었어.’

그 외에 저마다의 ‘최고’를 장식했던 수많은 아이돌이 있었다.

판매량이 높다고, 음원 성적이 좋다고, 콘서트 수익이 많다고, 어떠한 숫자가 높다고 최고의 아이돌이 아니다.

누군가의 마음속엔 어떤 아이돌이 최고였고, 최고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

성필은 그러한 셀 수 없는 최고의 이유를 섞고 또 섞어, 형용할 수 없는 최고의 아이돌상(像)을 그려냈었다.

그러다 보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최고의 아이돌은 모든 그룹의 장점만을 섞은 거라서, 현실엔 존재할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지 않냐고 말할 수 있다.

비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필은 꽤 심각했다. 만약 최고의 아이돌을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며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까?

감히 답을 내릴 수 없는 고민이라, 전생의 성필은 그 고민을 마음 한편에 던져두었더랬다.

그러나 30살로 돌아오고 나선 그럴 수 없었다.

당장 하나의 가장 명확한 목표를 설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성필은 그 목표를 정했다.

‘미국.’

팝(POP)의 본고장.

가장 거대한 음악 시장이자, 전 세계를 자국 시장의 영향권 안에 둔 위대한 문화.

팝의 제국은 지구 전역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통한다면 그게 곧 최고라는 증명이 될 수 있다.

팝스타를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케이팝 아이돌은 동양인일 거고, 한국말을 쓸 테고, 영어를 쓴다고 해도 팝을 소비하는 미국인들에겐 꺼림칙하게 다가올 거고, 뭣보다 미국은 퍼포먼스를 감상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

가장 큰 문제점은, 아이돌 인더스트리의 기본 구조가 미국인들이 혐오하는 체제란 것이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여 만들어낸 산업의 결과물. 따라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미국에서 성공하는 게 대단한 것이다.

‘웨벡스의 미사토 본부장님은 팝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데 부정적이셨지만.’

성필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 생각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의 성공은 성필이 붙잡을 수 있던 유일한 최고의 단서였다. 결코 놓을 수 없다.

미사토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 말을 납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니까 내 목표는 곧.’

팝에서의 성공이다. 따라서 그건 곧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아이돌을 만들어낸단 뜻이다.

꽤 오래 전부터 언론이 남용하여 싸구려 이미지가 붙어버린 ‘월드 스타’란 단어를, 진실로 체현시키는 게 성필의 구체적인 목표가 됐다.

목표가 정해졌다.

가장 큰 난관을 없애야 한다.

미국인들이 혐오하는 케이팝 인더스트리의 문제점. 케이팝 아이돌은 자아 없는 인형이란 비판에서 자유로워야만 한다.

그걸 타파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아이돌을 아티스트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 아티스트십을 키워낸다.

‘세 번째야.’

세 번째 ‘우리들의 프로듀싱’이다.

인민이들은 소녀연맹의 진심을 받아들인다. 그녀들의 고뇌와 고충, 고난을 진심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녀들의 꿈을 응원한다.

그런데 이 마음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질까.

소녀연맹이 정말 인형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마음이, 언젠가 모두에게 닿는 날이 올까.

“이사님.”

성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장하양의 목소리였다.

“어.”

한 박자 늦게 대답하고 옆을 보았다.

‘검은 바다’를 입은 장하양이 있었다. ‘후쿠요 히다카’ 패션쇼 이후 처음이었다.

천사는 악마도 두려워할 만큼 무섭게 생겼고. 악마는 모든 인간을 유혹할 만큼 아름답다고 한다.

그 표현에 따르면 장하양은 악마였다.

흐린 달이 뜬 밤 아래에 매혹적인 어둠을 휘감고 성필을 유혹하기 위해 나타났다.

“……뭐야?”

성필이 얼빠진 목소리로 답하자, 장하양은 만족했는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하라 디자이너님이 보내주셨잖아요. 쓸 때까지 썩이고 있기 아까워서, 입어봤어요.”

성필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소녀연맹 멤버들은 보이지 않았다. 성필의 얼빠진 모습을 촬영하여 놀림감으로 삼으려 한 줄 알았다.

“어떤지는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돼요. 충분히 봤어요.”

“어떤지 말하고 싶은데, 하면 안 돼?”

“사라지는 것으로 저를 표현하지 마세요.”

말로 아름다움을 묘사하지 말라는 뜻이다.

성필이 느꼈을 미(美)에 대한 경탄을 가슴에 품고, 영원토록 잊지 말라는 소리다.

“애들은?”

“돌아갈 준비하고 있어요.”

“몇 시지?”

“한 시 넘었어요.”

“오래 있었네. 나도 준비해야겠다.”

“쉬고 계세요. 내려오려면 시간 좀 걸려요. 애들이 언니 옷 갈아입히기 놀이했거든요.”

“그러면 더 쉬어도 되겠네.”

“덥잖아요. 들어가시는 편이 낫지 않나요?”

“괜찮아. 달을 보고 싶어. 하양이는 들어가.”

“저도 달 볼래요.”

둘은 함께 달을 보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성필이 입을 열었다.

“하양이는 설하나 아라랑 다르네.”

“어떤 점이요?”

“불안해하는 걸 본 적이 없어.”

‘우리들의 프로듀싱’ 첫 타자인 백설하는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조아라조차 성필에게 몇 번이나 하소연할 정도였다.

본인의 이름을 건 책임이란 그토록 무겁다.

“애들이 제일 사색이 됐을 때가 언제인 줄 알아?”

“언제인데요?”

“시작할 때랑 컴백 직전이야.”

시작할 때는 제작비를 보고 놀란다. 컴백 한 번 하는 데 이렇게나 돈을 쓰냐면서 말이다.

수억, 수십억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면 식은땀을 줄줄 흘린다. 물론 그녀들이 제작비를 결재하진 않는다.

단지, 성필은 보라고 한다.

너희들의 상상을 현실로 불러오는 데 필요한 금액이라고.

컴백 직전에 사색이 되는 건 뭐, 성필도 그렇다. 오늘은 ‘만조상해원경(萬祖上解寃經)’을 들으며 ‘나무아미타불’을 외웠다.

홍규헌은 그걸 보고 ‘세례도 안 받았는데 냉담자(천주교에서 일시적으로 신앙에 적극적이지 않게 된 신자를 일컬음, 유령회원 같은 것)가 됐네’라며 웃었더랬다.

그저께는 십자고상을 쥐고 기도했으니.

“그런데 하양이는 불안해하는 걸 본 적이 없어.”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티 낼 정도로 고통스럽지는 않아요.”

“왜?”

“박 이사님을 믿으니까요.”

장하양이 주먹을 들었다.

“이사님의 디렉팅을 믿어요. 곡도, 안무도, 뮤직비디오도, 의상도, 무대 연출도, 퍼포먼스도, 수십 번이나 반려하셨지만 결국엔 전부 컨펌해주셨어요. 이사님의 눈에 보기 좋아서잖아요. 고통은 반려당할 때 전부 느꼈죠.”

성필이 그녀와 주먹을 맞추었다.

“고통스러웠어?”

“얄미웠어요. 이사님의 머릿속엔 선명한 비전이 있으셨잖아요. 처음부터 말씀해주시면 좋았을 텐데,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 않으시잖아요.”

“비전이 있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성필이 하고픈 대로 명령하면 시간이 훨씬 단축될 텐데.

“낭비가 아니야. 왜냐하면, 현재의 형태는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완벽하고 아름답거든. 혼자 그린 세계가 완벽할 수 있는 건 그림, 조각, 소설, 시 정도라고 생각해.”

장하양이 어렴풋한 미소를 띠었다. 달빛처럼 은은하지만 태양처럼 강렬했다.

“자기가 못 하는 걸 다른 사람이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못 하는 걸 내가 할 수 있다. 그거죠?”

“잘 배웠네.”

“누구 아이돌인데요.”

“응.”

“이사님의 아이돌이에요.”

“굳이 되짚을 필요 없어.”

“완벽…….”

장하양이 말끝을 흐렸다.

“아직 확신이 없는 파트가 하나 있어요.”

“뭔데?”

“제 가사예요. 다른 모든 건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쓴 가사만큼은 안 돼요.”

“다들 좋다고 했어.”

“제가 납득할 수 없는데요?”

“혼자 생각하고 혼자 만들고 혼자 납득하는 사람은 자기완결적이지만, 불완전한 거야. 스스로 맺고 끊어졌단 건 다른 것과 맺어질 수 없단 거니까. 하양이는 올발라.”

“확신이 없는 가사로 무대에 오르는 건 떨려요. 두렵기까지 해요.”

“선물 줄까?”

장하양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손을 내밀었다.

“보이지 않는 선물이야.”

“설마 ‘믿음’은 아니죠?”

“…….”

“아하하, 제일 받고 싶은 거였어요. 어서 주세요. 어떻게 주실 거예요. 어깨를 빌려주시면 두려움을 눈물로 바꿔서 흘려보낼게요.”

“너 화장했잖아 비비지 마!”

성필은 폰을 꺼내어 ‘송 포 피플’ MR 버전을 재생했다.

“불러줘. 내가 듣고 평가해줄게.”

“이미 수백 번도 더 들으셨잖아요.”

“이게 최종 평가야.”

장하양은 입술을 비쭉 내밀며 삐친 티를 냈다. 하지만 자신의 파트가 다가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허리를 꼿꼿이 펴고 노래할 준비를 했다.

그녀는 성필의 눈치를 보며, 혹여나 듣는 사람이 있을까 봐 작은 목소리로 노래 부르듯 랩 했다.

싱잉 랩.

“지켜보고만 있지 마

함께 춤추고 노래하자

오 아직 내키지 않아?

알겠어 알려줄게

사람들이 내 곁에 있는 이유

돈 자랑은 안 해

자랑 안 해도 보여

재능의 부유함이

물론 아니야 얼굴만은

센 척하고 욕하지 않아도

건강한 몸과 올바른 마음

이걸로 충분히 아름다워

자 이제 네 사랑을

아주 조금 떼어줄래?

그게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보여줄게

오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 빨리 와

사람들과 쭉 기다렸어, 환영해.”

폰에서 나오는 자그마한 음악과 함께 랩을 하려니 도저히 분위기가 안 살았다.

장하양은 괜스레 창피해져선 옅게 웃었다.

“옷이 날개인 것처럼, 아이돌한텐 무대가 날개인 가 봐요. 컴백 무대에선 이것보다 훨씬 나을 거예요.”

“이것보다 더 나으면 어쩌려고?”

“네?”

“정말 나일강이 범람해버려…….”

장하양은 눈을 끔뻑이더니, 아까보다 더 환한 미소를 띠었다.

“감사해요. 정말로 믿음이 생겼어요.”

장하양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장 좋은 곡과, 가장 좋은 퍼포먼스, 가장 좋은 옷, 가장 좋은 뮤직비디오, 무엇보다 멤버들의 마음이 있어요. 제가 바라는 모든 게 있으니까, 반드시 닿을 거예요.”

그때 가로 엔터 안쪽의 불이 전부 꺼졌다. 동시에 남은 멤버들이 문을 열고 나왔다.

“에엑?! 하양 언니 아직도 옷 안 갈아입으셨나요! ‘검은 바다’는 숙소까지 들고 가면 안 된다구요!”

“아하하, 미안. 갈아입고 올게.”

“아, 하양 언니 때문에 귀가 시간 늦어졌다. 아저씨, 언니한테 뭐라고 해줘요.”

“싫은데?”

“편애 맞다니까…….”

“꼬우면 ‘우리들의 프로듀싱’ 또 하든가.”

“어, 시켜줘요. 이제 감 잡았어요. 얼마든지 시켜요. 내가 바로 가로 엔터 신사옥 지어줄게.”

“다음은 아타시(나)얏!”

장하양은 웃음을 흘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그녀가 사라지자 백설하가 물었다.

“하양이가…… 힘들어하죠?”

아마 장하양이 성필에게 고민 상담을 했으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성필이 고개를 저었다.

“기대하고 있어.”

오히려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3’에서 힘들어했던 건 다른 멤버들 쪽이었다.

가사를 짜내느라 온갖 고생을 했으니까.

장하양이 힘들어했다면, 멤버들에게 작사를 억지로 맡겼다는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장하양은 힘들어할 수 없다.

모두의 고뇌를 등에 지고, 그녀들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장하양에겐 결의가 있다.

또한, 기대한다. 그녀는 자신이 쌓아온 노력에 대해 한 점의 미혹도 없으니까.

장하양은 노력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쌓은, 아니. 가로 엔터의 모두와 함께 쌓아온 노력의 가치를 이렇게 표현했다.

‘하늘에 서겠다, 고 했지.’

소녀연맹은 땅에서의 지루한 여행을 끝낼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 걸음마부터 시작한다.

땅을 거니는 모두를 내려다보면서.

소녀연맹 컴백 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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