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75화 (675/760)

675화

3대 기획사 중 하나인 YJS.

회장 집무실.

수족관을 연상시키는 넓은 방은 은은한 빛이 사방을 감싸는 형태였다. 빛이 있지만 어둡다고 표현하는 게 어울렸다.

매니지먼트 총괄은 나선형의 벽면을 따라 걸으며 회장에게까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선반에는 KS 엔터 정호환처럼 책이나 서류도. SMS 엔터 강성욱처럼 자사 아티스트들이 얻은 트로피나 상패도 없었다.

선반에는 프라모델, 유명 스포츠 선수의 사인이 담긴 용품, 전설적인 뮤지션이 사용했던 역사적인 악기, 팝스타와 회장이 같이 찍은 사진 등등.

그의 취향을 듬뿍 반영하는 물품밖에 없었다.

“회장님.”

매니지먼트 총괄이 부르자 프라모델을 만지작거리던 회장,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영등포와 마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단 뜻이었다.

이준호는 다시 프라모델로 눈을 돌렸다. 니퍼가 부품을 하나씩 떼어냈다.

매니지먼트 총괄이 입을 열려고 할 때, 이준호가 먼저 서두를 뗐다.

“소녀연맹이요, 한 100만은 쉽게 넘었겠어요.”

“예?”

“방해만 안 받았어도요.”

“아…….”

“뭐랍니까?”

매니지먼트 총괄은 현재 상황을 전했다.

가로 엔터는 완벽한 피해자 포지션이 됐다. 그리하여 가해자들에게 이목이 모이고, 대중이 칼을 들고 그들을 찢어발기는 중이다.

전면에 나선 가해자, 즉 소녀연맹을 다분히 악한 의도로 패싱시킨 방송국들은 전전긍긍하는 중이다.

그렇기에 허락을 구했다.

“소녀연맹의 음방 출연을…… 늦었지만 잡아도 괜찮냐고요…….”

더는 버티기 어렵다고 한다.

“명분이 의상 심의 규제였으니, 2주 차부터 출연시키는 걸로 하면 지금은 수습할 수 있다고…….”

“그러라고 하세요.”

“아.”

매니지먼트 총괄이 안심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매니지먼트 총괄이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떠나려던 순간.

“그, 누구죠? 소녀연맹이 지금 들어가려면 누구 출연이 취소되어야 하잖아요.”

“당연히 저희 소속은 아닙니다.”

“저희 애들로 해요.”

이번에야말로 매니지먼트 총괄은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이준호가 버릇대로 더듬거렸다.

“그, 이번에 데뷔하는 애들 있지 않나.”

YJS 엔터의 전략은 다른 기획사들과 사뭇 다르다. 이준호는 몇 년 전부터 본인의 프로듀싱 능력을 외부로 꾸준히 투사해왔다.

즉, YJS 엔터와 하등 관련 없는 걸그룹들을 이준호 본인이 투자하고 프로듀싱해왔단 것이다.

그와 동시에 YJS 엔터는 다른 기획사를 인수하든, 새로 레이블을 세웠든, 산하에 수많은 기획사와 레이블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의 대형 유통사와 WTP의 소속사가 하고 있는 일을, 이준호는 몇 년 전부터 꾸준히 해왔던 것이다.

엔터 업계의 힘은 미디어가 아닌 콘텐츠에, 즉 뮤지션에게 있다.

있게 될 것이다.

이준호는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미디어의 힘이 지금보다 훨씬 강할 때부터 간파했다.

그리하여 이준호의 힘이 닿는 뮤지션은 양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준호가 일컫는 ‘데뷔하는 애들’이란, YJS 엔터 산하 레이블의 아이돌을 일컬었다.

“걔들 빼라고 해요.”

“이…….”

매니지먼트 총괄은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이번에 무대에 못 서면, 최소 6개월은 기다려야 다음 음방에 나올 수 있을 텐데요……. 데뷔가 6개월이나 밀리는 겁니다, 회장님…….”

“알아요.”

“그리고 또…… 가로 엔터는 알 겁니다. 하필 빠진 게 저희 산하 레이블이면, 저희가 방해했다는 게…….”

“알아요.”

“예?”

“안다고요. 그리고 저쪽에서 알라고 하는 거예요.”

“……정말, 인수하실 겁니까?”

가로 엔터를?

“예.”

“그런 거라면, 굳이 미디어 출연을 다시금 허락해줄 이유가 있습니까? 부러뜨린 소녀연맹의 날개를 다시 달아주는 거잖습니까.”

“이미 할 만큼 했어요. 또, 유통사 반응은 그대로일 테니까요.”

기획사는 음원 유통사를 거쳐 음원을 발매한다. 대중들은 신경 쓰지 않지만, 음원 유통사는 식당으로 비유하면 식재료를 공급해주는 곳이다.

식당 손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부분이란 뜻이다.

“유통사조차 소녀연맹을 안 도와줬어요.”

미디어 프로모션이 오른손이라면 유통사 프로모션은 왼손이다. 소녀연맹은 양손이 잘린 상태로 전장에 나섰다.

특히 유통사 프로모션은 겉으로 드러나진 않으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평균적으로 한국 음원 차트 TOP100 안에 든 곡의 50%가량이, 한국 최대 유통사인 야자수 뮤직의 곡이다.

크기에 걸맞은 영업력과 홍보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유통사들은 물밑에서 기획사의 성공을 돕는다.

그런데, 소녀연맹은 계약한 유통사에게마저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아니.”

이준호는 ‘유통사가 소녀연맹을 안 도와줬다’는 표현에서 어폐를 느꼈다. 그리하여 바로 수정했다.

“제가 못 돕게 한 거죠, 네.”

야자수 뮤직이 평균적으로 차트 TOP100 안의 50%를 유통한다.

그리고 YJS 엔터의 자회사 중 하나인 음원 유통사는 평균적으로 TOP100 안의 10% 지분을 차지한다.

이준호에게는 정말 다행히도, 한국은 사업에 관대한 편이라 미국처럼 산업 독점 규제가 빡빡하지 않다.

YJS는 음반 회사이자 매니지먼트 회사이며 에이전시면서 음원 유통사인 동시에 퍼블리셔이기도 하다.

YJS의 다면적인 힘이 이번 일을 가능하게 했다.

“그냥 그쪽이 저희에게 조금이라도 겁을 먹으면 성공한 거예요.”

이준호는 아까 소녀연맹이 초동 100만을 넘었을 수도 있겠다고 말했었다. 만약 방해만 안 받았어도, 반드시 100만을 넘었을 것이다.

가로 엔터는 피눈물을 흘리겠지.

그리고 이 일을 획책한 이들에게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움과 경계심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희 레이블 애들을…….”

“어차피 소녀연맹 밀어낼 구실 주려고 예정보다 빨리 꽂은 거였잖아요.”

“…….”

“그,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거니까. 별로 상관없지 않나?”

매니지먼트 총괄은 시선을 내리깔더니, 허리를 공손히 숙이고 물러났다.

그가 나서자 이준호는 프라모델을 놓고 생각에 빠졌다.

‘……아주 조금 겁을 먹은 수준이 아닌가?’

음방은 절반이 고사됐지, 예능 출연은 아예 없지, 그 흔한 아이튜브 채널들에마저 출연할 수 없게 됐지.

거기에다가 한편이라고 믿었던 유통사 프로모션 채널까지 전부 끊겼으니…….

‘아니면, 이 정도가 딱 좋나?’

채찍으로 한 번 후려쳤으니 다음은 당근을 내밀 것이다. 절대 거절하지 못할 막대한 금액을 제시하여 소녀연맹을 사들일 예정이다.

야자수 뮤직이나 WTP의 소속사가 가로 엔터를 사들이려 했을 때 제시한 쩨쩨한 금액과는 비교도 안 될, 아주 큰 금액으로.

만약 그걸 거절한다면 머리가 나쁘거나, 감정이 이성을 압도했거나 둘 중 하나다.

걱정은 딱히 안 된다.

한국 땅에 발붙이고 있는 이상, 언젠간 굴복할 수밖에 없을 테니.

* * *

미국 뉴욕.

김덕팔은 눈앞의 변호사를 생기 없는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만약 수십 년 동안 단련해온 사회적 기술이 없었다면, 그는 진즉 무표정이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저도 한때 뮤지션을 꿈꿨습니다.”

아직도 히피 패션을 잊지 못한 중년의 백인 남자는 선글라스를 쓴 채 신나게 이야기했다.

“기회가 왔죠. 드디어 기회가 온 겁니다. 매우 강력한 음반 제작자인 스미스 씨에게 제 레코드를 들려줄 기회가 온 겁니다. 저는 소중히 데모를 만들어 그에게 가져다주었죠. 그는 제 음악을 듣곤 미소를 짓더군요. 저도 웃었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음반을 발매하셨나요?”

“스미스 씨가 저에게 말씀하시더군요. ‘개럿 씨, 로스쿨에 진학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라고요.”

‘개럿 씨’는 크게 웃더니 책상을 쾅쾅 두드렸다.

“예, 그래서 하버드 로스쿨로 갔습니다. 뮤직 비즈니스 학위도 땄고요. 저는 음반 산업 규모가 현재보다 40%나 더 거대했던 1990년대부터 변호사로 활동했습니다. 이제 저를 믿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로스쿨에 갔다.

뮤직 비즈니스 학위가 있다.

오랫동안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 짧은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김덕팔은 1시간 동안 그의 탄생부터 학창 시절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이곳에 온 순간부터 신뢰는 있었습니다.”

김덕팔이 과거의 인연에게 소개받아서 온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 인연이 말하길, 뮤직 비즈니스를 시작하고 싶다면 변호사부터 찾으라고 했었다. 김덕팔의 생각과 일치했다.

미국은 한국처럼 회사 하나가 모든 업무를 종합하여 해결할 수 없다. 한 산업 안에서의 독점이 법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매니저, 에이전트, 개인 매니지먼트 관리자 등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첫 번째는 변호사라고 한다. 변호사는 다른 직종보다 아티스트에게 소모해야 할 시간이 적다.

즉, 변호사는 그 누구보다 많은 업계인을 만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럼, 일 이야기를 해볼까요?”

드디어.

개럿이 본론에 들어갈 듯하자 김덕팔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개럿은 흔히 ‘구글 시계’라고 불리는 타임 타이머를 꺼내더니 1시간을 맞춰두었다.

“일단 가치 청구(시간당 요금)를 하겠습니다. 만약 정식으로 계약이…….”

“계약이 맺어지면 비율 청구, 예. 저도 압니다.”

김덕팔이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가 변호사님의 시간을 사는 거니, 쓸데없는 말씀은 삼가주십시오. 비율 청구처럼 요금에 관련된 걸로 시간을 뺏는 건 앞으로 가만히 보지 않겠습니다.”

개럿이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김덕팔을 진정시키려 했다.

“쓸데없는 말씀이 아닙니다. 비율 청구에 관해 말씀을 드린 건, 제가 ‘소녀연맹’과 제발 부디 계약하고 싶어서입니다. 미래의 파트너가 되고 싶어서요!”

“소녀연맹을 아십니까? 자세히?”

“클라이언트의 정보를 알아보는 건 기본이죠. 1시간 동안 제 이야기를 들려드린 건, 저에게 친밀감을 느끼시길 바라서였습니다. 아, 솔직히 말씀드려서, 감격스럽군요.”

“감격이요?”

김덕팔은 아까 자신이 한 말을 거의 잊어버렸다. 쓸데없는 말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다더니, 본인이 먼저 묻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아는 걸 자신만 모를 순 없는 노릇이니.

“‘WTP’와 ‘인티머시’가 화제가 되고, 제 지인 중에 그 둘 중 하나를 맡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럽더군요. 정말 기본적인 도움만 주고서도 돈을 쓸어가니, 부럽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정말 기본적인 정보.

이는 미국의 엔터계 종사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사실을 뜻한다.

허나 한국 사람들은 자세히 모르는 정보일 터다. WTP는 세계 음악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는 거대 시장, 미국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첫 번째 탐험가이니까.

기본적인 정보들조차 절실했겠지.

“저에게도 그런 기회가 왔으니, 꼭 붙잡고 싶지 않겠습니까.”

“소녀연맹이 그 정도로…….”

그리 물으려던 김덕팔이 고개를 저었다.

‘소녀연맹은 이미 업계 톱이나 마찬가지야.’

이런 반응에 익숙해져야 하리라.

“물론 아직은 그 정도가 아니죠. 놀랍긴 해도, 미국에선 뭐랄까 미지근한 수준……. ‘진짜’ 센세이션이 아니죠.”

약 줬다가 병 주는 건가?

대단하다고 했다가 미지근한 수준이라니.

“그러니까.”

개럿이 격정적으로 말했다.

“끓여야죠, 100도로!”

“할 수 있습니까?”

“저야 못 하죠!”

“…….”

“하지만 도와줄 친구분들을 압니다. 김 씨도 그 친구분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거 아닙니까? 말해보세요, 어디와 계약하고 싶습니까?”

개럿은 손가락을 하나씩 펴며 말했다.

“세일 유니버설? 스피너 뮤직? 말씀만 해보세요. 반드시 최고의 조건으로 계약을 성사시키겠습니다. 눈물과 함께 스러진 제 뮤지션의 꿈을 걸고!”

“초동 판매량을 아십니까? 빌보드 200의 기준처럼 일주일간의 판매량을 뜻합니다.”

“알고 있죠 물론.”

“계약하자마자 음반 광고를 걸어줄 기업이 있겠습니까?”

“언제 신보를 발매하죠?”

“발매한 지 4일이 지났습니다.”

“제정신입니까? 어떤 기업이 발매한 지 4일이 지난 앨범을 공들여 광고를 걸어준단 겁니까?”

“소녀연맹은 100만 장을 꼭 찍어야 합니다. 상징이 필요해요.”

“으하하! 정신이 나갔군요!”

* * *

나흘 전부터 정호환은 퇴근하면 폰을 꺼두었다. 폰이 켜지는 건 출근하여 집무실 책상 앞에 앉은 후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 소녀연맹의 반응이나 살피고 있을 듯해서였다.

정호환은 하루하루 쇠약해지고 있었다.

“…….”

출근하여 집무실에 자리 잡았다.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온갖 감정이 순식간에 머리로 들이차서, 도저히 생각다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 혼란을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혼란을 지우고 나면 짙은 우울함이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정호환은 흉물이라도 집듯 폰을 들었다.

‘제발.’

세상은 연신 소녀연맹의 기적에 대해 떠벌리고 있다. 그 기적은 정호환에게 있어선 재앙이었다.

이 재앙이 한시라도 빨리 끝나길 빌었다.

‘오늘만큼은 제발.’

케이어스는 꿈이다.

정호환 혼자만의 꿈이 아닌, KS 엔터가 세워졌을 때부터 모두의 꿈이었다.

그 꿈은 약 30년 전에 생겨났으나, 약 4년 전까지 명확한 실체조차 없었다.

KS 엔터의 꿈은 회사의 이름을 빌려, 30년의 세월을 걸쳐 명확하게 드러났었다.

‘우리의 꿈이 망가지지 않기를.’

정호환은 30년의 세월을 반추했다.

첫 번째 목표는 한국 내수시장 제패였다.

아이돌이 컴백할 때마다 ‘애플뮤직 몇십 개국 차트 1위’라는 기사가 흔히 나오곤 한다. 혹은 ‘글로벌 송 차트 몇 위‘라던가.

보통 한국인들은 그걸 보면 별다른 감상이 없다. 믿지 않거나, ’그 나라 사람들은 들을 것도 없나‘라며 지나갈 뿐.

허나 정호환은 그런 걸 볼 때마다 감격한다. 당장 한국이 30년 전까지 그런 나라들과 같았다.

자국의 노래만으로 차트를 빽빽이 채우는 나라는, 한국인들에겐 매우 놀라운 사실이겠지만, 매우 드물다. 전 세계 백수십 개국 중 20개국이 안 된다.

대부분은 음악적으로 문화 식민지가 되었다.

‘내 첫 번째 꿈은, 미디어 기술의 폭발적인 성장에 대항하여 한국을 문화적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

성공했다.

‘두 번째 꿈은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것.’

정호환이 일본을 공략하겠다고 할 때 모두가 비웃었다. 당시 제이팝은 아시아를 제패했었고, 그때도 세계 음악 시장 규모 2위를 차지했었다.

그런 곳에 조악하며 허름하기 그지없는 노래를 들고 가서 어떻게 하겠냐며, 사람들이 조롱했었다.

그런데.

‘성공했다.’

다음 꿈은 아시아 제패였다.

그때는 사람들이 비웃지 못했다. 점잔 떨며 힘들지 않겠냐고 몇 마디 툭 던질 뿐이었다.

성공했다.

‘다음은 서양권.’

음악의 문화적 영향력으로 순위를 나눈다면, 10위 안엔 일본을 제외하고 모두 유럽의 국가들과 미국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 한국이 진입했다.

여기까지 30년이 걸렸다.

‘내 다음 꿈은 미국.’

케이어스는 최후의 요새를 향한 비장의 무기였다. 그 무기는 국내의 모든 경쟁자를 순식간에 도태시키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발목이 잡혔다.

소녀연맹에게서.

정호환의 인생과 KS 엔터의 꿈을 건 집약체, 케이어스가 실시간으로 추월당할 위기에 놓여 있다.

아니, 일정 부분 추월당했을지도 모른다.

뮤직비디오 조회 수와 글로벌 음원 성적에서 보이는 영향력은,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를 추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한 가지만은 포기할 수 없다.

팬의 숫자를 나타내는 지표.

‘판매량.’

정호환이 떨리는 손으로 소녀연맹의 초동 판매량을 검색했다.

시야가 울렁거린다.

눈을 부릅뜬다.

나흘째의 판매량을 읽는다.

“하.”

정호환이 힘 빠진 웃음을 뱉었다.

그가 폰을 양손으로 붙잡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이돌의 초동 판매량은 보통 첫째 날 판매량에서 평균 50% 수준으로 증가한다.

이는 오랜 세월의 경험이었다.

가끔 그 법칙에서 엇나가는 이들이 있지만, 가끔일 뿐이다. 그룹의 성격과 특색에 따라 달라지지만, 크게 고려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소녀연맹이 그런 특이한 그룹으로 보였다. 나쁜 쪽으로가 아니라, 좋은 쪽으로.

“감사합니다…….”

정호환은 연신 감사를 전했다.

괴물처럼 연일 자체 커리어 하이를 경신하던 소녀연맹의 판매량이, 드디어 꺾였다.

100만.

정호환이 지닌 최후의 심리적 저항선이었다.

“감사합니다…….”

소녀연맹은 100만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엔터테인먼트는 이미지의 세계다.

케이어스에겐 어느 이미지가 필요하다.

올해는 케이어스의 해가 되어야 한다. 아니, 케이어스의 해가 될 것이다.

걸그룹 최초 밀리언셀러에 등극하고, 그 영향력을 해외로 투사하게 될 영광스럽고 기념비적인 해가 된다.

그곳에 다른 그룹이 설 자리는 없다.

밀리언셀러라는 명예로운 호칭은 오직 케이어스에게만 허락될 것이다.

정호환은 미리 감사를 전했다. 어느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면, 부디 이 감사를 듣고 자신을 어여삐 여겨주길 바라면서.

“감사합니다…….”

* * *

변호사 개럿이 호탕하게 웃었다.

“4일이 지났습니다 4일! 광고를 아무리 해봤자 며칠 만에 몇만 장을 더 팔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

김덕팔이 테이블 위에 올라온 타임 타이머를 다시 0분에 맞추어두었다.

삐빅, 삐빅, 삐빅.

시간이 모두 지났음을 의미하는 알람이 울리고, 김덕팔이 일어섰다.

개럿이 당황했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 말하며, 김덕팔은 속으로 홍규헌에게 사과를 전했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계약을 달성하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만.’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 걸린다 하더라도 고작 며칠이겠지만 말이다.

‘이 변호사의 말이 맞아. 어느 회사가 방금 계약한 뮤지션을 위해 곧장 광고를 달아주겠어. 게다가 앨범을 발매한 지 며칠이나 지난 시점에서 말야.’

음악 광고란 건 엄격한 스케줄의 세계다.

비유하자면 자리가 정해진 현수막이다. 그곳엔 차례가 있고, 차례를 무시하며 자신의 현수막을 달 순 없는 노릇이다.

김덕팔이 바라는 건 그러한 몰염치이자, 달성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삽질이었다.

하지만.

‘이 삽질에 시간을 쏟아보고 싶다.’

김덕팔은 아이돌들의 앨범 판매량 추이를 굉장히 많이 분석해보았다. 그렇기에, 오늘 소녀연맹의 판매량을 보곤 낙담했다.

이 기세면 어떤 변수가 있지 않고서야 100만 장을 넘기지 못한다.

물론 그 변수가 갑자기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김덕팔은 운에 기대고 싶진 않았다.

만약 변수가 끼어든다면, 그 변수가 자신이 만든 것이길 바랐다.

‘고작 3일의 삽질이야 사장님도 용서해주시겠지.’

변호사 개럿의 말마따나 이건 정신 나간 생각이다. 그럼에도 김덕팔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변호사를 찾아가도 비슷하게 말할 것이다.

어쩌면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사기꾼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사기꾼일지라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멘탈리티부터 달라.’

유통사를 향해 찔러보기라도 할 사람이 필요하다. 사소한 프모로션이라도 얻어낼 수만 있다면, 혹시 아는가?

그 나비의 날갯짓이 기적을 일구어낼지도.

“개럿 씨, 만나 봬서 반가웠…….”

“지금 바로 작업에 착수해볼까요?”

갑자기 개럿이 말을 바꾸었다. 그의 얼굴은 당혹인지 모를 것으로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가 일어나 김덕팔의 손목을 붙잡았다.

“저 개럿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방금은…….”

“자, 바로 가봅시다! 개럿 렛츠 게릿(Garrett let’s get it)!”

개럿이 말을 바꾼 이유가 있었다. 그는 김덕팔이 맨정신을 가진 인간인 줄 알았다.

‘근데 제정신이 아니야.’

제정신이 아닌 인간도 많이 상대해보았다.

아무렴, 30년 넘게 뮤직 비즈니스 업계의 변호사 짓거리를 해왔는데!

이런 인간들을 상대하는 법이야 정해져 있다.

‘현실을 보여주는 거지.’

그래? 발매한 지 며칠 지난 앨범에 광고해 줄 회사를 찾는다고? 절대 못 찾는다.

하지만 개럿은 회사들을 설득할 것이다.

그 광경을 보여줄 것이기도 하다.

물론 안 되겠지만.

‘뭐, 내가 노력했단 건 알 테니.’

그거면 충분하다.

현실에 낙담한 김덕팔을 위로하며 현실적인 계약 조건을 검토하면 될 터다.

물론, 그의 모든 노력은 시간당 700달러로 계산된다. 지금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

김덕팔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최선을 다한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자, 먼저 기본 계약 조건들을 검토해봅시다!”

“뭔가 수가 있습니까?”

“예?”

“제가 가려고 하니 막 던지는 공수표가 아닙니까?”

개럿은 검지로 턱을 긁었다. 그러다 말했다.

“‘카오스’.”

“예?”

카오스.

케이어스를 뜻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의 등장에 김덕팔이 당황했다. 그걸 본 개럿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었다.

“최근 스피너 뮤직과 계약을 맺었다죠? 그럼 정해졌군요! 그 계약에 배 아파하고 있을 상대를 찾아가면 성공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라이벌을 찾자는 뜻이다.

세계 3대 유통사 중 하나인 스피너 뮤직이 케이팝 그룹과 계약을 맺었다면, 그 그룹엔 수익성이 있단 뜻이다.

그러니 케이팝에 관심을 기울이는 다른 경쟁자들도 있을 터다.

“짐작 가는 쪽이 있습니까?”

“스피너 뮤직과 같은 거인, ‘레버 레코딩’입니다.”

마찬가지로 3대 유통사 중 하나.

“찔러봅시다. 친구의 소식에 괜히 배 아프지 않냐고.”

[Girl’s League(소녀연맹) ‘Song for PEOPLE’ Official MV]

발매 96시간(사흘째).

[조회 수 87,000,0**]

8,700만 회.

[Song for PEOPLE

워터 멜론 일간 차트

1일 차: 13위

2일 차: 4위

3일 차: 1위

4일 차: 1위]

[소녀연맹 ‘송 포 피플’ 초동 기록

1일 차 판매량: 532,8**장

2일 차 판매량: 199,1**장

3일 차 판매량: 100,8**장

4일 차 판매량: 57,0**장

누적 판매량: 890,6**장]

케이어스 ‘헬리오스’의 84.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