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95화 (695/760)

695화

신아름이 깜짝 놀라 장하양을 쳐다보았다.

장하양은 ‘왜 사장님이 성필의 정장을 맞춰주냐’고 말했었다. 신아름은 거기까진 생각이 뻗어가지 못했었다.

그러고 보니 진짜 이상하다. 신아름과 장하양이 말한 두 경우 모두 말이다.

성필이 맞춤 정장을 만들러 테일러샵을 가는데 홍규헌이 따라갔단 것도 이상하다.

홍규헌이 성필에게 맞춤 정장을 만들어주러 둘이 함께 테일러샵을 갔단 것도 이상하다.

둘 다 이상하다.

어째서?

[사장님 오빠분 뵈러 가기로 해서.]

예상하지도 못했고 상상하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자고로 납득이 되는 답이란 질문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사장님 오빠분 뵈러 간다’는 답 뒤엔 무수한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납득이 안 된다.

[아, 근데 사장님. 사장님의 오빠분을 부르는 호칭이 따로 있어요? 부인은 사모님, 자식은 자제분, 남편은 부군이라고 하잖아요.]

[누가 사장의 남편을 부군이라고 불러. 무슨 판타지 세계에서 왔어? 오빠는 뭐어, 오빠분이겠지.]

[그게 맞는 거 같긴 한데…… 아. 암튼 사장님 오빠분 뵈러 가기로 했어.]

“그, 그거랑 정장이 무슨 상관이에요?”

[잘 보여야지.]

그러니까 왜?

그냥 원래 입던 옷을 입고 가면 안 되나?

이렇게까지 복장을 신경 쓰다니 꼭 상견례라도 하는 것 같잖은가.

“상견례라도 하시는 거예요?”

장하양이 짓궂은 웃음과 함께 물었다.

신아름은 속으로 ‘이거지!’를 외쳤다. 묻고 싶었으나 결코 물을 수 없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글쎄, 상견례라고 해야 하나.]

웃음기 가득했던 장하양의 표정이 쩌적 갈라졌다. 그녀의 얼굴에서 봄이 사라지고 앙상한 가지만이 만발한 겨울이 찾아왔다.

마른 눈발이 흩날렸다.

“박 이사님, 연애 금지의 맹약은요……? 연애는 안 하지만, 약혼은 한다는 말씀이셨어요……? 그런 중세 성직자들 같은 편법이 통할 거 같으세요……?”

신아름은 성필의 언행에 당황하는 순간에도, ‘편법이 안 통하면 어쩌려고?’란 의문이 떠올랐다.

[그 뜻이 아니고. 상견례는 통상적으로 양가 식구가 모이는 자리잖아. 나한테는 통용될 수 없는 단어 아닌가 해서…….]

장하양이 할 말을 잃고 입을 뻐끔댔다. 자기도 모르게 패드립을 쳐버렸다.

언어가 되지 못한 목소리가 ‘어어, 어어’ 같은 소음이 되어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저 있잖아요!”

신아름이 급발진했다.

“저 데리고 가면 되죠! 지금 비행기 타고 갈까요? 앞으론 스케줄 없어요!”

[고마워 아름아…….]

“비행기 표 끊으란 뜻 맞죠?!”

[박 이사, 언제까지 얘기하려고?]

[아.]

성필의 뒤로 재단사가 다가와 있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때였다.

성필이 급히 답했다.

[일단 상견례 아니고, 그냥 식사 자리야. 우연히 뵀는데 초대받았어. 오빠이시니까 동생이 어떤 사람이랑 일하는지 궁금하시겠지. 그게 다야. 미안, 이만 끊을게. 항상 고마워 얘들아.]

“아, 알라뷰…….”

뚝.

신아름이 성필에게 ‘미 투’란 답을 듣지 못하고 전화가 끊겼다.

그녀는 카메라 앵글에 들어오기 위해 장하양과 어깨를 딱 붙이고 있었다. 그녀는 전화가 끝나자마자 장하양에게서 떨어져 침대에 힘없이 손을 짚었다.

“그냥 초대……? 그냥 식사에 초대받는데, 같이 정장을 맞추러 가? 사장님이 원단까지 골라주고……?”

하나부터 아홉까지 다 거짓말이다.

그 안에 든 유일한 하나의 진실은 성필이 홍규헌의 오빠를 보러 간다는 것뿐이겠지.

신아름이 이를 빠득 갈았다.

“인정 못 해…….”

“그런 거 아니라고 하셨잖아.”

“언니는 믿어요?”

“믿어.”

장하양은 성필이 웬만해선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을 안다. 특히 자기 보신을 위해 거짓말하는 인간은 결코 아니다.

소녀연맹이 최고의 아이돌이 될 때까지 연애하지 않겠단 맹약은 여전히 지켜질 것이다(최고의 아이돌이 될 때까지가 아니라 소녀연맹 7년 계약 종료 때까지임).

그러니 성필이 홍규헌의 오빠에게 식사 초대를 받은 건, 정말 별 뜻이 없는 일이리라.

아마 정장은 홍규헌이 맞춰주는 것이겠지만, 직원 상여금 같은 게 아닐까 짐작한다. 성필은 이번 소녀연맹의 프로듀싱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으니 말이다.

“난 안 믿고, 인정 못 해요. 최소한 이번에 팀장님이 사장님네 오빠를 뵙는 게 정말 식사 자리라고 해도…….”

그냥 평범한 식사 자리라고 해도…….

신아름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꽤 오래도록 찾지 못했다. 그 단어는 감히 자신의 사장에게 품을 만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의 바다를 떠돌던 신아름의 정신은 이윽고 정답에 다다랐다. 입 밖으로 내는 게 불경하게 느껴져서,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탐탁잖아.’

신아름은 홍규헌이 탐탁잖았다. 성필이 홍규헌과 함께 그녀의 오빠를 보러 가는 상황이 탐탁잖았다.

“애초에 사장님이 팀장님한테 호감이 없으면 저렇게까지 해주시겠어요? 7살 어린애를 끌고 와도 사장님이 팀장님한테 관심 있으신 거잖아요. 그러면 안 된다고요!”

“……왜?”

장하양이 순수한 궁금증으로 되물었다.

단순히 연애 금지의 맹약 때문은 아닌 듯했다.

“사장님은 골초에 알코올 중독자니까요!”

놀랍게도 매우 합리적인 반대 이유가 나왔다.

신아름은 장하양을 설득하려는 듯 열렬했다.

“뭐가 됐든 중독자는 평생의 반려로 적합하지 않아요! 니코틴 중독, 알코올 중독, 음란물 중독, SNS 중독, 커뮤니티 중독, 마약 중독 다 똑같아요! 아무런 노력 없이 손가락 까닥하고 손 흔들고 숨 쉬고 마시는 것만으로 너무나 쉽게 쾌락을 얻어온 인간들 정신 상태가 어떻겠어요? 도파민 신경이 너덜너덜할걸요? 뭐든 빨리빨리, 참고 버티지도 못하고 다그치는 거나 할 줄 알겠죠! 애를 어떻게 키우겠냐고요!”

이젠 양육 문제까지 넘어갔다.

“자기 자신도 통제 못 하는 인간이 어떻게 타인을 배려하며 평생 살겠어요! 남이 자기 맘대로 안 되는 걸 1년이라도, 1분이라도 버티겠어요?”

장하양은 신아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라보다가, 신아름을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그녀의 등을 세심하고 따스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신아름은 방언 터진 듯 계속 말을 쏟아냈다.

“저는 그야 사장님을 존경해요! 멋진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치만 사장으로 좋은 사람이랑 팀장님 배우자로 좋은 사람은 다른 거잖아요!”

“맞아 아름아. 아름이 말이 맞아.”

“가장 힘들 건 팀장님이에요. 평생이 얼마나 괴로우실까…….”

대체 얼마나 먼 미래까지 상상하고 있는 걸까.

솔직히 장하양은 신아름이 무서웠다. 대체 신아름의 마음속에서, 성필의 배우자는 얼마나 완벽한 인간이어야 하는 걸까.

아니, 신아름의 배우자가 될 인간은 어떨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상일까?

“아저씨가 뭐래?”

조아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물음은 나직하여 자칫하면 못 들을 정도로 작았다.

어느새 일상복 차림으로 돌아온 그녀는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두려움과 기대감이 반반씩 차 있었다.

“아저씨가 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못 보셨대.”

“아…….”

조아라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신아름은 왜 또 저래요? 설마 내가 실수 좀 했다고 막 뭐라고 한 거 아니죠?”

“사장님이 팀장님 자빠뜨리려고 해!”

“뭐?!”

장하양은 들리지 않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신아름의 모습은 과거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

장하양은 신아름의 등을 천천히, 부드럽게, 따스하게, 계속 쓸어주었다.

* * *

홍문헌과의 식사 약속까지 성필의 특훈은 이어졌다. ‘재벌집 막내딸 데릴사위가 되었다’ 작전의 요점은 홍문헌의 이상형이 되는 것이었다.

홍문헌이 바라는 이상적인 남성상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사장 홍규헌의 남자 보는 눈을 증명한다.

“오빠는 화장을 직접 해.”

“트렌디하시네요.”

“대학 때 만난 언니…… 부인이 화장해보라고 했거든.”

“그걸 하셨어요?”

홍문헌이 대학에 다닐 때쯤엔 아직도 마초적인 남성상이 대세였었다. 그 시절 화장을 했으면 주변 친구들이 ‘성기를 왜 붙이고 있니?’라며 비웃었을 게 분명하다.

“사모님을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그 얘기가 재밌어. 오빠야가 여드름 흉터로 고민하고 있었거든. 막 고등학교 졸업했으니까. 언니가 그럼 화장해보라고 하니까 오빠야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나한테 코르셋을 입히려고 하지 마라.

코르셋은 사회적 평가 기준의 비유다.

이 역시 그 시절에 말했다기엔 믿기지 않는 언어 사용이었다. 요즘처럼 화제가 되기 전이라, 웬만큼 사회학에 관심이 있지 않고선 들 수 없는 비유였다.

“그러니까 언니가 뭐라고 했냐면.”

제발 코르셋 좀 입어!

“언니가 직접 해줬어. 학을 뗐는데, 뭐 어떡해? 사랑하는 사람이 해준다는데. 오빠야는 그 상황도 로맨틱하게 받아들인 거지. 그땐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랑 30cm도 안 떨어진 거리에서 얼굴을 마주 볼 기회가 생긴 거야. 아주 그냥 피가 미친 듯이 끓었겠지.”

“속는 셈 치고 한 거네요.”

“했더니, 자기도 놀랐다고 하더라. 그때부터 직접 하기 시작했어. 오빠야 집에 있는 화장품들이 산을 이룰걸.”

성필은 공항에서 홍문헌을 보곤 그가 메이크업샵을 다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 직접 하다니, 정말 의외다.

“박 이사도 하자.”

“저한테 코르셋을 입히려고 하지 마세요.”

“입어.”

“네.”

뭐 어쩌겠는가.

사장님이 하라시는데.

이 일은 손혜빈이 맡기로 했다. 퇴근 후, 성필은 엄마손을 잡고 마트에 따라가는 아이처럼 손혜빈과 함께 화장품점에 들었다.

손혜빈은 먼저 화장수와 화장솜, 클렌징 오일과 클렌징폼을 샀다.

“남자는 기본적인 것만 해도 면이 살아. 비비랑 쉐딩이랑 색 있는 립밤, 아이브로우랑 눈썹 정리 도구만 사자.”

“그게 기본이야?”

“기본이지. 먼저 여기.”

손혜빈은 남성용 화장품 코너에 서서 쿠션형 비비를 여러 개 살펴보았다. 그중 하나를 꺼내어 손에 묻힌 후 성필의 볼에 살짝 발라보았다.

“어, 딱 이거네. 이걸로 하자.”

“하나만 해도 알아? 종류 엄청 많잖아.”

“내가 너를 얼마나 오래 봤는데, 알지 그럼.”

“대단하다…….”

다음으로 손혜빈은 세 종류의 브러시와 쉐이딩 제품을 하나 담았다.

“비비를 바르면 얼굴에서 음영이 사라져. 이건 그림자를 넣는 거라고 생각해.”

“음.”

다음은 색 있는 립밤이었다.

성필이 시험 삼아 입술에 발라보니 입술이 평소보다 더 붉게 생기 있어 보였다. 성필은 자신의 그 모습을 보고 실없이 웃었다.

손혜빈도 웃으며 물었다.

“너무 예뻐?”

“아니, 한 이사님이 해주신 말씀 생각나서 그래. 왜 입술 화장품이 붉은지 알아? 사람은 흥분하면 피가 빨리 돌잖아. 입술도 붉어진대. 그래서 입술이 붉은 이성을 보면 더 매력적으로 느낀다고 하더라.”

“과학적인데?”

둘은 쇼핑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갔다.

퇴근 시각이 지나 직원들이 거의 없었다. 웨이퍼센트와 카오틱 에너지를 담당하는 매니저 소수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성필이 감사를 표했다.

“누나, 시간 내줘서 고마워.”

“뭘. 네가 부끄러워하면서 ‘화장 가르쳐줘’라고 하는 거 봤으니 됐지. 진짜 장관이었어.”

“고마워.”

“그래, 꼭 성공하자.”

사장님의 청춘을 되찾아주기 위해서!

성필은 세수하고 와 의자에 경건히 앉았다. 그리고 손혜빈에게 배운 대로 화장했다. 화장이 끝나고 성필은 거울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이게 나……?”

“더럽게 못생겼다.”

성필이 클렌징 티슈로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빨리 이 우스운 몰골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 뒤로도 손혜빈의 강의를 받아 몇 번이나 시도해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내가 직접 해줄 수 있지만…… 그럼 의미가 있나?”

“없지…….”

“나한텐 너무 당연한 거라서 설명하기가 힘들어. 손가락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명하는 기분이야.”

“나도 이해해. 어떻게 프로듀싱하냐는 질문을 들어도, 나한텐 당연한 거니까 설명하기 힘들어. 숨만 쉬어도 성공해버리니 원…….”

“미쳤냐?”

손혜빈이 화장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어. 한두 번으로 익숙해질 순 없으니까.”

“누나는 언제 익숙해졌어?”

“여자들은 어릴 적부터 화장에 관심이 생겨. 오늘 너 같은 짓을 수십 일 동안 반복하면서 창피당하다 보면 잘하게 되지. 이젠 기억도 안 나. 처음 화장하고 학교에 간 날 애들의 얼굴만 기억나고.”

“어땠는데?”

“칭찬은 해주는데, 그 안에 ‘화장 잘했다’는 없었어.”

“저런…….”

그때 화장품을 정리하던 손혜빈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왜?”

“잠시만 기다려! 최고의 스승이 있어!”

헐레벌떡 사무실을 나간 손혜빈은 곧 카오틱 에너지의 막내, 임한결을 데려왔다.

임한결은 성필을 보자마자 잔뜩 굳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누나 설마…….”

“한결아, 얘 화장 좀 가르쳐줄래?”

“제, 제가요? 화장을요? 박 이사님한테요?!”

“같은 남자잖아. 나보다 훨씬 더 잘할 거 같은데?”

“누나 하지 마. 애한테 뭐 하는 거야. 한결아 미안해. 돌아가서 연습해.”

“가르쳐드릴 수 있으면 영광이겠습니다!”

그리 말하는 임한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마치 썩이고 있던 재능을 조명받은 사람처럼, 이 일에 목숨이라도 걸겠단 기개가 느껴졌다.

성필은 감히 그에게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다. 애교를 부탁받은 리카처럼 행복이 만면에 번져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바로 바르지 마시고…….”

임한결은 자신의 얼굴을 예시로 들어 설명해주었다. 그는 화장 초보자가 어떤 고민을 겪는지 훤히 알았다. 설명해주는 것도 딱 성필의 수준이었다.

“처음 하시는 거니까 쉐딩은 목, 콧대, 콧볼, 그리고 눈썹 아래쪽만 해주셔도 충분해요. 이렇게 원을 그리듯이 콧볼에…….”

성필은 임한결의 시간을 빼앗지 않으려 최대한 집중해서 그를 따라했다.

이윽고 화장이 끝났다.

임한결과 손혜빈은 말없이 성필을 쳐다보다가, 이윽고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둘이 성필에게 손거울을 내밀었다.

성필이 놀라서 자신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게 와타시(나)……?”

“네 손으로 했단 걸 못 믿겠지?”

“한결아 대단하다. 진짜 대단해. 화장은 어떻게 배웠어?”

“저어, 저는 어릴 때부터 여자애들이랑 더 친했어서…….”

임한결이 쑥스럽게 웃었다.

“남자애들은 그니까, 저랑 잘 안 놀아줘서, 여자애들이랑 어울리려면 화제도 맞춰야 하고…….”

성필은 사과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어린 나이의 남자아이들은 남성성을 과시하려고 하지 않던가. 그 안에서 남성성을 과시하긴커녕 아예 남자가 아닌 취급을 받았으니, 그의 학창 시절은 어땠을까.

“그러다 보니까 잘하게 됐죠 뭐, 하하.”

“고마워 한결아.”

고민하던 성필은 사과보다 감사가 낫겠다고 판단했다.

“네 덕분에 살았어. 나중에 꼭 갚을게.”

“간단한 건데요 뭐…….”

임한결은 부끄러워하며 손을 내저었다. 부끄러움 속에서도 숨기지 못할 뿌듯함을 드러났다.

아마 화장 기술로 남자에게 칭찬받은 적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네 도움으로, 나는 꼭 성공할 거야.”

“……?”

임한결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지만, 대강 사랑에 관련된 거겠거니 싶어서 그를 응원했다.

“파, 파이팅이에요!”

* * *

“성필아.”

점심시간.

성필과 유하음은 식사를 해결한 후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응?”

유하음은 대답하는 성필을 흘끗 보았다. 성필은 진지한 얼굴로 읽지도 않던 경제 주간지를 탐독하는 중이었다.

유하음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곤 커피를 들이켰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말 아냐?”

“그거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대, 여자는. 여성 호르몬이 늘어나서 피부가 좋아진다던데?”

“남자도 그래. 남자는 남성 호르몬이 늘어나나 보네. 평생 연이 없던 운동을 시작한다거나 성격이 대담하게 변하기도 해. 나도 그랬고. 덕분에 지금 아내 앞에선 창피한 짓을 많이 했었지.”

“너 혹시…….”

성필이 책을 덮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유하음을 노려보았다.

“딴 여자 생겼냐?”

“너 얘기하는 거 너 새끼야!”

“에, 와타시(나)?”

“너 뭐냐? 요즘 왜 그래? 안 읽던 책 읽고, 옷은 더워 죽겠는데 번드르르하게 걸치고 다니고, 또 얼굴에 분 바르는 건 또 뭐야? 누구냐? 어?”

“이 책은 한 이사님이 추천해주셨어.”

“책은 그렇다 치고 다른 건 뭔데?

“다르게 보이긴 하나 보네.”

성필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유하음은 속이 뒤집힐 듯했다.

“뭐, 내가 어떻게 보여?”

“죽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으음, 그렇겠지.”

“그렇겠지……?”

“다들 그렇거든. 자기보다 뛰어난 경쟁자를 보면 기분이 안 좋아진단다 친구야.”

“뛰, 뛰어난 경쟁자……?”

“내가 멋지단 뜻으로 받아들일게.”

성필이 유하음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휴게실을 나섰다. 유하음은 어이가 없어서 당장 2층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졌다.

“저 새끼 진짜 뭐 잘못 먹었나?”

대체 어떤 인간이 성필을 저렇게 바꿀 수 있는 거지? 전 여자친구랑 사귈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유하음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보긴 좋네.’

그래, 친구야.

너도 결혼할 때가 됐긴 했지.

공작의 마지막 날갯짓이다. 마음껏 화려해지렴.

‘결혼하고 나면 그럴 수 없거든…….’

유하음은 침울하게 커피를 홀짝였다.

* * *

준비는 끝났다.

성필은 그간 모든 부분을 단련했다.

홍문헌을 따라 화장을 배웠다.

홍규헌에게는 멋들어진 맞춤 정장을 선물받았다.

한구인의 조언을 받아 경제 이슈는 놓치지 않고 캐치했다.

일주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일간 신문을 완독했다.

홍문헌의 정치적 성향마저도 완벽히 머릿속에 카피했다.

“박 이사.”

“예.”

약속 당일.

두 사람의 홍문헌의 저택 대문 앞에 섰다.

하필 먹구름이 낀 날이라, 그의 2층 저택은 마치 마왕의 성처럼 보였다. 격자무늬 대문 안으로 깔끔하게 꾸며진 정원이 엿보였다.

짧다면 짧은 정원의 길을 지나 현관에 도달하면, 더는 돌이킬 수 없다.

“걱정하지 마. 박 이사는 완벽해. 정말 결혼을 허락받을 수 있을 수준이야.”

“드디어 저희가 인정받는 거네요…….”

“아직은 세뇌 상태 아니야.”

“무슨 소리하시는 거예요 당신?”

“내가 세뇌한 거보다 더 나가면 어떡해? 아예 결혼을 해놨네.”

성필은 뺨을 짝짝 치곤 넥타이를 가다듬었다.

“갑시다, 사장님의 잃어버린 청춘을 되찾으러.”

“그래.”

두 명은 나아간다.

밝게 빛날 미래를 위하여.

* * *

식탁.

가장 상석에는 가장인 홍문헌이.

그 옆에는 아내와 딸이 앉았다.

그리고 그보다 멀리 떨어진 자리에 성필과 홍규헌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레스토랑에 가서야 볼 수 있을 음식들이 펼쳐진 넓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홍문헌이 질문했다. 아주 사소한, 식사의 여흥을 돋우기 위한 스몰토크를.

“요즘 이데올로기로서의 능력주의가 화제로 떠오르고 있지.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석학들, 대니얼 마코비츠와 토마 피케티, 마이클 샌델까지 담론에 참여하고 있어. 확실히 지금껏 생각해본 적도 없는 주제더군. 어렴풋이 느끼곤 있었지만, 역시 학자라고 해야 할까, 그 어렴풋한 느낌을 아주 논리정연하게 주장하고 있어. 특히 학벌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흥미롭더군. 귀족들이 땅과 자신의 가문에 부여된 로망스를 잃어버리고 통치권과 고결함을 증명할 수 없게 되자 대학을 이용하기 시작했단 건, 확실히 민족국가의 발흥과 궤를 같이하지. 현재도 프랑스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인사들의 모교인 파리정치대학의 설립 의의를 알고 있나? ‘고결한 자들은 자신들의 특권과 전통이라는 쓰러져가는 성벽 뒤에 놓인, 눈부시고 유용한 능력과 명성이 따르는 우월함, 그리고 미치지 않고서는 포기될 수 없는 역량으로 세워진 제2의 성벽에 민주주의의 물결은 부딪치고 있다’고, 파리정치대학의 창립자가 창립 의의를 밝혔었네. 참 대단해. 정계를 좌지우지할 대학을 창립한 의의가, 고결하신 귀족들이 계속해서 특권을 유지하게 하기 위함이라니. 심지어 민주주의를 난폭한 파도에 비유하다니! 그렇다면, 귀족이란 이름 대신 파리정치대학 출신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 불과하지. 귀족의 자격 증명은 학벌, 그리고 재력으로 바뀌었지. 귀족을 떠받치는 건 귀족의 신성한 의무나 태생이 아니라 능력주의라는 이름이 되었고. 어떻게든 울타리를 유지하려는 모습이 인상 깊지 않나? 포브스 선정 100대 부자, 그런 게 과거의 귀족 연보처럼 되어버렸어. 모든 성공은 능력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으며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보호받네. 사람들은 돈이 많거나 학벌이 좋으면 무조건 우러러보지. 옛날 귀족을 보는 것처럼 말야. 능력주의는 굉장히 성공적인 이데올로기라, 현대에 그것을 의심하는 자는 없네. 자본주의가 끝끝내 공산주의를 쓰러뜨린 사건이 신화시대의 건국 신화가 되었지. 그래, 재벌은 이름 바뀐 귀족이야. 누구도 귀족의 신화를 의심하지 않아. 그런 귀족들에게 과거보다 현재가 고마운 점은, 옛날의 귀족과 달리 왕의 심기를 한 번 거슬렀다고 목이 매달리진 않는단 거고. 지배자의 적을 지원할 수 있단 것도 옛날의 귀족보다는 낫지. 선택으로 승자의 편에 설 수 있으니, 안 그런가? 현대의 귀족들은 암살과 모략과 반란과 처형과 독살과 선동과 봉기를 대신하여 투표를 택했으니 말일세. 여러모로 이전보다는 낫지. 아, 이거 실례했군. 자네의 의견을 물어보고 싶었는데 계속 내 가치 판단 기준을 알려줄 힌트를 계속 주고 있으니 말일세. 현대의 귀족이라니, 참으로 자의식과잉이 가득한 말 아닌가? 그렇다고 자네가 나의 의견을 무조건 맞춰야 한다는 건 아닐세. 나는 다름을 사랑해.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마녀사냥을 정치적으로 금지한 민주주의의 덕목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나는 밀을 좋아해. 공리주의로 유명한 그 밀이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말했듯, 세상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의 사형에 동의한다고 그 사람을 죽일 권리는 없지.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얻었을 때 다른 모든 사람을 죽일 권리가 없는 것처럼.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말이라도 주의 깊게 들어야 하는 법이야. 그래서.”

홍문헌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곤 푸근한 미소와 같이 되물었다.

“능력주의 담론에 대한 자네의 생각은 어떻지?”

“……네헤?”

성필이 얼빠진 소리로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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