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2화
“좆됐는데.”
홍규헌이 가만히 그리 말했다.
회의실의 모두가 동감했다. 특히 회의실의 말석에 앉은 매니지먼트 2팀 팀장, 유하음이 그러했다.
유하음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내가 메이저 방송은 못 잡아봤긴 한데…… 원래 이렇게 캔슬되고 그래?”
분명 웨이퍼센트가 영입될 때, 민경섭은 웨이퍼센트가 출연할 방송을 줄줄이 읊었었다.
꿈도 못 꾸던 방송명을 듣고 웨이퍼센트 멤버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었다.
민경섭은 유하음과 눈을 맞추지 못하며 말했다.
“출연까지의 텀이 길기도 했으니까, 웨이퍼센트보다 유명한 출연자가 나오기로 하면 캔슬될 수도 있죠. 몇 달의 기한이 있었으니…….”
“웬만한 연예인들은 전부 우리 웨이퍼센트보다 유명하잖아요!”
“그건 맞는 말인데…….”
“맞는 말이라고요?!”
“……출연 일자를 조정하기로 했어요.”
유하음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며칠 뒤에요?”
“몇 주 뒤인데요?”
“앨범 활동 다 끝나갈 때 나가면 무슨 소용이야아아아악! 우리나라에 웨이퍼센트보다 유명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요?!”
“네…….”
웨이퍼센트. 컴백 때 공중파 음방도 자주 출연하지 못했던 그룹이다.
메이저 예능 출연은 꿈속의 꿈이었다.
오히려 멤버들이 나가면 쑥스럽겠다고 할 정도였다. 패널들이 ‘웨이퍼센트의 유빈이라고?!’라며 대본에 쓰인 대로 환영해주면 부끄러워서 얼굴은 들겠냐고 말이다.
“으, 음방은요? 설마 저희 애들도 소녀연맹처럼 기획사 정치질의 희생양이 돼서 출연 못 하는 건 아니겠죠?”
“하음아, 너 말이 너무 거칠어. 사장님 계시잖아.”
성필이 달래자 유하음이 평정을 되찾았다.
민경섭은 목청을 가다듬고 설명을 이었다.
“원래 여섯 개 나가기로 했는데 하나만 취소됐어요.”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나오길래 우리 애들 출연을 캔슬시킬…….”
“PTR―17이 유닛으로 데뷔한대요.”
“꺼흐흑…….”
압도적인 인지도 차이에 유하음이 울분을 삼켰다. 유하음이라도 웨이퍼센트 대신 PTR―17의 유닛을 내보낼 것이다.
“그래도…… 다섯 개라도 나가서 다행이네요…….”
“…….”
“네, 원래 텔레비전은 기대도 안 했어요.”
유하음이 소매로 눈가를 박박 닦았다.
“그래도 유통사들 덕 봐서 아이돌 콘텐츠 채널 같은 덴 갈 수 있겠죠?”
민경섭은 성필의 눈치를 보았다.
성필은 홍규헌의 눈치를 보았다.
홍규헌은 눈을 내리깔았다.
“우리 애들 음원 유통사는 어디에요? 야자수? 늦게 정해진 건 전부 다 우리 웨이퍼센트 애들 데려가려고 해서 그런 거죠?”
음반을 만들 땐 보통 유통 계약을 먼저 맺는다.
그런데 웨이퍼센트는 이례적이게도 컴백이 다 다가올 때까지 유통 계약을 맺지 못했다.
최근에 계약을 성사하여, 오늘 결과가 발표될 참이었다.
“헤헤, 야자수 뮤직이면 좋겠다.”
“레버 레코드요…….”
“어딘데 거긴?”
유하음은 진심으로 몰라서 물었다.
“성필아, 우리나라에 그런 유통사가 있었어?”
“해외 유통사야.”
“해외……?”
“글로벌 3대 유통사라고, 전 세계의 시장을 꽉 잡고 있는 대단한 기업이야. 세계 음악 기업 순위 TOP3 안에 들어.”
“……그래서? 홍보는?”
레버 레코드의 답변 요약.
[ㅎㅎ… ㅋㅋ;; ㅈㅅ!]
레버 레코드는 한국에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들의 한국 시장 음원 점유율은 10% 정도로 높은 편인데, 전부 해외 아티스트의 음원에다 클래식과 재즈 같은 비주류 음악도 다수 섞여 있다.
사실상 케이팝과는 관련이 없다.
“우리나라 공식 아이튜브 채널이 있는데, 원한다면 거기에 올려준대. 구독자 수가 거의 200만 명이야.”
유하음은 폰을 꺼내어 레버 레코드 한국 아이튜브 계정을 검색했다.
실제로 구독자 수가 200만에 육박했다. 그런데 영상들의 조회 수가 전부 1만도 못 넘었다.
죄다 처음 들어본 뮤지션들이다.
“…….”
유하음, 혼절!
그렇게 절망만이 남은 회의가 끝나고, 성필은 긴급히 사장실로 불려 갔다.
홍규헌은 문을 닫자마자 감탄을 섞어 이렇게 말했다.
“좆될 줄은 알았는데 진짜 좆됐는데?”
“사장님, 그런 상스러운 단어는 입에 담지 말아주세요…….”
“YJS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어?”
“원래 유명하지도 않은 그룹이었는데, 틀어막기가 소녀연맹보다 훨씬 수월하겠죠 뭐…….”
“진짜 우릴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그렇다고 했으니까요……. 또 굳이 우리뿐 아니라 과거에도 정치질로 활동이 다 틀어막힌 아이돌들도 있었고요. 폐쇄적인 만큼 부조리하죠, 이 업계는. WTP만 봐도…….”
“말이 안 되잖아 말이! YJS보다 다른 유통사들이 더 큰데 걔네를 어떻게 조종해! 다른 공모자가 끼지 않고서야! 정호환이 박 이사한테 앙심 품고 뭐 한 거 아니야?”
“그럴 분은 아니신데…….”
“그럼 그 위에 회장이?”
“문규완이요? 예전에 여기 오셨을 때 울면서 정호환 이사님이랑 포옹하는 거 보니까 순수하신 분 같았는데…….”
“그건 나도 조금 감동이었어.”
홍규헌이 마른세수했다.
“유하음 팀장을 볼 면목이 없어. 이러려고 데려온 게 아닌데. 유 팀장 말이 다 맞아. 회사들 정치질에 희생돼서 아이돌들만 피해 보고 있잖아.”
“웃긴 건 피해를 보는 게 옛날이랑 딱히 다를 것도 없단 점이에요.”
웨이퍼센트가 옐로 서브마린 엔터에 계속 남아 있었어도 지금이랑 비슷했을 것이다.
“웃으라고 한 말이야?”
“나름 농담이었어요…….”
“재미없어. 하지 마.”
“네…….”
“난 그 애들한테 밝은 미래를 선물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옛날이랑 다를 바 없다면, 여기가 옐로 서브마린 엔터랑 다를 게 뭔데?”
성필은 오랜만에 담배가 간절했다.
옛날엔 프로듀싱에만 집중하면 됐다.
아니, 이것도 소녀연맹이 성장했기 때문이니 좋아해야 할까.
‘좋아하긴 개뿔이.’
성필도 홍규헌처럼 화가 치민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자.”
홍규헌이 품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우린 네임 밸류가 있는 기획사가 아니야. 그럴듯한 아이돌은 소녀연맹뿐이고, 대형 기획사들처럼 이름값만으로는 홍보할 수 없어. 웨이퍼센트의 컴백만으로는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성적만을 거둘 거야.”
십만장벽.
십만 장은 확실히 대단한 기록이다. 하지만 유하음이 표현하길, 그 십만 장은 웨이퍼센트가 개같이 팬사인회를 돌아서 달성한 것들이었다.
‘우린 이번에 팬사인회 개같이 돌리기 전략은 포기했어.’
대신 수집욕과 소유욕을 자극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게다가 이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 웨이퍼센트의 프로모션은 꽤 빵빵한 편이었다.
“그나마 기대할 만한 건 가로 엔터 아이튜브 채널과 위어스 정도겠네요. 매니지먼트와 프로모션에서 막혔으니, 프로듀싱이 성공적이길 바라야겠고요.”
“그렇지. 정말 원론적인 성공 방식이지만,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나…….”
가로 엔터의 웨이퍼센트는 성공해야만 한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목에 칼이 들어오니 확실하게 알겠다.
가로 엔터는 기적 같은 신화를 연달아 써서 거대해지지 않으면, 몇 년 내로 확실하게 죽는다.
그 신화의 첫 페이지가 불살라지기 직전이다.
“어떻게든 웨이퍼센트의 이름을 홍보할 수 있는 방법이…….”
홍규헌은 가진 지혜를 전부 짜내려는 듯 두피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성필도 그녀를 따라 머릿속에서 모든 프로모션 통로를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어떻게든 웨이퍼센트의 이름을.
단 한 번이라도.
세상을 향해 널리 퍼뜨릴 수 있는 방법.
“하아, 안 되겠다. 다시 이사들 모아서…….”
“있어요.”
“어?”
“있어요, 방법. 웨이퍼센트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요.”
“뭔데?”
“정확히는, 웨이퍼센트의 이름이 아니라…….”
* * *
“임시 동맹은 계속되는 거다?”
“그래.”
노아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자장면을 보았다. 한동안 자장면을 응시하던 그녀는 조심조심 포장을 벗겨냈다.
나무젓가락을 완벽한 대칭으로 떼어낸 그녀는 이전과는 달리 허겁지겁 먹지 않았다.
윤상열은 노아가 먹는 모습을 보다가 손에 들린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노아는 윤상열의 기색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질문했다.
“우리 컴백일은 왜 나중인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프로듀싱 2부 부장님의 새로운 차기 그룹 데뷔 때문이지. 간단한 과제에만 매달리는 너는 모르겠지만, 프로듀싱이란 건 정치와 깊은 관련이 있어.”
“모른다.”
“아이돌이 모습을 드러낼 플랫폼의 자리는 한정적이야. 그 자리에 아이돌을 밀어 넣을 수 있는 게 기획사의 중요한 역량 중 하나지. 그리고 그 역량은 회사 내에서 공유한다. 너희 글로브나 유구성이 맡은 차기 그룹, 그리고 석세스 엔터의 다른 아티스트들끼리 밥그릇을 순서대로 차지하게 해야 해.”
“음, 우리가 양보한다는 소리로군. 이해했다. 나는 고지능자니까.”
“사실 어떤 의미에선 인과응보기도 해. 유구성이 들어온 후로 난 프로듀싱 1부 부장이란 직함을 달게 됐지만, 사실상의 총괄 프로듀서직을 계속 수행했거든.”
“인과응보?”
“유구성이 아니꼬워서 일감을 좀 몰아줬지.”
노아가 질렸단 듯 윤상열을 쳐다보았다.
“형도 그걸 바랐고. 맡은 일의 양이 곧 그 사람의 영향력이니. 형이 바라는 대로 유구성한테 일을 좀 많이 줬지. 한 시기에 집중된 형태로.”
“윤 피디의 속이 배배 꼬여서 우리의 컴백이 늦어졌다는 소리로군. 이해했다. 나는 고지능자니까.”
죽여버릴까?
“노아, 내가 KS 엔터로 가지 않은 건 딱히 너희를 소중히 여겨서가 아니야. 예의를 찾아볼 수 없는 그딴 말투를 계속 쓰면 내가 어떨 거 같나? 내가 이런 어리광을 계속 받아줄 사람처럼 보이나?”
“윤 피디가 나 보고 고지능자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따라 하는 거다.”
“그런 말투를 쓰는 인간이 고지능자일 리 없지.”
“일본어로 얘기해보다. 그럼 내가 얼마나 고풍스러운 말투를 쓰는지 안다. 내 언어 지능은 최소 국어과(일본어과) 4년제 대학생 이상이다.”
“…….”
윤상열은 노아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노아는 덜컥 겁을 먹었다.
노아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황급히 변명했다.
“윤 피디는 지금까지 우리를 개나 소처럼 부렸다! 임시 동맹이라지만 아직 우리는 윤 피디를 용서한 게 아니라고!”
“……아니.”
윤상열이 확실치 않단 듯 노아 쪽으로 턱을 까딱했다.
“너.”
“뭐, 뭐다.”
“원래 나한테 반말을 썼던가?”
“……그렇, 다.”
“그렇군.”
윤상열은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그의 조바심을 나타내는 제스처였다.
글로브의 컴백이 밀렸다.
석세스 엔터의 다른 아티스트들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특히 글로브의 후배 그룹의 데뷔일 때문에 컴백 황금 사이클을 양보해야 했다.
글로브의 시간을 이대로 흘려보내는 건 아깝지만, 만반의 준비를 기할 시간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면 썩 나쁜 일은 아닌…….
“피디님.”
문이 열리고 직원이 들어왔다.
“노아를…….”
“노크.”
“예?”
“노크 모르나 노크? 노크 말야 똑똑!”
“아, 죄, 죄송합니다!”
직원은 문을 닫고 나가서 노크했다.
윤상열이 짜증을 담아 들어오라고 했다. 직원은 아까보다 긴장하여 말했다.
“노아를 잠시…….”
“식사 중이다. 무슨 일인데 노아를 데려가려고 하지?”
“손님이 와서…….”
“노아한테? 노아 부모님인가?”
노아를 찾아올 손님이라고 하면 그녀의 부모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윤상열은 자기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아뇨, 그게…….”
손님의 이름을 들은 윤상열과 노아는 동시에 넋을 놓았다. 그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작업실을 나섰다.
윤상열이 씹어 뱉듯 말했다.
“미쳤군. 미친놈인가?”
“어쩔 수 없지 않나. 나 같은 미인을 쟁취하려면 직접 찾아와야지!”
“정문으로 들어온 건 아니겠지?”
석세스 엔터 1층 현관에 그가 있었다. 그는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과 대화하는 중이었다.
“저 모르시겠어요? 저 약간 유명해요. 한때 분홍머리 걔라고 조금 화제가 됐…….”
그는 윤상열과 노아를 발견했다.
아까까지 여유롭게 대화하던 게 거짓말처럼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머리를 손으로 한 번 쓸고는 노아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윤상열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후, 진지한 눈으로 노아를 바라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노아 씨. 저어, 웨이퍼센트의 유빈이라고 합니다. 다름 아니라…….”
“당신의 마음에 불을 지른 건 미안해요.”
“네?”
“하지만 이렇게 회사로 찾아오는 건 너무 무례하다고 생각하다요.”
“……네?”
* * *
에리카의 이야기를 듣고 강동현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 그런 게 가능하다고?”
“네, 저만 가면 바로 고예요.”
“진짜로…… 걸그룹 쓰리톱 그룹의 멤버를 모으는 게 가능해? 가능하다면 화제성은 보장되겠지만, 말이 안 되는…….”
“말이 안 되는 게 문제가 아녜요.”
에리카는 한시도 버릴 수 없단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되게 해야 해요.”
* * *
“노아만 오면 끝이에요.”
성필이 흥분해서 폰에서 에리카의 연락처를 찾았다. 홍규헌은 그의 설명을 듣고도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리카랑 케이어스 에리카, 글로브의 노아를 한 번에 모아서 프로젝트 그룹을 해?”
“제가 에리카 씨랑 노아를 다 설득할 거예요. 그래야만 해요.”
“그, 그래. 그게 실현된다면 대단하겠는데. 거기 어디에 웨이퍼센트가 낄 자리가 있어?”
“있어요. 웨이퍼센트가 제일 중요한 역할이에요. 왜냐하면…….”
* * *
윤상열은 어처구니없단 듯 되물었다.
“노아를 말입니까?”
“네, 넵.”
유빈은 손을 공손히 모으고, 여자친구의 아버지에게 결혼 허락이라도 받듯 허리를 숙였다.
“노아 씨를 섭외하게 해주세요!”
“……하.”
윤상열은 웃음을 터뜨렸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도 그럴 게, 프로젝트 이름이.
“사무라이 걸즈?”
“네에…….”
“메인 기획자, 프로듀서는?”
유빈은 천천히 허리를 펴곤 윤상열을 똑바로 보았다. 자신의 열정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저입니다.”
웨이퍼센트 분홍머리 걔.
유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