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06화 (706/760)

706화

토를 모두 치웠다.

‘다행이다.’

유빈은 오늘 눈을 뜨는 순간부터 속이 안 좋았다. 긴장과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음식은 물 이외에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덕분에 그가 쏟아낸 건 투명한 위액이 전부였다.

‘자칫하면 아이돌 세 명 앞에서 토사물을 쏟은 남자가 될 뻔했어.’

저 셋의 눈을 보면, 토사물이든 위액이든 거기서 거기일 듯하지만.

아무튼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켰다.

“예에,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웨이퍼센트의 유빈입니다.”

조촐한 박수가 뒤따랐다.

“아시다시피 제 목표는 일본 시장에서의 성공입니다. 우리나라 공중파 방송에선 일본어가 나오는 걸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어요. 저는 이게 시대착오적인 규제라고 생각합니다. 현시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그룹들의 일본어 곡이 성공하고, 그 성공이 방송국들이 무시할 수 없는 게 된다면, 이 규제에도 자그마한 변화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리카가 고개를 주억였다.

과거에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 영입 제안을 받으며 모두 들었던 내용이었다.

“엑, 그런 말 못 들었다.”

노아는 아닌 모양이다.

그러자 그녀의 옆에 있던 윤상열이 귓속말했다.

“어제 들었다.”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생각하니까 들어본 적 있는 거 같다. 그렇군,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문화로써 투쟁하는 건가.”

“…….”

유빈은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에리카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그녀는 별다른 반응 없이 유빈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중이었다.

유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리카마저 노아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면 꽤 상처받았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의의도 모르는데 왜 모인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이다.

“굳이……?”

강동현이 작게 읊조렸다. 그는 사무라이 걸즈가 그냥 멤버 셋을 모아 진행하는 믹스테입 프로젝트로만 알고 있던 것이다.

‘굳이’라는 작은 목소리에 유빈의 멘탈이 1차로 박살 났다.

에리카가 강동현을 찌릿 노려보자, 그는 실수를 깨닫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즈, 제 목표는 오리콘차트 1위입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파급력이 있을 테니까…….”

상당히 비현실적인 목표였다.

한국 차트 1위가 목표라 해도 비현실적이라고 했을 텐데, 일본 차트 1위가 목표라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일본 시장에 대해선 문외한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일본에 변변찮은 연줄도 없다.

“믿을 만한 건.”

윤상열이 입을 열었다.

“소녀연맹, 케이어스, 글로브의 이름값뿐이군요. 이 세 사람이 필요했던 건 셋의 능력보다 스타성 때문이고요.”

“예…….”

“뭔가 본말전도라는 느낌이 드네요. 이 셋이 만들어낼 작품은 좋을 거야, 이런 게 아니라. 이 셋이 모이면 성공할 거야, 이런 거니.”

“아, 아뇨. 당연히 리카 씨와 에리카 씨에게도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리카 씨는 ‘우리들의 프로듀싱’으로 프로듀싱 전 과정을 곁에서 지켜볼 경험이 있으셨을 거고.”

리카가 자신만 믿으란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에리카 씨는 믹스테입을 만들어본 경력도 있으신 데다가, 그 결과물이 굉장히 좋았어요. ‘서울 시티 보이’는 프로모션이 더해졌다면 성공할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에리카는 자만하는 듯 보이지 않으려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그러니까…….”

유빈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잔뜩 기대감을 표출하는 노아가 눈에 들어왔다. 리카와 에리카를 칭찬했으니, 이젠 자신의 차례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픈 말은.”

유빈은 안타깝게도 노아에게 아무런 칭찬도 건넬 수 없었다. 노아는 리카와 에리카에 비해 딱히 창조적인 작업물이 없었다.

유빈이 노아에 대해 아는 유일한 건 그녀가 일본 출신이라는 점뿐이었다.

노아가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모두의 도움이 있어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 비전은 작업물이 아니라 결과에 관한 것이에요. 그리고, 세 분께 기대하는 것들이 당연히 있습니다. 일본 시장을 공략하는 만큼 세 분의 귀가 필요해요.”

세 사람의 귀가 필요하다.

그건 곧 유빈이 지니지 못한 제이팝 취향이 필요하단 뜻이었다.

유빈은 제이팝을 꽤 즐기는 편이다. 수치적으로 따지자면 케이팝이 50%, 제이팝이 25% 정도다.

하지만 실제 일본에서 살아온 사람보다 제이팝에 익숙할 리는 없다.

유빈이 후천적으로 얻어온 제이팝에 대한 문화적 경험을, 세 일본인은 태어나고 자라나며 자연스럽게 습득한 것이다.

“저는 감지하지 못하는 일본에서의 히트성을, 여러분이 잡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몇 년 동안 케이팝만 들었다요.”

노아가 말했다.

“아타시(저)는 일반적인 제이팝 취향과는 동떨어져 있는데요!”

리카가 말했다.

“저도 제이팝과는 그리 친하지 않아요. 아는 건 한국에 오기 전, 어렸을 때 들은 정도예요. 거기서 제 지식이 멈췄어요. 아, 세이코의 앨범은 나올 때마다 듣고 있지만요.”

에리카가 말했다.

유빈은 머신건 총알처럼 터져 나오는 부정의 세례에 머리가 멍해졌다. 이윽고 그는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제이팝과 가장 친한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

그때 희망이 비쳤다.

이 자리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뮤직 프로듀서를 꼽을 때 항상 딸려 오는 세 명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소녀연맹은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팝 아이돌 중 하나다. 그녀들의 뮤직 디렉팅을 담당한 정지음이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유빈이 희망을 담아 쳐다보자 정지음이 한껏 당황했다.

“따, 딱히 일본 시장을 노리고 뭘 해본 적은 없어서……. 그냥 케이팝 만드는 대로 한 건데…….”

“그래도 감이 있지 않으실까요?”

“사리에 안 맞죠.”

윤상열이 유빈의 질문을 가차 없이 끊었다.

“일본의 아이돌씬에서, 케이팝 아이돌과 일본 아이돌의 팬덤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어요. 둘이 팬층을 공유하는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음 님이…….”

노아는 윤상열이 ‘지음 님’이라고 칭하는 것을 듣곤 소름이 돋았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만드신 곡이 일본 시장에서 성공했단 건 압니다. 하지만 그 성공 원인은 일본의 대중적인 청취층을 공략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먼저 일본의 케이팝 팬덤으로부터 반응을 얻고, 그 유명세가 퍼져나가 위로 올라간 것이죠.”

“그럼 결과적으로 인기가 있단 거 아니다?”

“일본의 장르풀은 넓다. 아무렴, 세계 2위의 음악 시장 규모를 자랑하는데. 어떤 장르든 팬층이 있고, 그 팬층을 사로잡는 것만으로도 차트 1위에 이름을 걸 수 있어. 우리나라처럼 대중적인 것만이 성공하는 시장이 아니란 거다.”

물론.

윤상열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차트 1위에 올랐단 데엔 대중을 공략하는 어느 요소가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게 근본적으로 대중적인 것인가, 그리 물으면 ‘아니’라고 답할 수 있겠지. 유빈 씨의 목표가 케이팝을 배제한 채 제이팝 시장에서 성공을 얻어내는 거라면, 지음 님에게만 도움을 구하는 건 그다지 좋은 결과를 초래하진 않을 겁니다.”

정지음은 인정한단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다짜고짜 ‘소녀연맹의 뮤직 프로듀서!’라며 치켜세우곤 모든 걸 맡겼다면, 정지음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면.”

유빈은 새로운 희망을 갖고 윤상열을 보았다.

“윤상열 피디님은…….”

“제이팝 못 만듭니다.”

“아, 예…….”

유빈은 마지막으로 강동현을 보았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노골적으로 눈을 피했다.

“…….”

최고의 케이팝 뮤직 프로듀서 세 명.

그들은 시작도 전에 ‘못 하겠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유빈은 미리 준비해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 그럼 이건 되게 편견에 사로잡힌 발언일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제이팝은 역시 밴드잖아요? 뉴 메탈, 페스티벌 록, 애니메 록, 발라드 록……. 마침 리카, 에리카 후배님이 밴드 악기를 다룰 수 있는 걸로 아는데요.”

“하이(네)!”

“네, 기타 종류는 전부 다룰 수 있고 건반도 가능해요.”

“시간이 촉박한 건 아니니까, 일단 일본적인 무언가를 만드는 걸 목표로 삼는 게 어떨까요.”

“유빈 선배, 님!”

노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네, 노아 씨.”

“난 악기를 못 다룹니다.”

“…….”

노아는 눈치가 보이는 듯 면피용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거 하나 있다요!”

“오, 뭔데요?”

“캐스터네츠!”

‘하,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유빈은 새삼스럽게 목구멍이 턱 막혔다.

캐스터네츠를 신명 나게 두드리는 노아를 생각하니 더더욱 그러했다.

“밴드 사운드라면…….”

오직 부정적인 이야기만이 넘쳐흐르던 때, 정지음이 말했다.

“내가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아.”

“……아, ‘롱 포’!”

소녀연맹의 두 번째 타이틀곡인 ‘롱 포’를 만든 게 바로 정지음이다.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꽤 들어봐서 제이팝적인 느낌도 알고 있긴 하고.”

“저, 저도 오늘부터 공부하면서 최선을 다해볼게요.”

강동현은 시류에 몸을 담듯 정지음의 이야기에 묻어났다. 그런데 그와는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났다.

다들 의외란 듯 그를 본 것이다.

강동현이 당혹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왜, 왜 그러세요?”

“그게.”

유빈이 못 믿겠단 듯 물었다.

“작업에 쭉 참여해주시게요?”

KS 엔터의 수석 프로듀서이자 한국 최고의 작곡가 중 한 명이? 그저 에리카를 따라 하루만 참관하러 온 게 아니었나?

에리카는 KS 엔터의 주요 자원이다. 그런 에리카가 참여하는 프로젝트이니, 케이어스의 음악적 색깔을 해치진 않는지 파악하러 온 줄 알았는데.

아예 작업을 돕겠다고?

“네.”

강동현이 쉽사리 답했다.

“어차피 저 할 것도 없…….”

에리카가 강동현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강동현이 바짝 얼어붙었다.

뭐, 어차피 할 것도 없는 모양이다.

유빈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담아 윤상열을 보았다. 그는 유빈의 의도를 파악하고 즉답했다.

“저는 오늘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보러 온 것뿐입니다.”

“윤 피디!”

노아가 윤상열의 귓가에 속삭였다.

“앞으로 모임마다 학부모들이 다 따라올 거 아니다! 나만 부모가 없으면 어떡하나!”

“난 네 부모가 아니다.”

“그래도…….”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 내에서, 안 그래도 노아는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결과물뿐만 아니라 작업 과정에서도 그러할 가능성이 높다.

에리카는 밴드 악기를 다루고, 리카는 작곡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노아만 아무런 특기가 없다. 그나마 캐스터네츠 정도가 특기라면 특기일까.

이렇게 아무것도 자랑할 게 없는 상황인데, 그나마 자랑할 윤상열이 없어진다면 자신의 입지는 어떻게 될까.

노아는 그것을 걱정했다.

“윤 피디가 있는 게…….”

“네가 빛날 장소를 찾던 거 아니었나?”

“…….”

“인생은 싸움이야. 여긴 네가 고른 전장이고. 버텨야지.”

“…….”

노아는 시무룩해져선 윤상열로부터 떨어졌다.

둘의 작당 모의가 끝나자, 윤상열이 말했다.

“협업 형태로.”

“……!”

“작업물을 전달해주시면 제가 보태는 형식으로 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노아 이 녀석에게만 맡겼다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안 올 줄 알았던 부모가 운동회에 늦게나마 찾아온 아이처럼 노아가 기세등등해졌다.

“뭐부터 시작할 겁니까?”

윤상열이 유빈에게 물었다.

프로듀싱 과정 중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

곡을 만들 때 멜로디부터, 코드부터, 가사부터, 리듬부터, 이렇게 많은 시작점이 있듯 프로듀싱도 그러하다.

컨셉부터, 곡부터, 안무부터, 심지어 의상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

“생각해둔 게 있어요. 이 프로듀싱은 소재가 먼저입니다. 즉, 컨셉이요. 그 컨셉은 모두와 소통하면서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도성 있는 뮤지션들이 모였다.

유빈 홀로 밀어붙이는 것보다 모두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진행하는 쪽이 훨씬 나을 것이다. 유빈은 그리 확신했다.

가장 가까이서 지켜 봐온 프로듀서, 성필이 그러했으니까.

“저어.”

첫 번째 미팅이 마무리되려는 시점, 에리카가 손을 들었다.

“사무라이 걸즈에 관련해서, 제가 원하는 시점에 소식을 공개할 수 있을까요?”

“원하는 시점이요?”

“다들 아시다시피 케이어스 멤버들은 앞으로 돌아가면서 솔로곡을 낼 거예요.”

강동현이 침을 꼴깍 삼켰다.

에리카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는 본인이 굉장히 절박한 상황이며, 그렇기에 사무라이 걸즈가 필요하다는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그저 ‘이걸로도 홍보하면 좋겠다’ 이상의 느낌을 내지 않았다.

“거기에 이 믹스테입 프로젝트를 프로모션 소재로 쓰면 좋을 거 같아서요. 괜찮을까요?”

에리카의 승부수였다.

프로모션 시기와 전략을 정하는 것도 프로듀서의 역할이다.

유빈이 에리카의 요구가 타당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에리카는 불가피하게 그와 싸워야하리라.

“오, 좋네요.”

에리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저도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거든요.”

“유빈 선배님도요?”

“내일 바로 기사 내도 될까요?”

“……내, 내일 바로요? 왜요?”

하.

윤상열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쳐다보자, 윤상열은 미안하단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입가를 손바닥으로 막은 후 몇 번 심호흡했다.

‘그런 거였나.’

뭐 이딴 등신같은 프로젝트가 다 있나 싶었다.

머리에 꿈만 가득 찬 애들을 모아 놀이를 벌인다고 하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왜 굳이 이런 형태인가.

왜 굳이 일본인 세 명만을 모으고, 왜 일본 시장을 목표로 하고, 게다가 목적은 무슨 공중파 방송 규제를 없애?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공상에 망상을 더한 것 같다. 그렇게, 윤상열은 자꾸만 의문을 품었었다.

‘말이 안 될 수밖에 없었던 거야.’

말이 안 될수록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거세질 테니까!

윤상열은 이쯤 되니 감탄을 터뜨리고 싶어졌다.

‘박성필, 이런 식으로 돌파구를 찾아?’

윤상열도 가로 엔터가 여러 곳으로부터 압박받으리란 것은 예상했다. 이 필터를 돌파하지 못하면 가로 엔터의 성장은 눈에 띄게 침체할 거다.

웨이퍼센트가 필터의 분수령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웨이퍼센트는 가로 엔터에게 기회이자 위기다. 그 어느 때보다 험악한 환경이 가로 엔터와 웨이퍼센트를 기다릴 것이었다.

컴백이 바로 눈앞인데도 별다른 홍보가 없는 게, 웨이퍼센트가 처한 상황과 가로 엔터가 당하는 압박을 증명한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는 압박을…….

‘이렇게 해결해?’

유빈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리카, 에리카, 노아를 모았다. 그리고 허황된 꿈을 읊으며, 아이돌 팬덤 전체가 주목할 거대한 이벤트를 꾸며낸다.

그로써 최소한 소녀연맹, 케이어스, 글로브 팬덤 내에선 유빈이 홍보될 것이다.

웨이퍼센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그래,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말이 안 돼. 이뤄질 가망도 없고. 애초에 인력, 자원 낭비지.’

성필은 처음부터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든 말든 관심도 없는 것이었다.

웨이퍼센트의 컴백을 앞두고, 단 한 번의 관심만 모을 수 있다면야 훗날의 일은 아무래도 좋은 거겠지.

성필은 이용한 거다.

리카를, 에리카를, 그리고.

‘노아를…….’

윤상열의 이마에 힘줄이 잡혔다.

‘한 번만 쓸 홍보 도구. 그게 이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의 정체였어.’

일주일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버리고 관심도 안 주겠지.

거기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집힌다. 그러니 뭐라도 해줘야겠다.

‘네가 버릴 사무라이 걸즈.’

반드시 성공시킨다. 그리고 그 최대의 수혜자를 노아로 만들 거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성필에게 고맙다고 해야겠지. 비록 이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쓸만한 패들을 한자리에 모아줬으니.

윤상열은 프로듀서다.

그런 그가 보기에, 리카와 에리카 그리고 노아가 한자리에 모인 이 광경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요리사가 최고의 재료를 눈앞에 둔 순간이었다.

‘웨이퍼센트 홍보와 컴백이 다 끝나면 사무라이 걸즈는 시들해지겠지. 그때 내가 주도권을 가져오는 거다.’

홍보용으로 급히 짜놓은 괴상한 그룹이 진짜 성공하는 걸 보면, 성필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키히힉, 히힉…….”

“윤 피디, 왜 혼자 웃고 있나. 재밌는 거 생각났으면 말해봐라요.”

“기사 이번 주 내로 내도 괜찮겠죠?”

윤상열의 기분 나쁜 웃음을 뒤로하고, 유빈이 에리카에게 물었다. 에리카는 여전히 당황한 채였으나, 머릿속으로 계산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히려 이렇게나 빠른 홍보는 에리카에게 호재로 작용할 수도 있다.

윤희연이 이 소식을 접한다면, 결코 가만히 두진 않을 테니까. 그녀는 사무라이 걸즈가 지닌 가치를 반드시 알 거다.

‘거기에 한 숟가락 올리고 싶으시겠지.’

이 프로젝트를 밝히는 건 먼 훗날이 될 예정이었지만, 그래, 빨리 알려지면 오히려 좋다.

“그렇게 해주세요.”

* * *

KS 엔터 회장, 문규완은 오래된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

고급 빌라의 엘리베이터 안에선 선물을 든 채 자꾸만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는 친구의 집 앞으로 걸어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몇 초 지나지 않아서 그가 나타났다.

“회장님.”

정호환이었다.

문규완이 종이백을 건네자 정호환은 만개한 웃음으로 선물을 받았다. 문규완이 현관으로 들어서서 신발을 벗었다.

“제수씨는?”

“잠시 밖에요.”

“이야.”

집 안으로 들어가며 문규완이 탄성을 뱉었다. 요사이 인테리어를 새로 했다더니,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세련된 느낌으로 변했다.

“어째 나보다 집에 더 관심이 많으십니다, 허허.”

“멋지니까 그러지.”

“안으로 갑시다.”

문규완은 정호환의 안내를 받아 그의 방으로 향했다. 서재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보이는 풍경에 문규완이 흠칫했다.

정호환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인테리어를 한 게 회사를 나오기 전이라.”

정호환이 안내한 방은 작업실이었다.

벽, 천장, 바닥 전체가 고가의 방음재였다. 방에는 엄청난 가격의 음향기기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문규완은 자기 키와 비슷한 크기의 스피커를 손으로 쓸었다. 금속이라곤 믿을 수 없는 감촉이었다.

“여기를…… 쓰나?”

“음악 들을 때 씁니다. 이거 보입니까?”

정호환은 책상 위의 자그마한 기계를 가리켰다. 텔레비전 옆에 두는 셋톱박스와 비슷한 크기였다.

“이 작은 게 리시버, 앰프, 스트리머, 네트워크 기능이 다 있습니다.”

“성능이 별로겠군.”

“값은 싼데, 생각보다 훨씬 좋습니다. 신제품은 얕보지 못하겠어요.”

“얼리어답터 다 됐군.”

문규완이 푸근한 웃음과 함께 의자에 앉았다.

나무 테이블 위엔 정호환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차가 놓여 있었다. 찻잔의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윤희연 이사는 잘하덥니까?”

“잘하고 말고, 아직 아무것도 안 나왔어.”

“잘할 겁니다. 시간을 주시지요. 주변은 단기적인 성과에 매몰되어 윤희연 이사를 깎아내리고 몰아내려 할 겁니다.”

“그렇겠지.”

“회장님이 방패가 되어주시지요. 윤 이사 이상의 적임자는 KS 엔터에 없습니다.”

“없긴 왜 없나.”

“괜찮은 인재가 들어왔습니까?”

“내 눈앞에 있지.”

정호환의 얼굴이 굳었다.

“아직도 돌아올 생각은 없을까?”

“…….”

정호환은 세월을 반추하듯 고개를 들어 위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시선을 올린 시간이 오래 지나갔다.

문규완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끔찍합니다.”

그리고 그 인내 끝에 정호환이 뱉은 말이 이것이었다.

끔찍하다.

“……무엇이?”

“분명 제가 만든 곡은 아름다운데, 그게 유통사를 거치면 쓰레기처럼 변하는 게요.”

“그거야 뭐, 열화는 피할 수 없잖은가.”

“그렇지요. 가장 완벽한 상태로 완성한 음원일 텐데,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어느 곳에서 이상하게 변한 뒤에 세상에 선보여지지요. 부르짖고 싶습니다. 내 작품은 그런 모양이 아니라고. 음원 스트리밍으로 적당히 흘려듣지 말고, 좋은 플레이어와 앰프, 스피커를 구비하여 CD로 들어 달라고.”

“이상하게 변한 음원이 좋게 들려야 진짜 잘 만든 곡이라고, 자네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냥 한탄입니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 수준의 아쉬움이지요. 그런데…… 요즘 들어 그 생각이 진해져요. 제가 간과하고 적당히 넘어간 무언가가 이러한 차이를 만든 게 아닌가…….”

소녀연맹과 케이어스의 차이를 만든 게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역량이 부족한 것일 텐데.

“저는 제가 그리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상황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노력도 부족하지 않았고, 재능도 없는 게 아닐 텐데, 어째서 꿈에 닿지 못했는가…….”

문규완이 꽉 다문 입술 안으로 이를 까득 물었다. 오랜 친구이자 동생의 이러한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하늘 위에 펼쳐진 수천억 개의 별과 은하. 그중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는 건 매우 운이 좋은 몇 개가 전부. 압니다. 운이 이 세계의 거의 전부라는 걸요. 그리고 저의 30년은, 운으로 결정되는 세계를 인간의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있는 세계로 만드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운이라는 요소를 실패의 원인으로 가져오면…….”

정호환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제가 지금까지 해온 건 뭐가 되겠습니까. 저희가 이룩한 문화의 기술, 그 오만하고 멋진 이름은 뭐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익숙해지고, 인정하려고 합니다. 제가 모자라서 꿈에 닿지 못했단 걸요.”

“아니야.”

“저희 애들에게, 케이어스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저만 아니었어도 더 높은 풍경을 보았을 아이들인데.”

“아니야.”

“저는 돌아가지 않을 셈입니다.”

“알게 될 거야.”

주어가 없는 말이었다.

정호환이 무슨 뜻이냔 듯 문규완을 응시했다.

“네가 꿈에 닿지 못했듯, 가로 엔터도 그러할 테니까.”

“설마…….”

정호환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문규완은 그의 안색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격앙된 낯빛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네가 이 회사에서 나간 그 날부터 결심했다. 네 30년의 꿈이, 아니, 우리의 꿈을 일그러뜨린 놈들에게 똑같이 되갚아주기로. 놈들이 현시점에서 가장 간절할 것을 무너뜨릴 거다.”

“뭐가…… 뭐가 남는단 겁니까? 그런 일을 해서 뭐가 남습니까? 이 일은, 우리가 선택한 이 음악이란 일은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잖습니까. 그런데 다른 이를 억지로 끌어내리고 상처입혀서, 대체 뭐를 남기겠단 겁니까?”

“너다.”

정호환이 놀란 숨을 삼켰다.

“돌아와라, 호환아. 30년이나 품어온 꿈이다. 고작 누가 먼저 발을 디뎠다고 포기할 거냐? 사내가 가는 길에 어찌 호화로움과 미식만을 바라겠느냐? 우리가 항상 그러했듯 그 길엔 진흙탕과 폭풍우가 일겠지. 그걸 뚫고서 이곳에 선 거다. 그런데 고작, 고작…… 겨우 그런 일에…….”

믿기지 않는다.

정호환이 이 일을 그만두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그 믿기지 않는 말을 정호환이 되풀이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들으란 듯 한 글자씩 또렷하게.

“30년이나 품어온 꿈이기에, 그만둔 겁니다.”

“……아니야, 너는 반드시 닿을 수 있어. 내가 알아. 너는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너는 반드시 할 수 있어.”

“죄송합니다 회장님.”

문규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로 엔터의 꿈을 망가뜨리고 내 속을 풀거나, 네가 다시 회사로 돌아와야 한다. 둘 중 하나다. 선택해라. 무의미한 피해자를 만들 건지, 아니면 다시금 꿈을 향해 도약할지.”

“회장님…….”

“호환아! 억울하지도 않냐! 이 시간 이후 스러져갈 너의 소망들이! 네가 바쳐온 삶이! 우리의, 꿈이……!”

정호환은 답 없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그의 눈동자에 배어 나온 공포를 보자, 문규완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네가 선택한 거다.”

문규완은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정호환의 집마저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에 타자, 문규완은 자신의 호흡이 거친 것을 알아차렸다.

‘네가 선택한 거다, 라니.’

책임전가도 유분수지.

문규완 본인의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지껄인 말일 뿐이다. 무의미한 피해자를 만들 거냐고 했던가, 그래, 문규완은 무의미하고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려 했다.

아니, 이미 만들었다.

YJS 엔터의 이준호와 만나서, 그러기로 했었다. 둘 모두의 이익이 교차한 지점이었다.

‘배신하려고 했어.’

하지만 문규완은 오늘 이준호를 배신할 속내를 품고 있었다. 만약 정호환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가로 엔터를 향했던 수많은 이빨을 순식간에 치울 생각이었다.

그걸 넘어 그보다 더한 보상을 줄 셈이었다.

‘호환이 네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런데, 그게 전부 끝났다.

정호환이 돌아올 거란 희망은 오늘부로 사라졌다.

이젠 그를 꿈의 길에서 추락시킨 이들에 대한 불합리한 분노만이 남았다.

빌라를 빠져나와 주차장에 들어서자 비서가 바로 다가왔다. 부슬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비서가 우산을 펼치며 말했다.

“남 이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홍범이가?”

문규완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담배를 꼬나물었다.

“무슨 일인데?”

비서가 매니지먼트 이사 남홍범으로부터 온 소식을 전했다. 문규완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툭 떨어졌다.

“에리카가 누구랑 그룹을 만들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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