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화
성필, 한구인, 손혜빈 셋은 LP바로 들어섰다.
손혜빈이 단골로 다니는 이 LP바는 그녀가 신인일 시절부터 현재까지 영업하고 있었다.
어두우면서 아늑한 분위기, 거기에다 적당히 떨어진 테이블 간의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바 테이블 안쪽으로 가까워질수록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LP판의 향연이 더욱 잘 보였다. 성필과 한구인, 특히 한구인이 눈을 빛냈다.
“저기 가자.”
손혜빈이 자연스럽게 바 테이블 구석 쪽에 앉자 다른 두 명도 따라 앉았다.
그들이 자리 잡자 사장이 손혜빈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영광이면 제 사인 좀 걸어두시지 그러세요.”
그리 말하는 손혜빈은 자신의 사인이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단 걸 너무나 잘 알았다.
역사를 장식한 수많은 뮤지션들의 음반 가운데 손혜빈의 사인이 걸리는 건, 그녀 스스로도 꽤 창피한 일이 될 것이었다.
“천천히 고르세요.”
사장은 메모지와 볼펜, 메뉴판을 그들의 앞에 두었다. 손혜빈이 메모지를 한구인 쪽으로 밀었다.
“듣고 싶은 곡 있으면 적어서 내. 메뉴는 내가 고른다. 한 이사님 괜찮죠?”
“괜…….”
“사장님 여기 육포랑 떡볶이랑 오징어랑…….”
“…….”
한구인은 손혜빈이 준 메모지를 다시 성필 쪽으로 밀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성필이니, 그가 곡을 택하게 해주어야 마땅하리라.
“저는 됐어요. 한 이사님이 고르세요.”
“아, 그럼 그럴까요?”
한구인은 아티스트의 이름, 앨범명과 곡명을 반듯한 글자로 적었다. 그리고 병맥주 세 개가 도착함과 동시에 사장에게 주었다.
“그래서 성필이.”
손혜빈이 세 개의 맥주병을 차례로 따며 물었다.
“우리한테 속 시원하게 털…….”
“손님.”
사장이었다.
그는 바 테이블의 반대편에서 죄송하단 듯 미소를 지었다.
“해당 음반은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한구인은 처음 가본 레스토랑에서 매너를 숙지하지 못한 사람처럼 부끄러워했다.
그가 사장에게서 메모지를 받아 들자, 성필과 손혜빈은 궁금하여 그 내용물을 확인했다.
[Oscar’s Motet Choir - Cantate Domino - Adam: O Helga Natt(Cantique De Noel, O Holy Night)]
“이게 뭐예요?”
“그,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혹시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라흐마니노프 모음 앨범인데 거기에 있는 파가니니…….”
“죄송합니다, 클래식 음반은 없습니다…….”
한구인은 창피한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러곤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생각해내려는 듯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클래식이 없다면 뭐가 있을까.
재즈? 록? 팝? 성필에게 주워들은 것 중에 괜찮을 만한 게…….
“킹 크림슨 21센추리 스키조이드 맨이요.”
성필이 한구인을 슬쩍 보았다. 한구인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박 이사님이 고르시길 바랐으니 괜찮습니다.”
과연 사장의 얼굴도 밝아졌다. 프로그레시브 록은 취급하는 모양이었다.
사장이 떠나가자 손혜빈이 낮게 웃었다.
“아니, 설마 했는데 한 이사님이 클래식을 뽑으실 줄 몰랐어요.”
“LP바라고 하면 고전적인 느낌이지 않습니까. 음악감상실 같은 곳이 떠올라서…….”
“음악감상실은 뭐예요?”
“누나 몰라?”
“너는 알아?”
“한 이사님이랑 몇 번 갔었어.”
손혜빈의 표정이 아까와 비슷해졌다. 아까가 언제냐면, 한구인이 성필과 집에서 영화를 같이 자주 본다는 걸 들었을 때였다.
“소극장처럼 의자가 놓여 있는데 거기 엄청 크고 좋은 스피커가 있어. 듣고 싶은 음반을 고르면 주인분이 틀어주셔.”
“뭐, 그래서 둘이 거기 가서 같이 음악만 들었다고? 뭔데 그게?”
“냉커피랑 과자도 줘. 사장님이 나이가 있으신 분이셔서 그런지 믹스 커피랑 한과더라.”
손혜빈은 몇 초간 침묵을 지키다가, 맥주병을 입 안에 박곤 술을 벌컥였다.
“그래, 또 말해봐. 둘이 또 어딜 갔어?”
“왜 그래. 뭐 이상해?”
“아니, 남자 둘이 논다는데 장소랑 놀잇감들이 뭔가 되게…… 되게…… 섬세하잖아. 무슨 조기축구회를 같이 간단 것도 아니고 음악감상실? 같이 소극장에 연극도 보러 가고 그래?”
“옛날엔…….”
“내 살아생전 너랑 한 이사님처럼 노는 남자들은 처음 본다.”
“지금 저희를 규정된 남성성의 프레임 안에 가두시는 겁니까? 손 이사님, 실망입니다.”
“그게 아니라 신기하 아 깜짝야!”
스피커에서 ‘21st Century schizoid man’의 도입부가 터져 나오자 손혜빈이 어깨를 떨었다.
기괴한 사운드와 거친 보컬에 손혜빈은 순간 ‘이게 노래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필이 뭔가 만족한 듯 리듬을 타는 걸 보니 노래가 맞는 모양이다.
“그래…….”
손혜빈은 일단 처음 접한 성필에 대한 정보는 저 멀리 던져버리기로 했다.
성필이 쉬는 날엔 집에 틀어박혀 아이돌 뮤비나 보는 줄 알았지만, 같이 놀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긴 하다.
“이야기나 해봐.”
성필은 맥주병을 양손으로 꼭 쥐고 뭉그적거렸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기라도 한 것일까. 이윽고 그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한 이사님이랑 누나도 알겠지만, 정호환 이사님 때문이야. 그렇게 가실 분이 아니었는데…….”
“다키스트가 은퇴한 거랑 비슷해?”
다키스트가 해체한 시기, 성필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행동했었다.
손혜빈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어느 날 은퇴를 선언하면 팬의 마음이 좋을 리 없다.
손혜빈도 겪었던 일이다. 동경하고 사랑하던 팝스타가 신보를 내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고, 마침내 은퇴가 확정됐을 때.
어린 시절의 그녀는 공허한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어 눈물로 밤을 보냈었다.
“정호환 이사님도 다키스트처럼 때가 되신 거지. 나이가 나이라, 이 일을 옛날처럼 정력적으로 하실 순 없으시잖아. 오히려 박수 칠 때 떠난 거라 존경심이 들기도 해.”
“맞습니다. 걸그룹 최초 밀리언셀러를 달성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정호환 이사님도 기쁘게 떠나셨을 겁니다.”
“……내가.”
성필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딱 입술을 적실 정도로만.
“마음이 싱숭생숭한 건 정호환 이사님이 떠나셨기 때문만은 아니야. 다키스트가 은퇴했을 때…… 그때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달라.”
“근본적으로?”
그렇다, 정호환이 떠난 건 다키스트의 은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둘 다 슬픈 일이지만, 정호환이 떠난 건 성필 때문이니까.
“나 때문이니까.”
책임 소재는 명백하게 성필에게 있다.
왜냐하면, 전생의 정호환은 성필이 마흔 살이 될 때까지 KS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로 군림했으니까.
전생과 현재가 다르다면 그 이유는 성필에게 있을 수밖에 없잖은가.
성필이 정호환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가 바꾼 미래가 정호환을 내쫓은 거나 마찬가지다.
“에리카 씨가…….”
에리카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게 어떻게 네 탓이야. 에리카 그년 그거,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엿 먹이는 재주가 아주 탁월하네?”
한구인은 손혜빈의 발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회사의 아티스트를 상대로 어떻게 저리 말할 수 있을까.
‘아, 손 이사님 입장에서 에리카 씨는 후배로군.’
가로 엔터에 서유선이 왔을 적에, 서유선은 손혜빈을 보곤 겁먹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말았었다.
손혜빈은 서유선을 후배로 살갑게 대한다고 했으나, 인간적인 친밀함에서 기인한 친절이 아니었다.
“네가 좀 편하게 대해준다고 막말하긴.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사실인데 어떡해.”
성필이 그리 말하자 손혜빈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그녀는 하 웃더니 맥주병을 벌컥벌컥 한입에 비웠다.
“나 때문이야.”
성필은 이견의 여지가 없단 듯 그리 말했다.
그리고 성필의 시야로 보기에, 그건 명확한 진리였다.
“내 꿈은 프로듀싱을 하는 거였어. 프로듀서를 꿈꿔온 나에게 정호환 이사님은 내 우상이고 영웅이었어. 내가 프로듀서를 꿈꿀 수 있게 케이팝이란 토양을 다져주신 분…….”
정호환은 성필에게만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KS 엔터에겐 물론이고, 이 땅에서 아이돌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 모두의 영웅이다.
그걸 넘어, 한국과 전 세계의 케이팝 팬에게도 감히 깎아내릴 수 없는 명성을 지닌 이가 바로 정호환이다.
30년간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씬을 새롭게 창조해내고 발전시킨 사람.
그에게 빚지지 않은 업계인이 과연 존재할까?
손혜빈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너 때문이냐고. 막말로 말야, 걍 너한테 열등감 느껴서 도망갔단 거 아니야? 그럼 넌 좋아해야지 왜 슬퍼해? 네가 정호환을 이긴 거야!”
“……하하.”
성필이 씁쓸한 웃음을 뱉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그가 과거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면, 그래서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는 좋아했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성필은 그렇지 않다.
케이어스의 최후까지 프로듀싱하여 그녀들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주고, 정체된 케이팝 시장에 돌파구를 마련했으며, 영원토록 사람들 입에서 회자되어야 할 프로듀서가.
성필 때문에 사라졌다.
“그러게…….”
“그렇다니까. 에리카 그년 말 듣지 말고…….”
맥주를 한 병 더 주문하려 들리던 손혜빈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성필 때문이었다.
성필이 테이블에 올라온 맥주를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고 있었다.
“야, 야, 너 우냐……?”
“아니야, 내가 왜, 누나 말대로 좋아해야지. 아니, 좋아, 좋네…….”
정호환.
찬란하기 그지없는 이름이다.
수십 년 후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사에 관한 책이 쓰일 때, 그 이름이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케이팝을 창조하고 예술적인 경지까지 끌어올렸으며, 최후엔 케이팝이 처한 정체기마저 스스로 타파해버린 초인이자 영웅으로.
쓰일 것이었다.
그에게 할당되었을 몇 페이지는 성필 때문에 사라졌으므로, 그의 업적은 현시점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내가 정호환 이사님을 이겼네…….”
처음 정호환을 만났을 때, 그는 성필의 팬이라고 말했었다.
성필은 그 말이 어찌나 기쁘던지, 집으로 돌아가서도 계속 그 생각만 했었다.
같이 있던 신아름 앞에선 김민주의 말투에 화난 척을 했고, 실제로 화도 났었지만, 집에 가선 그 마음이 전부 사라졌었다.
오직 정호환이 했던 말만 머릿속에 맴돌았었다.
전생에선 대등한 위치에서 만나기를 소망만 했던 인물이 팬이라고 말해준 게 기뻐서, 너무 기뻐서, 그래, 너무 기뻐 행복하기까지 했었다.
“아, 진짜 이게, 이렇게 돼버렸네…….”
전생의 성필이 자주 하던 망상이 있었다.
프로듀서가 되어 프로듀싱한 그룹이 매우 유명해졌을 때, 언젠가 정호환을 보고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이사님 덕분에 프로듀서를 꿈꿀 수 있었고, 프로듀서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이젠…….’
우연히 마주쳐도, 성필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성필이 아니었다면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을 전설적인 프로듀서다.
그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버렸단 죄책감 때문에, 성필은 그와 만나고도 도망갈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도망갈 것이다.
더 끔찍한 일은, 이 죄책감을 세상 누구에게도 고백할 수 없단 사실이다.
성필이 과거로 돌아와 꿈에 매진한 게, 자신의 영웅을 죽여버렸단 말을 누가 믿을 것인가.
그리고 또한 마음대로 후회하지도 못한다. 정호환이 떠나간 이유는 5년 전부터 성필이 해온 모든 선택의 합이기에.
‘내가 가로 엔터와 함께해 왔던 모든 일을 부정해버리는 거니까…….’
성필은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곡을 신청한 이들이 없는지, 성필이 신청한 킹 크림슨의 음반은 계속해서 재생되는 중이었다.
곡은 세 번째 트랙인 ‘Epitaph’에 이르렀다.
보컬이 애절하게 ‘Crying’을 외쳤다.
어째서 하필 고른 게 킹 크림슨의 음반이었을까. 아마 그 음반 커버가 성필의 심정과 비슷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편집증적으로 주변을 살피는 붉은 남자의 얼굴이 머리에 갑자기 떠올랐었다.
“박 이사님.”
성필은 등에 닿은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다. 옆에 앉은 게 한구인이니, 그의 손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어떻습니까.”
성필은 고개 숙여 우느라 코끝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코를 훌쩍이자 눈물이 툭 떨어졌다.
테이블에서 티슈를 집어 얼굴을 닦았다.
그러는 동안 한구인은 이야기를 이었다.
“정호환 이사님은 박 이사님 때문에 꿈이 부서져서 떠난 게 아닙니다. 꿈을 맡길 사람을 찾았기에 떠나신 겁니다.”
성필이 고개를 들어 한구인을 바라보았다.
“케이팝의 시작을 장식했고, 스스로도 끊임없이 혁신을 거듭해오신 분입니다. 사명감이 있으셨을 겁니다. 자신이 이 업계를 이끌어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러한 업적을 달성하셨겠습니까?”
아이돌 문화를 만들고.
아이돌 문화가 거의 절멸하다시피 한 상황에서도 다키스트라는 아이돌을 데뷔시키고.
대중의 외면에 두려워하지 않고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편집증적인 집착과 자기 혁신이었다.
“그런 분이 이 업계를 떠난 게 단순히 패배감 때문일 리 없습니다. 그런 분이셨다면, 아이돌이 끝났다고 했던 00년대 중반에 이미 떠나셨을 겁니다. 하지만 정호환 이사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불씨를 살려내셨습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모두가 안 될 거라고 비웃던 상황에서도 다시금 일어나길 택하셨던 분입니다. 그런 분이, 고작 한 번 졌다고 물러나겠습니까.”
한구인이 고개를 저었다.
“결코 아닙니다. 정호환 이사님께 아이돌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명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 포기하셨죠. 포기할 수 있을 상황이 마련된 겁니다. 자신의 사명을 이을 사람이 나타났으니까요. 박 이사님입니다.”
“…….”
“물론 제 이야기는 저의 주관일 뿐이고 과대 해석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 반드시 그럴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곤 정호환 이사님이 물러가신 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만약 정말 소녀연맹 때문에 이 업계를 떠나신 거라면, 소녀연맹을 보고 감동하셨던 겁니다. 감동하셨기에 체념하신 겁니다.”
체념.
그 말은 곧 패배 선언과 같았다.
“자신은 더 이상 박 이사님을 따라갈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없어도 이 업계는 밝을 거다. 그 모든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떠나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박 이사님.”
한구인이 자신을 바라보란 듯 눈가에 힘을 주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눈동자에 힘이 실렸다.
“슬퍼하셔도 됩니다. 슬프실 겁니다. 그러나 정호환 이사님이 떠나가신 책임을 본인에게서 찾으셔선 안 됩니다. 그건 정호환 이사님을 향한 모욕입니다.”
“모욕, 이요?”
“모든 선택은 정호환 이사님이 내리셨습니다. 정호환 이사님의 슬픔도, 체념도, 패배도, 전부 정호환 이사님의 것입니다. 정호환 이사님이 최후에 받아들이신 월계관, 그 잎 하나하나를 이루는 그분만의 고유한 역사입니다. 그걸 박 이사님이 멋대로 박 이사님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한구인의 목소리엔 미묘한 열기가 감돌았다. 그답지 않았다. 그답지 않게, 불쾌함을 풍겼다.
“정호환 이사님이 화내실 겁니다. 저라도 그럴 거고요. 제 판단임에도 다른 사람이 멋대로 자기 때문이라며 한탄한다면, 반드시 그럴 겁니다. 그러니 모욕입니다. 단호히 말씀드리자면, 박 이사님껜 책임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안 됩니다.”
정호환의 선택은 정호환만의 것이고 그의 역사이기에.
한구인의 이야기가 끝나자 침묵이 감돌았다.
손혜빈은 성필과 한구인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방금 한구인이 한 이야기는 위로는커녕 꾸중에 가까웠다.
술을 마신 성필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다.
“……아.”
성필은 애매한 신음을 내뱉더니 짧게 웃었다.
“그래요, 제 책임이 아니다…….”
웃음.
손혜빈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 답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성필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눈에 남아 있던 눈물이 물 머금은 수건이 짜이듯 흘렀다.
“감사합니다…….”
성필이 자신의 능력을 자각한 시점.
후회한 미래를 보는 능력을 깨달은 시점부터, 그는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이들이 주인공인 매체를 독파했다.
드라마, 영화, 소설.
그중 가장 비중이 높은 건 소설이었다.
미래를 보는 능력이란 건 너무나 쓰기 좋은 소재였으므로.
하지만 성필은 소설 주인공들처럼 능력을 쓸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성필은 본인 일에 관해 후회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자신이 택한 일이니 겸허히 받아들였다.
대신, 그와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한 주변인들의 미래는 너무나 자주 그리고 또렷이 보였다. 성필은 태생적으로 이기심보다 이타심이 많은 인간이었다.
‘그래, 책임을 느낄 필요는 없어.’
그리고 10년 전의 과거로 돌아온 후로, 성필은 처음 능력을 깨달았을 때와 같은 일을 했다.
회귀와 관련된 매체를 독파했다.
역시나, 주로 소설이었다. 그중에서도 웹소설이 압도적이었다.
후회만 가득했던 삶에서 과거로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꾸린다는 내용은 굉장히 매력적이잖은가.
그런데, 성필은 그 일을 오래 할 수 없었다.
솔직히 역겨워서 더 읽기가 힘들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역사를 바꾸는 인간들…….’
타인이 가져야만 할 기회와 물건과 재화를 빼앗고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본인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타인이 마땅히 가졌어야만 할 성공을 너무나 쉽게 취한다.
그러면서 대체 뭐가 그리 뿌듯할까.
뭐가 그리 자랑스러울까.
정상적인 인간이 어떻게 그딴 식으로 살아갈 수 있지? 그 어떠한 고민과 고뇌도 없이?
쓰는 인간이건 읽는 인간이건 제정신이 아니다.
토가 나올 지경이어서, 성필은 더는 그러한 소설을 읽지 않았다.
역사에 만약은 없단 말은, 모두에게 주어져야 할 정당한 자리가 있다는 뜻이다. 더는 돌이킬 수 없기에 완성된 연극이고, 거기에 수정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된 성필은 항상 마음이 불편했다.
‘기뻐, 그리고 죄책감이 든다.’
절반쯤 섞인 감정 사이에서 중용을 찾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소녀연맹 멤버들을 찾으며 기뻤지만, 그녀들이 미래에 얻을 자리를 없애버린 것 같아 항상 찝찝했다.
열도를 뒤흔들 스타가 될 리카.
고난 끝에 가수로 데뷔한 백설하.
안무가와 배우로서 대성할 조아라.
성필이 석세스 엔터에서 나감으로써 모든 영광이 사라진 신아름.
그래서 더 열심히 일했다. 그녀들에게 원래 주어졌어야 할 보상보다 더 큰 것을 안겨주기 위해.
그런데, 사실 그런 건 불가능하다.
‘내가 한 짓으로 미래가 바뀐 이들이 수백만, 수천만 명일 거야.’
성필이 세상에 가져다준 행복 이상으로 불행이 생겨났을 거다.
하나하나 신경 쓰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인 주제에 신의 고민을 품었으니 삶이 불행했다. 떳떳하지 못했다. 점점 더 정신이 피폐해져만 갔다.
하지만 드디어 결론이 났다.
“내가 하등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야…….”
비유하자면 성필은 부잣집에 태어난 거다. 거기에 죄책감을 느끼고 재산을 주변에 나눠줘야 하나? 아니, 그렇지 않다.
그리고 성필은 운 좋게 선진국에 태어난 거다. 거기에 죄책감을 느끼고 제삼세계에 재산을 퍼부어가며 기부해야 하나?
아니, 절대, 결코, 그렇지 않다.
커피콩 밭에서 어린애들이 몇십 원씩 받으며 일하다 탈진해서 죽는 게 무슨 상관인가. 내가 커피를 싸게 먹을 수 있으면 그만이지.
희토류를 채굴함으로써 자연이 파괴되고 광부들이 우수수 죽어 나가고 병든들 무슨 상관인가. 스마트폰과 컴퓨터만 싸게 살 수 있으면 그만이지.
타국에 팔려 수탈당하는 자국의 토지에서 노예처럼 일하느라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한 푼의 재산도 모으지 못한 채 죽는 농부들이 무슨 상관인가. 자신이 먹는 밥값만 싸면 그만이지.
이 모든 죄를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나? 감당해야 하나?
“아니, 아니지, 아니야…….”
부잣집에 태어나고, 선진국에 태어나는 것.
전부 바란 게 아니었지만 얻게 되는 것들.
타인에게 죄책감과 책임을 느낄 필요가 없다. 이 한마디를 꺼내면 된다.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마법의 단어이며, 모두가 동의하는 말.
‘꼬우면 네가 이렇게 태어났어야지…….’
이제 알겠다.
회귀하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죄책감 따위 없는 이유. 애초에 그런 마음가짐이면 주인공은 되지 못한다.
이 모든 합리화 끝에 성필은 결론을 내렸다.
정호환이 떠나간 건.
“내 잘못이 아니야…….”
그 말에 한구인과 손혜빈이 반색했다.
성필의 눈에도 아까까지 없던 불꽃이 깃들었다.
“내가 이긴 거야.”
경쟁에 뛰어들기로 한 순간부터, 모두가 행복한 결말은 포기해야만 한다.
경쟁엔 승자가 있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게 패자가 존재해야만 하므로. 패배하는 자가 있어야만 성립되고 유지될 수 있는 게 경쟁이기에.
성필은 승자에 서고 싶었고, 승자에 서길 택했다. 정호환은 그 반대였을 따름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 잘못이 아니야.”
지금 떨어지는 눈물을 마지막으로, 성필은 전생을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