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2화
“저는 음악 업계에서 매우 특이한 시기에 커리어를 시작했어요. 앨범의 몰락이 가시화된 시기였죠.”
앨범은 지배적인 음악 플랫폼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그 성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인터넷의 대중화로 디지털 음원 파일이 유통됐다. 사람들은 인터넷의 바다에 굴러다니는 음원 파일을 좋을 대로 다운로드하여 들었다.
“음반 업계의 암흑기, 아시죠?”
“한국도 비슷했습니다.”
대중적으로 히트한 앨범이 100만 장씩 팔리던 시대가 저물었다.
앨범이나 음원을 돈 주고 사는 사람들이 바보 취급받던 시대였다.
불법 음원을 유통하는 건 비용이 0에 가까웠다. 불법 유통자들은 음원을 공유하는 곳에 광고를 걸어 수익을 얻었다.
뮤지션과 음반 회사들은 아사 직전에 몰렸다.
레이첼은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숨이 막힌단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황금기와 비교해서 음악계 전체 수익이 50% 이상 감소했어요.”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총국민소득이 절반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해보라.
예산도 절반으로 줄어들겠지.
그러면 그냥 나라가 망해버린다.
국가가 제공하던 모든 서비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여 단시간에 무법천지가 되어버리겠지.
다시 시스템을 쌓더라도, 옛날만큼의 위상은 결코 회복할 수 없으리라.
“모두 미래를 암울하게 보았죠. 결국 극소수의 슈퍼스타를 제외하고, 음악에 진지하게 임하는 인간은 없어지리라고요.”
‘프로페셔널 뮤직의 종말’은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기술 발전이 하나의 문화를 종말로 몰아갈 거라고, 다들 그리 믿었다.
뉴 밀레니엄 멸망 괴담은 음악계에 한해서만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이 암흑기를 목도한 업계인들과는 달리, 대중들은 비용이 0이나 다름없는 공짜 재화를 행복하게 누렸다.
마치 지구온난화 문제처럼, 잘못됐단 건 어느 정도 알지만 누구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려 했었다.
보통 사람들이란 당장의 행복이 더 소중하다.
하지만 인간은 종말이 눈앞에 다가와도 어떻게든 파훼할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전 세계의 음반 업계 사람들이 이 암흑기를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했다. 당연히, 가장 거대한 시장인 만큼 가장 피해가 컸던 미국에서도 그러했다.
각 회사의 중역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거듭했다.
“방법은 두 개.”
레이첼이 검지와 중지를 폈다.
“첫 번째, 콘서트 티켓 가격을 올린다.”
콘서트 티켓 가격은 물가상승률을 훨씬 앞질러 증가했다.
물가상승률이 100%라면, 미국의 대학 등록금은 200% 이상 상승해왔다. 콘서트 티켓 가격 상승이 그보다 더욱 가팔랐다.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었다.
“두 번째.”
레이첼이 검지를 까딱였다.
성필을 향해 맞춰보라는 것처럼 재치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면접관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지는 태도가 당돌하기 그지없었다.
성필은 희미한 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굿즈.”
“그렇죠, 아티스트와 관련된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는 거예요. 앨범으로 돈을 벌 수 없으니 다른 걸 팔기로 했다……. 저는 암흑기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머천다이징 사업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암흑기를 헤쳐 나간 경험이 있죠. 굿즈 산업이 오늘날처럼 고도화되기 이전부터 했으니, 현재를 만든 주역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죠?”
“그 주역이 수천 명은 되지 않을까요.”
레이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자랑은 과장되어 있었다. 성필은 그 부분을 지적한 것이었다.
하지만 과장되어있을지언정, 거짓은 아니다.
레이첼의 경험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종류일 것이다. 그녀는 커리어를 시작한 순간부터, 문자 그대로 절박한 마음으로 굿즈 사업에 임했을 게 분명하다.
음악을 사랑하여 음반 업계로 왔지만, 음반 업계가 망하게 생겼다.
레이첼은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상품을 다양화하고, 판매 장소를 물색하고, 판로를 개척하고…… 디자인, 생산, 현장 판매, 뭐든 손 안 댄 곳이 없어요.”
그녀의 과장된 어법이나 오늘 성필을 거짓으로 부른 무례함과는 별개로, 성필은 그녀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가장 격렬하게 투쟁하여 업계를 지켜낸 사람 중 한 명이니까.
레이첼은 자기 PR이 신통치 않다고 느낀 듯했다. 그도 그럴 게 성필은 계속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레이첼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팝업 스토어는 알고 계시죠?”
“……레이첼 씨, 저도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냥 일하는 게 아니라 이사고요. 제 지식을 굳이 확인하려고 안 하셔도 됩니다.”
“아, 죄송합니다. 제 버릇 같은 거라서.”
레이첼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팝업 스토어는 한 매장이 뮤지션 혹은 다른 콘텐츠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는 것이다.
일정 기간 관련 상품을 판매하게 된다.
“그걸 체계화된 사업 모델로 확립한 사람이…….”
그 말을 들은 성필은 눈을 크게 떴다.
팝업 스토어는 몇 년 전 레버 레코드 소속의 한 래퍼가 성공을 거둠으로써 사업성을 증명했었다.
그건 음악계에선 새로운 사업로가 개척된 거나 마찬가지인, 나름대로 대사건이었다.
성필이 놀란 기운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레이첼입니까?”
“제가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었어요.”
“……발의한 건 아니고요?”
“참여했었어요.”
성필은 흥이 식었지만, 그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레이첼은 개척자로서 머천다이징 사업을 헤쳐 나갔다.
누구도 하기 어려운 경험을 수십 년간 쌓아온 것이다. 심지어 레버 레코드에서 말이다.
능력지상주의인 삭막한 미국 음악계에서 수십 년간 같은 장소에 발붙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레이첼의 능력은 입증된 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능력에는 업무나 사회성 등 여러 종류가 있지만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인재인가?’
성필은 확실히 판단하기 어려웠다.
레이첼에게 전권을 준다면 꽤 신기한 프로젝트를 연달아 발의할 것 같긴 하다. 도전 정신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장님이 바라는 건 아티스트 IP사업부가 만들어지는 거야.’
제 기능을 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만약 바닥에서 시작하고자 한다면 연 단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아티스트의 IP를 이용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성필이 아는 것만 해도 꽤 많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시도할 수 있단 뜻은 아니다.
멀리뛰기를 못 하는 사람은 없지만, 잘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은가.
앎에도 얕음과 깊음이 존재한다.
성필에게 아티스트 IP 사업은 밝혀지지 않은 영역이었다.
‘그런데 머천다이징 업무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낸 레이첼이라면…….’
안정적으로 부서를 꾸려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커리어를 쌓은 시간은 전생의 성필보다 더 많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레이첼은 얼음과 섞여 맹맹한 콜라를 먹곤 미간을 좁혔다.
“의외로 암흑기는 싱겁게 지나갔죠. 황금기 때로 완벽히 돌아가진 못했지만, 옛날보단 상황이 훨씬 나아요.”
레이첼은 아쉽단 표정이었다.
아쉽다니.
‘그 혁신’이 일어났을 때 음악계 사람들은 발로 박수 치며 좋아했었다. 음악 불법 다운로드를 일시에 소멸시킨 혁명.
“그래도 개인적으로 통쾌하긴 했어요.”
“통쾌해요?”
“왜, 박 이사님도 그런 일 없었어요? 옛날에 음악을 사서 들으라고 하면, 공짜로 들을 수 있는데 왜 그러냔 답을 들었던 때요.”
“있죠. 제가 일하는 곳이 일하는 곳이다 보니 직접적으로 들은 적은 없지만요. 주변에서 하는 얘기는 들려왔어요.”
“그쵸. 저는 이런 말까지 들어봤어요. 더 좋은 양질의 서비스를 해주면 돈을 쓰지 않겠냐? 미친 소리 아니에요?”
“미친 소리죠.”
같은 것을 다룬다면, 그 어떤 양질의 서비스도 공짜를 이길 순 없다. 경제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걸 부정하는 건 바보밖에 없다.
그런데, 그 일이 벌어졌다.
그건 정말 기적이었다.
그 기적을, 누군가 이렇게 표현했다.
‘당신이 불법 복제품보다 더 나은 상품을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조 단위 기업 가치를 지닌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잉’. 그 창업자이자 CEO가 한 말이다.
공짜를 압도하는 음악 서비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창업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기술이 항상 승리한다.’
그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거인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거인의 이름은 인간의 욕망이었다.
현대인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건, 음악계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등장하여 업계의 판도를 뒤바꾸었다.
“그 미친 소리가 진짜로 이루어져서, 싱겁게 끝나버렸어요. 저는 이왕이면 돌파구가 머천다이징에서 등장하길 바랐다구요. 뭐, 어차피 아티스트 파생 상품이란 게 한 철 장사이기도 하니 어쩔 수 없지만요……. 잠시만요.”
레이첼은 콜라를 리필하여 자리로 돌아왔다.
성필은 레이첼이 또 수다를 떨 기미가 보이자 손을 들어 제지했다.
“대단한 분이란 건 알겠어요. 하지만 왜 케이팝 아이돌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지 듣지 못했네요.”
“중요한가요?”
“중요해요. 케이팝 아이돌을 이해하기 위해선 ‘오타쿠’적인 마인드가 필요해요.”
무언가에 열광하고 깊이 몰입하는 상태를 이해해야만 한다.
미국의 팝 시장과 과거의 록 등을 분석하던 평론가들이, 케이팝의 성공을 진단할 때마다 말이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게 그래서다.
애초에 아이돌를 파본 적이 없으니 ‘덕후의 마음’과 팬덤의 생태계를 모르는 것이다. 그걸 빼고 케이팝을 논할 수는 없다.
“팝스타처럼 멋진 상품을 만드는 것 이상의 사고(思考)가 필수입니다.”
“저는 소녀연맹을 좋아해요. 열정적으로. ‘위어스’ 멤버십에도 가입했어요. 뷔라이브도 챙겨봐요. 트잇터 케이팝 커뮤니티망(網)에서 활동하기도 해요. 특히 하양의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이 떨리곤 해요.”
“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물으신 건 이게 아니었죠. 왜 케이팝 아이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느냐…….”
레이첼은 입이 심심한지 남은 감자튀김의 부스러기를 몇 개 주워 먹었다.
“그게, 요 몇 년 새 케이팝 아이돌 앨범이 잘 팔리잖아요? 빌보드 차트에도 못 드는데 앨범만 몇만, 몇십만 장을 파니까 궁금한 거예요. 먼저 뮤비를 보고, 음악을 듣고, 그리고 앨범을 샀어요.”
레이첼이 손을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앨범이 그냥 앨범이 아닌 거예요! 굿즈 키트, 아니, 굿즈 패키지예요! 알아보니까 되게 옛날부터 그랬다면서요?”
레이첼은 이마를 탁 쳤다.
“머리에 전기가 꽂힌 거 같았죠! 아,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앨범이 안 팔리면, CD를 부속품 취급하고 팬들이 좋아할 만한 걸 넣으면 되는데! 정말, 정말이지, 그때 받은 충격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요.”
“그런 방법을 쓰는 팝스타들도 있지 않나요?”
성필이 가장 먼저 떠올린 팝스타는, 백설하가 좋아하는 ‘아리아나 그란데’였다.
그녀는 앨범에 굿즈를 사은품처럼 끼워 넣어 판매량을 올렸다고 논란이 됐었다.
그전에도 그러한 방법을 쓴 이들은 많았지만, ‘아리아나 그란데’가 유독 도마 위에 오르는 건 역시나 그녀의 엄청난 인기 때문이다.
유명인이란 길거리에 쓰레기만 버려도 곧장 십자가에 매달려는 인간들이 우후죽순 몰려오니 말이다.
앨범 끼워팔기나 초저가형 앨범 양산, 혹은 아예 앨범을 사은품으로 증정하는 상술과 비교하면 애교스럽긴 하지만.
아무튼 레이첼이 그러한 예시를 모를 리 없다.
“그런 건…….”
레이첼은 어른에게 덤비는 어린아이를 볼 때와 같이 실소를 머금었다.
“케이팝 아이돌의 앨범 패키지와 비교할 수 없죠. 저희 쪽이 하는 게 ‘어쨌든 앨범’이라면, 케이팝 아이돌은 ‘앨범은 됐고 굿즈’라는 느낌이라. 앨범이라고 부르지만, 앨범이라는 단계를 넘어섰다고 해야 할까요.”
성필은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첼이 바라보는 아이돌의 앨범은 그런 이미지로군.
그녀가 이야기를 이었다.
“대충 알아보니까 그런 상술을 좋게 보지 않는 여론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감탄했거든요. 박 이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다고 생각합니다. 케이팝 아이돌의 앨범이 그런 방식으로 바뀐 건, 레이첼과는 다른 방식으로 암흑기를 돌파하려는 방법이었으니까요.”
레이첼은 멍하니 있다가 ‘아……’ 감탄을 흘렸다.
“그렇군요. 앨범과 굿즈의 결합…….”
“한국에도 혁신을 생각해낸 사람이 있던 거예요. ‘스포티파잉’ 같은 걸 만들어내는 대신, 기존의 시스템을 바꾸는 쪽으로요.”
KS 엔터, SMS 엔터, YJS 엔터.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중 누군가가 먼저 이렇게 생각했다.
‘잠깐, 앨범에 뭘 좀 더 넣어볼까?’
한국의 아이돌은 일본의 아이도루(アイドル)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아이도루의 사업 방식인 ‘악수권’ 혹은 ‘하이터치권’ 같은 것을 차용하여 ‘팬미팅 응모권’을 만들었다.
팬카페도 그것을 위해 생겨난 문화였다.
아이도루의 앨범은 무미건조한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악수권 쪽지가 들어 있다.
거기에, 정호환·이준호·강성욱 중 누군가가 먼저 굿즈를 더하기로 결정했던 거다.
아니, 아예 CD를 밀어내고 굿즈가 주요한 상품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정품 음악’이란 단어에 쏟아지는 대중의 비웃음은, 저희로서도 이겨내기 힘들었죠. 지역 축제를 돌아다니며 돈을 버는 것 정도가 가장 좋은 수입원이었으니까요. 그 시절 엔터사는 전부 구멍가게나 다름없었어요.”
“그 판도를 바꾼 게 지금의 앨범 패키지군요.”
“케이팝은 거대해요. 거대해졌어요. 거대해진 이유가 그냥 ‘콘텐츠가 좋아서’일 리는 없죠. 돈이 필요해요. 팬들이 사고 싶도록 앨범을 만들어내는 노력과, 그 앨범을 사주는 팬들의 열정적인 지지로 이만큼 커진 거예요.”
그 과정이 없었다면 KS 엔터와 다른 대형 기획사들은 지금까지도 동네 구멍가게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 역사가 있었군요.”
레이첼이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어쩌죠? 더 가고 싶어졌어요.”
성필은 레이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깔보는 눈빛이 없어.’
세계 최고의 음악 시장, 세계 최고의 음악 회사에서 근무한 레이첼이다.
그런데 딱히 한국을 깔보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그 역사를 존중해주고 감탄해준다.
성필은 기분이 좋았다.
‘문제는 이 기분이 꼭 국뽕 영상 같은 거 봤을 때 찾아오는 기분 좋음이란 거지…….’
약간 부끄럽다.
“그럼, 레이첼.”
어쩐지 면접처럼 되어버렸다. 실제로 면접과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묻는 대신, 지금 물어두는 쪽이 좋겠지.
“왜 가로 엔터입니까?”
“그 질문을 하실 줄 알았어요.”
“대답도 준비해 오셨나요?”
“실은 두루뭉술했는데, 박 이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명확해졌어요.”
성필이 말해보란 듯 턱을 까딱였다.
“음반사가 아티스트와 계약하는 방식에 대해선…….”
레이첼은 성필의 눈치를 보다가 실없이 끝을 맺었다.
“아시겠죠?”
“네.”
계약하면 음반사가 아티스트에게 선불금, 혹은 계약금이라고 불리는 것을 준다.
몇만 달러 이상으로 금액이 꽤 많다.
이 돈으로 아티스트는 작업을 하는 동시에 뮤지션으로서 생계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선불금엔 상환 의무가 있다.
아티스트가 앨범으로 돈을 벌면, 음반사가 자동으로 징수해서 선불금을 깐다. 그 선불금을 모두 상환하면 그제야 이익이 아티스트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 선불금을 상환하는 뮤지션은 열 명 중 한 명이에요. 10%의 사람들만이 상환에 성공한단 거니, 저희 레버 레코드는 90% 확률로 손해를 본다는 거죠. 심지어 그 10%가 모두 다 돈을 벌어주는 것도 아니거든요. 음반사에 진짜 돈을 가져다주는 건 소수의 스타들이에요. 자갈 속에서 걸러진 0.1%의 보석이요.”
그래서 음반사의 사업 모델은 흔히 석유 탐사 회사와 비교된다.
땅 여기저기 관을 꽂아 석유를 찾아다닌다.
허탕만 치며 손해를 본다. 기껏 찾은 유정도 석유 몇 번 뱉고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아주 가끔, 석유를 물처럼 뱉어내는 지점을 발견한다.
그걸로 이제까지의 모든 손해를 메꾼다.
“한 명이 999명이 낸 손해를 메꾼다. 이게 저희의 사업 모델이에요. 아, 그런데 그것도 레버 레코드 같은 대형 회사에나 해당되는 얘기에요. 기회가 한 번뿐인, 아니면 고작 몇 번에 불과한 어중이떠중이들은…… 말씀 안 드려도 아시겠죠?”
“인생을 건 배팅에 성공할 확률이 0.1%보다 훨씬 낮겠죠. 가망 있는 뮤지션이 어중이떠중이 회사와 계약할 확률이 없다시피 할 거고. 가망이 있다면 대형 음반사에서 진작 채갈 테니까요.”
“그럼 궁금하지 않으세요? 레버 레코드가 어떻게 이렇게 커졌는지? 레버 레코드도 처음에는 그런 어중이떠중이였을 거 아니에요.”
“궁금하네요. 어떻게…….”
전 지구를 사업장으로 삼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한 명의 슈퍼스타를 찾아 돈을 번다.
그리고 10명의 뮤지션을 키울 돈을 얻고, 0.1%의 확률로 또 슈퍼스타를 찾는다.
그걸 반복하여 레버 레코드처럼 커진다.
확률적으로 말이 안 된다.
“어떻게 레버 레코드는 거대 기업이 됐죠?”
“가끔 있거든요. 그런 미친 확률을 뚫는 인간들이 말이에요. 기적이 이어지면 레버 레코드를 세울 수 있답니다. 간단하죠?”
“전혀 간단하지 않은데요. 그 이야기가 가로 엔터와 어떤 관련이 있죠?”
레이첼은 이야기가 장황한 타입이었다.
성필은 그런 사람을 몇 만나보았다. 상대하면 피곤해진다.
지금도 눈꺼풀이 조금 무거웠다.
그때, 레이첼이 도박판에 들어온 사람처럼 희열에 찬 미소를 띠었다.
“이사님의 행운은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네?”
“저는 가장 어두운 시기에 음악계에서 보냈어요. 우연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제가 직접 찾아갔어요. 저는 소용돌이 안에 있는 걸 좋아하거든요. 역사적인 순간을 지나쳐 보내곤 나중에 책에서 읽긴 싫어요.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고 싶어요.”
“그게 무슨…… 무슨 뜻입니까?”
“케이팝 아이돌은 글로벌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어요. 제 안목으로 판단하자면, 케이팝은 뉴미디어 시대가 배출해낸 첫 번째 글로벌적 하위문화예요. 앞으로 케이팝과 비슷한, 뉴미디어의 수혜를 받는 문화가 우후죽순 생기겠죠. 하지만 케이팝이 처음이에요. 최초의 영광을 거머쥐었어요. 그래서 의미가 있죠. 케이팝이 황금기에 이르고 쇠락의 문턱에 들어가는 걸, 제 눈으로 꼭 보고 싶어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물론이죠. 진심이 아니고서야 거짓말까지 해서 이사님을 뵈었겠어요?”
“케이팝이 정점에 이르고 쇠락하는 걸 보고 싶다고요?”
“이왕이면 정점에 이르는 순간 제가 있었으면 하네요.”
“그래서 선택한 게 가로 엔터라고요?”
“아니요, 저는 박 이사님을 선택했어요.”
성필은 어안이 벙벙했다.
“만약 10년 전이었다면 KS 엔터의 문 회장, SMS 엔터의 강 대표, YJS 엔터의 이 회장에게로 갔겠죠. 그런데 현재는 현재이고, 지금의 소용돌이는 박 이사님처럼 보여요. 실은 덕질의 대상이라고 할 게…… 소녀연맹이라기보다는 박 이사님에 가까워요. 소녀연맹의 행보를 처음부터 다 봤는데, 경이롭더라고요. 어때요, 납득할 만한 이유죠?”
“납득할…….”
성필의 숨이 짧게 탁 끊겼다.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정말 싫게도, 성필은 납득해버렸다.
만약 성필이 20년 전으로 회귀했었다면 KS 엔터로 들어갔을 것이다. 정호환의 곁에서 덕업일치의 삶을 살았겠지.
그런 의미에서 레이첼은 영리한 사람이다. 시운(時運)을 놓치지 않으니.
“이게 제 입사 동기예요. 답은 언제 들을 수 있을까요?”
“……레버 레코드에선 별말 하지 않습니까? 회사를 옮기는 거에 대해서요.”
“이 업계에선 일상다반사인걸요. 그런 건. 한국은 피이용자가 계약에서 벗어나는 게 힘든가요?”
“아뇨, 아니지만, 아…….”
성필은 왼손을 쥐었다가 폈다. 그리고 엄지손톱으로 새끼손가락 마디를 꾹 눌렀다.
감촉이 아닌 압력이 느껴졌다.
최근 생긴 성필의 버릇이었다. 정신을 깨우는 트리거 같은 것이다. 감각 없는 손에 압박을 가하던 그는, 이윽고 레이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예.”
성필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트폴리오를 보내주세요. 참여한 프로젝트와 성취 같은 걸 공개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요. 저희도…….”
미국인의 커리어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지?
미국의 헤드헌팅 회사 같은 데 연락해야 하나?
아니면 인터넷에 검색하면 이름이 나올까?
“이미 준비해왔어요.”
레이첼이 웃으면서 폰을 흔들었다.
“에어드롭으로 보내드릴게요.”
폰에 이미 포트폴리오를 넣어왔다니.
그녀의 철두철미함에 성필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런데 저는 애플폰이 아니어서요.”
“네? 그럼 뭐를…… 설마 밀키웨이? 아, 그렇구나. 밀키웨이 폰 제작사 본사가 한국에……. 애국심으로 쓰는 건가요?”
“…….”
“보기 좋네요. 그래도 굳이 애국심 때문에 더 열등한 기기를 쓸 이유는 없지 않나요?”
레이첼, 애국심(대한민국) 점수 마이너스 1점.
성필은 메일 주소로 자료를 받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보다 대화가 더 길어져서, 공항으로 급히 가봐야 할 듯하다.
“레이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성필이 손을 내밀자 그녀가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처럼 푸근한 웃음을 보였다.
연년생 자식을 셋이나 장성시켜서 그런가, ‘어머니’라는 느낌이 확 났다.
사람 지치게 하는 수다쟁이인 것과는 별개로, 포근한 분위기가 그녀를 감싸고 있다.
“저도요.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나야 했죠. 어떤 분이 거짓말을 하셔서.”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물어볼 게 있는데…….”
“패스트푸드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몸매를 유지하냐고요? 간단한 의학 상식인데, 섭취한 칼로리보다 쓴 칼로리가 많으면 살이 빠져요.”
“아뇨, 그게 아니라…… 만약 채용이 결정되면 언제 한국으로 올 수 있습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성필이 그녀의 손을 더 꼭 쥐었다.
“결정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이사님. 오…….”
레이첼이 갑자기 감탄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성필이 의아하여 물었다.
“왜 그러세요?”
“스타랑 악수했잖아요. 감격적이어서.”
“…….”
성필을 덕질한다고 했었지.
아부가 아니라 진짜인가, 아니면 이 모습도 채용되기 위한 아부인가.
성필은 떨떠름하게 손을 뗐다.
* * *
[박 이사, 돌아오자마자 미안하지만 사장실로 와줄 수 있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홍규헌에게서 연락이 왔다. 성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어차피 시각은 3시라 근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홍규헌이 부르지 않았어도 얼굴을 비칠 생각이었다.
게다가 성필은 빨리 그녀를 보고 싶기도 했다.
‘대박이야.’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레이첼의 포트폴리오를 꼼꼼히 살폈다. 그녀가 참여한 프로젝트들은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모두 역사의 한 페이지들이었다.
굿즈 산업이 고도화되는 과정에 놓인 빛나는 돌다리들이었다.
그녀가 했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괜히 레버 레코드에서 수십 년간 발붙이고 있던 게 아니었어.’
임원은 아니지만, 고위직까지 오른 이유가 있다. 절대 노름으로 따낸 직위는 아니다.
‘이런 사람이 가로 엔터에 들어와 준다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케이팝 아이돌의 감성에 관해서는 주변의 보조가 필요하겠지만, 충분히 감내할 만하다.
레이첼이 감을 잡기까지 이제껏 굿즈 관련 업무를 맡았던 손혜빈이 도와주면 되겠지.
‘카오틱 에너지의 프로듀서로서 바쁘겠지만…….’
손혜빈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가로 엔터는 최대한 빠르게 성장해야만 하니까.
미안하기에, 성필은 야근하는 동안 그녀의 별이 되어 계속 옆에서 빛나줄 생각이다. 무슨 뜻이냐면, 어차피 성필은 자발적 야근자이니 계속 옆에 있겠단 거다.
이젠 옛날처럼 외롭진 않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회사에 도착했다.
“사장님, 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사장실로 들어오자마자, 성필은 형용하기 힘든 분위기를 느꼈다.
그래, 무거웠다.
우울했다.
여느 때처럼 책상 맞은편에 앉은 홍규헌은 그늘진 얼굴로 성필을 보았다.
그 앞엔 민경섭과 손혜빈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표정도 홍규헌보다 나을 게 없었다.
“어, 박 이사 왔어? 의자 가져와서 앉아.”
성필이 구석에서 의자를 가져오기 전에, 민경섭이 먼저 일어나 의자를 가져와 옆에 놓았다.
성필은 고맙단 인사와 함께 그곳에 앉았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됐다.
“그, 무슨 일이에요?”
홍규헌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마치 담배를 피우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성필에게서 시선을 피한 채 나지막이 읊조렸다.
“콜베르 있잖아.”
“네.”
카오틱 에너지의 데뷔조, 즈비그니예프 콜베르게르. 별명은 부르기 쉽도록 ‘콜베르’가 되었다.
“멍이 있더라고. 오늘 티저 영상 촬영 건으로 스타일리스트와 작업을 했는데, 스타일리스트가 말해주더라.”
“멍이요……?”
성필은 머리가 차가워졌다.
“뭐, 사고라도 당했나요?”
성필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과거 장하양이 다쳤을 때였다. 진소유, 우효민, 라희와 무대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다쳐서 2주간 쉬어야 했다.
“많이 심해요? 데뷔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그제야 성필은 이곳의 분위기가 침울했던 게 이해가 갔다.
만약 콜베르게르의 상태가 심각하다면, 눈물을 머금고서라도 데뷔를 미뤄야 하리라.
그런데 데뷔를 미룬다면, 방송국 스케줄상 몇 개월 후로 밀릴 수도 있다.
나이는 아이돌의 무기다.
카오틱 에너지의 훗날 프로듀싱 기획은 멤버들의 나이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여느 아이돌이 다 그렇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몇 개월이 허비된다면, 그건 엄청난 손실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심지어 내년 목표가 상장인데, 차기 그룹으로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성필은 아까 홍규헌이 했던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심하다면, 어쩔 수 없죠. 건강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괜히 몰아쳤다가…….”
“민 이사. 설명해줘.”
“네.”
성필은 말이 끊기자 당황했다. 그리고 어리둥절하여 민경섭을 쳐다보았다.
민경섭은 성필에게로 돌아앉고 손을 들었다. 그의 손이 민경섭 자신의 왼쪽 가슴에 이르렀다.
“여기부터.”
왼쪽 가슴에서 아래로.
명치.
그리고 왼쪽 허벅지 안쪽.
“여기까지예요.”
“……뭐?”
성필은 말 그대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건, 그렇게 멍이 든다는 건…….”
평범한 사고 같은 걸로 드는 멍이 아니다.
팔이나 다리면 혹시 모른다.
사람은 넘어지거나 부딪칠 때 무의식적으로 팔과 다리가 나간다. 중요 장기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다.
만약 사람이 몸 안쪽에 멍이 든다면, 그것도 넓은 범위에 걸쳐서 멍이 든다면, 그건 교통사고이거나…….
쉽게 생각해서, 누군가에게 공격당한 거다.
왼쪽 가슴, 명치, 허벅지 안쪽.
특히 허벅지 안쪽은 절대 우연으로 상처가 생길 부위가 아니다.
“콜베르가 스타일리스트한텐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사고를 당한 거였으면 숨길 리 없다.
콜베르게르가 공격당했다.
누구한테? 회사와 숙소만 오고 가는 콜베르게르가 누구한테 공격당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한테 맞는단 건가?
멤버밖에 없다.
‘이건…….’
성필은 황망해졌다.
‘멤버 퇴출까지 고려해야 할 상황…….’
“끄흑…….”
그때 흐느낌이 퍼졌다.
그 목소리는 성필이 알기로, 절대 흐느낌 따위 내뱉지 않을 사람이었다.
“흐으윽…….”
손혜빈이었다.
손혜빈은 고개를 숙인 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홍규헌의 앞이라 참으려는 게 보였지만, 참을 수 있는 종류의 슬픔이 아니었다.
아까 성필이 떠올렸듯, 카오틱 에너지가 공중분해 될 위기인 것이다.
손혜빈이 메인 프로듀서를 맡아서, 1년 넘게 준비해온 프로젝트이며, 그 멤버는 손혜빈이 거의 직접 뽑다시피 했다.
성필이 소녀연맹에게 가지는 애정을, 손혜빈은 카오틱 에너지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으흐, 흐끄으윽…….”
홍규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혜빈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그녀를 뒤에서 안아주었다.
그게 방아쇠였다.
손혜빈은 오열했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절규했다.
그걸 보는 성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년.’
카오틱 에너지의 데뷔조를 뽑고 여기에 오기까지 1년. 연습생 기간까지 합치면 그보다 더 긴 시간.
그 시간이, 전부 허사로 돌아갔다.
아니,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
손혜빈이 울고 있다.
성필은 피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정수리를 뚫고 나올 듯했다. 혈압이 높아져 귀에 심장박동이 들릴 지경이다.
시야가 붉어지는 착각이 든다.
손혜빈이 울고 있으니까.
성필이 떠올리기로 그녀가 이렇게 운 적은 단 한 번뿐이었다. 당시의 그녀는 절망에 절망이 겹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그녀도 그때와 같은 상태란 뜻이 된다.
성필의 머릿속은 분노로 가득했다.
손혜빈을 울게 만든 인간을 때려죽이고 싶단 생각밖에 없었다.
* * *
“아, 미치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운전병이 됐을 걸 그랬다.
“운전도 잘 못 하는데…….”
내일 바로 운전을 해야 한다니.
게다가 부푼 꿈을 안고 기획사에 입사했더니,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서울의 지리를 외우는 일이라니.
전역할 때 기대했던 미래와는 꽤 달랐다.
성필은 옥상과 연결된 건물 계단 상층까지 와서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선배 매니저에게 받은 서울 지도책을 폈다.
“상암동이 여기고…… 우리 회사까지 오려면…….”
성필이 짜증을 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손에서 놓았다. 무언가를 외우고자 하니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차라도 있으면 직접 운전하면서 연습해볼 텐데, 아, 미치겠다 진짜.’
직업을 잘못 선택한 건가…….
그때 위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녹슨 경첩이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였다.
성필이 깜짝 놀라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옥상의 양철 문이 열리고, 햇빛을 받아 검은 실루엣이 안으로 들어온다.
이윽고 그가, 아니, 그녀가 계단 위에 섰다.
서서, 성필을 내려다본다.
“음?”
고운 음색이다.
열린 문에서 들어오던 빛이 잦아들었다. 구름일까, 무언가가 해를 가린 것이다.
그녀의 모습이 명확해졌다.
깊은 쌍꺼풀 아래의 눈은 신비함을 품었는지, 인간 같지 않은 광택이 흘렀다. 그 눈을 보고 성필은 얼이 빠졌다.
그 눈은 그녀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혼혈처럼 보인다. 중국의 어느 소수 민족과? 태국이나 인도와? 혹은 중앙아시아의 어느 부족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니면 더 멀리 나가 우크라이나, 중동, 서양이라 해도 믿겠다.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비단이 나부끼듯 일렁였다. 일렁였다는 건 성필의 착각이 아닐 터였다.
열린 문으로 봄바람이 불어 그녀의 가느다란 속눈썹을 간지럽혔다.
바람의 간지러움 때문인지 그녀가 미소를 띠었다.
“볼 거 없을 텐데요?”
그녀가 입은 치마가 깃발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그녀는 그대로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왔다.
“속바지 입어서. 너무 빤히 쳐다보신다.”
그제야 성필은 자신이 굉장한 실례를 저지르고 있단 것을 눈치챘다.
치마 입은 사람을, 심지어 바람 때문에 치마가 펄럭이고 있는 사람을, 계단 아래에서 빤히 바라본 것이다.
그가 눈을 팍 내리깔았다.
또각또각,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곧이어 숙인 시야에 그녀의 검은 구두가 보였다. 그리고 바람에 펄럭였던 하얀 치마도.
“여자 속옷은커녕 속바지도 본 적이 없나 보네요. 진귀한 경험이라 눈을 떼기 힘들었어요?”
“아, 아, 니, 그, 아니…….”
한숨이 들렸다.
“얼굴 들어요.”
들었다.
성필은 광채가 비쳐오는 듯하여 눈을 반만 떠야 했다. 아니, 그녀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손혜빈이에요. 그쪽은 누구예요?”
진짜 손혜빈이다.
성필은 황급히 지도책을 양손으로 공손히 들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바, 박성필입니다.”
“그리고?”
“네?”
“박성필 씨, 그리고요? 뭐 하시는 분인데요?”
“아, 그, 저는…….”
성필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비교하자면 자신은 길가에 굴러다닐 자격도 없는 돌멩이였고, 그녀는 별 대신 박혀도 좋을 보석이었다.
성필은 절로 위축되어 말했다.
“새로 온 로드 매니저, 입니다……. 그, 아마 혜빈 씨를 맡게 될 거 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
“혜빈 님.”
“……네?”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흐르는 눈. 그녀의 깊은 쌍꺼풀 끝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혜빈 님이라고 불러야지?”
“…….”
성필은 침을 꼴깍 삼켰다.
보지 않아도 얼굴의 열기로 알겠다.
지금 자신의 얼굴은, 홍당무보다 더 새빨갛게 달아 있다. 막 전역한 터라 안 그래도 여자에 면역이 없는데, 그 상대가 손혜빈이라니.
이렇게 숫기 없는 모습을 보인단 게 부끄러웠다.
동시에 그녀와 마주한 게 기쁘기 그지없다.
성필이 가쁜 열기로 가득한 숨을 뱉으며 말했다.
황홀한 투로.
“네, 혜빈 님…….”
박성필, 청춘기(靑春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