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33화 (733/760)

733화

애처로운 울음이 이어지기를 잠시.

손혜빈은 뜨거운 숨과 함께 눈가를 닦았다. 그녀는 뒤에서 안아 자신의 목을 감싼 홍규헌의 팔을 부드럽게 짚었다.

홍규헌은 말끝을 흐렸다.

“이제 괜찮…….”

손혜빈은 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규헌은 손혜빈에게서 떨어져 잠시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라본다고 마땅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홍규헌은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깊은 심호흡 소리와 함께 손혜빈의 등이 들썩였다. 이윽고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논의를 이어 나가려던 홍규헌은 성필의 얼굴을 보곤 그만두었다.

성필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적나라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혹시 성필은 이 일의 내막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저토록 분노한 건가? 홍규헌이 그에 대해 물었더니 성필은 삭막하게 모른다고 답할 뿐이었다.

홍규헌이 멋쩍게 말을 줄이자, 손혜빈이 나긋한 미소와 함께 그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그에 성필은 눈을 내리깔고, 분노로 덥혀진 숨을 삼켰다.

“그래서.”

홍규헌이 민경섭을 쳐다보았다.

“민 이사는 어떻게 봐?”

어떻게 보냐.

매니지먼트 이사로서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 거냐고 묻고 있다.

질책이 아니었다.

홍규헌은 간단명료하게, 이 사태에 대한 방안만을 묻는 것이었다.

“저는.”

민경섭은 앉은 다리 사이로 손깍지를 꼈다가 풀었다가, 정신 사나운 행동을 반복하며 말했다.

평소였다면 홍규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을 테지만, 지금은 감히 불경하게도 땅바닥을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도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실수란 게 있다고 믿어요.”

홍규헌의 눈썹이 꿈틀댔다. 의아하단 표시였다. 허나 그녀는 민경섭이 계속 말하도록 두었다.

“법도 초범에겐 관대해요. 첫 번째는 실수일 수 있다, 그게 이성적인 판단이니까요. 그렇죠, 심판만 있고 용서가 없으면 안 되죠. 손자병법에도 적이 도망갈 구석은 두라고 하니까요. 용서가 없다면 사람들이 반성할 이유도 없잖아요. 용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반성할 바엔 뻔뻔하게 아니라고 잡아떼고 모른 척하는 게 더 합리적이죠.”

민경섭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철학적인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그게 그의 정신상태를 반영했다.

논리를 쌓아 올려야만 한다. 아무런 설명 없이 대뜸 자신의 판단만 말해선 안 되는 사안이란 것이다.

“충분한 징계와 당사자들 간의 합의가 뒤따른다면, 네, 용서할 수 있습니다.”

“봐주자는 거야?”

홍규헌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다그치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녀조차 이 사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기에 민경섭의 판단을 듣고픈 것이었다.

“아니요.”

민경섭이 바닥만 보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에 단호함이 비쳤다.

“카오틱 에너지 애들은 어려요. 절제가 부족할 수 있어요. 그래서 딱 한 번…… 실수를 저질렀다. 폭력을 행사했다. 네, 단 한 번이라면 어떻게든 수긍할 수 있겠는데요. 근데 콜베르의 멍은…….”

고작 한 번으로 설명이 안 된다.

여러 번이다. 악의가 느껴진다.

“폭력을 써 버릇한 인간이 남긴 흔적이에요.”

민경섭이 혐오스럽단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문제를 해결하는 덴 쉬운 방법과 어려운 방법이 있다. 어려운 방법은 말로 하는 것이고, 쉬운 방법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해온 인간은 영혼이 저열함으로 물든다.

화합과 대화로 상징되는 인내는 점점 닳아 소멸하고, 종국에 남는 건 짐승뿐이다.

“적어도 저는 그런 인간에 대한 적합한 심판을 내릴 수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관리할 수도 없겠고, 하고 싶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

그리 말한 홍규헌은 갑자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들파들 떨렸다. 닫힌 눈꺼풀 안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떴다.

“만약 우리의 가정이 맞다면, 박 이사의 생각은 어때?”

홍규헌은 손혜빈의 답을 최후로 미루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손혜빈은 카오틱 에너지의 메인 프로듀서다. 성필도 총괄 프로듀서로서 카오틱 에너지에게 애정이 있겠지만, 손혜빈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손혜빈은 반드시 모두의 의견을 듣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만 한다.

“방출해야 합니다.”

그게 다였다.

홍규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혜빈을 바라보았다. 손혜빈은 묵묵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게 답이었다.

“오케이, 콜베르를 불러 이야기를 들어볼까. 스태프가 물었을 때처럼 콜베르가 얼버무리면 카오틱 에너지 전원을 차례로 부른다. 그러고도 답이 나오지 않으면, 데뷔는 미룬다. 그리고 범인이 카오틱 에너지 안에 존재한다면, 그 멤버는 방출하고 또한 데뷔를 미룬다. 다들 이견은 없지?”

“자, 잠시만요.”

그때 손혜빈이 손을 들었다.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몰렸다.

손혜빈은 그 관심을 받아들이기 벅찬지 가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죄지은 사람처럼 입술을 떨며 말했다.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손 이사님.”

민경섭이 발끈했다.

“분초를 다투는 일이에요. 최대한 빨리 결정해서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4인 데뷔든, 아니면 남은 한 명을 또 새로 뽑아서 다음 데뷔 날짜를 잡든 할 수 있어요. 한시가 급해요. 시간을 달라는 건…….”

손혜빈의 어리광일 뿐이다.

민경섭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물론 그녀의 마음은 십분 이해한다.

1년 넘게 아이들을 보아왔으니 어떤 심경이겠는가.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겠지. 그 무너짐과 대면하고 버티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할 터다.

하지만 단 하루라도 허투루 버려선 안 된다.

“정말 데뷔를 미룬다면 하루라도 빨리 방송국에 알리고, 미리 찍어둔 콘텐츠들도 폐기하거나 수정해야 하고, 또 프로모션 스케줄은요? 머천다이징 기획들은요? 곡은요? 당장이라도 A&R팀에 수정을 요청해야 하잖아요.”

손혜빈은 반박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이 어리광 부리고 있단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에 가는 게 무서워 막상 다가온 등원길에 부모님을 붙잡고 우는 꼴이다.

손혜빈의 연약함이다.

“손 이사님은…….”

“그만.”

민경섭의 말이 뚝 끊겼다.

성필이 끼어든 것이다. 그는 참담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목소리로, 다시 민경섭에게 말했다.

아까는 명령하는 어조였다면, 이번엔 부탁이었다.

“그만해줘, 경섭아.”

“형…….”

성필은 민경섭이 손혜빈을 몰아붙이는 것을 보고 있기 힘들었다. 민경섭의 판단이 매우 합당함에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손혜빈의 연약함.

그 약점이 찔려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는 손혜빈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사장님.”

“어, 박 이사.”

“웃기게 들리시겠지만, 경섭이 빼고 저희들은 월급을 거의 최소 수준으로 받고 있잖아요.”

“그렇지.”

“그럼 누나한테 직원 복지 차원으로 하루만 시간을 주실 수 없으실까요?”

“직원 복지…….”

홍규헌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상황에서도 재치를 잃지 않는 성필에게 감탄했다.

“저희 모두 카오틱 에너지 애들을 시작부터 봐왔어요. 경섭이도, 사장님도, 저도, 다 같이 한 마음일 겁니다. 슬프죠. 그런데, 누나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같은 프로듀서로서,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누나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손혜빈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슬픔을 모조리 뱉어내고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시간을요.”

홍규헌은 눈만 돌려 민경섭의 의사를 물었다.

민경섭은 말없이 자신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툭, 툭, 툭, 내리쳤다.

동물원에 오랜 시간 갇힌 동물처럼 스트레스성 행동을 반복하던 민경섭은, 기어코 숨겨둔 슬픔이 배인 목소리로 수긍했다.

“오늘은 잠 못 자고 계속 눈 뜨고 있겠네요.”

결판나지 않은 논의가 끝났다.

홍규헌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끝으로, 성필은 사장실 문을 닫고 나왔다.

“성필아, 나 휴게실에 좀.”

손혜빈의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성필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러 부축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성필에게 기대어 왔다.

옛날보다 더 가벼워진 것 같다.

손혜빈은 매우 느리게 걸었으므로, 그녀와 발맞춘 성필 또한 느렸다. 천천히 난간을 짚으면서 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때 난간 아래로 홀의 휴게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옛날엔 소녀연맹 멤버들의 휴게 거점으로 사용되던 공간에, 이젠 콜베르와 임한결이 보였다.

콜베르는 팔꿈치를 허벅지에 대고 손으로 턱을 괸 채 무어라 열정적으로 떠드는 임한결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임한결은 신나서 이야기하는데 콜베르는 가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콜베르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자신의 왼쪽 가슴을 긁적였다.

그걸 보자 성필은 심장이 철렁여왔다. 콜베르가 긁은 것이 자신의 심장이기라도 한 것처럼.

“3층 휴게실로 가자.”

계단에 도착하자 손혜빈이 그리 말했다.

자주 사용하던 휴게실은 1층에 있는데, 굳이 3층으로 가자고 한다. 이유는 짐작할 만하다.

둘은 힘겹게 3층으로 올라갔다.

“두 분이 어쩐 일로?”

한 손에 커피를 든 김덕팔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해외사업부 사무실은 3층에 있어서 이 셋은 평소에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

김덕팔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나타났다. 하지만 곧 사라졌다.

“수고하십시오.”

손혜빈을 본 그는 고개를 꾸벅하며 둘을 지나쳐갔다.

휴게실로 들어오자 적막이 반겨주었다.

유리 세공품 다루듯 조심스럽게 손혜빈을 자리에 앉혔다. 그녀는 쓰러지듯이 테이블에 팔을 얹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커피?”

답이 없었다.

성필은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녹차 티백을 두 개 꺼내었다. 물이 끓기를 기다려 녹차를 타서 그녀의 앞에 두었다.

성필이 녹차의 쓴맛을 즐기는 동안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성필의 눈에 손혜빈의 등이 들어왔다. 반듯하게 펴진 평소와 달리 어깨와 등이 익은 벼처럼 굽어 있었다.

“누나.”

성필은 쾌활한 목소리를 지어내며 그녀의 뒤에 섰다. 그리고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자연스럽게 마사지를 시작했다.

“내가 매니저였을 때 누나가 날 무슨 마사지 기계처럼 썼었잖아. 매일 어깨가 결린다면서. 근데 거짓말이었나 보네. 매일 어깨가 결린다면서, 가로 엔터 와선 몇 번 주물러달라고 하지도 않았잖아. 그냥 그땐 나 골탕 먹이고 싶었던 거지?”

성필의 정성스러운 손길에도 손혜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숙인 얼굴은 장막처럼 드리운 머리카락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굽은 탓에 평소보다 작아 보이는 등만이, 성필이 볼 수 있는 유일할 것이었다.

“성필아.”

손혜빈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응, 누나.”

“술 마실까, 오늘.”

성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 * *

처음에는 신기해서 이곳저곳 둘러보던 방송국도 이젠 어느 정도 적응됐다.

성필은 손혜빈의 등만 바라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시원스러운 그녀의 다리가 뻗어나갈 때마다 백색의 복도가 휙휙 지나갔다.

분명 그녀는 걷고 있을 텐데도 매우 빨랐다. 성필은 그녀를 따라가느라 거의 경보 수준으로 움직여야 했다.

“저, 혜빈…… 님…….”

“뭐어?”

손혜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큰소리로 되물었다.

“할 말 있으면 똑바로 크게 해!”

성필은 침을 꼴깍 삼켰다.

“혜빈 님.”

지나가던 스태프들이 뭔가 해서 성필 쪽을 쳐다보았다. 성필 특유의 낮고 울리는 목소리는 과하게 잘 퍼져서 자연스럽게 이목을 끌었다.

성필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보이는 게 또 손혜빈의 새하얀 다리였던 터라, 아까보다 얼굴이 붉어진 채 또 시선을 올려야만 했다.

“혜빈 님.”

“아하하하하핳!”

손혜빈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보지 않고도 성필의 몰골을 알겠단 태도였다.

“어, 이 혜빈 님한테 무슨 볼일인데?”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하지만…….”

성필은 손혜빈을 ‘혜빈 님’이라고 부르는 동안 그 영향 때문인지 고풍스러운 단어를 쓰게 되어버렸다.

“제가 꼭…… 화장실에 갈 때도 따라가야 합니까……?”

성필의 품에는 손혜빈의 자그마한 핸드백이 안겨 있었다. 아까 화장실 앞에서 기다릴 때도 품고 있던 것이었다.

“매니저 일이 뭐야? 아티스트가 불편하지 않도록 이것저것 하는 거 아니야? 근데 뭐가 불만이야? 네가 선택한 일이잖아. 버텨야지.”

“그, 근데, 다른 분들은 매니저를 안 데리고 다니는 거 같아서, 요…….”

성필은 화장실 앞에서 기다릴 때마다 수치심에 어쩔 바를 몰랐다.

그토록 우상으로 그려왔던 손혜빈이 화장실을 간단 걸 믿고 싶지 않아서일까? 물론 그녀가 ‘화장실’이라고 말했을 땐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랐긴 했다. 그런데 그러한 10대 중반 소년같은 고민 때문은 아니었다.

“정말…… 창피합니다…….”

여자 스태프들이 성필을 보며 수군거리는 것도, 아이돌들이 의심쩍은 눈빛을 보내는 것도, 아무튼 전부 다 창피하다.

성필은 이게 괴롭힘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부탁했다.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야. 내가 널 괴롭히는 거 같아?”

손혜빈이 어느 문 앞에서 멈추었다. 성필은 헐레벌떡 그 문을 열었다.

안에는 오늘 촬영 예정인 예능의 스튜디오가 있었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비추는 촬영장 세트를 제외하곤 하나같이 검기만 하다.

그 검은 배경을, 손혜빈이 다시금 질주하듯 걷기 시작했다. 성필이 문에서 손을 놓고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네가 하는 건 매니지먼트야. 내 매니저잖아. 내가 시키는 걸 해야지. 내가 사리에 안 맞는 말을 하니?”

손혜빈이 본인의 자리로 돌아와 털썩 앉았다. 그리고 거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았다.

“일하러 왔으면 일을 해. 이거 하기 싫어요, 저거 하기 싫어요. 그러다 보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참으로 지당하고 합당한 말이다.

손혜빈이 뽀얗고 보드라운 손을 척 내밀었다. 성필은 물끄러미 그 손을 보다가 ‘아!’ 하고 음료수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손혜빈은 음료를 몇 모금 마시곤 말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까 그러더라. 우리나라 사람 70%가 대학에 간대. 그럼 넌 30%잖아. 학력이 낮은 만큼 의지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어?”

“……혜빈 님도 대학 안 나왔잖아요.”

“야!”

손혜빈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주변의 이목이 몰린 걸 신경 쓰지도 않고, 그녀가 성필을 타박했다.

“난 대재(大在)야 대재! 대학 다니고 있다고! 대학생이랑 그냥 고졸이랑 같아?”

일주일에 수업 딱 두 번 들으러 학교에 간다.

게다가 그 수업마저도 빼먹을 때가 많다.

그러니 대체 언제 졸업할지 감도 안 온다.

하지만 성필은 입술을 꾹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면 눈물이 흐를 것 같다.

‘이런 사람이, 내가 군대에 있을 때 그토록 흠모하던 손혜빈이라니…….’

매일이 유서(遺書)다.

꿈이 죽어갈 이유만이 늘어난다.

얼마 안 가 속절없이 시드는 계절처럼 성필의 꿈도 자취를 감추게 되겠지.

“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때 어디 있었는지 모를 성필의 선배 매니저가 다가왔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어, 성필이.”

선배는 성필이 있는 둥 마는 둥 대했다. 어차피 곧 도망갈 놈이라고 생각하는 게 뻔히 보였다.

“혜빈이가 또 왜 기분이 안 좋을까?”

“몰라.”

혜빈이 팔짱을 끼며 새침하게 답했다.

선배가 성필에게 눈짓했다. 그는 손혜빈의 눈치를 보다가 우물쭈물 답했다.

“제가…… 좀…… 투정을 부렸습니다.”

“투정? 무슨 투정?”

“혜빈 님 화장실 갈 때 따라가기 싫다고…….”

성필은 선배가 웃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눈썹을 귀신처럼 세우고 비아냥을 담아 말했다.

“혜빈 님? 너 압존법은 엿이랑 바꿔 먹었냐? 전역한 지 얼마 안 됐단 새끼가…….”

“즈, 죄송합니…….”

“뭐어?”

손혜빈의 목소리가 또 히스테릭하게 높아졌다.

“오빠가 나보다 높아?”

“……어?”

“아아, 그렇구나. 내가 오빠 아랫사람이구나?”

“아, 아니이. 꼭 그렇단 뜻은 아니고…….”

선배는 사람 좋은 얼굴로 얼버무리다가 또 뭐 확인할 게 있다며 유유히 사라졌다.

성필이 관찰하기로, 저 선배가 가장 잘하는 건 전화 받는 척이다.

“시팔 하여튼…….”

손혜빈이 그리 중얼거리며 검지로 입술을 쓸었다. 그리고 짜증스럽게 검지와 중지를 까딱였다.

담배를 찾는 것이다.

성필의 꿈이 신음했다. 또 유서가 늘었다면서. 이젠 더는 버틸 수 없겠다며 성필을 향해 단말마를 내뱉기 직전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문하사를 할걸.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야, 혜빈이.”

손혜빈의 스트레스가 가라앉을 새도 없이 또 누군가 다가왔다.

이 프로그램의 피디였다.

술과 간식으로 연마한 올챙이배가 인상적인 피디는 허허 웃으며 손혜빈에게 다가왔다.

손혜빈은 들리지 않도록 한숨을 뿜은 후, 활짝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성필은 어물쩡 있다가 피디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피디는 성필을 존재하는 사람 취급도 해주지 않았다. 그의 눈은 손혜빈에게만 박혀 있었다.

“노래 좋더라?”

“감사합니다. 이렇게 피디님이 바로 불러주시고, 정말 곡이 잘된 거 같아요.”

“그래, 그런데 방송 무대 보니까 의상이 되게 과감하더라. 행사 다니면 이상한 애들 없어? 막 집요하게 무대 아래에서 사진 찍는다거나, 응?”

피디가 노골적으로 아래를 보며 말했다. 그의 눈에 저열한 욕망이 번들거렸다.

성필은 기분이 확 나빠졌다. 생리적인 불쾌감으로 피가 식고, 다음으로는 손혜빈의 반응이 걱정되어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어쩔 수 없죠. 이상한 눈빛으로 본다고 발로 차버릴 순 없잖아요?”

손혜빈이 싱그러운 미소로 답했다.

피디는 좋다고 웃었다. 자기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아무튼 그래, 잘해봐.”

피디는 손혜빈의 팔을 마사지하듯이 주무르곤 자리를 떠났다.

손혜빈은 잠시 피디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성필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성필이 재빨리 그녀의 손에 음료를 쥐여주었다.

“퉷.”

그녀가 반이나 남은 음료컵에 침을 탁 뱉었다.

그리고 털썩 의자에 앉았다.

치마가 펄럭이는 걸 본 성필이 기겁하며 외투를 벗어 그녀의 다리에 덮어주었다.

손혜빈은 고맙단 말도 없이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어깨도 아프고 몸이 다 쑤신다아아아아아아아. 비가 와서 그런가.”

“어깨 주물러드릴까요? 제가 군대에서…….”

“하여튼 시팔 어떻게든 내 몸에 손대고 싶어서 아주 속이 바짝바짝 타지? 나 처음 봤을 때도 눈을 못 떼더니.”

“……죄송, 합니다.”

손혜빈과 함께 지낸 모든 계절이 유서였다.

안녕, 꿈이여.

한 청춘이 품었던 고귀한 환상이여.

성필에게 찾아온 마법의 가을은 끝이다.

“스탠바이 들어갑니다!”

손혜빈이 힘없이 일어나 세트장으로 들어갔다. 성필은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작게 ‘파이팅’을 외쳤다.

이 또한 손혜빈의 괴롭힘 중 하나였다. 그녀가 뭔갈 하려고 할 때마다 자동반사로 ‘파이팅’이라 말하라고 했다.

그때마다 손혜빈은 웃곤 했는데, 못 들었는지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시작합니다!”

촬영이 시작되자 선배 매니저도 돌아왔다.

예능은 MC의 인사와 함께 시작됐다.

이 예능은 오늘 막 시작한 것으로, 타이밍 좋게 컴백한 손혜빈이 게스트 MC를 맡게 됐다. 반응이 좋다면 그녀가 고정 출연할 수도 있다.

엄청난 기회다.

텔레비전 외에 홍보 수단은 사실상 전무하니까.

고정적으로 예능에 얼굴을 비출 수 있다면 손혜빈의 인지도는 지금 이상으로 상승할 것이다.

그런데 손혜빈은 제대로 촬영에 임하지 못했다. 긴장했거나 예능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태도 자체가 불성실했다.

질문에도 대강 답하고, 코너가 돌아와도 대강대강 임할 뿐이었다.

촬영이 끝났다.

손혜빈이 선배 매니저 쪽으로 왔다. 선배 매니저는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뒤로 올챙이배를 출렁이며 뛰어오는 피디가 보였기 때문이다.

“야아아아―!”

선배 매니저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죄송하단 말만 반복했다. 손혜빈은 흥미 없단 눈빛으로 허공인지 벽인지 모를 곳을 보았다.

“너희들 죽고 싶어?!”

장장 수십 분에 걸친 분노는 스태프들이 조심스럽게 만류하고서야 끝이 났다. 떠나면서도 피디는 손혜빈네 회사를 매장하겠다느니 역정을 냈다.

선배 매니저는 곧바로 손혜빈을 다그쳤다.

“너 뭐 하자는…….”

“나 택시 타고 갈 거니까 오빠는 알아서 가요.”

손혜빈이 거칠게 스튜디오를 떠났다.

“어, 너 어디가? 야, 혜빈아! 혜빈아!”

선배 매니저는 당황하며 손혜빈을 쫓았다.

성필은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는 품에 안은 손혜빈의 핸드백을 내려다보았다.

* * *

대표 집무실엔 담배 연기가 연신 피어올랐다.

대표와 손혜빈이 동시에 담배를 물고 연기를 뿜어댔다. 성필의 선배 매니저도 골초라지만, 이 대표실은 거의 화생방이었다.

문을 열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라 그런 가벼운 제안을 하기에도 눈치가 보였다.

“내가 그 피디 있는 덴 가기 싫댔잖아. 그 시팔 범죄자 새끼. 오빠도 알잖아?”

손혜빈이 말하는 오빠란 매니저가 아니라 대표를 뜻했다.

“여자 게스트들 나오면 더듬기나 해대고.”

“더듬는다니…… 격려지.”

“그게 격려면 뭐 가슴 만지는 건 마사지야?”

대표가 ‘크하아아아’ 거칠고 커다란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다리를 떨며 몇 개비째인지 모를 담배를 뻐끔댔다.

“혜빈아, 돌아가서 사과해라.”

“지랄, 싫은데? 내가 확실히 말했지? 그 인간 있는 덴 안 가겠다고. 내가 해달란 걸 오빠가 먼저 무시했어.”

“그 인간 CP 될 거야. 확실해. 나중엔 예능국장도 될지 모르고. 평생 방송 안 나가게?”

“오빠, 나 아티스트잖아. 아티스트의 요구를 안 들어주는…….”

“아 시발 혜빈아!”

대표의 욕설에 손혜빈은 놀라지 않았다.

우아하게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곤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기세에 지지 않고 대표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외쳤다.

“돈 벌고 유명해지는데 그깟 몸 좀 더듬어지는 게 뭐 어때서? 시발 너만 그래? 다 그래! 다 더러워도 참고하는 거라고! 어? 술 마시는 데 쫌 가서 웃어주고 아부 떨고, 그렇게 방송에 많이 나가서 유명해지면 네 이득 아니야? 뭐 몸을 팔라는 것도 아니고! 닳는 것도 아닌데!”

“오빠 지금 뭔 소리 하는 거야?”

“어린 나이에 좀 유명해지니까 사리 판단이 안 돼? 어떡할 거냐고 이걸! CP 될 인간 심기를 거슬러서 어쩌자고! 사과해! 가서 사과하라고―!”

손혜빈의 입술이 떨리며 벌려졌다. 입술 사이로 악문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대표가 비웃음을 흘렸다.

“유명해지고 싶다며? 노래하고 싶다며? 춤추고 싶다며? 해달라는 거 다 해줬잖아?”

“어, 유명해졌지. 노래하고 춤추면서 돈 벌지.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했지.”

“그럼 가서 사과해.”

“오빠나 먼저 사과해.”

“……뭐?”

“내가 하기 싫단 거 억지로 시켰잖아. 억지로 그 방송에 보냈잖아.”

“미친 거냐? 연예인 그만두게?”

“안 그만둬. 그래도 가서 그 피디한테 사과는 안 해. 그게 내 답이야.”

“연예인도 안 그만둘 거고, 피디한테 사과도 안 할 거라고? 그 두 개가 양립하냐? 시발 뭐 그 방송국 안 되면 다른 방송국에서 이름 날리면 된다고 생각하나 본데, 방송국 그 인간들 다 이어져 있거든? 이거 해결 못 하면 그냥 넌 끝이야 끝!”

한숨.

손혜빈이 또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연기를 빨아들여 코로 내보냈다.

그녀의 나른한 눈가로 연기가 나풀거렸다.

“왜 그랬어?”

“뭘?”

“내가 그 인간 방송에 가기 싫다고 미리 말했는데, 왜 멋대로 보냈냐고.”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있냐?”

“……그래, 알겠어.”

대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 생각했다.”

“내가 오빠랑 계속 일할 이유가 없네 이러면. 매니지먼트사(社)라면서. 매니지먼트가 안 되는데 발붙이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대표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잡혔다.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마지막 조건이야. 내 요구를 무시한 것, 오빠가 사과해. 그리고 방송을 망친 거, 난 사과하러 안 가. 알아서 해결하고, 다신 이런 일 없게 해.”

곁에서 지켜보던 매니저는 둘의 눈치를 살폈다.

손혜빈의 이야기는 합리적이었다. 합리적이긴 한데, 대표가 들어줄 리가 없다.

더러운 일 다 참고하는 거다. 애초에 그런 업계인데 뭐 어떡하란 건가.

그런데 대표가 손혜빈의 요구를 거부하고 협상이 결렬되면, 둘 다 파멸이다.

손혜빈은 발붙일 데가 없어 연예인 생활이 끝나고, 대표는 다음 캐시카우를 찾을 때까지 손가락을 빨게 될 것이다.

매니저도 일자리를 잃게 될 거다. 대표 친척인 게 유일한 능력인데…….

“저, 저, 혜빈아 그러지 말고…… 형도 너무 열 내지 말고…….”

그때 집무실 문이 열렸다.

성필이 손혜빈의 핸드백을 들고 평소의 멍청한 얼굴로 서 있었다.

대표가 재떨이를 벽에 집어 던졌다.

“이 병신 새끼야 타이밍 보고 끼어들어!”

“그, 아, 죄송합니다. 그, 근데 빨리 전해야 할 거 같아서. 피디님이 다음 방송에도 나오시라고…….”

“……응?”

대표가 두 눈을 끔뻑였다.

그때 그의 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대표가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전화를 받았다.

“아아, 예 피디님.”

예, 예, 아, 예.

예…….

통화가 끝났다.

대표는 어리둥절하여 성필을 쳐다보았다.

“뭐…… 어떻게 된 거냐? 네가 뭔 말을 했으면 이런 반응이 나와?”

“아, 그게…….”

성필이 손혜빈의 핸드백을 조몰락거리면서,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송국 바닥을…… 무릎으로 청소하고…… 다녔습니다…….”

“뭐? 무슨 소리야?”

“……울면서 빌었습니다.”

“……뭐?”

진짜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대표는 되물었다.

성필은 달아오른 얼굴을 부채질하며 말했다.

“비, 빌었습니다, 그냥. 그리고 또 혜빈 님, 이 아니라, 혜빈 씨한테 사과드릴 게 있는데. 피디님한테 말을 좀 지어냈습니다.”

손혜빈은 놀란 눈으로 성필을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대표가 대신 물었다.

“뭐라고?”

“가족사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어냈습니다. 그, 그래도 제가 혜빈 씨 가족관계는 다 압니다. 나이대도 유추했고, 전에 예능에 나오셨을 때 말씀하셔서 사는 곳도 알아서, 인과적으로 사리에 안 맞는 변명은 아니었을 겁니다.”

“뭐, 뭐 혜빈이 가족이 병으로 크게 아프단 말이라도 했…….”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랬어?”

순수한 의문이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네 맘대로…….”

상황이 상황인지라 탓하는 기색은 없었다.

성필은 입 안에 든 말을 오물거리며 씹었다.

만약 그가 배운 게 더 많고 경험을 더 쌓았다면, 지금 떠올린 것보다 더 나은 말을 할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의 답이었다.

아무런 꾸밈도 없는 그만의 해답.

“매니저니까요…….”

폭소가 터져 나왔다.

손혜빈이었다. 그녀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꼬나쥔 채 손꿈치로 이마를 탁탁 두드렸다.

끅끅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눈빛은 아까보다 훨씬 밝고 총명했다.

“그럼 나 사과하러 안 가도 되겠네?”

대표는 어처구니없단 듯 입을 벌렸다.

손혜빈이 대표에게서 성필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순수한 미소와 함께.

“그렇지, 성필아?”

“아…….”

성필이 핸드백을 조몰락거리면서 답했다. 손혜빈처럼 미소를 머금고서.

“그렇습니다.”

* * *

일주일 후, 손혜빈은 다시 예능 촬영장을 찾았다. 올챙이배의 피디가 다가와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래, 힘내고.”

피디는 격려하듯 손혜빈의 어깨를 꾹꾹 주무르더니 에휴 한탄하며 떠나갔다.

손혜빈은 픽 웃으면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성필이 그녀의 심기를 살피며 물었다.

“불쾌하지 않으세요?”

“불쾌하지.”

“고정 들어와도 안 하실 거죠?”

“해야지.”

“네? 안 하고 싶다면서요?”

거의 연예계와 연을 끊을 기세로 그만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성필은 집무실 밖에서 그 이야기를 엿들었었다.

그때 손혜빈의 목소리에 맺힌 한은 연예계를 향한 짙은 피로, 그리고 대표를 향한 깊은 실망감이 서려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었다. 어째서?

“누구 좋으라고.”

손혜빈이 검지와 중지로 아랫입술을 꾹꾹 눌렀다. 그녀가 스트레스받을 때 취하는 행동이다. 담배를 찾는 것.

“누구 좋으라고 내가 그만둬. 더러워도 참고 돈 많이 벌어서 외제 차 몇 대씩 살 거야. 그럴 나이쯤 돼서 젊은 애들 조수석에 태우고 빵빵 클랙슨 울리면서 도로를 질주할 거라고.”

“그런데 그땐 왜…….”

손혜빈이 쯧 혀를 찼다.

“넌 모르겠는데, 내가 회사에 쌓인 게 많아. 물론 나 찾아준 고마운 오빠이긴 한데…….”

쉽게 말해서.

손혜빈은 뒤에 선 성필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빡이 쳤어. 쌓였던 게 터져서.”

“아…….”

그 순박한 웃음에 성필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항상 상전처럼 구는 이 손혜빈이란 여자는, 사회인으로서 성필과 나이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같은 동네에 살았다면 벌써 말을 놓고 동생·누나 하고 있을 것이었다.

성필처럼 어리기만 한 나이에 너무나 많은 짐을 짊어진 사람이다. 그녀의 경험으로 감당해내기엔 무겁기만 한 명예를, 의지하기 힘든 회사에 속하여 홀로 감당해내고 있다.

“끄으읏……!”

손혜빈은 기지개를 켜며 다리를 쭉 뻗었다. 그러곤 힘을 탁 풀고 어깨를 으쓱였다.

“아, 온몸이 결려. 죽겠다. 야.”

“네?”

“어깨 좀 주물러 봐.”

“녜? 졔가요?”

“왜. 내 몸 만질 기회가 막상 오니까 힘들어? 뭐어, 의자에 안 붙게 좀 떨어져서 잘 만져봐.”

손혜빈의 성희롱에 성필은 목부터 귀까지 모든 곳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빨리.”

“…….”

성필은 손혜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끝에서부터 전류가 내달려 심장까지 빠르게 닿았다.

피 대신 환희가 순환한다.

‘아, 안 돼.’

22살이 감내하기엔 자극이 너무 크다. 감히 혜빈 님의 어깨에 손을 대다니…… 이건 꿈인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소설의 주인공이 된 건가?

그러고 보니 손혜빈과의 첫 만남은 전형적인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 스토리의 도입부 같긴 했다.

그렇구나, 마법의 가을은 이제 시작이야…….

“힘 안 줘? 아니면 뭐 음미하냐?”

“아, 아, 네.”

성필이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손혜빈이 ‘흐어어’ 신음을 흘렸다.

“너 되게 잘한다?”

“군대에서 많이 했습니다.”

“와 씨, 완전 이득이네. 군대 가면 마사지사 자격증도 쥐여주냐?”

“하하, 뭐, 네, 뭐, 예…….”

성필의 어조가 우울해지자 손혜빈은 농담을 관두었다.

한동안 마사지가 이어졌다.

성필은 22살이 감내하기 힘든 자극을 어떻게든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떨림을 필사적으로 숨기며 그녀를 불렀다.

“저, 혜빈 님.”

“야.”

서늘한 어투였다.

성필은 심장이 철렁였다.

뭐지? 진짜 닿은 건가? 그럴 수가, 감촉이 전혀 안 느껴졌는데?!

“무슨 혜빈 님이야.”

손혜빈이 고개를 돌려 성필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깊은 쌍꺼풀. 그녀의 눈가가 우아한 자태로, 평소의 밉살스러움을 담아, 하지만 전혀 밉지 않게.

“누나라고 불러.”

소박한 호의를 띠었다.

그 호의는 매우 자그마했으나, 성필에게는 매우 거대했고. 또한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성필에게는 세상 모든 것의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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