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4화
성필은 열기를 더해가는 불판을 바라보았다.
고깃집에서도 가장 안쪽 방이라 주변 소리가 크게 시끄럽지 않았다. 다만 건넛방에서 직장인들이 회식 중인지 남자들의 웃음이 연신 들려올 뿐이었다.
손혜빈은 멀거니 불판을 바라보다가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누나.”
성필은 그녀의 앞접시에 익은 고기를 덜어주며 사근사근 말했다.
“계속 불 보고 있지 마. 눈 건조해지잖아.”
독작(獨酌)에 관해선 말하지 않았다.
성필이라도 술이 고플 것이다.
기분이 좋아서 마시는 게 아니라, 현실을 맨정신으로 인식하고 싶지 않아서 마시는 술.
즐기는 것을 넘어서, 어른들이 세상과 맞서기 위해 터득하는 방법이었다.
벌써 한 병이 비었다.
손혜빈은 앉은 채로 비틀거리더니 벨을 눌렀다. 그리고 점원에게 소주 두 병을 주문했다. 또 시키기 귀찮으니 미리 한 병을 더 시키는 것이었다.
두 병이 오고서야 성필은 자신의 잔을 채웠다. 하지만 입으로 가져가지는 않았다.
그보다 빠르게 손혜빈은 두 잔을 비웠다.
성필과 손혜빈은 말없이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고기를 바라보았다.
‘어쩌지.’
성필이 떠올린 생각은 그것이었다.
어쩌지.
진짜 어떡하냐.
‘어떡하긴.’
답은 이미 민경섭이 주었다.
타당하고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폭력을 행사한 멤버를 퇴출시킨다. 그렇다면 이후의 대처는 두 가지이다.
한 명을 더 뽑거나 네 명으로 그룹을 꾸리거나. 하지만 그러한 소수 인원으로 성공한 예시는 굉장히 적다.
미신 같은 말이긴 하지만, 그룹 멤버는 홀수여야 한다 성공한다고 하지 않던가.
‘현세대에 4명으로 성공한 보이그룹이라고 하면…….’
KS 엔터의 PTR―17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PTR―17도 멤버 한 명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있더랬다. 반응은 빨랐다. 곧장 퇴출한 후 새 멤버를 하나 더 끼워 넣었던 것이다.
‘차라리 우리가 나은 건가.’
적어도 가로 엔터는 카오틱 에너지가 데뷔한 다음에 사건이 터지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타인과 비교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역으로 아무런 사고 없이 데뷔한 그룹이 훨씬 많지 않은가. 그들과 비교하면 가로 엔터는 다행도 뭣도 아니라, 그냥 큰일 난 거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데 최악부터 가정하는 게 웃기긴 하네.’
성필뿐 아니라 손혜빈, 그리고 다른 이사들도 모두 그러했었다.
인간의 본능 자체가 좋은 자극보다 나쁜 자극에 민감하고 더 오래 기억하는 법이다.
그리고 회사에 경영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이들이라면,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독보다 더 독하게 작용한다.
아주 사소한 위험이라도 세상이 끝날 것처럼 대응해야 살아남는다.
이 가라앉은 분위기는 혹여라도 찾아올지 모를 위기에 대한 방어기제였다. 평직원처럼 ‘어떻게든 되겠지, 별일 있겠어?’라며 웃고 있을 수 없단 뜻이다.
“누나, 술은 그만 마시고 고기도 좀 먹어. 속 다 버린다.”
성필이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손혜빈이 기울였던 턱을 들었다. 그녀는 드문드문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어?”
“참는 거야? 아니면, 메인 프로듀서가 아니라서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는 거야……?”
요컨대, 성필은 카오틱 에너지에 대한 애정이 적으니 손혜빈 본인처럼 격렬히 반응하지 않는 게 아니냐.
그런 뜻이다.
화풀이다.
그걸 알지만, 성필은 그녀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탓할 수도 없었다.
이번 일은 그녀에게 자연재해다.
쓰나미나 지진을 향해 분노할 수는 없는 일. 언제나 탓할 수 있는 건 사람일 따름이다.
“척하는 거지.”
“…….”
손혜빈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사과했다.
“미안.”
그러고서 또 술을 마셨다.
성필은 코로 길게 숨을 내뿜었다. 그도 손혜빈만큼은 아니더라도 참담한 심경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동요가 적냐면, 손혜빈과는 달리 희망의 빛이 약간 더 강하기 때문이다.
먼저, 그가 믿는 건 성필 본인의 능력이다.
‘만약 우리가 걱정할 사태였다면 미래를 봤을 거야.’
그런데 이건 100%가 아니다.
성필이 보는 미래는 웬만해선 6개월에 한해서만 작동한다. 그래서 전생에서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손해를 입기도 했었다.
예외는, 에리카의 믹스테입 사건 때 세어보았듯이 전생에서 본 마지막 미래다.
그리고 장하양의 미래나, 에리카가 아티스트십을 포기하고 KS 엔터의 방침에 순응했을 때 정도다.
예외가 있다고 해서, 성필은 6개월이란 시간을 절대 허투루 생각하지 않는다.
예외가 아닌 경우가 훨씬 많았으니, 당연히 6개월일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 맞다.
‘카오틱 에너지 기획이 시작된 게 1년도 더 전.’
그러니 이 순간의 미래를 못 보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중간에라도 볼 수 있었을 텐데…….
‘무슨 계기로?’
미래를 보는 데는 계기도 중요하다.
성필이 ‘그 상황을 뒤엎을 수 있는 갈림길’에서 미래가 보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두 그래왔다.
그런데, 카오틱 에너지 멤버들은 너무도 화기애애하게 오순도순 잘 지냈다. 아니, 지낸 것처럼 보여왔다.
거기서 어떤 갈림길이며 갈등을 잡아냈겠는가.
계기도 시기도 맞지 않아 능력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부정적인 가정이다.
‘두 번째로 예상할 만한 건…….’
성필이 바라마지 않는, 진짜 별일 아닌 것이라는 결말이다.
콜베르의 가슴, 배, 허벅지 안쪽에 멍이 들 모두가 예상치 못할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들으며 다들 왁자지껄 웃어넘긴다.
가장 이상적인 미래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를 모르겠다.
교통사고를 당해도 그렇게 멍이 들진 않겠다. 앞에서 박는다고 하면 키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은 허리 아래로 큰 상처가 생길 텐데.
콜베르는 상체부터 하체까지 골고루 멍이 들었다고 한다.
무슨 트럭에 쿵 박은 게 아니고서야…… 아니, 박았더라도 어떻게 허벅지 안쪽이?
‘콜베르가 우연찮게 기괴한 자세로 허벅지 안쪽을 보이고 있어서?’
진지하게 그런 멍이 들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면, 밟으면 망치가 떨어지는 함정에 처해 세 군데를 동시에 가격당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물론, 그보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명확히 타깃을 정해서 때렸다는 게 훨씬 현실성 있다.
이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결국 답은 나오지 않는다.
아무튼 아까 생각했듯이, 콜베르의 멍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가정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이다.
‘내 능력이 사라졌다.’
성필은 후회할 미래를 못 본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거의 1년은 넘었을 듯하다.
물론 지금까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후회할 일은 없긴 했다.
다만 새 아이스크림을 샀더니 의외로 맛이 없어서 실망했다든지, 케이어스의 앨범을 샀는데 원하는 버전이 나오지 않아 실망했다든지, 아무튼 사소한 실망밖에 없었다.
그것도 후회라면 후회라고 할 만한 것들이긴 하다.
애초에 ‘후회한다’는 조건이 그렇게 빡빡한 것이었다면, 성필은 차 키를 두고 집을 나올 순간에조차 미래를 볼 것이다. 그런데 그렇진 않다.
‘만약 내 능력이 없어진 거라면…….’
실은 콜베르가 정말 폭행을 당한 거고, 성필은 능력이 없어 미래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추론도 가능하다.
웬만해선 상상하고 싶지 않은 추론이다.
‘그렇지만…….’
성필은 능력이 없어지는 상상을 하여도 놀랍도록 담담했다.
러너에게 다리가 사라진 게 아니다.
복서에게 팔을 빼앗은 것도 아니다.
그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능력이 어쨌는지도 모를 사이에 사라졌을 뿐이다.
만약 능력이 사라진 게 사실이라고 판명 난다면, 성필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구나.’
드디어…….
성필이 이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된 건 정호환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난 후였다.
에리카는 성필이 정호환의 꿈을 부쉈다고 했었다.
그걸 듣고 생각했었다.
동경하던 이의 꿈을 부수는 게 자신이 운명에게서 얻어낸 힘이라면, 그걸로 어떻게 온전히 행복할 수 있겠는가.
강성욱도, 이준호도, 정호환도 삶을 걸고 게임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성필은 세이브 로드 기능이 있어서 그들의 진심을 좋을 대로 농락해버린다.
빌 게이츠, 워렌 버핏, 포드, 록펠러 등.
옛날의 성필은 그들도 성필과 비슷한 힘이 있다고 반쯤 진심으로 믿었다.
세상으로부터 선택받았으니 그 특권을 마음껏 누리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으쓱였다.
그런데…… 30년간 투쟁해왔던 정호환의 실의를 보곤, 도저히 자신만만할 수 없었다. 정호환은 아이돌이 몰락했던 시대에도 아이돌을 포기하지 않던 사람이다.
‘내가 정호환 이사님의 꿈을 부쉈다는 건…….’
우상의 꿈을 부쉈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까지, 성필은 단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단지 안타까울 뿐이다.
그가 능력으로 해왔던 일 중 단 하나도 후회하는 게 없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오히려 성필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놀라웠다.
그가 쓰게 입꼬리를 올렸다.
‘리카도, 설하도, 아라도, 하양이도, 아름이도…….’
그래, 그녀들을 두고 어떻게 감히 ‘후회’란 단어를 쓸까.
그녀들과 만났고, 배신의 진창 속에서 새 삶을 얻었는데 능력 자체를 얻은 것을 어떻게 후회할까.
“사장님…….”
맞아, 홍규헌에게도.
“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성필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시야가 뚜렷해지며 맞은편의 손혜빈이 눈에 들어왔다.
“누나?”
방금 ‘사장님……’이라고 말한 건가?
어느새 손혜빈은 소주를 두 병 비웠다. 그녀의 옆엔 절반쯤 줄어든 새로운 소주가 있었다.
2병 반을 혼자 비웠다.
“사장님을 뵐 면목이 없어…….”
손혜빈은 혀가 꼬부라져서 그리 말했다.
“우리가 버릴 몇 개월…… 아니면 1년……. 그 시간이 사라지면, 우리 계획이 전부 헛것이 되잖아…….”
손혜빈의 눈가가 찡그려졌다. 눈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한 이사님이 잠도 안 자고 준비하는 상장(上場) 작업도…… 다 무의미한 게 될 거야……. 언제 이런 기회가 올까? 소녀연맹이 아니라 가로 엔터 자체가 주목받는 기회가……. 소련이들, 효민이, 웨이퍼센트, 카오틱 에너지……. 연타석 홈런이었어야 했는데…….”
손혜빈이 입에 잔을 가져갔다. 그리고 꺾었다. 술이 절반쯤 그녀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입가가 술로 광택이 감돌았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더 있었다면…….”
“누나 혼자 뽑은 게 아니잖아. 경섭이도 있고 나도 있고, 사장님도…….”
차마 ‘별일 아닐 거야’라곤 못했다.
희망이 커질수록 그게 좌절됐을 때의 고통이 더 크니까.
“누나 혼자만의…….”
“메인 프로듀서가 나였어. 내가 구상한 그룹에, 내가 뽑은 애들이야……. 성필이 네가 그랬지, 성공은 프로듀서의 것이 될 수 없지만 실패는 전부 프로듀서의 거라고…….”
성공은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실패는 프로듀서 홀로 짊어진다. 그래서 책임자라고 불린다.
가장 큰 주역이지만, 가장 빛이 적게 드는 곳에서 이끼와 함께 살아간다.
성필도 그에 씁쓸함을 느끼긴 했으나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윤상열은 이런 세태에 반감을 느끼고 있더랬다.
손혜빈은 술 탓인지, 윤상열 정도의 자의식이 아니고선 얻지 못할 죄책감에 휩싸인 듯했다.
“처음부터 실수였던 거야. 가장 중요한 첫 단추부터…….”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그녀는 또 술을 마셨다.
이젠 걱정될 정도다.
성필이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았다. 그러자 그녀는 앙탈이라도 부리듯 힘차게 소주병을 들어 입에 꽂아 넣었다.
꿀꺽, 한 모금 마시고 술이 푸화학 폭발하듯 튀었다.
그녀의 입과 코에서 술이 덜 잠긴 수도꼭지에서처럼 줄줄 흘렀다. 성필은 말없이 그녀의 옆자리로 가 티슈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아 누나,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괜찮아.”
어떤 근거도 없었다.
그런데도 손혜빈은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계속해달라는 것처럼, 그저 조용히.
술을 한 잔 더 마신 손혜빈은 잠들었다. 소리쳐도 어깨를 두드려도 깨어나지 않았다.
“누나 정신 차려!”
대답이 없다.
진짜 잔다.
“…….”
성필은 망연자실해졌다. 그녀가 웬만큼 제정신이 아니게 될 거리란 건 예상했다. 그런데 아예 정신이 사라질 줄은 몰랐다.
“…….”
말이 안 나온다. 진실로 이 기분을 표현할 단어가 망연자실밖에 없다.
성필은 일단 계산서를 가지고 빠져나가 값을 치렀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쓰러진 손혜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치겠네.”
한숨과 함께 절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두 병을 비웠을 때 말릴 걸, 후회된다.
성필은 그녀를 붙잡아 미닫이문 틀에 기대게 했다. 이어서 그녀의 발에 신발을 신겨주었다. 하얀 살에 비친 짙푸른 혈관이 눈에 띈다.
“허억, 헉…….”
발을 만지고 흥분해서 숨이 거칠어진 게 아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데려오고, 일으키고, 다리를 적절한 자리에 두고, 또 앉게 만들고.
성필은 신발을 신고 손혜빈 쪽을 향해 등을 보이며 쪼그려 앉았다. 당연히 손혜빈이 업혀 오지는 않았다. 지금도 간신히 문에 기대어 앉은 형세를 유지하고 있다.
“미안, 진짜 미안, 미안해 누나.”
성필은 그녀의 팔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온 후, 자신의 등에 그녀의 가슴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순식간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허리를 최대한 굽혀 그녀가 등에 얹혀 있게 하고, 재빨리 팔을 움직여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팔을 넣어 업는 자세를 만들었다.
바벨 스쿼트 따위와 비할 게 아니다.
바벨은 인간이 들기 쉽게 만들어져 있는데, 정신 잃은 인간은 누군가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안녕히 가세요.”
가게 주인의 묘한 눈길을 받으며 가게를 빠져나왔다.
성필은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유료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차로 향했다.
마침내 차 앞에 도달하자.
“…….”
어떻게 문을 열지?
성필은 몇 초간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곤 손혜빈을 땅바닥에 내려두었다.
“누나, 앉아 있어야 해. 알겠…….”
땅에 내려놓은 즉시 손혜빈이 바닥에 스르륵 드러누웠다.
“……됐다, 됐어.”
성필은 조수석 문을 연 후 손혜빈을 신부 나르기(bridal carry) 자세로 안아 들었다. 짐짝 다루듯 그녀를 조수석 안에 구겨 넣었다.
아직 여름이 지나지 않아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성필은 눅눅해져 몸에 달라붙은 와이셔츠를 벗어 반팔 차림이 됐다.
차를 몰아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고급 빌라의 주차장은 외부인의 출입을 허용해주지 않았다. 성필은 근처를 빙빙 돌며 주차할 만한 곳을 물색했다.
안타깝게도 손혜빈이 사는 곳과 멀었다.
“누나 제발 일어나봐 제발!”
손혜빈은 귀신처럼 고개를 꺾은 채 잠들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성필은 또 그녀를 업고 빌라로 향했다.
빌라 현관은 마치 서양의 궁전처럼 계단 위에 있었다. 몇 계단 안 되지만, 사람을 업고 걸으려니 성필의 얼굴에서 땀이 후두둑 쏟아졌다.
이윽고 반들반들한 유리문 앞에 이르렀다.
비밀번호 패널이 보인다.
“누나, 비밀번호.”
“…….”
“제발, 제발…….”
오늘 몇 번이나 ‘제발’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제발 비밀번호 말해줘…….”
손혜빈이 정신을 잃기 전에 비밀번호를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그때 성필의 정신이 번뜩였다.
‘혹시 여기 아이디 카드로 문을 여나?’
패널 아래쪽에 검은 액정이 있다.
여기에 뭔가를 대는 시스템인 듯했다.
“누나, 이번에는 앉아야 한다?”
성필이 그녀를 내려놓자마자, 그녀는 또 바닥에 스르륵 드러누웠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성필은 그녀의 핸드백을 뒤졌다. 립스틱, 파우치, 핸드폰, 지갑, 향수, 껌, 티슈, 여성용품, 면봉…….
지갑을 열어도 아이디 카드는 없었다.
그런데 다른 게 있었다.
성필은 한동안 그것을 홀린 듯 쳐다보았다. 아주 옛날, 성필과 손혜빈이 사진관에 가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만우절 기념으로 성필은 군복을, 손혜빈은 교복을 입었다.
‘내가 가기 싫다고 했는데 억지로 끌고 갔었지…….’
성필은 미소를 갈무리하고 핸드백을 닫았다.
카드는 없다.
마지막으로 그가 물었다.
“누나, 비밀번호.”
역시 답은 없었다.
유리문 안쪽으로 보이는 접수처, 그곳의 경비원 둘이 성필을 수상하단 듯 응시하는 게 보였다.
성필은 최대한 빨리 손혜빈을 둘러업고 빌라를 떠나 차로 돌아왔다. 그녀를 다시 조수석에 앉히고, 성필은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하아…….”
“욱.”
성필은 깜짝 놀라 손혜빈을 보았다. 그녀가 ‘욱, 윽’이란 소리를 불규칙적으로 뱉어냈다.
식은땀이 줄줄 나왔다.
“아, 안 돼, 붕붕아…….”
성필은 애차(愛車, 중고로 6년 탐, 매주 세차해줌, 거금 들여서 오디오 시스템 설치함)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며 사색이 됐다.
황망하게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어디로?
사람 없는 도로를 달리던 도중, 성필의 눈에 분홍색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모텔이었다.
저기로 가면…….
‘뭔 시발!’
모텔 홀이며 방이며 이불이며 죄다 구토를 해대는 꼴을 볼 순 없다. 게다가 장소가 장소다. 다음날 손혜빈이 무슨 추궁을 해올지 모른다.
그림으로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그럴 바에야.
‘내 집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