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35화 (735/760)

735화

성필은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제발 토하지 말아 달라고 비는 동안 집에 도착했다. 이젠 익숙해진 폼으로 그녀를 업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손혜빈을 업은 채 신발을 대충 벗어두고 침실로 들어갔다. 마침내 허물을 벗듯 그녀를 침대에 던져넣었다.

침대가 출렁이다가 멈추었다.

손혜빈은 자는 동안에도 뭔가 부드러운 곳에 눕자 이불을 찾는 듯 손을 움직였다. 성필이 그녀의 품에 이불을 안겨주었다.

그러자 손혜빈은 다시 움직이길 멈추었다.

성필은 불도 켜지 않았다. 창밖으로 비쳐 들어오는 달빛과 주홍색의 상야등(常夜燈)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손혜빈은 푸르스름하고 불그스름한 빛에 동시에 휩싸인 모양새였다. 뺨이 발갛다.

성필은 그 모습을 보았다.

계속, 대체 얼마인지 모를 시간 동안.

“끅.”

그 소리에 성필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토하려는 건가?

“흐, 흐윽…….”

손혜빈은 울었다.

이불을 애처롭게 부여잡고, 새우처럼 몸을 말면서 흐느꼈다. 그렇게 반달처럼 굽어진 그녀는 자꾸만 울음을 토해냈던 것이다.

“…….”

성필은 홀린 듯이 방을 빠져나갔고, 또 집을 나섰다. 정처 없이 거리를 걷다가 편의점에 들렀다.

“어서 오세요.”

성필은 계산대에 양손을 짚고 점원의 뒤, 담배 진열장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때 무언가 떨리는 게 보였다. 점원이었다. 웬 체격 건장한 남자가 계산대에 손을 짚은 채 노려보니 무서웠던 모양이다.

손에 폰이 들려있다.

“아, 그, 말보로 레드 하나 주세요. 라이터도 하나요. 또…….”

카운터 앞 진열대에 놓인 숙취해소제를 하나 집었다.

“이것도.”

성필은 담배를 손에 쥐고 걸었다.

집 앞에 서서 담배를 뜯고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몇 번 빨았다. 몇 번 더 빨고, 바닥에 비벼끈 후 꽁초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손혜빈을 뉜 침실 문이 열려 있었다.

열어두고 나왔나 보다.

쓰레기통에 꽁초를 버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손혜빈은 눈물 자국을 남긴 채 괴로운 얼굴로 자는 중이었다.

성필은 또 그녀를 넋 놓은 사람처럼 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 벗어둔 땀에 젖은 와이셔츠를 다시 입었다. 끝자락을 바지 안에 넣고 제대로 된 스타일을 갖춘 후,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가다듬었다.

땀에 전 것만 빼면 출근할 때와 똑같다.

성필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또 담배를 입에 물었다.

울음과 물 대신 연기와 불을 뿜었다.

* * *

“안 되겠는데?”

성필이 카센터에서 나오며 말했다.

손혜빈은 모자의 넓은 챙을 올려 선글라스를 보였다. 검은 선글라스로도 손혜빈의 눈빛이 느껴져 성필은 지레짐작 움츠러들었다.

성필은 괜히 노을을 밀어내는 검은 하늘을 보았다.

“영업시간이 끝나서…….”

“벌써?”

“시골이니까…….”

성필의 말을 보증이라도 하듯이 카센터의 셔터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손혜빈이 버릇처럼 욕설을 뱉었다.

“아 시팔 그러니까 저 고물차 좀 바꾸라니까. 어디 갈 때마다 쪽팔려서 죽겠어. 아니, 쪽팔린 건 둘째치고 결국 이 사달이 나잖아!”

“헤헤.”

“웃어?”

“흑흑.”

“울어?”

“내가 안 바꾼 것도 아니잖아…….”

손혜빈은 모자를 벗고 부채질했다. 곧 밤이 찾아온다지만 여름은 여름이다. 그녀의 가벼운 차림으로도 더운 건 막을 수 없었다.

지역 축제 때문에 온, 도시라고 불리지만 서울 시민인 둘에겐 시골처럼 보이기만 하는 이곳.

낯선 땅이다.

하지만 성필은 오기 전에 이곳의 주요 지리정보를 전부 머리에 넣어두었다. 특히 이동수단과 관련된 것을 대부분. 딱히 PC방을 찾을 필요도 없이 바로 해결책을 내놓았다.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갈까? 여기서 얼마 안 걸려.”

“아 씨…… 버스로 얼마나 걸리는데?”

“두세 시간?”

“미치겠다. 멀리도 왔네. 너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내가 왜 거짓말을 해. 누나가 오는 길에 자기만 해서 얼마나 긴지 못 봤던 거지.”

“쓰읍, 말대답!”

손혜빈이 손을 치켜올렸다.

“또 혜빈 님이라고 부를래?”

“미안. 그럼, 버스 타러 갈까?”

손혜빈의 검지가 아랫입술을 마사지하듯 문질렀다.

“내일 나 스케줄 없던가?”

“응.”

“그럼 그냥 하루 쉬고 가자. 지쳤어. 숙박업소 찾아.”

“그럼 먼저 대표님한테 전화…….”

“숙박할 데 먼저 찾아! 방 다 나가면 어떡할 건데!”

성필이 이 일을 시작한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여러 계절을 보내고, 해도 넘겼다.

성필은 손혜빈과 말을 놓고 정답게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로 친해졌다. 반면 손혜빈과 대표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기만 했다.

주요한 원인은, 성필이 보기엔 손혜빈에게 있었다. 그녀가 앨범에 자신의 의견을 넣고 싶다는 모양이다. ‘당연히’ 대표는 거부했고 말이다.

그게 몇 개월, 아니, 해를 넘어 이어지자 손혜빈은 아예 대표와 말도 안 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렇다. 대표란 말이 나오기만 해도 역정을 내는 이유.

“여기 근처에 카페 같은 게 있던가.”

성필은 능숙하게 손혜빈의 분노를 받아넘겼다.

“음…… 아, 저기 있다! 누나는 저기서 기다려. 내가 잘 곳 찾으면 연락할게.”

“그래, 빨리.”

성필은 택시를 타고 PC방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대표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했다.

손혜빈과 관련된 중대사이기에 그에게 가장 먼저 보고해야 한다.

[그래라. 내일 오는 건 맞지?]

[네. 아마…… 오후 4시쯤엔 서울에 들어설 거 같습니다.]

[수고해라.]

[넵, 감사합니다 대표님!]

손혜빈과 대표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과 달리, 성필은 대표에게 점점 더 큰 신임을 받았다.

무릎을 걸레처럼 써서 방송국 바닥을 닦고 다닌 게 꽤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그 뒤로도 가르쳐주는 걸 잘 배우고 싹싹하게 행동하니 이뻐해 주었다.

참고로 월급은 100만 원 아래다. 막 9급 공무원 된 사람보다 약간 나은 수준.

참고로 정해진 휴일은 없다.

참고로 정해진 퇴근 시간 없다.

보상이라고 한다면 손혜빈과 함께 있을 수 있단 것 그 자체겠지.

‘그런 사람이 많다지.’

많이 만나보기도 했다.

연예인을 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매니저가 되거나 엔터사에 취직하는 사람.

그런 이유로 손혜빈의 엔터사에 취직한 성필이 할 말은 아니다만, 그런 사람들은 얼마 못 버티고 이 업계를 떠난다.

“아, 네. 남는 방 있나요?”

성필은 PC방에서 도시의 숙박업소마다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결과가 영 신통치 않았다.

‘축제가 있어서 그런가.’

하긴, 축제 때문에 손혜빈까지 불렀다.

아이돌도 왔다.

사람이 많이 모일 만도 하다.

‘여기 아까 전화했었나?’

성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건데, 자신은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 공부를 안 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했어도 잘은 못했을 듯하다.

항상 수첩을 사야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잊어먹어서 난처해진 일이 많다.

성필은 조사를 계속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식은땀이 흘렀다.

“방이 없어…….”

그러다가 겨우 한 곳 발견했다.

성필은 쾌재를 불렀다. 딱 하나가 남았다고 한다. 손혜빈에게 연락하지도 않고 그리로 날 듯이 달려가 체크인했다.

건물을 나오자 성필은 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떨리는 심장을 붙잡고 손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방 구했어?]

쪼옥, 빨대로 커피를 마시는 소리가 들린다.

“응. 근데 누나, 모텔인데…….”

숙박업소는 절대 모텔로 잡지 말 것.

성필이 선배 매니저에게 들은 말이다.

모텔이 무조건 애정을 나누는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단 건 알지만, 연예인이니 그럴 의도가 아니더라도 들키면 논란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어쩔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그 한 방이라도 못 구하게 될 수 있다.

[뭐?]

역시나 손혜빈은 목소리를 높였다.

[너 어쩌자고 그딴 델 구했어?]

“어쩔 수 없었어. 축제라서 다 만실이었단 말야. 민박 같은 덴 특히…….”

시외뿐 아닌 게스트 하우스 같은 곳을 포함한 도시 민박도 다 마찬가지였다.

손혜빈은 낮게 한숨을 흘리더니, 아주 자애로운 어투로 이리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무대에 선다는데 사람들이 안 모이고 배겨? 홍보 담당자는 진짜 머리가 좋다. 그치?]

“당연하지.”

[알겠어. 빨리 데리러 와.]

“그, 그리고 누나…….”

[왜?]

성필이 불안과 침을 삼켰다.

“방이 하나야…….”

[그래서?]

성필은 두 눈을 끔뻑였다.

“응? 그래서라니……? 화 안 내……?”

[내가 화를 왜 내? 너는 뭐 공원 어디 가서 벤치에 누워 자면 되잖아.]

모든 계절이 유서였.

[농담이고, 최대한 할 수 있는 대로 구해봐. 정 안 되면 화장실에서 재워줄게.]

“고마워 진짜, 내가 잘할게…….”

방은 구해지지 않았다.

몇 시간 후, 성필은 모텔 방 안에서 손혜빈과 마주 앉아 족발을 먹었다.

허름한 외관에서부터 보았지만, 딱히 천박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누런 장판에 심플한 가구는 평범한 가정집의 침실처럼 느껴졌다.

손혜빈은 물 담은 종이컵에 담뱃재를 털며 한숨을 탁 쉬었다. 숨결에서 따스하고 눅눅한 술 냄새가 배어 나왔다.

성필이 신기해서 물었다.

“누나는 담배를 그렇게 피우는데 어떻게 노래를 잘해?”

“젊어서 그래. 나이 조금 더 들면 록커처럼 금속성으로 바뀔걸. 관리해야지, 해야 하는데…….”

손혜빈은 또 담배를 빨았다.

“내가 뭐 유흥을 하는 것도 아니고, 즐길 게 이거밖에 없는데 어떡해. 나를 망치러 온 내 구원자야.”

손혜빈이 담배를 사랑스럽단 듯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 필터를 붉은 입술로 머금었다.

성필은 시선을 돌리며 족발을 한 점 집어먹었다.

“넌 진짜 술 안 먹어? 너 마실 거까지 산 건데.”

“내일 숙취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어떡해.”

“자고 일어나면 다들 하던데.”

“혹시 모르잖아. 나 혼자면 몰라도 누나가 있는데.”

“이열, 믿음직해 우리 성필이.”

손혜빈이 기특하단 듯 성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필은 묵묵히 그 쓰다듬을 받다가, 미묘하게 열이 올라서 물었다.

흥분이 아니라 미약한 분노였다. 손혜빈도, 심지어 성필도 눈치채지 못할 분노.

“방에서 자게 해줘서 고마워.”

“뭐 어때. 우리가 남이야?”

그 말을 듣고서, 성필의 분노는 그 스스로 깨달을 정도로 명확해졌다.

‘내가 남자로 안 보이는 건가?’

성필은 손혜빈이 밖에서 자라면 진짜 밖에서 잘 생각이었다. 이슬 맞으면서 자는 것 따위 진짜 아무것도 아니니까.

극기주(克己週) 땐 너무 배고파서 몰래 짬통에서 음식을 꺼내 먹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흙바닥에서 오들오들 떨며 자다가 일어났더니 코 안과 입 안이 얼어있기도 했다.

그런데 날씨 좋은 여름철에 공원 벤치에서 자는 게 문제겠는가.

‘차라리 나가서 자라고 했다면…….’

그게 더 기뻤을 텐데.

성필은 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치기 어린 마음에, 못마땅한 눈빛을 손혜빈에게 던졌다.

그녀는 성필의 마음도 모르고 술과 담배를 탐닉했다.

그런 그녀를 응시하다가, 성필은 자기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과 달리 손혜빈은 만인의 연인으로 불리는 스타다.

‘언감생심이지…….’

이 마음은 언제까지나 일방향이어야만 한다.

성필은 지금이 너무나 행복해서, 더 행복할지도 모르는 미래로 다가가는 게 두려웠다. 애초에 다가갈 수 없을 미래이기도 했다.

“넌 담배 왜 안 핀다고 했지?”

술이 불콰하게 오른 손혜빈이 웃으며 물었다.

성필은 간단히 답했다. 몇 번이나 한 이야기였다.

“인연이 없어서.”

실은 ‘몸에 안 좋으니까’가 답이었다. 그런데 흡연자 앞에서 그리 말하는 건 실례다.

몰라서 안 피우는 게 아니니까.

“흐응…….”

손혜빈은 그런 소리만 냈다.

검지와 중지에 담배를 끼우고 또 연기를 마셨다. 연기를 뱉었다. 마셨다, 뱉었다.

담배가 절반쯤 줄어들자, 그녀가 입에서 담배를 빼었다. 그리고 반대로 돌려 성필에게 내밀었다.

“드디어 만났네.”

“응?”

“인연.”

성필은 그녀가 내민 담배를 바라보았다.

필터에는 립스틱이 묻어 있어 붉은빛이 감돌았고, 그녀의 타액 때문에 빛을 받아 윤기 있었다.

“나 혼자 피울 때마다 너 옆에 있는 거 괜히 눈치 보이고 미안했거든. 근데 같이 피우면 상관없잖아? 나도 안 쓸쓸하고, 너도 멍하니 기다릴 필요 없고, 그치?”

“아니…….”

“인연이 없어서라며? 이제 있으니까 피워도 되는 거잖아?”

성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손혜빈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성필이 쳐다보자 자기 표정이 어색하단 걸 눈치챘는지 괜히 씩 웃어 보였다.

“자, 네 구원자가 될 거야.”

“나를 망치는?”

“그래, 너를 망치러 온 너의 구원자.”

성필은 단호하게 ‘안 돼’라고 말하고 싶었다.

언젠가 은사(恩師)를 다시 만나게 됐을 때, 그때의 자신은 흡연자가 아니길 바랐으니까. 그녀가 탐탁지 않게 여길 인간으로 살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필터에 묻은 붉은빛이 너무 매혹적이었다. 고작 색소 화합물 주제에 농염한 빛이 스며들어있다.

‘박성필 이 구제할 길 없는 변태 새끼야. 그런 이유로 흡연을 하겠다고? 누나의 타액 때문에? 간접 키스라도 하고 싶어서? 네가 아무리 어려도 그딴…….’

성필은 그대로 그녀에게로 상체를 기울여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를 잡은 그녀의 손으로부터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향기와 숨을 들이켜자 정신이 번뜩였다.

“아.”

신(神)의 연기.

폐에서부터 손끝까지 짜릿함이 퍼진다.

시야가 몽롱해지고 머리가 아뜩하다.

그 몽롱한 시야로, 이 감각보다 더욱 황홀한 손혜빈의 미소가 비쳤다.

손혜빈이 담배에서 손을 뗐다.

성필은 담배를 검지와 중지로, 손혜빈이 하던 대로 잡았다. 그리고 또 연기를 들이켰다.

“이제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겠네.”

손혜빈이 빙긋 미소 지었다. 그녀는 연신 연기를 마시는 그를 향해 놀리듯 말했다.

“좋아, 우리 성필이?”

성필은 연기 사이로 비치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어, 좋아…….”

좋아해.

* * *

이틀 후, 성필은 기분 좋게 회사로 출근했다.

회사 건물 앞에 도착한 그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상쾌한 태양을 바라보며 연기를 뿜어댔다.

에너지가 몸에 가득 차는 기분이다. 오늘도 손혜빈을 볼 생각에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다 피운 담배꽁초를 대충 하수구 근처에 던지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몇 층 올라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홀을 지나 사무실로 가는 길, 가장 안쪽의 대표 집무실로부터 손혜빈이 나왔다.

성필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 누나……!”

손혜빈은 성필을 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그를 지나쳐갔다. 성필은 당황하여 그녀를 돌아보았는데, 이미 그녀는 모퉁이로 사라진 뒤였다.

“시발 진짜 못 해먹겠네!”

집무실에서 무언가 집어 던지는 큰 소리가 났다. 아마 재떨이일 것이다.

욕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성필은 가슴 졸이며 그쪽으로 향했다. 안쪽엔 대표가 짜증 난 얼굴로, 선배 매니저가 아양 떠는 얼굴로 있었다.

대표는 성필이 눈에 들어오자 쯧 혀를 찼다.

“뭐 구경거리 있냐?”

“아, 아니요.”

“없으면 가서 일이나 봐!”

“죄송합니다…….”

성필은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닫고 나서, 손혜빈이 뛰어간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어디로 갔는지는 알겠다.

원래는 탕비실 비스무리한 곳이었으나 이젠 손혜빈의 전용 흡연실쯤 된 곳일 터다.

성필은 두서없이 문을 열었다.

어둠이 반겨주었다.

“누나.”

창문에 쓸 일 없던 커튼이 쳐져 있다.

열린 문으로 비치는 빛으로 말미암아 의자에 두더지처럼 몸을 말고 앉은 손혜빈이 보였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다.

성필이 무의식적으로 형광등 스위치에 손을 가져갔다.

“불 켜지 마.”

성필의 손이 애매하게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 손은 스위치로 가는 대신 문을 붙잡아 닫았다.

어둠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간헐적인 훌쩍임과 한숨이 교차해서 들려왔다. 한숨엔 물기가 짙었다.

“누나, 무슨 일이야?”

성필이 묻자 헛웃음이 들려왔다. 그 웃음조차 물기로 가득했다. 지금 손혜빈이 담배를 피운다면 연기 대신 수증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성필아, 너도 그렇게 생각해?”

“뭘…….”

“내가 앨범에 아이디어 좀 내고…… 내 생각대로 만들고 싶단 게…… 이상해?”

역시 그 문제였구나.

손혜빈과 대표 사이엔 안 맞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손혜빈의 자기주장이 가장 큰 갈등 원인이었다.

아티스트십.

손혜빈은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불렀고, 그리 여겼다. 그에 대표는 조소를 들려줄 뿐이었다.

이름만 아티스트지, 그냥 인형과 다를 바 없다고. 웃으라면 웃고 노래하라면 노래하고 춤추라면 춤추고, 그런 유리 진열장 안의 인형이라고.

“너도 내가 커서 대가리가 굵어진 거라고…… 사리 판단이 안 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생각한다.

이게 성필의 진심이었다.

대표는 음악적 소양이 대단하다. 록이며 팝이며 어린 시절부터 질리도록 들어오고, 따로 음악도 공부했다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엔터사 같은 걸 차릴 리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 대표의 눈에 손혜빈은 말 그대로 대가리가 굵어져 사리 판단 못 하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성필도 동감했다.

손혜빈은 어렸다. 성필 자신처럼.

어린아이다운 비대한 자아가 그녀에게 실을 끊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형사의 손길을 벗어난 인형에게 미래는 없다.

“누나.”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다.

상대는 손혜빈이니까.

그렇다고 손혜빈에게 무조건 맞장구칠 수도 없다. 그건 대표를 배신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일단 그녀를 달랠 생각이었다.

“진정하고…….”

“대답해!”

손혜빈이 날카로운 외침을 내뱉었다. 그러곤 서럽게 흐느꼈다.

“네가 말해주면…… 정신 차릴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래애…….”

상황과 맞지 않게 성필의 심장이 뛰었다. 자신이 그토록 손혜빈에게 큰 존재란 게 기뻤다.

동시에 그녀가 안쓰러웠다.

대표와 대립하던 그녀는 귀족과 싸우는 혁명가의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와 같은 높이에 선 사람이 만류한다면, 그녀의 낭만적인 혁명가 기질도 끝을 고하게 될 터다.

혹은 그녀의 사상을 지지해준다면 이전보다 훨씬 저돌적으로 변하겠지.

“대답해줘 제발, 솔직하게…….”

손혜빈이 재차 물어왔다.

“지금 물어볼 사람이…… 의지할 게 너밖에 없어…….”

성필은 입술을 씹었다. 지금부터 그가 할 말은 반드시 손혜빈을 상처입히겠지만, 해야만 하는 말이다.

감정은 배제하고 이성의 목소리를 따라 진실을 말해야만 한다.

매니저로서 그녀를 위하기에.

남자로서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녀가 행복하기를.

“내가 누나와 같이 지낸 시간이 길진 않지만.”

이 세상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기에.

“곁에서 지켜봐 온 내 생각은…….”

그 순간 성필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펼쳐졌다.

현재가 아닌 미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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