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2화
성필은 반사적으로 에리카를 보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이 승리에 에리카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최소한 이 자리가 파하고 나선 환호성을 지를 게 틀림없다.
그때.
“그만합시다, 이제.”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윤희연이 그리 말했다.
갑작스럽게 그녀의 태도가 뒤바뀌었다. 예의 바르게 곧추세웠던 허리가 구부러져 편한 자세가 되었고, 엉덩이를 쭉 빼고 느슨히 의자에 걸터앉았다.
“뭐라고요?”
성필은 심장이 철렁여서 물었다.
윤희연은 보는 사람이 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그만하자구요. 알겠어요. 이제 끝내요.”
에리카가 초조하게 상황을 살폈다. 이번엔 ‘척’이 아니었다. 진짜 초조했다.
윤희연은 피식 웃으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포커 해보셨어요?”
뜬금없는 질문이다.
“무슨 소리입니까 갑자기. 끝낸다고요?”
“저는 포커를 좋아하거든요. 인생과 가장 닮은 게임이에요. 운과 노력이 적절히 섞여 있어요. 손에 처음 받는 두 개의 패는 태어나면서부터 얻은 능력이죠. 에이스 두 개면 금수저를 문 거라고 할까요.”
윤희연은 칩을 모으듯이 손을 테이블 위로 몰았다.
“그리고 중앙에 공유 카드가 공개돼요. 그건 운이죠. 세상과 내가 공유하는 운. 누군 쓰레기 같은 환경에서 태어날 수 있어요. 누군 부유한 부모님한테 사랑받으며 자라기도 하고요. 쓰레기 같은 패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좋은 손 패……. 근데, 최고의 패가 항상 이기진 않아요. 최악의 패가 항상 지지도 않고요. 이기고 지는 건 플레이어예요. 그리고 노리밋 포커는 인생처럼 대가를 거는 데 제한이 없어요. 올인이 가능하죠. 인생이 시간,자본, 심지어 생명까지 거는 데 누구도 말리지 않는 것처럼.”
포커에 대해 말하는 윤희연은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취미에 커다란 애정을 가진 사람처럼, 그녀는 신나서 말을 이었다.
“저는 그냥 즐기는 수준이 아니에요. 연구하고 통계를 외우고 심리학책과 논문도 찾아봐요. 뭐, 심리학은 유행이 지난 사회심리학만 보긴 해요. 요즘은 인지심리학이 대세인데, 인지심리학은 포커판에서 쓸 수 없잖아요. 상대편 뇌에 전극을 꽂고 뇌의 반응을 볼 수도 없고요.”
협상이 결렬됐으니 잡담이라도 떨자는 건가?
성필은 망연히 에리카를 보았다. 에리카도 성필을 보았다. 둘 다 방법이 없어서 서로만을 보았다.
윤희연은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재밌는 논문이 있어요. 하버드 대학교 공공정책 연구소란 데에서 낸 거예요. 거기 협상 전문가 집단이 있어요. 협상을 연구한대요. 왜, 납치극이나 인질극, 테러 때 나와서 ‘요구조건을 말해라!’라고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요. 협상, 사람의 심리를 읽는 거거든요. 포커에 꼭 필요해요. 그래서 몇 개 읽었는데…….”
윤희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가 있잖아요, 협상에서 대담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면 어떤지 알아요? 그것만으로도 상대편에게 불쾌감을 유발한대요.”
“……예?”
“때로는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스트레스 수치를 상승시킨다는 거예요. 뭐, 그런 거죠. 밈이긴 한데 ‘여자가 말대꾸?’라는 거요. 사회적인 선입견. 그래서 테러리스트랑 협상할 땐 여자를 내보내지 말라던가. 상대 화를 돋울 가능성이 남자일 때보다 높으니까요.”
성필은 윤희연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눈치챘다.
지금…….
“제가 성별로 윤 이사님을 차별…….”
“딱히 박 이사님한테 뭐라는 게 아니에요. 근데, 이건 개인의 인식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니까요. 그런 거죠.”
윤희연은 성필로부터 고개를 돌려 벽을 보았다. 마치 그곳에 창문이 있어서 바깥 풍경을 보는 것처럼.
“예를 들어서, 갑자기 여기 호랑이가 들어오면 저는 무의식적으로 박 이사님 뒤에 숨을지도 몰라요. 딱히 ‘박 이사님이 남자니까 대신 죽어도 돼’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데, 무의식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요. 무의식적인…….”
그녀의 목울대가 크게 위로 움직였다.
“옛날부터 가끔 그럴 때가 있어요. 내가 여자라서 안 되는 건가 싶을 때요.”
“아닙니다,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아니에요 절대!”
“저 대신 정호환 이사님이 계셨으면 달랐을까요?”
성필은 말문이 턱 막혔다. 어이가 없어서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저, 정호환 이사님이랑 윤희연 이사님은 아예 경우가 다르잖습니까. 사람이 다르고요. 정호환 이사님은 에리카 씨를 볼모로 삼…….”
“아까부터 부탁…….”
웃음기 가득했던 윤희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부탁. 부탁, 부탁, 부탁, 부탁…….”
윤희연이 테이블을 손으로 쾅, 쾅, 쾅, 쾅, 쾅 두드렸다. 테이블을 부술 것만 같이, 그녀의 눈은 적의를 담아 테이블을 노려보았다.
그 눈이 다시 성필에게로 향했다.
“부탁, 부탁, 부탁…… 제가 건방져 보이던가요?”
“…….”
“그래서 뭐, 고개를 공손하게 숙이고 빌빌 기기라도 바라셨나요? 부탁하는 인간이 태도가 뭐 그러냐, 라고…….”
성필은 개구리가 뱀을 볼 때처럼 몸이 바짝 굳었다.
윤희연의 눈이 형형한 분노를 드러냈다.
“저는 부탁하러 온 게 아니에요. 하물며 비굴하게 빌러 온 건 더더욱 아니고요. 하지만 과거에 결례를 범한 거래자의 입장에서, 제가 원하는 걸 이루는 한에서 박 이사님의 요구를 들어드리려고 한 거예요. 그런데 박 이사님은 거래할 생각은 없고 제가 무릎 꿇기만 바라시네요.”
에리카의 얼굴이 서서히 괴로움이 드러났다. 그녀는 불안을 주체할 수 없어서 성필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성필도 에리카와 같은 마음이었다.
“10년 넘게 내가 이런 일 얼마나 겪었을 거 같아요? 바라는 게 협상이 아니라 굴복인 인간들. 그땐 참았어요. 근데 이젠 안 참아요. 안 참으려고 여기까지 올라온 거니까.”
그 말에서 성필은 전생의 조아라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안무가로서 무명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조아라다. 하지만 성필을 만났을 땐 능력으로 인정받은 뒤였다.
그녀는 KS 엔터의 케이어스에게 안무를 줄 정도로 유명했고 능력 있었다. 또한 KS 엔터에게마저 다른 이들과 똑같이 대했다.
성필이 물었었다.
‘계속 KS 엔터한테 안무 주고 싶지 않아? 이번 일로 정호환 이사님 심기 거슬렀으면 어쩌려고?’
그랬더니 조아라가 말했었다.
‘오빠, 내가 어렸을 땐 고개 숙이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일감 얻어냈고. 그런데 말이에요. 내가 열심히 일하고 명성을 얻으려고 노력한 건, 고개 숙이려고 그런 게 아니거든요. 고개를 더 빳빳하게 들고 다니려고 그런 거지.’
성필은 조아라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당당함에 매료됐었다.
과거로 돌아오고 석세스 엔터를 나올 용기를 낼 수 있던 건, 조아라로부터 그런 삶의 태도를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윤상열에게 먼저 숙이기만을 강요하는 김태훈에게서 벗어날 용기를, 성필은 뼈저리게 가슴에 새겼다.
그런데 이젠 성필이 김태훈이 됐다.
목적은 윤희연의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쌓아온 삶 자체를 짓밟으려고 했다…….
‘맞아.’
성필은 20대 초반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윤희연과 같은 위치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뼈저리게 이해했다.
거래처 사람들은 성필에게 좋은 조건 이상의 것을 바랐다. 분명 형태는 거래일 텐데, 그들은 성필이 부탁이라도 한 것처럼 여겼다.
성필은 비굴하게 자세를 낮추어야 했고, 모욕당해도 웃어야 했으며, 처참하게 자신을 죽여야 했다.
그들도 성필에게 필요한 게 있어서 불렀을 텐데, 그들은 왕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그걸 보며 성필은 항상 생각했었다.
‘저런 어른은 되면 안 된다.’
그런데, 성필은 지금 그런 어른이 됐다.
적어도 그런 어른 노릇을 해버렸다.
본인이 혐오했던 짓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자그마한 권리를 손에 쥐고서 그걸 원하는 사람에게 무릎 꿇으라고 하는 게…… 정상인가?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윤희연이 굴복하길 바라고 있다.
“내가 왜 박 이사님을 직접 보자고 했는 줄 아세요? 왜 처음 제시했던 조건조차 철회하고 저한테 손해만 있는 조건을 내걸었는지, 알아요? 박 이사님의 말씀 때문이에요. 저를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라고 불러줬으니까요. 나를……!”
윤희연은 미안하단 듯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소리 질러서. 스트레스 수치 상승하셨겠다.”
“…….”
“나를…….”
그녀가 목청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능력 믿고 나대는 싸가지 없는 어린년이 아니라……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라고 불러줘서,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로서 예의를 지킨다고 해줘서. KS 엔터 인간들, 이사회 인간들이랑 다르게, 나이 성별 따지지 않고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로 봐줘서, 그래서 왔어요. 그런데 이사님이 바라는 건 거래가 아니라 굴종이시니.”
윤희연이 옆 의자에 두었던 핸드백을 테이블 위로 꺼내 올렸다.
“처음부터 아귀가 안 맞았네요.”
성필은 직감했다.
끝났다. 전부 다.
처음 윤희연과 전화했을 때, 그녀는 줄곧 성필을 의심하는 기색을 보였었다.
성필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윤희연이 처음 내걸었던 조건은 모두가 만족할 해피 엔딩이었다.
그런데 성필이 에리카의 부탁을 받고 그보다 더 나은 조건을 이끌어냈다.
성필과 에리카에겐 해피 엔딩 이상의, ‘해필리 에버 에프터(Happily ever after, 그 뒤로 쭉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급의 엔딩이었다.
거기서 더 욕심을 부렸다.
‘윤 이사님이…….’
굴욕을 겪는 것. 그걸 노렸다.
이유는, 에리카가 KS 엔터의 방침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윤희연이 불쾌감을 느끼고 협상을 그만둘 만하다. 그녀에겐 성필이 계속 무릎 꿇으라고 협박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박 이사님.”
에리카가 성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쪽을 보니, 에리카는 성필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윤희연을 보고 있었다.
“저 때문에 화나신 거 알아요.”
“……응?”
성필의 사고 흐름과 맞지 않는 발언이었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에리카는 아직도 연기하는 중이었다.
“저 대신 화내주시는 것도 감사해요. 정말…….”
그제야 에리카가 성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바꿀 수 없는 시련에 체념하고 나름의 행복을 찾기로 한 사람의 얼굴.
하지만 성필은 그 속내를 알았다.
에리카는 윤희연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아까 윤희연이 울분에 차서 한 말이 그녀를 움직이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데, 이젠 괜찮아요.”
“……!”
성필은 에리카의 저의를 깨닫고 전율했다.
그녀는 이 판이 깨지지 않도록 연기하는 중이었다.
성필 입장에서만 이 자리에 앉을 이유를 주는 게 아니었다. 윤희연의 입장에서도, 에리카는 도움을 주고 있다.
윤희연이 이 자리에 에리카를 데려온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데려왔는가?
‘에리카 씨의 솔로 데뷔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나를 설득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왔다…….’
윤희연은 에리카가 개입함으로써 판이 뒤바뀌는 것을 눈치챘을 터다.
실제로 그녀의 눈이 이채가 서렸다.
당장이라도 나갈 것 같았는데, 에리카가 성필을 달래는 걸 보곤 기운이 약간 누그러졌다.
“더는 저 때문에 화내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에리카가 성필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녀의 손이 어깨부터 팔까지 천천히 내려왔다. 비단이 바람에 날려와 팔을 훑는 것 같았다.
아무리 거친 야생마라도 온순하게 만들 수 있는 손길이다. 그에 성필은 동요가 멎어 들었고, 외적으로는 화를 참고 진정한 것처럼 보였다.
“저 때문에 망가지실 필요 없어요. 화내지 마세요.”
“……예.”
성필은 크게 심호흡한 후 다시 윤희연을 보았다.
굴욕을 주어야 할 상대에서 거래 상대로 변한 사람을.
성필이 담백하게 고개를 숙였다.
“불쾌하게 느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윤 이사님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사과, 받을게요.”
“이사님만 괜찮으시다면 이야기를 계속해도 괜찮을까요?”
윤희연은 성필 대신 에리카를 관찰했다.
에리카는 역할을 다한 후 다시 조용해졌다.
최소한 아까처럼 이상한 연기를 하며 성필의 화를 돋우진 않겠다.
그런 판단이 들자, 윤희연은 자세를 다잡았다.
“조건이 있어요.”
“조건을 거시겠다고요?”
아까 거부했던 것을 재확인할 셈인가?
“저를 정당한 거래 상대로 취급해주세요. 아까처럼 깔아뭉개려고 하지 마시고요. 박 이사님, 저는 이 일을 하고 싶어요. 절실한 것도 맞아요. 하지만, 무릎을 꿇을 수 없어요. 제가 절실한 만큼 베팅하는 덴 한도가 없겠지만, 절대 낼 수 없는 칩도 있어요.”
자존심.
“제 머리는 저 혼자만의 게 아니에요. KS 엔터 전체를 짊어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굴복시킬 적이 아니라 거래자로 대해주세요. 이게 조건이고, 지켜지지 않으면 저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어요.”
성필과 에리카가 눈빛을 교환했다.
에리카가 고개를 끄덕이고, 성필이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딜(Deal)?”
“조건, 저도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사무라이 걸즈 제작을 지원해주세요. 윤 이사님 계신 것만으로도 정말 큰 힘이 되겠지만, 아까 말씀해주셨다시피 가로 엔터만 자원을 투입하는 건…….”
윤희연은 성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에리카에게만이라면, 돼요.”
성필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딜.”
그러자 오히려 윤희연이 놀랐다.
“사무라이 걸즈 제작기는요?”
“만들어야죠.”
“‘죽고 못 사는 친구(김민주와 신아름의 예능 자체 콘텐츠)’ 때처럼 가로 엔터랑 KS 엔터 채널에 동시에 올리려고요? 그것도 곤란해요.”
“아니요, ‘아마노가와’ 아이튜브 채널에 올릴 겁니다.”
확인해보니 구독자도 1만 아래이고 조회 수는 그보다 더 처참하다.
별다른 콘텐츠도 없는 제과 회사 채널을 누가 구독하겠는가.
아마노가와도 그걸 알아서인지 채널 관리에 힘쓰지 않고 거의 방치해 두었다.
“그걸 빌미로 제작비를 더 얻어보려고요.”
“원래 이럴 생각이었어요? 방금 떠올렸다기엔 아귀가 잘 맞는데요?”
“유빈이 생각이었어요.”
수상할 정도로 홍보와 투자에 관심이 많은 유빈이 생각해냈다.
이러면 돈을 더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 말이다.
“저야 원래 거절할 생각으로 온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에리카 씨한테 고마워하세요.”
윤희연은 에리카를 보았다.
에리카는 여전히 처연한 분위기를 냈다. 더는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도 말이다.
비운의 여주인공 역할이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제 끝난 거죠?”
“끝났습니다.”
“아.”
윤희연이 탄성을 터뜨리며 붙잡은 성필의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그녀의 기쁨이 직접적으로 전해졌다.
“임시 동맹이네요. 프로젝트 끝날 때까지지만, 잘 부탁드려요.”
* * *
탬버린을 열심히 흔들던 노아가 팔을 늘어뜨렸다. 자연스럽게 탬버린 연주도 멈추었다.
최유현이 기타의 현을 붙잡아 잔향을 지웠다.
“쉴까?”
“어…….”
최유현은 곧장 폰을 꺼내어 음악을 재생했다.
네트워크 앰프가 폰의 신호를 받아 전기 신호를 스피커로 흘려보냈다. 스피커는 작은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놀랍도록 선명하고 큰 소리를 내보냈다.
최유현은 소리를 듣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다.
후배들에게 숙소를 물려주고 새롭게 배정받은 글로브의 숙소. 예전 숙소보다 커서 이런 스피커도 놓을 수 있었다.
최유현은 스피커의 음악에 맞춰 기타를 쳤다. 오아시스의 ‘The Masterplan’이었다.
“가사 좋지?”
“나 영어 모른다…….”
“여기서 몇십 번을 들었는데 왜 몰라.”
“모른다…….”
노아는 최근 들어 부쩍 힘이 없었다.
사무라이 걸즈가 막 시작했을 때는 잠도 못 잘 정도로 힘이 넘쳤는데 말이다.
최유현은 음악의 힘을 믿었다. 노아에게 폰을 넘겼다.
“너 듣고 싶은 거 들어. 힘 좀 내게.”
노아는 멀뚱히 폰을 보다가 검색창에 느린 속도로 제목을 입력했다.
곧 곡이 나왔다.
놀랄 정도로 조악한 음질의 음악이었다. 일부러 이렇게 믹싱을 한 것일 터다.
가사는 일본어였는데…….
[Disappointed
미안해 저기
미안해 저기
미안해 저기
잘못했어 내가
미안해 저기
미안해 저기, 워어…….]
“……노아.”
노아가 노래를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고멘 네에(미안해 저기), 고멘 네에(미안해 저기), 고멘 네에(미안해 저기), 잘못했어 내가…….”
음악에 남자의 기괴하고 높은 비명이 섞였다.
[우워아아아워악!]
최유현은 더 듣고 있기 힘들었다.
노아에게서 폰을 빼앗아 음악을 껐다.
“야, 곡은 언제 윤 피디님한테 들려줄 거야?”
“…….”
노아가 다리를 감싸 안고 무릎 사이에 턱을 묻었다.
“안 해도 된다. 사무라이 걸즈는 카와이 베이스다…….”
“믹스테입 프로젝트잖아. 멤버들의 창작이 가장 중요한 거 아니야?”
“나 같은 건…….”
노아가 무릎에 얼굴을 완전히 묻었다.
“할 줄 아는 게 없다…….”
“없긴 왜 없어. 가사 썼잖아.”
“내 가사 따위 리카에 비하면 쓰레기나 다름없어. 윤 피디가 비웃을 거다. 다른 애들도 같이.”
“내가 대신 보여줄까?”
“아, 안 된다!”
최유현은 말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노아는 과자 뺏긴 다섯 살배기 어린애처럼 최유현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최유현은 노아가 덮쳐오자 그대로 쓰러졌다.
“야, 무거워…….”
“절대 안 된다! 안 된다!”
“그럼 어떡하자고!”
최유현이 벌떡 일어나 노아를 종잇장처럼 날려버렸다. 노아는 바닥에 드러누워, 그대로 태아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유현이가 써준 곡은 좋지만, 내 가사가 별로다. 안 된다…….”
“좋다니까 그러네.”
“애초에 가사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다. 리카는 곡을 쓴다구…….”
“작사 아무나 해?”
“리카는 작사도 한다, 나보다 훨씬 더 잘해…….”
“믿져야 본전이잖아. 피디님한테 곡만 들려줘. 그리고 뭐 안 된다고 하면 안 하는 거고. 좋다고 하면 좋은 거잖아.”
“말 안 돼…….”
“고작 ‘안 된다’는 말 듣는 몇 초가 두려워서 수십 일 동안 우울해하는 건 말이 되고?”
노아가 흠칫했다. 그녀가 둥글게 만 상태에서 고개만 들어 최유현을 보았다.
최유현은 노아를 감싼 알을 부수려는 듯 박차를 가했다.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네 이름대로 살아.”
“내 이름…….”
“네가 말했잖아. 부모님이 이름대로 살길 바라서 지어준 이름이라고.”
오오가이토 노아(大海渡希明).
성은 큰 바다를 건넌단 뜻, 이름은 빛을 바란다는 뜻이다.
참고로 노아 아버지의 이름은 오오가이토 다이스케였다.
아버지는 멋진 성에 비해 자신의 이름이 평범한 게 항상 불만이어서, 자식에겐 멋진 이름을 붙여주겠다고 초등학생 시절부터 다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이름이 노아다.
성경에서 수십 일의 홍수를 넘어 마침내 빛을 맞이한 ‘노아’와 발음이 같다.
“부모님의 바람을 어길 셈이야?”
“……안 된다.”
노아가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오오가이토가(家)의 장녀로서 그래선 안 된다.”
“그래, 곡도 열심히 만들고 가사도 열심히 썼잖아. 오랜만에 쓰는 너네 나라 말이라서 사전까지 찾아보면서 노력했어.”
“우리나라 말은 잘한다! 지금도 잘하잖나!”
“…….”
노아는 ‘우리나라 말’을 ‘한국어’로 쓰고 있었다. 한국에서 생활한 게 오래되어 그런 모양이다.
주변 사람들이 다 ‘한국어’를 ‘우리나라 말’이라고 표현하니, 그걸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된 것이다.
“노아, 네 우리나라 말은 일본어야.”
“어? 무슨 소리인가 그게?”
“됐다.”
“말해라! 나는 고지능자라서 어려운 이야기도 잘 이해해! 어서!”
“아니라니까. 피디님이나 찾아가.”
“오늘 쉬는 날인데…….”
“우리가 쉬는 날이지 피디님이 쉬는 날이야?”
“아!”
노아는 겨우 일으켰던 몸을 다시 바닥에 붙였다.
“나중에 시간 날 때 갈 거다. 오늘은 아니야.”
“…….”
최유현이 노아에게 억지로 옷을 입혔다.
대충 트레이닝복 위에 점퍼를 걸치게 하고 숙소에서 내보냈다.
“잘하고 와.”
“우으…….”
숙소 문이 쿵 닫혔다.
노아는 터덜터덜 몇 걸음 걸었다.
그때 그녀는 심각한 문제점을 인지했다.
‘회사로 어떻게 가는 거지?’
평소엔 매니저가 태워줬는데.
우물쭈물하던 노아는 최유현에게 전화했다.
“회사로 어떻게 가나?”
[……너 지금 어디야.]
“어? 으응, 현관 앞이다.”
[근데 전화…… 아니다, 나갈게.]
결국 최유현이 노아와 동행했다.
석세스 엔터 앞에 도착했다. 최유현은 잔뜩 긴장한 노아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가서 말하는 거야. 곡을 만들었어요. 들어봐 주세요. 괜찮으면 편곡 부탁드립니다. 아니면 수정할 데가 있을까요?”
“어, 어, 알겠다.”
“뭐라고 해야 한다고?”
“나는 바보가 아니야. 알아서 하겠다.”
“그래…….”
노아는 뻣뻣한 걸음으로 윤상열의 작업실로 향했다. 매우 느렸다. 하지만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가는 한, 아무리 느려도 결국엔 목적지에 도착하는 법.
노아는 윤상열의 작업실 문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고 ‘여어 윤 피디, 작업은 잘되나!’라곤 했지만…….
‘직원들이 왜 겁을 먹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군…….’
일적으로 만나면 무서운 사람이다.
노아는 문을 열려다가 불현듯 윤상열이 화냈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직원들이 노크 안 하고 들어오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었다.
노아가 노크했다.
몇 초 후 답이 돌아왔다. 방음이 상당한 문이라 들리는 건 애매한 소리뿐이었다.
노아가 문을 열자 검은 방이 반겨주었다. 오직 문으로부터 등진 윤상열이 보고 있는 모니터의 빛만이 광원이었다.
시퍼런 청색광 때문에 눈이 따가웠다.
“누구냐?”
“유, 윤 피디.”
윤상열이 푹 한숨을 쉬었다.
노아를 돌아보진 않았다.
“너냐.”
“지, 지금 바쁜가? 므, 뭐 하고 있나?”
노아가 슬금슬금 윤상열에게 다가갔다. 그가 마우스를 바쁘게 움직이며 답했다.
“작곡.”
“아, 그렇겠지. 윤 피디는 작곡가다요……. 다, 다음에 오는 게 좋다?”
“어차피 네 일이기도 하니까, 용건 있으면 말해라.”
“내일? 내일 오라고?”
“…….”
윤상열은 의자를 빙글 돌려 노아를 보았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던 윤상열. 현재 그는 포니테일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길었다.
그렇지만 그는 머리를 묶지 않았다.
‘라희 말이 맞다…….’
윤상열에겐 장발이 잘 어울린다. 라희가 말하길, 이목구비가 뚜렷할수록 장발이 더 잘 어울린다고 한다.
머리카락이 배경을 지우는 역할을 해서 얼굴이 부각된다는 모양이다. 역으로 이목구비가 흐릿한 인간이 장발을 하면 그야말로 파멸적이라고 한다.
노아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었다.
‘나도 머리를 깎아야 하나…….’
윤상열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사무라이 걸즈의 곡을 만들고 있다.”
“사무라이 걸즈? 곡은 이미 있다요.”
“카와이 베이스? 그딴 걸 진짜 타이틀로 낸다니, 말도 안 되지.”
노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 그런가? 그런데, 그으, 리카와 에리카가 동의했잖나…….”
“상관없어.”
노아는 신이 나서 목소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런가! 새 곡이면 나는 록이 좋다!”
윤상열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찌푸린 눈가에 불쾌함을 뜻하는 주름이 잡혔다.
“누가 물어봤나?”
“……아.”
노아는 양손을 모으고 꼼지락거렸다. 그녀가 입술을 앙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그, 그렇다. 그랬지, 미안하다…….”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꺼.”
“으응, 윤 피디는 잘하니까, 믿는다…….”
“그래서 용건은?”
노아가 입을 뻐끔댔다.
“그, 그그, 없다.”
“뭐?”
“그냥 윤 피디 얼굴이 보고 싶었다…….”
“……뭐라고?”
“아, 아아, 그, 어어…….”
윤상열이 피식 웃었다.
“네 지능이 높은 게 사실이긴 하군. 미적 감각이 탁월해. 그래, 마음껏 봐라.”
“…….”
“평소엔 정신 나간 소리를 잘도 지껄이면서, 농을 모르는군. 이 곡을 완성시켜서 다음 정기회의 때 가져갈 텐데, 네가 찬성해야 해.”
“응, 내가 말인가?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다음 회의 전까지 들어볼 수 있나……?”
윤상열은 별 바보 같은 질문을 다 듣는단 표정을 지었다.
“넌 당연히 좋아하겠지. 내가 만들었어. 글로브 곡 중에 안 좋은 게 있었나?”
“……헤헤.”
노아가 해맑게 웃었다.
“그렇긴 하다.”
“더 용건 없으면 나가.”
“응, 힘내라요.”
노아는 나갔다.
문을 닫자마자 눈동자에 옅은 물기가 서렸다. 그녀가 손등으로 눈가를 박박 닦았다.
‘윤 피디가 잘할 거다.’
* * *
윤상열은 사무라이 걸즈를 위한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냈다. 사실 그리 자신할 만한 건 아니었다. 시간이 부족했으니 곡 퀄리티는 보장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 카와이 퓨처 베이스인지 지랄인지보다는 훨씬 좋아.’
오늘이야말로 사무라이 걸즈의 기풍을 완전히 바꿀 것이다. 그런 다짐으로, 윤상열은 노아와 함께 RRBKZ 아지트에 도착했다.
오늘은 리카가 참여하는 마지막 정기 회의다. 마지막이라는 건 아예 끝이라는 게 아니라, 앞으로 몇 달간 만날 일이 없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리카는 이제 소녀연맹 일본 활동을 위해 떠나니까.
‘그러니까 오늘이 적기이자 최후의 기회.’
이대로 손을 놓고 있으면 사무라이 걸즈는 카와이 베이스인지 개씹쌉소리인지 뭔지로 데뷔할 수밖에 없다.
케이팝 역사에 다시 없을 기적의 컬래버레이션을 그딴 걸로 날릴 순 없다.
‘오늘은 오직 그것에만 집중한다. 만약 리카가 자기가 카와이 퓨처 베이스의 신이라면서 꼴값을 떨면 싸우기라도 해야 해.’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RRBKZ 아지트로 왔는데…….
“오늘은 새로 소개해드릴 분이 있습니다.”
박성필이 있는 건 그렇다 치고.
“오늘부터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에 참여하시게 될 윤희연…….”
성필의 옆에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과 얼굴의 여자. 그녀를 보고 윤상열의 전신이 굳어버렸다.
“윤희연 이사님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실 테지만, KS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로 재직 중이십니다. 다들 박수로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리카, 에리카, 정지음, 강동현이 박수를 쳤다.
다른 이들은 박수를 칠 정신이 없었다.
윤상열은 석상처럼 굳어 있느라 바빴다.
그런 윤상열을 향해 윤희연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오빠, 안녕.”
“…….”
윤상열은 계속 굳었다.
그리고 노아는.
‘비사아아아아아앙!’
마음의 경고 사이렌 때문에 입을 쩍 벌렸다.
‘또 윤 피디를 빼내 가려고 왔어! 질리지도 않고!’
그리고 박수를 치지 않는 마지막 멤버, 유빈.
리카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선배님 축하드려요! 최고의 팀을 꾸렸어요!”
“……최고의 팀?”
아이돌, 소녀연맹의 이시카와 리카!
아이돌, 케이어스의 사쿠라바 에리카!
아이돌, 그냥 노아!
A&R 직원1, 작곡가 정지음!
A&R 직원2, 작곡가 강동현!
A&R 직원3, 석세스 엔터 총괄 프로듀서 윤상열!
A&R 직원4, 가로 엔터 총괄 프로듀서 박성필!
그리고.
“다들 잘 부탁드립니다,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인 윤희연이에요. 여기 박성필 이사님이 소개해주셔서 오게 됐구요. 아, 유빈 씨죠?”
A&R 직원5,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 윤희연이 유빈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앞에 선 윤희연은 유빈의 손을 꼬옥 붙잡고 싱긋 미소 지었다.
“참여하게 해주셔서 고마워요, 유빈 프로듀서님?”
리카가 휘파람을 휘익휘익 불었다.
“세상에 다시 없을 최고의 팀이에요! 이런 프로듀서진을 거느린 사람은 역사상 없었을 거예요! 유빈 선배님, 현재 소감을 한마디로 하면!”
“어? 조졌다.”
유빈, 혼절!